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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7.21. 수정
2006. 2. 1. 수정.
최용술선생님과 관련된 자료정리만 해놓은 것만 봐도 불쾌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흥분하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제대로 된 자료하나라도 확보하는 것이 순서일 듯 합니다.
모 스포츠신문에 난 최용술선생님 일대기나 미국인터뷰내용이 합기도싸이트에서 소개되고 있지만 그 내용들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근거없는가 지적될 때 최용술선생님에 대한 책을 써내신 분조차 그자료는 없는게 낫다 없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라고 하셨습니다. 문제가 많다고 말입니다.
그 문제가 많은 자료의 내용도 자꾸 보고 자꾸 퍼뜨리다 보면 진실이 될까요?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고 신용이 없으면 존경받지 못한다.
이런 단순명료한 점을 고려하여 잘못된 정보는 고치고 합기도자체의 위상은 높일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는 것이 제 합기도공부의 뜻입니다.
언젠가 최용술선생님에 대해 연구하시는 분께 저의 생각을 전하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30년수제자론은 어렵다 차라리 비전 야와라의 전수자만으로도 불과 몇십년만에 합기도란 무술이 전세계에 퍼질만큼 대단한 분이었으니 그 쪽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최근에는 아이키주지수 라는 생경한 용어까지 써가며 최용술선생님의 직제자라인임을 강조하는 분들이 최용술생님의 술기라며 를 가르치는 경우조차 생겨났습니다.
존경받는 한국의 무술인들 그들의 위대한 스승...저도 한국무술인들이 존경받는 것을 볼 때 가장 뿌듯합니다.
그러나 그런 훌륭함은 오직 대동류합기유술 다케다 소가쿠 또 30년 수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스승 일본특수부대지도 황궁교습 등등의 검증되지 않은,흥미진진하고,그자체가 드라마인, 신화와 연결될 때
그리고 이제는 "합기의 신"이라는 위명이 더해질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기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 결과물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최용술선생님 미국인터뷰내용을 보고 이에 대해 적은 외국무술인의 글입니다.
Don't waste time researching the various points of this interview. It is pure fiction, outside of the possiblitly that Choi may have been to Japan and then returned to Korea.
No offense intended to anyone, but why is this hogwash still being repeated publicly
-대충 요약하자면
해당 인터뷰내용에서 다양한 측면에서 사실인지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시간낭비하지 마라. 완전 소설이다 단지 최용술이 일본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란 점만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왜 이따위 쓰레기같은 글이 자꾸 반복되는 지 모르겠다-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가 전했던 역사와 관련해서만큼은 우리에게 존중 내지 존경을 보낼 수 없기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합기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애착을 갖고 있는가와는 별개로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멋진 드라마같은 소설같은 만화같은 역사에 대해 비판을 가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 지 짐작도 안되실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한국합기도나 한국합기유술에 매우 우호적인 외국인들도 이런 사료자료에 문제가 많다는 것에는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최대한 우호적일 때 "내가 만난 한국의 최용술선생님의 제자분 술기는 대단했다. 대동류관련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정도입니다. 설마 별 관계도 없다면 이렇게 훌륭한 제자분들이 이런 엉터리자료를 기반해서라도 대동류수제자론을 이야기하겠는가 하는 믿음정도인 것입니다.
이정도도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는 측도 있겠지만 결국 한국합기도 다 엉터리고 제대로 된데는 몇군데 없거나 한군데뿐이라는 결론으로 빠지게 되는 함정이 있습니다.
한국은 물론 미국 유럽 남미로 뻗어나간 합기도인들은 어느틈에 다 엉터리합기도인이 되어버립니다.다.....쉽게 존칭도 빼고 지한재 명광식...하는 말들의 결론은 다 그런 것입니다. 죽을 고생으로 합기도를 세계에 알린 다수의 훌륭한 선생님들 폄하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도장깨기를 언급하지 않아도 거친 세계에서 누군가 자기손목을 잡아봐야 뭔가 자신을 보여줄수 있는 그런 경쟁이 아니라 진짜 경쟁을 거치며 살아온 분들을 말입니다.
(현재도 대구나 구미같은 곳에서는 간판내려라 는 식의 '문화'가 남아있고 또는 말없이 바로 옆에 도장을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분들중에 도주님술기를 한다는 분들도 있지만 도주님술기 운운하기 싫다 나는 운동 제대로 했다라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때 머릿속에 맴도는 것이 바로 극진 가라데의 최영의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고 신용이 없으면 존경받지 못한다
늘 욕먹고 마음 아픈 일도 많지만 언젠가 갖다붙인 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하는 날 그래도 이해해주는 분들이 많아질 거라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제가 만나야 할 분들은 합기도의 원로들보다 사학과교수님들일 겁니다.
이하 정리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내용들입니다.
1. 최용술선생님 일본어 이름
요시다 타추주추라고 주장하는 제자도 있으나
손자(최태영)와 김정윤선생님을 통해서 밝혀진 요시다 아사오가 그래도 정확할 듯..
다만 성함을 두가지를 쓰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듯 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성함조차 제대로 확인못하고 있는 한심함을 지적당한 적은 별로 없는 듯 합니다..
2. 생년
1899년이 최근에는 우세한듯 하나
외국합기도싸이트에 아직도 1904년으로 기록 된 경우 많음 그밖의 매체에 따라 1905년생도 있고 1901년생으로 나오는 것도 있고.. 이 역시 어느 것이 옳으냐를 떠나 한심한 노릇이라고 생각됩니다.
3. 다케다 소가쿠의 양자였는가? 산본수웅의 양자였는가?
그런데 최용술선생님께서 다케다 소가쿠의 양자였다고 주장하시기도 한 것 같고 많은 제자분들도 그렇게 들으셨던게 아닌가 합니다.
최용술선생님의 제자분들 간에도 양자였음을 주장하는 입장과 당시 일본이나 한국의 풍속으로 볼 때 양자가 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최용술선생님께서는 자신이 다케다 소가쿠의 양자였음을 주장하셨음에도 제자중 이를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이런 설명
이하 괄호안은 신무 합기도협회 영어싸이트에 올라있는 내용입니다.
(It is doubtful, as has been suggested, that Choi was adopted by Takeda, as it is not the custom in Japan, either then or now, for Japanese families (especially prominent Japanese families) to adopt Korean children. Supporting the scenario that Choi was merely a houseboy is the lack of any listing of his name, either Korean or Japanese, in any of the official records of Daito-Ryu Aki Jujitsu.)
-최용술이 다케다의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인 특히 명망있는 일본이 가문에서 한국어린이를 입양한다는 것은 일본의 관례가 아니다.최용술이란 이름이나 요시다 아사오란 일본이름이나 대동류의 어떤 공식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그가 단지 잡일꾼에 지나지 않았다는 설을 뒷받침한다-
4. 요시다 아사오란 이름을 붙여준 것은 누구였는가 다케다 소가쿠인가 산본수웅인가?
다케다 소가쿠가 지어준 이름이란 것이 최용술선생님의 주장인데 제자분들의 글에서는 산본수웅이 요시다 아사오란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시다란 성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다케다가 아니라 "요시다"가 성이라는 것과 관련 입장정리 필요할 텐데 그런 생각까지 해본 사람도 없는 듯 합니다.
산본은 야마모토라고 읽힙니다. 최용술선생님은 야마모토가 아니라 와타나베라는 이름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합기도계의 주장도 문제입니다만 다케다도 야마모토도 와타나베도 아닌 요시다란 성을 쓰신 것도 설명할 길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양자가 아니라 다케다 가문의 일꾼내지 종이었다고 하며 나름대로 대동류수제자론을 유지하려는 입장...(개별적으로 합기도를 하는 한국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는 외국수련생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30년넘게 술기를 받았기에 누구보다 대동류에 정통했을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인데..
제자에게도 잘 안보여주는 비전기는 그에게 술기를 받게 해서 넘겨주는 법인데 조선인 일꾼에게 술기를 받게 했다...
과연 그런가?
그럼 확인안되는 황궁교습내지 명문가 인사들 지도는 어떻게 설명할 건지? 일본의 사무라이 후손들로 자부심높은 인간들이 조선인 종에게 무술을 교습받았다?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대동류에 연결시키겠다고 최용술선생님을 다케다 가문의 종이었다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그런 상상력까지 발휘하는 분들의 머릿속 구조를 이해하기 어렵다...다케다가문과 연결시키는 것자체가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는데...)
천황 히로히토가 그와 최용술선생님을 매우 아껴 황궁을 나간뒤에도 보살펴 주었다거나 일본내에서 일본경찰을 살해했는데 황실을 무상출입하며 가르친 공적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 대해 사실확인이나 한 번 제대로 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5. 다케다 소가쿠와 수십년간 신수산에서 입산수련하셨는가
1982년 인터뷰에서 최용술선생님은 자신이 다케다 소가쿠로부터 30년간 개인적으로 지도를 받았고 그중 20년은 다케다 소가쿠의 산 중 집(mountain home)에 격리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최용술선생님 육성 동영상에서 최용술 선생님께서 내하고 다케다 소가쿠하고 20년만에 산에서 내려왔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하는 김정윤선생님의 1962"합기술" 내용입니다.
-"1908년에 일본에 납치되어 간후 산본수웅에게 4년간 보살핌을 받다가 14세때 다케다 소가쿠를 따라갔고 (합기술내용 요약. 카페주인)......신주산에 입산한 후 팔년간의 수도를 하시다가 대정팔년(1919년)경 무전총각선생과 하산하여 동경일본교에서 육년간 거주하면서 무전총각선생과 황실에서 대신들을 교수하시었다."-
위 책에서의 설명을 따를 때 1912년경부터 1919년까지 산상수련을 하고 그후 6년간 도쿄에 거주하면서 황실에서 대신들을 교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케다 소가쿠는1910년부터 1921년까지 홋카이도에 머물렀고 그리고 1921봄에 홋카이도를 떠났다가 다시 1922년가을부터 1930년까지는 홋카이도(북해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특히 1915년부터 1919년까지 홋카이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중에 요시다 코타로나 우에시바 모리헤이 같은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카페주인 주)
이에 따르면 관동대지진때 다케다 소가쿠는 홋카이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하는 1971년 월간합기도 내용입니다.
"도주 최용술선생께서는 일본 사람들 세계에서도 극비리에 연수했던 합기술 을 일본의 심심산중에서 수련했고 일제말기에는 궁성(일본 왕이 거처하던 궁궐)안의 황족들을 교습하기 위해 무상으로 출입하고 있었다."
이하는 1982년 최용술선생님 인터뷰내용입니다.
다케다 소가쿠가 황족의 스승이 아니었느냐 최용술선생님 당신도 황족을 가르치는 일에 관계했습니까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당시에 나는 스승님께서 지도하실 때 보조를 하였습니다. 동경에 있을 때 스승님과 나는 황족 뿐아니라 황궁의 고관대작들도 황궁에서 가르쳤습니다. "
시기는 사실 별 문제가 안됩니다.
문제는 다케다 소가쿠가 황궁에서 황족을 가르친 일이 있는지 아직까지 일본 대동류쪽에서는 아무 근거를 못찾아서인지 전혀 그런 일이 있었는지 밝히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황궁에서 황족을 가르쳤다면 우리보다는 다케다 가문에서 대영광으로 좋아할 일인데 말입니다.
더구나 1920년대 다케다 소가쿠는 거의 대부분을 홋카이도에서 보냈고 관동대지진때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일본이라는 나라, 특히나 그당시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천황은 신이었습니다. 청와대 경호실장 하는 것과 황족을 가르치는 것은 상당히 다른 느낌의 것이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꼼꼼하고 치밀하게 글을 읽는 분께서는 우리카페에 제가 올려놓은 다케다 소가쿠 연대기와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참고삼아
the important place to keep Takeda clan's reign. This place is Yougai-san or Maru-yama. Or other version says where Takeda-clan lived or Takeda-shurine is, the name of this place is Tutuji-ga-saki, very famous place in Japnese history literature. Remaked Tutuji-ga-saki house is polular touring site.
And the story going into mountain to MA train is over JAPANESE sence in 20C. I know KOREAN old folklore has such kind of story, or chinese martial-art entertainment novel.
이런 것도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아케다 지역에 있다는 신수산은 다케다 가문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산은 아닌듯 한데...
다케다 소가쿠가 황실을 출입해가며 황족을 가르친 적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보고 이런 주장을 하고 또 그런 주장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 최용술선생님은 다케다 소가쿠와 몇년도까지 함께 있었다고 주장되는지...최용술선생님께서 다케다 소가쿠 사망시기를 모르셨다고 보여지는 증거들...
사전지식으로 먼저 한가지 전하고 시작합니다.
다케다 소가쿠 는 1943년에 병사(뇌출혈)했습니다. 나이가 있으니 늙어죽었다 해도 좋을 겁니다.
가. 이하는 1962 합기술 내용입니다.
서기1943년 선생의 고령으로 인한 신병으로 중태에 이르게 됨을 알고 북견택(기타미자와?기타미?)시에 있는 아들에게 연락을 하였다. 별세하기 3개월전에 그의 아들이 북견택시로 모시고 간후 북견택시 사전촌(오타루?)에서 87세를 일생으로 서거하였다.
나. 이하는 1991 매일신문 내용입니다.
최용술씨(1905년생)는 8세때 이웃의 사탕공장을 경영하던 일본사람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최소년은 일본사람의 주선으로 15세때 대동류합기유술의 총재인 다케다 소가쿠의 문하에 들어간다. 최소년은 다케다 소가쿠의 문하에서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 합기도를 수련한후 46년에 복귀한 것으로 돼있다.
다. 이하는 1982 최용술생님 인터뷰 내용입니다.
다케다 소가쿠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자 연합군에 패했다는 것에 조상들을 볼 면목이 없어지자 식음을 전페하여 자살했습니다. 지도자였기에 일본의 패망에 강한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지요. 그는 명예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자결하는 것뿐이라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1945년 일본패망후 다케다 소가쿠가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카페주인 주)
라. 이하는 최용술선생님,정기태 선생님(캐나다에 합기도 전파)이 증언했다는 내용입니다.
다케다 소가쿠는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이후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다께다소까꾸 아들인 다께타쿠시로와 몇몇 제자들이 보는곳에서 할복했다.
(역시 1945년에 다케다 소가쿠가 사망했다는 것입니다.카페주인 주)
마. 이하는 문화일보 김정수 선생님 인터뷰 내용입니다.
최 도주는 45년 해방으로 한국에 돌 아올 때까지 40여년 가까이 다케다 문하에서 대동류를 수련했다는 것이다. 체구가 작았지만 대담한데다 자질도 뛰어나서 사부로부터 사랑받았다 한다.
결국 최용술선생님께서 1910년대에 다케다 소가쿠를 만나 30년수제자라는 것은 다케다 소가쿠가 죽을 때까지 그에게서 개인지도를 받았다는 것인데 다케다 소가쿠 사망시기에 대해 유일하게 1943년으로 전하는 김정윤선생님의 글이 1962년에 나왔습니다만
오히려 최용술선생님은 1945년 일본 패망후 다케다 소가쿠가 식음전폐로 자살했다고 하시기도 했고 할복자살했다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다케다 소가쿠는 1943년 사망했습니다. 병사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최용술선생님 가족분 중에 최용술선생님께서 그 가족분이 직접 받은 부고장을 받고 찾아갔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는데 부고장을 받았다는 매우 구체적인 이야기이니 그런 점을 어찌 감히 부인할 수 있는가 하는 입장으로 보는 분들도 있지만 위에서 나온 최용술선생님이 할복장면을 지켜보았다거나 자살하였다는 내용들과 비교해 가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7. 대동류의 목록 내지 면허관련.
면허개전 받았는데 도난했다고 주장하는 측(임종배선생님등...)과 수제자지만 받지 않았다는 측...정리 안되고 있습니다.
대충 "매우 중요한 서류들"이란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에서 그정도의 서류가 인증되었다면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쪽에서는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쪽으로 무게를 많이 싣고 있습니다.
참고로 김정윤선생님과 함께 초기 합기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 서복섭선생님의 경우 인터뷰에서 최용술선생님께서 일본에서 "어떠한" 자격증을 받았으나 분실했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최용술선생님으로부터 서복섭선생님께 대동류의 목록체계에 대해 전해진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동류의 구체적인 목록체계가 국내합기도계에 전해진 바가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장인목 선생님계열은 목록을 받아왔고 당연히 비전목록(초전목록)이라는 용어등도 그대로 이어져 왔습니다.
8.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다케다 소가쿠에게 소개한 사람
요시다 코타로.1886-1964
1915년에 우에시바 모리헤이(1883-1969)를 다케다 소가쿠에게 소개 또는 책임지고 천거한 사람은 요시다 코타로이다.
그는 학원대학,와세다 대학을 다녔고 미국의 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홋카이도에서 사설도서관을 운영했고 신문사를 운영했다고 한다.
"극우"인사로도 매우 널리 소개되어 있으며 일본 황군과 경찰교습을 널리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우익활동내지 모리헤이의 제자들의 우익활동,군대활동,만주활동등과 관련해서 극우단체인 현양사,흑룡회 회원이었던 요시다 코타로와의 관계가 논해진다.
요시다는 조선과 만주에 다니곤 했고 그때문에 한국에 대동류 스타일이 남아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주장하는 이조차 있다.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야나기류 합기유술을 전파했고 현재도 계승되고 있다.
9. 30년수제자이며 대동류만을 다케다소가쿠에게 배웠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다른 기법을 혼합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인지..
정리안됨.
대동류합기유술에 최용술선생님이 가르치셨던 권술 족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분들이 글을 쓸 때 최용술선생님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택견을 배워 대동류에 섞었다던가 하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원래의 야와라에 그런 권술 족술이 있었습니다.
어찌되었건 30년 수제자가 다른 기법섞었다는 주장 자체가 별로 설득력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지한재 선생이 가미하신 발차기뿐아니라 최용술선생님의 중하단 위주의 발차기도 대동류와는 다른 기법인데 그것을 지한재선생등의 문제로만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 수준높은 대동류를 지도한 것이 아니라 기초내지 수준이 낮은 야와라 내지 단순한 유술수준을 지도하는 모습에서 대동류의 특징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최용술선생님이 가르치신 것이 대동류그대로라면 왜 다른지에 대한 설명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가. 일본대동류의 제자들이 2차대전에서 몰살되어서 제대로 된 제자가 없어서 저열한 것만 배워서 그렇다 ?
과연 그럴까요?
나. 일본대동류의 공개되지 않은 기법이 무지 많고 그것은 합기도와 같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다. 변질되기 전 초창기 대동류기법을 최용술선생님이 전하신 것이다.?
그럼 일본의 여러 대동류유파들이 왜 아직도 공통기법을 공유하는가? 다들 변질되었는데 다들 비슷하게 변질되었는가?
4. 최용술선생님께서 제자들중 인격등을 살펴서 수준을 달리해서 술기를 넘겼기때문에 몇단을 받았다 하는 것과 상관없이 제대로 술기를 배운 사람이 별로 없다. 혹은 대체로 야와라 내지 유술 수준만 가르치시고 극소수에게만 혹은 단 한명의 제자에게만 합기유술 내지 합기술의 술기를 전했다.?
그럼 최용술선생님의 제자분들중 제대로 배운 분들이 누구라고 확정짓기는 어렵지만 그분들만 대동류를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10. 왜 최용술선생님은 당신께서는 "야와라"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
장인목 선생님계열에서는 자신들을 대동류 내지 다이토류라고 확실하게 하는데 최용술선생님은 평생을 야와라라고 하셨다-외부적으로 합기도란 이름이 자리잡았음에도 가까운 제자들에게는 야와라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심지어 합기도는 지한재가 만든 운동이름이다라고 까지 하셨다고도 합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합기도란 이름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등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합기유권술이란 이름도 합기도란 이름도 합기유술이란 이름도 제자들이 지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용술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름짓는 것에 별 이견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유술이란 이름에 권자를 넣어 합기유권술이란 이름을 지은 것이 최용술선생님이신지 제자분이신지 논의될 때는 그분이 문맹이었다라는 이야기는 잠시 잊어두는 게 좋을까요?. -
무도가가 자신이 한 무술이름에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특히 그무술에 오랜기간 천착해 왔을 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관련해서 ...평생을 유지하셨던 명칭, 야와라 만이 최용술선생님이 지켜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는 점이기도 하다. 야와라라는 명칭은 그분의 가장 첫 제자인 서복섭 선생님부터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분들에게까지 공통으로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야와라는 대동류나 아이키도 외에도 많은 유술계열을 통털어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특정계열의 유술에서는 자신들을 야와라 라고 일컫기도 한다. 최용술선생님의 경우 무슨무슨 류 야와라도 아니고 단지 야와라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점은 제자분들 누구도 부인하시지 않습니다.( 간혹 수준낮은 야와라따위에 카페주인이 연계시키는 것에 크게 반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최용술선생님을 직접 뵙지도 못한 그분들은 뜻하는 바가 높은 수준의 "합기"에 있는 분들이라 그런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또 일본 팔광류합기유술이 자신들을 팔광류야와라 또는 팔광류라고 하는 경우는 있으나 단순히 야와라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과도 비교 대상입니다.
야와라가 일반적으로 유술을 아울러 쓰는 표현인 경우의 예는 일본유도협회싸이트에 가보면 일본 전체의 "유(야와라)"를 대표하는 유도인들이 자신들을 부를때 쓰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야와라라는 유도소녀 주인공 만화도 있지만...
11. 국내합기도계에 "합기"라는 용어의 부재
합기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한국합기도계에 번져나간 것은 불과 몇년되지 않습니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합기라는 용어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합기도 관장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합기가 무엇이다 합기란 이런 것이다. 합기를 보여준다 그렇지 못하다 란 표현이 너무나도 쉽게 쓰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최용술선생님이 합기라는 용어를 아셨습니까? 그분이 합기란 이런 것이다 라고 가르친 적이 있으시다면 그런 것을 배웠다는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그 어떤 제자도 합기라는 용어를 최용술선생님이 쓰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원로도 내가 합기를 한다 라는 말을 할 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만이 마치 대동류와의 연결점을 입증할 증거인 양 내세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용술선생님을 가장 가까이 모셨다고 할 만한 분들도 거기에 대해 부정적인 것이 현실입니다.
12. 대동류관련 용어의 부재
한국합기도계에서는 최용술선생님이 다케다 소가쿠의 30년 수제자라고 주장만 했지 대동류와의 관계점을 모색하는 노력은 기울인 바가 별로 없었습니다. 기껏 대동류와 아이키도의 차이점에 관련한 개론적인 글을 가져다가 합기도와 대동류가 비슷하다고 분석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 점은 용어에서도 드러납니다. 대동류내부에서도 용어는 혼재되어 있지만 그런 것은 변명거리가 안됩니다.
118개조라는 용어는 다케다 도키무네가 만든 것이 아니라 다케다 소가쿠가 이미 쓰던 용어이고 비전목록118개조는 대동류에서는 누구나 알던 용어라고 해도 좋을 단어입니다.
초전 중전 대전 오의 등등의 일본 무술계에서 흔히 쓰이던 용어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대동류에도 초전목록이란 용어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야와라에도 대동류처럼 원래 단제도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동류의 목록체계가 한국 합기도계에 남아있지 않은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배운 것은 "대동류합기유술"이라고 말합니다. 현재 합기도(아이키도)라는 틀안에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우리의 원로들은 어떻습니까? 그분들이 같은 질문에 답할 것은 "야와라"입니다.
13. 왜 지금에 와서 합기를 내세우는가
합기도 일반이 대동류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일반합기도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합기술"등은 비전되어 오직 특정도장들 내지 특정도장 한곳에만 전수되었다고 하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합기술이란 용어를 김정윤선생님이 어떤의미에서 사용하고 전하신 것인지와 관계없이 일본자료에서 나오는 용어 "아이키"와 같은 뜻으로 쓰면서 합기가 들어간 특정의 고급기법으로 사용한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주장.-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일본 아이키도인이나 대동류인이 아니라...자신이 배우는 곳만이 최용술선생님의 제자분들 중에 합기를 유일하게 "이었다"고 주장하시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습니다.
I have not yet to see any "aiki " in Hapkido.
in the world, many hapkido master exist. but nobody can show "aiki". it's only jujitsu...
-나는 지금까지 한국합기도에서 전혀 합기를 본적이 없다.세상에 합기도마스터는 많이 존재하지만 그누구 합기를 보여줄 수 없다. 단지 유술수준일 뿐이다.)
이 주장을 하시는 분은 물론 자신의 스승만이 유일하게 합기를 보여준다고 주장하십니다. 오직 단 한분.
최용술선생님의 술기자체를 모두 합기술로 부르는 입장과 대단히 깊이있게 배운 분들에게만 전해진 특정기법만 합기술로 부르는 입장이 대립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이 명칭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처음 그 명칭을 쓴 사람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렇기에 대동류수제자론은 최용술선생님의 가르침마저 흔들어 놓고 있는 셈입니다.
첫댓글 국내 합기도가 자료정리를 해야할 부분이 상당수 되는거 같은데 일본 대동류나 아이기도 같은 경우엔 잘 정립되어 있습니까..??일본에는 하나하나 체계를 잡아 나갔나요..?? 관련 자료 좀 올려 주셨으면 합니다...
합기도(국내)의 경우 내노라 하는 협회에서도 역사 연구는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몇년 전에 협회일과 무관하게 개인차원에서 노력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중앙협회교육에서도 도주의 귀국이후 역사만 언급할뿐 그 이전은 언급조차 않고 있습니다.
그렇죠...그런데 이 카페에서 운영자님이 주장 한데로 한국 합기도는 역사정립이나 기법 면에서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동류나 아이기도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자구요~운영자님~ㅋ 없나요..??
갑비님이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근거자료를 번역해 원문과 함께 올립니다. 아마 신무합기도 영문싸이트에서 퍼온 글이라고 기억합니다. 그분들이 위의 글에 공감을 하든 하지 않든 한국합기도계에서 그런 주장을 해온 분들이 상당히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다케다 소가쿠집안에 조선인 종이나 일꾼도 없었다고 종가대리인 곤도측에서 확인했습니다. 아직까지 기억이 정확한 사람들도 많이 살아있고 재산관련기록도 확실한가 보더군요.
일본인들이 그리 만만하지 만은 않다는 것을 자꾸 부딛쳐보면 알게 되지요..그리고 근거없이 주장하던 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거나 확인되면 -증거를 통해서-합기도만이 아니라 한국이란 나라자체의 이미지도 같이 덩달아 떨어져가는 것 같아 마음이 상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예전에..뭐 지금도 그리 크게 변한것 같지는 않지만...한국사람들을 정말 싫어 했었습니다..지금도 그런듯하고....그래서 한국사람들이 자신의 나라가 한국이란 것을 숨겨가면서까지 그곳에서 생활을 하며 살아왔는데...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될수만 있다면 모든 역사를 다 바꾸어서라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것은 지금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구요... 무조건 일본인들이 그렇게 말을했다 저렇게 말을 했다고해서 다 믿을것은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기술을 서로 비교해 보는 수 밖에는 없는듯하네요.. 저번에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어디까지나 역사는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져 온것이 사실이니까요...역사란 것은 그런것입니다..
흘러간 과거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들인데...조상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근본 뿌리만 알면 그 조상을 찾는것은 어찌보면 쉬울수도 있습니다. 근본 뿌리를 한번 찾아보십시요..근본이 어디인지....
아직까지 우리나라엔 최용술도주님의 술기가 살아 있습니다...아직 그 근본이 살아 있기때문에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용기내에 한번 찾아보십시요... 글과 말은 한계가 있습니다.....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이 있구요... 하지만 기술은 그렇지 않습니다..
윤세권선생님의 술기를 본 사람들도 그분연세에 그런 스피드...놀랐지 않습니까? 술기도 훌륭하시고...원로분들의 동영상등이 자꾸 소개되면 언젠가 해결될 겁니다.
언젠가 일본대동류에서도 한국의 합기도 비디오 보고 따라할 날이 올지도 모르는 거죠. 각종 권술과 족술을 말입니다.
대략 정리해 보면 카페주인님이 주장 하시는건 최용술 도주가 대동류를 전수 받은게 아니고 일본에서 쇼린지 캠포나 여타 다른 유술을 전수 받아서 한국내에서 발전 시켰다고 주장 하시는 건가요..??늘상 같은 내용만 보다보니...
위의 꼬릿말에도 있고 일전에 저도 주장한바가 있는데 일본인들의 역사왜곡 이란 생각은 왜 안나는 것일까요..??
아~~그리고 카페 이름은 합기도 공부보단 합기도 비판이 어떨까요..?? 카페 제목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거 같아서~ㅋ
합기도만세 합기도 짱 이라고 외치는 초등학생이 아닌 다음에야 스스로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역사왜곡 그것도 현실을 도피하는데 아주 좋은 말 중 하나겠습니다. 일본인들에게 무슨 말을 하든 너희들은 왜곡하는 놈들이다 라고 하면 다 통했으면 좋겠네요...
한국인과 일본일을 뺀 나머지는 누구말을 믿게 될까요 한국쪽 주장과 자료라는 것들과 일본자료를 비교할 때....
그리고 일본인들이 뭘 왜곡했는지 하나하나 짚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왜곡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도 함께 말입니다...저도 일본인들 왜곡점을 하나하나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정말 설득력있는 내용으로 최용술선생님 및 합기도자체의 위상과 신용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고 신용이 없으면 존경받지 못한다...
일전에 나왔지 싶은데요~최용술 도주의 일본내 제자 라던가... 아님 최용술 도주에 관한 일본 대동류측의 입장표명 일본쪽도 명확하진 않은거 같은데요...
지금의 상황에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아직까진 대동류 종가쪽이겠죠...그쪽에서 무슨 말을 하든 우린 그쪽에 끌려다니게 되어 있으니까요...진실을 모르는 상태에선 말입니다... 숫자가 많든 적든 그건 상관이 없죠..누가 누구를 끌고 다니는지.....끌고가는 쪽은..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
끌려 다니는 쪽에선 그 말을 우선적으로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일테니까...지금의 어떤분처럼요....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최용술 도주님이 남겨주신 술기가 무엇인지 알아 보는것이 가장 우선인거 같구요 이 술기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그것 또한 알아보는것이 또 중요하겠죠...
그 두가지만 알아 보신다면 합기가 어떻느니...합기가 있느니..그런말은 더 이상 하실 이유도 필요도 없으실겁니다..... 모든것은 그냥 있었으니까요.... 누가 이렇다 저렇다 했느니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진실은 그냥 있으니까요...그 진실을 그 참을 찾아보세요...
합기도를 세계에 알리려고 했던 분들은 합기도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일뿐입니다. 그분들이 정말루 합기술을 사랑 하셨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겁니다. 항상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죠.
본인들이 시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기때문에 그 결말도 본인들이 감당하지 않으면 안될것입니다. 그나마 최용술도주님의 술기를 변형없이 지켜오신분들이 계시기에 아직까지 저희에겐 희망이 있는 것이지 세계에 알렸다고 합기술이 더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다 생각합니다.
모든것이 자신의 위한 욕심때문에 그렇게 된것이... 특히나 우리나라 사람들 욕심이 참 많잖아요...조금만 배웠다하면 모든것을 다 배운줄 알고 스스로 우두머리가 되려 하는 성격이 많기때문에..이런일이 벌어진거죠.... 본인들이 배운 무술은 본인들의 것이 아닌 스승님의 것이란걸..잊어선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스승님이 살아 있을땐 자신이 책을 써내더라도 스승님의 이름으로 책을 펴냈던 것인데 세상 모든것이 내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사실 내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르고 한 행동들인거죠 스승님을 배신하고서 잘 된 사람은 한명두 못 봤습니다.... 스승님이 살아 계시는데도 죽었다 말을 할정도였으니...
운영자님 최용술 아라는 분존재는 하신분이었습니까?
1925년 가을 황세자 거처에서 21일간 무술지도. 1926년 봄 부터 가을까지 황궁 에서 고관들 무술지도 (출처 무도.모리헤이 우에시바 저) 7번글에서 제가가지고 사진(60년대술기) 과 무도(모리헤이 우에시바) 대동류합기유술(곤도 가츠유키) 동일사진 있음
대동류가 아닌 다른 유술에서도 같은 술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희 카페에서도 대동류와 야와라 쇼린지 켐포에서 공통된 사진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자료에서도 같은 기술이 나오는 무술은 또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야와라와 비슷한 무술은 대동류나 아이키도보다 훨씬 더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손질 발질이라는 타격기를 포함한 무술로써 말입니다.
Late in 1925 he gave a demonstration to a group of influential people which included the former Prime Minister Count Gonnohyot Yamamoto. In 1926 this was followed by him giving lessons to members of the Imperial Household Agency, army and navy officers, and other leading figures in the political establishment.
In the capital, Takeshita introduced Ueshiba to influential people in military, financial, and political circles, as well as people connected to the imperial household, even organizing a society to support his martial arts teacher. This enabled Ueshiba to become entirely independent from Takeda and Daito-ryu Aiki Jujutsu. During this process, in 1928, Ueshiba changed the name of his martial arts school to Aioi-ryu Aiki Bujutsu. He again renamed his school Aiki-Budo or Ko-Budo, and finally settled with aikido in 1942.
Imperial Household Agency=궁내청 =일본왕실관리기관.
의도적인 것인지 실수인지 모르겠지만 합기도라는 무술명칭뿐 아니라 그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활동을 최용술선생님의 활동으로 치환해서 전하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합기도란 무술의 창시자가 배운 무술=대동류합기유술. 우에시바의 군대, 경찰, 궁내청직원들 지도=최용술선생님의 황실무상출입과 황실고위관리지도.특수부대 지도 등등 그런 경우가 눈에 많이 뜨입니다.
1925년에 우에시바는 40대중반의 나이였습니다. 최용술선생님은 21세였거나 26세였습니다. 그리고 다케다 소가쿠가 그 당시 도쿄에 있어서 또 황실에서 누군가를 가르쳤는지 확인해 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다케다는 홋카이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남에서 부터 황실,하와이까지 연결되어지는 심지어 해방후 한국을 방문 했다는 요시다 아사오(합기도측) 요시다 코다로(다이토류측) 판별이 저의 진정한 의도입니다. 아끼도 도주님 활동을 합기도도주님 활동으로 치환하여 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명백히 밝혀둡니다. 제가 스승으로 받은것은 훌륭한 무술과 미스터리 역사라는 무겁고 고통스러운 멍에를 함께받고 있읍니다. 그 멍에로 인해 운신의폭이좁았던 합기도가 자기자리를 찾는 것이 저의 바램이죠... 혹시 고타로의 사진을 찾을수 있다면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측에서 일본측에 문의결과 무응답 이었다고 하더군요.
요시다 아사오(최용술)와 요시다 코타로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위에 사진을 올려놓았습니다. 사진이 보이시지 않으면 저희 카페 사진자료실에서 확인해보시고 그래도 안보이면 google에서 찾아보십시오.
"제가 스승으로 받은것은 훌륭한 무술과 미스터리 역사라는 무겁고 고통스러운 멍에를 함께받고 있읍니다."라는 needle님의 말씀에 미국에 계신 분은 오히려 국내에 계신 대부분의 합기도인들보다 인식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합기도(야와라)는 분명 좋은 무술입니다. 그렇지만 그 역사와 관련된 멍에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멍에에서 어떻게 벗어날 지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합기도역사자료실의 두번째 공지글 "나는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대동류수제자론을 무비판적으로 퍼뜨리는 분들께...) "을 한 번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무작정 대동류(daitoryu)와의 관계 황실 출입 및 지도, 우에시바 모리헤이 지도, 청와대무상출입 등등의 이야기를 자랑스러워하기보다 확인될 때까지 말을 아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곤도의 우케(사진)의 도장방문?때 그 눈길을 절때로 잊을수가 없군요. 자랑스럽다?? 무술로서의 우위라면 모를까.대동류와의 관계는 부담입니다. 그 인터뷰건으로 심심히 않게 방문들이 있엇죠. 스승을 대신해 답례방문을 하며 느낀건 발차기의 필요성입니다. 무술은 정신에서 시작하여 정신으로 끝나고 힘은 마음(신념) 에서나온다고 생각합니다.정통성 확립이 최우선 과제라고 봅니다. 발차기가 있다 없다 손끝이 펴졌다 오무라 졌다는 그것에 비하면 사소한것이라고 봅니다. 일본관장과는 다른 따스함이 느껴지는 충고 기억 하겠읍니다. 합기도인이기를 바라며...
기술적인 정통성 확립과 역사적인 정통성 확립을 기대해 봅니다. 그 때문에라도 1945년 이전의 최용술선생님의 행적에 대한 논의는 겉으로는 조용히 내부적으로는 치열히 확인해야 할 사항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손끝이 펴졌다 오무라졌져다 하는 것 발차기가 있고 없고는 정통성의 확인차원에서 문제제기가 시작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몰랐던 것이 국내 합기도인들 대부분입니다. 한국에서는 합기도와 아이키도는 달라도, 합기도와 대동류는 완전히 같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도 몇년전까지는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로분들이신 최용술선생님의 제자분들조차 대동류와 합기도(야와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시고 계십니다.
약간 사실관계만 바로잡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인 특히 명망있는 일본이 가문에서 한국어린이를 입양한다는 것은 일본의 관례가 아니다." 소카쿠의 호적상 기록은 '농민'으로, 동거인을 포함하여 당시 고향 지역 주민들의 증언으로도 소카쿠 및 그의 아버지는 '농민'이었으며, 명망있는 집안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소카쿠가 주장한 가문의 역사는 소카쿠 본인의 창작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이 '최용술을 양자로 받아들였다'는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입양기록이 있는지 호적을 한 번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