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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제사장의 죽음
역대하 23:16-21
23:16 여호야다가 자기와 뭇 백성과 왕의 사이에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한지라
23:17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23:18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의 직원을 세워 제사장 레위 사람의 수하에 맡기니 이들은 다윗이 전에 그 반차를 나누어서 여호와의 전에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자기의 정한 규례대로 즐거이 부르고 노래하게 하였던 자더라
23:19 또 문지기를 여호와의 전 여러 문에 두어 무릇 아무 일에든지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3:20 백부장들과 존귀한 자들과 백성의 방백들과 온 국민을 거느리고 왕을 인도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내려와서 윗문으로 좇아 왕궁에 이르러 왕을 나라 보좌에 앉히매
23:21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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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나옵니다.
그 나라와 현재 우리나라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세운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이 세웠다는 이스라엘 나라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세상 나라는 왕이 최고이며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이
최고로 중요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 드리는 장소가
그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왕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호와의 성전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멸망당할 세상 나라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성전이 최고라는 말은
곧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인정을 받고
세상적으로 존경을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세상적인 부귀 영화가 들어있는 것을 원하지 않고
우리 몸 전체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되기를 원합니다.
움직이는 성전,
하나님이 늘 함께 임재 하시는 성전,
그럴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정말 우리 마음속에 소중한 것은
부귀 영화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귀한 보물이고
최고의 선물이고
가장 귀한 가보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옛날 구약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거예요.
옛날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데
그 나라는 과연 다른 나라와 다르더라,
그 나라는 하나님의 성전이 최고더라"고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사람과 얼마나 일치되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과 얼마나 차이 나느냐,
그게 더 중요한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납니까?
옆집에 사는 아저씨와 나와는
어떤 차이가 나며,
앞집에 사는 불교신자와 나는
어떤 차이가 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있음과 하나님 없음의
차이입니다.
이것보다 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멸망이고
하나님이 계시면 그건 영생과 구원이에요.
얼마나 간단합니까.
이보다 더 간단한 게 어디 있어요.
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 행운을
그렇게 귀하게 보지를 않습니까?
왜 그걸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요?
하나님 없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운 겁니까?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부터 뭔가 잘못된 마음이 있으면
이걸 수정하고 바꿀 수 있는
그런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니까,
제사장들이 한가지 일을 했습니다.
무슨 일을 했느냐하면
없던 왕을 새로 세웠습니다.
왕은 아무나 시키는 것이 아니라
뭔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없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에 의해서 왕이 다시 세워진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들고 싶어서
만들면 안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자꾸 상상을 해서
하나님을 만들어 가지고 있어야 되겠다 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뭔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려면
우리 힘으로 이루어낼 수 없는
다른 어떤 계기가 있어야 되고
다른 일이 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냐?
지금까지 내 마음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내 마음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통감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한테 대들고 싶고
예수한테 침이라도 뱉고 싶은
이런 나쁜 마음이 은연중에
우리를 장악하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교회 나오나 안나오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없어지고
예수님이 고맙고,
예수님이 좋아지고,
예수님이 나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바뀌고 있는
변화 같은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걸 보고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고 하는데,
사람이 완전히 변한 거죠.
하나님을 왠지 싫어하고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멱살을 쥐고 싶고 공격하고 싶고 그런 마음에서
이제는 전혀 하나님을 반기고 싶고
고개 숙이고 싶고 절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이런 마음이
새로 생긴 거예요.
전에 전혀 없었던 마음이
새로 생긴 겁니다.
본문에는
왕이 없었는데
새로 생긴 거예요.
그러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없던 왕이 새로 생겼느냐하면,
16절 17절에 살펴보면
"여호야다가 자기와 뭇백성과 왕의 사이에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한지라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게 되고
신앙이 들어오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뭔가 처분하고 싶고
깨부수고 싶고
내어쫓고 싶고
저런 것을 싫다고 하는 마음이 들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은
내 마음속에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말입니다.
그 당시에 제사장들은
우상을 깨뜨리고
그 우상을 섬기도록 독려했던 최고의 지도자, "맛단"이라 하는 바알의 제사장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람 죽이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우상을 깨는 일이 그리 쉬운 일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서 보게 되니
"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
저건 꼴 보기 싫다,
저런 인간은 제거해야 마땅하다"
는 생각이 든 겁니다.
이처럼 이러한 하나님의 거부반응을
받아드린다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라도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 강단에서 설교를 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가
강단에서 섰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누구를 더 좋아하겠습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사도 바울이 여기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이재명 대통령이 와서
여기에서 강의를 한다고 합시다.
어느 쪽에 더 관심이 있고
어느 쪽에 더 많이 모여들겠습니까?
이 대통령이 수요일
어떤 교회에서 강의를 한다고 한다면
수요일 날 안 빠질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한다든지
사도 요한이 설교를 한다고 한다면
우리 마음속에는 들어봐야 뻔한 설교,
하나님 잘 섬기라는 것,
그것은 왠지 듣기 싫더라"면서
우리 마음이 끌리지 않는 거예요.
결국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흔히 거짓 선지자,
나쁜 선지자를 죽인다는 이 말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아, 저런 목사는 없애고 싶다.
저런 목사의 설교는 귀를 막고 싶다"는 마음이
그냥 드는 것이 아니고
신앙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목사야 다 똑같은 목사인데,
뭐 아무 목사나 있어라,
교회만 되면 되지 뭐,
목사가 한두 명인가?
신학교 졸업생이 많은데
아무나 와서 하면 되지"라는 생각보다는,
"저 목사가 어떤 말을 하는지
한번 들어보자.
아! 저런 말은 하면 안 되는데,
저건 잘못된 말이고,
이건 하나님 뜻이 아니고
완전히 자기 자랑이네"라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판단력이 생기고
"저건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소리야"라고 구분이 된다는 그 자체가 신앙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껄끄럽게 해 가지고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교회가면
잠만 오지 그것 따질 생각 않는데요,
어떻게 그걸 다 따지고 삽니까,
그냥 교회 참석하고 집에 가면 그만이지요."
이렇게 우리는 편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저는 우리 마음속에 신앙의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다.
뭔가 본문처럼 부술 것을 부수고
죽일 자는 죽이는,
그러한 왕의 마음과 일치되지 못하다고 합니다.
요즘 교인들이 세상에서 바쁘다 보니까
교회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 떼우기 예배,
시간 떼우기 설교
모든것이 시간떼우는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즉, 말씀에 대한 성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을 쏟는 구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저 교회는 교회대로 운영하고
나는 우리 가정만 운영하면 된다는 식으로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요즈음 추세가 다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 15절
산상보훈 가운데 나오는 말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라고 나와 있는데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가 있다는 이야기고
거짓 선지자가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는
아주 선한 선지자, 훌륭한 목사처럼
나타날 수가 있으니까
너희는 그것을 판단을 잘 해야 된다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를 했잖아요.
그러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저 말씀이 하나님의 소리인지
인간의 소리인지를
살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본문에서 왕을 누가 세우느냐하면
레위인들이 세웁니다.
18절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과 직원을 세워서
제사장 레위 사람의 수하에 맡기니
율법대로 제사를 드렸다
고 나옵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또 문지기를 여호와의 전 여러 문에 두어
무릇 아무 일에든지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레위 인들에게
이 모든 제사와 성전 관리를 맡겼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전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왕도 성전을 세워서
왕궁으로 모셔야 되는 겁니다.
성전세우려면 하나님의 인가가 나야 됩니다.
성전에 있는 레위 사람들에 의해서
왕이 이렇게 받들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 안에 놓이게 합니다.
자, 레위인들, 그리고 제사장들이
왜 그리 중요할까요?
왜 이스라엘에서
이 레위인들이 그렇게 제일 중요한 일을 맡게 됩니까?
그것은 출애굽기 32장 28, 29절에 보면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라는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잖아요.
그때 산 밑에서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내려와서
너희들이 금송아지 만든 것은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고
이 금송아지 만든 것을 잘못 되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세 편에 서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반대편에 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모세 편에 선 사람도 있었고,
어떤사람은 모세의 반대편에 선 사람도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지시했느냐 하면
모세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반대편 가운데는
자기의 동생도 있고 형님도 있고
친척도, 친구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
친구였고 형제간이었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서로 반대편에 서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 놈들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죽이겠습니까.
친구고 형제인데.
그 때 레위 인들이 칼을 들고
비록 자기 형제이며 친구이지만
가차없이 그 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 죽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잔인한, 이런 무서운 일을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하나님 앞에 헌신했다고 합니다.
보통 교회에서
헌신예배 많이 드리잖아요.
그런데 이게 헌신이에요.
헌신은 친구라든지 형제지간으로
끌어왔던 인간 관계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편이냐 아니냐를 재분배하는데 있어
충성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 서겠다,
형제 친척보다도
나는 하나님 편을 선택하겠다는 사람을
헌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출애굽기 32장에 보니까
그렇게 형제들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레위 지파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성경이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유교에서는
형제간에 잘 지내고 부모에게 공경하라고 가르쳐왔잖아요.
사회규범이나 윤리 도덕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말짱 도루묵이고
소용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그걸 수용하고 "맞습니다, 하나님 옳습니다"하고
끼어 들면 헌신이고
끼어 들어서 형제를 죽였던 사람들이
바로 레위 인들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할 수 있는 그런 복과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 의해서
왕이 세워지는 겁니다.
그 레위 지파에 의해서 말입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성전에 문지기가 있어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부정한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조항이 있는데
그러한 자들은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걸 바로 하나님 앞에 헌신했던 레위 지파들이
담당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가 거룩한 성도가 된다는 말은
"이 몸을 하나님을 위해서 바치겠습니다"라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보다도 부모보다도 친척, 친구보다도
하나님이 우선이고
하나님이 최고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헌신되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이 이스라엘나라는 이상한 나라여서
왕보다도 국민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이
최우선으로 귀하고 거룩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나라와의
차이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그 말을 들을 때
"그렇지 그 말이 맞지"라고
쉽게 받아 들였겠지만
막상 본문에 더러운 놈은
이 성전에 못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야 이거 신앙이 장난이 아니구나,
하나님 섬긴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고
이게 취미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거구나"하고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교회에 들어온 목사가
양의 탈을 썼는지,
세상 잡담을 하는지,
윤리 도덕을 이야기하는지,
아니면 복음을 이야기하는지,
여러분들 같으면
"내가 뭐 신학을 했나
뭐 졸다가 집에 가면 그만이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도 지금 하나님께 헌신했는데
목사가 하나님께 헌신을 안하고
시간정산을 철저하게 해달라고 고소하기 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접하고서
하나님의 헌신된 자인지 아닌지 분간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 올 때
헌신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일까,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의 자세로
딱 교회를 와야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가 있으니까 다니면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되고,
헌신된 사람이 되어야 되고,
내가 움직이는 교회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양식을 먹으면서
날마다 주의 말씀이 맞으면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주님 앞에 또 다시 헌신하는 생활이 되풀이되어야,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게 헌신된 레위 지파요 거룩한 성도요
이게 신자인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이상하다 그 사람 왜 죽이지,
거짓 선지자를 왜 죽이나 살려두지,
사람 죽이는 것이 취미인가,
우상을 왜 부수지,
그 참 쓸데없는 인간들"이라고
이렇게 비꼬지 마시고
지금도 사람 죽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나라의 모든 우상을 부술 때,
그 헌신된 심정을
마음으로라도 같이 이해를 하고
같이 동정을 해야 되고
옳다고 같이 박수를 쳐주어야 됩니다.
"나도 그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죄를 짓다니"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정말 헌신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교회를 해야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