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뚜얼 슬링 해골 박물관 ( 1975~1979)
김윤선
1641년 시아노크 19 본래 5위 왕으로 프랑스가 베트남 식민지로 지배 할 때, 시아누크 아버지를 왕으로 하고 있었다.
오랜 식민지로 나라를 잃고 살던 국가는 1970년 캄보디아에 봉제 금속 스포츠 등 다양한 중소기업들이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왔다. 나라가 서고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열성을 다할 무렵 시아누크 가문이 지배하던 왕국이 캄보디아 공산당 정권이 들어설 것을 우려하였다. 베트남전을 계기로 미국에서 베트남 인접 국가인 캄보디아를 통해 베트남 전 승리를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친미 쿠테타를 지원 한다. 캄보디아 총리인 로솔과 부총리는 시아누크 국왕이 소련을 방문하는 사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친미 정권을 장악 할 계획을 세운다.
폴 포트와 크메르 루즈는 정권을 위해 온 국민을 살상 시키는 행위를 자행하여 결국 사라 졌지만 집권 기간 중 약 2백 만 에서 2백 5십 만 명의 인구가 희생 되었다고 했다.
1975년 정부가 시체를 발굴하면서 구덩이를 파헤치니 구덩이마다 시체가 달랐다고 한다. 머리만 있는 곳과 몸만 있는 곳 아기와 함께 묻혀 있는 곳 등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죄 없는 사람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온 몸을 쇠사슬로 묶어 고문과 함께 죽음으로 몰아가는 끔찍한 장면들이 사진으로 공개 되어있었다. 어린 아이를 안은 어머니, 하늘을 찌를 듯한 힘이 솟는 젊은이들, 눈에 초점을 잃은 노인들, 많은 매를 맞아 실신한 여학생 남녀 구별 없이 마구잡이 총살을 간행하는 악인들은 마치 성냥이 들이 먹이를 앞에 놓고 포효하는 장면이었다. 앞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 앞에 언제 뒤에서 총으로 또는 창으로 죽을지 모르는 현장에서 반응조차 할 수 없는 긴장감에 숨을 몰아쉬는 처참한 장면을 가슴 조이며 바라보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현장에 얼마나 살고 싶어 비명을 질렀을까?
몸서리치는 현장을 보며 일제 치하에서 우리 선조들이 조국을 그리며 피를 흘리고 죽어가던 생각이 떠올랐다. 농사지은 것을 모두 다 빼앗아 가고 죽물조차 먹을 것이 없어 목에는 마른기침만 하고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을 그것도 모자라 몽둥이로 실신을 시켜 길가에 버렸던 우리 아버지가 생각났다.
사형의 현장에서 한 젊은이가 수 만 명의 시체를 밟고 탈출하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바닷가에서 어느 외국 선박에 의해 생명을 구하고 캄보디아 현장을 세계에 알렸다.
흰 색으로 채색된 위령탑에 칸을 만들어 정부에서는 70년 후반부터 이곳을 시체 박물관으로 정하고 해골을 모아 놓고 전시장처럼 해 놓았다.
머리에는 영혼이 있기에 몸과 따로 묻는다는 해설자의 설명이다.
뚜얼슬랭 박물관은 프놈펜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였는데 사람들을 고문과 죽음으로 학살을 한곳으로 70년 이후로 이곳을 시체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해골에다 니스를 반질반질하게 변하지 않도록 칠해놓고 외국인들의 관광지로 보는 이들마다 소름 끼치는 장면과 함께 몸서리를 쳤다.
벽보에는 죽은 사람들의 사진이 수없이 붙어있고 학살 당시의 사진을 그대로 전시해 놓았다. 공무원 교사 경찰 사업가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등 뒤에서 학살을 시켰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 큰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가고 있는 사진을 보니 가슴이 저려왔다. 얼마나 그 순간에 무서웠을까? 마지막 죽음의 순간 바로 앞에 학살이 자행되는 순간을 비명과 절규의 속에 마구 총칼을 휘두르는 금수 같은 현장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옆 사원에는 얼굴이 험상궂게 화난 불상이 한쌍이 모셔져 있었다. 마치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으슥한 느낌 속에 사람의 발걸음은 흔적도 없었다.
관객들이 오가는 사이 넓은 뜰엔 큰 나무들이 우뚝우뚝 서있고 가장자리에 작은 나무에는 열매도 달려 있었다. 이쪽저쪽을 거닐며 나는 지금 피바다 위에서 죽어간 영영들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나부끼는 사이로 작은 나뭇잎이 하늘거리는 것은 어린 아이들의 영혼인가, 큰 나무는 엄마나무인가, 비명소리와 함께 우우 혼령의 소리가 구천으로 떠돌고 아이 들의 울음소리가 내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