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종교 다원화 시대에 있어서의 기독교의 복음과 해방신학 비판에 대한 고찰.
-
- 이 글은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연구 논문임-
1 시작하는 말
지난 여름 목회자(牧會者)들을 위한 Bible Study Program 에 평신도로서 외람 되게 참석하여 함께 공부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었다. 당시 高名하신 전 상환 박사님 게서 마지막 시간에 크리스트교와 다른 종교들
과의 비교에서 크리스트교의 진리의 우월성, 그리고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
고“(신 12:23, 17:20,28:14)란 성서의 구절과 孔子님의 중용지도(中庸之道)란 말씀을 인용(引用) 하시면서 목
회자(牧會者)들은 영적(靈的)인 순수복음(純粹福音)만을 전해야 된다고 역설(力說)하셨고, 해방신학은 너무 左
로 치우쳐 잘못 되었다는 주장이 였다. 평소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본인으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었고
근본적인 見解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 들에게 도전되고 있는 타종교와 공존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서 어떻게 기독교의 정체
성(Identity)을 밝혀야 하며, 또 한편에서는 서구 제국주의 신학에서 신학의 해방(The Liberation of Theology)은
물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解放)을 정통적인 복음(福音)에 비추어 다시 반성하고 우선적
으로 가난 한자들에게 연대하여 불 의한 사회에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투신(Praxis)하는 삶의 현장에서, 신
앙의 意味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실천의 해석학(Hermeneutics of Praxis)을 주장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충격
을 주고 있고, 논란이 되고 있는 해방신학(a Theology of Liberation)대한 비판과옿 오해(誤解)에 대한 응답과 아
울러 불의가 만연한 대륙에서, 성서에서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이에 대한 본인의 견
해를 진술하고자 한다. 종교적 다원주의(Pluralism)는 오늘날 엄연한 현실로서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있다고 하
겠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귀의(歸依)하고 있는 종교체험과 교의(敎義)와 眞理에 절대적 신뢰(信賴)
를 갖고 있다.
종교란 Paul Tillich 가 언급한 것처럼 인간들이 일상성을 넘어선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며 인간의
삶과 의미를 정향(定向)하는 엄청난 힘을 주기 때문에 자기 종교에 대한 신앙을 포기할 수 없고 상대화시킬 수
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타종교는 모두 비진 리이며 미신이며 우상이라고 비판할 수 없다고 하겠다. 더구나 ”나
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 14:6))는 말씀을 믿어 온 기독교인들에게는, 오늘
현대사 회의 종교 다원주의의 상황에서는 시급한 신학적 해석이 요구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 Karl Rahner가 언급하는 바는 ”교회의 제 3 시대“ 즉 지금 현대사회의 종교 다원주의와 크리스트교의
만남은”Kairos"이며, 교회의 제 3 단계(the third stage of the church)시대에 실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Kairos
는 위기의식(危機意識),형태 변화,은총(恩寵)의 새로운 체험을 수반하는 “때의 의식(意識)”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기독교 교회사의 제 1 시대는 유대교의 형식(The Judaic form)에서 부터 주후 1 세기 신약 시대와, 교회
의 제 2 세기는 복음이 Greek 문화와 로마 문화 토양 속에 육화하여 오늘날까지 서구 문명권의 형태를 가지 고
온 시대다. 그리고 이 제 3 시대는, 세계 교회로서의 기독교 시대인, 동양문화 및 종교와 만나면서 형태 변화되
면서 새롭게 자신을 해석하고 거듭나는 기독교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 부정할 수 없는 종교적 다원주의는 인류
문화사의 시대적 흐름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서 Paul Tillich 에 依하면 종교란 가장 포괄적이고도 기본
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궁극저(窮極的)인 관심(關心)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는 하느님이란 인간의 유한성 속에서 포함된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때문에 하느님이란 인
간이 궁극적으로 관심 하는 대상에 대한 이름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제 문제인 종교문화역사(宗敎文化歷史)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준 석학자인 Ernst Troeltsch와 Arnold Toynbee 그리고 Carl Gustav Jung 의견 을 서술한 신
학자(神學者)인 Paul F.Knitter의 유명한 NO OTHER NAME ?(Act 4:2)란 저서에서 언급되어진 그의 사상을 중심
으로, 본인의 견해를 진술하고자 한다.
2) 기독교와 타종교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1) Ernst Troeltch(1863-1923)에 의하면 모든 역사적 종교들은 상대적이다. 라고 언급했다. 이는 철저한 역사의
식을 가지고 기독교가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를 상실함이 없이 역사 과정 안에서 형성된 여러 가지 전승의 형식
과 틀을 포기하고 새로운 형태 변화를 통하여 “때의 징조”에 창조적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신학 사상
은 神의 내재적 초월(Immanent Transcendence)사상이다. 하느님은 절대적이지만, 절대자 하느님의 역사적 자
기 계시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신체험(神體驗)으로서의 모든 종교는 구체성, 상대성, 다양성, 제약성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는 것은 기독교를 포함한 세계 모든 종교의 상대성을 선언한다고 하겠다. 기독교가 고백하
는 하느님은 절대적이지만 이 하느님을 파악 고백한 역사적 종교 공동체로서의 교회 공동체인 기독교는 언제나
역사적 상대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절대자를 증언하고 체험하지만 어느 종교도 그 자체로
서 절대적이지 못하다. 그 이유로서는 모든 종교와 인간의 모든 삶의 구현 과정이 역사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역사로서만 실현되기 때문에 종말론적 완전한 실현은 역산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E.Troeltch의 초기 사상에
서는 기독교는 월등한 윤리성과 영적 위대성의 심도에 있어서 타종교보다, 월등하게 우월하므로 기독교는 비록
절대 종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세게 종교들 속에서 최고점에 도달한 윤리성, 영적 종교라고 자부했으나, 이러
한 기독교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은 엄밀한 역사 상대주의와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는 만년에 세계 종교
의 수렴 형태로서의 기독교 우월론이 서구 문화 우월론의 표현 이였으며 그것은 과오 였음을 인정 고백하였다.
인격주의 종교로서 기독교의 특징이, 존재론적 특성이 강한 불교보다 영성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
그리고 윤리성의 심도에 있어서 우월하다는 생각은 서구 문화 속에서 성장한 자신의 문화 제국주의의 발상 이
였음을 반성했다. 기독교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그 종교적 영성의 심도와 윤리성에 있어서 타종교
보다 우월하며 모든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라고 자부하듯이, 불교도는 불교가, 이슬람교도는 이슬람교가, 유대
교인은 유대교가, 바로 그렇다고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그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언제나 절대적인 신념 체계이다. 이것은 Tillich의 모
든 종교의“궁극적관심(窮極的關心)“이므로, 모든 종교는 무조건적, 궁극적 절대성의 열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
러므로 잘못될 경우 배타적 열광 주의나 광신 주의로 몰고 갈 위험성이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한분 이시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고 만물 위에 계시기 때
문이다.(에베 4:6)
2) 역사 학자인 Arnold Toynbee(1989-1975)는 모든 종교는 본질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깊이에 들어
가면 같은 목적을 지향한다. 오로지 궁극적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다를 뿐이다. 라고 언급했다. 그의 저작 역사
연구에서 종교란 인간들의 삶의 심장이며, 모든 문명 발생의 생명의 씨앗이며, 문명사회의 흥망성쇠가 그 사
회 종교의 힘과 영성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Toynbee가 말하는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궁극적 요소는 “어
떤 영성적인 것의 현존”(the Spritual presence)인데, 이 공통 요소는, 소승 불교,대승불교,힌두교,유대교,이슬람
교,기독교,그리고 조르아스터교의 깊이에서 공통적으로 추출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Toynbee 에 의
하면 모든 종교의 본질이며, 동시에 그 공통 요소는 궁극적 실재 자의 현존 체험을 통한 인간의 영성적 성숙이
목표라고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체계들인, 상징, 교리 신학, 의식, 예전, 도덕적 덕목은 상대적인 것이며, 비본질적이라고 보
았다. 절대자의 체험은 추상적, 보편적 원리와 진리로서 체험 인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적 실체는 구체적
이고,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양식에 성육화되는 길을 통해서만 인지 체험된다. 무시간적(無時間的) 비역사적,
초문화적, 절대자 현존 체험이란 있을 수 없다. 구원(救援)과 속량은 구체적, 역사성에 依하여 화육 해야만 한
다. 문제는 역사적 종교가 그 본질을 나타내려고 하거나 형성시킨 비본질적인 형식(Form)들을 절대화하는 것이
비판되어야 할 문제라고 한다.Toynbee는 기독교의 중심교리중, 하나인, 원죄(原罪) 사상의 핵심을, 이기적 자
기 중심 성과 타자에 대한 지배욕과 오만이라고 본다. 개인만이 아니라, 역사적 종교도 “자기중심적”을 탈피하
지 못할 때 罪性에 빠진다고 한다. 모든 종교 안에는 궁극적 실재 자의 영적 현존 체험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종교의 핵심적 본질이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교의, 의식, 신학, 상징, 가치 체계는 이차적이며, 비본질적이라고
하는 Toynbee의 종교관은, 현재 종교 다원주의 문화적 토양을 형성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이
러한 종교 보편주의는 종교 다원주의로 하여금, 기독교 신학권 안에서 이제까지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신학
(Theocentric Christology)을 신(神)중심주의 신학으로 전향시키는 촉진제가 된 것이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는
모든 종교보다 위대하기 때문에 어떤 종교일지라도 하느님 체험을 독점적으로 할 수 없다. 궁극적 실재의 계시
방식이나, 인간의 체험, 접근 관계 양식이 유형적으로 다양하고 다룰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종교관의 다양성
과 차이 성은 서로 갈등 대립 관계에서 볼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에서 관계 정립을 해야 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시각에서 종교 보편 주의자들의 역사적 특수 종교에, 비판을 하는 것은 옳다. 허지만 예수그리스도 안에
서, 구체적인 인격 안에서 체험하고 고백한 계시의 궁극성과 독특한 특성이 소홀하게 생각할 수 있어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3) 심리학자인 Carl gustav Jung(1875-1961)은 인간의 깊이에 모든 종교의 원형이 있다고 한다. 즉 인간의 마
음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정신(Psyche)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 원형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Freud 의 종교관과
無意識(Unconscious)의 解釋을 비판했다. 즉 Freud에 依한 종교 발생 원인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유아기의 환
상과 공포감의 투사(Projection)로서 외디프스 콤플렉스의 표현이라고 했다. 종교란 일종의 고도로 승화된 정신
질환이다. 왜냐하면 종교인들이 궁극적(窮極的) 실재에게 부여하고 귀의하고자 하는 전지전능, 거룩한 聖,완
전무결, 도덕적 완덕 등,神의 속성은 인간의 심리적 투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Jung은 무의식적 정신
적 실재(Pychic Reality)를 강조한다.Freud 에 있어서 무의식은의식(意識)에 의한 억압의 결과론적 현상이지만
Jung에 있어서는 의식보다 더 앞서며, 근원적인 정신적 실재로서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Jung 의 무의식
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인 특성과는 관계없이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발견되는 보편적 요소로서 Jung은 집단적 무
의식(Collective Unconscious)으로 표현한다. 이 집단적 무의식은 인간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근원적 원형
(Archetype)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한다.
이 Archetype은 문화와 인종에 차이 없이 인간들의 종교적 원천이며, 신화를 산출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그럼
으로 Jung의 집단 의식론과 원형론은 모든 세계 고등 종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어 종교 다원주의를 포용적
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이것을 기독교 신앙의 신학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하느님의 形象(Imago Dei)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원형들은 세계 모든 종교들에게 공통적인 것으로서, 다양한 문화, 및 역사적 Context 범주에서, 즉 각기 다른 토
양에서 자라난 다른 종교들의 상징과 신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원형은 무의식 속에 있는 소리 없는 말씀이라면,
이 말씀을 듣게 하고 보게 하는 Media는 각 종교들의 다양한 상징들이며, 예배 의식이며, 교의들이다. 이 매개
들은 문화, 역사 토양에 따라 다양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들리는 원음과 기본 Code는 같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疎外 분열된 인간의 정신을, 통일, 화해, 성숙, 치유시키는 힘은, 창조적 힘을 지닌 원형에 있는 것이지, 원형을
매개하는 상징이나 신화, 혹은 종교의식, 그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원형을 매개하는 원형을 전달하는 매체나 관념 체계로서의 상징, 교의, 의식, 율법을 절대화할 때, 종교의 우
상화가 된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억압으로, 역기능 한다. 그러므로 현대 종교의 위기는 모든 것이 외형화 제
도 기구화,형식화되고,이론화,논리화되어서,무의식의 원형과 접촉을 상실해 가는데 있다고 하겠다. 그 결과 주
지주의, 합리주의, 심리적 감상주의, 율법주의, 기능주의와 가치관이 판을 치게 되고, 한 전문 기능의 가치로 전
락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Jung의 심성론에 의하면, 각기 다른 종교들이 서로의 다름의 깊이를 인식하
고, 반대의 일치성에서 상호 보완적인 이웃을 체득함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 시대
에 있어서의 화해는 독선적 자기 주장(Individualism)을 버리고, 자기 종교의 고유한 특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
내 보이면서, 서로가 서로를 조명하면서, 함께 성숙해 가는 것은 혼합주의(Syncretism)가 아니다. 각종교의 고
유성은(Uniqueness)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형성된 음식 맛과 같다고 하겠다.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서의 기독교가 세계 고등 종교에 대응한 기독교의 반응을 살펴 볼 때 크게 3 개
의 Group으로 구분하여 이들의 신학적인 입장을 Paul Knitter가 서술한 입장에서 다시 접근하여 문제를 제시하
고자 한다. 이것은 1)보수적 배타주의(Exclusivism) 2)급진적 포용의(Inclusivism) 3)神 중심주의
(Theocentricism)로 구분되어 주장됨을 을 아래에서 설명하겠다.
1) 보수적 배타주의(Exclusivism)의 입장
보수적 배타주의 입장에서는 오직, 참 종교는 하나라는 것이다. 이들의 기본 입장은 성서 영감론과 무오설에
의한 성서의 절대 권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구주로서의 인격적인 고백과 구원 체험에 대한 강조, 현대 신학
연구의 비판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대속 신앙의 구원관, 그리고 타종교 일체를 부정하고 기독교의 유일
성을 강조하고 있다.1974 년 스위스 로잔느에서 모인 “세계 복음회 국제 대회”(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sim)이들은 보수적 복음주의 기독교 우파 입장을 대변하고, 에큐메니칼 써어클들이 취지 하는 종
교적 보편주의 노선과 타종교 또는 다른 Ideologies 와의 대화를 통한, 개방성으로 인한 종교 혼합주의
(Syncretism)의 위험에 대한 우려와 경고로 비판되었다. 이러한 극우파 복음주의 신학 노선의 장점은 복음에 대
한 확신과 선교 열정, 성서에 대한 신뢰와 복종, 전통에 대한 충성심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구원 주로서의 고
백이 있는 반면에, 약점은 성서 영감 설과 무오성의 교리적 경직성은 현대 사회의 모든 학문 발달과 사회변혁에
창조적 적용을 못하고, 개혁보다는 자기 방어적이며, 타종교 일체를, 적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죄악시하고, 복
음 화의 이름 아래 타종교에 대한 정복론적인 생각에 빠져서, 복음 화에 대한 순수 열정과 사랑을 종교적 열광
주의와 혼동한다. 그러므로 타종교에 대한 이해나 연구와 존경이 없이 피상적 이해로, 타종교를 정죄하게 되는
위험이 따르게 된다. 한편 복음주의 좌파를 대표하는 Karl Barth는, 오직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의 계시에 依해서
만 가능하다고 했고, 그의 Church Dogmatic,이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종교는 불 신앙이다. 종교란 한 위대한 관심이지만, 하느님이 없는 불 신앙이라고 말해야 한다. 계시의 관점에
서 보면 종교란 인간의 한 시도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하느님이 계시 안에서 행동하시고, 행하시려는 바
를, 미리 앞질러 예측하려는 인간의 시도다. 계시 가운데 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계시되는 신적 실재를 사람이
임의적으로, 또 자신들이 좋아하는 바대로 구성한 신 관념으로 대치해 버리고 만다.
Barth에 依하면 “계시”와 종교는 양립할 수 없으며 대립된다. 칼 발르트가 모든 종교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 의로
워지려 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은총을 외면하는 불 신앙과 오만의 시도라고 할 때, 종교로서의 기
독교 자체도 동일한 카테고리에 들어 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과 믿음으로서만 구원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참 종교로서의 가능성을 기독교에서만 본다. 오직 기독교 안에 하느님의 “계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면 기독교외에 다른 종교, 아미타 불교의 정토신앙(Amita Buddhism)힌두교의 박티종파(Bhakti forms
of Hinduism)에서의 은총과 믿음에 의한, 구원 신앙의 종교 형태는 어떻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역사와 유대교
공동체에서의 하느님의 계시와 은총은 어떻게 할것인가다. 여기에 Richard Niebuhr는 철저한 유일 신앙
(Radical Monotheism)은 언제나 유대 민족주의, 기독교 종파 주의로, 그리고 서구 문명의 우월권에 의하여 오염
되어 왔다고 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을 직접 만난다고, 고백하는 우
리의 자기 신앙의 고백과, 기독교가 하느님을 독점하려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하느님은 만 군의 주 여호와
하느님이기 때문이시다. 하느님은 모든 민족과 종교와 문화를 넘어서 계시며 모든 종교 문화를 똑같이 심판하
시고 똑 같이 속량하시고 똑 같이 구원하신다. 고 할 때, Barth의 한계를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서구신학의 한
계라고 하겠다.
2) 포용주의(Inclusiviism)의 입장
2)포용주의(Inclusivism)는 진보적 자유주의 개신교와 카톨릭 Group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겠다. 먼저 개신교
자유주의자 들의 신학 사상을 검토하여 보면, 창조적 하느님은 자연과 역사의 主로서 그의 영광과 주권과 구원
경륜의 의지의 뜻을 항상 계시해 오셨다. 인간은 자연과 역사와 인간성 속에서 은총의 현존, 영적인 것의 현존
의 임재를 경험한다. 세계 종교는 구원의 힘이 있으며 Barth 가 주장하듯이 종교는 인간의 불 신앙, 오만이 아니
다. 모든 세계의 종교는 계시의 응답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가 체험한 모든 계시의 질적 내용을 가
장 의미 충만하게, 다양한 궁극적 실재의 힘과 의미를 가장 구체적인 전인적 자기 존재를 통해서, 그 안에서 생
명의 몸 전체로서 자신을 비워, 그가 하느님이라고 불렀고 그분을 온전히 계시하시고, 당신을 신격화시키지 않
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룸으로서 모든 계시의 성취 자로서, 계시의 규범을 보여 주었고,모든 종교는 궁극적 실
재의 계시 체험을 동반하고 있지만, 구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보는 입장이라고 하겠다.1961 년
세계교회 협회(WCC)는 뉴델리 회의에서 타종교간의 대화 태도에 있어서 큰 전환을 이루었다.
이것은 1968 년 Tambara Missionary Conference 이후, 개신교의 선교 신학적 기초를 이끌어 오던 Karl Barth
의 복음주의적 배타주의 태도(Evangelical Exclusive Attitude)가 하느님의 선교 신학과 우주적 기독론등의 신학
적 토대를 포용주의 입장으로 방향 전환을 하였다.1971 년 세계 기독교 협의회(WCC)에서는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 및 다른 이데올로기와의 대화(Dialogue with men of other Faith &Ideologies)를 공식 승인했고, 그 신학적
입장을 표현했다. 이 내용은 카톨릭 입장과 차이는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진리를 함축한 하느님의
세계 경륜 도구로서의 모든 종교들이 수렴, 완성, 성취된다는 입장으로 바뀐 계기가 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진보적 개신 교회들이 보수적 복음주의를 버리고, 포용주의로 방향 전환 되었다고 하겠다.1975년
나이로비에서 모인 WCC 에서는 하나의 공동체의 모색, 다양한 신앙, 문화 이념을 지닌, 사람들과의 공동 연구
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WCC 의 보수적 입장의 교회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약화시키고, 선교
전선의 사명감을 둔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강한 반발로 인하여 WCC는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지닌, 여러 교파들
의 교회 협의 체의 입장으로서는 카톨릭의 제 2 바티칸 공의 회처럼 통일된 문서를 작성하지 못하였으나,WCC
의 일부 신학자들은 오늘날 현실로서 교회가 직면한, 종교 다원주의 현실과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
는 모든 인간과 문화 속에 역사 하신다 는 우주적 기독론을 확산하여, 하느님은 교회를 뒤따라오시는 분이 아니
라, 기독교 교회가 선교사에 의하여 전파되기 이전에도, 하느님은 세계역사 한복판에서 우주적 구원과 인류 전
체 구원을 위해, 구원 경륜을 펼치고 계시다는 하느님 선교 신학의 입장에서, 그 동안의 기독교 선교 역사가 보
여준 헌신적이고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복음 전파 운동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스스로를 냉철하게 겸손
하게 반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경륜 가운데 돌보시고 키워 오신, 비서구적 종교 문화와 값진 유산들을 악마시 하고, 죄악시
하면서 ,뜨거운 열광적 광신 주의가 서구문화 제국주의 열풍과 야합하여 타민족 문화와 타종교간에 대한 공격
적 정복 적인 태도가 아니 였는가. 또 익명적 크리스천(Annoymouse Christian)이나 알려지지 않은 기독론(the
Unknowen Christ)등등이, 묵시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
고 반성을 하게 되었고 1975 년 종교간의 대화 지침서(Guidelines on Dialogue with people of Living Faith and
Ideolgie)를 Geneva 에서 발행되었다.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대화의 입장과 상호 이해의 관계성은 많이 발전하
였으나, 적극적인 포용론의 입장을 넘어서지 못했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내포한 독특성
(Uniqueness)과 규범성(Normativity)을 견지한 입장이다. 한편 1965 년 제 2 바티칸 공의 회에서는 비기독교적
종교들과 교회와의 관계성에 관한 선언 (Declaration on the relationship cf the church to non-Christian
Relations)은 타종교와의 관계를 정립하는데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이 문서의 기본적 내용은 1) 인류는 더 긴밀한 민족간의 관계가 긴밀해지며 교회는 타종교를 보다 긴밀한 관
계성에서 접촉하게 되는바, 교회는 본 선언문에서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인류 상호 친교에로 이끌어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숙고해야 한다. 교회의 이 과제를 다루는 정신은 인간 가운데에서 인류의 일치와 사랑
을 증진시켜야 한다.2)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온 땅위에 살 계하시고 그들의 시대를 정해
주시고 영토의 한계를 그어주신 (행 17-26)하느님의 섭리와 선하심과 구원의 경륜은 모든 사람에게 닿아 있다
(롬 :6-7, 행 14:17,잠 98:1,딤전 2:4) 모든 족속이 하느님의 영광의 한 빛 안에 거할 때까지(계 21:23)모든 족
속과 나라들은 오직 하나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하느님을 찾고 모시려 한다. 다양한 종교들 속에서 인간은 인간
존재의 궁극적 문제를 질문한다.3) 힌두교와 불교의 심오한 종교철학, 명상, 자비함, 삼학팔정도(三學八正道)
와 연 기설, 풍요로운 종교 예의와 신화와 상징들, 그 모든 것들 속에, 생명과 자연과 역사를 통한 신비하신 궁
극적 실재 자의 현존을 인지했음을 확인한다.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종교들 안에 있는 참되고 거룩한 것들을 어
느것 하나라도 배척하지 않는다. 교회는 불교와 힌두교의 교리와 덕행의 가르침, 그들의 행위와 삶의 길이 교회
의 그것들과 똑같지 않아도 그 모든 것도, 모든 사랑의 빛이신 진리의 밝음이 있기 때문이다.4) 그러나 기독교
교회는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요14:6)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또한 끊임없이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은 종교적 생명의 온전함을 찾게 될 것이며 그분 안에서 하느님은 만물을 자기와 화
해 시키셨다.(고후 5:18-19)그리스도 교인들은 그들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과 삶을 증언하면서도 다른 종교 안
에서 발견되는 선한 영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 사회 문화적 가치들을 인정해야 하며, 그들을 격려해야 한다.5)
기독교 교회는 자비롭고 전능하며 자존하시는 한분 하느님을 믿는 이슬람교도들을 존경으로 대한다. 인격적
창조주이신 신관, 죽은 자의 부활 신앙과 심판 신앙, 기도와 이웃 선행과 단식을 중심한 이슬람교의 경건한
신앙과, 전능하신 하느님의 경륜에 복종하려는 그들의 신심, 예수를 예언자로 존경하며, 아브라함과 마리아를
기억한다. 그리스도 인과 이슬람교도 사이의 경멸과 적대감을 버리고, 상호 이해와 인류의 사회 평화, 선한 도
덕적 사업, 그리고 평화와 자유를 위해 함께 노력을 해야 한다.6)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믿음의 족장들과
모세와 예언자들의 믿음과 그 믿음의 유산, 하느님의 이스라엘 선택을 통한 특별하신 경륜과 계약 등을 공유하
는 특별한 관계로서 뗄 수 없는 특별한 관계다. 비록 유대교 당국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
주었지만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고난과 죽음에로 내 몰아간 큰 죄를 무분별하게 모든 유대인들에게 전가시켜
서는 안된다. 교회는 하느님의 새백성 이지만 유대인들이 하느님에 의해 버림받았다 고나, 저주받았다고 말해
서는 안된다.
교회는 모든 형태의 反 셈족주의를 거절하며 유대인들과 함께 성서 연구와 신학 연구를 하는 것을 권면 한
다.7)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形象안에서 피조 되었으므로 만약 사람들 가운데 형제로서 대하기를 주저하는 사
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만민의 아버지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없고 인간의 신 관계는 보이는 형제 인관 관계를
통해 이어 지므로,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요일 4:8)
그러므로 교회는 인종과 피부색, 계급 신조의 차이를 들어 형제인 인간을 갈라서 대하며, 갈등 관계로 몰아 넣
는 모든 이론과 사상도 그리스도의 마음에 반대되는 것으로 단호히 거절된다. 따라서 베드로와 바울의 발자취
를 따르며 거룩한 공의 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대로 모
든 사람과 화목하여(롬 12:18)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기를(마 5:49)노력해야 될 것이다. 이와 같
은 공회의 선언문은 Karl Rahner의 신학적 영향하에 기초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Karl Rahner의 신학적 입장
을 요약하면, 그의 신학적 인간학의 기본 전제는 인간은 하느님을 지향하도록, 그의 본성과 자연 속에, 하느님
의 형상으로서 낙인찍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의 현존과 신성의 주권, 지배 영역으로부터 제외된 자연만
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은총의 실제가 은총의 능력과 영광이 신의 이름을 부르든, 안
부르든, 모든 존재 속에 침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를 넘어, 우주적으로 역사 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계시와 은총의 실재성은 기독교가
전파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모든 인류의 마음과 역사와 자연 속에 현존하는 궁극적 신비자의 구원 경륜과
관계에서 적극적 의미와 구원을 얻음에 유효한 중보적 매체로서 그 효용성, 정당성, 타당성을 갖는다는 신학적
주장은 세계 고등 종교들에 있어서는 타당한 것이지만,2 천 여년 동안 기독교 교회 박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
해 온 카톨릭 교회로서는 혁명적인 신학적 전환이 였던 것이다. 허나, 문제는 Karl Rahner가 갈파한바 처럼, 오
늘날 교회는 현대의 다원주의의, 현상을 삶의 여러 지평에서 피할 수 없이 부딪치고 있는 현실에서 종교 다원주
의는 기독교가 대처하기에 가장 어려운 난제로 되어 있는데, 그 理由로서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하느님의 계시
종교로 주장해 왔고, 다른 종교를 배척해 왔기 때문이다.Karl Rahner의 신학은 익명적 크리스천 (the
Anonymous Christian)이라는 이론을 기초로 하여, 카톨릭의 오랜 전통을 통해 흘러오는 자연과 초자연 이론, 일
반 계시와 특수 계시, 교회의 구원론적 신비체 이론, 성례전 이론 등과 접촉돼 면서 타종교들과의 대화의 태도
로서 포용 주의를 신학적으로 정립하였다. 이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요약하면, 절대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주장
은 인간적인 주장이나, 종교적 신학적, 확신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을 향해 행위 하신 그의 자
유로우신 자기 계시에 기초하여, 오직 하나의 역사, 하나의 절대 종교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역사적 종교로서 기독교의 출현 이전이나, 이후에 있는 모든 세계 종교에도, 또한 하느님에 관한 자연
지식이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온전한 은총에 이전에도, 그리스도로 인한 초자연
적 요소를 함축한다. 때문에 기독교는 타종교의 신앙인 들을 단순한 비기독교 인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명적 크리스천( an Anonymous Christian)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형을 만난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교도들은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를 접하지 못한 자들로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라 하겠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선교에 의하여 영향받기 이전에 이미, 그들에게 ,참다운 의미에서 계시가 주어 졌다고 하겠다.
인간은 신비하고 신묘한 궁극적인 하느님의 靈,곧 인간을 무한에로 부르시는 은총을 받고 있다.‘복음 선포“란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버려졌던 자들을 그리스 도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고, 익명의 그리스
도인들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은총과 구원의 실재를 신앙하게 되는, 고백적 그리스도 인의 상태에로 바꾸는 것
이라 하겠다. 익명의 그리스챤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 교회와 복음 안에서 보다 명료하고, 보다 순수하고, 보
다 자기 성찰 적인 방도로서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 교회에로 받아 들여 진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회적 공동체로
존재하는 기독교 자체는 아직 갖추어져 있는 구원의 실체를 時空속에서 앞당겨 증언하는 은총의 공동체로, 현
존 할뿐, 하느님은 인간보다도, 교회보다도 위대하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포용적인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동
시에 확고한 신념으로 바울이 아테네에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면서도 예배하는 신을 알게 하겠습니다(행
17:23)라는 확신으로 타종교 인들을 만나러 나가야 할 것이다.Karl Rahner 의 이와 같은 신학적 입장은 기독론
과 교회론의 두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만인과 만물의 보편적 구원을 이루어 가는 구원의 구성적 원
인(the constitutive cause of a Universal Salvation)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교회를 그리스도 몸의 신비 체로서, 만
물이 종말적으로 그 안에서 구원을 성취할 ”전세계 구원의 성례전(the Scrament of Salvatioon for the entire
World)으로서 이해한다고 하겠다. 즉 교회는 만물 가운데서 모든 것을 충만으로서 아직 그 신비가 온전히 드러
나지 않는, 전 역사 과정을 통해 그 신비한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 나가는 하느님 나라의 원형(a
Prototype of kingdom of God)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Karl Rahner의 포용주의는 그리스도가 참된 보편교회안에 수렴 성취된다는 입장으로 보아지게 된다고
하겠다. 허지만 이와 같은 K.Rahner의 신학을 같은 카톨릭 신학자인 Hans Kung에 의하여 비판되고 있다. 익명
적 그리스챤의 신학적 이론은 가장 최근에 신학적 조립품(Theological Fabrication)으로서 선한 뜻을 지닌 모든
인류를 카톨릭교회의 뒷문으로 몰아 넣으려는 의도적인 신학적 조림 품으로 혹평하면서 이러한 신학적 조립품
을 가지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던 카톨릭교회의 무오교회(Imfalliable Formula)를 구원해 보려는 자기
합리화의 주장이라고 비판하면서 경험상으로 볼 때 신앙이 깊은 힌두교 도나 불교들 중에 기독교 교회로 전향
하려는 사람은 없고 오이려 이들은 신실한 힌두교 도나 불교도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또한 타종교와 대등한 관
계에서 볼 때 Karl Rahner의 익명적 크리스챤은 그리스도 교인들과 신학자들의 주제넘은 오만함과 공격적 정복
론의 선교 심리를 반영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참다운 종교간의 대화의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입장을 바꾸어서 불교인들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익명적 불교인들이며, 궁극적으로 모든 기독
교회는 불교의 승단에 수렴 통일 될 것이라고 한다면, 되겠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
가다. 교회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Karl Rahner의 우주적 보편 교회로서의 지나친 강조는 구체적인 문화, 사회적
상황 속에 육의 몸을 입고 있는 성육적 구체교회를 추상적 보편 교회로 증발시킬 위험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익
명적 크리스천은 당연히 버려야 할 사상이며, 카톨릭교회는 구원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해야할 일은 교회 중심
주의에서 벗어나서 하느님 중심주의(Theocenterism)에로 전환 또는 대치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카톨릭교회의 중심 주의가 하느님 중심 주의로 방향을 전환하더라도 한스 큉에 있어서까지, 기독교의
하느님론은 기독교를 떠나서 거론되기가 어렵다. 결국 카톨릭의 포용 주의가 개방할 수 잇는 신학적 입장도 예
수 그리스도의 규범성과 유일성(uniqueness)을 떠나서 기독교의 선교학이 존립할 의무를 상실하게 된다고 하겠
다.
종교다원주의(Pluralism)
3) 종교다원주의는 신비하신 중심자에 이르는 길은 여러개의 길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러한 과감한 입
장에서,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 신학과 교회중심 신학을 방향 전환하여 하느님 중심주다. 역의의 신학적 발상으
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다. 개신교의 대표적 학자는 장로교 목사 였든 John Hick 을 들 수 있겠다.
그는 God has many names,라는 저서에서, 오늘날 세계 신학은 신학적인 발상법에 있어서 “코페르니 쿠스적
혁명“을 거치고 있다고 보며, 그 혁명은 옳다는 주장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회
전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중세기적 우주관에 혁명을 가져 왔다. 기독교를 선두로 해서, 모든 종교들은 자기종교
를 우주의 중심 별로 생각하고 다른 항성들은 그 주위를 도는 별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톨레미적
(Ptolemitics)천동설 적인 발상은 기독교 신학에서 극심하여, 일체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나 교회 중심주의가 그
런 시대적 제약에서 나온 신학 발상법이라고 본다.John Hick 의 주장은 종교다원화 시대에서 모든 종교는 궁극
적 실 재자, 영원하신 하느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파악하거나, 또는 존재론적인 색깔로 파악하든, 다양한 접근에
의 길(Path)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이름중 한가지 양태라고 보고, 신 중심주의(theocenterism)에로 대 전환 할
것을 촉구한다.
이와 같은 다원주의(Pluralism)는 “하느님은 여러 이름을 갖는다(God has many Names)는 저서의 제목에서
표현되고 있사적 문화적 배경과, 풍토와 기후와 다양한 삶에 따라, 궁극적 신비이신 하느님의 영적, 현존체험,
계시체험과 그에 수반되는 인간의 구원체험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에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이 종교에서 드러나는 인격주의적, 유신론적(Theistic)종교 유형으로, 하느님의 절대 인격과 주권에 대한 인
간의 인격적 영적 응답 관계가 그 관계 모델이 된다. 이와 다른 종교 유형은 힌두교, 불교, 들에서 내포되는 자
연 신비주의(Nature Cosmic-Mysticism)유형인데, 이것은 우주전체, 자연 그 자체, 존재 그 자체, 마음 그 자체
가, 바로 신적 실재(the Divine reality)의 드러남이라고 보는 존재론적 동일성의 원리에선 종교로서, 만민과 만물
은 이미 불성을 지니고 있고, 구원은 아집과 망상에서 벗어난 ”깨달음“이 그 관건이다. 이와 같이 종교의 유형
적 특징은 절대자를 체험하는 계시체험의 양식의 차이로서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차이에 따라, 다양한 양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죤 힠의 기독론의 핵심은 역사적 그리스도의 생애와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하느님
의 계시가 드러났다고 하는 것은 옳으나, 오직 나사렛 예수의 Agape 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온전하신 계시가
드러났고, 나사렛 예수의 행위와 존재 안에서만, 하느님의 모든 것이(the Whole of God)남김 없이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계시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카톨릭의 사제로서 동서 종교의 만남에 기여하고 있는 Panikker Raimundo 의 종교 다원주의는 인도사
상의 깊은 전통 多(Many)와 하나, 즉 一(One)의 힌두사상 변증법적 이론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
다....
산봉우리란 어떤 의미에서는, 산정에 이르는 여러 비탈길들로서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궁극적 신비의 실재
가 그 이름들과 별도로 그 이름들밖에 따로 실재한다는 의미에서 많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신비
로운 궁극적 실재가 곧 많은 이름들이며 각각의 이름은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의 이름에 대한 호칭 문제 보다,“이름”이 상징하고 있는 신의 실재성은 다신(Many God)은 일신(One God)의
분화된 모습이며,다신(多神)은 일신(一神)의 계시양태라고 그의 저서 The Unknown christ of Hinduism이란 저서
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은 같은 카톨릭사제인 Karl Rahner 입장처럼,나사렜 예수 그리스도 모든 종
교의 계시 체험을 판단하는 궁극적 계시 체험과 구원 체험을 경험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규범 성을 견
지하려고 하지만,Panikker는 크리스트교 안 의 우상 형태의 역사주의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예수의 구원의 능력
은 그의 역사적 구체성과 행위에서만 발견되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가 구원을 할 수 있는 중요
한 이유는 그가 모든 역사적 형태를 넘어서 있는 실재, 즉 그리스도를 구체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 혹은 사건들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며,
그는 보편적 예수그리스도가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는 크리스트교 주장을 약화시키려는 행위를 경고한다.
보편적 그리스도, 범 우주적인 신-인 양성론적 사실은 일정한 구체적 역사적 형태를 통해서만, 실제적일 수 가
있다. 파니카 자신도 예수는 그리스도의 궁극적 형태라는 점을 인식한다. 그 主되심이 무수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이러한 그리스도는 내게 있어서 나사렛 예수와 불가분적으로 연결되면서 궁극적 형태를 갖추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격적 고백을 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의 동일성을 전제하
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고 한다.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으나, 그렇다고 그리스도는 예수라
고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최고의 이름(Supper Names)항상 모든 이름 위의 이름
(빌:2-9)인 구체적인 역사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종교는 일정한 방식으로 그리스도
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수긍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름 위의 이름,Rama,Krishlna,Isvara,Pucha,Tathagutha등의 많은 역사적 이름으로 나타 날수 있다고 한
다. 이러한 主(그리스도)는 모든 가능한 대리인들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그의 유일회적인 主되심을 실
현하면서 세계 종교를 포용한다고 하겠다. 한편 예수는 범 우주적인 神-人,양성론적 원리의 많은 이름 가운데
하나로서, 이 원리는 종교성의 참된 형태들이 존재하는 만큼의 많은 이름들을 구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동
시에 나사렛 예수 안에서의 유일회적인 현현을 발견한다고 한다. 이상에서 복음주의적 보수신학의 배타주의와
카톨릭과 진보적 개신교의 포용주의와 하느님 중심주의의로 혁신을 주장하는 다원주의 입장들의 신학적 고찰
을 비판하면서 Paul Knitter는 제 3의 해방신학의 실천의 해석학(Hermeneutics of Praxles)으로서,새로운 방법론
으로 성서가 증거하고 복음주의적 보수신학이 강조하는, 다섰가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타적 신앙고백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1)행 4:12, (2)요 14:6, (3)딤전 2:6, (4)고전 15:21-22, (5)히
9:12).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참 사람이 였다는 것을 신약 성서가 증언하므로 신앙적 발상의
기점을, 하느님 중심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고 본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님의 전 관심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그 구현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
뤄지듯 이 땅에서 이뤄지길 소망했다(누 11:20;17:20;막 1:15)신약성서의 전체적인 신앙고백은 그리스도 중심
에 있음은 당연하지만 성서 기자들은 예수의 神子性이 하느님을 곧 바로 대신하는 것으로 서술하지 않는다고
본다.(요 1:1;20:28;히 1:8-9;고전 3:23;15:28;마 24:36)예수 님은 자신이 곧 하느님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으
며, 아들로서 아버지 하느님께 끝까지 순종했다고 보겠다. 그러므로 위의 다섰가지 성구들은 유일하고,규범적
이고,결정적이며,궁극적인 것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지만, 이와 같은 신앙의 언어들 자체가 실천의 해석학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우리가 구원받을 이름은 ....,하늘아래 이
이름밖에 없고 (행 4:12)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며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인데, 곧 사람이신 그
리스도 예수입니다(답전 2:6)내가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자가 없다(요
14:6)죽음이 한사람을 통해서 들어 왔으니, 죽은 자들의 부활도 한사람을 통해서 들어 왔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고전 15:21-22)네자신의 피로서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 셨습니다(히 9:12)란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구원의
길이 유일회적이며 궁극적인 신앙고백들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하시는 중심(엡 1:10)이심을 증언
하게 되고, 진실로 그 참사람은 하느님의 독생자(요 1:14)라고 진술된 초대교회의 기독론적인 신앙고백들은 초
대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사회 경제적 ,정치적 배경과 종교, 진화론적 세계관에 고려하여 해석을 해야
된다고 하겠다.
1)이러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고백하던 배경에는 “진리란 하나이며 확실하며 불변하고 규범적이라
고 생각하던 진리 관이 지배하던 시대 였고, 2) 당시의 역사의식은 유대 종말론적 묵시 문학적 의식이 지배하던
역사의식의 긴장상태,Kairos의식이 지배적인 시대, 역사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종말론적인 상황이 였다.
3) 초대 공동체 상황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조명해 볼 때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우리에게 전하는 절대적이고 배
타적인 기독론적 용어는 예수의 존재론적 본성을 변증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위협에 둘러 쌓인 신앙공동체의
자기 정체성과 결속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절박한 상황에서 생명을 내건, 즉 공동체 안의 동일성과 그 성원의 자
격을 규정하는 것이 였다.Krister Stendall 이 강조한 것처럼, 종교적 언어, 즉 사랑의 언어, 애무의 언어라고 하겠
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유일한 분으로서 진술하면서 형이상학적 원리를 제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진
술로써 이 공동체에 속하게 하려 했던, 인격적 관계와 헌신을 불러일으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럼으로 배타주
의적 그리스도론의 언어는 마치 산중에 사는 ”지어미“가 세상에 훌륭한 사람이 많지만, 자기의 남편을 제일로
사랑하고 모시는 궁극적 관심으로 고백한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유일하
신 분, 진리 생명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고백은, 타종교 안에 있는 진리와 구원의 힘을 무시, 부
정 핍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Paul Knitter는 오늘날 그리스도를 규범적이고 궁극적인
것으로 보는 전통적 이해의 철저한 수정에 대한 다른 분명한 요청은, 해방신학의 관점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
다. 해방신학자들은 실천(Praxis)을 모든 신학적 방법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주장한다. 이들의 해석학적 접근 방
법의 이해는 우리가 해방의 실질적인 실천 속에서 복음을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우리의 세계
를 보다 낫게 만들려는 시도에 구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즉 성서와 전통의 의미대로 행동하는 일 없이는 이것
을 비판하고, 혹은 입증하는 일은 시작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사회정의에 공헌하지 못할 때, 신에 관해
서려 실천은 진리를 일으키다 스스로 교정하는 기초라고 한다. 이것은 오직 예수를 실제로 따름으로서만, 우리
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의 멨세지를 실천하고 사는 데에서만 우리는 실제로 그가 누구이며 그가 두었을 의도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Paul Knitter 는 오늘날 크리스트교 계시의 진리를 발견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실천 형태중 하나는 해방의 정치적 실천뿐만 아니라,타신앙과의 대화의 실천에도 있다는 것이다.신앙
이란 말은 인격적인 경험과 동시에 모든 참된 종교 배후의 불가해한 내용을 가르친다고 하겠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을 붙잡고 또한 붙잡히는 것의 직관적 접촙이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신
을 보다 큰 실재의 한 부분으로 느끼게 하는 그것이 인격적으로 느껴지거나, 또는 비인격적으로 느껴지던지 신
뢰의 행위 안에서 형성된다. 신앙의 행위는 수많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술되어 왔다.K. Rahner는 자신을 궁극
적 실재에 넘겨주는 행위로 제시한다. 그리고 Paul Tillich에 있어서 신앙은 존재에의 용기에 대한 심오한 인격적
경험으로서, 불교에 있어서의 신앙은 각(覺)즉 깨달음 속에서 자신을 압도하는, 새로운 존재 인식이며, 새로운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항상 우리가 알고 분명히 진술할 수 있는 것 이상, 즉 알려진
무지라는 것이다. 여기에 진리란 홀로 어느 진리도 불변할 수 없다는 것을 반성한다. 진리는 본질상 다른 진리
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다른 모든 진리를 패배시킴으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진리와
의 관계능력을 시험함으로써, 즉 그들을 가르치고, 또한 그들로부터 배우는 그리고 그들을 포괄하고, 또한 그들
에게 포괄되는 능력을 시험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성을 통 한 진리 양태는 각개 종교의
유일성을 허용한다는 것이며 각 종교의 특수한 신적 진리에 대한 파악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함유하는 진리
는 유일회적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유일회성은 전적인 인격적 위임을 요구할 때, 보편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고
절대적으로 긍정될 수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절대성은 다른 것들을 배타하거나 포괄하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종교의 진리가 나를 다른
종교에로 개방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것을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
면, 삼위일체의 그리스도 교리는 이슬람교의 신의 하느님에 대한 주장을 필요로 하며 불교의 비인격적인 공
(空)은, 신적인 “너‘에 대한 그리스도 경험을 필요로 하고, 궁극적인 것과 유한한 것 사이의 차별에 대한 크리스
트교 경험을 필요로 하고, 궁극적 인과 유한한 것 사이의 차별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브라만과 아트만 사
이의, 비 이원성에 대한 힌두교의 통찰을 필요로 하며, 유대-크리스트교 전통의 내용에 정위된 예언자적 실천
은 개인적 명상과 행위의 결과를 추구함이 없는 행위에 대한 동양의 강조를 필요로 한다. 종교들은 다양성 속에
있는 그들 자신에 대해서 증거 함으로서 그것들의 충분한 의미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성서적 증거
는 현재의 빛에서 즉 이러한 증거가 오늘날 우리를 인도하는 행동, 결정, 태도에서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
다. 여기에 여성 신학자인 R.Ruther 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참된 인간성은 예수 안에서만 성취되었다고 선포하
는 신학자들에게, 이러한 신념이 “모든 다른 사람들은 비 본래적 인간성을 가졌다는”태도를 불러일으키는데 얼
마나 많은 역사적 작용과 죄를 범하고 있는지 묻는다. 이러한 확신 있는 증거는 반 셈족주의라는 그리스도의 역
사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여성신학자인 죌레는 이러한 크리스트교의 기독론의 신념은 타종교들과, 문화, 그리고 타정치집
단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침투하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와 성 차별주의에 대한, 규범적인 신의 현존을 백
인 남자에게서 유일하게 최종적으로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론을 비판한다. 그럼으로 비 남성과 비 백
색은 신의 아들과의 그들의 근본적인 차이에 따라 비인간으로 간주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리스도론과, 타신앙 타 이데올로기에 대한 크리스트교의 대도에 있어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나가는 말
선교에 있어서 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복음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고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돌보
고, 전도하며, 봉사하는 일이다.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복음 선교와 정치적 개입 사이에서 중립이란 것
을 택하여 왔다. 이것은 정치적 보수주의 편에서 사회변화와 혁명의 편에서 거의 외면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압제자들의 편에 서있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초월적 복음들은 세계를 움직이는 구체적인 세
력들의 시야를 멀리 떠나서 추상적 영원을 위한, 즉 순수한 영적이란 이름으로 구원을 민중에게 제공한다. 교회
는 전적으로 선교 적이라면, 그것은 불의한 모든 것에 대한, 사회적 비판의 기관으로 활약하도록, 요청될 때 교
회는 비판적 종말론의 맥락에서, 천당에 관한 종말론적 희망을 사희에에 관한 혁명의 변화, 새 하늘과 땅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이라 하겠다. 이것은 교회가 일반 민중과는 상관없는 자체의 특권을 위해서 타협했으면서도
정치적 순결성을 주장하는 전통적 가설들을 폭로한다. 구원은 해방적 행동으로 정당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
이다. 그것은 육신과 영혼을 포함하는 총체적 인간에게 선포되는 것으로서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은 자유신학에
대한 복음주의 자들의 항거와 거부 속에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은 인간의 영적인 영원한 치유에 관심 하는 것이
지, 어제의 사회복음과 오늘날의 정치복음이 제공하는 단순한 일시적 진정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평화의 수립, 정의를 위한 투쟁 및 인간복지의 실천을 비방하기 위한 오직 영적 구원에 대한 성서적 주장으로
이끌어 간다. 이것은 평화의 수립, 정의를 위한 투쟁 및 인간복지의 실천을 비방하기 위한 오직 영적 구원에 대
한 성서적 주장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나 육을 떠난 영적 구원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역사적이고 사회
적이며, 육신 적이다. 구원의 현존에 대한 표준은 영적 황홀히 아니라, 육신적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많
은 기독자들은 영지주의에 의하여 비복음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하느님을 우상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기독교 선
교를 재고하기 위하여서, 해방신학의 타당성을 긍정 하고, 건설적인 비판 정신으로, 경고를 발하지 않는다면,
우리자신의 역사적 종말론적 시각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해방신학자들이 채
용하는 역사관은 지나치게 일차원적이다.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복음주의 적인 관점에서는 구원의 목표가 하느
님과 인간의 모순을 극복하는데 있다. 우리는 이것을 수직적 차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해방신학에 있어서 정치
적 Praxis 의 목표는 기존의 불 의한 사회체제와 이것에 뒤따를 체제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수평적 차원이라고 하겠다. 종말론적 역사 해석에 있어서 위의 두 목표는 정착된다. 이 종합적 구원은
타계 적이고 현세적이고, 미래 적이며, 육신 적이며, 정신적이며,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며, 종교적이고 세
속적이며,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이다. 인간은 자기의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받을 수 가 없다.
그러므로 해방은 구원을 위한 새로운 말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치 어떤 전적인 타율이 사회 영역을 휩쓰
는 것처럼 양심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만일 복음주의 신학이 지나치게 초월주의라면, 해방신학은 지나치
게 현실주의적인 내재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전자는 역사를 넘어서, 후자는 역산에 있는 것을 위해서 노
력하는 것으로 본다. 누군가가 해방신학이 성서를 정치적으로, 읽어 낸다고 비판을 가하면 그 사람 역시, 다른
하나의 정치적 선택에 근거하여 하나의 해석학적 선택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동일한 기호(Sign)를 읽되, 상
이한 내용을 읽어 감으로써, 자신의 독해를 고정화하려고 하는 태도라 하겠다. 그리고 신학의 상황성은 역사적
상황에서 규정되며, 이 문제 상황 극복이라는 실천적 관계를 가진다.
오늘날 한국에서의 민중 상황은 세계구조를 반영하는 민족 내부의, 사회, 정치, 경제 질서의 모순과 민족분단
의 상황에서 규정되어 왔다. 다른 한편 크리스트교회의 종교적 문제상황은 오늘의 세계구조 아래서, 한국민중
과 민족의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고, 구원과 정신의 초월 경에서 몰입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곧잘 특권층
의 이데올로기로, 둔갑해 있고, 타종교들도 오늘의 민중, 민족, 세계의 문제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크
리스트교나, 타종교이든 비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전 상환 목사님 게서는 임어당 교수의
크리스트교의 개종과 신앙고백의 예로써, 기독교의 우월성을 中庸之道로서 언급하면서, 해방신학의 정치적 복
음에 대한 비판은, 역사의 주어진 문제상황을 도외시하는 종교적 영성이나 초월성은 비역사적 추상성을 존재적
차원이라고, 착각하게 하고, 역사에서의 그 문제상황을 지속시키려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있다
고 하겠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12 절의 “다른 이로써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은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란 말씀은 성서적으로 옳으나,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 기성교회의 테두리
안에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말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비성서적 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크리스트교든,
타종교이든, 종교들 자체가 구원을 받아야 할 주제이다. 민족과 세계가 분단되어 있고, 종교와 종교가 세계 도
처에서 대립하여 싸우고 있는 현실의 지구촌에서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은 옳은 가다. 또 구원의 문제가 어째서
종교들만의 주제가 될 수 있느냐다.크리스트교이든,타종교이든,무신론,또는 반종교적 세계이든, 모두 역사의
문제 상황과 곤경에 함께 처하여 있다. 더욱 크리스트교는 오늘의 문제상황을 초래한 서양 주역들에게 봉사하
여 왔으므로, 크리스트교 안에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이제 크리스트교는 이 문제 상황 극복이라는 실천적 과제
를 새롭게 수행 할 때만 하느님의 역사에 참여 할 수 있다고 보겠다. 크리스트교가 관념적 영성에서 내세의 구
원을 순수 복음이라고 하면서, 역사의 현장에서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서, 제 3 세계로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
파 확대되었을 때, 이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은, 무신론, 반종교적 역사 혁명론으로 대체되었다. 이 비판은 크리
스트교이든, 타종교이든, 정신적인 환상이나, 초월 경에서부터, 역사의 장으로 소명된 현대 역사의 결정적인 사
건이다. 종교간의 대화가 기존하는 종교들이나, 관념들의 차원에서,道,梵,열반과 같은 표상들에 있어서의 구원
개념의 차원에서 진행된다면, 그것은 여전히 관념들의 종합이나, 이것을 시도하는데 불과하다. 크리스트교든,
타종교이든, 무신론적 세계이든, 다 역사의 현실에서 수렴되는 과정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즉 역사의 구원 진
리로서 기능을 수행하느냐하는 물음이, 거듭 제기되고, 실천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크리
스트교나 타종교들이, 하느님을 승인하든, 아니하든, 역사의 구원에 동참함으로서, 하느님의 종말적 구원의 빛
아래 있다는 말은 옳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적 목표는 새교인을 얻고나, 교회 울타리 안에 세계의 것들보다 많이 채움으로서 교회
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선교의 목적은 세계로 하여금, 그 자체의 잠재성에 보다 충실하게 하고
인간생활을 보다 인간적이게 하며 타종교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안에 현존하는 구원도 신비를 보다 충분
히 분류하도록 도움으로써 유대교인을 보다 훌륭한 유대교인으로, 힌두교 도를 보다 훌륭한 힌두교도로, 인간
주의자들을 보다 인간적이게 하며, 그 힘을 집중하는 것이다. 회심의 개념은 복음주의적 배타주의가 말하는 의
미에서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대신에 교회를 세계로 회심시키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이 교회 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고 계신 일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
람들을 초청하는 대신에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 세계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거기서 일하고 계신 것을 바라보도
록 요청되고 있다. 이것은 세계를 하느님의 구속적 행위의 대상으로서 심각하게 취급하는 것이고 교회가 세계
를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시아의 타종교들이 이방 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이방 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적인 복음이 우리의 마음의 고향인 아시아 종교와 문화와 합류되고
편입되는 참된 토착화를 위한 해방의 관점에서 신학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한편 크리스트교를 포함한 모든 사
람이 신입에서는 이방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종교인들과 함께 이러한 이방성(소외)을 극복하고 세계를
인간화 시키는 선교적 책임이 하느님의 소명이 아니 겠느냐다.
참고 문헌.
The Dynamics of Faith, Paul Tillich. New York: Haper &Row,1957
The Future of Religion, ed. by D. M Brown. New York: Haper &roW,1965
Ultimate Concern,Tillich in Dialogue, ed. by D. M Brown.1965
What is Religion?,ed. by J. L. Adams, 1969
God has many Names, by John Hick, The Westminster Press,1980
One Faith, many cultures, Roy O. Costa, Editor, Orbis.1989
No Other Name? Paul F.Knitter, Orbis. 1985
Many Paths, Eugene Hiillman, Orbis, 1989
Biblical hermeneutics, S Croatto, Orbis.1984
Biblical hermeneutics, Duncan s. Ferguson, John Knox Press, 1986
Toward a universal Theology of Religion, Leonard Swidler, orbis.1987
Christology at the Crossroads, Jon Sobrino, S, J. Orbis, 1985
Our Naming God, Carl E.Braaten, Fortress Press 1978
A Theology of Liberation, Gutierrrez, Orbis. 1985
We Drink from our Own Wells," " " " 1987
Liberation of Theology,J. S. Segundo, Orbis. 1985
The Apostolic Imperative Carl E. Braten, Fortress, 1985
Justification, Carl E. Braten, Fortress, 1989
Pluralism, Harold Coward, Orbis, 1985
Christianity and the world Religions, Hans Kung, Doubleday.1986
Process Theology as Political Theology, John Cobb, Jr, Westminster, 1982
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 S. Wesley Ariarajah, Orbis, 1989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Karl Rahner, Seabury.1978
Religion in the making, Alfred North Whitehead, Harvard, 1926
To Change the World,The Crossroad, Rosemary R.Ruether.1981
Christ in a Changing World, SCM Press, Tom F.Driver.1981
An Historians Approach to Religion, Arnold Toynbee, Oxford, 1979
The Silence of God, Raimundo Panikkar, Orbis, 1989
Sacred World and sacred Text, Harold Coward, Orbis, 1988
Faces of Jesus,ed, Jose Miguez Bonino, Orbis.1977
Faith on the Edge, Leonardo Boff, Harpor &Row.1989
Systematic Theology, Paul Tillich,3 Vol,University of Chicago,1959
The Impact of Psychotheraphy on Theological Thought, New York: Acadey 1966
Christ and Culture, H. Richard Niebuhr, New York: Harper &Row,1975
Dogmatik im Grundriss, Karl Barth.(敎義學槪要)全景淵 譯,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