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비공개 입니다
강림의 지명 풀이
마을들의 지명은 태초부터 자연적으로 생겨서 내려오는 마을과, 한자가 도
입된이래 고려와 조시대를 거치며 생겨나거나 고유이름이 한자화 된 마음
이름으로 분류된다. 정확한 사료를 찾기는 힘들지만 구전, 사료 그리고 어
릴때 들어 각인되었던 내용을 근거로하여 피력하고자한다.
대명사 강림이야기는 이미 피력하였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원래의 고유지명을 갖고 있는 마을★)
★ 정바우 - 정바우란 한문으로는 정암(正岩,定岩)이다. 전설에는 고요히
누워 별을 바라보는 바위라는 뜻이다. 定짜는 고요하다. 바르다(正), 별이
름, 편안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正岩 또는 定岩으로 혼용해도 무방할
것같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정암의 전설이 있었다.
"정바우 앞 개울에 깊은 소가 있고 그 위에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이 바
위의 주변은 뛰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돼 신
선들이 가끔 내려와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 어느 날 하늘에서 한 쌍의
신선남녀가 내려와 사랑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때 마귀가 이들 남녀를 시
기한 나머지 두 신선남녀를 몰살시켰다. 그러자 천추의 한을 품은 두 남
녀는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남자는 거북바위가 되고 여자는 정암
(고요히 누워 별을 바라보는 바위)이 되었다."
★ 아랫담 - 정바우장터를 기준으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
담이란 집주위나 일정한 공간을 막기위하여 흙 돌 따위로 쌓아올린 것을 말한다.
담벼락 아래쪽의 마을이라는 뜻일것이다. 논들이 제법 많이 형성되어 있다.
★ 뒷담 - 정바우 뒤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배후지이다. 논보다는 주로 밭들이 많다.
★ 선계 - 신선들이 놀던 곳으로 명당이었던 마을.
물이맑고 청량하여 천상의 선녀들이 목욕을 하러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산세가 수려하고 장송들이 둘러쳐저 있고 청정한 냇가에는
지금도 백로들이 거닐고있어, 신선들이 자주 내려왔다가 올라갔을 것이다.
고대에는 신선골이라 하지않았을까.
★ 노들 - 백로가 노닐던 들판. 쿵쿵소앞쪽의 강변이 길고 물고기가 많아
백로들이 많이 날라와서 놀았다. 백로로짜를 사용하여 노들.
또는 노뜰이라고도한다. 들이나 뜰이나 통상 함께 사용한다.
★ 쿵쿵소 -쿵쿵소는 선계에서 노뜰사이에 흐르는 소가 깊은 곳을 말한다.
수량이많고 갑자기 휘어지는 물살의 힘으로 인하여 바윗돌 부딪히는 소리
물소리들이 쿵쿵소리를 냈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초등학교6학년때 물
밑에 까지 잠수하려면 숨이가쁘고 힘들어서 못하였다. 어른키로 세길 정도
되는 깊은 소였다. 쏘가리 치리 매자 모래무지 메기가 거짓말 안보태고 팔
뚝만 했다.
★ 버덩말 - 버덩이란 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들
판을 가르키는 용어로 노고소 벌판이 예전에는 광활한 벌판이었다. 부곡계
곡이 나 약물고비쪽에서 바라보면 지대가 높아보인다. 안담에서 배향산쪽
에 벌려있는 마을이 버덩말이다. 말은 마을의 준말이다.
★ 아시내 - 동생을 가르키는 강원도의 사투리. 동상과 동의어 그옛날 어
떤 촌부의 동생이 살지않았을까. 그래서 동생네 마을이라는 뜻.
★ 안담 - 안담은 노고소마을 전체를 보았을때 마을 가장 안쪽에 포근하게
자리를 잡고있다. 그래서 붙여진것이 아닌가한다.
★ 개건너 - 개울건너. 송실에서 주천강을 막바로 건너면 보이는 마을이
다.
이 마을은 씨족공동체마을이다. 청송심씨 18세손이 1800년대 초 쯤 함경
도 단천에서 직계가족을 데리고 원주를 거쳐 최종적으로 개건너로 이주하
며 20세손대부터 가족이 많이 불어나 현재까지 집성촌을 이루고있다. 한
때 이마을은 모두가 심씨네 사람들이었다. 현대에는 이촌향도현상으로 많
은 심씨들이 마을을 떠나 5가구정도만 거주하고있다. 내가 처음 정바우에
와서 똘똘뭉친 심씨네가 신기하고도하고 어려워 이마을에 접근을 하지않았
다. 그러나 나의 절친한 국교동창생들이 거주하여 간간이 드나들기도 하였다.
개건너는 대부분이 밭작물을 재배한다.
★ 송실 - 송실주변에는 소나무밭들이 빼곡이 둘러처져있다. 그래서 생겨
난 이름으로 소나무가 많은 계곡이라하여 송곡이라고도 부른다. 아마도 신
라시대에는 소나무골이라고 불렀을듯...마을이 광활하여 논과 밭이 많았다.
★ 가리네 - 가리네, 가리내로 사용한다. 또는 가천이라고도 불렀다. 가천
은 한자식의 용어이다.
우선 가리는
1)곡식이나 땔나무를 쌓아놓은 더미,
2)한자로 佳異라고 쓰는데 풀이하면 묽이 좋고 아름다운이라는 뜻이다.
3)가리다라는 뜻이다. 무엇을 가리는가. 옆마을에 현재도 부르는 음달가리내
가 있다. 삼형제봉 뒤쪽으로 해발 850미터의 급경사의 산봉우리가 두 개가
있어 늘 햇빛을 가리게된다. 가리내의 마을을 보면 급경사의 삼형제 절벽
바로앞에 자리하고있어 항상 음달이었다. 정오시에 잠시 해가 들뿐 대부분
음달이 덮고있다. 이 세가지 중에 가장 설득력이 있는 용어는 3번이다.
그래서 가리네는 늘 해가 가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창말 -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명명된. 창고 창(倉)짜
와 마을이 합해져 생겼다. 마을명이 한자화되었다. 강림학교를 지나 아시내
를지나면 이 마을이 나온다.
★ 보건너 - 보(堡)를 건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노고소 벌판이 끝나는 곳에서 개천을 건너면 나오는 마을이 보건너 마을이다. 보라함은 흐르는 강물을 논에 대기위하여 개울을 비스듬히 수중에 돌담을 쌓아 물길을 돌리는 역할을 하는 둑이나 제방을 말한다. 이 수중보는 갈수기때는 물을 가둬 활용하지 만 수량이 많을때에는 자연스럽게 넘쳐흐르게 한다. 노고소와 보건너마을을 가로지르는 이 보위에는 바로 노고소라는 깊은소가 위치해있다. 노고소마을과 구분하기위하여 노구소 도는 구연(耈淵)이라고도 한다.
★ 자세골 - 뒷담에서 배향산방향으로 오르면 울창한삼림이 나온다. 이산의 모양새가 계곡이 꼭항아리모양을 하고있어 항아리자짜(瓷), 지세세짜(勢)를 써서 자세골이라 부른다. 자세골은 소나무나 참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서식을 하여 정바우 사람들은 주요 땔감을 여기에서 날라왔다.
(◆태종임금이후에 지어진 마을◆)
◆ 노고소 - 노고소는 태종과 만나서 거짓말을 했던 어느 할머니의 가슴
아픈사연이 담겨진 개천을 말한다. 이일이 있은후로 마을이름도 노고소가
생겨났다. 노고소마을은 강림초등학교 앞에서부터 남쪽으로 쭉 뻩은 넓은
벌판이 있는 마을이다. 버덩말과 안담을 모두 포함한다. 노고소는 강림에서
부농들이 많았고 양질의 쌀이 가장 많이 났다. 논의 물은 보건너보에서 유
입되어 농사를 지었다.
◆ 태종대 - 태종대 마을은 아주극소수의 사람들이 살고있었다. 태종대누
각 뒤편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다. 강림학교후문으로 나가면 태종대가 나
온다. 태종대는 마을이기도 하지만 노구소위 절벽위에 축조한 누각의 명칭
이기도하다. 누각은 물론 그 절벽전체를 태종대라 할수있다. 사연인즉슨 그
절벽위에서 태종 이방원이 원천석 선생을 찾기위해 머물렀기 때문이다.
◆ 마치골 - 말마짜 (馬) 고개치짜(峙)를 사용하여 말을 타고넘은 고개라는
뜻이 있는 마을. 또는 임무를 마치다는 마치골. 두가지설이 있다. 이 둘다
태종 이방원과 관련이있다. 태종이 원천석을 찾으려고 배향산쪽으로 말을
타고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찾지못하여 임무를 중단하고 돌아가
자 마치골이라고도 하였다.
◆ 수레너미 - 태종 이방원은 임금으로 즉위한 이래 1414년 횡성을 지나
학곡저수지쪽에서 매향산을 넘어온다. 이 매향산을 넘어오면 지금의 수레
너미 마을에 이른다. 임금의 수레가 험한산 길을 넘어오면서 고생 고생하
였다. 그 기념으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첩첩이 산이라 산막골
로도 부른다. 수레너미는 매향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로 인하여 꺽지 쉐리
메기 퉁가리 수수미꾸라지 등이 많이 서식한다.
★부곡 - 그릇을 만드는 가마가 있었던 곳 가마골, 가메골. 원래는 순수 우
리말이었는데 고려시대이후 한자음을 통용하다보니 釜谷이라 불렀다. 일설
에는 치악산 시루봉이 가마솥 모양이라해서 부곡이라는 용어가 나왔다고도
한다.
★월현 - 월현의 원래의 고유지명은 달고개마을이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
역 통폐합에 따라 월읍리와 덕초현 동산리 등자치를 병합하여 월현리라 명
명하였다. 월읍리의 월짜 덕초현의 현짜를 땄다. 지금도 달고개마을이 있다.
=== 10대 가게 ===
01. 잡화상 5곳
정바우장터의 대표적인 잡화상은 5곳 정도였다. 크기가 고만고만하였다.
잡화상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그야말로 잡화상이었다.
주로 과자와 술 성냥 낚씨도구 학용품 등 생필품위주의 상품들이었다.
정바우에서 가장 큰 잡화상은 수복이네 가게였다. 조그만 도랑을 건너자
마자 왼편에 자리를 잡았다. 수복이네는 아랫담에서 농사를 주로 지으며
살다가 어느날 정바우에 가게를 인수하게되었다. 아저씨 아주머니가 주로
장사를 하였고 자식들은 학교 다니기가 바뻤다. 이북말투를 주로 사용하는
인자하신 아저씨와 조선의 곱디고운 아주머니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도
랑에서 몸을 씻고 세수를 하다보면 주로 아주머니와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온화한얼굴과 말로 나를 격려하곤 하였다. 수복이는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나타샤를 연상하는 깜찍한 마스크였다. 지금은 수옥누나가 맡고있다.
강림교 후배인 창섭이네 가게는 주로 잡화와 농기구를 판매하였다.
창섭이네 아버지는 학식도 있으시고 도장파는 기술과 행정사무를 보시는
실력이 있었다. 섬세하고 다재다능한 어버지를 둔 창섭이였다. 이 가게는
잡화는 소규모이고 주로 많은 농기구와 물고기 잡는 어항과 낚시를 많이
갖추고있었다. 놀기를 좋아하는 활달한 창섭이는 공부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물론 다들 공부에 그리 관심을 두지않았지만 말이다. 언제든지 축
구하러 자치기하러 나오라면 나오곤하였다.
길건너 첫 번째가 맹씨네 가게였다. 어느날 갑자기 대화에서 희성인 맹씨성을
가진 형제가 강림에 등장하였다. 형은 아담한 체구였는데 아주머니는
상대적으로 키가 컸다. 아마도 정바우에서 제일 키카 큰 것 같았다.
동생은 아직 미혼이었다. 동생은 형보다도 아주 잘생긴 미남이었다.
강림의 뭇 처녀들의 마음을 뺏었으리라. 그러던중 군에 입대하고 얼마
안되어 불의의 사고를 당하였다. 아마도 지뢰를 밟았는가 싶다.
발목 부분이 절단되어 의족을 하고 나타났다.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매우 충격이였고 가슴 시렸다. 두형제가 힘을 모아 가게를 제법 크게 늘려갔다.
길목도 좋으려니와 장사 수단도 좋았다. 상당한 재력을 모았으리라.
그러던 어느날 동생 맹씨의 혼사소식이 떠돌았다. 색씨는 아름다운
미모를 날리는 아랫담의 기자누나였다. 정바우 아이들에겐 대단한 이슈였다.
아니 모든 사람의 흥밋거리였다.
왜 다리를 저는 총각한테 시집을 가냐고..아마도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었
겠지만 말이다.
맹씨네 가게를 지나면 병수형네 가게였다. 병수형네도 대부분의 물건이 잡화였고
주로 나이 많으신 아버지가 상시 가게를 지키고 계셨다. 대부분
의 다른 가게에는 나의 또래가 있거나 후배들이 있었다. 장터에서 늘상 축
구를 하던 우리는 가게 주인들에겐 밉상이었다. 그러나 자기집 자식들이
꼭 끼어있기에 축구경기를 보고 무어라 말을 하지않았다. 당시의 가게들은
전면이 모두 유리창으로 된 신식 가게였다. 축구를 하다보면 꼭 유리창을
깨는 날이 오곤하였다. 헉--. 그래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유리를 깨
지않는 날이 비일비재하기도 하였다. 다른 가게에 들어가면 그집 아들을
시켜 얼릉 공을 빼내왔다. 그러나 병수형네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가게였
다. 할아버지가 무지하게 꼬장 꼬장하신 분이셨다. 절대 공을 내주지 않았
다. 그러면 경기는 중단되었다. 우리는 놀이를 접고 하염없이 병수형을 기
다렸다. 당시 형은 가게보다는 주로 아랫담에서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해
오느라 가게에 없었다. 강림에서 제일 잘생긴 병수형이 돌아오기만을 학수
고대하였다. 그렇게 공을 돌려받았다. 유리를 깰망정 이튿날이면 또다시 볼
을 질렀다. ㅎㅎㅎ.
마지막으로 잡화상이 잘되는 집이 운석이네 집이었다. 수생이네 집과 마
주보고 있었다. 운석이네는 양조장까지 운영하였기에 막걸리도 주로 판매
하였다. 그래서 퉁자가 놓여있는 부근에 가면 막걸리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게는 주로 운석이 어머니가 맡았고 아버지는 정미소와 양조장 일을 도맡
았다. 강림의 돈을 쓸어 담았다. 운석이 아버지는 강림의 유지로서 크고 작
은 일들을 잘 챙겼다. 운석이네는 아들부자였다. 딸은 어디가고 4형제가
돌똘뭉쳤다. 둘째 운석이는 약간 작지만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었다.
4형제는 각자 가게와 양조장 정미소일을 거들었다. 존웨인이 주연을 한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 ‘엘더 4형제’를 연상케 하였다.
02. 정미소
강림일대에서는 대부분이 디딜방아나 물레방아로 옥시기나 밀 보리 등을
타개서 먹었다. 마을마다 디딜방아나 물레방아가 있었다.
하루분 식량은 이렇게 해결하였다. 그러나 벼농사인 경우 한해농사를 다 짓고 나면
대량으로 방아를 쪄야만 하는데 디딜방아로는 곤란하였다. 강림일대에서는 유일
하게 운석이네 벼정미소 한곳 뿐이었다.
노고소 송실 개건너 선계 아랫담 뒷담의 모든 벼는 이곳에서 쪄갔다.
가을에 황소등에 수레에 누런가마니를 싣고 정미소로 향하는 행렬은 장관이었다.
발동기를 점화하고 피대를 걸은 기아들이 돌기시작하면 자동으로 벼들이 쪄지고
가마니를 받치기만 하면 차곡차곡 쌀이 쌓였다. 추수기에는 평
일이나 장날이나 정미소가 쉴새없이 돌아갔다. 정바우에서 가장 키가 큰
건물이 정미소였다. 발동기에서 나는 아우성은 정바우의 유일한 멜로디였
다. 지금도 아련히 들려오는데---.
“ 타-----앙, 타---앙---탕--탕--탕--타-타타타타.....”
03. 약국
강림과 부곡 월현을 통털어 유일한 약국이 ‘지약국’이었다. 맹씨네 가게
바로뒤편에 자리잡았다. 앞마당은 넓은 광장이었다. 약사님은 머리가 허연
영수네 아버지였다. 당시의 수준으로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월현 부곡사람
은 장날에나 와서 약을 사다놓곤 하였지만 정바우사람들은 아무 때나 살수
있었다. 약국이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나는 아니 우리식구들은 약을 그리
잘 사지를 않았다. 지금은 툭하면 대일밴드를 붙였지만 당시에는 그냥 헝
겊으로 둘둘 말으면 끝이었으니 말이다. 속이 아프면 소다 한 숟가락 떠놓
고 말았다. 내동생이 화로에 손등 전체를 데어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어머니는 매일 강가에 나서 미역과같이 미끌미끌하게 생긴 말총을 뜯어다
가 손등위에 올려놓곤 하였다. 수개월을 그렇게 찜질을 하여 화상을 치료
하였다. 당시에는 약국에 마땅한 약이 없었다. 실버헤어의 영수아버지와 어
머니는 참으로 온화하셨다. 당시에 약국을 하면 상류층의식이 강했을텐데
어찌 강림에서 한 세월을 보냈는가 싶다. 그 자재 영숙이와 영수는 참으로
단아하고 바른 아이였다. 대가족이 버글 버글대는 촌에서 식구가 단촐했다.
04. 식당
장바우 장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사람수에 비하면 식당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큰 연옥이네 메밀국수집, 미자네식당, 봉덕이네식당
그리고 출장소앞에 두어군데 있었던 것같다. 메뉴도 대부분 한식이 고작이
었다. 나중에 봉덕아저씨 식당에서 짜장면을 팔았던것같다.
연옥이네 메일국수는 순수 강림 메밀로만 만들었기에 전통적인 맛이었다.
춘천막국수 양구막국수하지만 연옥이네 만큼은 못했다. 장날에만 면을 만
들었는데 그야말로 줄을서서 먹는 곳이었다. 사위가 정미소를 하기에 평소
메일을 뽀아놓았다. 장날이되면 메일반죽을 하고 가마솥에 면발을 밀어넣었다.
쫄깃하고 가느다란 면발이 가마솥에서 잠시 끓고나면 육수를 부어 상에 올렸다.
반찬은 김치 한가지면 족하였다. 연옥이네는 어머니가 모든 장사를 아울렀고
아버지는 뒤치다꺼리를 조용히 하셨다. 왈가닥아주머니를 연상하는 어머니에
샌님같은 아버지셨다. 운석이 어머니하고 연옥이어머니는 모녀지간으로
강림의 하리마오였다.
정바우장터의 가장 중앙에 자리를 잡아 장터 앞뒤로 몰려드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장날의 모든 돈은 연옥이 어머니 행주치마속으로 들어갔다.
05. 선술집
선술집이라 해야하나 식당이라고 해야하나. 봉덕아저씨는 원래 원주에서
한주먹하는 아저씨였다. 백구두에 양복을 쭉 빼입고 원주를 들락거렸다.
그가 강림에 나타나더니 지약국위쪽에 식당을 떡하니 차렸다.
술집이라고 하기에는 당시의 강림정서가 못마땅했기에 식당으로 개업을 하였다.
그러나 서서히 본모습이 들어났다. 메뉴는 식사지만 주로 술과 아가씨를 준비하였
다. 순진무구한 강림에 봉덕이네 식당은 눈엣가시거리였다.
아저씨는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였다. 장날이되면 한가닥하는 젊은 장정들이
봉덕이네 아저씨집으로 몰려들어 회포를 풀곤하였다.
시골구석에 접대부를 두고 술한잔 걸치니 금상첨화였으리.
그렇게 몇 년을 장사를 하더니 이번에는 쌍둥이를 출산하여 정바우를
또 발칵 뒤집었다.
화제를 몰고다니던 아저씨였다. 물론 멋쟁이였다. 가리네의 주먹잽이
거인아저씨와 늘상 으르렁거리며 살았다. 그 거인아저씨는 장에 오면
꼭 봉덕이네 식당에서 얼굴이 벌게지도록 마셨다. 그리곤 비틀거리며
가리네로 사라졌다. 기골이 장대하여 항상 그 아저씨앞에서는 숨을 죽였다.
쌍둥이 민철이 민호는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같다.
아주 활달한 개구쟁이 소년이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주먹을 믿지 않았을까..쌍둥이네 식당은 막걸리로 강림촌부들의 주머니를
많이 우려내었을 것같다.
이와 비슷한 선술집이 또하나 있었으니 미자네식당이었다. 미자네는 모녀
단둘이서만 살았다. 그리 뛰어난 미모는 아니였지만 장사를 위해서는 미모에
신경을 많이 썼다. 딸레미 미자도 그러하였다. 촌부들은 과부가 운영하는
미자네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어느덧 미자도 훌쩍 커있었다. 두 여인만 있는
식당에 남정네들의 발길이 어찌 끊길소냐..안쪽으로 길죽한 홀에 손님은
그럭저럭 들었다. 밥술정도는 먹었지만 그렇게 크게 돈을 벌지는 못하였으리.
06. 이발관
신신이발관. 현대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였던 아버지였기에 간판도 그리 내
걸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머리를 소중히 여겨야하는데 단발하여야하
니 신식문물이 아닌가. 정바우에 집을 신축하면서 처음부터 이발관을 방두
칸 크기로 축조하였었다. 외부에서 잘보일수있도록 이발관전면은 투명창으로
설치하고 내부에는 대형 거울을 길게 달았다. 그 위에는 강원도지사가 발행한
이발사 면허증과 영업허가증을 걸었다. 홀에는 신식 의자 두개를 원주에서 사들여왔다.
이발기구와 돈을 넣는 장식장을 구석에 두고 중앙에 난로를 한쪽켠에는 머리감는
세수대를 두었다. 평상마루를 두어 대기 손님들이 앉도록 하였다.
아버지는 강원도 이발사면허증 제1호였다. 가장먼저 이발사자격증을 따셨다.
그래서 원주에서 가장 큰이발관을 개업 운영하였다. 그러던중 개인사정이 있어
정바우로 이사를 하였다. 장날만 되면 경향각지 골짜기에서 몰려든 이발손님으로
북적거렸다. 오전일과가 한바탕 끝나고 나면 바닥을 쓸어야만하였다.
오후일과가 끝나면 또한번 바닥을 쓸어야했다. 그만큼 바뻤고 손님의
짤린 머리카락이 수북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접촉하여야하므로 바리깡은
매일 크레졸로 소독을 하였다. 어른들의 이발에서 면도, 고데까지 아버지가 다하셨고
나는 주로 국민학생의 빡빡머리를 깍거나 머리감는 일을 주로 하였다.
머리감는 물을 수시로 길어와야 했는데 여름에는 맑은 도랑물을 겨울에는
개울물을 길어왔다. 6학년인 나에게는 힘든 노동이었다. 하지만 돈통에는 돈이 넘쳐났다.
장날일과가 끝나면 아버지는 용돈만 조금 남기고 몽땅 어머니에게 바쳤다.
그때부터 울 어머니는 손이 큰 아주머니가 되어갔다. 이발관의 주수입으로 오남매를
키웠다. 내가 원주로 유학을 오게되자 보조일꾼을 한명 두게 되었다. 대화에서
온 입술이 두툼한 아저씨다. 사정사정하여 받아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 아저씨였다.
정바우까지 흘러들어와 신신이발관에 들어왔다. 그가 몇 년간 일을 하더니
기술도 숙달하고 돈도 모았다. 그러더니 독립을 한다고 봉덕이네 옆집으로 가서
개업을 하였다. 이후로 현저하게 손님을 뺏기게 되었다. 주인을 배반하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옛말에 머리검은 짐승은거두지말라고 했던가!!
잘나가던 그때가 많이 그립다.
07. 포목점
비단이장사 왕서방이라는 노래가 있다. 수생이네 아버지는 김씨이기에 아마도
김서방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것같다. 원주에는 양복점이나 양장점이 몇군데 있었다.
하지만 이런 촌구석에는 있을수가 없었다. 당시 대부분은 기성복이었고 기성복이
없거나 안맞으면 직접 만들어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 포목점은 광목 옥양목 비단 등을
주로 팔았다. 약간의 기성복도 함께 걸어놓았다. 옷감들은 나무로 짠 긴틀에 20마씩
말려있었다. 비단보다는 광목이나 옥양목을 많이 사갔다. 좀 산다싶으면 비단을 구매하였다. 손님이 오면 적절하게 가위로 몇마씩 잘라 팔곤하였다.
장날이되면 수생이네는 포목을 몽땅 앞마당으로 끌고나와 진열하였다.
울긋불긋 화려한 옷감들을 보면 촌 아낙네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는 제법 돈을 모아 아랫담에 논과 밭을 사들였다. 정바우 악동들은 수생이네 집에
주로 모여 밤새 나이롱뻥을 쳤다. 아저씨는 눈감아 주었고 아주머니는 우리를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외지에서 이사를 온 수생이와 자주 어울려주니 고마워 했을것이다.
08. 신발가게
신발은 신분의 상징이다. 그 사람이 신은 신발을 보면 부귀가 들어났다.
그런 신발이었지만 당시의 경공업 수준은 아주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단순한 디자인에 얼마 신지못하면 접착부분이 벌어져 버리거나 꿰메 신어야했다.
학송이네 가게는 주로 신발을 취급하였다. 태화고무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검정고무신 흰고무신이 많았고 어쩌다 검정운동화가 전시되었다.
당시의 시골사람들에게는 주로 검정고무신이었다. 가게는 옆으로 길게 설치가되어
장날에는 나무문을 모두 들어서 한쪽옆으로 옮겨두고 장사를하였다.
학송이 아버지는 대화사람이었는데 성격이 대쪽같았고 어머니는 충성을 다하는 분이었다.
학송이가 조금이라도 엇나갈라치면 단호하게 혼을 내곤하셨다.
혼나고서도 학송이는 천하태평이었다. 학송이와 학순이 두 남매를 두었지만
아주 단란한 가정이었다.
09. 여관
우리집 맞은편 바로 옆에 여관이 있었다. 장터입구 오른편이다. 정숙이네 여관이다.
당시로는 원목을 들여 제법 그럴듯하게 건축하였던 건물이다.
기억자로 지은 이 여관은 안채에 주인이 살고 바깥쪽으로 여관방을 두었다.
강림같은 촌구석에 숙박업이 가당키나 하겠냐만 그럭저럭 손님들이 들었
다. 외지에서 처음 들어오는 사람, 장날 잔뜩 술을 마시고 몸을 못가누는
농부들과 산판업을 하는 일꾼들이 주로 묵어갔다. 강림지역 발령을 받은 공무원들도
주로 이용하였다. 강림국교 선생님, 출장소 직원, 지서순경들이었다.
강림에 전근을 온 공무원들은 마땅한 민박집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묵기도하였다.
특히 버스가 개통된 날부터는 기사와 안내양이 매일 숙식을 제공받았다.
숙박손님에게는 식사도 대접하였기에 일거양득이 아니었을까.
이불빨래며 식사며 정숙이 올케가 상당히 고생을 많이했으리라.
10. 대장간
정바우 장터의 가장 첫집이 대장간이었다. 사각형모양으로 건축된 한칸 크기의
초가집이었다. 이 대장간이 들어선 곳은 우리집 밭이었다.
오촌당숙께서 대장장이셨다. 신체가 크고 힘이 장사였다. 손재주 또한 탁월
하였다. 사방팔방에서 농기구를 제작하느라 몰려들었다. 쓰던 농기구가 무
뎌지면 다시 복원시키려고 가져오기도 하였다. 혼자서 대장일을 할 수밖에
없기에 손님이 오면 보조일을 거들게 하였다. 풀무질을 하거나 햄머로 내
려치는 일들을 부탁하였다. 황토흙으로 불가마를 만들고 풀무를 설치하였
다. 숯불에 불을 붙이고 풀무질을 하면 숯불의 온도가 천도씨 이상 올라갔
다. 어떤 쇠붙이든지 풀무질만 하면 버얼겋게 달아올랐다. 시뻘겋게 달은
쇠를 모루에 올려놓고 망치로 이리저리 두들겨 패면 호미도 나오고 칼도
나오고 낫도 나왔다. 하루종일 대장깐에서는 망치소리 햄머소리가 들렸다.
강림은 물론 부곡 월현 가리네 등지의 모든 농기구를 만들어냈다. 모루와
망치를 보면 많이 달았다. 연륜을 말해주었다. 기골이 장대한 육척장신의
차대장 아저씨가 그립다. 인자하기가 말할 수없다. 부곡 할아버지 성묘를
갈때나 제사를 지낼때면 꼭 함께 해주었다.
2017.
|
출처: 비공개 입니다
첫댓글 자세히 알려주신 선배님의 고향예기 잘봤습니다 저는 41회입니다 추억은 다시생각나고 몰랐던 예기는 잼있고--감사합니다!
선배님덕분에 잠깐어린시절을 떠울려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