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시대
인간이 머리카락에 신경을 쓰게 된 기원은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유사이전(有史以前)에 상고시대의 자연피(自然被)가 어느 때 검(劍:묶다)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농경의 정착 생활이 가져다 준 여유가 용모를 미화시키고 간결(簡潔)을 추구하는 본 뜻을 발동시켰을 것은 추측키 어렵지 않다.
모발 정리의 풍속은 문헌 비고에 단군원년부터 땋아서 늘어뜨린 머리모양으로서 편발(編髮)을 하였다고 한다.이것은 설화적 기록에 불과하지만 이런 것을 미루어 볼 때 고대사회에서부터 머리카락을 간수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편발 풍속은 사기열전 조선전조에 위만 조선시대 이전부터 땋아 느렸던 머리를 한데 뭉쳐 머리꼭데기인 정수리부분에 등글 게 묶는 뭉치상투(추계)형태로 변해 갔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여자의 계양(상투모양)은 그 형태를 알 수 없어도 그 존재를 추인할 수 있는 이른 바 오늘날의 상투와 유사한 것이다.
상투의 수발법은 대전 출토 농경문화 청동기에 성인 남자는 상투를 하고 미혼 남자는 풀어헤친 머리모습으로서의 피발한 모습을 이 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이 때 발굴된 청동기는 연대미상이나 청동기시대의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므로 상투의 역사는 대략 2~3세기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나서는 자라는 대로 두었다가 3개월 말일쯤에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의 머리모양인 각(角)과 여자의 머리모습인 기(羈)로 나누어 쌍상투를 했다. 동남, 동녀가래(禮)를 갖추기 위해서는 머리털을 감추는 권책과 넓은 수건인 두건을 썼다. 성인들은 머리를 길러 단발(單髮:하나로 묶는)를 했으나 쌍발(雙髮)은 동자들의 머리형태로서 총(總)으로 머리카락을 묶는 것을 총각(아머리)이라 한다.동자들의 쌍계는 곧 총각이다. 총은 옛날에는 남녀 모두에게 있었으며 10세 내외의 어린이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아직 덜 자란 머리를 임시로 묶는 양식이다.
우리 나라의 쌍계 역사는 기자 조선 때부터라 하기도 하고 몽고풍이라 하기도 하여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 머리묶음의 형식은 자연발생적인 원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역사는 오래 되었다고 본다.이러한 추계형태는 부락 공동체를 이루어 꽤 안정된 생활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는 삼한시대로 오면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에서 또다른 머리형태를 산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해동역사(海東歷史)에 "三國의 부인은 반발(盤髮)인 일종의 얹은 머리를 하였는데 모두 아발(鴉髮)을 지었고 남은 머리카락은 늘어뜨렸으며 미혼모는 말아서 뒤로 쳐지게 늘어뜨렸다"고 하였다.
채협총에서 출토된 채화칠협에서 나타나 있는 인물상을 살펴보면,머리가 정돈되어 있고 이마를 넓히기 위해 머리털을 뽑은 흔적이 있으며,눈썹이 굵고 진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그 새대에 최소한 단정한 몸차림이 생활의 기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마를 넓게 보이고자 하는 노력은 그 시대 이미 어떤 종류의 미의식이 작용했으며,그에 따라 자신의 용모를 가꾸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이밖에도 원시화장이라고 알 수 있는 문신(文身)이 마한과 변진인에 의해 행해졌다.조선명윤록(朝鮮明倫錄)에 의하면 문신의 발단은 원래 원시화장이었으며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변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삼국시대
수발(首髮)의 풍속은 국가의 체계가 갖추어지고 생활수준이 높아진 삼국시대에 이르러 다양화되었다.고구려의 벽화에 나타난 여인들의 두발형은 다양하고,백제의 여성은 혼인을 전후로 머리의 형태가 달랐으며 신라의 여인들은 가발을 사용해 장발(長髮)의 처리기술이 뛰어났다. 또한 이 시대는 머리형으로 신분과 지위를 나타냈다는 점이 주목된다. 얼굴화장에는 백분과 연지 눈썹먹 등이 사용되었고 특히 남자들의 화장이 행해졌으며 향수와 향료가 제조 되었다. 장신구에는 관(冠)과 관장식,귀걸이,팔지,반지,비녀 등이 있으며 비녀로는 청동제와 은제가 있는데 모두 현재 열린 핀의 형태이다.
■고구려의 수발(首髮)(고구려~조선)
계는 머리를 맺는 양식으로서 그것은 자연발의 상태에서 발달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계는 고금을 통해서 남자보다도 여자에게 있어 더욱 복잡한 것이었고 그 장식도 다양하다. 상대(上代) 우리나라 계양에 있어서도 남자는 남북이 모두 수계(상투) 한가지 였지만 여자에게는 다섯가지 계양을 지적할 수 있다.
1) 얹은머리:모발을 뒷머리로 부터 아퍼리로 감아 돌리어 끝을 앞머리 가운데에 감아 꽂은 것으로 무용총 주실 우벽에 밥상을 받든 여인도에서 볼 수 있다.
2) 쪽진머리:두발을 뒤통수(Nape point)에 낮게 트는 양식으로 각저층 주실 편벽 둘째번의 여인도 등에서 볼 수 있다.
3) 푼기명머리:두발을 3분하여 한 다발의 머리채는 뒤로하고 두 다발의 머리채는 좌우의 볼족에 늘어뜨린 계양으로 삼실총 제1실 남벽 왼쪽 여인도 등에서 볼 수 있다.
4) 묶은증발머리:짧은 두발을 뒷머리에 낮게 묶은 계양으로서 무용총 주실 우벽의 밥상을 받든 소녀도에서 볼 수 있다.
5) 쌍쌍투머리:머리좌우의 정변 가까이에 두 개의 계두를 솟계한 것으로,중화군 제4호분,제1호분 서벽의 소녀도 등에서 볼 수 있다. 상투는 남자의 계양으로,각저층의 씨름하는 2인의 남인(男人)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에 상투와도 거의 다름이 없다.
■백제의 수발(首髮)
백제시대의 수발형태는 옛 중국의 사서(史書)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북사열전(北史列傳)에 여자는 "머리를 땋아서 뒤로 늘이고 혼례를 하면 두가닥으로 나눠 머리 뒤에 길고 잘 휘는 물건을 헝쿨어지지 않도록 빙빙 둘러서 포개어 감아뒀다."라든지,수서(隨書)에 "머리를 두갈래로 나눠 서린다."라는 기록과 주서(周書)에 "미혼녀 들은 머리를 땋아서 머리 위에 둥그렇게 얹고 다닌다."는 기록으로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수발형태를 통한 백제의 기혼과 미혼의 구별은 그들의 윤리관념을 나타내주고 수식문화가 발달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표상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의 수발형태는 (수서)나 (북서)의 기록에서도 변발(辨髮)의 풍속은 퉁구스족의 공통된 풍습으로서 삼국이 공통된 것이었다고 봐야한다.
신라의 수발
구당서(舊唐書)동이전 신라조에는 "부인의 머리는 매우 아름답고 길다고 하면서 정관5년(631)에 여악사2인을 바친 바 있는데 검은머리가 아름답다고" 기술 했었다.또한 다래도 유행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때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편에 다래를 예물(禮物)로 가져가게 했다는 것과 경문왕때 당나라에 가는 사신이 4자5치 길이의 다래 1백50냥과 5자3치 다래 3백냥을 가지고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더욱이 성덕왕 22년초에는 미체라는 것이 나오고 경문왕9년조에는 4척5촌 두발 또는 3척5촌 두발이라는 것이 나오고 있어 그 당시 이미 다래(체)가 신라의 명물(名物)로써 외국으로 수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남자도 가발을 잘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당서 동이전 신라조에 "신라의 남자는 머리를 깎아 팔고 흑건을 썼다."함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는 상투를 틀던 당시 가난한 자는 부득이 머리를 깎아 다래로서 팔고 다시 머리가 자라 상투를 틀게 될 때까지 맨머리를 가리기 위해 흑건(黑巾)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수발형태는 우리 나라의 사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서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수서'에는 "부인이 머리를 땋아 머리에 두르고 여러가지 비단과 구술로 장식했다."고 기록돼있어 신라시대에는 얹은머리가 유행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고 려 시 대
통일신라시대의 뒤를 이은 고려 태조는 신라의 정치제도와 문화전통을 계승하는 정책을 시행해 국교(國敎)도 계속 불교로 받아들였다. 또한 국초(國初)부터 중국의 기녀제도를 본받아 교방을 두는 등 기녀를 제도화 시킴으로써 외형상 사치해졌고 내면상으로는 탐미주의의 경향이 농후해졌다.
■고려의 수발
머리모양은 쪽진머리와 비슷하나 쪽을 머리 위에 붙인 것이 아니라 머리다발 중간에 틀어 심홍색의 갑사로 만든 댕기로 묶은 것이 다르다.또한 비녀를 꽂으나 오른쪽어깨 위에 닿을 정도로 늘어지게 쪽을 찌르고 나머지 머리다발 즉 머리꼬리는 아래로 늘어뜨리는 식의 머리형태이며 부녀의 계양은 귀천없이 동일했었다고 볼 수 있다. 절세가인을 노래한 고려시대의 시(時)를 살펴보면 "구름같은 머리털에 옥잠(玉簪)을 꽂았구나"하는 구절을 보아서도 가체를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비녀가 사용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따르면 일반서민남자의 수발형태는 "마흔인 경우 노끈으로 머리를 묶고 그 나머지는 아래로 늘어뜨렸으며 장가를 들지 않은 자는 건(巾)으로 머리를 싸고 내려뜨리다가 장가든 뒤에 속발(束髮) 즉,상투를 튼다."고 전해진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고려시대 기혼여성들의 수발모습은 상대(上代)의 얹은 머리와 비슷한 형태이나 귀밑머리를 실타래처럼 틀어 오른쪽 어깨에 드리움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을 시작했던 것 같다.이와 같이 고려여성의 머리모양이 얹은 머리였다는 사실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하회탈의 각시 상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이를 보면 미혼녀의 경우는 미혼남자의 수발형태와 동일했고 다만 남자의 상투를 묶는 노끈 대신 붉은 비단으로 머리를 묶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고려도경[귀녀도]에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경우 열살 남짓한 여자였는데도 피발을 하지 않았다." 는 기록이 보이는 바 일부 귀족층에서는 어린아이의 머리를 틀어 올려 어른스럽게 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드문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머리를 붉은 비단으로 묶어준 후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것이 상례였다.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조 선 시 대
무릇 여인들의 머리모양은 고금을 불문하고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으로 인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비롯해 남자들보다 휠씬 더 복잡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의 수발
고려가 원(元)의 풍속을 따르기 이전까지 전시대인 시라의 수발형태를 그대로 따랐던 것처럼 조선조 역시 처음에는 고려의 풍속을 이어 받아 부녀의 대표적인 머리형태는 얹은머리 즉, 속명「트레머리」라고 하여 쪽머리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수발형태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상고시대부터 전개되어온 전통적인 머리형태였다. 얹은머리와 쪽머리의 머리모양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습속(習俗)이 뿌리깊었음을 볼 수 있다. 얹은 머리는 빗어 넘긴 머리를 뒤에서 두가닥내고,왼쪽가닥은 오른쪽으로 오른쪽은 왼쪽으로 교차시켜 그 끝을 앞머리로 고정시킨 것으로 보통 그위에 흑색가르마를 얹기도 하였다. 얹은머리는 조선조 중기에 크게 유행하여 다래가 성행하였으며 이 다래를 사용하여 틀어 올려 머리를 더욱 크게 만들어 부(富)를 나타내기도 했는데, 당시 여자복식의 멋과 유행의 집점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기녀의 머리모양도 예외는 아니었다.풍속화인 김홍도의 「평안감사환영도」를 보면 관기(官妓)의 얹은머리와 동기(童妓)의 사양머리는 대조되고 있다. 동기의 머리모양은 쪽은 두개이지만 비녀는 하나로 쪽을 고정시키고 있다.이러한 사양머리는 비녀를 꽂아서 새앙낭자라고 했다.또한「정조실록」을 보면 각 궁방의 수사리 의녀 침선비등과 각 고을의 기녀들은 본 발로 머리를 얹은 뒤에 가르마를 써서 등의를 구별하도록 했다.
출처:상고시대
인간이 머리카락에 신경을 쓰게 된 기원은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유사이전(有史以前)에 상고시대의 자연피(自然被)가 어느 때 검(劍:묶다)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농경의 정착 생활이 가져다 준 여유가 용모를 미화시키고 간결(簡潔)을 추구하는 본 뜻을 발동시켰을 것은 추측키 어렵지 않다.
모발 정리의 풍속은 문헌 비고에 단군원년부터 땋아서 늘어뜨린 머리모양으로서 편발(編髮)을 하였다고 한다.이것은 설화적 기록에 불과하지만 이런 것을 미루어 볼 때 고대사회에서부터 머리카락을 간수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편발 풍속은 사기열전 조선전조에 위만 조선시대 이전부터 땋아 느렸던 머리를 한데 뭉쳐 머리꼭데기인 정수리부분에 등글 게 묶는 뭉치상투(추계)형태로 변해 갔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여자의 계양(상투모양)은 그 형태를 알 수 없어도 그 존재를 추인할 수 있는 이른 바 오늘날의 상투와 유사한 것이다.
상투의 수발법은 대전 출토 농경문화 청동기에 성인 남자는 상투를 하고 미혼 남자는 풀어헤친 머리모습으로서의 피발한 모습을 이 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이 때 발굴된 청동기는 연대미상이나 청동기시대의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므로 상투의 역사는 대략 2~3세기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나서는 자라는 대로 두었다가 3개월 말일쯤에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의 머리모양인 각(角)과 여자의 머리모습인 기(羈)로 나누어 쌍상투를 했다. 동남, 동녀가래(禮)를 갖추기 위해서는 머리털을 감추는 권책과 넓은 수건인 두건을 썼다. 성인들은 머리를 길러 단발(單髮:하나로 묶는)를 했으나 쌍발(雙髮)은 동자들의 머리형태로서 총(總)으로 머리카락을 묶는 것을 총각(아머리)이라 한다.동자들의 쌍계는 곧 총각이다. 총은 옛날에는 남녀 모두에게 있었으며 10세 내외의 어린이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아직 덜 자란 머리를 임시로 묶는 양식이다.
우리 나라의 쌍계 역사는 기자 조선 때부터라 하기도 하고 몽고풍이라 하기도 하여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 머리묶음의 형식은 자연발생적인 원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역사는 오래 되었다고 본다.이러한 추계형태는 부락 공동체를 이루어 꽤 안정된 생활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는 삼한시대로 오면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에서 또다른 머리형태를 산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해동역사(海東歷史)에 "三國의 부인은 반발(盤髮)인 일종의 얹은 머리를 하였는데 모두 아발(鴉髮)을 지었고 남은 머리카락은 늘어뜨렸으며 미혼모는 말아서 뒤로 쳐지게 늘어뜨렸다"고 하였다.
채협총에서 출토된 채화칠협에서 나타나 있는 인물상을 살펴보면,머리가 정돈되어 있고 이마를 넓히기 위해 머리털을 뽑은 흔적이 있으며,눈썹이 굵고 진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그 새대에 최소한 단정한 몸차림이 생활의 기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마를 넓게 보이고자 하는 노력은 그 시대 이미 어떤 종류의 미의식이 작용했으며,그에 따라 자신의 용모를 가꾸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이밖에도 원시화장이라고 알 수 있는 문신(文身)이 마한과 변진인에 의해 행해졌다.조선명윤록(朝鮮明倫錄)에 의하면 문신의 발단은 원래 원시화장이었으며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변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삼국시대
수발(首髮)의 풍속은 국가의 체계가 갖추어지고 생활수준이 높아진 삼국시대에 이르러 다양화되었다.고구려의 벽화에 나타난 여인들의 두발형은 다양하고,백제의 여성은 혼인을 전후로 머리의 형태가 달랐으며 신라의 여인들은 가발을 사용해 장발(長髮)의 처리기술이 뛰어났다. 또한 이 시대는 머리형으로 신분과 지위를 나타냈다는 점이 주목된다. 얼굴화장에는 백분과 연지 눈썹먹 등이 사용되었고 특히 남자들의 화장이 행해졌으며 향수와 향료가 제조 되었다. 장신구에는 관(冠)과 관장식,귀걸이,팔지,반지,비녀 등이 있으며 비녀로는 청동제와 은제가 있는데 모두 현재 열린 핀의 형태이다.
■고구려의 수발(首髮)(고구려~조선)
계는 머리를 맺는 양식으로서 그것은 자연발의 상태에서 발달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계는 고금을 통해서 남자보다도 여자에게 있어 더욱 복잡한 것이었고 그 장식도 다양하다. 상대(上代) 우리나라 계양에 있어서도 남자는 남북이 모두 수계(상투) 한가지 였지만 여자에게는 다섯가지 계양을 지적할 수 있다.
1) 얹은머리:모발을 뒷머리로 부터 아퍼리로 감아 돌리어 끝을 앞머리 가운데에 감아 꽂은 것으로 무용총 주실 우벽에 밥상을 받든 여인도에서 볼 수 있다.
2) 쪽진머리:두발을 뒤통수(Nape point)에 낮게 트는 양식으로 각저층 주실 편벽 둘째번의 여인도 등에서 볼 수 있다.
3) 푼기명머리:두발을 3분하여 한 다발의 머리채는 뒤로하고 두 다발의 머리채는 좌우의 볼족에 늘어뜨린 계양으로 삼실총 제1실 남벽 왼쪽 여인도 등에서 볼 수 있다.
4) 묶은증발머리:짧은 두발을 뒷머리에 낮게 묶은 계양으로서 무용총 주실 우벽의 밥상을 받든 소녀도에서 볼 수 있다.
5) 쌍쌍투머리:머리좌우의 정변 가까이에 두 개의 계두를 솟계한 것으로,중화군 제4호분,제1호분 서벽의 소녀도 등에서 볼 수 있다. 상투는 남자의 계양으로,각저층의 씨름하는 2인의 남인(男人)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에 상투와도 거의 다름이 없다.
■백제의 수발(首髮)
백제시대의 수발형태는 옛 중국의 사서(史書)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북사열전(北史列傳)에 여자는 "머리를 땋아서 뒤로 늘이고 혼례를 하면 두가닥으로 나눠 머리 뒤에 길고 잘 휘는 물건을 헝쿨어지지 않도록 빙빙 둘러서 포개어 감아뒀다."라든지,수서(隨書)에 "머리를 두갈래로 나눠 서린다."라는 기록과 주서(周書)에 "미혼녀 들은 머리를 땋아서 머리 위에 둥그렇게 얹고 다닌다."는 기록으로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수발형태를 통한 백제의 기혼과 미혼의 구별은 그들의 윤리관념을 나타내주고 수식문화가 발달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표상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의 수발형태는 (수서)나 (북서)의 기록에서도 변발(辨髮)의 풍속은 퉁구스족의 공통된 풍습으로서 삼국이 공통된 것이었다고 봐야한다.
신라의 수발
구당서(舊唐書)동이전 신라조에는 "부인의 머리는 매우 아름답고 길다고 하면서 정관5년(631)에 여악사2인을 바친 바 있는데 검은머리가 아름답다고" 기술 했었다.또한 다래도 유행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때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편에 다래를 예물(禮物)로 가져가게 했다는 것과 경문왕때 당나라에 가는 사신이 4자5치 길이의 다래 1백50냥과 5자3치 다래 3백냥을 가지고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더욱이 성덕왕 22년초에는 미체라는 것이 나오고 경문왕9년조에는 4척5촌 두발 또는 3척5촌 두발이라는 것이 나오고 있어 그 당시 이미 다래(체)가 신라의 명물(名物)로써 외국으로 수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남자도 가발을 잘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당서 동이전 신라조에 "신라의 남자는 머리를 깎아 팔고 흑건을 썼다."함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는 상투를 틀던 당시 가난한 자는 부득이 머리를 깎아 다래로서 팔고 다시 머리가 자라 상투를 틀게 될 때까지 맨머리를 가리기 위해 흑건(黑巾)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수발형태는 우리 나라의 사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서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수서'에는 "부인이 머리를 땋아 머리에 두르고 여러가지 비단과 구술로 장식했다."고 기록돼있어 신라시대에는 얹은머리가 유행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고 려 시 대
통일신라시대의 뒤를 이은 고려 태조는 신라의 정치제도와 문화전통을 계승하는 정책을 시행해 국교(國敎)도 계속 불교로 받아들였다. 또한 국초(國初)부터 중국의 기녀제도를 본받아 교방을 두는 등 기녀를 제도화 시킴으로써 외형상 사치해졌고 내면상으로는 탐미주의의 경향이 농후해졌다.
■고려의 수발
머리모양은 쪽진머리와 비슷하나 쪽을 머리 위에 붙인 것이 아니라 머리다발 중간에 틀어 심홍색의 갑사로 만든 댕기로 묶은 것이 다르다.또한 비녀를 꽂으나 오른쪽어깨 위에 닿을 정도로 늘어지게 쪽을 찌르고 나머지 머리다발 즉 머리꼬리는 아래로 늘어뜨리는 식의 머리형태이며 부녀의 계양은 귀천없이 동일했었다고 볼 수 있다. 절세가인을 노래한 고려시대의 시(時)를 살펴보면 "구름같은 머리털에 옥잠(玉簪)을 꽂았구나"하는 구절을 보아서도 가체를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비녀가 사용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따르면 일반서민남자의 수발형태는 "마흔인 경우 노끈으로 머리를 묶고 그 나머지는 아래로 늘어뜨렸으며 장가를 들지 않은 자는 건(巾)으로 머리를 싸고 내려뜨리다가 장가든 뒤에 속발(束髮) 즉,상투를 튼다."고 전해진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고려시대 기혼여성들의 수발모습은 상대(上代)의 얹은 머리와 비슷한 형태이나 귀밑머리를 실타래처럼 틀어 오른쪽 어깨에 드리움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을 시작했던 것 같다.이와 같이 고려여성의 머리모양이 얹은 머리였다는 사실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하회탈의 각시 상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이를 보면 미혼녀의 경우는 미혼남자의 수발형태와 동일했고 다만 남자의 상투를 묶는 노끈 대신 붉은 비단으로 머리를 묶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고려도경[귀녀도]에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경우 열살 남짓한 여자였는데도 피발을 하지 않았다." 는 기록이 보이는 바 일부 귀족층에서는 어린아이의 머리를 틀어 올려 어른스럽게 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드문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머리를 붉은 비단으로 묶어준 후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것이 상례였다.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조 선 시 대
무릇 여인들의 머리모양은 고금을 불문하고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으로 인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비롯해 남자들보다 휠씬 더 복잡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의 수발
고려가 원(元)의 풍속을 따르기 이전까지 전시대인 시라의 수발형태를 그대로 따랐던 것처럼 조선조 역시 처음에는 고려의 풍속을 이어 받아 부녀의 대표적인 머리형태는 얹은머리 즉, 속명「트레머리」라고 하여 쪽머리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수발형태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상고시대부터 전개되어온 전통적인 머리형태였다. 얹은머리와 쪽머리의 머리모양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습속(習俗)이 뿌리깊었음을 볼 수 있다. 얹은 머리는 빗어 넘긴 머리를 뒤에서 두가닥내고,왼쪽가닥은 오른쪽으로 오른쪽은 왼쪽으로 교차시켜 그 끝을 앞머리로 고정시킨 것으로 보통 그위에 흑색가르마를 얹기도 하였다. 얹은머리는 조선조 중기에 크게 유행하여 다래가 성행하였으며 이 다래를 사용하여 틀어 올려 머리를 더욱 크게 만들어 부(富)를 나타내기도 했는데, 당시 여자복식의 멋과 유행의 집점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기녀의 머리모양도 예외는 아니었다.풍속화인 김홍도의 「평안감사환영도」를 보면 관기(官妓)의 얹은머리와 동기(童妓)의 사양머리는 대조되고 있다. 동기의 머리모양은 쪽은 두개이지만 비녀는 하나로 쪽을 고정시키고 있다.이러한 사양머리는 비녀를 꽂아서 새앙낭자라고 했다.또한「정조실록」을 보면 각 궁방의 수사리 의녀 침선비등과 각 고을의 기녀들은 본 발로 머리를 얹은 뒤에 가르마를 써서 등의를 구별하도록 했다.
출처:http://www.hairline.co.kr/OSSB2/Root/khome/khair-i0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