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해 겨울 덕정리 일대의 소개 명령이 떨어졌다. 적을 유인하여 원자탄을 쓸 것이니 살고 싶으면 38선으로부터 50리(?)밖으로 소개하라는 통보를 받고 동네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고 동네는 텅 비우게 되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어머님은 해소 병이 악화되어 퉁퉁 부으셨고 촌보를 움직이지 못하셨다. 그래도 횃대를 잡고 걸음 연습을 하시면서 좀 나으면 나가자고 하셨다. 빈 동네를 지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개도 짖지 않았다.
드디어 구세주가 나타나셨다. 칠봉산 밑 봉양리 현암동 거무네미 누님이 오셨다 그는 사력을 다하여 짝짝 미끄러지는 시오리 빙판 길을 한번 쉬지도 않고 주내면 덕고개 안 동네 큰댁으로 모셨다. 어머니를 모실 피난을 포기한 10촌 누나가 나타나자 외아들인 나는 피난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고집과 주위의 권유로 송산까지 나갔으나
중국지원군의 진격속도가 워낙 빨라 결국 저녘에 조명탄을 낮같이 밝혀놓고 폭격과 포격을 가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흰 홑이불을 만또처럼 두른 중공군(중국 인민 해방군 지원군)이 왔다. 우리가 돌아올 때 근방에 폭격을 당했으나 피해자는 없었다.
그들은 기관지 천식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시신을 묻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땅을 파는데 곡괭이가 텅텅 튀었다. 어느 날 갑자기 쌕쌔기(제트기)가 마을로 덮쳤는데 방공호 속으로 뛰어든 우리는 무사했으나 우리가 있던 방 옆 마루에 놓였던 뒤주를 기관포탄이 관통했고 옆집 할머니 벌 되는 분이 허벅지 관통상을 입으셨다. 그분은 호박 삶은 것과 소금을 섞은 즙을 상처 부위에 처매고 나셨다. 우리 동네는 홍씨 집성촌이었다. 길, 마당에는 기관포탄이 언땅을 뚫지 못하고 강철 탄환만 박히고 구리 외피가 널려져 있었다. 실탄 사격은 따따따가 아니고 마른나무더미를 거대한 힘으로 일시에 짓이기는 소리가 난다. 아지직!아지직!한다고나 할까? 이 경험으로 4.19경무대 공격 시 실탄 사격을 즉각 감지 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칠봉산 밑 누님 댁으로 왔다. 나는 비행기 공포증과 방공호에 물이 차 상한 곡식 밥으로 식욕을 잃고 있었는데 이 곳으로 온 후 알타리 김치 된장찌개에 입맛을 찾고 이 동네는 비행기가 와 사람들이 나다니고 있었다. 아마 공군 당국도 민간인이 있다고 알고 있어 폭격이 고려 된 것 같았다.
중국 지원군들은 부대 이동이 주로 도보였다. 그래서 누빈 방한복과 여러 종류의 신발은 튼튼하고 따뜻했다. 주요 수송수단은 노새가 끄는 마차였다. 그들은 학습 등을 위한 만년필이나 손전등이 잘 보급되었고 우리들은 장수연 담배로 그 것들과 맞바꾸어 사용할 수 있었고 국군이 버리고 간 권총을 챙겨 논 애들의 수입은 더 짭짤했다.
주로 밤에 행군했다. 어둠이 깔리면 있던 부대는 이동하고 새 부대가 왔다. 노새 울음소리 마차 바퀴소리 ,그리고 허리에 찬 물 컵과 수저 호크가 부디쳐 절겅거리는 소리 그리고 각 집으로 숙소를 배정하는 지휘관이 낯선 언어...
그들의 무기는 노획한 미제무기가 꽤 있었다. 모택동의 말 "우리의 무기고는 바로 미국에 있다" 주인집 여자들은 아랫목으로 그들은 윗목으로, 그래서 그 경계선은 당연히 남자인 내 몫이 되었다. 심지어 칫솔 치약까지 미제가 많았다. 밤에는 문을 가리고 전대에다 넣을 미수 가루나. 간단한 과자를 굽거나 튀겼다. 나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집어먹곤 했다. 쌀은 몰래 땅에 묻는데 총 창으로 찔러 잘도 찾아냈다. 붉은 돈(북한 전시 화폐)을 주기는 하나 그것으로 교환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치 된장 간장은 나누어 먹었다. 물론 돈을 주고..
달빛이 교교한 한밤 내 옆에 자던 병사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울고 있었다. 쌍 가랑머리 예쁜 여자의 사진 ..손발언어로 의사 소통, 그는 북경대학 의과 출신이고 그 여자는 간호사 ....
시아버지와 며느리만 남은 집에 들었던 한 병사는 밤에 자다가 며느리의 치마꼬리를 잡았다가 고발되어 저녁 회의인지 군법회의인지 동방홍(모택동 찬가)등의 노래를 부른 후 ....등등 광에다 가두고 밥을 굶기는 벌을 주는 것을 보았다. 광에는 열쇠도 안 잠갔는데 그는 나오려 하지도 않았다.
눈이 하얗게 덮이고 그들의 모자 옷의 안쪽은 하얗고, 비행기가 뜨면 하얀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훌륭한 대피. 밤이면 어떤 이는 앞밭에 쓰러져 있던 꽁꽁 얼은 국군의 시체를 일으켜 세워 한 방 치는 경우도 목격되었다.
"너희들은 국군이 오면 그만이야 알았어?'"하니 그 병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날 윗동네 가보니 그 사람이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게 아닌가. 그는 통역관이었다. 나를 본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수통을 벗어 걸어 주고 머리를 만지고 한번 웃더니 가 버렸다. 나는 혼이 나는 줄 알았다.
얼마 있다 동네로 포격이 가해졌다. 멀리 가는 포탄 소리는 부웅... 아니면 삐 융..하는 소리가 나지만 근처로 떨어지는 소리는 '쓔 ㅅ 챵!'이었다.
용인 선까지 밀렸던 전선을 다시 북으로 밀고 하는 과정을 거쳐 그들은 갔고 국군이 다시 왔다. 온 동네를 장 티브스가 휩쓸고 나도 예외 없이 걸려 되걸린 것까지 합쳐서 꼭 하달만에 간신히 살아 남았다. 후에 사람들은 미국이 세균전을 했다고 주장했다. 의료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기적 같은 회생이었다. 나무 한 짐하고 동지팥죽 먹은 후 주서 온 수류탄에서 분리해 낸 뇌관에 불 붇혀 던지다. 손가락 셋을 잃었다. 벌말 춘향이는 한 손목을 잃었고 엄상굴 우리 반 이었던 애는 안 마당에서 지뢰를 안고 두드리다 터져 완전 분해되어 고깃점이 외양간 기둥에 너덜너덜 붙었다고 했다.
해방 때 우리나이 일곱 살이었던 소년은 대학생이 되었다. 일제의 폭압과 민족의 분단을 알게 되었다. 그는 대구 폭동, 제주 4,3항쟁, 여수 순천 반란 등을 배웠다. 4.19때 경무대를 공격했다, 그리고 광주 민주화 항쟁 후 다가온 87년6월,
아!, 6월, 땅이여! 하늘이여 대학생은 장년이 되었다. 6월 항쟁 전두환 군사 폭압 정치를 마감하고 대통령직선제를 끌어냈다 김종철의 원혼이 어느 정도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아! 6월, 땅이여! 하늘이여 2000년6월 15일 이제 장년은 노년이 되었다.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맞났다! 그 감격이 우리들 마음 속과 이 땅 이 하늘에 울려 메아리 쳤다.
이제 6월의 땅과 하늘은 월드컵 4강 진입 광주 승리를 놓고 온 나라가 응원의 열기로 충만 팽배해 있다. 붉은 응원단이 열기는 남녀 노유를 막론하고 그 정도가 극을 달리고 있고 국민적 단합을 온 세계에 과시하였다. 아마 새로운 응원문화가 남한의 것을 따라 세계로 확산되리라 확신한다.
그러나 이 국민적 열기를 민족적 열기로 그 질적으로 고양할 것을 제시하고 싶다. 6월! 6월항쟁 및 6.15 남북 공동 성명. 6월에 상기하고 기려야 할 일들과 급등하는 부시의 지구촌을 겨냥한 전쟁 계획들, 당면하고 있는 노동자 문제들이 월드컵 열기에 함몰되어 지나쳐 버림을 간과하지 말자. 그리고 6월 월드컵과 아리랑 축전. 우리는 이 열기를 모아 올바른 선거 문화와 민족의 화해와 교류 협력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촉진시켜야 한다.
북한은 이미 5,6월 두 달간 시행되는 아리랑 축전이 남한의 월드컵 경기 마감과 때를 같이하려다 북이 그 행사를 7월 15릴로 연장하엿으나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로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6.15 남북 금강산 축전도 14.-15일에 성공리에 끝났다. 이 열기가 민주화와 통일로 직결되기를 기원한다.
아 6월 ,땅이여! 하늘이여
<자료1> 6.25 남북 전쟁 (백과사전 발췌)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동시에 투입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 ·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제203전차연대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 ·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 ·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 왔다.
남한에 대한 북한의 남침을 평화의 파괴 ·침략행위로 보고 미국 정부는 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즉시 소집을 요구하였다. 같은 날 오후 2시에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이 제출한 결의안을 9:0, 기권 1(유고슬라비아), 결석 1(소련)로 채택하고, 평화의 파괴를 선언하고 적대행위의 중지와 북한군의 38선까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동 결의안은 또한 모든 회원국이 동 결의안의 집행에 있어 유엔에 대하여 모든 원조를 제공하며, 북한집단에 원조를 하지 않도록 촉구하였다.
6월 27일의 안전보장이사회 회합에서 미국대표 W.R.오스틴 대사는 6월 25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무시한 북한군의 계속적인 대한민국 침략은 ‘국제연합 자체에 대한 공격임’을 천명하고, 국제평화회복을 위하여 강력한 제재를 취하는 것이 안전보장이사회의 임무라고 선언, 안전보장이사회의 토의를 위하여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는 같은 날 정오에 대통령 트루먼의 발표문을 낭독한 후 “결의안과 본인의 성명요지 및 대통령 트루먼이 취한 조치의 중점은 유엔의 목적과 원칙, 즉 평화를 지지하는데 있다”고 밝혔다.
그 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찬성 7, 반대 1, 기권 2, 결석 1로 유엔 회원국들이 동 지역에서의 군사적 공격을 격퇴시키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6월 27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회원국이 제공하려는 원조형식에 관하여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한 6월 29일의 유엔 사무총장 서한에 대한 회원국들의 반응은 신속하였고, 압도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각종 원조제공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대한민국 방위작전을 통일화하기 위하여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에 7:0, 기권 3, 결석 1로써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이 미국이 지휘하는 ‘통합사령부’에 집결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한편, 미국과 관계 회원국들은 즉각적으로 동 결의에 따랐으며,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프랑스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 ·타이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16개국이 육 ·해 ·공군의 병력과 장비를 지원하였으며, 그 밖에 많은 나라들도 각종의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한국에 제공하였다.
그 후 같은 해 9월 16일의 인천상륙작전을 전환점으로 하여 전세를 반전시킨 유엔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 10월에는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에는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38선이 돌파된 후인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서울을 철수하게 되어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고착되었다.
1951년 2월 1일 유엔 총회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탄하고 한반도에서의 중공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앞의 6월 25일의 결의와 6월 27일의 결의에 소련은 결석했으며, 공산 측은 결석을 거부권의 행사라고 주장하여 앞의 결의는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엔의 관행상 결석은 거부권행사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 ·25전쟁의 3년 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었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희생자였다.
또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 ·종교인 ·공무원 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휴전협정 제60항에 의거하여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대한민국과 유엔군 측의 16개 참전국, 그리고 공산군측의 북한 ·중공 및 소련 등 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대한민국과 유엔군 측 참전 16개국은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방안으로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토착인구 비례에 의하여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자유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고, 그 결과에 의하여 통일 독립된 민주적 한국정부를 수립하자'는 안을 제시하고, 주한 유엔군은 이러한 목포가 달성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전을 지키게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공산 측은 오로지 주한 유엔군의 철수를 강요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위장평화통일 제안을 내놓고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함으로써 회담을 교착시켰으며, 회담은 같은 해 6월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휴전선으로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 쫒 겨 난 1960년대 초에 씀 아버지는 골방에서 죽어갔다네. 어머니는 냉방에서 죽어갔다네.
이진사네 김진사네 그 아들의 그 아들놈이 나를 때리고 오막이 불태워 없어지던 날 나는 산넘고 물건너 떠나왔다네
옆집에 분이누나 잘있으라오 등넘어 돌쇠할매 잘있으라요
10원짜리를 100원에 팔라는게요? 윤사장 장전무가 또 나를 때리고 고랑채여 바람부는 거리로 나왔습니다.
아빠처럼 골방에서 죽어갈가나 엄마처럼 냉방에서 죽어갈가나
지금 쯤 고향에는 봄이 왔겠지 복사꽃 망울지는 고향의 뜰에 황소풍경 쩔렁이는 고향에 들에
돌쇠할매, 분이누나 내 살아서 갚으리이다. 내 죽어서라도 꼭 갚으리이다.
<자료2> 6월 항쟁(백가 사전 발췌)
전두환 군부 정권의 호헌 조치에 반대하고 최종철 고문치사 은폐사건이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폭로로 기폭제가 되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4.13 호헌 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 ·29선언을 발표하였다. 1987년 6월 29선언
6월 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리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최대 인원인 100여만 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력이 마비되자 정부는 한때 군 투입을 검토하였으나 온건론이 우세하여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며,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3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자료3> (통일부)
남북공동선언(전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6월 15일
대 한 민 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 통 령 국 방 위 원 장 김 대 중 김 정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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