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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 Bruckner(1824 안스펠덴, 오버외스터라이히 주-1896 빈)
오스트리아의 오르간 주자, 작곡가. 1776년에 안스펠덴(린츠의 남쪽 15km)에 자리잡은 그의 할아버지는 이 시골의 옛 가문(암스테텐 근처의 외트 출신)에서 학교 교사가 된 최초의 인물이었다. 1814년부터는 그 아들인 안톤 브루크너(父)가 보조 교원이 되었고, 1823년에는 아버지의 후임이 되었다. 안톤은 테레지아 헬름 Theresia Helm과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요제프 안톤 Josef Anton(아들)은 1년 후인 9월 4일에 출생했다(뒤이어 세 누이와 정신박약의 기미가 보이는 동생 이그나츠 Ignaz가 태어났다). 요제프 안톤이 음악에 대해 최초로 눈을 뜨게 된 것은 회르싱에서 오르간 주자로 있던 사촌 요한 밥티스트 바이스 Johann Baptist Weiss(1812-50)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서였다. 그는 1835년과 1836년에 이 사촌의 집에 머물며 잘 알려진 최초의 습작, 오르간을 위한 4개의 프렐류드를 작곡했다. 안스펠덴으로 돌아온 후 그는 일찍이 학교나 마을의 무도 모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아버지를 도왔다. 그러나 이듬해 아버지의 너무 빠른 죽음으로, 수도원장인 미하엘 아르네트 Michael Arneth의 주선으로 근처에 있는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성가대원 양성소로 들어갔다. 아르네트가 안톤을 위하여 양부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양성소에서 일반 교양과 최초의 음악교육을 받았다. 특히 뒤에 〈브루크너 오르간〉이라 불려지게 된 그는 이 수도원의 오르간 정교수 안톤 카팅거 Anton Kattinger의 밑에서 오르간을 배웠다. 16세 때 장차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앞에 놓고 안톤 브루크너는 간단하게 아버지처럼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는 린츠의 교원 양성소에서 1년 동안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아우구스트 뒤른베르거 August Dürnberger(1800-80) 밑에서 특히 화성과 대위법 레슨을 받았다. 안톤은 8년간에 걸쳐서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의 작은 마을에서 조교원(助敎員)생활을 계속했다. 슈타이어 근처의 크론슈토르프에서는 오르간 주자인 레오폴트 폰 체네티 Leopold von Zenetti(1805-92)에게 레슨을 받았다. 이어서 1845년부터 성 플로리안의 조교원에 임명되었으며, 1848년 3월 부오르간 주자가 된 3년 후 정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몇 곡의 오르간곡과 많은 종교적 모테트 외에, 이 〈초기〉에는 이미 매우 의미깊은 두 작품의 탄생을 보게 된다. 1849년의 레퀴엠 d단조와 5년 후의, 미사곡으로는 네 번째 시도인 미사 솔렘니스 B♭장조 등 두 곡이다.
〈돔〉의 오르간 주자
미사 솔렘니스는 특히 그의 생애와 업적에 있어서의 최초의 고비를 나타낸다. 보호자인 아르네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 젊은 오르간 주자는 자기의 운명이 더 이상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 없음을 깨닫고 이듬해 여러 가지 시험을 쳐서 많은 자격증을 얻은 다음, 우선 올뮈츠의 오르간 주자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게 된다. 다음에는 린츠에 지원하여 그곳에서 1855년 11월 옛 고성당 〈돔〉(현재의 이그나치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지방 도시에 약 13년간 봉직했다. 모짜르트를 위한 음악제가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되듯이 이 고장은 현재 음악제를 열어서 그를 기리고 있으며, 이 음악제는 해마다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다. 브루크너의 이 린츠에서의 체류는 같은 기간의 두 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제1단계는 그 음악이론의 모든 것을 기초부터 다시 배우는, 이 나이의 예술가로서는 보기 드문 예였다. 이미 38년 전에 슈베르트로부터 가르침을 청해 받은 적이 있는 빈의 뛰어난 대위법 작곡가 지몬 제히터(1788-1867)가 안톤을 제자로 인정해 주었다. 안톤은 배편을 이용하여 매달 스승의 집으로 갔다. 그는 배를 타고 강가의 풍경을 즐기면서 도나우 강을 내려갔는데, 그의 작품 속에는 그때의 인상이 담겨져 있다. 이 일련의 교육(1861년 11월 음악원의 교수 자격을 인정받았다)이 그가 받은 최후의 교육과정은 아니었다. 다시 2년에 걸쳐 자기보다 10세나 연하인 린츠 극장의 악장 오토 키츨러 Otto Kitzler에게 오케스트라 기법을 지도받았던 것이다. 키츨러는 브루크너가 생각지도 못했던 모든 새로운 레퍼토리, 베버에서 슈포어,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슈만이나 리스트를 거쳐서 바그너에 이르기까지를 일일이 보여 주었다. 그 중에서도 바그너 예술과의 최초의 만남은 1863년 2월의 탄호이저의 린츠 초연에서였다.
교회 음악가에서 교향곡 작곡가로
제히터가 제자에게 전면적인 창작활동을 금지한데 반해서(이 시기의 작품은 1856년에 가필하여 1861년에 처음으로 완성한 독창과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편 제146편 뿐이다), 키츨러는 초기의 습작을 〈고귀한〉 기악곡 형식으로 쓰게 했다. 그래서 현악4중주곡 c단조(이 곡은 1951년이 되어서야 알려지게 된다)와 슈베르트의 연장선상에 있는 뛰어난 서곡 g단조가 1862년에 완성되었는데, 브루크너는 이듬해 f단조의 최초의 교향곡(이른바 〈습작〉)에 서명했다. 그는 이 교향곡을 곧이어 구상된 교향곡 d단조와 함께 최종적인 번호 붙임에서 빼버렸으나, 뒤늦게 후회하여 말년에 가서는 〈0번〉이라는 상징적 번호를 교향곡 d단조에 붙이게 된다. 〈린츠 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에 브루크너는 불멸의 전례용 작품을 창작했다. 유명한 7부합창 아베 마리아(1861)를 포함하는 제2모테트 시리즈와 아울러 가장 중요한 3개의 미사곡이 작곡된 것이다. 미사곡 제5번 d단조(출판된 것으로는 제1번)는 1864년에 완성되어 초연되었으며, 해설자 모리츠 폰 마이펠트 Moritz von Mayfeld는 이 작품 속에서 브루크너의 천부적인 재능이 갑자기 개화했다고 믿었다(이 브루크너의 친구는 호의적이기는 했지만, 그의 이제까지의 창작활동 전체와 끊임없는 진보가 결과적으로 이 작품을 낳게 되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15개의 관악기 반주가 수반된 미사곡 제6번(제2번) e단조는 1866년 여름 동안에 작곡된 것인데 1869년에야 가까스로 야외에서 초연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곡이지만 제6번에 비해서 보다 주관적 표현을 가진 미사곡 제7번(제3번) f단조 "대미사"는 1867년의 심한 우울증 속에서 병을 〈쫓아내기라도〉 하듯이 착수되었다. 1872년 빈에서 초연된 이 미사곡은 에두아르트 한슬릭에게 열렬히 받아들여졌으며, 그는 이 곡을 베토벤의 미사 솔렘니스와 비교했다. 그러나 진지한 신앙 속에서 이런 감명깊은 곡을 만들어냈다고는 해도, 안톤은 이러한 작품에서는 보다 순수하게 개인적이고 자기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듯한 표현을 하고 산다는 급박한 욕망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욕구는 오랫동안 억제되어 있었던 만큼 더욱 강렬했으며 교향곡에서 폭발하게 되었다. 교향곡 제1번 c단조(186566)의 격렬한 대조와 격렬한 이끔은 다름 아닌 형식과 화성의 대담함에서 나온 것이며, 그러한 것들에 의해서 이 작품은 교향곡의 근대적 쇄신의 최초의 기초가 되었다. 1868년 5월 9일 린츠에서 열린 이 작품의 첫 공개연주회(브람스의 최초의 교향곡이 등장하기 8년 전의 일이었다)에서 이 교향곡이 그에게 작곡가로서는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에게 주어졌던 명성 이상의 성공을 안겨주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이때부터 계속 이 작곡가는 이해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까지의 그의 주요 작품이 모두 그러했던 것처럼 이 작품도 브루크너 자신이 직접 초연을 지휘했다. 데뷔 이래, 성가대장이라는 부차적인 활동이 〈세속의〉 음악생활에 종종 그를 등장시켰다는 것을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이다. 1865년부터 사귀어 오던 바그너는 1868년 4월 브루크너에게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의 일부를 초연에 앞서 합창 연주할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브루크너는 직접 린츠의 전문 합창단을 위하여 많은 곡을 작곡했다. 이들 곡은 지금도 여전히 게르만 여러 나라에서 불려지고 있는데 외국에서는 거의 불려지지 않는다. 1867년 9월에 세상을 떠난 제히터는 빈 음악원의 교수직과 왕실 예배당 오르간 주자의 후임으로 그를 지명했었다. 열망하던 지위였지만 막상 이러한 중책이 자기에게 주어지려 하자, 그는 당황하여 이를 사양하고 다른 곳(잘츠부르크나 뮌헨)에서 오르간 주자를 맡으려 했으나, 결국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의 발견자이며 또한 브루크너의 찬미자였던 요한 헤르베크 Johann Herbeck의 설득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맡게 된다. 브루크너 임명의 칙명은 1868년 7월 음악원에서 내려져 9월 4일그의 44세 탄생일에 그는 왕실 예배당에 부임한다. 이튿날 그는 빈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 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는 이 고장이 그의 골고다의 언덕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양면적인 성격
가사 일을 돌보아주는 막내 여동생 마리아 안나와 함께 브루크너는 빈의 베링거가 42번지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 때 그는 이미 중년이 되어 있었는데 아직은 오늘날 알려지고 있는 이미지갖은 시련이 겹쳐 허리가 굽은 백발의 고행자(苦行者)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겸허함과 온갖 세속적, 종교적인 권위 앞에 머리를 숙이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제도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일지도 모르고 브루크너 자신의 선택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그너와 만났을 때도 그러했다(오토 뵐러 Otto Bo‥hler가 묘사한 유명한 실루엣을 보면, 실제는 반대인데 그가 바그너보다 키가 작게 그려져 있다). 그의 행동, 건반 조작을 하는 데 필요한 이상으로 헐렁한 의복, 시골 사투리(프랑스에서 말하자면 베리 지방 농민의 사투리 같은) 등은 모두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이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부정하는 충분한 기량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우직하다는 평판(말러는 반은 신(神), 반은 얼간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을 이용하여 지식계급의 경계심을 풀면서 조금씩 아무도 그가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위치에 올랐다. 그는 특히 신앙심을 표출하여 자기의 주변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하면서 그 그늘에 천부적인 재능을 증명할 야심을 감추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것을 〈출세주의적〉 야심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약 30년 동안 자기의 음악에 대한 적성에 의문을 갖던 끝에, 자기가 완성하도록 운명지워진 작품에 대해서 의식하고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최악의 시련에도 견뎌낼 준비가 되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목적의 도달 수단으로 하는 것 이외에는 승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학교 교사의 아들이며 손자였던 그는 좋은 교사가 될 운명을 타고났었다. 그리하여 음악원뿐만 아니라 본래라면 발을 붙이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인 대학에서도 끈기있게 그 재능을 이용했다.
제2차 빈 악파
대신에게 간청하여, 또한 동료인 한슬릭의 영역을 침범하여 그와 결별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는 1875년 마침내 철학의 학위를 받으려는 학생들에게 개설된 음악이론 강좌를 얻었다(그러나 처음에는 무보수였다). 이 강좌에는 20년간에 걸쳐서 음악가뿐만 아니라 후에 유명해지는 빈의 많은 사상가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그들과 가족적이라고 해도 좋을 관계를 맺었던 이 거장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갖게 되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저서 속에서 갖가지 형태로 이 거장을 찬양하고 있다. 말러처럼 음악원과 대학의 양쪽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도 있었다. 브루크너는 또 사(私)제자도 두고 있었는데, 후고 볼프는 빈 살롱 Wiener Salonblatt지 속에서 브루크너를 열심히 변호하였고,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에게 증언을 의뢰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제2차 빈 악파〉라는 말은 쇤베르크의 그룹(이것은 〈제3차〉가 될 것이다)에 대해서가 아니라 브루크너와 그의 중요한 두 후계자인 후고 볼프와 구스타프 말러, 그리고 그 이외에도 프란츠 슈미트 같은 몇몇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룹에 대해서 사용해야만 한다. 사상이나 스타일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음악적 유사성이 그들을 서법의 차원과 몇 개의 명백한 인용이라는 차원에서 결부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을 특징짓는 듯한, 그리고 결국은 조성(調性)의 세계를 분쇄하게 되는 한 형식과 어법의 획득이라는 점에서 부르크너의 선행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패배에서 승리로
여기서는 그의 음악상의 운명을 간단히 실펴보는 것이기 때문에 거장의 빈 도착으로 거
슬러 올라가기로 하자. 그의 음악상의 운명은 사생활과 합쳐져 있었다. 작곡을 위하여 그는 자기의 3중의 역할을 끝낸 나머지 짧은 시간을 모두 할애하려고 했다(그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생애의 마지막 5년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최후의 작품 교향곡 제9번을 잘 완성시키기에는 이미 때는 늦었었다). 가정 내에서의 행복이라는 면에서는 적어도 두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언제나 그는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종교상의 비타협성을 단념하게 된 것이다(적어도 그것이 그의 변명의 말이었다). 1870년 누이동생이 죽자 하녀 카티 카헬마이어 Kathi Kachelmayer를 고용하게 되었고, 이 여성은 그가 죽을 때까지 헌신적으로 그를 돌보아 주었다. 매년 여름, 그는 공부하며 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다. 세 차례에 걸쳐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와 더불어 빈에서의 28년간의 체류가 가장 중요하다. 1869년에는 프랑스(낭시와 파리)를, 1871년에는 런던을 오르간 주자로서 방문하여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1880년에는 바이에른, 스위스, 오트 사부아를 관광차 여행했다. 그 이외에는 자기 작품의 각종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하여 몇 차례 독일을 방문한 것이 여행의 전부였다. 독일에서의 이러한 콘서트에서는 빈보다 먼저 작품이 연주될 때도 있었다. 물론 바이로이트 음악제에도 가서 곧 그 단골이 되었다. 그밖에는 특별히 두드러진 일은 없었다. 단지 1877년에 헤세가와 린크가가 교차하는 가도의 집으로, 그리고 1895년에는 프랑스와 요제프 황제로부터 자유로운 사용이 허용된 벨베데르 궁의 위병 막사로 두 번 이사했을 뿐이다. 에피소드로는 1886년 황제의 리셉션 이야기가 있다. 이 자리에서 황제는 이 음악가로부터 너무 심하게 나를 몰아붙이지 말라고 한슬릭에게 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부탁을 들었다. 또, 단 한 차례 브람스와 레스토랑 X춤 로텐 이겔에서 만났을 때 그들이 서로 이해한 것은 요리의 재료에 대해서만이었다. 그것은 극단에서 극단으로, 즉 제3번의 패배(1877. 12. 16)에서 제8번의 승리(1892. 12. 18)로 옮겨간다. 특히 그는 1887년에 이 제8번의 초고를 헤르만 레비로부터 거절당해 자살까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반대로, 그의 만년의 가장 큰 기쁨의 하나는 1891년 11월 빈 대학으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일이었다. 이에 이어진 축전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수많은 원고
빈에서 그의 머릿속을 주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교향곡의 기념비적 건설이라는 것이었다. 약 3년간의 단속(斷續) 끝에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도시 생활에 익숙해질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브루크너는 1871년부터 1872년에 작곡한 교향곡 제2번 c단조와 함께 다시 교향곡으로 돌아왔으며, 그 이후 계속 그것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때로는 몇 년에 걸쳐서(특히 1876년부터 1879년까지와 1888년부터 1891년 사이) 이전의 작품을 개작하는 일에 몰두했다. 대부분의 교향곡은 이렇게 해서 2개 내지 3개의 원고를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각 악장에 대해서는 더 많은 이종이 보인다. 오늘날 이들 텍스트는 모두 빈에서 출판된 비판 전집 Kritische Gesamtausgabe에서 볼 수 있다. 극히 사소한 개작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아울러 생각해 볼 때, 브루크너가 만들어낸 교향곡은 9개도 11개도 아닌 무려 17곡이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체계적인 개편은 확실히 무엇보다도 먼저 작품을 완벽한 것으로 하고 주제를 보다 잘 묘사하려고 하는 배려에 호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작은 때로는 귀중한 대담함을 소멸시켜 버린다는 문제점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초고의 재발견은 매우 흥미롭다. 특히 마지막으로 개정한 몇 작품은 제자들의 요구와 동시대 사람들의 귀에 받아들여지는 음악이어야 한다는 그 자신의 연주자로서의 배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제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텍스트를 만들었고 이들 텍스트가 실제로는 최초로 출판된 것이 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텍스트는 오늘날 폐지되어 버리긴 했으나 특히 교향곡 제3번과 제8번의 최종곡에는 그 불쾌한 흔적이 남아 있다.
교향곡의 기법
그의 교향곡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는 순수음악이며, 푸가기법과 같은 의미에서는 교향곡의 기법(A. 마샤베)이라고 칭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확실하며, 어느 교향곡이나 제1교향곡에 관해서는 이미 보아온 바이지만그 실제에 있어서는, 가령 확실한 표제가 없더라도 적어도 작곡가의 창작시의 상황이나 그때 음악가에게 닥쳐온 감정과의 직접적인 유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브루크너는 본질적으로 낭만파라는 것, 따라서 낭만파 시대의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적인 위치에서 말하자면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말러나 20세기 작곡가들의 중간에 위치한다. 이러한 두 사실은 적어도 그의 〈비시간적〉이라는 생각과는 상반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신비주의〉라 불렸던 것도 사실은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앞에 둔 그의 감탄과, 그가 인정한 미의 창조자에 대한 감사의 뜻의 표현이었다. 이 〈신비주의〉라는 말은 그의 전교향곡 중에서, 그리고 특히 그 아다지오에 있어서 항상 변치 않는 그의 사상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아다지오 중 적어도 마지막 5개는 모든 음악 중에서도 가장 영감이 풍부한 페이지로 꼽힐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격렬한 갈등은, 영국의 음악학자 로버트 심슨이 행한 뛰어난 연구에서처럼 화성적 긴장으로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또한 구스타브 카르스 Gustave Kars가 내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러한 힘을 가진, 그리고 이처럼 복잡한 작품이 투쟁도 의심도 존재하지 않는 행복한 인생의 결실일 수 있었던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 방향성에 관해서도 매우 다양했던 이들 교향곡은 어느 것이나 단절됨 없이 발전의 길을 걸었다. 즉, 개개의 교향곡은 선행한 곡에 뒷받침되면서 다음에 생겨날 곡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형식상의 구성은 두 가지 기본 원칙에 따르는데, 그 하나는 후기의 슈베르트에 의해서 이미 착수된 과정을 조직화하여 완성시킨 〈내적 통일〉이다. 단 하나의 중요한 구조에 의해서 악곡 전체를 쌓아 올리는 것이며, 그것이 전악장을 풍부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는 성공을 거두게 한다. 다른 하나는 〈세 주제〉의 소나타 형식이다. 이것은 템포의 연속과 마찬가지로 콘트라스트를 중시한다는 배려에 대응하는 것이다(격렬하거나 서사시적인 두 개의 소재가 서정적 특성을 갖춘 〈가요 주제〉를 에워싼다). 너무나도 널리 보급된 사고방식과는 반대로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곡의 길이도(제5번과 제8번의 두 예외는 제외한다), 오케스트라 편성의 크기도 그 이전의 음악가들의 많은 예(베를리오즈 등)를 초월하지는 않는다. 브루크너는 후기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교향곡에 사용되는 악기 이외의 악기를 사용하는 일은 결코 없었으나 보다 근대적인 테크닉, 그리고 특히 음색의 선택과 배분에 관한 확실한 직관 덕분에 보다 화려한 효과를 이 오케스트라에서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니즌의 남용이 아니라 큰 블록(악기군)을 단위로 하여 발전해 가는 오케스트라의 각 그룹 상호간의 독립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20세기에 처음으로 재발견되는 방법에 의하고 있는 것이다. 브루크너의 표현에서 보이는, 종종 주요 악상의 발전을 준비하는 휴지(온쉼표)의 빈번한 출현 또한 오르간 연주와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침묵〉이 주는 역할은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세 낭만파 작곡가(슈베르트, 브루크너, 말러)에게 공통되고 있다. 그것은 적어도 교향곡에 있어서 오히려 〈허무에의 공포〉를 주장하는 저 독일 낭만파 작곡가(베토벤에서 레거에 이르는)와 그를 구별하는 근본적인 특색인 것이다.
끝으로, 브루크너의 주요 전례작품은 1881년에 착수되어 1884년에 완성한 테 데움을 유일한 예외로 하고 빈에서는 전혀 작곡되지 않았다. 그래서 영광의 시대의 교향곡(제2번 부터 제9번까지)이 종교적 표현과 세속적 표현을 동일한 장르 속에서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음악사를 통하여 거의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해도 좋다. 이 이원성과 서법의 획득 덕분에 브루크너는 J. S. 바흐와 베토벤이라는 두 위대한 인간성의 찬미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역적, 민족적인 테두리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러한 이미지를 주목한다면 한스 폰 뷜로가 꼽은 〈세 거장〉의 세 번째 사람은 브람스가 아니라 브루크너이다. 그에게 바쳐진 다종 다양한 연구는 우리 시대의 음악에 대해서 그의 메시지가 갖고 있는 가치와 중요성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날이 갈수록 더욱더 확실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빈 시대의 많은 걸작들
빈 시대에 작곡된 교향곡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그 특색을 간략하게 말해 두기로 하자. 제2번은 브루크너가 아끼던 제자이며 스승의 가장 중요한 자서전을 쓴 아우구스트 괼레리히 August Göllerich에 의해서 <오버외스터라이히의 교향곡>이라 불려졌다. 탄력적인 스케르쪼가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민속무용은 그 후 적어도 제5번까지의 교향곡의 스케르쪼에 항상 나타나는 요소가 된다). 제3번은 베토벤풍의 서사시적 영감과 니벨룽겐의 반지의 세계를 잇기 위해 처음으로 야심을 불태운 것이며 이것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헌정되었다. 그래서 브루크너는 빈의 전통주의적 비평가들로부터 20년 동안 배척되었다. 제4번은 작곡자 자신이 〈낭만파〉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으며 각 악장에도 소박한 표제가 붙어 있다. 제4번은 전체적으로 자연에 대한 사랑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흔히 비교되는 전원에 비해서 명확하게 지시하는 의도의 횟수는 훨씬 적다. 그 대신 그 순환적인 구성법은 가장 완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5번(1875-77)은 이 작곡가의 특히 전형적인 창작이며, 일련의 교향곡 중에서 최초의 정점을 형성하는 작품이다(그는 이러한 말을 결코 듣는 일이 없었다). 이 작품은 그 중 푸가를 도입한 뛰어난 음의 구축물이며, 빈풍의 서정성에 종교적인 분위기를 결부시키고 있다. 제6번은 이 음악가가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서 만든 것도 아닌 수많은 목가 중의 하나인 에필로그가 아다지오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스케르쪼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제7번은 작곡가에게 국제적으로 영광을 안겨준 교향곡이다. 1884년 12월 30일 아르투르 니키슈에 의해서 라이프찌히에서 행해진 초연은 이튿날 그를 암흑에서 양지바른 곳으로 끌어내 주었다. 이 교향곡에는, 사용되고 있는 선율 자체의 품위도 그러하고 오케스크라의 화려한 장식, 그리고 폭넓은 청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무엇이 있다. 브루크너가 처음으로 튜바를 사용한 아다지오는 바그너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 최후를 장식하는 〈만가 Trauerode〉는 그 13년 후 작곡가 자신의 장례 때 그를 묘지로 인도하게 된다. 전교향곡 중 가장 장대하고 가장 복잡한 제8번(그는 이 곡을 1884년부터 1890년에 걸쳐서 작곡했다)에는 표제적인 요소가 적어도 세 개는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제2곡의 제1악장 최후에 울려퍼지는 〈죽음의 시계 Totenuhr〉이다. 제2의 요소는 스케르쪼에서의 다뉴브 강변의 농부의 그림이며, 제3의 요소는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 황제들의 만남을 묘사한, 피날레의 막을 여는 3회에 걸쳐서 밀려오는 주제이다. 그러나 작품의 주제를 모조리 겹쳐 놓음으로써 장대하고 파란에 찬 끝맺음은 이러한 지엽말절(枝葉末節)을 초월한 점에서 교향곡이라는 형식 그 자체가 가진 잠재적인 가능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상징적으로 〈선한 신〉에게 바쳐진 제9번에서 그는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었을까? 제1악장의 규모나 아다지오의 최고조의 부분에서 화성적 소재(온음계의 모든 겹침)에 의해서 실현되는 쾌거에서 그것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음악가가 최후의 날까지 쓰고 있던 최종 악장의 스케치에서는 조성의 기능이 종종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최후의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다(코다의 첫머리에서 중단되고 있다). 따라서 이 거장은 스케르쪼의 심연으로 향하는 무서운 흐름 뒤에 이어진 아다지오의 숭고한 정적 속에서 이 세상의 청중과 작별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서서히 몸이 쇠약해져서 수종(水種)과 폐병(肺病)이 발병하여 그는 1896년 10월 11일 세상을 떠났는데, 그동안 또 다른 장르에서 적어도 두 개의 비올라를 사용하는 현악5중주곡 F장조(1879)와 헬골란트(1893)를 남겼다. 헬골란트는 아우구스트 질버슈타인 August Siblerstein의 시에 바탕을 둔 남성합창과 대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서 그가 끊임없이 만들어낸 약 40곡을 헤아리는 세속합창곡의 최후를 장식하는 작품이었다. 마지막으로, 종교음악에서는 브루크너의 작품으로 앞에 든 테 데움 외에 반짝반짝 빛나는 시편 제150편(1892)과 가장 유명하고 새로운 표현을 가진 마지막 몇 곡의 모테트4개의 그라두엘레(1869년의 이 장소를 만드신 분은 신이시다부터 1885년의 이사야의 가지는 싹을 틔우고까지), 금관악기를 수반한 이것이야말로 대제사이다(1886), 왕의 깃발은 펄럭인다(1892)가 있다.
사후(死後)의 청중
안톤 브루크너의 장례식은 음악의 도시 빈의 전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1896년 10월 14일 성 칼 교회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다. 그는 몇 주 전에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증명서를 의사에게 요구했었다. 그는 또 자기의 관을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는 오르간 밑 지하의 납골당에 매장하지 말고 안치해 달라고 유언했다. 이 소원을 들어주려고 사람들은 터키의 침공이 있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하 묘지를 발견하여 수천의 인골(人骨)을 발굴하기도 했다. 이후 브루크너는 그들 앞에서 영원히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요 작품
교정자에 대해서는 해당판의 교정자의 이름을 밝혀서 〈판〉이라고 표시했으며, 〈개정〉은 진실이 결여된 개정임을 나타내고 개정자의 이름을 적었다. 〈GA〉는 아우구스트 괼레리히와 막스 아우어 Max Auer의 연대순 번호(안톤 브루크너의 생애와 작품의 전체상 Anton Bruckner, Ein Lebens und Schaffensbild[192237 레겐스부르크, 재판 1974]에 기재된 것)이며, 브루크너 작품의 주제별 목록은 레나테 그라스베르거 Renate Grasberger에 의해서 만들어진 안톤 부르크너의 작품목록 Werkverzeichnis Anton Bruckner([1977 투칭, 한스 슈나이더사])에 의거한 것이다.
[교향곡] ▶오케스트라를 위한 4개의 작품 GA 61, 62/13(1862;도블링거사, 오일렌부르크사) ▶서곡 g단조 GA 63(1862, 우니베르잘사 1921) ▶교향곡 "습작" f단조 GA 64(1863, 레오폴드 노바크 Leopold Nowak판 1974) ▶교향곡 제0번 d단조 GA68 (1864, 제2고[자필] 1869, 노바크판 1968) ▶교향곡 제1번 c단조 GA 78(제1고 〈린츠고〉 1866, 로베르트 하스판 1934, 노바크판 1953;제2고 〈빈고〉 1891, 하스판 1935, 노바크판 1980) ▶교향곡 제2번 c단조 GA 94(1872;하스판(오리지널) 1938, 노바크판[1876년의 가필 개정판]1965) ▶교향곡 제3번 d단조 GA 95(제1고 1873, 노바크판 1977;아다지오 개정본 1876, 노바크판 1980;제2고 1877, 레티히 Ra‥ttig판 1878, 프리츠 외저 Fritz Oeser판 1950, 노바크판 1981;제3고[최종 악장은 샬크의 개정판] 1889, 레티히판 1890, 노바크판 1959) ▶교향곡 제4번 E♭장조 "낭만파 Romantisch" GA 96(제1고 1874, 노바크판 1975;최종 악장의 제2고 1878, 노바크판 1981;제2고 187880, 하스판 1936/44, 노바크판[1886년의 가필 개정을 포함] 1953;뢰베 Ferdinand Lo‥we 개정 1888, 구트만사 1889) ▶교향곡 제5번 B♭장조 GA 97(187577;하스판 1935, 노바크판 1951;샬크판 1894, 도블링거 1895) ▶교향곡 제6번 A장조 GA 106(1881;하스판 1935, 노바크판 1952) ▶교향곡 제7번 E장조 GA 110(1883;하스판 1944, 노바크 판 1954) ▶교향곡 제8번 c단조 GA 118(제1고 1887, 노바크판 1973;제2고 1890, 하스판[외부의 영향이 개입한 것으로 상징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제1고와 제2고의 절충판이라고 생각되는 것] 1938, 노바크판[텍스트에 충실] 1955) ▶교향곡 제9번 d단조 GA 124(제13악장 1894, 알프레트 오렐 Al
fred Orel판 1932, 노바크판 1951;뢰베 개정판 1903, 도블링거사 1903;3중주의 최초의 형태 f단조/f# 단조 오델판 1932;최종 악장[미완] 1896;스케치[오렐의 교정 보고 Revisionsbericht 중] 1932;외저에 의한 부분적 관현악화 1940, 알코르 사 1940;네일 Neill과 가스탈디 Gastaldi에 의한 전체 관현악화 1962 미간;메르첸도르퍼 Ma‥rzendorfer에 의한 전체의 관현악화 196981, 미간)
[기악곡] ◇오르간곡 ▶프렐류드와 푸가 c단조 GA 18(1847) ▶푸가 d단조 GA 54(1861) ▶프렐류드 C장조 GA 114(1884;하젤뵈크 Haselbo‥ck판, 도블링거사 1970) ▶기타 7개의 오르간곡 ◇피아노곡 ▶환상곡 G장조 GA 82(1868, 휘니 Hu‥ni판 1921 쮜리히) ▶추억 Erinnerung GA 87((1868, 도블링거사 1900) ◇현악4중주곡(바이올린 2, 비올라, 첼로) ▶현악4중주곡 c단조(1862, 노바크판 1955) ◇현악4중주곡(바이올린 2, 비올라 2, 첼로) ▶현악5중주곡 F장조 GA 103(1879;구트만판 1884, 노바크판 1963) ▶간주곡 d단조 GA 104(1879, 우니베르잘사 1913;노바크판 1963) [교회 성악곡] ◇알토 독창과 오르간을 위한 작품 ▶미사곡 제1번 "빈트 하거 미사 Windhaager Messe"[알토 독창, 오르간, 호른 2를 위한] GA 4(1842, 도블링거사) ▶아베 마리아 제3번 GA 108(1882, A. 뵘 운트 존사) ◇무반주 혼성합창곡 ▶미사곡 제2번[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자필고](1843? 미완) ▶미사곡 제3번 "크론슈토르퍼 미사 Kronstorfer Messe" GA 8(1844, A. 뵘 운트 존사 1941) ▶4개의 탄툼 에르고 4 Tantum ergo GA 15/14(1846;개정 1888, 토노스사) ▶아베 마리아 제2번 GA 52(1861) ▶팡제 링과 Pange lingua GA 84(1868) ▶그라두알레 제1번 "이 장소를 만드신 분은 신이시다 Locus iste" GA 92(1869) ▶그라두알레 제2번 "바른 자의 입은 지혜를 말한다 Os justi" GA 105(1879) ▶그라두알레 제3번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도다 Christus factus est" GA 112(1884) ▶그라두알레 제4번 "이사야의 가지는 싹을 틔우고 Virga jesse" GA 116(1885) ▶왕의 깃발은 휘날리고 Vexilla regis GA 120(1892)[*이상 7곡에 대해서는 페터스사, 토노스사] ◇혼성합창과 오르간을 위한 작품 ▶탄툼 에르고 GA 15/5(184688, 토노스사) ▶탄툼 에르고[게를리히 아우어의 상술한 책] GA 25(1848?) ▶아베 마리아 제1번 GA 48(1856, 토노스사) ▶마리아는 아름답도다 Tota pulchra es Maria GA 101(1878;페터스사, 토노스사) ◇합창과 트롬본(3 또는 4)을 위한 작품 ▶시편 제114편[게를리히 아우어의 상술한 책] GA 36(1852) ▶처녀들이 왕 앞에 초대되다 Afferentur regi GA 53[1861;페터스사, 토노스사] ▶나는 하인 다윗을 선택하였다 Inveni David GA 81(1868;페터스사, 토노스사) ▶그라두알레 제3번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GA 111(1879?;버베리히 Berberich판 1934) ◇혼성합창, 트롬본과 오르간을 위한 작품 ▶이 분이야말로 대제사장이시다 Ecce sacerdos magnus GA 115(1885;우니베르잘사, 페터스사) ◇8성의 혼성합창과 관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미사곡 제6번(제2번) e단조 GA 71(1866, 가필 정정 1882;노바크판 1959, 원저고 1977) ◇독창,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로 위한 작품 ▶레퀴엠 d단조 GA 22(1849;하스판 1930, 노바크판 1966) ▶마니피카트[괼레리히와 아우어의 상술한 책]GA 34(1852) ▶미사곡 제4번 B♭장조 "미사 솔렘니스" GA 42(1854;하스판 1930, 노바크판 1975) ▶시편 제146편 GA 50(185661, 미간) ▶시편 제112편[독창 없음] GA 65(1863;우니베르잘사 1926) ▶미사곡 제5번(제1번) d단조 GA 71(1864, 노바크판 1957) ▶미사곡 제7번(제3번) f단조 "대미사" GA 80(1868, 가필 정정 1876/90;하스판 1944, 노바크판 1960) ▶테 데움[오르간 임의] GA 109(1884;노바크판 1962) ▶시편 제150편 GA 122(1892;그라스베르거판 1964)
[세속 성악곡] ◇독창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 ▶4월에 Im April GA 88[가사 가이벨 Geibel](1868? 도블링거사) ◇무반주 남성 합창곡 ▶유성 Stern schnuppen GA 24[가사 마리넬리](1848) ▶저녁 하늘 Der Abendhimmel 제1작 GA 68[가사 체들리츠](1862) ▶저녁 하늘 제2작 GA 75(1866, 도블링거사 1902) ▶합창단 Sa‥ngerbund GA 107[가사 폰 데어 마티히/새로운 텍스트 케르슈바움](1882) ◇테너 독창과 남성합창을 위한 작품 ▶한밤중에 Um Mitternacht 제2작 GA 117[가사 프루츠 Robert Prutz](1886) ▶꿈과 깨어남 Tra‥umen und wachen GA 119[가사 그릴파르처](1890)[이상의 곡에 대해서는 별도로 기재된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토노스사에서 출판] ◇독창, 남성합창과 오르간 또는 피아노를 위한 작품 ▶단념 Entsagen GA 31[가사 레트비츠 Redwitz](1851? 도블링거사 1956) ▶한밤중에 제1번 GA 69(1864;우니베르잘사 1911) ▶가을의 노래 Herbslied GA 70[가사 살레트](1864;우니베르잘사 1911) ▶추도의 말 Nachruf GA 99[가사 폰 데어 마티히/새로운 텍스트 위안의 음악 Tro‥sterin Musik소이페르트](1877;우니베르잘사 1911, 노토스사) ◇요델 가수와 4개의 호른을 수반한 남성합창곡 ▶저녁의 마력 Abendzauber GA 100[가사 폰 데어 마티히](1878;우니베르잘사 1911) ◇남성합창과 취주악을 위한 작품 ▶게르만인의 행진 Germanenzug GA 66[가사 질버슈타인](1863;부르크하르트 Burkhart판 1978) ▶독일의 노래 Das deutsche Lied GA 121[가사 펠스](1892;우니베르잘사 1911) ◇남성합창과 대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헬골란트 Helgoland GA 123[가사 질버슈타인](1893;도블링거사 1899, 새로운 텍스트 딸림 천둥소리여, 울려라 Dro‥hne, Du Doner 외저, 알코르사 1947) ◇독창, 남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축전 칸타타 Festkantate GA 59[가사 P. 파메스베르거](1892;도블링거사 1955) P. G.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