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차귀도
찜질방 여인 때문에 새벽이 바빴다.
모슬포까지 다시 가느라 중거리버스를 타는 번거로움으로.
가파도, 마라도 도항선착장 모슬포항에서 차귀도(遮歸島)앞 자구내
포구를 향해 일주도로와 해안로를 번갈으며 나아갔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새벽의 남서풍이 옷깃을 여미게 했다.
비상식량으로 길가의 즉석빵집에서 호도과자 1봉지를 샀다.
섬 답게 각종 회를 제외하면 음식만 별로인 것이 아니다.
출신성분이 애매한 호두과자지만 간밤의 식사가 부실했던데다 점심
때까지는 마땅한 식당을 만나기가 어려울 듯 해서 살 수 밖에.
해는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는가.
해안에 밀착해 걸으니까 검푸른 바닷물이 그나마 보이는 것이리라.
차귀도가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서.남태평양이 뿌옇기만 했어도
서귀포시 대정읍을 뒤로 하고 제주시 한경면(翰京)에 접어들었다.
(제주시와 북. 남제주군이던 제주도가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개편됨
으로서 한경면도 북제주군에서 제주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제주시에서 출발해 서귀포시를 거쳐 다시 제주시에 들어섬
으로서 제주로 걷기도 어느 새 막판이다.
곧 하늘이 크게 선심쓰는 듯 시야를 넓혀주었다.
고산평야가 한눈에 담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주에서 가장 넓다는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닌가 보다.
먼저, 고산리 바닷가의 오름, 수월봉(水月峰)이 부르는 듯 했다.
해발 77m에 불과하지만 수월봉과 '녹고물샘'에는 효심 깊은 수월과
녹고 남매의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는 봉우리다.
어린 남매의 지극한 간호에도 홀어머니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100종의 약초를 달여먹여야 낫는다는 말에 약초캐기에 심혈을 기울
였으나 오갈피만을 구하지 못해 애가 타던 남매는 수월봉 절벽에 핀
오갈피를 발견한다.
수월이는 절벽의 오갈피를 꺾어 녹고에게 건네주다가 추락사한다.
누이를 잃은 슬픔에 하염없이 흘린 눈물이 '녹고물샘'이란다.
정상에는 기상대와 기우제를 지내던 수월정이 있다.
수월봉은 제주시가 지난 2천년, 밀레니엄(millennium)을 맞아 노을
축제를 연 곳이며 차귀도를 배경으로 한 노을 비경은 전국 1위란다.
차귀도로 가는 길가에는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유적 중 하나
라는 고산리선사유적지(高山里先史遺蹟地:사적제412호)도 있다.
수월봉(1.2)과 수월봉에서 바라본 차귀도(3)
선사유적지(4), 자구내포구의 옛 등대(5)와 차귀도(6)
자구내포구에 도착했을 때 차귀도가 산뜻하게 다가왔다.
세 개의 섬(죽도, 지실이도, 와도 ) 으로 되어있으며 대가 많아 일명
죽도(竹島)라고도 부른다는 것으로 미루어 죽도가 대표섬인가.
조천읍 신촌리에도 이름뿐이나마 대섬이 있는데.
제주의 여러 섬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섬으로 평가
받는데는 우뚝 솟은 장군석의 공이 크단다.
명불허전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조사(釣師)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런데, 차귀도는 절경일 뿐아니라 전설도 의미가 깊다.
제주섬에 유능한 인재가 출현하는 것이 겁이 났던가.
원(元:중국)은 이를 막기 위해 지관 호종단(胡宗旦)을 보냈다.
혈맥과 수맥을 마구끊으며 죄충우돌하던 호종단이 서귀포의 지장샘
(서홍동)수맥 절단에 실패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차귀도 포구에 이르렀을 때, 돌연 매 1마리가 날아와 일으킨 돌풍이
호종단이 탄 배를 부숴버렸다.
한라산 신령이 매로 변해 호종단의 횡포에 대한 복수로 귀로를 차단
했다 하여 차귀도(遮歸島)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
모슬진에서 20리길 '차귀진' 역시 제주 9진중 하나다.
이조효종(17대)3년,목사 이원진(李元鎭)이 왜구의 침략을 막으려고
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단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은 성의 윤곽조차 찾아볼 수 없다.
모슬진처럼 개발에 희생된 것도 아닌 듯 한데.
두모촌
차귀도는 저녁놀이 최고의 장관이라는데 유감스럽게도 아침때였다.
미련 없이 떠나서 일주도로로 들다가 당산봉 자락 길가에 박혀있는
'차귀당(遮歸堂) 옛터전' 안내석을 발견했다.
옛 제주의 토테미즘(totemism)을 확인해 주는 표석이라 하겠다.
뱀신을 믿었던 제주의 토속신앙이다.
뱀신을 모시고 제사하던 옛 성황사(城隍祠)가 차귀당이란다.
차귀도의 차귀는 사귀(蛇鬼:뱀신)의 와전이라는 설도 있단다.
차귀당 옛 터전
차귀도에 매료되어 많은 시간을 빼앗긴 까닭에 절부암에 들리려던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두모촌까지 줄달음치듯 했다.
용수리 절부암(節婦岩: 제주도기념물제9호)은 열부(烈婦) 제주고씨
(高氏)의 절개를 기리는 바위이며 절부암제까지 지낸다는데.
어부 남편이 고기잡이 나갔다가 조난당해 끝내 불귀객이 되었다.
아내는 용수리 바닷가 일명 엉덕동산이라는 숲 바위 위에서 남편의
뒤를 따른다며 목을 매었다.
한데, 표류하던 남편의 시신이 바로 그 바위 아래에 머물었다.
남편의 시신이 머문 그 바위를 절부암이라 한단다.
차귀진에서 10리길 두모촌(頭毛村)은 현 한경면소재지 두모리다.
예전에는 두모리에서 고산리까지가 모두 두모리였단다.
제주도의 지형으로 보아 이 지역이 동물의 머리에 해당하고 구좌와
성산 일대는 꼬리라는 것.
머리에는 털이 있으므로 두모라 한 것이라나.
한경면사무소
인접한 신창리 바닷가의 한 집을 찾아 나섰다.
오랜 세월 인연 관계인 강원도 삼척 어촌집과 연관된 집으로 서울을
거쳐갈 때마다 내 집에서 묵고 간 이들의 집이다.
우연히 상봉할 때마다 그들은 단순한 인사말 이상으로 내게 방문해
주기를 바랐기에 들른 것 뿐이다.
마침, 그 마을을 통과하는 중이었기에.
'경자수산'(한치,준치,갈치,옥돔,고등어,조기 도소매)이라는 거창한
명함과 달리 간판이 없고 찾기가 매우 어려운 골목의 골목집이다.
물어물어 찾긴 했으나 나를 상대할 분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출타중.
부인은 서울 내 집에 대해 알고 있는 듯 한데 엉거주춤이다.
환대를 바라고 일부러 찾아간 것이 아니므로 서운할 건 없지만 왠지
가벼이나마 문화적 충격이 온 것은 사실이다.
면사무소 옆 식당(하경)에서 반계탕을 먹었다.
반쪽 삼계탕임은 알고 있지만 먹어보긴 처음이었다.
모슬포에서 산 빵이 시장기를 달랬으므로 반계탕으로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제주도에서 먹어온 식사중 가장 맘에 들었다.
명월성지와 명월대
두모리에서 한림읍 월령삼거리까지는 일주도로가 곧 해안도로다.
두모촌에서 30리길 명월진(明月鎭)은 월령리에서 금릉사거리, 협재
사거리 등 일주도로를 따라 동명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명월진도 제주 9진중 하나다.
왜구가 지근인 비양도(飛揚島)에 정박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명월포에 쌓았다는 성이 제주기념물제29호 명월진성이다.
안에 샘과 객사, 군기고 등을 갖춘 성이다.
중종(11대) 5년 목사 장림이 목성을 축조하였으나, 선조(14대) 25년
이경록 목사가 석성으로 개축했단다.
명월포수전소는 제주10수전소중 하나다.
장림은 같은 이유로 같은 해에 별방진을 이축한 제주목이다.
한데, 이 곳에서는 왜 흔한 돌을 두고 목성을 쌓았을까.
명월리 명월성지(1.2)와 비석거리(3), 명월대와 석교(4.5)
아무리 갈길 바빠도 지방기념물제7호 명월대(明月臺)에 올라보리라.
지방 유림과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라니까.
그런 범주에 들지 못하고 단지 늙은나그네일 뿐인데 어찌 그리 고집
스럽게 애착(?)하고 있었을까.
명월대뿐 아니라 8도의 유사한 장소들에서도 늘 그래왔다.
명월성지(明月城址)에서 1120번도로 따라 남행하다가 명월사거리를
건넌 후 하동 지나 중동 명월대 앞까지 올라갔다.
지근에 있는 제주 특유의 갈옷 몽생이회사(廢 명월초등학교터) 덕인
듯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으나 온 마을 바닥을 시멘트로 덮었다.
차량 통행이 빈번한 도로의 포장이야 당연하지만 차가 다닐 수 없는
골목길까지 예외없이 시멘트범벅을 만든 시골길이 이해되지 않는다.
걷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시골 사람들과 함께.
작은 개울을 끼고 있는 명월대 일대가 팽나무 군락지다.
봄 가뭄탓인지 계곡 물은 말랐고 숲은 막 동면에서 깨어난 상태지만
남녘 답게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애써 찾아갔건만 지붕없는 3단 명월대는 나를 실망시켰다.
애초부터 3단 민바닥이었던가.
여기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대(臺), 각(閣), 정(亭), 루(樓)등은 8각이건 6각이건 비를 막고 볕을
가리는 지붕이 있는 건물이라는 고정관념 탓이었을까.
항몽 유적지 애월진
한림읍사무소 ~ 한림항으로 나가 해안로를 탔다.
귀덕리에서 다시 일주로를 따라 애월리 애월항까지 나아갔다.
명월진에서 25리 애월진(涯月鎭)이다.
애월에는 성지(城址)와 연대, 환해장성 등이 남아있다.
화북처럼 옛 군사방어시설들이 고루 남아있는 곳이다.
애월진성을 최초로 축조한 이는 삼별초(三別抄)항쟁군의 김통정(金
通精) 장군으로 고성리(항파두리)의 항파두성((缸坡頭城)이란다.
그들은 강화도에서 멀리 진도까지 내려와 전열을 정비, 항쟁했으나
용장성을 빼앗기고 제주까지 밀리게 되었다.
항파두성을 최후의 거점으로 삼아 고려원종(元宗:24대)14년 김통정
장군의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여기 항몽유적지(缸坡頭里抗蒙遺蹟址)는 사적396호다.
당초, 이 성은 토성(土城 또는 木城?)이었는데 선조(14대)14년, 목사
김태정(金泰廷)이 포구로 이축(移築)할 때 석성으로 개축했단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애월초등학교 담장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애월읍사무소(1), 애월항(2)과 옛 빨래터(3.4)
애월환해장성(5)과 애월초교 담장이 된애월진성(7.6)
그런데, 애월이 또 이 늙은 나그네를 혼란에 빠뜨리려는가.
삼별초군의 애월진 축성은 고려 원종12년의 일이라는데 그들의 제주
상륙을 막으려고 환해장성을 쌓은 것은 원종11년이라?
삼별초군이 환해장성을 뚫고 상륙해 관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항파두성을 쌓았다는 것인가?
제주 해안선 300여리(약 120km)를 두르는 환해장성은 일명 제주의
만리장성이다.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한 두 해, 단기간에 완성될 작업이 아니다.
진도와 제주도는 삼별초군이 여몽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인 섬이다.
한데, 항쟁군에 대한 큰 온도차를 느끼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제주로는 애월진에서 45리 제주(濟州)가 남았을 뿐이다.
고산자의 10대로 정리(程里)를 따라 걷다가 발견한 점 하나가 있다.
최단 2리에서 최장 50리 간격의 지명과 부연(敷衍)의 심도를 통해서
그의 현장 답사 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겠다는 점이다.
그런데, 제주로의 경우 부연이 전무하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애월초등학교 담장이 된 성벽에서 해안로를 따라 고내리 ~ 신엄리~
구엄리 ~ 일주로에 합류되는 하귀리까지 나아갔다.
실로 구보에 다름 아니었다.
해 안에 제주시내권에 진입하기 위해서 그랬다.
조부천(藻腐橋)을 건넘으로서 마침내 제주시내에 진입했으며 곧바로
한라산 뒤풀이팀과 약속한 장소로 갔다.
첫날 함덕을 통과할 때 주석(酒席)을 가졌던 김홍기님이 김상욱 시인
에게 그 사실을 알림으로서 탄로(?)가 났기 때문이다.
실은, 걷기를 다 마치고 회동하려 했던 건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