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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슬산지기 원문보기 글쓴이: anglo네바다
1862년 9월 17일 메릴랜드주에서 벌어진 앤티텀 전투. 북부 지역에서 벌어진 이 치열한 전투는 북군의 승리로 끝났고, 링컨에게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할 기회를 주었다.
‘대체역사소설(Alternative History)’이란 문학 장르가 있다. 역사가 달리 전개되었다는 가정하에 전혀 다른 가상의 역사, 즉 기존의 역사를 대체하는 시간선(timeline)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하였으며 대중소설 영역에서 판타지와 함께 주요 장르로 자리매김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체역사소설은 대체로 조선말기, 대한제국 시기,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 역사가 다르게 전개되었더라면?’이라는 질문에 독자들이나 작가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대체역사소설이 당당히 주류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고, 유명한 작가도 많다. 수많은 미국의 대체역사소설 작가 중에서 최고의 거장(巨匠)이라 하면 단연 해리 터틀도브(Harry Turtledove)를 꼽을 수 있다. 실제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획득한 학자인 그는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비잔티움에서 온 첩자(Agent of Byzantium)],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한 [치욕의 나날들(Days of Infamy)], 그리고 지구인과 외계인의 전쟁을 그린 [세계전쟁(Worldwars)] 등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대작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의 유명세를 가능케 한 터틀더브의 최고 역작(力作)은 다름아닌 14권 분량의 [남부승리 (Southern Victory)]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첫 권인 [산 자가 없도다(How Few Remain)]로 시작하여 [최후의 순간(In at the Death)]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1860년대의 남북 전쟁에서 남부가 승리하여 미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1945년 다시 남부가 멸망하기까지 약 80년간의 대체역사를 그리고 있다. 미국 최고의 대체역사소설가가 남북 전쟁을 그의 대작의 배경으로 삼은 것은 미국의 독자들이 가장 관심 있어하는 부분이 바로 남북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는 남북 전쟁의 결과가 달라졌다면 향후 미국 역사의 흐름이 결정적으로 바뀌었을 것임을 의미한다.
대체역사를 차치하고라도 남북 전쟁이 미국 역사상 일대 사건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북 전쟁은 미국의 정치ㆍ문화ㆍ사회 등 모든 분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며,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여기서 전환점이라 함은 남북 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미국의 역사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미국의 정식 명칭은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여기서 ‘States’는 흔히 ‘주(州)’로 번역되며 현재 우리나라의 도(道)와 비슷한 행정구역으로 인식되지만, 원래 State는 정치학적으로 해당 영역 안에서 행정, 치안, 징세 등의 행위에 있어 독점적인 권리를 가진 정치체를 뜻한다. 즉 State는 하나의 ‘국가’이다. 원래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에 미국의 소위 국부(國父, Founding Fathers)들 대부분은, 일정 권한을 연방정부에 이양하기는 하지만 각 주들이 상당한 권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1804) 등 연방정부가 보다 강력한 권한을 가지기를 원했던 연방주의자(federalist)들은 이것이 항상 불만이었고, 주의 권한 유지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republicans)들에 맞섰다. 이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미국 초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미합중국 권력 행사의 주체가 연방정부냐 아니면 주정부이냐는 논란의 연장선상에 남북 전쟁이 있다.
미국의 주들이 자치적인 존재로 남아있기를 원했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등의 의도와 달리 초기 이후 미국정치는 연방정부의 권력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초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1819년 대법원에서의 맥컬럭 대 메릴렌드주(McCulloch vs. Maryland) 사건 판례였다. 미국 의회는 1816년에 제 2 미국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을 법인화하면서 필라델피아에 본점을 설립한 후, 1817년에는 메릴랜드주(州) 볼티모어에 지점을 설립하게 된다. 제 2은행 볼티모어 지점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화폐와 어음을 발행하고 각종 금융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메릴랜드 주 의회는 1818년 2월에 주 의회의 사전 승인을 받지않은 금융기관이 메릴랜드주 안에서 화폐를 발행하고 금융 상품을 취급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이를 위반할 시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제 2은행 볼티모어 지점장이었던 제임스 맥컬럭은 이에 불복하였고 결국 메릴랜드주 항소법원에서 시비를 가리게 되었다. 메릴랜드 항소법원은 헌법상 미국 제 2은행의 설립은 위헌(違憲)이라며 메릴랜드주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연방정부가 은행을 설립할 권한이 미합중국 연방헌법에 명시되어있지 않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이 사건에 대한 최종판결은 결국 대법원에서 가리게 되었는데 당시 대법원장 존 마셜(John Marshall, 1755~1835)은 연방의회가 그 헌법적 권한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안을 제정할 수 있게 하는 연방헌법 제1조 제8항 제18절의 ‘필요적절조항(Necessary and Proper Clause)’을 들어 제 2은행의 설립 역시 의회의 헌법적인 기능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제2 은행의 설립은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이에 메릴랜드주는 연방정부가 주 정부들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받았으니 주 정부에 주권행사의 최종 권한이 있다는 논리로 맞섰다. 그러나 대법원은 연방헌법을 승인한 것은 주 정부들이 아니라 국민들임을 분명히 했다. 주 정부의 최종 권한(Ultimate sovereignty)을 부인하고 사실상 국민들에 의하여 승인된 연방헌법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주 정부와 연방정부의 권한과 더불어 당시 미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던 문제는 바로 노예제도였다. 원래 남북 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은 노예제를 남북 전쟁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등장한 수정론자들은 정작 노예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으며 남북 전쟁은 미합중국의 분리를 막고 남부 세력을 영구적으로 눌러두기 위한 링컨과 연방정부의 마키아벨리적 선택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일부 계급론자들은 심지어 북부 공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가들이 주동하여 흑인 노동력을 독점하고 있는 남부의 지주계급을 쳐부순 전쟁이었다는 논리를 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예제 때문에 남북 전쟁이 일어난 것이 옳다. 북부의 위정자들이 노예상태에 있는 흑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은 아니었지만, 사실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여러 해 전부터 미국은 노예제 때문에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노예제를 두고 미국민들이 찬반으로 양분되고 그로 인한 정치적ㆍ물리적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경제생산에 있어 노예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남부에서는 소위 주의 권리(States’ Rights) 문제와 맞물려 분리주의 여론까지 강하게 나타났다. 결국 남북 전쟁은 노예제 때문에 불거진 갈등이 위에서 언급한 연방정부 – 주정부 사이의 갈등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다.
영국의 노예 수송선 브룩스(Brookes) 호. 아프리카 내륙의 흑인들은 서부 해안의 노예 사냥꾼들에게 잡혀 백인 노예상들에게 팔렸고, 이런 배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도착했다.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 국가들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본국에서의 이민만으로는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할 수 없었다.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가장 쉽게 조달하는 방법은 바로 노예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필요성과 맞물려 노예 거래는 대서양을 무대로 한 무역에서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거대한 사업이 되었다. 새로운 사업으로 등장한 노예 거래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프리카 서부의 흑인들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가장 큰 수혜자도 역시 흑인들이었다. 서부 해안에 위치한 일부 군장사회들은 스스로 노예사냥 집단이 되어 내륙의 흑인들을 잡아다가 배를 타고 오는 백인 노예상들에게 팔았다. 그리고 이들은 노예 거래로 부를 축적하여 군장사회 단계에서 벗어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같은 흑인들에게 잡혀 신대륙으로 건너가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뱃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상품이었고 뱃간에 글자 그대로 화물처럼 처박혔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미국 초기 식민사회 노동력의 대부분은 계약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물론 현대의 노동자 같은 대우를 기대할 수는 없었고 과거의 농노보다 약간 나은 정도의 대접을 받았지만, 이들 계약 노동자들은 일정 기간 동안 일한 후 자유인이 되어 자기의 상점을 열거나 식민지 변경지역의 황무지를 사서 땅을 일굴 수가 있었다. 이러한 계약 노동자 중에는 흑인들도 상당수였고 이들 역시 일정 기간 일한 후에 자유민이 되었다. 북미 식민사회에 흑인 노예들이 대량 유입되기 전, 이미 미국 땅에는 많은 수의 흑인 자유민이 있었고 이 자유민들은 흑인 노예들과 공존했다. 예를 들어 1770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촉발한 원인이 된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에서 희생된 크리스퍼스 애턱스(Crispus Attucks) 역시 흑인이자 자유민이었다.
앨라배마주의 면화 농장에서 하루 일을 마친 흑인 노예들. 면화 재배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면화의 주요 공급처였던 미국 남부는 미합중국 건국 시의 격렬한 논쟁에도 노예제를 존속시켰다.
흑인 노예들의 미국 유입이 대량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1700년대 초반부터였다. 그 원인은 역시 노동력 부족이다. 1600년대에 초기의 백인들과 함께 들어온 흑인들은 계약 노동자가 많았고 원주민과의 전쟁과 질병들의 이유로 사망률도 높은 편이라 노동력 부족은 만성적인 현상이었다. 아울러 흑인 여자와 백인 남자들과의 사이에서 혼혈아들이 태어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지위도 법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흑백 혼혈이었던 엘리자벳 키(Elizabeth Key)란 여성은 1656년에 자신의 남편이 잉글랜드 국민이기 때문에 자신과 아들이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청원을 법원에 제출하였고 자유민 신분을 얻었다. 이를 시작으로 노예 신분으로 지내고 있던 많은 흑인들이 법원에 소(訴)를 제기하여 자유민 신분을 얻게 된다. 이에 1662년에 버지니아 의회는 ‘partus sequitur ventrem(자식의 지위는 어미를 따른다)’라는 로마시대 법률을 근거로 어머니가 노예면 자식도 노예가 된다는 종모법(從母法)을 통과시킨다. 혼혈인들이 노예 신분을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종모법과 함께 노예 수의 급증을 불러온 것은 1705년 버지니아 식민의회에서 통과시킨 노예 규약이다. 이 규약은 노예의 지위를 명시하고 있는데 그 규정문은 다음과 같다.
“이 규약의 통과 이후 이 영지(領地: 버지니아) 내의 모든 법원과 기타 지역에서 모든 흑인과 물라토, 그리고 인디언(원주민) 노예들은 모두 종(從)이 아닌 재산으로 판단되고 간주될 것이다.” <br /><br />That from and after the passing of this act, all negro, mulatto, and Indian slaves, in all courts of judicature, and other places, within this dominion, shall be held, taken, and adjudged, to be real estate (and not chattels)<em></em>
아울러 이 규약에는 기독교 국가 출신의 백인들을 제외한 모든 지역 출신들의 노예화를 가능케 하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노예제도 대사전(Dictionary of American Slavery)]이란 책에 의하면 1620년에서 1700년까지 80년 동안에 미국으로 수입된 노예의 수는 21,000명에 불과한데 비하여 1701년부터 1760년까지 60년 동안에는 무려 18만 9000명의 노예가 미국으로 팔려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미국 독립 전쟁을 전후한 혼란으로 일시적으로 줄었다가 신생 미합중국이 안정기에 접어든 후 다시 급증하기 시작하여 1801년에서 1810년 사이에는 12만 4천 명이 미국으로 끌려온다. 더군다나 초창기 미국의 헌법도 1조 2항을 통해 노예를 ‘그러한 사람들(such persons)’이라 부르며 그 수입을 사실상 용인하고 있고, 4조 2항에는 노예 지역에서 도망친 노예는 도망친 주의 권한으로 추포(追捕)하여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합중국이 생겨나던 당시, 노예 문제는 건국 인사들 간에 격론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러한 격론에도 불구하고 미합중국 초기 헌법은 노예제도를 불법화하지 못했다. 건국 세력 중에는 남부에서 큰 농장과 장원을 경영하고 있는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비호하에 미국의 노예제도는 계속 존속되었다. 심지어 계몽주의와 휴머니즘의 신봉자라고 할 수 있는 토머스 제퍼슨도 많은 노예를 거느린 농장주였고, 이 때문에 노예제도를 적극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폐지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사실 워싱턴이 1789년에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약 72년의 기간 중 50년은 어떤 형태로든 노예를 거느린 인사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남부에서 노예제도의 존속을 부추긴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는 미국 남부에 목화가 전해진 것이었다. 초기 산업혁명을 주도한 것은 섬유산업이었다. 목화는 기후적인 이유로 인하여 미국 남부에서 재배가 잘 되었고, 미국 남부는 북부와 타국 섬유 공장들에 면화를 공급하는 주요 공급처가 되었다. 면화는 원료로서 수출하기 전에 일단 재배를 하고 씨를 빼내는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씨를 빼내는 작업은 엘리 휘트니(Eli Whitney, 1765~1825)의 코튼-진(Cotton gin)의 발명으로 수월해졌지만 수많은 면화를 재배하는 작업은 여전히 손으로 해야만 했다.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 북부는 건국 이후 노예제가 빠르게 사라진 반면 오하이오강 이남의 주들은 대체로 노예제를 인정하였다. 노예제를 둘러싼 양측의 대립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불꽃이었으며, 일시적 미봉책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남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업의 비중이 적은 북부에서는 건국 이후 노예제도가 빠르게 사라졌다. 1804년까지 현재 펜실베이니아와 메릴랜드주의 경계선인 메이슨-딕슨 라인(Mason-Dixon Line) 이북의 주들은 모두 노예제도를 폐지하였다.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뉴욕, 뉴저지,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등이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곳이었다. 이후 새로이 연방에 편입된 주 중에서 오하이오강 이북의 주들은 모두 주 헌법을 통해 노예제도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비하여 오하이오강 이남의 주들은 대체로 노예제도를 인정하였다(예외적으로 이후 북군에 가담하게 되는 켄터키와 메릴랜드주는 노예제도를 인정하였다).
노예제도를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후 미국이 서쪽으로 팽창을 계속하면서 이 갈등은 증폭되었다. 남부 출신 의원들과 북부 출신 의원들은 1820년 미주리 협정(Missouri Compromise)이라는 정치적 타협을 통해 노예문제에 대한 갈등을 일시적으로나마 봉합하였다. 이후 새로이 미합중국에 편입되는 지역들은 북위 36도 30분을 기준으로 하여 그 북쪽은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이남에서는 노예제를 존속시키기로 하였으나 36도 30분에 의하여 양분(兩分)되는 미주리주가 문제였다. 결국 미주리가 노예주(奴隸州, Slave State)가 되고, 대신 의회 내에서 노예주와 자유주(自由州, Free State)의 수를 맞추기 위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일부를 분리시켜 신생주인 메인(Maine)을 만드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협정은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였을 뿐, 이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은 텍사스의 합중국 편입과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에 편입된 영토를 둘러싸고 다시 불거졌다. 원래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로 이주한 미국계 백인들은 노예제를 불법으로 규정한 멕시코 정부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이 미국의 개입을 불러와 미국-멕시코 전쟁을 촉발시킨다. 결국 멕시코는 미국에 패하여 지금의 텍사스로부터 캘리포니아, 오리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넘긴다. 이 와중에 텍사스의 영역 중 36도 30분 이북의 지역이 문제가 되었는데, 1820년의 미주리 협정에 의하면 이곳은 노예제를 유지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아울러 36도 30분이라는 기준을 태평양까지 그대로 연결하는 문제도 관건이었다.
이 때문에 1850년에 헨리 클레이(Henry Clay)와 스티븐 더글러스(Stephen Arnold Douglas) 주도하에 새로운 협정이 제정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캘리포니아는 36도 30분 선(線)과는 관계없이 자유주로 편입이 되며 새로이 합중국의 수도가 된 워싱턴 DC 경내에서는 노예 매매가 불법화되었다. 아울러 새로이 미국 영토로 편입된 뉴멕시코에서는 노예제를 주민 투표에 붙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s: 도망한 흑인 노예를 소유주에게 반환하는 법률)은 강화되었고 텍사스는 북부와 서부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1000만 달러를 연방정부로부터 보상받았다. 자칫 잘못하면 내전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던 상황은 1850년의 대타협으로 다시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지만, 노예제는 이러한 일시적 미봉책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타협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북부와 기타 지역의 노예 폐지론자들(Abolitionists)의 활동은 노예 지지론자들의 눈엣가시였다. 이들은 남부로부터 도망치는 노예들을 숨겨주는 것은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자유를 주장하는 전직 노예들의 법적인 변호까지 맡았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사례는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포드(Dred Scott vs Sanford) 사건이다. 버지니아 출신의 노예였던 드레드 스콧은 원래의 주인에 의해 미주리주로 옮겨 살다가 군의관인 존 에머슨이 그를 사면서 일리노이주와 위스콘신 테리토리(현 미네소타주)으로 이사, 다시 남부 루이지에나주로 옮겼다. 이 와중에 스콧은 위스콘신에서 결혼을 하였고 1843년 에머슨의 사망 후 그의 아내인 일라이자 샌포드에게 자신과 가족의 자유를 ‘사겠다’고 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자,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도움을 받아 1850년 미주리주 법원에 소를 제기한다. 주인이 자신과 그 가족을 데리고 노예제가 불법인 주에서 거주하였으니 이미 그 순간부터 자유인이었다는 논리였다. 결국 주 법원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대법원에서는 그가 ‘열등한’ 흑인이기 때문에 소를 제기할 자격조차 없다는 결정과 함께 스콧의 패소를 선언하였다. 대법원은 아울러 미주리 협정에 대한 법적인 결정을 내리면서 북위 36도 30분 선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이후 테리토리에서 주(州)가 되려는 지역은 노예제 여부를 주민 투표로 결정하게 만들었다.
당시 대법원장인 로저 테이니(Roger Taney)는 자신의 결정을 일종의 정치적 타협안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남부 노예주들에게 유리한 판결이었다. 남부 노예주들은 당연히 환영하였지만 북부 자유주의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고, 특히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이를 무기삼아 대대적인 여론몰이에 나섰다. 이미 판결이 나기 전에 노예지역과 자유지역의 경계선 같은 캔자스(Kansas)에서는 노예론자들과 폐지론자들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향후 이러한 충돌이 전국으로 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퍼져갔다.
노예제 반대 여론에 기름을 부은 작품인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왼쪽)과 소설을 집필한 스토우 부인(오른쪽).
1856년에는 미국 의회에서 노예론자인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브룩스(Preston Brooks) 의원이 메사추세츠의 섬너(Charles Sumner)의원을 의사당 내에서 구타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섬너는 중상을 입고 3년간 의정활동을 중지해야만 했다. 아울러 1852년에 스토우 부인(Harriet Beecher Stowe, 1811~1896)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이 출판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는 노예 반대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노예제로 인한 갈등과 대립은 이미 ‘갈 데까지 간’ 상태였고, 1850년대의 미국은 노예제라는 불화요인으로 인하여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결국 1860년, 노예제로 인한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네 명의 후보가 미국의 대통령직을 놓고 대선에서 격돌하게 된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세 명의 후보자. 왼쪽부터 에이브러햄 링컨, 존 브레킨리지, 스티븐 더글러스.
1860년, 미국의 16대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이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4월에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찰스턴(Charleston)에서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열었지만, 남부 출신 노예제 지지론자 의원들이 당의 강령에 반기를 들고 나가버리는 바람에 반쪽짜리 전당대회가 되고 말았다. 어찌되었건 전당대회는 강행되었고 일리노이주의 상원의원인 스티븐 더글러스(Stephen Douglas, 1813~1861)가 후보로 선출되었다. 남부 출신 민주당원들은 6월에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에서 따로 전당대회를 열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존 브레킨리지(John Breckenridge, 1821~1875)를 후보로 선출하였다.
한편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과거 자유토지당(Free Soil Party)의 당원들과 휘그(Whig)당의 진보론자들과 함께 새로이 생겨난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공화당은 노예제 반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공화당은 1860년 5월 전당대회에서 전직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이자 변호사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을 후보로 선출하였다. 휘그당의 잔여 세력과 반이민 정책을 모토로 삼았던 노우-낫싱(Know Nothing) 운동의 잔여 세력들은 소위 헌정연합(Constitutional Union)을 결성하고 전직 테네시 상원의원인 존 벨(John Bell)을 후보로 내세웠다.
이해 미국 대선의 특징은 노예제에 대한 여론이 지역에 따라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원래 남북을 막론하고 고른 지지를 받던 민주당은 분당 사태를 겪음에 따라 그 세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떨어져 나간 남부표는 물론 노예제에 대한 애매한 태도로 북부의 민심도 얻지 못하였다. 비록 더글러스가 전국적인 인지도가 있었다 하나 민주당은 시작부터 약점을 안고 선거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신생 공화당은 노예제 반대를 명확히 함으로써 남부를 포기하는 대신, 기존 민주당의 북부표를 크게 잠식하였다. 이는 노예제 반대론자들의 표를 얻음은 물론 북부가 최근의 이민으로 인구가 많아졌다는 점에 착안한 일종의 도박이었다. 한편 민주당에서 떨어져나간 노예제 지지론자들은 브레킨리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고, 존 벨은 남북 사이에서 승부를 보려 하였다. 특히 벨과 더글러스는 남부 분리주의자(Secessionists)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자신들이 선출되어야 연방이 해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지지를 호소하였다.
1860년 미국 대선 결과를 나타낸 지도. 각 후보가 승리한 주가 다른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노예제 반대론자인 링컨이 북부의 주들과 캘리포니아, 오리건을 휩쓸면서 미합중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예상대로 공화당은 북부의 주들을 휩쓸었고 링컨이 전체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 총 303표 중 180개의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링컨은 새로이 생겨난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주는 물론 북부주들을 거의 휩쓸었다. 더글러스는 주민투표에서 많은 득표를 했지만 미주리주에서만 승리하는 데 그쳤다. 벨은 비록 3개주를 이기기는 하였지만 당선권과는 애초부터 인연이 없었다.
이는 남부 의원들과 유권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브레킨리지에게 거의 몰표에 가까운 지지를 보냈지만 많은 인구를 가진 북부에 밀린 것이다. 더군다나 링컨은 남부에서 승리한 주가 하나도 없었지만, 순수하게 북부의 표만 가지고 남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후보를 눌렀다. 이제 인구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남부가 향후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였으며, 북부의 표는 언제나 노예제 반대론자 후보에게 돌아갈 것이 분명하였다. 더 이상 그들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게 된 남부의 정치인들은 연방 탈퇴 여론을 부추겼다.
투표일 이전에 버지니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남부 주에 주둔하고 있던 연방군 지휘관들은 군 내부에서 분리주의가 빠르게 번지고 있고 군 일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정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링컨은 이를 선거판에서 흔히 있는 소문으로 치부하고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분리주의는 남부에서 대세로 굳어졌고, 링컨이 당선된 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군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자 군 원로인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1786~1866) 중장은 당선자 링컨이 취임하기 전, 그에게 군의 통수권부터 인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물론 링컨도 이런 남부의 여론을 모르는 것은 아니어서 취임사에서부터 남부의 민심을 다독이는 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남부 주의 국민들 사이에서 이제 공화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니 그 재산과 안정과 개인적인 안위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근거 없는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있어왔고 누구라도 볼 수 있는 증거에 의하면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러한 증거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이 지금까지 해온 연설과 출판한 모든 연설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인용하여 여러분께 다시 말씀 드립니다. “본인은 노예제가 현존하고 있는 모든 주에 그 어떤 방식으로도, 노예제도에 대한 직접ㆍ간접의 간섭을 할 의도가 없습니다. 저에게는 그리할 권리도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또한 그리할 의향 역시 없습니다.” <br /><br />Apprehension seems to exist among the people of the Southern States that by the accession of a Republican Administration their property and their peace and personal security are to be endangered. There has never been any reasonable cause for such apprehension. Indeed, the most ample evidence to the contrary has all the while existed and been open to their inspection. It is found in nearly all the published speeches of him who now addresses you. I do but quote from one of those speeches when I declare that “I have no purpose, directly or indirectly, to interfere with the institution of slavery in the States where it exists. I believe I have no lawful right to do so, and I have no inclination to do so.”<em></em>
이러한 연설을 두고 일부에서 링컨은 진정한 노예제 폐지론자가 아니었으며 당선을 위하여 폐지론을 이용했다는 수정론이 일부 등장하였으나 이는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링컨이 노예제를 유지하려 했다는 발언은 여러 군데서 찾아 볼 수 있지만 이는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연방을 유지해야 하는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한 말일뿐이며, 링컨은 노예제를 직접적으로 찬성한 일이 없다. 그는 일생을 통틀어 노예제도 폐지론을 주장하였으며 이는 선거 당시의 풍자만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1860년 미국대선 풍자만화. 링컨이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백악관으로 달려가고 있다.
위의 만화에서 링컨을 제외한 세 명의 후보들이 링컨이 앞서가는 것을 보고 한 마디씩 하고 있다.
<strong>벨:</strong> 아이고 안되겠네. 난 포기하겠소. <br />(Bless my soul. I give up)<br /><strong>브레킨리지:</strong> 저 롱다리 폐지론자가 결국은 앞서가는구먼. <br />(That long-legged abolitionist is getting ahead of us after all)<br /><strong>더글러스:</strong> 내가 살면서 이렇게 빨리 뛴 적이 없었는데……. <br />(I never run so fast in my life)<br /><em></em>
이 가운데 남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브레킨리지가 하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거에 대한 신문 풍자만화에서 링컨이 노예제 폐지론자로 등장한 것은 당시의 유권자들과 기타 후보들, 그리고 언론 모두 그가 폐지론자임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니 아무리 링컨이 당선 후에 ‘나는 노예제도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 운운해도 이를 믿어줄 리 없었다.
남부 주들은 링컨이 취임도 하기 전에 분리를 결정한다. 가장 먼저 분리를 선언한 것은 사우스캐롤라이나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연방으로부터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탈퇴를 유발하였고 이를 정당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들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f the Immediate Causes Which Induce and Justify the Secession of South Carolina from the Federal Union)”이란 문서를 통하여 1860년 12월 24일에 미합중국에서의 탈퇴를 결정한다. 다음 해인 1861년 2월까지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러베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그리고 텍사스의 6개 주가 추가로 연방 탈퇴를 선언하였으며 이들 주의 대표자들이 모여 1861년 2월 4일 남부연합, 공식 명칭으로는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 of America)의 건국을 선포하고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1808~1889)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수도는 앨러배마주의 몽고메리로 결정되었다.
링컨은 취임하기 전인 2월에 북부 14개 주와 남부 7개 주 출신의 유력 정치인들과 전직 정부관료들을 모아 ‘평화회담’을 열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앞서 말한 대로 취임사에서 자신은 노예제에 간섭할 의도가 없음을 밝혔으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고하였다. 연방정부의 관점에서 연방의 분할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 이에 정부는 연방으로부터 탈퇴한 모든 주가 ‘반란 상태에 있음(in a state of rebellion)’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섬터 요새에서의 전투에서 연방군을 지휘한 로버트 앤더슨 소령(왼쪽)과 남부 연합군을 이끈 보우레가드 준장(오른쪽). 둘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재학 당시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1860년 말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연방에서의 탈퇴를 결정하면서 주(州) 내에 있는 연방 군사시설을 두고 주 정부와 연방군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입장에서는 주의 주요 항구이자 거점인 찰스턴 인근의 군사 기지에서 연방군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찰스턴 항구에는 두 개의 주요 시설이 있었는데 몰트리 요새(Fort Moultree)와 섬터 요새(Fort Sumter)였다. 몰트리 요새는 미국 독립전쟁 시절부터 찰스턴 항구를 지키던 요새였고 연방군 수백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미 남부가 탈퇴하기 전부터 남부인들은 연방군 요새들을 에워싸기 시작했고, 1860년 12월 몰트리 요새는 사실상 포위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찰스 피켄스(Charles Pickens)는 더 이상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의 일원이 아니라며 연방군의 퇴거를 요구하였고, 찰스턴의 일부 신문은 사람들에게 요새를 공격할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몰트리의 연방군 지휘관인 앤더슨(Robert Anderson) 소령은 병력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몰트리 요새의 대포에 말뚝을 박아 사용할 수 없게 만든 후 12월 26일에 휘하 병력을 보다 방어에 용이한 섬터 요새로 옮긴다. 섬터 요새는 새로이 지어지기는 했지만 그 등대를 지키기 위한 경비병 1명과 민간 관리인들 외에는 병력이 없었다. 그러나 위치상 찰스턴 항구로 들어가는 수로(水路)의 정중앙에 있어 만약 연방군이 이를 장악하게 될 경우 찰스턴을 드나드는 남부 함선들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비록 방어의 용이함 때문에 섬터 요새로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연방군의 병력은 태부족이었다. 원래 135문의 대포를 설치하고 600명이 넘는 병사가 상주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앤더슨 휘하의 병사는 68명뿐이었고 그 외 약 40명의 건설노동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앤더슨은 겨우내 악조건 속에서도 최대한 수비를 강화하였다. 아메리카 연합국(남부) 정부는 워싱턴의 연방정부를 도발하지 않으려는 정치적 고려 때문에 겨울 동안에는 공격을 자제하였지만, 링컨의 취임이 가까워오자 행동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보우레가드(P.G.T Beauregard) 준장에게 섬터 요새 공격을 명한다. 공교롭게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재학 당시 앤더슨은 보우레가드의 교관이었다. 보우레가드는 해안과 해상(海上) 이동포대에 수백문의 대포를 배치하고 찰스턴시 민병대를 포함한 6000명의 병력을 모아 한때 그의 스승이었던 앤더슨이 있는 섬터 요새를 향한 공격을 준비하였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한 링컨은 남군에게 위협받고 있는 섬터 요새와 플로리다의 피켄즈 요새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이를 지원할 방법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한편 남부 정부는 워싱턴 DC에 특사를 보내 연방시설에 대한 피해를 끼칠 경우 보상하겠다는 의사와 함께 평화조약을 제안했다. 그러나 링컨은 남부 주들은 현재 연방정부에 대한 반란 상태이며 반란군과의 협상은 없다는 말로 남부의 평화제의를 단칼에 거절하였다. 어떤 식으로든 협상을 하고 조약을 맺는다는 것은 남부를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링컨은 섬터 요새에 대한 지원을 결정하였고 섬터를 지키고 있는 앤더슨에게 이를 통보한다. 섬터 요새에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남부에서는 지원이 도달하기 전에 요새를 점령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 아래, 마침내 4월 11일에 앤더슨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그러나 앤더슨이 남부의 최후통첩을 거부하면서 남군은 4월 12일 새벽 4시, 섬터 요새에 대한 포격을 개시한다.
남군은 수백문의 포로 공격하였지만 병력과 장약이 부족한 앤더슨은 불과 6문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아울러 남군은 발사하기 전 뜨겁게 달군 소위 열탄(熱彈, hot shots)을 섞어 발사하여 요새 내부의 목재건물에 화재를 일으켰다. 결국 3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지는 적의 공격과 물자 부족에 견딜 수 없게 된 앤더슨은 4월 14일 오후 2시경에 남군에 항복한다.
앤더슨은 퇴거하기 전 미국 국기에 대한 예포발사를 요구하였고 남군이 이를 수락하여 100발의 예포를 발사하던 중 대포가 폭발하여 연방군 병사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한다. 남북 전쟁에서 북군 최초의 인명 피해였다. 남군은 요새를 접수하고 연방군 병사들은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북군 함선에 실려 철수한다. 앤더슨은 철수하면서 요새의 찢긴 성조기를 가지고 갔는데 이는 전쟁 내내 북부의 전쟁 의지를 고취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섬터 요새의 점령으로 미국은 남과 북으로 확실히 갈라지게 되었다. 노예제와 주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남부와 연방을 유지하려는 북부 사이에는 이제 전쟁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섬터 요새가 넘어간 후 워싱턴의 연방정부와 몽고메리의 남부 정부는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 시점까지 남부는 각 주의 민병대에 의존하였으나, 연방정부가 대규모로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자 소위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군의 정규군(남군)을 창설하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 연방군의 장성들이 연방군 직위를 사임하고 새로이 창설된 남군에서 지휘를 맡게 되었다.
섬터 요새가 남부에 넘어가자 링컨은 본격적으로 병력을 소집하기 시작하였고, 어느 쪽을 선택할지를 놓고 눈치를 보고 있던 버지니아, 테네시,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등 4개의 경계주(border states)들은 같은 남부인들과 싸우기를 거부하며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한다. 버지니아가 탈퇴하자 몽고메리의 아메리카연합(남부) 정권은 수도를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로 옮긴다. 이는 버지니아의 ‘용기’를 보상하는 동시에 워싱턴에서 가까운 곳을 수도로 선택함으로써 워싱턴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버지니아인들이 주 정부의 결정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버지니아 서부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의 주민들은 탈퇴를 거부하였고, 워싱턴 정부는 이 지역을 분리시켜 웨스트버지니아주(州)를 새로 만든다.
노예제도를 유지하면서도 남부의 분리 결정에 찬성하지 않은 주들도 있었는데 델라웨어, 켄터키, 메릴랜드와 미주리였다. 물론 메릴랜드같은 경우는 반 강제적이었다. 만약 메릴랜드가 남부로 넘어갈 경우 수도 워싱턴이 적지(敵地)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을 우려한 링컨 대통령이 수천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메릴랜드 의회 내 친(親) 남부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하였고, 친 남부 인사들이 빠진 메릴랜드 의회가 미합중국 잔류를 결정한 것이다.
미주리주의 경우 주민들은 대부분 중립이었으나 미주리 주지사인 잭슨(Claiborne F. Jackson)과 주의회 의원 대부분은 남부 지지자들이었다. 이에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미군장교였던 나다니엘 라이언(Nathaniel Lyon)은 재빨리 자신의 사병 조직을 의용군으로 편성하고 휘하에 있던 정규군과 힘을 합쳐 세인트루이스에 있던 연방군 무기고를 장악해 이를 북부의 일리노이로 보냈다. 아울러 미주리주 방위군이 주둔하고 있던 캠프 잭슨 요새를 재빨리 점령해 주 방위군 병력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친 남부였던 인근 주민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군중에 총격을 가하여 28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병력을 지휘하여 주지사와 함께 그를 따르고 있던 주 방위군 부대를 남쪽으로 몰아낸다. 이리하여 남부로 넘어갈 뻔하였던 2개의 주가 연방에 남아 있게 되었고, 이후 전쟁에서 북군이 남부로 진격하는 발판이 되었다.
남북 전쟁은 미국 영토만 남북으로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교육을 받고 동료로서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에 참전하였던 군의 선후배들 역시 갈라놓았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북군의 수장은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군을 지휘하였던 노장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1786~1866) 중장이었다. 물론 링컨에 의하여 임명된 것이 아니라 그가 군의 원로로서 총사령관을 맡고 있을 때 남북 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스콧은 이때 74세로 매우 노쇠하였고, 때문에 자신을 대신해서 연방군을 이끌어줄 인물을 찾았다.
이윽고 스콧은 자신이 아는 부하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 로버트 리(Robert E. Lee, 1807~1870)에게 군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버지니아 출신이었던 리는 비록 남부의 분리독립에는 반대였지만, 연방군의 지휘를 맡을 경우 고향인 버지니아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스콧의 제안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겼다. 리는 군의 대선배였던 스콧에게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근신하겠다고 했지만, 스콧은 ‘우리 군에 애매한 사람은 필요 없다네(I have no place in my army for equivocal men)’라고 극언하며 리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결국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리는 연방군 장교 직위를 사임한 후 남군에 가담하게 된다. 후배에 대한 스콧의 태도가 다소 매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스콧 역시 버지니아 출신이고 남부인이라는 점에서 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였고 어떠한 이유로도 주(州)들의 연방 탈퇴는 용인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였기에 리의 애매한 태도가 못마땅했고 결국 리를 내치고 말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스콧의 결정은 이후 남군에 날개를 달아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리가 사령관직을 고사하고 남군으로 가면서 미합중국 수도인 워싱턴 DC를 지키는 미 육군의 동북 버지니아군(Army of Northeastern Virginia)은 비록 직업군인이기는 하지만 한 번도 야전에서 군을 이끌어본 적 없는 어빈 맥도웰(Irvin McDowell, 1818~1885)이 맡게 되었다.
남부의 대통령이자 통수권자인 제퍼슨 데이비스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이고 연방군에 다년간 복무한 적이 있는 전직 군인이었다. 그와는 달리 새로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된 링컨은 군 경력이 전무한 변호사 출신이어서 전쟁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링컨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의회도서관에서 전쟁사 서적들을 대출받아 벼락치기 공부를 하였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군통수권자로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전쟁이 터졌을 때 전쟁에 무지한 것은 대통령인 링컨뿐만이 아니었다. 북부의 많은 유력 인사들과 시민들 대부분이 남부 ‘따위’가 연방정부의 상대가 될 리 없다며 연방군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측하였다. 연방군이 몇 번 출동하여 위력을 보여주면 남부의 반란 세력은 그대로 항복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작전 짜기에 고심하고 있는 군 수뇌부와는 달리 그들은 남부를 서둘러 공격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전쟁 분위기에 들떠 있는 북부민들과 달리 스콧은 의외로 전쟁이 오래갈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남부를 굴복시킬 대전략을 구상하였는데, 이름하여 아나콘다 작전(The Anaconda Plan)이었다. 물론 이 이름은 스콧 스스로가 붙인 것이 아니고 그의 작전이 언론에 흘려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나콘다 작전은 병력과 화력으로 남부를 직접 치는 것이 아니라 남부의 숨통을 조여서 말려 죽이는 개념이었다. 우선 해군력을 늘리고 함선들을 총동원하여 대서양과 멕시코만에 배치, 남부 해안을 봉쇄하고 물자의 유입을 막는다. 그리고 강력한 일군(一軍)을 미시시피강 유역으로 진격시켜 강 유역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여 텍사스 지역의 물자와 인력이 남부로 유입되는 것을 막고, 남부의 주요 항구인 뉴올리언즈를 북군의 거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스콧이 제안한 아나콘다 작전. 남부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해안을 봉쇄하고 물자와 인력의 유입을 막아 남부의 숨통을 조이는 전략이었다.
스콧의 계획은 빠른 전투와 승리를 기대하고 있는 여론의 반대에 부딪혔고 당장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북군은 동부전선에서는 지지부진하였지만 서부에서는 연승을 거두었고, 우세한 해군력을 앞세워 비록 완전한 봉쇄는 아니지만 외부의 물자와 지원이 남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즉, 남북 전쟁의 결과만 놓고 보자면 전쟁은 스콧의 작전대로 진행되었고 물자와 인구가 부족한 남부가 항복하게 된다.
불 런 전투에서 북군을 이끈 사령관 맥도웰 소장.
새로이 북군을 맡게 된 멕도웰 소장은 부임 초기부터 빨리 남부를 공격하라는 여론의 재촉을 받았다. 맥도웰의 병사들은 소위 ‘의용군’이었으며 대부분 90일 복무 과정으로 들어온 단기 사병들이었고, 전투 경험은 물론 체계적인 훈련도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여론과 정치인들의 독촉에다 시달리다 못한 맥도웰은 결국 공격에 나서기로 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새로이 남부의 수도가 된 리치먼드였다. 버지니아에는 루이지애나 출신의 보우레가드(P.G.T Beauregard)가 이끄는 2만의 병력이 매너서스(Manassas)에 주둔하고 있었고, 버지니아 서부의 셰넌도어 밸리(Shenandoah Valley)에 존스턴(Joseph E. Johnston)이 이끄는 1만 2천의 병력이 있었다. 맥도웰이 세운 작전의 골자는 패터슨(Robert Patterson) 소장이 거느린 18,000의 병력으로 요충지인 하퍼즈 페리를 공격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여 존스턴의 병력을 묶어두고 보우레가드의 포토맥군(Army of the Potomac)과 합치지 못하게 한 다음, 35,000의 병력으로 보우레가드를 타격하여 수적인 우위로 격파하는 것이었다. 보우레가드의 군단을 무찌르고 나면 리치먼드로 곧장 진격하여 점령한다는 작전이었다.
1861년 7 월 16일,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워싱턴을 출발한 맥도웰의 군은 그 미숙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일단 50파운드(22kg)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행군한 적이 없는 병사들은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였고 선봉대를 맡은 병사들은 숲 속을 지나면서 약간의 소리나 움직임에도 적들이 숨어있을 지 모른다며 멈추기 일쑤였다. 선봉대가 멈추면 연쇄반응으로 후발 대열들도 멈출 수밖에 없었고, 후발의 병사들은 장교의 눈을 피해 갈증을 덜어줄 물을 찾거나 산딸기를 따러 흩어지는 등 군기가 엉망진창이었다. 7월 18일에 매너서스 인근 센터빌에 도착하였을 때는 식량도 떨어져 워싱턴에 추가로 군량을 요청해야 했다.
불 런 전투에서 맥도웰이 세운 계획은 셰넌도어 방면을 맡았던 패터슨의 행동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흐트러졌다. 패터슨은 일단 남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90일짜리 단기 사병들로 구성된 자신의 군이 적장 존스턴이 이끄는 15,000명의 ‘베테랑’들과 싸우기에는 불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사령부로부터 내려온 애매모호한 명령은 패터슨의 우유부단함을 더욱 부추겼다. 즉 존스턴의 움직임을 막기 위하여 기동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공격까지 해야 하는지의 여부가 확실치 않았던 것이다. 패터슨은 존스턴이 혹시라도 워싱턴으로 진격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군을 약간 뒤로 물렸는데, 존스턴은 이를 틈타 근처 피드몬트(Piedmont)에서 병사들을 기차에 태워 보우레가드가 있는 매너서스로 향하였다. 이들이 거의 모두 7월 20일에 매너서스에 도착하면서 맥도웰의 수적 우위는 사라졌다.
매너서스에 있던 보우레가드의 계획은 북군의 좌익을 들이치고 북군의 전진기지인 센터빌을 직접 타격하여 북군을 무너뜨린 후 워싱턴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관이었던 존슨에게 계획을 설명하였고 존스턴은 보우레가드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보우레가드는 매너서스 인근의 좁은 강인 불 런을 따라 군을 배치하였고 북군이 군량을 조달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오른쪽에 병력을 집중하였다. 그쪽에 철로가 있기 때문에 만약 북군의 공격이 있다면 철로를 따라 이어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북군의 공격이 없자 7월 21일 아침에 북군의 좌측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기습을 당한 것은 보우레가드였다. 제대로 된 기병이 없어서 자신이 직접 말을 타고 전선을 정찰한 맥도웰은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남군의 좌측, 불 런이 좁아지는 지점에 10,000명의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7월 21일 새벽 2시에 병사들을 깨워 공격 대형으로 포진시킨 후, 동이 트기 시작할 때 남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철로가 있는 방향으로는 요란한 포격을 가하여 남군의 시선을 돌렸다. 전형적인 성동격서(聲東擊西)였다. 그러나 불 런 근처에서 많은 먼지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한 남군의 에번스(Nathan Evans) 대령은 기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휘하 병력을 동원하여 불 런을 도강하는 북군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다. 에번스가 북측 기습군을 막는 사이 주변에 있던 2개의 남군 부대가 추가로 달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불 런 방면 남군은 4,500에 불과하였고 중과부적으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남군은 강 건너 헨리하우스 언덕(Henry House Hill)으로 밀려났다. 만약 북군이 이곳을 돌파한다면 남군의 후방이 노출되는 것이었고 전세는 남군에게 불리하였다. 남군 병사들은 하나 둘씩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전투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남군의 패배가 확실해 보였다.
1861년 7월 21일 하루 동안 벌어진 불런 전투. 초기에는 북군이 병력의 우위를 내세워 남군을 밀어붙였으나 남군의 반격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전투는 남군의 승리로 끝났다.
보우레가드는 아침을 먹다말고 뛰쳐나와서 헨리하우스 언덕 인근에서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기타 지역의 병력을 투입하여 북군의 공격을 막으려 하였다. 북군도 물러나지 않았고 후속 병력들이 달려오면서 7월 21일 내내 헨리하우스 언덕 인근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진행되었다. 점심시간 즈음에 일단의 북군이 남군의 전선을 돌파하는 듯 하였으나 나는 듯이 달려온 스튜어트(J.E.B Stuart)의 기병대에 격퇴되었다. 북군은 병력의 우위를 내세워 계속해서 지친 남군을 밀어붙였지만,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에서 괴짜로 유명했던 전직 교관 토머스 잭슨(Thomas Jackson)의 부대가 끝까지 완강히 버텨 북군의 돌파를 막아내었다. 잭슨의 부대가 마치 돌벽(Stone Wall)처럼 버텨 북군을 막아냈다는 전설이 남군 사이에 퍼지면서 잭슨은 ‘스톤월(Stonewall)’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후 북군의 맹장으로 이름을 드높이게 되는 윌리엄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1820~1891)도 헨리하우스 언덕의 격전에서 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이 피 튀기는 격전은 의외의 실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북군 포병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간접사격을 하다가 멕도웰의 명령에 의하여 인근의 도건스 릿지(Dogan’s Ridge)로 나와 근접지원사격을 하고 있었다. 오후 3시쯤 남군은 북군의 두 포대 중 하나를 공격했는데, 이때 포대를 지휘하고 있던 배리(William Barry) 소령은 푸른 제복을 입은 부대가 접근하는 것을 보고 북군의 증원군이라 생각하여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북군이 아니라 남군 잭슨 휘하의 33 버지니아 연대였고, 이들은 포병대 근처까지 온 다음 포병대와 그 수비 병력에 일제사격을 가하여 이를 궤멸시켰다. 잭슨은 여세를 몰아 2개의 연대로 근처에 있던 북군 리켓스(James Ricketts) 대위의 포대에 공격을 가하였고 이로써 북군의 포병 전력은 전멸하였다.
남군의 공격에 무너지는 리켓스 대위의 포병 연대. 북군의 포병이 궤멸되면서 전세는 확실히 남군 쪽으로 기울었다.
북군의 포병들이 궤멸되면서 전세는 남군 쪽으로 기울어졌다. 북군이 14시간 동안 더위 속에서 진행되는 전투에 지쳐가고 있을 때, 마침 셰넌도어 방면에 있던 남군의 마지막 부대가 기차로 도착하여 오후 4시경에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맥도웰은 2개의 여단을 예비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다. 북군이 지쳐가고 있음을 감지한 보우레가드는 전군에 전면적인 반격을 명령하였고 지친 북군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미 몹시 지친 상태였고 부대간의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일선의 북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본 제 2선의 북군 부대들도 뒤돌아섰고 곧 후퇴가 아닌 무질서한 도주로 변하였다. 병사들은 식량과 배낭, 심지어 무기와 탄약까지 버리면서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만약 남군이 이때 전면적인 추격을 하였더라면 북군은 워싱턴까지 밀릴 수도 있었지만, 남군도 지친 것은 매한가지여서 매서운 추격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울러 전선이 워낙 넓어 보우레가드가 자신의 군 모두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 또한 어려웠고, 북군의 셔먼이 자신의 부대와 일부 패잔 병력을 수습해 후위대를 형성하여 남군의 추격을 막았기 때문에 남군은 추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북군을 완전히 궤멸시키지는 못했지만 전투는 남군의 승리였다. 전직 군인이었던 남부 대통령 데이비스는 리치먼드에서 전장까지 달려오는 동안 후퇴한 남군 병력을 보고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막상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남군이 승리를 거둔 후였고 이에 남군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을 치하하였다. 반면에 북군의 승리를 기대하면서 이를 ‘참관’하러 나온 북부의 국회의원들은 북군의 무질서한 패배를 지켜보면서 빠른 승리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다. 불 런 전투에서 남군은 비록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군복과 함께 아메리카 연합국의 국기(Stars&Bars)가 미합중국의 국기와 비슷하여 우군과 적군을 오인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기억하고 전장에서 쓸 군기를 새로 만들었다. 이 군기(軍旗)는 아메리카 연합, 즉 남부의 새로운 상징으로 등장하였고, 현재도 미국 남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남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보우레가드는 전투 이후 자신의 완전한 승리를 전장에 나타난 대통령 데이비스가 막았다는 식의 발언을 하였고, 이 기사가 버지니아의 한 신문에 실리면서 데이비스의 미움을 사서 서부전선으로 전출되었다. 이때까지 북부에서는 기껏해야 90일이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으나, 이러한 자신감은 불 런의 패배로 인하여 사그라졌고, 결국 북부 미합중국은 장기전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불 런에서의 참패는 북군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렸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처음에 ‘반란군’ 따위에게 패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했던 미국(북부) 국민들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 제대로 싸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불 런에서의 패배 하루 뒤(7월 22일)에 곧장 3년 복무 기한의 병사 50만 명을 모집하는 법안에 서명하고 사흘 뒤에는 추가로 50만을 모집하는 법안에 재차 서명하였다. 젊은이들은 적극적으로 군문(軍門)에 몰려들었고 각 도시의 모병 사무소는 군에 입대하려는 청년들로 가득했다. 아울러 북부의 주지사들은 앞다투어 각 주의 의용병(volunteers)으로 구성된 부대를 보내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머지않아 워싱턴 근교에 마련된 여러 훈련장에는 훈련병들이 넘쳐났다.
이렇게 청년들이 넘쳐나게 된 이면에는 당시 미국의 이민을 둘러싼 현실이 있다. 1840년대까지 60만 명에 불과하던 ‘이민자’의 수는 1850년에 이르러 180만으로 급증한다. 특히 아일랜드의 감자 흉작으로 인한 대기근, 그리고 1848년 유럽 각국에서의 시민혁명 실패는 많은 유럽인들을 미국으로 내몰았다. 1860년에 이르러서는 이민자 수가 더욱 늘어났고, 미국의 노동시장은 새로운 인력을 흡수할 수 없어 많은 청년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기보다는 군대에 들어가 공짜 밥을 얻어먹고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1863년 5월 챈슬러스빌(Chancellorsville)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 젊은이들이 적극적으로 의용병이 되었던 이면에는 미국의 이민을 둘러싼 현실이 있었다. 넘쳐나는 이민자로 인해 노동시장이 포화되자 청년들은 전쟁터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어찌되었건 누군가는 불 런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고 결국 동북버지니아군 사령관 맥도웰은 해임되었다. 동북버지니아군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이 창설된 포토맥군(Army of the Potomac)의 사령관에는 군문으로 복귀한 전직 철도 회사 사장 조지 매클렐런(George B. McClellan, 1826~1885)이 임명되었다. 그는 많은 사가(史家)들에 의해 초기 북군 패배의 원흉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이는 어찌 보면 누명이다. 매클렐런은 커다란 집단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시 채 2만도 되지 않던 미합중국 육군을 수십만의 정예 조직으로 거듭나게 한 데는 누구보다도 매클렐런의 공이 컸다.
일단 그는 부임하자마자 헌병을 동원하여 워싱턴 곳곳의 술집과 가정집에 숨어 있던 전직 장교들과 도망병들을 찾아내어 다시 병영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새로이 모인 수십 만의 신병들을 훈련시킬 교과과정을 짜고 신병들의 훈련을 적극적으로 감독하였다. 아울러 군이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여 이에 대한 생산을 주문하고 막대한 양의 군량과 탄약을 비축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하루 18시간을 일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부하들을 마구 몰아붙였다.
매클렐런은 부임한 후 불과 두 달만에 땅바닥까지 떨어졌던 북군의 사기를 진작시켰고 엉망이었던 군 기강을 바로잡았다. 오합지졸이었던 수십만의 신병들은 훈련을 거쳐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는 강한 군인들로 거듭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매클렐런은 장교와 사병을 막론하고 군 전체의 신망을 얻었고 포토맥군을 잘 조직된 전투 집단으로 변화시켰다. 매클렐런의 부지런함 덕분에 주에서 보내는 의용병과 단기 사병에 의존하던 북군이 전문화된 직업적 정규군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현대로 따지자면 매클렐런은 탁월한 병참감(兵站監, Quartermaster General)이자 공병감(工兵監, Chief of Engineers)이라 할 수 있다. 2만도 안 되는 군을 수십만의 강군으로 만들고, 이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확보하였으며, 덤으로 워싱턴 주변에 12개의 포대 진지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수도 방어 네트워크를 완성하였다. 매클렐런은 사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후 군 생활 내내 공병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그는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공병단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전투에서 효과적인 작전으로 대위까지 진급하였다. 전쟁 후 웨스트포인트로 돌아와 진지 구축과 공병 훈련을 담당하였고, 아울러 외국에서 총검술과 기병전 서적을 들여와 이를 토대로 훈련 교본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뽐내기를 좋아하는 만큼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는 일 중독자였던 매클렐런은 군내에서 소위 ‘군사과학’의 대가로서 그 명성이 높아졌다.
매클렐런은 1857년에 군직을 내려놓고 공병으로서의 경력을 이용하여 철도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1861년 4월에 오하이오주 의용군의 사령관으로 군문에 복귀하였다. 그의 유명세는 연방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의 공병/병참경력을 높이 산 연방정부에 의하여 5월 3일에 오하이오강 이북의 지역을 총괄하는 오하이오 군관구(軍管區, Department of Ohio)의 수장이 됨과 동시에 미합중국 정규 육군의 소장(少將)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34세에 총사령관인 스콧에 이어 미국 육군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계급을 받은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연방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서부 버지니아 지역에서의 작전을 맡았고, 6월과 7월에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필리파이(Philippi)와 리치마운틴(Rich Mountain) 등의 전투에서 남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리치마운틴에서의 전투는 그를 일약 영웅으로 만들었고, 이 때문에 유명세를 타고 신설 포토맥군의 사령관에 임명된 것이었다.
앤티텀 전투 이후 막사 안에 마주 앉은 링컨과 매클렐런. 매클렐런은 한때 ‘젊은 나폴레옹’이라 불릴 정도로 지지를 받았으나,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 탓에 전투의 순간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다.
그러나 병참과 조직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군대를 재빨리 장악한 매클렐런이었지만 그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매클렐런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그의 성장 과정이 너무 순탄했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16세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20세에 59명 중 2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의 공훈으로 대위까지 승진하였고 여러 차례의 유럽 유학을 거치면서 군내 공병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군직을 내려놓은 후에는 철도 회사 사장이 되었다가 군문에 복귀하여 소장 계급을 달게 되었다. 한 마디로 그는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두 번째, 그는 야심이 큰 정치군인이었다. 야전에서의 지휘보다는 정부 내 인사들과 교분을 다지는 데 주력하였고, 포토맥군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군의 대선배이자 상관인 스콧 중장을 제치고 모든 보고를 대통령에게 직접 하였다. 상관으로서 무시당하는 것을 두고 스콧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자 멕클레렌은 이를 대통령과 함께 여당인 공화당 고위 인사들에게 일러바쳤다. 이에 매클렐런이 승리를 가져다 주기를 기대하였던 공화당 의원들은 스콧을 성토하였고 링컨에게 스콧을 몰아내라고 종용하였다. 결국 스콧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령관직에서 사임하였다.
세 번째, 매클렐런은 모든 일에 지나친 완벽주의를 추구하였고 아울러 지나치게 신중하였다. 군을 움직이는 데 있어 모든 게 확실하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단점들로 인하여, 매클렐런은 정작 전투의 순간이 닥쳤을 때 승리를 거머쥘 수가 없었다.
포토맥군의 재정비가 이루어지는 동안 미합중국의 해군 역시 증강되고 있었다. 이미 링컨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남부 해안에 대한 봉쇄를 명령한 상태였다. 문제는 이러한 봉쇄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함선이 태부족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합중국 해군에는 42척의 주력함선이 있었는데, 상당수가 탐험을 위한 원양항해 중이어서 즉시 투입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대다수는 범선이었고 기동력이 좋은 증기선은 3척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워싱턴 정부에 의한 봉쇄령이 선포되자 다른 나라, 특히 유럽 국가들은 미 해군이 허풍을 떤다며 공공연히 비웃기까지 하였다.
미 해군 증강 사업의 일환으로 1862년 진수된 기범선(機帆船) 뉴 아이언사이드(New Ironsides)호.
그러나 워싱턴 정부에게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내륙수로, 즉 강을 장악하는 문제였다. 특히 내륙에서 병력을 움직이는 데 있어 오하이오강이나 미시시피강 같은 큰 강은 중요한 수송로였고, 수심이 얕은 내륙수로에서 원활히 기동할 수 있는 강상(江上) 함선의 보급도 시급하였다. 이에 워싱턴 정부는 원양항해를 하고 있던 함선들을 전부 불러들이고 새로운 함선들을 건조함은 물론 민간의 무역선과 여객선들을 대량 구입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861년 말에 이르러 미합중국 해군에 80척의 증기선과 60척의 범선이 증강되었고, 봉쇄에 투입된 함선의 수가 160척에 달했다. 1862년에는 더욱 빠른 증강이 이루어져 미 해군은 282척의 증기함선과 102척의 범선을 보유하게 되었다.
해군 병력도 빠른 수로 증강되어 전쟁 전 9,000명에 불과했던 미합중국 해군은 1861년 말 24,000명으로 늘어났고, 이후 곧 5만 명을 넘었다. 이에 비하여 남부에는 함선 건조를 위한 조선소도 얼마 되지 않았고(전국에 걸쳐 7개소), 숙련된 선공(船工)들과 수병의 수에서도 북부 해군의 물량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남부에서는 함상전력으로 북부 해군과 정면대결하기보다는 기동력으로 북부의 함선들을 따돌리기 위한 쾌속선들을 주로 띄웠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봉쇄돌파선(Blockade Runners)이라 불렀다.
남부의 봉쇄돌파선. 북부의 함선을 따돌리기 위해 남부가 선택한 것은 기동력 있는 쾌속선이었다.
북부의 봉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의외로 봉쇄 작전에 지원하는 청년들이 많아 인원 부족을 걱정할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뱃일과 함상 생활이 결코 쉬울 리는 없었지만 일단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심지어 술 마시는 것(?)까지 복무 환경이 전반적으로 육군보다 나았다. 결정적인 것은 배에 타게 되면 총포탄에 맞아 죽거나 다칠 확률이 현격히 낮아진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남부의 무역선이라던가 봉쇄돌파선을 나포할 경우 짭짤한 금전적 이익도 얻을 수 있었다. 남부의 함선을 나포하였을 시 배와 함께 화물은 경매에 부쳐졌고, 그에 따른 수익은 그 배를 나포한 함선의 승무원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1864년말경 미합중국 해군의 아이올로스(Aeolus) 호(號)가 남부의 돌파선인 호프(Hope) 호(號)를 나포하자 규정대로 경매 후 수익이 분배되었는데, 아이올로스 호의 함장은 13,000달러, 현재 가치로 약 20만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다. 그리고 수병 1명당 1천달러, 현재의 가치로 약 15,000달러가 주어졌다. 참고로 이 당시 북부 육군 병사의 월 수당이 13달러, 현재의 가치로 약 200달러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해군에 들어가 봉쇄 작전에 종사하는 것이 훨씬 나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861년 8월 29일에 노스캐롤라이나 해터러스에 상륙하고 있는 북군 육전단. 해터러스 요새는 이후 북군의 봉쇄 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북부 육군이 불 런에서의 참패 이후 재정비하는 동안 해군은 링컨 대통령의 봉쇄령에 보조를 맞추어 남부 해안에 대한 공략에 나섰다. 일단 중남부 해안에서 돌파선들이 출항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봉쇄돌파선들의 ‘소굴’이 된 노스캐롤라이나의 해터러스 해협(Hatteras Inlet)을 공략하였다. 이 지역은 긴 섬들이 해안을 방파제처럼 막고 있었고, 남부의 함선들은 이 섬들을 이용하여 북부 봉쇄함들과 숨바꼭질을 하였다. 남부에서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부랴부랴 수비를 보강하였고 아울러 등대라던가 부표등 항해에 필요한 시설물을 모두 철거하였다.
그렇지만 보강이 끝나기 전 1861년 8월 28일, 상륙 병력을 실은 북부 해군의 전함 7척이 하테라스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지역을 지키고 있던 남군의 해터러스 요새(Fort Hatteras)와 클라크 요새(Fort Clark)에는 총 19문의 구식 활강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총 141문의 신식 강선포를 싣고 있었던 북군 함대는 이를 이용하여 강선포의 최대사거리에서 두 요새를 포격하였다. 요새의 활강포로는 북군 함대를 타격할 수 없었다. 이어진 포격전에서 비록 두 요새의 병력 900명 중 사상자는 25명에 불과하였지만, 두 요새 모두 주요 시설이 부서졌다. 이에 북군의 버틀러(Benjamin Butler)가 이끄는 육전대가 상륙하자 두 요새를 지키던 남군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해터러스는 이후 북군의 봉쇄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승리가 북부에 전해지면서 불 런 참패의 쓰라림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북부 해군의 남부 해안에 대한 작전은 계속되어 1861년 11월 7일에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의 남부 요새인 포트 로얄을 점령하였다. 아울러 북군은 이를 기지로 삼아 남부의 중요 항구인 찰스턴과 사바나 간 철로를 끊으려 하였으나 이 지역을 맡고 있던 리(Robert E. Lee)가 철로의 수비를 강화시키면서 작전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 양측 모두 아직 얼마나 큰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갈 지 모른 채 1861년 말은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매클렐런은 매우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이었고 아울러 ‘완벽한’ 준비에 지나치게 집착하였다. 그는 많은 시간을 들여 군을 훈련시키고 조직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빠른 판단을 요하는 전투에는 적합치 않았다. 매클렐런의 지나친 신중함은 그를 영웅으로 만든 리치마운틴의 전투에서도 드러났다. 그의 부관이었던 로즈크랜스(William Rosecrans)는 매클렐런이 예비대를 투입하기를 주저하였고 이 때문에 전투를 쓸데없이 오래 끌었다고 불평하였다.
매클렐런의 지나친 신중함은 포토맥군의 훈련이 끝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에 드러났다. 처음에는 침체에 빠져있던 북군을 되살린 매클렐런을 ‘리틀 나폴레옹’이라 하며 칭송하던 여론은 그가 이런저런 이유로 출동하기를 거부하자 ‘Tardy George(느려터진 조지)’라고 비꼬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기다리다 못한 링컨 대통령이 1862년 1월 27일에 남부에 대한 행정부의 ‘강력한 행동’을 승인하는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매클렐런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을 때도, 매클렐런은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링컨 대통령은 3월 8일에 매클렐런을 미합중국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그에게 포토맥군 사령관직을 맡겼다. 이 일로 인하여 매클렐런은 링컨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지만 당장 최고 통수권자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매클렐런이 늑장을 부리고 포토맥군이 워싱턴 근교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동안,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켄터키-테네시 지역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켄터키는 비록 노예주였지만 남부의 분리 독립에는 반대했던 주로서 남부의 독립 이후에도 미 연방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켄터키 내에서는 친남부 세력도 만만치 않았고, 만약 남부가 켄터키를 장악하게 되면 오하이오-인디애나-일리노이 등 오대호 지역에 대한 공략의 발판이 될 수도 있었다.
1 캔자스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데이비드 헌터 소장. 2 미주리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헨리 할렉 소장. 3 오하이오 군관구를 맡았던 돈 카를로스 뷰엘 준장. |
이 지역은 산지와 숲이 많은 관계로 교통과 연락, 그리고 물자 수송 등에 있어 강을 통한 수운(水運)이 필수적이었다. 고로 이 지역을 차지하려면 테네시강과 컴벌랜드강을 무조건 장악해야 했다. 문제는 이 지역의 군 지휘권이 헌터(David Hunter) 소장의 캔자스 군관구(Department of Kansas), 할렉(Henry W. Halleck) 소장의 미주리 군관구(Department of Missouri), 그리고 뷰엘(Don Carlos Buell) 준장의 오하이오 군관구(Department of Ohio)로 분산되어 있어 통일된 움직임을 기대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켄터키와 테네시의 친 남부파들을 몰아내고 이를 워싱턴 정부의 관할하에 두는 것도 급선무였다.
다행히 켄터키 지역은 연방군이 빨리 장악할 수 있었지만, 테네시와 미주리 지역을 완전히 굳힐 필요가 있었다. 1862년 1월 10일과 19일에 연방군은 미들-크릭과 밀스프링스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전투는 소규모였지만 테네시를 거쳐 남부 깊숙이 진격할 수 있는 컴벌랜드 통로(Cumberland Gap)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승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컴벌랜드 통로를 장악하였음에도 할렉이나 뷰엘은 교통상의 어려움을 들어 테네시 쪽으로 진격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그랜트(Ulysses S. Grant) 준장은 자신의 상관에게 적극적인 공격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결국 2월 1일 할렉은 그랜트에게 일단의 병력을 맡겨 테네시강 유역에 대한 공격에 나서도록 하였다.
서부 지역의 남부 방어선은 극히 취약하였다. 현재 아칸소주 경계에서 컴벌랜드 통로까지 약 1000km의 전선을 지키는 남부 병력은 전부 존스턴(Albert Sidney Johnston) 대장의 통일된 지휘하에 있었지만 병력은 고작 2만에 불과하였다. 폴크(Leonidas Polk) 소장 휘하에 12,000명이 켄터키주의 컬럼버스에 주둔하며 방어선의 좌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 다른 4,000명이 버크너(Simon Bolivar Buckner) 준장 휘하에 중앙에 해당하는 켄터키의 보울링-그린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틸먼(Lloyd Tilghman) 준장 휘하의 4,000병력이 테네시강 유역의 헨리 요새(Fort Henry)와 컴벌랜드강의 도넬슨 요새(Fort Donelson)를 지키며 남군의 우익을 맡고 있었다.
그랜트의 목표는 헨리 요새였다. 그의 상관인 할렉도 매클렐런처럼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라이벌인 뷰엘을 능가하는 전공을 기대하면서 그랜트의 요청을 수락한 것이다. 그러나 마침 공격이 시작할 때 즈음 대홍수가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원래는 강변에 있는 헨리 요새의 바로 아래 부분까지 물이 차오르면서 요새의 낮은 부분에 위치한 포들이 모두 잠겨버렸다. 그랜트에게는 좋은 소식이었으나 이때 마침 동부 전선에서 좌천된 보우레가드가 남부의 대규모 지원 병력을 이끌고 서부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랜트는 예정보다 일찍 공격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1862년 2월 1일 일리노이주의 카이로(Cairo, Illinois)를 떠난 북군은 2월 4일에 헨리 요새 인근에 도착하였고, 같이 출발한 푸트(Andrew Foote) 해군 준장의 강상(江上) 함대와 함께 2월 5일 합동 공격에 나섰다. 그랜트 휘하의 병력은 헨리 요새의 수비 병력들이 탈출할 수 있는 동북쪽 통로를 막았고 뒤이어 함대가 요새 근처에 도착하였다. 헨리 요새를 맡고 있던 틸먼은 대포의 반수가 작동 불능이 된 상태에서 요새가 수륙 합동 공격에 견디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수비 병력 4천 중 2,500을 지름길을 통하여 약 10km떨어진 도넬슨 요새로 보냈다. 다음날인 2월 6일에는 푸트 휘하 7개의 함선(4척은 철갑선)으로 구성된 선단이 헨리 요새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포병의 반격으로 그중 1척이 대파되기는 하였지만, 요새 병력은 7척의 함선들이 퍼붓는 집중 포격을 견딜 수 없었고, 포격이 시작된 지 불과 75분 만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 요새를 함락시킨 북군은 곧바로 도넬슨 요새의 공격에 나섰다. 도넬슨 요새는 정식 요새라기 보다는 병력과 물자를 쌓아놓은 곳에 담장을 둘러친 주둔지였다. 다만 강이 보이는 쪽으로 대포를 설치하여 요새로서의 구색은 갖추었다. 2월 12일에 요새 인근에 도착한 그랜트 휘하의 북군 병력은 총 25,000이었고 요새 내의 남군 병력은 몇칠 전 헨리 요새에서 도착한 병력을 합쳐 약 16,000 정도였다. 2월 12일과 13일에는 양군이 서로 탐색전을 펼치는 데 그쳤고, 비가 내리며 궂은 날씨가 13일 밤에 맹추위로 바뀌면서 양군 모두 추위에 떨었다.
남군 지휘부는 강과 육지 모두 장악당한 상태에서 요새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고 탈출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남군은 도넬슨 요새를 둘러싼 북군 중 우익을 담당한 멕클레르넨드(John A. McClernand) 준장의 부대를 집중 공격하기로 하였다. 2월 14일에는 푸트의 함대가 도착하였고 그랜트는 요새에 포격을 가하여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요새의 수비력을 과소평가한 푸트가 함선들을 너무 가까이 모는 바람에 요새 포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면서 함선 모두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병들의 초전 승리에도 아랑곳없이 함대가 없었고, 육지에서의 증원이 불가능한 남군의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였다. 결국 15일에 남군은 북군 우익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일단 혈로(血路)를 뚫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공격을 지휘하던 필로우(Gideon Pillow) 준장이 공격 부대의 대열이 크게 흐트러지고 병사들이 지쳤음을 이유로 들어 탈출을 다음날로 미루기로 하였다. 남군의 일선에서 맹렬히 싸운 버크너 준장은 당장 탈출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는 묵살되었다. 잠시 일선에서 떠나 있던 그랜트는 다시 전장을 돌아보고 즉시 탈출구를 막으라고 주문하였고, 포위망의 다른 지역에서 병력을 불러와 탈출구는 결국 닫히게 되었다.
탄약이 떨어져가는 상황에서 탈출구까지 막히자 남군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자 남군의 현장 총지휘관이었던 플로이드(John B. Floyd) 준장은 항장(降將)이라는 오명을 남기기는 싫다며 지휘권을 필로우에게 넘기고 일단의 병력과 함께 전장을 이탈한다. 지휘권을 넘겨받은 정치군인 필로우 준장 역시 포로가 되기는 싫다며 호위병 몇몇과 함께 나룻배를 타고 탈출하였다. 결국 열심히 싸운 버크너만 남아 그랜트에게 항복하는 불명예를 안아야 했다. 자신이 키운 기병대를 이끌고 북군 병력을 열심히 견제하던 포레스트(Nathan B. Forrest) 중령은 지휘관들을 겁쟁이라고 욕하면서 휘하의 기병 700여 명과 함께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포레스트는 전력을 보전하여 무사히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만약 남군이 그대로 탈출을 했더라면 북군의 승리는 반쪽짜리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버크너는 그랜트에게 항복 서신을 보내면서 그랜트가 명예로운 항복을 허락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랜트와 버크너는 185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랜트가 지나친 음주로 지위를 박탈당하고 캘리포니아를 떠나게 되었을 때 무일푼인 그에게 여비를 주면서 동부까지 갈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랜트는 버크너의 기대를 뭉개버리면서 무조건적인 항복 외에는 어떠한 조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궁지에 몰린 버크너는 그랜트를 비신사적이라고 비꼬면서도 결국 자신의 휘하에 남은 병사들과 함께 북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그랜트는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 그랜트’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남군은 13,000명이나 되는 병력이 북군의 포로가 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남군은 전략적으로도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우선 컴벌랜드강과 테네시강이 뚫리면서 멀리 앨라배마와 미시시피 북부까지 북부의 수상 전력에 노출된 것이다. 실제로 헨리 요새 함락 이후 북군의 강상함대가 강을 따라 남군의 조선소를 부수고 배들을 불태우면서 앨라배마 북부의 플로렌스까지 시위를 하였다. 아울러 도넬슨 요새까지 함락되면서 북군의 대군단이 남군 주둔지인 켄터키주 컬럼버스와 남부에서 얼마 안되는 공업 도시인 내슈빌(Nashville) 사이의 공간을 장악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뷰엘의 군대가 내슈빌을 위협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에 따라 남군은 내슈빌에서 철수함은 물론, 컬럼버스에서도 철수해야 했다. 이로써 북부와 남부의 중간 지대인 테네시와 켄터키가 북군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이후 북군에 의한 남부 초토화의 시발점이 된다.
서부에서의 승리로 북부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북부 곳곳에서는 축포와 함께 승리의 종소리가 울렸다. 반면 불-런에서의 승리로 빠른 승전의 환상에 빠져 있던 남부의 여론은 이 전쟁이 힘든 전쟁이 될 것임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남부의 신문들은 ‘어려운 시간’이 도래하였다며 총력전에 돌입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남부가 총력전을 펼치기에는 장애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징집에 대한 반대였다. 남부 사회는 ‘민병(Militia)’의 전통이 강했으며 민병이 아니더라도 군은 스스로 자원해서 가는 곳이었지, 억지로 끌려가는 곳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남부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명분은 워싱턴 정부의 독선과 독재를 벗어나 남부의 ‘자유’를 지킨다는 것이었다. 당시 싸우고 있던 지원병들도 1년 복무를 조건으로 군에 자원한 것이었다.
결국 총력전에 필요한 병력이 부족함을 느낀 남부 정부는 1년 병사들이 만약 복무를 연장하면 60일 휴가와 50달러의 급료를 주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부대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부대장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기병이나 포병 등 상대적으로 죽을 위험이 적은 부대를 택하고, 엄격하고 유능한 지휘관보다는 친한 사람을 선출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결국 3월 28일에 대통령 데이비스는 남부 의회에 징집령이 포함된 법안을 상정하였는데, 대다수의 의원들은 이 법안이 주(州)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소란을 잠재운 것은 텍사스 출신의 위그폴(Louis Wigfall) 상원의원이었다.
“제발 이런 유치한 말다툼은 그만둡시다……우리의 적은 우리 연합(남부)의 주(州) 모두에 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버지니아는 그들에 의하여 에워싸여 있소……우리는 지금 큰 군대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병력을 어디에서 구하란 말입니까?……그 어느 누구도 국가의 안위에 반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br /><br />(Let us cease this child's play… The enemy are in some portions of almost every State in the Confederacy. . . . Virginia is enveloped by them. We need a large army. How are you going to get it? . . . No man has any individual rights, which come into conflict with the welfare of the country)<em></em>
1862년 4월 16일, 징집법안이 남부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 징집령으로 1861년에 325,000명이었던 남부의 총 병력은 45만으로 늘어났다. 물론 대리인을 세울 수도 있고, 일부 직업인들은 징집에서 제외시키는 예외 사항을 두는 바람에 돈 많은 부자들이 징집을 피하고 특정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원’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 징집령은 남부의 절박한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남북 전쟁이 초기에는 남부가 유리하였다가 북부가 전세를 뒤집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1861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186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부가 확실한 우위를 보였던 때는 없었으며, 남부는 시종일관 북부의 물량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남부의 징집령의 뒷배경에는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향한 북부 포토맥군의 대공세가 있었다. 1862년 초 여전히 북군 총사령관이었던 매클렐런은 버지니아주 센터빌에 주둔하고 있던 존스턴의 남군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바람에 피해를 두려워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아울러 남부 공략에 대한 작전을 놓고 링컨 대통령과 말다툼을 하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매클렐런은 북군의 압도적인 해상력을 이용하여 버지니아 반도 남단까지 병력을 옮긴 다음, 남쪽에서 리치먼드를 공략함과 동시에 워싱턴 근교에 주둔한 다른 병력이 남진하여 리치먼드를 남북에서 조이는 작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링컨은 이에 반대하면서 센터빌에 주둔한 남군을 몰아낸 다음 병력의 우위를 이용하여 리치먼드를 육지에서 직공(直攻)할 것을 주문하였다. 혹시라도 워싱턴의 수비가 허술해져 남군이 공격해올 것을 걱정한 것이다. 매클렐런은 이미 워싱턴은 자신이 구축한 튼튼한 수비망의 보호하에 있다며 주장을 꺾지 않았다. 이에 링컨은 그래도 직업군인인 매클렐런이 자신보다는 작전에 대하여 잘 알 것이라 생각하며 3월초 매클렐런의 작전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매클렐런이 본격적으로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존스턴군은 이미 매클렐런이 상륙작전을 시도할 것을 눈치채고 3월 9일에 센터빌에서 남쪽 컬페퍼(Culpeper) 지역으로 병력을 옮겼다. 매클렐런이 그의 작전을 개시하기 전 존스턴군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센터빌 인근으로 진격하였을 때, 존스턴군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으며 통나무를 검게 칠하여 대포로 위장하는 등 위장 진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별로 강하지도 않은 적이었는데 미적거리느라 적군이 탈출할 수 있었다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매클렐런에 대한 비난 여론은 더욱 높아졌다.
기본적으로 여론에 민감한 매클렐런은 비난 여론을 의식한 듯 공격을 서둘렀다. 마침내 3월 17일, 12만 1500의 병력, 대포 44문, 수레 1150대, 그리고 말 1만 5천마리를 실은 대함대가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한다. 그리고 같은 날에 버지니아 반도 남단의 먼로 요새(Fort Monroe)에 상륙하면서 이른바 버지니아 반도 캠페인(The Peninsular Campaign)이 시작된다.
설상가상으로 남부의 잭슨(Stonewall Jackson) 소장이 버지니아 서부 셰넌도어 지역에서 매우 효과적인 기동전을 펼치면서 매클렐런이 구상한 작전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병력은 불과 17,000에 불과하였지만 잭슨은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하면서 셰넌도어 인근의 북군 병력에 수시로 기습을 가하였다. 비록 뱅크스(Nathaniel Banks) 소장이 이끄는 북군의 움직임을 잘못 판단하여 3월 23일에 컨스타운(Kernstown)에서 패하기는 하지만 링컨 대통령과 워싱턴 정부는 혹시라도 잭슨의 병력이 워싱턴을 공격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뱅크스의 2만 병력을 셰넌도어에 그대로 두는 것은 물론, 버지니아주 프레데릭스버그(Fredericksburg)에 있던 맥도웰(Irvin McDowell) 소장의 3만 병력까지 움직이지 말고 잭슨의 움직임에 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로서 매클렐런의 공격에 보조를 맞추기로 하였던 5만의 병력이 리치먼드 공략을 포기하고, 잭슨의 병력을 쫓게 된 것이다. 매클렐런은 작전이 무산될 수도 있다며 링컨의 조치에 크게 반발하였지만, 그래도 전력의 우위를 믿고 반도 남쪽에서 그대로 밀고 올라가기로 하였다.
사전 준비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매클렐런은 모든 것이 계획된 대로만 된다면 자신이 이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론]의 저자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는 전쟁 중에는 지휘관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전쟁의 안개’가 생겨나게 마련이며, 이 때문에 계획이 원래대로 진행되지 않는 ‘마찰력’이란 것이 생긴다고 역설하였다. 즉 시시각각 상황이 바뀌는 전쟁터에서 모든 것이 원래 계획대로 진행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대군과 엄청난 물자를 바닷길로 옮기면서 매클렐런은 우세한 해상 전력으로 보급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당장 해군은 난색을 표하였다. 남부 해군의 신무기인 철갑선 버지니아(CSN Virginia) 호와 남군 해군이 인근 해상에 있어 보급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버지니아 호는 원래 북군 해군의 메리맥(USS Merrimac) 호였는데, 남부가 분리 독립을 선언하던 1861년 4월에 지금의 노포크(Norfolk) 조선소를 맡고 있던 북군이 철수하면서 불태운 선박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메리맥 호는 완전히 불타지 않고 엔진은 온전한 채로 홀수선까지만 가라앉았다. 이를 남군이 건져올려 철갑선인 버지니아 호로 개조한 것이었다.
버지니아 호는 3월 8일에 제임스강(James River) 어귀에 있는 햄프턴로즈(Hampton Roads) 수로에서 북군 목제함선 2척을 격침시킨다. 이에 북군도 스웨덴 출신의 발명가인 에릭손(John Ericsson)이 만든 철갑선 모니터(USS Monitor) 호를 출동시켰고, 다음 날에는 세계 최초로 철갑 동력선 간의 함포전이 벌어졌다. 이 함포전은 무승부로 끝났다. 그러나 이 두 철갑선은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버지니아 호는 강바닥에 좌초된 후 자폭(自爆), 모니터 호는 풍랑에 휩쓸리면서 운명을 다한다.
매클렐런은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북군의 해상력으로 버지니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요크타운을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해군의 비협조로 이를 포기해야만 하였다. 매클렐런은 1862년 4월 4일, 전군에 버지니아 반도를 거슬러 올라가라는 명령을 내린다.
1862년 4월 4일, 버지니아 반도 남부에서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한 매클렐런은 남군이 요크타운에 그대로 있을 것이고, 이를 포위하여 함락시키면 반도에서 남군의 기세를 크게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1862년 전반부만 놓고 보자면 남부에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남부는 상당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일단 수도 리치먼드 뒤쪽으로는 적의 12만 대군이 상륙하여 진격해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리치먼드 앞쪽에는 추가로 5만의 적병이 수도를 노리고 있었다. 아울러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에서의 패배로 켄터키와 테네시가 북부에 넘어갔다.
경계주인 미주리에서는 프라이스(Sterling Price)가 이끄는 친(親) 남부 주방위군이 북군을 몰아내는 듯 하였으나, 1861년 10월 프레드릭타운(Fredericktown) 전투를 고비로 전세가 뒤집혀 남군은 미주리주에서도 밀려나기에 이르렀다. 남군의 밴도른(Earl Van Dorn) 소장이 16,000의 병력을 동원하여 미주리를 재차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1862년 3월 6일에서 8일까지 벌어진 피리지(Pea Ridge) 전투에서 북군 커티스(Samuel Curtis) 준장의 1만 병력에 대패하면서 결국 미주리를 북군에게 온전히 내주고 말았다.
미주리 이후에도 남군의 패배는 계속되었다. 텍사스의 엘파소에서 출발하여 뉴멕시코와 콜로라도까지 점령하려고 했던 일단의 남군은 3월 26일에서 28일에 현재 산타페 인근의 글로리에타 고개(Glorieta Pass)에서 북군 기습대에 보급 부대가 당하는 바람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나와야 했다. 이후 북부 편에 있었던 캘리포니아에서 증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남군은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에서 물러나고 텍사스를 지키기에도 급급한 상황이 되었다. 전황은 남부에게 계속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갔고, 1862년 4월에는 남군에게 더욱 더 큰 패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샤일로 전투에서 북군을 지휘한 율리시스 그랜트. 서부에서의 북군의 승리를 주도하였고 이후 북군 총사령관직에 오른다. 남북전쟁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우고 결국 북부에게 승리를 안긴 그는 후에 1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빼앗기고 켄터키와 테네시에서 밀려난 남군으로서는 서부에서의 전세를 만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헨리와 도넬슨 요새를 함락시켜 테네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그랜트의 군대는 테네시와 미시시피주의 경계 지역인 피츠버그 랜딩(Pittsburg Landing)까지 밀고 들어온 상태였다. 여세를 몰아 미합중국 국방부는 그랜트의 상관인 할렉이 맡고 있던 미주리 군관구를 확장하여 미시시피 군관구(Department of Mississippi)를 새로 만들고, 이곳의 사령관이 된 할렉 소장은 테네시주 내쉬빌에 주둔하고 있던 뷰엘 소장의 오하이오 군(Army of Ohio)에게 피츠버그 랜딩으로 이동하여 그랜트와 합세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랜트의 테네시 군(Army of Tennessee)과 뷰엘의 오하이오 군이 합칠 경우 북군은 7만 5천의 병력으로 남부에 대한 본격적인 진공을 시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남군의 목표는 테네시 군과 오하이오 군이 합쳐지는 것을 막고, 더 나아가 이들을 각개격파한 다음 테네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남군 사령관인 존스턴(Albert Sydney Johnston) 대장과 불-런 전투 이후 좌천되어 서부로 파견된 보우레가드 소장은 4월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피츠버그 랜딩의 북군 주둔지 인근까지 남군 병력 4만 5천명을 이동시켰다. 테네시를 잃어버린 후로 남부 언론의 혹독한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던 존스턴 대장으로서는 승리가 절실하였다. 그러나 피츠버그 랜딩에 동원된 남군 병력은 전투를 겪어보지 않은 신병들이 대부분이었고, 일선 장교들 역시 미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이동하는 동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다 산과 계곡, 그리고 강이 뒤엉킨 복잡한 지형은 이동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부대들은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고 이 때문에 원래 4월 4일에 예정된 공격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일부 병사들은 혹시라도 화약이 비에 젖어 총이 발사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이동 중에 시험 사격을 하곤 하였는데, 보우레가드는 남군의 이동을 그랜트 군이 알게 되면 기습의 효과를 망칠 수 있다며 펄펄 뛰었다. 그러나 북군 병사들 역시 주둔지에서 시험 사격을 하고 있었던 데다, 비까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총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보우레가드의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마침내 남군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피츠버그 랜딩의 북군 주둔지에서 불과 3마일(5km)밖에 안 되는 지점까지 들키지 않고 이동하였다. 남군의 공격이 임박하였지만, 북군 지휘관들은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에서의 승전 이후 승리의 분위기에 취해 남군이 공격해올 리 없다며 정찰을 게을리하였다. 5명의 북군 사단장 중 한 명이었던 셔먼도 4월 5일에 부하 장교가 인근 숲 속에서 적병들이 이동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이를 무시하면서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려거든 오하이오로 돌아가게”라고 야단칠 정도였다. 아울러 북군은 주둔지를 만들면서 흙을 쌓아 올린다던가 하는 기본적인 방어 시설도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4월 6일 오전 6시에서 7시 사이에 남군이 공격을 시작하였을 때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북군 프렌티스(Benjamin Prentiss) 준장의 정찰대가 공격 직전에 남군을 발견하고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그나마 북군 병사들이 총을 들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을 뿐이다.
마지막 순간에 적군을 발견하기는 하였지만, 북군은 워낙 방심하고 있었던 탓에 남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 남군의 맹공 앞에 북군의 진지는 하나둘씩 무너졌다. 다행인 것은 전투 시작 전에는 안일하게 대응했던 셔먼이 온 전선을 뛰어다니면서 사단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북군 진지들이 모두 무너지는 것만은 막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북군 사단장들인 맥클레르넨드(McClernand), 프렌티스, 월리스(W.H.L Wallace)도 비록 남군의 거센 공격에 물러나기는 하였지만 대오를 유지하면서 후퇴하였다. 이 와중에 북군 주둔 지역의 중간에 ‘벌집(Hornet’s Nest)’이라고 부르는 움푹 패인 지형이 있었는데, 후퇴하던 프렌티스의 병력 일부가 오전 9시경쯤 이곳에 모여들어 수비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 때문에 남군의 전선 한가운데에 돌출부가 생기게 되었다.
사실 돌출부가 생기게 되면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은 한 일단의 부대를 포위 부대로 남겨두고 적의 주력을 공격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존스턴과 보우레가드는 ‘벌집’ 공격에 18,000의 주력부대를 투입하였다. 남군은 벌집을 향하여 열 차례나 돌격을 하였지만 4,500명에 불과한 북군 병력에 여지없이 격퇴되었다. 할 수 없이 남군은 보병 돌격을 그치고 60여문의 야포를 동원하여 집중사격을 한 후에야 벌집의 북군 병력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벌집 공격으로 인하여 남군의 병력이 소모되었음은 물론이고, 남군의 진격이 지연되면서 후퇴하던 북군 주력들이 대오를 재정비하고 병력을 추스를 수 있 시간을 허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남군은 벌집 공격 와중에 사령관인 존스턴 대장이 다리에 총상을 입는 횡액을 겪었다. 존스턴은 이를 경미한 부상으로 여기고 치료를 거부하였지만, 사실은 총탄이 다리의 동맥을 끊어놓은 상태였다. 이 총상으로 인하여 존스턴은 약 한 시간 후 과다 출혈로 사망하였고 보우레가드가 사령관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다.
북군의 피해 또한 무척 심각하였고 그들이 설치한 진지를 모두 빼앗기면서 엄청난 양의 보급 물자도 남군에 넘어갔다. 그러나 의외로 그랜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남군의 공격은 병력을 집중하여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긴 전선을 유지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북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뒤로 물러나온 것이었다. 비록 남군에게 몰리기는 하였지만 후퇴하는 북군은 험준한 계곡을 앞에 두고 방어선을 재구축할 수 있었고, 아직까지 야포 전력에서 남군에 비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아울러 북군의 뒤 테네시강에서는 북군의 함선 2척이 대기하고 있었고, 지원사격을 해줄 수도 있었다.
이때가 오후 6시, 하루 종일 전투를 하느라 병력이 지친 데다 계곡을 가로질러 공격하다가 북군의 포사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보우레가드는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린다. 후일 남군 지휘관 가운데 몇몇은 보우레가드가 이때 큰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다고 비난하였지만, 병사들이 지쳤고 야간전투가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보우레가드의 결정은 적절한 조치였다.
다음 날(4월 7일)은 남군에게 재앙이었다. 이번에는 남군 사령관인 보우레가드가 방심하고 있었다. 그는 빼앗은 북군 진지에 있던 셔먼의 침대에서 편히 잠들었다. 북군의 피해가 심각하여 다음 날 오전에 북군 패잔병들을 소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랜트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여 인근을 헤매던 월리스(Lew Wallace, 소설 [벤허]의 저자이기도 하다) 소장의 사단이 늦은 밤에 도착하였고, 사바나에서 급하게 달려온 뷰엘의 오하이오군 또한 그랜트 군에 합류하였다. 날이 밝자마자 북군은 전면적인 반격에 나섰다.
남군이 전날의 전투로 지쳐 있었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병력이 25,000으로 줄어 있었던데 비하여 북군은 지쳤지만 멀쩡한 15,000의 병력에 새로이 도착한 25,000의 병력을 합쳐 4만의 병력으로 맹렬한 반격을 펼쳤다. 엉성한 포위망을 형성한 남군은 강력한 포 지원과 함께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북군의 반격에 힘없이 밀려났다. 정오쯤에 남군은 전날의 공격 시작 지점까지 밀려났고 남아 있던 예비대까지 모두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체력이 충만한 2만 5천의 병력이 보충된 4만의 북군에게 계속해서 밀려났고 일부 사단은 붕괴되었다.
결국 오후 2시 반에 보우레가드의 참모가 병력을 모두 잃기 보다는 일부라도 보전하여 후퇴하자고 조언하였고 보우레가드는 이를 받아들였다. 남군은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하였고 지친 북군은 이를 추격할 수 없었다. 비록 사상자의 수는 북군이 더 많았지만, 남군이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후퇴하였기에 샤일로 전투는 북군의 승리로 기록되었다. 남부의 관점에서는 많은 병력과 지휘관을 투입한 전투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고, 이로써 테네시와 켄터키는 북부의 영역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샤일로가 패전의 끝이 아니었다. 4월이 지나기도 전에 남부에게 있어 전세는 더욱 암울해졌다. 인구와 물자가 더 많은 북군은 여러 지역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었다. 사실 테네시 전역에 동원된 남군 병력과 함선 중 상당수는 루이지애나에서 차출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4월 18일에 패러거트(David G. Farragut) 대령이 이끄는 함대가 뉴올리언스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세인트 필립(St. Phillip)에 나타났을 때, 뉴올리언스 인근에는 3천의 민병과 강상 함선 몇 척밖에 없었다. 패러거트는 4월 18일에서 23일까지 박격포를 실은 함선들을 동원하여 세인트 필립 요새와 인근의 중요 군사기지인 잭슨 요새(Fort Jackson)를 포격하였다. 다행히 화약고 등의 군사시설은 다치지 않았지만, 병영 건물이 모두 부서지는 바람에 잭슨 요새의 병사들은 식사가 부실해지고 휴식을 제대로 취할 수도 없었다.
패러거트의 함대는 강 어귀를 막고 있던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4월 24일에 뉴올리언스 방향으로 향하였다. 뉴올리언스 인근의 남군 해상력은 몇 척의 강상함대와 아직 도장 공사도 마치지 못한 함선들밖에 없었고 이들은 북군 함대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남군은 뉴올리언스로 향하는 패러거트의 함대를 막으려고 하였지만, 북군 함선들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남군 함선들을 두들겼다. 북군은 단지 1척이 침몰한 반면 남군은 12척의 배를 잃었고 뉴올리언스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4월 25일, 14척으로 이루어진 북군 함대가 뉴올리언스에 나타났고 항복하지 않을 경우 무자비한 포격이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뉴올리언스의 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이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시내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한편 뉴올리언스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던 러벨(Mansfield Lovell) 소장과 시장ㆍ시의회는 누가 항복을 할 것인가를 두고 옥신각신하였지만 결국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기다리다 못한 패러거트는 두 명의 장교와 함께 해병들을 보내어 시내에 있는 관세청 건물로 가서 남부 깃발을 끌어내리고 미합중국기를 게양하게 하였다. 남부 최대의 항구이자 미시시피강의 관문인 뉴올리언스가 다시 미합중국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한편 패러거트는 뉴올리언스로 떠나면서 함대를 나누어 박격포함들을 포터(David Porter) 대령에게 맡겼다. 박격포함들을 지휘하게 된 포터는 버틀러(Benjamin Butler) 소장의 육전대와 함께 요새를 향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계속되는 공격에 요새 안 병사들의 불편과 피로도는 극에 달하였다. 포터는 잭슨 요새의 지휘관인 던컨(Johnson K. Duncan) 준장에게 항복을 종용하였지만 던컨은 이를 거부하였고 포격은 계속되었다. 계속되는 포격을 견디다 못한 잭슨 요새의 병사들은 마침내 4월 29일 반란을 일으켰고 요새는 북군에게 함락되었다. 잭슨 요새가 함락되면서 고립된 세인트-필립 역시 같은 날 북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남부는 샤일로에서 패하여 켄터키와 테네시를 상실하고 패러거트와 버틀러에게 뉴올리언스를 잃었지만, 이 와중에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남군으로서는 다른 곳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매클렐런의 12만 대군이 버지니아 반도의 먼로 요새에 상륙한 후 수도 리치먼드를 향하여 북상중이었기 때문이다.
4월 5일, 매클렐런 휘하 키즈(Erasmus Keyes) 준장의 4군단이 남군 매그루더(John B. Magruder)의 병력과 마주치자 매클렐런은 매우 놀랐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남군이 버지니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요크타운에 병력을 집중할 것이기 때문에, 요크타운에 이를 때까지 남군이 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매그루더는 자신의 병력이 매클렐런의 대군을 막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지연작전을 쓰기로 하였다. 자신의 병력 중 한 대대를 동원하여 주둔지인 워릭강(Warwick River)에서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게 한 것이다. 아울러 야포를 최대한 느슨히 배치하여 최대한 넓은 지역에서 북군에 간헐적으로 포격을 가하였다. 이에 속은 매클렐런은 야포를 총동원하여 남군을 두들기려고 하였고, 이를 위해 후방에 있던 야포들을 전진 배치하였다.
매그루더의 지연작전은 성공하여 매클렐런이 포격 준비를 하는 동안 총사령관 존스턴이 보낸 증원 병력이 실제로 도착하였다. 매클렐런은 4월 16일에 남군의 수비를 알아보기 위하여 탐색공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오히려 손해만 입고 물러났다. 매클렐런은 이미 출발 이전부터 남군의 군세를 너무 높게 보고 있었는데, 매그루더의 속임수에 속아 자신이 싸워야 할 남군 병력이 무려 10만이나 된다고 믿고 있었다(실제로 이 시점에서 매그루더가 거느린 병력은 3만 5천에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잭슨(Stonewall Jackson)이 셰넌도어 방면에서 북군을 공격하자, 놀란 링컨은 워싱턴 수비를 대비하여 맥도웰(Irvin McDowell)의 1군단을 버지니아주 북쪽의 프레데릭스버그 인근에 두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이 때문에 매클렐런이 구상한 리치먼드에 대한 양면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해군의 비협조 때문에 남군의 전선을 우회할 수 없었던 매클렐런은 기본적으로 앞의 남군 전력을 두들기는 데만 몰두하였다.
1862년 3월 17일부터 5월 31일까지 버지니아 반도 작전의 상황도. <출처: (cc) Hlj at en.wikipedia.org>
증원군을 받은 남군 병력은 5만 7천까지 늘어난다. 그러나 병력이 증원되기는 하였지만 매클렐런이 준비한 야포 전력이 워낙 막강하였기 때문에 존스턴은 이미 워릭강 전선을 지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존스턴은 5월 3일에 워릭강의 군을 물려 리치먼드 방면으로 철수시켰다.
5월 5일에 남군 전선에 대한 전면 공격을 하려고 했던 매클렐런은 그 전날인 5월 4일, 열기구로 남군 진지를 정찰한 결과 진지가 비었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남군이 자신을 속이고 일제히 철수해버린 것이었다. 매클렐런은 스톤맨(George Stoneman) 준장의 기병대로 남군을 추격하는 한편, 프랭클린(William Franklin) 준장의 부대를 함선에 태워 남군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으로 남군의 퇴로를 막으려 하였다.
북군의 추격이 의외로 빠르게 이루어지자 존스턴은 윌리엄스버그 인근의 매그루더 요새(Fort Magruder)에서 지연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북군 약 4만 대 남군 3만 2천이 격돌한 윌리엄스버그의 전투에서 남군은 일부 지휘관의 실수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일단 북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려는 목적은 달성하였다.
한편 배를 타고 남군의 퇴로를 막으려 하였던 프랭클린의 부대는 5월 7일에 엘트험즈랜딩(Eltham’s Landing)에 상륙하여 임시 부두까지 짓고 병력과 야포를 하선시켰다. 이들은 남군 본대를 가로막고자 하였으나 휘팅(W.H.C Whitting)과 후드(John Bell Hood)의 남군 돌격대에 가로막혀 상륙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상륙부대는 남군이 철수한 뒤에 그들을 쫓아 도로에 진입하였으나 이미 남군 본대는 지나간 다음이었다.
링컨 또한 직접 전장(먼로 요새)에 나와 전장을 시찰하였다. 배를 수배하여 친히 주변을 정찰한 링컨은 남군 본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노포크를 점령할 수 있다고 여겨 통수권자로서 직접 해군 함선들을 동원하여 노포크에 포격을 가하였다. 구원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안 노포크의 남군들은 즉시 항구를 비웠고, 이로써 5월 8일에 북군 육전대가 노포크를 장악하였다.
매클렐런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리치먼드를 향하여 진격하였고, 남군의 북부 버지니아 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을 맡고 있던 존스턴 역시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버지니아 반도에서 군을 물린 이유는 야전으로 병력을 소모하기보다는 리치먼드 수비에 병력을 집중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때 북군은 북대서양 봉쇄 함대의 일부를 차출하여 리치먼드에 대한 과감한 공략을 시도해보았다. 장갑함 모니터와 함께 제임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리치먼드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리치먼드 남쪽 약 10km 드루리즈 블러프(Drewry’s Bluff)에 위치한 남군 요새와 남군 강상함대의 악착같은 수비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함대를 지휘했던 로저스 (John Rodgers) 해군준장은 돌아오는 길에 리치먼드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상륙이 가능한 지점이 있음을 매클렐런에게 통보하였다. 그러나 매클렐런은 어떤 이유에선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리치먼드를 정면공격하기로 하였다.
리치먼드 인근으로 진격한 북군은 포위전에 돌입하면서 리치먼드에서 동쪽으로 약 10km 지점, 칙카호미니강(Chickahominy River)에 포진하고 공격을 준비하였다. 북군이 막강한 포병 전력을 배치 완료하면 리치먼드가 함락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존스턴은 북군이 공격 준비를 완료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남군 사령관 존스턴은 포토맥군이 강에 의하여 양분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남쪽에 있던 북군의 3군단과 4군단을 공격하기로 한다. 마침 며칠간 계속된 비로 강물이 불어나 있었고, 남군이 칙카호미니강의 다리를 다수 파괴하였기 때문에 공격이 이루어지더라도 원군이 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존스턴은 5월 31일에 22개 연대 약 5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강 남쪽에 있는 북군 3만 3천을 들이쳤다. 원래는 한꺼번에 공격해서 단숨에 공파해야 했으나 비로 인하여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탓에 남군은 결과적으로 축차공격(逐次攻擊, 가용 가능한 부대를 순차적으로 투입하여 공격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북군 대형의 끝에 위치한 케이시(Silas Casey) 준장의 6천 병력은 남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완강히 버텼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밀린 케이시의 병력은 제1방어선을 내어주고 2선으로 후퇴한다.
이때 강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제2군단장 섬너(Edwin Sumner) 준장은 총성과 포성을 듣고 전투가 벌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매클렐런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세지윅(John Sedgwick) 준장의 사단에 진격 명령을 내렸고, 세지윅의 사단은 강물에 휩쓸리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다리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낡은 다리는 북군 병력이 건너는 동안에는 간신히 버텨주었지만, 병력이 모두 도강한 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붕괴되었다. 세지윅이 거느린 사단의 증원으로 남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매클렐런은 이 공격에 놀란 나머지 병력을 모두 남쪽으로 옮겼다.
한편, 공격 와중에 남군의 총사령관인 존스턴이 중상을 입고 지휘불능이 되었다. 남부 대통령 데이비스는 공석이 된 북부 버지니아군의 사령관에 대통령의 군사고문직을 맡고 있던 로버트 리(Robert Edward Lee, 1807~
1870) 대장을 임명하였다.
리는 버지니아에 대장원을 가진 농장주였으며 기사도와 예법을 중요시하는 전형적인 귀족 군인(aristocratic officer)이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시절부터 수재로 이름이 높았고 뛰어난 전술적 감각의 보유자였는데, 이 때문에 한때 선배인 윈필드 스콧으로부터 북군 사령관직을 제의 받은 바 있지만 그의 근신 요청을 스콧이 받아들이지 않아 할 수 없이 남군에서 군직을 맡게 되었다. 리는 호시탐탐 남부의 해안을 노리는 북군 해군으로부터 남부 해안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쟁 초기에는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등지의 해안 수비를 총괄하다가 1862년 초기에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군사고문이 되었다.
매클렐런의 공경이 시작되기 전, 잭슨을 셰넌도어로 진격시켜 북군의 눈을 돌리게 한 작전은 다름아닌 리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수도 리치먼드에 대한 북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리치먼드를 공격하는 북군 전력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작전을 세웠고, 이것이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었다. 잭슨은 5월 27일까지 셰넌도어에서 북군을 실컷 농락한 뒤 버지니아 반도 방면으로 복귀하였다. 다만 2개월에 걸쳐 500km를 넘게 행군한 잭슨의 병력은 결국 피로 때문에 버지니아 반도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리는 북군 사령관 매클렐런이 존스턴의 공격으로 극도로 몸을 사리는 것을 보고 공격적인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남군이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가하면 실패를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매클렐런이 물러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매클렐런은 존스턴의 공격으로 인하여 병력을 재배치한 다음 약 한 달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새로이 사령관이 된 리는 병력을 집중시킨 다음 6월 25일에 매클렐런의 북군에 대한 맹공을 시작하였다. 이른바 ‘7일 전투’의 시작이었다. 7월 1일까지 끊이지 않고 여덟 번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사실 6월 27일 게인즈-밀(Gaines’s Mill)에서의 승리를 제외하고 남군이 속시원히 승리한 전투는 없었다. 대부분이 막대한 사상자를 낸 무승부로 끝났고, 7월 1일의 멜번-힐(Malvern Hill)의 전투에서는 오히려 북군의 집중 포격에 남군이 53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대패하였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남군의 맹공에 시달리는 매클렐런은 계속해서 병력을 리치먼드와 점점 멀어진 위치에 재배치하였고, 6월 24일 남부 수도인 리치먼드를 불과 10km 남겨두고 있던 북군은 7월 1일에 이르러서는 25km이상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비록 많은 사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리는 북군을 리치먼드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북군의 사기는 다시 급락하였고 남부의 사기는 치솟았다. 결국 매클렐런과 포토맥군은 8월초에 버지니아 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수많은 인원과 물자를 동원하여 한 번의 공격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버지니아 반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이제는 남군이 공격에 나설 차례였다.
남북 전쟁 당시 미합중국은 남부뿐만이 아니라 혹시라도 남부에 있을 외교적 지원을 차단하기 위하여 다른 국가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는 여러 차례 남부를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의 와중에 있었고, 앞서 언급하였듯이 유럽의 산업혁명을 이끄는 것은 바로 섬유산업이었다.
남부는 유럽 섬유산업의 필수 물품인 면화(綿花)를 무기로 삼아 유럽 국가들의 전쟁 개입, 또는 최소한 남부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쟁 초기인 1861년 11월 8일, 남부 정부는 메이슨(James Mason)과 슬라이델(John Slidell)을 영국에 파견하여 남부연합에 대한 외교적 인정을 받아내고자 하였다. 이들은 영국 국적의 우편선인 트렌트(Trent) 호(號)를 타고 동맹을 제의하러 가던 중, 지금의 바하마 근처 해역에서 북부의 군함인 샌 재신토(San Jacinto) 호에 발견되어 강제로 정선(停船)당한 뒤 체포되었다. 트렌트 호의 나포와 남부 외교관들의 체포는 그 당시 북부가 남부에 대하여 실시하고 있던 해상봉쇄 작전인 아나콘다 작전(The Anaconda Plan)의 일환이었다(그러나 함장인 윌크스(Wilkes)는 트렌트 호를 나포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받은 일이 없었다).
남부는 외교전의 일환으로 1861년에 메이슨(James Mason, 왼쪽)과 슬라이델(John Slidell, 오른쪽)을 영국에 보냈다. 영국 국적의 우편선을 타고 가던 두 사람이 북군에 체포되면서 ‘트렌트 호 사건’이 일어났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영국의 보수적인 정권은 미국의 ‘극단적인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의 민주주의가 실패하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었다. 아울러 미국이 가진 잠재적인 국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당시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에 의하면 만약 미국이 양분(兩分)된다면 가장 이득을 볼 나라는 영국이며 따라서 영국은 남북 전쟁의 결과를 마음 졸이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프랑스는 당시 멕시코에 친불(親佛) 허수아비 정권을 세운 상황이었으며, 프랑스에 우호적인 남부 정권과 국경을 맞대는 것이 보다 유리할 것이라 판단하고 전쟁 초기에 남부를 승인하려 하였다. 만약 영국이 남부의 독립을 승인한다면 프랑스 역시 이를 따를 것임을 분명히 하여 미합중국 정부를 긴장시켰다. 미국의 분열을 바라는 서유럽과는 달리, 러시아는 오히려 북부가 승리하여 통일된 미합중국이 영국을 견제하여 주기를 바라며 북부를 지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샌 재신토 호의 함장인 찰스 윌크스가 취한 행동은 북부의 대전략의 차원에서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이었지만, 사태는 북부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남부에는 매우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실 유럽 국가들이 남부의 외교적 노력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상황이어서 슬라이델은 북군 수병들에게 체포되어 가면서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이 일로 인하여 미합중국과 영국의 사이가 나빠지고 남부의 외교적 목적이 보다 빨리 달성되리라 본 것이다. 슬라이델이 생각한 대로 영국의 국기를 달고 항해하던 배가 외국 군함에게 정지당하고, 게다가 외국의 군인들이 강제 승선하여 승객 일부를 데려갔다는 소식이 영국에 알려지자 영국의 조야(朝野, 정부와 민간 모두)는 전쟁 여론으로 들끓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미합중국의 국무장관 시워드(William Henry Seward)는 유럽에 상당히 강경한 외교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미합중국은 남부의 ‘국가’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란’을 진압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남부를 승인하는 어떠한 행위도 미합중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윌크스 함장이 트렌트 호를 나포하고 남부 외교관들을 체포하자 미합중국은 국제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만약 윌크스 함장의 행위가 ‘합법’이 되려면 미합중국의 함선이 ‘적국’을 돕는 제3국의 함선을 나포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남부를 ‘적국’으로 인정하여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이는 시워드와 링컨의 정책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링컨은 외교적 형세가 매우 불리하게 된 것을 인정해야만 하였다. 이후 영국 정부는 미합중국 정부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였고, 체포된 남부 외교관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인 캐나다와 서부 대서양에서 군사력을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영국과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던 미국 정부는 결국 메이슨과 슬라이델을 석방하였으며, 윌크스 함장이 정부의 공식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하였다고 인정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1862년 7월에 남군 사령관이 된 로버트 리(Robert E. Lee). 북부의 공세를 막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북부를 침공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과감한 작전으로 남군을 여러 차례 승리로 이끌었다.
1862년 5월에 이르러 북부의 해상봉쇄는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남부의 면화 수출이 전쟁 이전과 비교하여 3분의 1로 줄어들자 영국과 프랑스의 섬유산업이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섬유 공장들이 집중되어 있던 영국의 랭캐셔(Lancashire)에서는 대규모 정리해고로 쫓겨난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공장에서 쫓겨난 프랑스 노동자들의 불만도 점증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은연중에 북부의 패배를 바라고는 있었지만, 동시에 남부에 대한 승인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였다. 남부의 승리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7일 전투’를 통하여 매클렐런의 포토맥군을 멀리 물리친 후 남부 주력군인 북부 버지니아군의 수장이 된 리는 북부의 공세를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북부를 침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때까지 전투는 주로 남부 영토인 버지니아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전투로 인한 피해는 모두 남부가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리의 논리는 북부 수도 워싱턴의 생명선인 볼티모어-오하이오(Baltimore-Ohio) 철도를 끊고, 펜실베이니아의 농업지대를 공략하여 북부에도 경제적인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친남부주의자들이 많은 메릴랜드를 침공하여 메릴랜드의 분리를 유도하고 북부 영토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북부주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남부가 북부를 공략하여 대승을 거두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유럽 국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승인을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서부에서도 연패하고 리치먼드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남부는 전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승리가 절실하였다.
한편 신중하다 못해 소극적인 매클렐런을 대체할 만한 인물을 찾던 링컨은 포프(John Pope) 소장을 새로이 편성된 미연방 버지니아군(Union Army of Virginia)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서부 전선에서 몇 차례 성공을 거두어 새로이 사령관으로 임명된 포프는 부임하자 마자 “영광은 오직 진격에 있고, 후퇴에는 오직 수치만이 있을 뿐이다”라며 허세를 잔뜩 부렸다. 그에 대한 군 내부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포토맥군의 매클렐런과 그 휘하 장교들 또한 포프에 대한 경멸감을 공공연히 내비쳤다.
그러나 링컨은 어찌되었건 매클렐런에게 포프의 작전을 보조하라고 명령하였고, 이 때문에 포토맥군은 워싱턴 남쪽 알렉산드리아까지 배를 타고 장시간 항해해야만 했다. 할렉은 핏츠포터(John FitzPorter)의 군단을 포토맥군에서 차출하여 포프의 버지니아군에 합류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메클렐런의 포프에 대한 경멸감은 극에 달하였는데, 매클렐런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런 형편없는 인간은 어떤 일을 맡기만 하면 모조리 망쳐놓고 만다”라고 극언을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할렉이 다시 추가로 포토맥군에서 병력을 차출하려 하였을 때 매클렐런은 사실상 할렉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매클렐런을 비호하고 있는 정치 세력이 워낙 두터워 할렉은 메클렐런의 항명(抗命) 행위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1862년 8월 남군의 북부 버지니아 작전도. 남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북부는 수도 워싱턴 DC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되었다. <출처: (cc) Hal Jespersen at en.wikipedia.org>
한편 북군에 맞서 메릴랜드를 향하여 북진하던 남군의 북부 버지니아군(Army of Northern Virginia) 중 잭슨의 군단이 8월 9일 컬페퍼(Culpeper) 인근의 시더 마운틴(Cedar Mountain)에서 연방 버지니아군의 일부와 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버지니아군 제 2군단을 맡고 있던 북군의 뱅크스 소장은 1862년 봄 셰넌도어 밸리(Shenandoah Valley)에서 잭슨에게 망신당한 것을 복수할 생각에 성급한 공격을 하였다. 북군이 의외로 빠르게 공격을 해오자 남군 쪽 잭슨 사단의 일선 부대를 맡고 있던 윈더(Charles Winder) 준장이 전사하는 등 초반의 상황은 북군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잭슨의 직속부대인 스톤월 여단(Stonewall Brigade), 힐 (A.P. Hill), 브랜치(Lawrence Branch)와 트림블(Isaac Trimble)에 의한 반격이 시작되자 북군이 패퇴하였다. 뱅크스는 병력의 30%를 잃고 정신없이 후퇴하다가 뒤늦게 도착한 증원군 덕에 간신히 남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이후 남군의 진격이 계속되면서 포프는 허풍만 드셀 뿐 리와 잭슨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북군은 이후 머내서스 스테이션(Manassas station, 8월 27일), 더로우페어 갭(Thoroughfare Gap, 8월 28일) 등에서 연패하고, 포프와 리가 거의 정면으로 부딪힌 8월 28일부터 8월 30일까지의 제 2차 불 런 전투(Second Battle of Bull Run)에서는 북군이 사상자 1만 명을 내면서 대패하고 말았다. 포프의 버지니아군이 리에게 철저히 두들겨 맞으면서 이번에는 북부의 수도인 워싱턴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서부에서도 남군의 반격이 이루어지면서 북군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1862년 5월 말, 북군이 미시시피주의 북쪽 끝인 코린트(Corinth)를 점령한 후 그랜트는 당장 미시시피강의 빅스버그(Vicksburg)를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뉴올리언스를 점령한 패러거트의 함대가 내친김에 빅스버그 공격을 시도해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요새의 위치가 높아 함포로는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과 육지에서 동시에 공격해야 그나마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빅스버그는 미시시피강에 위치한 남군 최대의 요새여서 미주리주와 뉴올리언스를 장악한 북군이 이를 점령하는 것은 ‘아나콘다 작전’의 요지에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부전선을 맡은 북군의 사령관 할렉(Henry Halleck)은 빅스버그를 공격하려면 새로이 철도가 필요한데, 가뭄과 탈수로 인해 쓰러지는 병사들이 많은 상황에서 도보로 육상 공격을 감행하면 낙오병들이 많아질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그는 서부에 포진한 북군 병력 총 11만의 군세(軍勢)를 셋으로 나누어 4만은 아칸소 방면으로 향하게 하고, 4만은 뷰엘의 지휘하에 테네시 동부의 채터누가(Chattanooga) 방면으로 진격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3만은 보급을 위한 철도를 깔게 하였다.
2차 불 런 전투 당시 철로를 개설 중인 북군. 북군의 철로 개설은 궤간을 통일하는 등 미합중국 군사철도청(USMRR)에서 관리ㆍ담당하였다. 철로 보급을 통한 물자 수송의 원활함은 결국 북부의 승리를 이끄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새로이 개설된 철도에 대한 관리는 1862년 2월 창설된 미합중국 군사철도청(US Military Railroads, USMRR)이 일괄적으로 담당하였다. USMRR은 철도를 개설할 때 무조건 게이지(Gauge, 궤간)를 통일시켜 각 지역간의 보급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이에 비하여 남부는 북부의 USMMR같이 철도를 총괄하는 기관도 없었거니와 지역간 게이지가 달라 병력과 물자 수송에 애로가 자주 발생하였다. 철도 보급을 통한 원활한 물자 수송은 장기적인 차원에서 북부 승리의 견인차로 작용하였다.
북군 기술자들은 철로를 건설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지만, USMRR은 그 창설 초기에 서부전선에서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남군의 포레스트(Nathan Forrest) 대령과 모건(John Hunt Morgan) 대령의 기마대가 진격하는 북군의 후방에 출몰하여 보급대를 습격하고 철도를 뜯어내는 등 게릴라 전술로 뷰엘의 군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특히 모건은 테네시와 켄터키에서 철저히 현지 보급에만 의존하여 싸웠다. 이러한 모건의 활약상에 힘입은 남부에서는 미합중국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켄터키에 아직 친남부 세력이 상당할 것이라 생각하고, 브래그(Braxton Bragg) 대장을 테네시군(Army of Tennessee)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862년 7월에 북진을 개시하였다.
포레스트(Nathan B. Forrest, 왼쪽)와 모건(John Hunt Morgan, 오른쪽). 신출귀몰하는 기병 전술로 보급대를 습격하고 철도를 파괴하는 등 테네시와 켄터키 일대의 북군을 괴롭혔다.
뷰엘은 일단 프라이스(Sterling Price)와 밴 도른(Earl van Dorn)의 휘하에 32,000명을 코린트에 남겨두어 그랜트와 로즈크랜즈의 군을 견제하게 한 다음, 35,000의 병력을 철로를 이용해 애틀랜타로 돌린 후 채터누가로 옮기는 우회 작전을 실시하였다.
이에 남군의 브래그는 녹스빌(Knoxville)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Kirby Smith) 소장의 동부 테네시군(Army of East Tennessee) 18,000명과 공동작전을 구상하였다. 그의 작전은 5만이 넘는 병력으로 켄터키를 공략하고, 멀리 앨라배마 북부에까지 진출한 뷰엘의 보급로를 끊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하여 뷰엘이 북상하면 뷰엘의 군을 격파하고 켄터키를 영구 점령한 다음, 오하이오주까지 치는 것이었다.
일단 같이 행동하기로 한 스미스의 움직임은 신속하였다. 8월 14일에 브래그로부터 1개 사단을 지원받은 스미스의 군은 21,000명으로 늘어났고, 녹스빌에서 진격을 시작한 스미스의 부대는 북군에 점령당한 중요 요충지인 컴벌랜드 갭(Cumberland Gap)을 우회하여 켄터키 중심부로 그대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1개 사단으로 컴벌랜드 갭의 북군을 견제하게 하고는 2주 만인 8월 29일에 켄터키의 중부 도시인 리치먼드(Richmond, Kentucky)에 도착한다. 리치먼드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켄터키주의 주요 도시인 루이빌과 녹스빌, 그리고 주도(主都)인 프랭크포트(Frankfort)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로부터 불과 75마일(120km) 떨어져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을 줄 알았던 남군의 공격에 리치먼드의 주민들은 당황하였고 일부는 황급히 피난을 떠났다.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북군 넬슨(Edmund Nelson)의 신병 6,500명이 스미스의 병력과 충돌하였으나 다음 날(8월 30일)에 스미스의 군에 패하고 황망히 물러난다. 스미스는 헤스(Henry Heth)에게 8천의 병력을 주어 신시내티 근방으로 가서 정찰할 것을 명하였다. 렉싱턴에서 출발한 헤스는 약 2주간 혹시라도 신시내티를 공략할 만한 약점이 있는가를 살펴보았지만, 시장인 해치(George Hatch)와 월리스(Lew Wallace) 소장이 정규군 2만과 민병 6만을 동원하여 철통같이 지키고 있음을 파악하고는 공격을 포기하고 렉싱턴으로 복귀하였다.
한편 렉싱턴을 점령한 브래그는 주민들에게 ‘남부의 정의로운 전쟁’에 동참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켄터키의 친남부 주민들은 남부로 떠나거나 이미 종군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이 남군에 입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북군의 야전군이 아직도 건재한 상황에서 브래그의 병력을 가지고 켄터키를 장악하고 지켜낼 수 있을 지가 의문이었고, 아울러 브래그의 편을 들었다가 혹시라도 북군이 다시 점령할 경우 보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남군을 돕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말로는 ‘남군 만세’를 외치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눈치만 보았다.
남군은 9월 17일에 먼포드빌(Munfordville)을 공격하여 북군 4000명을 격파하고 이를 점령하였으나 이러한 승리도 켄터키 주민들을 안심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브래그는 코린트에 남겨둔 프라이스와 밴 도른의 군이 북상하여 도와주기를 기대하였으나 프라이스와 밴 도른의 군은 10월 4일 2차 코린트전투(Second Battle of Corinth)에서 그랜트와 로즈크랜스(William Rosecrans)가 이끄는 북군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다만 그랜트는 이 전투에서 양면으로 부대를 나누어 밴 도른의 퇴로를 막아 남군을 전멸시키려 하였는데, 남군의 공격을 격퇴한 로즈크랜스가 어떤 이유에선지 후퇴하는 남군을 가로막지 않아 패한 남군은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고, 이 일로 그랜트와 로즈크랜스는 원수가 되고 만다.
1862년 10월 4일 벌어진 2차 코린트 전투. 프라이스와 밴 도른이 이끄는 남군은 그랜트와 로즈크랜스의 북군에 밀려 대패하였고, 이로써 켄터키의 남군은 지원병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남쪽에 있던 뷰엘은 여전히 보급의 어려움을 들어 여러 차례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서부의 사령관이었다가 북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할렉은 여러 차례 뷰엘에게 전보를 쳐서 다시 북상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뷰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참다 못한 할렉은 비록 수사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뷰엘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지금 정부에서는 잘 싸우지 못하는 장군들 때문에 단두대를 세우고 있다네……. 아무래도 프랑스혁명에서 본 것과 같은 가혹한 조치가 필요할 것 같네만…….”
사실상의 최후통첩을 받은 뷰엘은 마침내 군을 움직여 브래그와 싸우러 나선다. 북상하는 뷰엘은 일단 한 개 사단은 주도 프랭크포트 쪽으로 움직여 양동작전을 펼쳤다. 이때 프랭크포트에서는 남군의 비호하에 켄터키 ‘주지사’의 취임식이 거행되고 있었는데, 뷰엘이 보낸 양동부대의 공격으로 인하여 취소되었다. 이때 뷰엘의 병력은 6만, 브래그와 스미스의 군은 약 4만 정도였다. 그러나 남군은 약 100km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고, 아울러 스미스는 명목상 브래그의 밑에 있었지만 사실상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1862년 5월부터 10월까지 이루어진 남군의 켄터키 공략과 페리빌 전투. 남군의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이후 남군은 서부에서 전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출처: (cc) Hal Jespersen at en.wikipedia.org>
브래그의 병력은 나뉘어져 있었고 뷰엘 역시 여러 방면으로 군을 보냈기 때문에 10월 8일에 뷰엘의 북군과 브래그의 남군이 페리빌(Perryville)에서 충돌하였을 때의 병력은 북군이 약 23,000, 그리고 남군이 약 17,000 정도였다. 이 전투에서 북군의 사상자는 4,200명, 남군은 약 3,400명으로 피해는 북군이 더 많았지만, 결국 북군의 전략적인 승리로 귀결되었다. 브래그의 군은 장거리 보급 능력이 없는데다 코린트 방면에서 북상하기로 했던 프라이스와 밴 도른의 군이 패하면서 더 이상 추가 병력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브래그는 원정이 실패하였음을 인정하고 남쪽으로 긴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남군은 다시는 켄터키에 발을 들이지 못하였고, 서부에서 다시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남군의 시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2차 불 런 전투 이후 워싱턴 방면으로 후퇴하던 포프의 버지니아군은 리와 잭슨이 계속하여 진격해오고 사령관 할렉이 반격을 명하면서 9월 1일 현재 버지니아주 패어팩스(Fairfax, Virginia) 인근의 찬틸리 장원(Chantilly Plantation)에서 남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은 포프의 군은 워싱턴 방면으로 완전히 퇴각한다. 이후 버지니아군은 해체되고 포프 역시 해임되었다. 남은 병력은 매클렐런의 포토맥군과 합쳐졌다. 남군의 공격이 북부의 버지니아군(Army of Virginia)을 사실상 와해시킨 것이다. 남군 역시 계속되는 전투로 지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유럽에서의 외교적인 승인을 얻기 위하여 계속 승리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리는 마음 편히 군을 쉬게 할 여유가 없었고 더 큰 승리를 위하여 메릴랜드주로 진격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뒤바뀐 전황에 실망한 사람들은 일단 노예제를 유지하면서 미 연방에 남았던 켄터키나 미주리 등의 유권자들이었다. 이들은 매클렐런이 리치먼드를 함락시키면 노예제에 대한 폐지 논의 없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면서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노예제도가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남부의 물적ㆍ제도적 토대라는 논리가 힘을 얻었던 것이다.
불과 1년 전인 1861년만 해도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남부의 여론을 악화시켜 전쟁을 일으킨 원흉으로 지탄받았으나, 1862년에는 전쟁을 주도하고 있던 공화당의 정치적 지지를 얻으면서 북부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고 국회에서도 연설하는 등 크게 세력을 넓혔다. 이에 힘입어 1862년 3월 13일에는 전투 중 북군 진영으로 넘어온 흑인 노예들을 돌려주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하원에서 통과되었다.
이 이전에도 대다수의 북군 지휘관들은 전투 중에 노예들이 북군 진영으로 넘어오면 일단 병영에서 허드렛일을 담당케 하고 주인들에게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1861년 4월, 버지니아 반도 원정 중 두 명의 노예가 북군 버틀러(Benjamin Butler) 소장의 진영으로 넘어오자 그 주인인 남군 장교가 백기를 들고 북군 진영으로 찾아와 반환을 요구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때 버틀러 소장은 노예들을 ‘노획품(Contraband)’이라고 하며 내놓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것이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일부 지휘관들이 실제로 노예들을 내놓는 경우도 있어, 폐지론자들은 이를 확실히 금지하는 법안을 요구하여 통과시킨 것이다. 이미 주(州) 이외의 속지(Territory)들과 수도인 워싱턴 DC에서 노예금지법안이 통과되었고 영국과 노예 거래 중지를 위한 조약을 체결한 상태에서 노예반환금지법안까지 통과되자 북부 노예주(Slave state) 출신 의원들과 유력 인사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이들은 목청을 높여 공화당을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전쟁 이전과 같이 노예제는 다시 한 번 첨예한 정치적 이슈로 떠올랐고, 링컨은 이러한 갈등을 정치적 타협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다. 그가 내놓은 타협안은 북부의 노예를 모두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대신 노예주들에게 재정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었다. 링컨은 3개월분의 전쟁 예산이면 북부 내의 모든 노예들의 유상(有償) 해방이 가능하다고 하였으나 노예주들은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사실 유상 해방에 필요한 재정은 북부의 다른 주들에서 세금을 걷어 충당할 계획이어서 노예주들이 금전적으로 손해 볼 일은 없었기 때문에 노예주들의 거부는 좀 아이러니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링컨은 노예주들이 타협안을 거절하자 실망을 감추지 못했으며 직설적으로 노예주들을 꾸짖었다.
“만약 경계주(Border States)들이 노예들의 점진적 해방에 대한 결정을 바로 내릴 수 없다면… 노예제도는 결국 갈등과 충돌, 즉 전쟁의 여파에 의하여 사라지게 될 것이요… 결국 당신들에게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em></em>
그러나 노예들의 해방에 반대하는 것은 노예주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원칙적인 차원에서 노예해방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노예들을 해방시키면 수백만의 흑인 자유민들이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하여 백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갑작스런 흑인들의 유입으로 인종 갈등과 사회적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당인 민주당은 전쟁을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나뉘게 되는데, 반전론자들은 전쟁보다는 협상으로 연방을 통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급진적인 노예폐지론이 없어지면 남부가 협상에 응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하지만 남부 인사들은 남부의 최종적인 목적이 ‘독립’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 반전론자들의 협상론이 실현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1862년 후반 전황이 북부에 불리해지자, 전쟁이 장기화할 것을 두려워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반전론과 협상론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공화당은 협상이나 타협은 절대로 불가하다고 맞섰고, 민주당 반전론자들을 ‘카퍼헤드(Copperhead, 미국 남부에 서식하는 독사들)’라고 부르며 적대시하였다. 워싱턴의 수비를 위하여 DC 근교에 주둔하고 있던 매클렐런은 이들 카퍼헤드파와 가까이 지냈고, 차기 대선에서 민주당의 후보로 공공연히 거론되었다. 매클렐런은 그해 7월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노예제도에 대한 불간섭이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를 본 전쟁 장관 스탠턴(Edwin Stanton)은 몹시 화를 내며 당장 매클렐런을 해임하려 하였다. 그러나 링컨은 매클렐런이 포토맥군의 병사들에게 추앙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해임이 포토맥군의 사기 저하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 그만한 장군도 없었기에 링컨은 스탠턴의 건의를 묵살하고 매클렐런의 오만불손을 그저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노예들에 대한 또 다른 타협안은 노예들을 정부가 사들여 자유로 풀어준 후에 이들을 다른 나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흑인들을 이주시키자는 주장은 의외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어떤 공화당 의원은 “솔직히 이주론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일단 국민들에게 먹혀 들어갈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공화당 의원들의 3분의 2가 수도 워싱턴에서 노예를 해방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흑인들의 이주를 위한 60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할 정도였다. 노예들의 이주지로는 온두라스와 니카라과가 선정되었으나 두 나라 모두 거부하면서 중앙아메리카 이주론은 무산되었다. 1863년에는 453명의 전직 노예들을 아이티 근처에 있는 섬으로 옮겼으나 질병과 기아로 수십 명이 사망하고 생존자들을 다시 미국으로 데려오면서 흑인 이주론은 흐지부지된다.
링컨이 노예들에 대한 타협안을 여러 차례 제시한 이유는 노예해방선언에 필요한 최대한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만약 기존 폐지론자들의 지지에 타협안 제시를 통하여 중간론자들의 지지를 추가로 얻어낼 수 있다면 국내의 정치적인 부담 없이 노예해방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흔히 링컨이 노예해방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의 증거로 회자되는 발언이 있다.
“나의 최고 목표는 이 연방을 유지시키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존폐가 아닙니다. 만약 노예들을 해방시키지 않고 이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그리할 것이고, 만약 노예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러할 것이며, 노예들의 일부를 해방시키고 일부를 노예로 둠으로써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면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노예제도와 유색인종에 대하여 행하는 모든 일은 이로써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만약 내가 행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연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br /><br />My paramount objective in this struggle is to save the Union, and is not either to save or to destroy slavery. If I could save the Union without freeing any slave I would do it, and if I could save it by freeing all the slaves I would do it; and if I could save it by freeing some and leaving others alone I would also do that. What I do about slavery, and the colored race, I do because I believe it helps to save the Union; and what I forbear, I forbear because I do not believe it would help to save the Union.”<em></em>
링컨의 이 발언은 급진적인 폐지론자이자 <뉴욕 트리뷴(The New York Tribune)>지의 편집장이며 사주(社主)인 호러스 그릴리(Horace Greeley)가 1862년 8월 20일에 칼럼란에 게재한 “2천 만의 기도(A Prayer of Twenty Millions)”에 대한 반박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발언이 노예폐지론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예해방에 소요되는 비용이라던지 정치적인 과정을 무시한 채 극단적인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던 그릴리에 대한 현실론적인 반박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노예 폐지와 관련하여 중간층의 지지를 끌어들이려는, 한 마디로 ‘정치적’ 발언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링컨은 이미 노예제가 남부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임을 깨달은 지 오래였다. 그는 남부의 기반이 되믄 노예제를 철저히 깨부수지 않고는 전쟁에서의 승리도 연방을 재통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링컨은 위의 반박 칼럼을 게재할 당시 노예해방선언을 할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던 중이었다. 링컨은 이때 유럽 국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이미 노예거래를 불법이라 규정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만약 노예해방선언을 통하여 노예해방이 전쟁의 목적임을 밝힌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명분상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남부를 지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미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노예해방을 남부에 강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해방선언은 허언(虛言)에 불과한 것이었다. 노예해방선언을 저울질 하던 1862년 7월경 당시, 전세는 북부에 불리하였다. 링컨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명분이 아니라 승전보(勝戰譜)였다.
메릴랜드에서 마주하게 된 로버트 리(왼쪽)와 조지 매클렐런(오른쪽).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나 지나친 조심성으로 주저하던 매클렐런에게 천금과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남군 장교들이 분실한 리의 작전명령서가 매클렐런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1862년 여름의 북부 버지니아 원정에서 포프의 북군을 완파한 리의 남군은 병사들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북진하였다. 일단 계속되는 전투로 피폐해지고 있는 버지니아에서 군을 옮김과 동시에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를 공략하여 민심 이반을 유도하려 한 것이다. 아울러 북군을 연파할 경우 북부 주민들의 사기를 저하시킴은 물론, 1862년 11월의 북부 총선에서 반전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남부와 협상에 임할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물론 남부의 일부 여론은 북부 수도 워싱턴 DC를 공격할 것을 주문하였으나, 워싱턴은 이전에 매클렐런이 구축한 방어망으로 단단히 보호되고 있는 데다 매클렐런의 포토맥군도 근방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리는 워싱턴 공략은 득보다 실이 더 크리라 판단하고 군을 북쪽 방향으로 돌렸다.
1862년 9월 3일 버지니아주 센터빌을 출발한 리는 메릴랜드에 진입하면서 남군은 메릴랜드를 점령할 의도가 없으며 해방군으로서 왔음을 선언한다. 같은 시기에 남부 정부도 남군의 북진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북부에 대한 ‘방어적 공격’일 뿐 점령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아울러 메릴랜드에 진입하면서 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전술을 다시 전개한다. 수적으로 비슷하거나 월등한 적이 근방에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군을 분산시킨 것이다. 자신의 군이 북군보다 빠르게 기동한다는 전제하에 중요 전술목표 여럿을 동시에 확보함은 물론 적군에게 자신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게 하여 중요한 순간에 적을 여러 방향에서 타격하려는 작전이었다. 이는 나폴레옹이 자주 구사한 분진합격(分進合擊)을 연상시키는 기동이었다.
일단 리는 군을 네 개의 군단으로 나누어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의 군단을 분스버로(Boonsboro)로 보내어 북부 민병대를 소탕하게 하였다. 그리고 셰넌도어의 영웅인 잭슨(Stonewall Jackson)을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경계에 있는 하퍼즈페리(Harpers Ferry)로 보내어 막대한 양의 물자를 비축하고 있는 북군의 보급기지를 공격하게 한다. 스튜어트(Jeb Stuart)와 힐(D.H. Hill)의 부대는 후방인 사우스마운틴(South Mountain)에 배치하여 혹시라도 있을 북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후위를 방어하게 하였다.
매클렐런의 움직임은 버지니아 반도 원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이때 리의 병력은 약 5만 5천이었고, 매클렐런은 8만 7천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 북군이 수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매클렐런은 적의 병력을 과장하는 고질적인 버릇 때문에 리가 11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고 추측하였다. 이 때문에 매클렐런은 리가 움직이기 시작한 지 4일이 지난 9월 7일에 이르러서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물론 리도 적 앞에서 병력을 나누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참모들의 우려를 일축하였다.
“제군들이 매클렐런을 잘 아는가? 그는 장군으로서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어… 그의 군은 지금 사기가 형편없고 혼란에 빠져 있어서 최소한 3주나 4주 동안 공격적인 작전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일세…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서스쿼해나(Susquehanna,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강) 강변에 가 있을 것이야.”<em></em>
그러나 전쟁은 대개 보이지 않는 변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은 또 다시 입증된다. 9월 13일에 남군이 머물고 간 지역을 정찰하던 북군의 기병대가 남군 장교들이 분실한 리의 작전명령서를 찾아낸 것이다. 정찰대로부터 명령서를 받은 매클렐런은 “이제야 보비 리(Bobbie Lee)를 혼내줄 수 있게 되었다”며 희희낙락하였다.
1865년, 앤티텀 전투 이후 하퍼즈페리(Harpers Ferry)의 모습. 남군은 하퍼즈페리의 보급창을 빼앗아 엄청남 양의 물자를 확보하였지만 남군의 1차 북진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리의 작전명령서를 손에 놓은 것은 매클렐런으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9월 13일경 이미 남군은 북부 영역에 진입하여 중요 보급기지인 하퍼즈페리를 집중 공격하고 있었다. 하퍼즈페리 요새를 지키고 있던 북군의 마일스(Dixon Miles) 대령은 무능도 무능이거니와 남군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하퍼즈페리는 주변의 고지에 둘러싸인 강변에 위치해 있어서 제대로 수비하려면 기지 자체보다는 고지를 확보하는 것이 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마일스가 한 개의 고지에만 약간의 병력을 두었을 뿐 고지 수비를 등한시 하는 바람에, 9월 14일경 주변 세 개의 고지는 모두 남군에게 점령당하였다. 남군은 이 고지들에 포를 끌어올려 기지를 포격하였고, 9월 15일에는 보병에 의한 돌격이 시작되었다. 공격을 견디다 못한 요새는 항복하였고 무려 12,000이나 되는 기지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공격을 지휘하였던 잭슨(Stonewall Jackson)은 불과 250여 명의 사상자밖에 내지 않으면서 많은 포로와 엄청난 양의 물자를 얻은 것이다.
이런 대승에도 남군은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리의 작전명령서를 입수한 매클렐런의 포토맥군이 평소와는 다르게 의외로 빠른 추격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빠르다”라는 것은 상대적이어서 사실 매클렐런은 명령서를 입수한 후 군을 재정비한다는 명목으로 18시간을 움직이지 않았다. 일군(一軍)을 급파하여 나누어진 리의 군에 대한 각개격파를 시도하는 대신에 매클렐런은 포토맥군 전부를 움직였고, 포토맥군의 움직임을 목격한 메릴랜드의 친남부 농부 한 명이 말을 달려 리의 군에 이를 알렸다.
리는 자신의 계획이 탄로났음을 알고 서둘러 나누어진 부대들에 연락하여 병력을 다시 집합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9월 14일에 포토맥군의 선봉 부대가 사우스마운틴의 산 고개들을 지키고 있던 남군 부대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남군은 열심히 싸웠지만 병력의 열세(북군 28,000 대 남군 18,000)를 극복하지 못하고 세 개의 산 고개를 모두 북군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사우스마운틴에서 남군의 분전은 리에게 병력을 다시 모을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전투에는 후일 19대 대통령이 되는 러더포드 B.헤이스(Rutherford B. Hayes)와 25대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제 23 오하이오 의용연대(23rd Ohio Volunteers Regiment)의 장교로 참가하였다.
비록 시간을 벌었다고는 하나 남군 후위가 예상외로 빨리 공격을 당한 상태여서 남군은 아직 분산된 병력들이 복귀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매클렐런이 사우스마운틴에서의 승리 후 빠르게 움직였으면 롱스트리트와 잭슨의 부대가 귀환하기 전에 리의 본대를 들이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클렐런은 다시 늑장을 부리면서 대열을 정비하는 데 하루를 썼다. 특히 사우스마운틴에서 하퍼즈페리는 그리 멀지 않았는데도 하페즈페리를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결국 하퍼즈페리의 함락을 사실상 방관하였다.
9월 16일에 메릴랜드주 샤프스버그(Sharpsburg)에서 양군이 조우하였을 때, 리의 병력은 불과 18,000명에 불과하였다. 하퍼즈페리를 점령한 남군 부대가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지만, 아직 전투 지역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남군은 북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전투를 준비할 시간도 부족하여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는 참호를 파기보다는 주변의 바위와 나무, 관목 등 장애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나머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지키는 전투’를 할 계획이었다.
매클렐런은 세 개의 군단을 우측에 집중시켜 이를 주공(主攻)으로 하고 번사이드(Ambrose Burnside)의 9군단을 좌측에 배치하여 조공(助攻)을 맡겼다. 혹시라도 리가 주공을 막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을 막기 위한 견제책이었다. 아울러 매클렐런은 무려 4개의 보병 사단과 기병대 전체를 예비대로 두어 남군 전선에 돌파구가 생길 때 투입할 생각이었다. 이론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작전이었으나 전투는 메클렐런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9월 17일 아침에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매클렐런은 주공을 담당한 병력을 움직이고자 하였으나, 명령이 매끄럽게 전달되지 못하여 한꺼번에 우세한 병력으로 남군 좌익을 들이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축차 공격이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남군 좌익은 위태위태하기는 하였지만 그런대로 북군의 공격을 버틸 수 있었다. 아울러 조공을 맡은 번사이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번사이드가 맡은 지역에는 앤티텀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어 이를 차지하기 위하여 병력을 다리에 집중시켰다. 문제는 남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 다리 인근에 수비 병력을 집중시킨 것이다. 사실 멀지 않은 곳에 물이 얕고 강폭이 좁은 곳이 여러 군데 있었고 이를 통하여 충분히 압도적인 병력을 도강시킬 수 있었건만, 번사이드는 다리에 대한 정면공격만을 고집하였다. 이 때문에 남군 우익은 북군의 공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고, 리는 우익으로부터 한 개 사단을 차출하여 병력이 열세인 남군 좌익에 대한 북군의 주공을 막을 수 있었다.
남군 좌익은 병력의 현격한 열세 속에서 지쳐가고 있었다. 잭슨이 맡고 있던 좌익은 저돌적인 후커(Joseph Hooker) 소장 휘하 북군 1군단의 맹공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리가 보내준 병력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리가 보내준 병력은 북군 1군단의 측면을 공격하여 이를 깨뜨렸다. 그러나 곧장 북군 12군단에 의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12군단은 잠시 남군의 전선을 돌파하였으나 이내 격퇴되었다. 그러자 그 다음에는 북군 섬너(Bull Sumner) 소장 휘하의 북군 사단이 공격을 하여 남군 전선이 다시 돌파되었고, 남군 좌익이 일시적으로 위기에 처하였으나 때마침 하퍼즈페리 방면에서 일단의 남군 병력이 도착하면서 북군의 돌파는 격퇴되고 돌파 지역은 다시 복구되었다.
이 상황에서 매클렐런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을 보였다. 매클렐런은 4개 사단을 예비대로 가지고 있었음에도 남군 좌익에 돌파 지역이 생겼을 때 군을 투입하지 않아 남군을 궤멸시킬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또 다른 결정적인 기회는 중앙에서 돌파를 시도하는 북군과 이를 막으려는 남군의 전투에서 나왔다. 남군은 수차례 북군의 돌파 시도를 좌절시켰지만 이를 막는 과정에서 남군 역시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지역은 이후 ‘블러디 레인(Bloody Lane)’, 즉 ‘피의 통로’라고 불리게 된다. 더 많은 병력과 화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북군의 공격에 남군의 전선이 무너지고 샤프스버그 방면으로 무질서한 후퇴가 시작되었다. 이때가 매클렐런이 예비대를 투입할 두 번째 기회였으나, 매클렐런은 리가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남군 예비대의 반격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손에 쥔 카드를 펼치지 않는다.
1 엔티덤 크릭(Antietam Creek) 근처 덩커 교회(Dunkers Church)에 쓰러져 있는 양군의 시신. 앤티덤 전투는 미국 전사(戰史)상 가장 많은 미국인이 전사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2 ‘피의 통로(Bloody Lane)’에 쓰러져 있는 사상자들. 공방전 속에 북군은 예비대를 투입해 남군을 궤멸시킬 기회가 있었으나 매클렐런의 지시로 두 번째 기회를 잃고 만다. |
세 번째 기회는 번사이드의 군단이 마침내 남군의 치열한 수비를 뚫고 앤티텀강의 다리를 건넜을 때였다. 계속되는 북군의 공격에 밀린 남군은 여기에서도 무질서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 핏츠포터(John FitzPorter) 소장의 5군단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지만, 리의 ‘유령 예비대’를 두려워한 매클렐런은 여전히 예비대 투입을 거부하였다. 예비대 없이도 번사이드의 사단이 남군 우익을 격파할 수 있을 듯 보였으나, 때마침 하퍼즈페리 방면에서 힐(A.P Hill)의 사단이 도착하면서 번사이드의 공격마저 격퇴된다. 9월 17일 내내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에서 양군의 사상자는 2만 3천에 달하였다. 단일 전투로는 미국 전사(戰史)상 최대의 피해였으며,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 당시 미군 사상자 수의 4배에 달하였다.
전술적으로는 무승부였지만 남군도 끔찍한 피해를 입어 더 이상 메릴랜드에서 작전을 수행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다음 날 18일에는 양군 모두 대치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다가 18일 저녁에 리가 남군의 후퇴를 명한다. 리의 1차 북부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남군은 셰넌도어 벨리 방면으로 힘없이 물러났다. 매클렐런은 여전히 리의 ‘예비대’를 두려워하여 적극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는다. 그는 워싱턴에 보낸 전보에서 북군이 ‘대승’을 거두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리의 북진은 격퇴되었고 북군은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리의 공격이 좌절로 돌아간 것을 본 영국과 프랑스는 잠시 남군에 대한 인정을 보류하기로 하였다.
이 틈을 타 링컨은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한다. 노예해방선언은 단지 선언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노예제도는 남부를 사회ㆍ경제적으로 지탱하는 기둥과 같은 것이었다. 링컨이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고 노예제를 부정함으로써 남북 전쟁은 단지 반란군 진압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노예제 그 자체를 붕괴시킴으로써 남군을 꺾는 것을 넘어, 남부를 사회ㆍ경제적으로 완전히 파멸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아울러 남부가 ‘노예사회’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여 만약 유럽 국가들이 ‘노예국가’인 남부를 인정하면 결국 노예제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즉, 유럽 국가들에 대한 도덕적인 부담을 높임으로써 남부에 대한 외교적 지원을 차단한 것이었다.
비록 앤티텀에서의 전략적 승리가 노예해방선언을 가능케 하였지만, 매클렐런은 여러 차례 예비대의 투입을 주저함으로써 남군을 완파할 기회를 놓쳤다. 원래 링컨을 비롯한 워싱턴 정부의 명령은 기회가 된다면 리의 ‘반란군’을 궤멸시키라는 것이었다. 매클렐런은 자신이 메릴랜드를 침공한 반란군을 막아냈다고 자랑했지만, 워싱턴의 전쟁부(War Department)는 소극성으로 말미암아 리의 군을 격멸할 기회를 놓친 매클렐런을 곱게 보지 않았다. 결국 얼마 안가 매클렐런은 포토맥군 사령관 자리를 내어놓게 된다.
결국 매클렐런은 사령관에서 물라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는 보다 호전적인 성격의 번사이드(Ambrose Burnside)가 임명되었다. 매클렐런은 번사이드가 일리노이주에서 철도 회사의 재무이사로 있을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고, 이 때문에 번사이드는 지휘권 인수를 망설였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군을 맡지 않을 경우 개인적으로 싫어하던 후커(Joseph Hooker) 소장의 임명이 유력하다는 말을 듣고서야 사령관직을 수락하였다. 매클렐런이 포토맥군의 사령관직을 내려놓게 되자 포토맥군 내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포토맥군을 혼자 창설하다시피 하고 훈련시켜 정예군으로 만든 매클렐런은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치군인이고 야심이 많다 하지만 매클렐런이 군인의 본분까지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해임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고별사에서 “나를 따르듯이 새로이 임명된 번사이드 장군을 따라주기 바란다”고 강조하며 병사들의 술렁임을 진정시켰다.
링컨과 워싱턴 행정부는 1862년 11월 7일부로 포토맥군을 맡게 된 번사이드에게 남군을 빨리 추격할 것을 명하였고, 번사이드는 빠른 진격으로 남군 본대가 수도인 리치먼드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는 고립된 남군 병력을 에워싸 격파할 심산이었다. 이에 번사이드는 군을 이끌고 재빨리 래퍼핸녹(Rappahannock)강을 도강하여 남군의 퇴로를 막으려 하였다. 11월 15일에 군을 출발시킨 번사이드는 일주일 전 부임하자마자 부교의 수송을 명하였으니, 포토맥군이 래퍼핸녹강의 팰머스(Falmouth)에 당도할 때쯤이면 강을 건널 부교가 도착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11만의 대군이 팰머스에 도달하였을 때 도강에 필요하는 부교들은 그 근처에도 없었다. 일단 번사이드가 보급 책임자들에게 정확히 어디에서 도강할 것인지 언질을 하지 않은데다 많은 물자를 수송하는 데 따르는 절차상의 문제, 그리고 수송 책임자들의 늑장으로 부교들은 아직 포토맥강 상류 부근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부교가 없음에도 번사이드 휘하의 섬너는 강 건너 프레데릭스버그(Fredericksburg)의 남군 병력이 5백에 불과하니 부교 없이 일부 병력을 도강시켜 프레데릭스버그 앞의 고지를 점령하고 남군 병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직 강물이 높은 수준이 아니니 도강을 강행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번사이드는 의외로 많은 비가 내려 예전보다 강물이 불어난 데다 더 많은 비가 내릴 경우 도강한 부대가 고립될 수 있다며 섬너에게 그대로 대기할 것을 명하였다.
리는 북군이 강을 빨리 건널 것으로 예상하고, 리치먼드 바로 북쪽의 노스애너(North Anna) 강가에서 번사이드의 군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번사이드가 아직 강을 건너지 않은 것을 보고 프레데릭스버그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번사이드가 부교를 기다리는 사이 11월 23일에 롱스트리트의 군단, 11월 29일에는 잭슨의 부대가 프레데릭스버그에 도착하였고, 강을 건너 리치먼드를 기습한다는 북군의 계획은 물 건너간 일이 되고 말았다. 11월 25일에 부교 한 개가 도착하기는 했지만 북군 병력이 신속하게 도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부교가 도착할 때쯤 팰머스 건너편의 프레데릭스버그에는 75,000명의 남군 병력이 북군의 진격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제 북군은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다. 도강을 하자니 남군이 벼르고 있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도강 지점을 찾기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워싱턴 정부는 빠른 공격을 주문하고 있었다. 링컨은 번사이드가 다른 도강 지점을 찾으리라 예상하였지만, 번사이드는 부교가 완성된 후 남군이 기다리고 있는 정면으로 병력을 밀어넣었다.
프레데릭스버그를 일시 점령한 북군은 남군이 기다리고 있는 메리스-하이츠(Marye’s Heights) 고지로 진격하였으나 고지에서 이루어지는 남군의 사격에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면서도 북군은 돌파를 노리며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고지 앞의 지형은 늪과 얕은 골짜기로 이루어져서 북군의 진격로는 한정되어 있었다. 남군의 사격은 북군의 제한된 진격로에 집중되어 더 큰 피해를 불러왔다. 전투 사흘째인 12월 13일에 미드(George G. Meade)의 사단이 고지에 도달하여 남군의 우익을 형성한 부대간에 약 600미터 정도의 간격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일시적인 돌파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후속 부대를 이끌던 프랭클린 소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드의 돌파를 돕지 않았고 북군이 만들어낸 유일한 돌파구가 복구되면서 미드의 사단은 양면 공격을 당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고 황망히 후퇴하였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는 13,000명의 사상자를 낸 북군의 대패로 마감되었다.
이 패배로 인하여 번사이드는 군을 물리는 수밖에 없었다. 1863년 1월에는 겨울치고 의외로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고 도로는 진창으로 변하였다. 북군의 후퇴는 고행길이었고 포토맥군의 사기는 급락하였다. 그리고 포토맥군 내부에서는 번사이드의 자리를 노리는 지휘관들의 정치적인 암투까지 이어졌다. 번사이드는 자신이 포토맥군에 대한 장악력을 잃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링컨도 포토맥군 내의 이상 기류를 감지하였다. 번사이드는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고 링컨은 번사이드의 사직을 받아들였다. 1863년 1월 26일, 포토맥군의 새로운 수장으로 후커(Joseph Hooker) 소장이 임명되었다.
워싱턴 수뇌부는 남부 수도에 집착했던 이때까지의 전략 목표를 바꾸어 리의 북부 버지니아군을 격멸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포토맥군의 새로운 수장이 된 후커는 번사이드보다도 저돌적인데다 성미가 급하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인물이었다. 워싱턴 정부는 리의 군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보다 공격적인 인물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이 때문에 호전적인 후커를 포토맥군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후커는 호전적인 성품에 걸맞는 과감한 작전을 세웠다. 이전 번사이드가 전진기지로 삼았던 팰머스에 본부를 마련한 후, 일단 기병대를 버지니아 깊숙이 진격시켜 남군의 이목을 그곳을 돌린 다음, 리치먼드로 빨리 진격하는 척하여 리의 군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본대는 래퍼핸녹강을 크게 우회하여 북부 버지니아군의 후방으로 돌고, 팰머스에 남겨진 부대가 빠르게 도강하여 북부 버지니아군의 전방을 들이쳐 양면 공격으로 리의 군단을 격멸한다는 개념이었다. 후커는 인기에도 민감해서 병사들의 복지에 신경을 많이 쓴 편이었고 휴가 제도, 군 병원, 그리고 식료품 보급 체계를 개선하여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후커의 작전은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버지니아를 습격하라고 보낸 기병대는 남군 시설에 대한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수의 마필(馬匹)만 잃고 돌아왔다. 호전성으로 이름이 높아 ‘싸움꾼 조(Fighting Joe)’라는 별명을 가진 그였지만, 후커는 정작 리와 싸워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소극적으로 돌변했다. 5월 1일에 그의 정찰대가 남군 병력을 만나 소규모 전투를 벌였을 때 그는 진격속도를 높여서 남군의 후방에 침투하기보다는 챈슬러즈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군을 멈추고 남군을 기다렸다. 물론 리는 자신의 군보다 병력이 많고 편안하게 기다리고 있는 적과 정면으로 맛붙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군을 둘로 나누어 잭슨의 부대에 우회기동을 명하였다. 5월 2일 새벽에 멀리 우회한 잭슨의 군은 후커의 측면을 들이쳤다. 후커는 남군의 포격에 부상을 입고 기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깨어난 후 일시적으로 지휘권을 옮기라는 참모들의 건의를 묵살하여 결과적으로 전투의 원활한 수행을 방해하였다. 5월 3일에는 증원군이 오면서 군의 붕괴는 막았지만 포토맥군은 방어진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리의 군이 후커의 본대에 집중하는 사이, 북군의 조공을 맡았던 세지윅(John Sedgwick) 소장의 부대가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메리스하이츠를 지키고 있던 남군 병력을 격파하고 고지를 점령하였으나, 리의 본대에서 구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북군의 모처럼의 승전도 결국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17,000의 사상자를 낸 후커는 포토맥군의 철수를 명령한다. 북군의 남진은 실패하고 리는 다시 한번 북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남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챈슬러즈빌에서 남군에는 13,000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비율적으로는 오히려 패한 북군보다도 심한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사상자 중에는 후커의 군에 대한 기습 작전을 성공시킨 잭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잭슨은 혹시라도 후커가 반격을 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기습이 성공한 후 최전방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같은 남군 병사들로부터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북군으로 오인받았기 때문이다. 잭슨은 왼팔을 절단하고 치료받는 과정에서 폐렴에 걸려 5월 10일 사망하였다. 그러나 심각한 병력의 패해와 잭슨의 병사에도 불구하고, 리는 남군이 승리한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북군을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재차 북진을 결심하게 된다.
샤일로에서의 승리로 서부 테네시가 온전히 북부의 손에 들어왔고, 뉴올리언스까지 점령하면서 북부는 미시시피강을 거의 장악하였다. 남부는 미시시피주 빅스버그(Vicksburg) 인근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미시시피강 유역을 거의 상실하였다. 즉, 텍사스-아칸소와 남부연합의 동부 지역은 빅스버그라는 가느다란 끈으로 위태위태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던 빅스버그는 이미 요새화되어 있었고, 남북 전쟁 발발 이후 그 수비는 더욱 강화되어 남부 정부는 빅스버그를 두고 ‘남부연합의 지브롤터’라고 할 정도였다.
빅스버그를 둘러싼 북군 그랜트와 남군 펨버턴과 존스턴의 움직임. 미시시피강의 요새였던 빅스버그는 양군 모두에게 반드시 탈환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출처: (cc) Hal Jespersen at en.wikipedia>
북군 수뇌부도 빅스버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1862년 5월과 6월에 함대를 동원하여 빅스버그를 포격해보았으나 격퇴당한 적이 있다. 아울러 당시는 브래그(Braxton Bragg)가 켄터키에서 북진에 나서면서 미시시피주 북부에 또 다른 병력을 주둔시켰고, 빅스버그의 공략을 맡은 그랜트의 테네시군(Army of the Tennessee)은 남부 야전군을 상대하느라 빅스버그를 제대로 공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브래그가 켄터키에서 철수하고 그랜트가 코린트에서 프라이스와 밴도른의 남군을 대파하면서 빅스버그에 대한 공략이 다시 재개되었다. 1862년 12월에 테네시군 수뇌부는 셔먼의 15군단으로 빅스버그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도강 지점이 늪지대여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빅스버그의 남군 수비대를 이끌고 있던 것은 특이하게도 북부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존 펨버턴(John Pemberton) 중장이었다. 펨버턴은 빅스버그에 대한 북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빅스버그 주변을 참호로 둘러싸인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그랜트는 빅스버그 공격에 앞서 물이 많은 주변의 지형을 바꾸기 위해 운하를 뚫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으나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늪이 많은 강의 서쪽에서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그랜트는 1863년 5월 2일에 철갑선들의 호위하에 빅스버그 남쪽의 그랜드 걸프(Grand Gulf)에서 수만의 병력을 미시시피강의 동쪽으로 도강시켰다. 이때 펨버턴이 수비 대신 도강하는 병력을 정면으로 공격하였으면 북군이 매우 곤란할 수도 있었지만, 펨버턴은 빅스버그 인근을 떠나지 않았다. 북부 출신으로 남군의 고급장교가 된 펨버턴은 남군 내에서 극심한 시기의 대상이었다. 그랜트와 충돌했다가 패배할 경우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펨버턴은 중요한 순간에 보신(保身)을 택하고 말았다.
아울러 그랜트는 남군의 수비를 방해하기 위하여 기병으로 구성된 기습 부대를 남부 깊숙이 진격시킨다. 기병대를 지휘하게 된 그리어슨(Benjamin Grierson) 대령은 어린 시절 말 뒷발에 채이는 사고를 당하여 말이란 동물을 극도로 싫어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주어진 1700의 기병대를 의외로 잘 이끌었다. 그리어슨의 기병대는 미시시피와 루이지애나주 북부를 횡행하였고, 스트레이트(Abel Streight) 대령이 이끄는 또 다른 기습 부대는 남부 테네시군(Confederate Army of the Tennesee)의 보급선을 끊기 위한 임무를 띠고 앨라배마 쪽으로 향하였다. 스트레이트가 남군 네이선 포레스트(Nathan Forrest)의 기병대에 포로로 잡히면서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리어슨은 4월 17일에서 5월 2일까지 미시시피와 루이지애나를 마음껏 분탕질하며 남군을 괴롭혔다. 그리어슨의 기습대는 철로를 뜯어내고 물류 창고에 불을 지르고 열차 차량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량 보급소를 때려부수고, 교량을 파괴하고, 중요해 보이는 건물에는 무조건 불을 질렀다. 피해를 견디다 못한 남군 기병대가 열심히 그의 군대를 쫓았지만, 그리어슨의 1700 병력 중 피해는 전사 3명, 부상 7명, 그리고 실종 9명에 그쳤다. 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채 그리어슨의 기병대는 유유히 북군이 점령하고 있던 배턴루지(Baton Rouge)로 들어갔다. 펨버턴은 그리어슨의 기병대를 잡으려 기병과 보병을 파견하였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미시시피의 주도인 잭슨에서 펨버턴을 지원하기 위하여 주둔하고 있던 남군 존스턴(Joseph Johnston)의 미시시피군(Army of the Mississippi) 또한 그리어슨의 기습으로 섣불리 군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만약 존스턴의 미시시피군과 펨버턴의 수비군이 힘을 합쳤더라면 북군에 맞먹는 병력으로 맞설 수 있었으나, 북군의 매클렐런처럼 지나치게 신중한 것이 탈이었던 존스턴은 잭슨 인근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5월 12일에는 펨버턴이 직접 나서서 빅스버그의 고립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레이먼드(Raymond) 전투에서 패하였다. 그랜트는 이어 존스턴에 대한 적극적인 공략을 펼쳤고 존 맥퍼슨(John McPherson) 소장 휘하의 17군단을 잭슨으로 보냈다. 맥퍼슨이 잭슨 인근에 도착하였을 때 잭슨에는 남군 수비병 6천밖에 없었다. 남군의 존스턴 대장은 시가전으로 도시를 파괴하기보다는 물러나는 쪽을 택하였고 그레그(John Gregg) 준장에게 본군이 물러날 때까지 잭슨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5월 14일 존스턴의 부대는 잭슨에서 철수했고 그레그 준장 역시 이를 따랐다. 잭슨을 점령한 북군은 도시에 불을 지르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였다. 중요한 것은 잭슨에서 빅스버그로 가는 철로를 끊어놓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잭슨은 교통 요지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빅스버그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사실 존스턴이 며칠만 버텼으면 증원군을 받아 15000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너무도 빨리 철수를 명하는 바람에 빅스버그의 수비군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5월 16일 남군이 다시 잭슨에 들어왔을 때 잭슨은 불탄 건물로 가득하였다.
펨버턴은 여전히 존스턴의 군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재차 돌파를 시도하였지만, 5월 16일 챔피언힐(Champion Hill)에서 잭슨에서 철수한 그랜트의 테네시군 본대와 조우하였다. 펨버턴은 또 다시 패하고 다시 빅스버그를 둘러싼 참호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펨버턴의 뒤를 쫓는 그랜트의 군은 5월 18일 빅스버그 인근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바로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어 5월 22일에 방어선을 뚫기 위한 재차 돌격을 명하였지만 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남군의 참호선이 정면 돌격으로는 뚫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그랜트는 참호전에는 참호전으로 맞서기로 한다. 그랜트는 보방(Sebastien Vauban)의 참호 전술을 모방하여 평행 참호와 함께 지그재그로 참호망을 구축하였다. 양군의 참호망은 그 규모가 엄청났는데, 어떤 곳에서는 양군 참호 사이의 간격이 십 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양군은 두 달이 넘게 대치하면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남군은 비축한 포탄으로 북군을 포격하였지만, 북군은 압도적인 물량을 앞세워 남군을 압박하였다. 북군 포병대는 빅스버그에 매일 7만 발의, 그야말로 ‘포탄비’를 선물하였다. 육상에서 발사되는 7만 발의 포탄에다 강을 거슬러 올라온 북군 함선들에 의한 함포사격이 더해지면서 빅스버그는 지옥으로 변해갔다. 빅스버그의 시민들은 결국 살기 위해서 시가지를 떠나 빅스버그 주변 고지에 굴을 파고 생활하였다. 펨버턴의 남군과 빅스버그의 시민들은 어떻게든 북군의 공격을 버티어내려 하였지만 빅스버그는 완전히 고립된데다 보급까지 끊긴 상태였다. 5월이 가고 6월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고 6월 말에는 식량마저 떨어져 짐을 운반하기 위한 나귀와 심지어 쥐까지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6월 28일… 건강하고 살찐 나귀들을 골라 도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외에도 쥐를 잡기 위한 덫들이 설치되었다. 쥐고기의 소비가 워낙 많았기에 포위가 끝날 때 즈음에는 쥐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em></em>
6월 25일에 북군은 남군의 참호 밑으로 갱도를 파고 폭파시키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남군은 북군이 갱도를 파고 있음을 뒤늦게 알고, 북군의 갱도 밑으로 굴을 파서 붕괴시키려 하였지만 땅속에서 방향을 잃고 실패하였다. 다음날 새벽 3시에 북군은 남군의 참호선 일부를 폭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폭약이 넓게 폭발하지 않아 좁은 통로만이 생겼고 남군의 피해도 그리 크지 않았다. 남군은 재빨리 폭발지역 바로 뒤쪽에 참호를 재구축하였다. 그랜트는 어찌되었건 새로이 생긴 통로를 돌파구로 확보하려는 차원에서 24시간 동안 20개 여단을 교대로 투입하였지만, 좁은 통로를 지키기는 너무 어려웠고 폭파 작전이 성공한지 불과 하루만에 새로 생긴 돌파구는 다시 남군의 차지가 되었다. 7월 1일에 재차 폭파작전이 시도되었으나 폭파 지역으로 돌파하려 나서는 병사가 없어 작전은 또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폭파 작전의 실패에 상관없이 빅스버그의 수비군과 시민들은 더 이상 굶주림과 더위, 그리고 계속되는 포격을 견딜 수 없었다. 펨버턴은 구원군이 올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함을 깨닫고 7월 3일에 북군 진영으로 항복 사절을 보낸다. 그랜트는 도넬슨 요새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펨버턴은 명예로운 항복을 할 수 없으면 저항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에 그랜트는 남군 병사들이 총과 포를 버리고 모든 물자를 남겨두며 장교들은 권총만을 휴대하고 맨몸으로 북군 진영을 통과하여 철수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허락하였다.
빅스버그의 함락으로 남부는 둘로 갈리게 되었으며 북군은 미시시피강은 장악할 수 있었다. 미시시피강은 완벽히 북군의 수송로가 되었고, 텍사스와 아칸소는 남부로부터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 이로서 노장 스콧이 입안한 아나콘다 작전대로 북부는 남부의 숨통을 쥐게 되었다. 빅스버그는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장기적인 차원에서 남북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전투였다.
챈슬러즈빌 이후 리의 북부 버지니아군은 추가로 병력이 증강되어 군세가 7만 6천으로 늘어났다. 리가 북군의 번사이드와 후커를 연이어 격파하자 북군 수뇌부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리에 대한 공포감이 조성되었고, 남부에서 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남부의 연승과 리의 위광(威光)이 드높아짐에도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남부를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눈치만 보았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으로 인하여 남부는 ‘노예국가’라는 낙인이 찍혔고 유럽 국가들은 대놓고 노예국가를 지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극단적인 반전론자들을 제외하면, 다소 친남부적인 메릴랜드는 물론 북부 어디에서도 종전협상론에 대한 지지는 없었다.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얻고 북부를 황폐화시킨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리는 북부를 재차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뜻을 관철시켰다.
리는 북부 버지니아군 7만 6천을 진두지휘하며 다시 북진에 나섰다. 남군은 포토맥강을 건너 메릴랜드로 향했는데, 앤티덤 전투때와는 달리 남군에 호응하는 분위기가 거의 없었다. 메릴랜드를 통과하는 동안 그들을 도우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고, 남군은 그대로 펜실베이니아로 진군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는 북부의 곡창지대였고, 펜실베이니아의 농장들을 약탈하면 자신들의 보급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북부 주민들의 사기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이 리의 계산이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목표와 함께 펜실베이니아주로 진격한 또 다른 이유는 펜실베이니아 주도(主都)인 해리스버그(Harrisburg)를 통과하는 철로를 끊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펜실베이니아의 농산물과 서부에서의 물자가 유입되는 곳으로 이를 끊으면 동부에서 작전 중인 북군에게 적잖은 피해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급의 확보과 철도의 단절이라는 두 마리 새를 동시에 잡기 위하여 리는 정찰대와 약탈 부대들을 넓은 지역에 전개시켰다. 그러나 이 약탈 부대의 일부가 인근에서 남군의 행방을 찾고 있던 미드(George G. Meade)의 북군과 충돌하게 되면서 남북 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가 벌어지게 되었다.
약탈 부대의 보고를 통하여 북군이 가까운 곳에 와 있음을 확인한 리는 재빨리 흩어진 군을 집결시키고 보병대 일부를 급파하여 인근의 소도시인 게티즈버그를 장악하게 하였다. 주변의 도로가 모이는 곳인 동시에 게티즈버그에는 신발 공장이 위치해 있어 거의 맨발로 다니고 있던 남군들의 신발 보급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토맥강을 건너 메릴랜드를 거쳐 펜실베이니아로 북진한 남군(붉은색)의 경로와 포토맥군의 새로운 수장이 된 미드가 지휘하는 북군(파란색)의 경로. 양군의 게티즈버그에서 7월 1일부터 3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출처: (cc) Hlj at en.wikipedia>
리의 약탈 부대와 최초로 만난 북군 부대는 새로이 포토맥군의 수장이 된 미드가 내보낸 기병정찰대였다. 6월 28일에 후커가 사임한 후 사령관이 된 미드는 즉시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면서 뷰포드(John Buford) 휘하의 정찰대를 내보냈는데, 뷰포드의 정찰대가 7월 1일에 게티즈버그 인근에서 남군 부대 일부를 발견한 것이었다. 뷰포드는 힐(A.P. Hill)의 남군 부대와 2시간 동안 물러나지 않고 총격전을 벌였지만, 이웰(Richard Ewell)이 거느린 남군 후속 부대가 도착하면서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뷰포드는 물러나면서 게티즈버그의 남쪽에 있는 말발굽 모양의 고지(高地)인 세메터리릿지(Cemetery Ridge)에 부대를 포진시켰다.
리는 이웰에게 세메터리릿지를 점령할 것을 주문하였다. 미드가 남군의 위치를 파악한 이상 부대를 이끌고 진격해오고 있을 것이므로, 미드의 본군과 전투가 벌어지기 전 인근의 고지를 장악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리가 이웰에게 내린 명령문에는 ‘가능하면’ 고지를 점령하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웰은 세메터리릿지에 포진한 북군의 수비가 너무 단단하다고 여기고 즉각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남쪽에서 북군의 증원군이 도착하였고 세메터리릿지의 북군 방어진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만약 기회를 포착하는 데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 잭슨이 살아 있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으나, 앞서 말했듯이 잭슨은 첸슬러즈빌에서 전사한 뒤였다.
북군 병력이 세메터리릿지로 속속 도착함에 따라 북군은 세메터리릿지를 따라 길게 수비진을 구축하였다. 아울러 세메터리릿지의 왼쪽인 컬프스힐(Culp’s Hill)에도 방어선을 만들고 남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게티즈버그 북쪽에 있던 리는 북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만든 것을 보고 어찌해야 할지 고심하였다. 일단 리는 양면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시 공격이 아니고 적절히 시차를 두어 공격할 계획이었다. 롱스트리트의 군단으로 세메터리릿지의 북군 좌익을 먼저 치면 위기에 몰린 좌측을 구하기 위하여 미드가 컬프스힐에 있는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좌측을 보강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본군으로 컬프스힐을 공략하여 돌파한다는 것이었다.
롱스트리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고지에 자리를 잡은 적을 치는 대신 전군을 남쪽으로 돌릴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면 남군 병력 전체가 워싱턴 DC를 향하게 되고 결국 미드는 남쪽으로 가는 남군을 막기 위하여 고지에서 내려올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어찌보면 합리적인 건의였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리는 롱스트리트의 건의를 묵살하였다. 일설에는 전투 전의 경미한 심근경색 증세로 인해 리의 정신이 다소 혼미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은 리가 자신감을 넘어 자만에 빠졌다는 것이 가장 논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프레데릭스버그와 챈슬러즈빌에서 북군을 연파하였고, 병사들은 여러 전투를 통하여 경험을 쌓았으며, 많은 보급 물자를 노획하였기 때문에 군의 사기가 충천한 상태였다. 사기가 충천해 있는 데다 경험 많은 자신의 군이 (그가 생각했을 때) 사기도 떨어지고 겨우겨우 훈련을 마친 북군 풋내기들과 싸워서 질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롱스트리트는 리의 거부를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어찌되었건 명령은 명령, 롱스트리트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북군 좌측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클즈(Daniel Sickles)의 북군 병력이 세메터리릿지의 남쪽 끝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군의 진격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시클즈는 좌측끝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와 있었지만, 단순히 지키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의 마음대로 원래의 방어선에서 보다 앞으로 나온 것이다. 롱스트리트는 시클즈의 북군 병력 뒤에 있는 리틀 라운드 톱(Little Round Top)이라는 언덕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원래는 시클즈의 방어선 끝에 있어야 했지만 시클즈가 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함부로 이동시키는 바람에 남군에게 노출된 것이다. 만약 이를 점령할 수 있다면 북군의 진지를 완전히 우회함은 물론 야포를 올려보내 노출된 북군 진지를 뒤에서 포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롱스트리트의 명령은 우선 세메터리릿지의 북군을 격파하라는 것이었다. 롱스트리트의 공격은 시클즈의 부대에 집중되었고 시클즈의 부대는 패퇴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미드는 시클즈의 부대가 위치를 이탈해 있음을 알아채고 재빨리 방어선을 보강할 방법을 찾았고, 군 공병감인 워런(Gouverneur K. Warren)을 보냈다. 워런은 주변에 있던 사이크스(George Sykes) 소장의 5군단에서 한 부대를 차출하여 리틀 라운드 톱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이크스에게 보낸 전령이 돌아오기 전에 워런은 마침 인근에 있던 스트롱(Vincent Strong) 대령의 여단을 만났고, 스트롱은 자신이 나사서 휘하 4개 연대를 리틀 라운드 톱에 올려보내달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시클즈의 부대가 한창 남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리틀 라운드 톱에는 미시간 제16연대, 펜실베이니아 제83연대, 뉴욕 제44연대, 그리고 체임벌린(Joshua Chamberlaine)의 메인 제20연대(20th Maine Regiment)가 올라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로써 기회가 되면 리틀 라운드 톱을 차지하려고 했던 남군은 ‘닭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1 치열한 격전지였던 리틀 라운드 톱. 남군 부대가 수차례 돌격해와 위기를 맞았으나 결국 북군의 승리로 마감되면서 롱스트리트의 우회기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2 리틀 라운드 톱에서 메인 제20연대 병사들에게 ‘착검 돌격’을 명함으로써 북군을 위기에서 구한 체임벌린(Joshua Chamberlain). 남북 전쟁 이후 메인주에 있는 보든칼리지(Bowdoin College)의 총장을 역임하고 메인주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
이를 본 후드(John Bell Hood) 소장 휘하 로(Evander law) 준장의 남군 부대가 리틀 라운드 톱에 대한 전면 공격을 펼쳤으나 수차례의 돌격이 모두 격퇴되었다. 그러나 리틀 라운드 톱을 지키는 북군의 병력이 부족하였던 탓에 7월 2일 저녁에 위기를 맞았다. 참호선 왼쪽 끝을 지키고 있던 메인 20연대는 남군의 돌격을 막아내느라 사상자가 늘어 싸울 만한 병력이 부족해졌고, 설상가상으로 탄약도 모두 떨어진 상태였다. 이에 연대장 체임벌린은 남군이 돌격해오기 전에 연대 병력을 일렬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착검!’을 명한 다음, 진격해오는 남군에게 돌진을 명하였다. 공격 시작 전, 체임벌린은 자신의 연대 좌측을 직각으로 방향을 바꾸어 포진시켰다. 체임벌린의 명령에 따라 20연대는 90도 직각을 이루어 남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돌격해오고 있던 남군 병력은 마치 닫히는 문 안에 갇힌 형국이 되었다. 많은 병력이 포로가 되고 남군의 돌격은 멈추었다. 리틀 라운드 톱의 전투는 다음날 5군단 소속 제3사단이 구원에 나서면서 북군의 승리로 마감되고 롱스트리트의 우회기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더불어 컬프스힐에 대한 남군 본대의 공격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정면과 측면 공격에 모두 실패한 리는 딜레마에 빠졌다. 물러나자니 미드가 이끄는 포토맥군의 추격이 이어질 것이고, 그렇다고 공격을 하기에는 북군의 수비가 견고해 보였다. 롱스트리트는 북군이 비록 좌측을 강화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약하니 북군의 좌측을 우회할 것을 재차 건의하였지만, 리는 다시 롱스트리트의 건의를 묵살하고 북군 중앙에 대한 돌격을 결정한다. 이틀간 계속된 전투로 북군 본대 역시 약화되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마침 증원군 1만이 도착하면서 리는 증원 병력으로 북군의 중앙을 공격하여 돌파한 뒤, 돌파구로 예비 병력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7월 3일 오후 1시경 남군 포병대가 북군 중앙에 포격을 개시하였고, 이 포격은 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북군 포병들은 잠시 반격을 하고 포격을 그쳤다. 그리고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남군의 포격을 바라만 보았다. 남군은 자신들의 포격이 북군 포병대를 궤멸시켰다고 생각하고 피켓(George Pickett) 소장의 병력 1만에다 힐 소장의 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15,000의 돌격대를 만들었다.
오후 3시경,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이라고 알려진 돌격 작전이 시작되었다. 시작 지점으로부터 북군의 진지까지는 약 1km 정도였고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개활지였다. ‘돌격’의 시작은 비교적 조용했고, 처음 20분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군이 개활지의 중간쯤에 도착하자 북군 포병대의 대포 80문이 일제히 발포를 시작하였다. 남군의 포격이 개시되자 곧 돌격이 이어질 것임을 눈치챈 포병대장이 발포를 멈추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제히 포문을 연 것이다. 동료들의 팔다리가 떨어나가고 머리와 옷에 불이 붙어 불덩어리가 되는 지옥 속에서도 피켓의 군단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북군 진지로부터 약 200야드 지점에 이르자 언덕 위의 북군 보병들도 사격을 시작하였다.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돌격대의 병력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고 일부는 북군이 있던 방어선에 난입하여 육박전이 벌어졌다. 만약 남군이 제 2파를 보냈다면 돌파가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남군에게는 병력의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미드는 전날 저녁에 1만의 증원군까지 받은 후였다. 남아 있는 돌격대로는 북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여력이 없었다. 남군은 올라온 길로 다시 후퇴를 시작하였고, 피켓의 돌격은 결국 7,500의 사상자를 내고 실패로 돌아갔다.
남군은 다음날 쏟아지는 빗속에서 버지니아로 긴 퇴각을 시작하였다. 이전의 북군 사령관들이 그러하였듯이 미드는 리의 남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다. 이때 공교롭게도 쏟아지는 비로 포토맥강이 갑자기 불어나 남군은 강가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는데, 만약 미드가 전군을 몰아 추격하였더라면 포토맥 강변에 고립된 리의 군을 궤멸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드 역시 갑작스런 소극성으로 그럴 기회를 놓쳤다. 그렇지만 자명한 사실은, 남군이 게티즈버그에서 패하였고 더 이상 북진을 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티즈버그는 남북 전쟁에서 남군의 최고점이었다. 게티즈버그 이후 남군과 남부의 기나긴 2년 간의 몰락이 시작된다.
북군이 게티즈버그에서 거둔 승리는 흔히 남북 전쟁의 분수령으로 간주된다. 리의 2차 북진은 프레데릭스버그와 챈슬러즈빌에서 북군을 격파한 후 그 승세를 타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리는 북진을 위하여 7만 2천이라는, 그야말로 없는 병력을 긁어모아 병사들을 동원했는데, 게티즈버그에서 무려 2만 3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물론 낙오병이나 질병으로 전투 불능이 된 병력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이다. 다행히 북군 사령관인 미드(George G. Meade)가 퇴각하는 남군을 추격하는 데 소극적이어서 남군은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남군은 본격적으로 병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물론 북군 역시 2만 3천의 사상자를 내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남부보다 인구가 많고 이민자가 지속적으로 유입되던 북부에는 병력 자원이 아직 충분한 상태였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승세를 탄 것이기는 해도, 리의 북진은 전체적인 국면으로 보았을 때 북군을 무너뜨리려는 적극적인 공세라기보다는, 실질적으로 포위당한 상태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남부의 몸부림이었다. 이미 북부는 우수한 해군력으로 남부를 에워싼 상태였다.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의 해안 곳곳에는 북군의 거점이 있었다. 북군은 뉴올리언스를 점령하고 미시시피강의 마지막 거점인 빅스버그를 점령하기 직전이었다. 또한 북군은 켄터키와 테네시를 장악하고 남부의 중심부인 조지아와 애틀랜타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세한 병력 자원을 바탕으로 남부 여러 곳에서 남군을 위협할 수 있었던 북군에 맞서, 리는 없는 병력을 집중시켜 큰 승리를 노려야 했다. 결국 모든 것이 남부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리가 노린 것은 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끌어들이고 워싱턴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낼 ‘한판 싸움’에서의 승리였다. 게티즈버그에서의 패배는 리가 노린 회심의 일격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싸움 이후 남부는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북부의 인구와 물량에 확실히 밀리게 된다.
계속해서 전시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부 또한 내부 사정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링컨은 1863년 3월 13일에 징집령에 서명하였는데, 이 법안의 골자는 할당된 지원병 숫자(Quota)를 충당하지 못하는 주(州)에서 징집으로 모자라는 숫자를 채우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계속해서 사람들을 군대로 끌어가면서도 확실한 승리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1863년 6월에 오하이오주의 홈스 카운티(Holmes County)에서 징집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봉기하였다. 이들은 야포를 탈취하여 어설프게 요새까지 만들고 저항하였으나, 주지사가 보낸 연방군 420명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어 1863년 7월에는 뉴욕 맨해튼에서 징집령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물론 그 원인은 훨씬 더 복잡했지만, 돈이 있는 자들이 300달러를 내고 대리인들을 세워 징집을 피할 수 있는 조항이 문제가 되었다. 돈 있는 자들은 대리인을 세우거나 죽을 위험이 적은 해군, 또는 비전투 지역 주둔 부대에 지원하는 등의 방법으로 전장에 나가는 것을 회피하였다. 이 때문에 하층민들과 이민자들 사이에서 ‘가난한 자들만 전쟁에 나가 죽는다’는 분위기가 만연했고, 1863년 7월 13일 맨해튼 47가 근처에 모여 있는 ‘의용소방대’를 포함한 500명의 군중이 징병 사무소를 습격하면서 폭동이 시작되었다. 이미 시작부터 경찰의 대응 수준을 넘어선 규모였고 설상가상으로 근처에 군 병력이 없어 폭동은 맨해튼 전체로 번졌다.
연방 정부는 게티즈버그 이후 후퇴하고 있던 남군을 추격하기 위한 병력의 일부를 차출하여 뉴욕에 투입하였다. 수천 명의 연방군 병력이 맨해튼에 도착하여 폭동을 일으킨 군중에 발포하고, 총검으로 격투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뉴욕 포구에 정박해 있던 연방해군 함선들 역시 동원되어 군중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진압작전 끝에 3일 후인 7월 16일에 겨우 폭동이 진정되었다(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2002년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는 바로 이 드래프트 폭동(draft riot)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링컨 대통령은 1863년 9월 15일에 의회의 승인을 얻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유사시 ‘인신보호권(Habeas Corpus)’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인신보호권이란 근대 민주정의 기본적인 권리로서, 정부 권력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시민을 체포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권리조차 유사시 철폐될 수 있다는 것은 워싱턴의 연방정부가 총력전으로 돌입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리가 게티즈버그에서 패하고 빅스버그가 그랜트에게 함락되고 있을 때, 서부에서는 또 다른 북군 장군이 승전보를 올리고 있었다. 브래그의 테네시군(Confederate Army of Tennessee)은 북군 로즈크랜스(William Rosecrans) 소장의 컴벌랜드군에 밀리면서 테네시주를 북군에 온전히 내준 상태였다. 당시 테네시주 머프리스버러(Murfreesboro)에 있던 북군 컴벌랜드군 사령관 로즈크랜스는 총사령관 할렉(Halleck)의 거듭되는 공격 독촉과 진격하지 않으면 병력을 빼서 그랜트에게 주겠다는 위협에도 아랑곳 않고 6월 내내 진격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1863년 6월 24일 마침내 로즈크랜스는 테네시 동부를 향하여 진격을 시작하였다. 브래그의 테네시군은 북군의 진격로 앞에 전선을 구축하였으나 로즈크랜스의 군은 재빠른 우회기동을 통하여 전선을 돌파하였다. 브래그의 지휘 능력을 의심한 일부 남군 장성들이 전선의 병력을 성급히 철수시킨 탓에 브래그는 전선을 포기하고 테네시주 털러호마(Tullahoma)로 물러났다. 브래그는 이곳에서 전선을 재정비하려 하였으나 여전히 그가 미덥지 못했던 부하 장성들은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며 브래그에 반발하였다. 부하 장성들과 싸우다가 군을 분열시킬 것을 두려워 한 브래그는 털러호마도 포기하고 채터누가(Chattanooga)로 물러났다.
로즈크랜스의 철저한 준비성 덕분에 최소한의 병력 소모로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워싱턴 정부의 반응은 시큰둥하였다. 승전보에 급급한 정부의 관점에서는 로즈크랜스가 늑장을 부리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전쟁상(戰爭相, Secretary of War) 스탠턴은 “리의 군은 궤멸되었고 그랜트 역시 큰 승리를 거두었소. 당신과 당신의 위대한 군대는 이 반란에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목전에 두고 있소. 이 기회를 잡지 않겠다는 말이오?”라는 전보를 보내며 로즈크랜스를 힐난하였다. 큰 공을 세웠음에도 치하는커녕 비난을 받자 로즈크랜스는 발끈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우리의 위대한 병사들은 테네시 중부에서 반란군을 깨끗이 몰아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병사들을 대신해서 말씀드리자면 승전보가 (병사들의) 피로 쓰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큰 승리를 무시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1 전쟁상 에드윈 스탠턴(Edwin M. Stanton). 로즈크랜스의 철저한 준비를 늑장이라 생각해 그를 힐난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2 월리엄 로즈크랜스(William Rosecrans) 소장. 털러호마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지만 순간의 실수로 치카마우가에서 대패한다. |
1864년의 대선을 위하여 계속되는 승리가 필요했던 연방정부는 계속해서 진격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길도 없는 데다 험한 산들과 깊은 강이 번갈아 나오는 지형인 동부 테네시를 가로질러 진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즈크랜스는 정부의 독촉을 적당히 무시하면서 보급선을 확보하고 수송 역량을 강화한 후 8월 16일에야 다시 진격을 시작하였다. 일단 진격을 시작하자 작전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일단 병력을 여러 방면으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진격시켰다. 그리고 우선 와일더 (John T. Wilder) 대령 휘하 1개 여단을 채터누가 방면으로 급파하였다.
급속 행군으로 8월 21일에 채터누가 인근에 도착한 와일더의 여단은 동북쪽 방면에서 시내를 포격하였다. 여단이 보유한 포의 수가 얼마 안 되어 포격은 심하지 않았지만 느닷없이 날아오는 포탄에 주민들은 혼란에 빠졌고, 강 포구에 있던 연락선 두 척이 침몰하였다. 동북쪽은 채터누가로 들어오는 도로가 있는 곳이라 브래그는 동북에서 북군의 공격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병력을 재배치하였다. 그러나 북군의 규모가 얼마인지 확실치 않아 공격을 못하고 있던 중, 9월 8일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로즈크랜스의 본군이 채터누가 서남쪽 외곽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와일더의 양동부대를 이용한 성동격서(聲東擊西)가 성공한 것이다. 양면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 한 브래그는 재빨리 군을 채터누가에서 빼내어 조지아주로 철수시켰고, 이로써 로즈크랜스의 군은 채터누가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하였다.
빅스버그와 함께 채터누가의 함락 소식은 수세에 몰린 남부의 관점에서는 또 한 번의 중대한 타격이었다. 중부와 동부를 잇는 교통의 요지임은 물론, 채터누가는 남부에서 몇 안 되는 코크스(coke)와 철강의 생산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남부의 무기 생산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북군이 남부의 경제적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조지아주의 문턱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동부에서는 리(Lee)의 작전 능력으로 북군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서부에서는 남부가 미주리, 아칸소, 켄터키, 테네시 등을 북군에 내주면서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테네시주를 전부 내주고 조지아주를 위협받게 된 남부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반격을 시도해야만 했다. 남부 정부는 브래그(Braxton Bragg)가 맡고 있던 테네시 군관구(Department of Tennessee)와 버크너(Simon Buckner)의 동부 테네시 군관구(Dept. of East Tennessee)를 합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버크너 휘하의 군사들은 모두 브래그의 군에 소속되었고, 여기에 동부전선의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 휘하 2개 사단이 더해지면서 7만이 넘는 대군이 만들어졌다. 남부 정부는 새로이 증원된 병력으로 브래그가 로즈크랜스의 북군을 공격하여 테네시를 되찾을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브래그는 공세에 요구되는 보급과 수송 문제를 들어 전쟁부(War Department)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어차피 교통과 수송이 어려운 지역이니 차라리 굳건히 방어선을 구축하고, 오히려 북군의 보급선을 늘어뜨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채터누가를 함락시킨 로즈크랜스는 그의 군을 합친 다음 조지아주로 진공을 개시한다. 브래그의 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본군을 거느리고 채터누가에 있는 동안 우측에 있던 토머스(George H. Thomas)의 군으로 피전-마운틴(Pigeon Mountain)에 있던 브래그 군의 좌측을 공격하게 하였다. 브래그는 뒤늦게 북군이 나뉘었다는 것을 알고 휘하 하인드먼 (Thomas Hindman)과 힐의 부대로 토머스의 군을 상대하게 하였다. 북군과 남군은 여러군데서 소규모 전투를 벌였지만 승부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소규모 전투를 통하여 북군이 분산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된 브래그는 채터누가에 있는 로즈크랜스의 본군에 대한 공격에 나선다. 전투는 채터누가 5km앞쪽 치카마우가(Chickamauga) 강에서 벌어졌다. 채터누가 인근까지 진격한 브래그의 군은 9월 19일 로즈크랜스 군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음 날에도 좌우측 공격에 모두 실패한 브래그는 롱스트리트로 하여금 8개 여단의 병력으로 북군의 중앙을 공격하게 하였다. 바로 이때, 로즈크랜스는 일부 정찰병들로부터 전선에 공백이 생겼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전선 좌측에 틈이 벌어졌으니 이를 메꾸어야 된다고 생각한 로즈크랜스는 일부 병력을 좌측으로 이동시켰다. 중앙의 병력을 맡고 있던 북군 지휘관 우드(Thomas Wood)는 로즈크랜스의 명령이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좌측에 있던 브래넌(John Brennan)의 뒤로 이동한다.
그런데, 사실 좌측의 공백은 없었다. 부정확한 정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로즈크랜스는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부정확한 정보에 대한 재확인 없이 그대로 일선 지휘관에게 하달한 것이다. 오히려 우드의 병력이 이동하면서 북군의 중앙에 공백이 생겼고, 때마침 이 방면으로 이동하던 롱스트리트 부대가 이 공백을 그대로 들이쳤다. 북군 중앙 부대들은 이 공격에 그대로 허물어지고 북군은 일순간 크나큰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다행히 로즈크랜스의 본대가 황망히 후퇴하는 동안 토머스가 나머지 병력을 수습하여 북군 전선 좌측에 있던 말발굽 모양의 고지인 호스슈-릿지에 방어선을 재구축한다. 남군은 토머스의 방어선을 뚫으려고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하고, 이 틈을 타 로즈크랜스의 본대는 무사히 채터누가로 후퇴할 수 있었다(이 전투로 토머스는 ‘치카마우가의 큰 바위(The Rock of Chickamauga)’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본대가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준 토머스의 군 역시 호스슈-릿지에서 철수하여 채터누가 인근에 방어선을 재구축하였다. 남군은 서부전선에서 얼마 안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채터누가 근처의 고지를 점령하면서 채터누가를 포위하게 된다. 브래그는 로즈크랜스에게 내준 채터누가를 재점령하고 테네시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브래그의 일시적인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워싱턴 전쟁부는 로즈크랜스의 패배 이후 빠르게 대응하여 동부에서 후커 소장 휘하 15,000명을 테네시로 급파하였다. 그리고는 그랜트에게 연락을 취하여 셔먼 휘하 2만을 채터누가 방면으로 보냈다. 9월 29일, 전쟁부는 그랜트에게 직접 채터누가 방면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전쟁부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재빠른 연락을 취하였지만 북군에게 있어 채터누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패배를 당한 로즈크랜스가 공황 상태에 빠지면서 두문불출하였고, 이 틈을 탄 남군이 로즈크랜스의 컴벌랜드군의 주요 보급로인 테네시강을 봉쇄하였던 것이다. 포위된 채터누가의 북군은 보급로마저 끊겨 식량과 탄약이 떨어질 위기에 처하였다.
그랜트는 10월 26일 보급로 재확보를 위한 ‘크래커 라인 작전(Cracker Line Operation)’을 개시한다. 결국 치카마우가 전투 후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북군 구원대가 브라운즈-페리(Brown’s Ferry)의 전투에서 남군 봉쇄 부대를 격퇴하면서 다시 북군의 보급로가 열렸다. 이후 와우햇치(Wauhatchie)에서 후커가 반격을 시도하는 남군을 재차 격퇴하면서 남군의 봉쇄는 완전히 풀렸다.
보급로가 끊겨 봉쇄되었던 북군은 그랜트의 보급로 재확보 작전이 승리함에 따라 남군의 포위에서 벗어났다. 이후 그랜트는 채터누가 남쪽의 룩 아웃 마운틴과 미셔너리 등선에 포진하고 있던 남군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한다.
남군의 봉쇄를 돌파하고 채터누가 방면의 작전권을 인수한 그랜트는 셔먼이 2만 병력을 거느리고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11월 중순경 셔먼이 도착하자 본격적인 반격을 계획한다. 그러나 남군은 채터누가 남쪽의 룩-아웃 산맥(Lookout Mountains)과 미셔너리 등선(Missionary Ridge) 등의 고지에 포진하고 있어 공략이 쉽지 않았다. 후커는 “싸움꾼 조(Fighting Joe)”라는 별명에 걸맞게 공격적인 계획을 세웠고, 룩-아웃 산맥 끝머리 강변 저지대에서 돌파에 성공함으로써 산 정상에 있던 남군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한편 다음 날 미셔너리 고지의 승패는 불분명한 명령 전달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중앙부를 막고 있던 남군은 북군이 공격하면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일부는 전세가 어려워지면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격이 시작되자 토머스의 북군은 고지 아래까지만 확보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치카마우가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며 고지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중앙을 지키고 있던 일부 남군 부대가 북군의 수적 우위에 눌려 후퇴하자 다른 부대들도 이를 따라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북군은 남군 포대의 쏟아지는 포격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을 막으려는 일부 남군 병력을 격파하고 고지를 점령하였다.
명령이 없었음에도 용기와 혈기를 앞세워 미셔너리 등선(Missionary Ridge)의 남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는 북군. 결국 고지를 점령하고 전투에서 승리한 북군은 조지아주로 진격할 수 있었다.
룩-아웃 마운틴에 이어 지형상 최적의 방어 위치인 미셔너리 등선까지 빼앗긴 남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브래그는 다시 조지아로 물러나야 했다. 북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북군은 다시 조지아주에 대한 진공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셔먼에 의한 초토화 작전의 시발점이 된다.
1864년이 시작되면서 북군은 루이지애나주를 모두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레드-리버 작전(Red River Campaign)이라 명명된 원정을 개시한다. 이미 점령한 아칸소와 뉴올리언스에 이어 미시시피강 하류를 확보함으로써 전함들의 원활한 항행을 보장하려 한 것이다. 북군의 초토화 작전은 동부에서 시작되었다. 북군은 이 작전을 위하여 뱅크스(Nathaniel Banks) 휘하 3만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에 맞서는 남군의 테일러(Richard Taylor)에게는 1만의 병력밖에 없어 북군의 완승이 예상되었으나, 의외로 뱅크스는 테일러의 기동전술에 말려들어 맨스필드(Mansfield)와 플레전트-힐(Pleasant Hill) 등지에서 대패하고 북군의 루이지애나 점령전은 실패로 끝난다. 이로 인하여 남부의 마지막 대항(大港)이라 할 수 있는 앨라배마 모빌(Mobile)에 대한 공격이 지연되어 남부는 약간이나마 해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승리에도 남군에 불리한 전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1864년 3월, 서부에서의 승리를 이끈 그랜트가 드디어 동부로 진출하여 동부의 주력군인 포토맥군을 맡게 되었다. 아직도 공식적인 수장은 미드(George G. Meade)였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그랜트가 하였다. 이와 더불어 전쟁 장관 스탠턴은 여러 방면에서 남부를 동시에 공략한다는 대전략을 수립하였다. 이전에는 각 전선의 병력이 따로 움직였다면 이제는 북군의 움직임 전체를 총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전에 의거하여 북군은 ① 남부 수도 리치먼드 직공 ② 남군 주요 보급지인 셰넌도어 밸리 공략 ③웨스트 버지니아를 통한 우회기동 ④ 조지아 방면 공격 그리고 ⑤ 엘러배마 모빌 항(港)에 대한 공격을 동시에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맞선 남부의 공식적인 작전은 ‘버티기’였다. 물자와 인력이 부족한 남부가 북부에 공세를 취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남부의 유일한 희망은 북부의 물량공세에 맞서 완강하게 버텨 북군 측의 손실을 노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혹시라도 전쟁에 지친 북부의 주민들이 18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혹시라도 민주당 평화파(peace Democrat)를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민주당 평화파라면 협상이 어느 정도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군사적인 승리가 아니라 ‘죽어라 버티기’를 통한 기사회생에 목을 매달고 있을 정도로 남부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랜트의 포토맥군은 신병 모집과 징집을 거쳐 다시 10만이 넘는 대군이 되어 있었다. 이에 비하여 리의 병력은 6만 남짓, 그랜트의 주공(主攻)을 막기에도 벅찬 병력이었고, 북군의 다방면 공세에 맞서 병력을 나누어줄 여유란 전혀 없었다. 그랜트는 목표가 리치먼드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고, 기발한 작전이라던가 기묘한 우회기동 같은 것 없이 우직한 정공법을 택하였다.
1864년 5월 4일, 동부전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오버랜드 작전(Overland Campaign)이 시작되었다. 그랜트는 버지니아주 스포칠베이니아 카운티(Spotsylvania County)를 뒤덮고 있는 울창한 숲 지대를 통과하여 리치먼드로 향하려고 하였다. 그랜트는 빠른 진군으로 남군이 도착하기 전에 숲 지대를 빠져나갈 심산이었다. 반면 리는 북군이 개활지로 나오게 되면 자신이 불리하리라 생각하여 일부러 숲 지대에서의 충돌을 유도하였다. 남군은 북군을 가로막는 데 성공하였고 리의 계산은 잘 들어맞았다.
버지니아주 스포칠베이니아 인근의 숲 지대인 윌더니스(The Wilderness)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북군과 남군. 전투는 많은 사상자를 낸 채 무승부로 끝났지만, 그랜트는 계속해서 리치먼드 방향으로 진격한다.
5월 5일, 북군 워런(Gouverneur K. Warren)의 5군단 병력이 이웰(Richard Ewell)의 남군과 격돌하고, 조금 떨어진 도로에서는 게티(George Getty)의 북군 6군단과 핸콕(William Hancock)의 북군 2군단이 남군 힐(A.P. Hill)의 부대와 충돌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무렵 북군은 7만 대 4만으로 병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많은 병력이 울창한 숲 지대에서 기동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숲에서는 피아(彼我)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고, 오인 사격도 잦았으며, 포격에 의하여 잡목에 불이 붙으면서 숨어 있던 병사들이 타죽는 등 한 마디로 지저분한 난전(亂戰)이 되었다. 5일의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사상자(북군 1만 7000, 남군 1만 2000)만을 남긴 채 승패 없이 무승부로 끝났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재개된 전투에서 북군 핸콕 군단의 빠른 공격으로 인하여 남군 우익이 무너질 뻔했지만, 때마침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의 부대가 도착하면서 북군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었다. 이 와중에서 롱스트리트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고, 전선이 안정되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다. 그랜트는 5월 7일에 전투를 중지하고 일부 견제 병력만 남긴 채 병력을 남동쪽으로 이동시킨다. 북군이 숲 지대에서 기습을 당하기는 했지만, 반대로 숲이 남군의 기동 역시 방해하기 때문에 남군보다 빨리 리치먼드 쪽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전의 북군 지휘관들이 병력을 북쪽으로 철수시킨 것과 달리 오히려 적진 더욱 깊숙이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리는 병력을 옮겨 스포칠베이니아 인근의 고지인 로렐-힐(Laurel Hill)에 군을 포진시키고 북군의 진로를 가로막는다. 남군은 로렐-힐 인근에 6km가 넘는 참호선을 구축했다. 이 때문에 북군은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스포칠베이니아가 남부 수도 리치먼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만큼 피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랜트는 5월 8일에 워런 소장과 세지윅(John Sedgwick) 소장의 병력으로 남군 참호선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한다. 그러나 공격이 실패하자 그랜트는 병력을 재정비한 후 5월 10일에 재차 공격을 명한다. 이번에는 이틀 전 전투의 실패를 교훈 삼아 남군의 참호선 중 앞으로 반원을 이루면서 튀어나와 ‘뮬 슈(Mule Shoe, 나귀 발굽)’라고 불린 부분에 병력을 집중하였다. 남군 참호선은 이번에도 북군의 공격을 버티어냈지만, 뮬-슈의 남군 병력은 북군의 공격에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5월 12일, 그랜트는 뮬-슈 방면에 핸콕의 병력을 보강하여 공격을 재개하였다. 일시적으로 참호선이 뚫리면서 공격이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남군 지휘부가 병력을 수습하여 반격하면서 북군의 돌파구가 다시 메워졌다. 뮬-슈의 서쪽 측면에서는 24시간 내내 백병전을 포함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워런과 번사이드(Ambrose Burnside)에 의한 조공(助攻)도 이루어졌으나 전선 돌파에 실패하였다.
5월 18일, 그랜트가 마지막으로 최종 공격에 나섰지만 남군의 저지선은 뚫리지 않았다. 5월 19일에는 남군의 반격이 있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병력만 낭비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그랜트는 이내 계획을 수정하여 스포칠베이니아 공격을 취소하고 대신 남동쪽으로 우회하여 5월 21일에 리의 측면을 공략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랜트는 남군이 다음 방어를 하기 위해 최적의 위치인 노스애너(North Anna) 강가로 향할 것이라 여기고 군을 빠르게 이동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군대가 노스애너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리의 군사들이 강 건너편을 장악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남군이 아직 방어진지를 구축한 상태가 아니었던 까닭에 북군은 기습을 결정하였고, 워런과 핸콕의 부대가 각각 도강에 성공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남군은 북군 교두보를 밀어내려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남군은 이에 약간 뒤로 물러났고, 리는 역(逆) ‘V’자형의 참호를 구축하게 하였다. 북군이 공격할 때 자연스럽게 북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효과적이어서 남군은 5월 24일 감행된 북군의 정면공격을 격퇴하였다. 북군 준장 레들리(James Ledlie)의 부대는 역 V자 참호의 끝부분을 공격해보았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남군의 원래 계획은 북군을 격퇴시킨 다음 즉각 반격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군의 공격이 끝났을 때 마침 사령관 리는 장염으로 인한 복통에 시달리는 중이었고, 지휘관을 잃은 남군은 반격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치열했던 노스애너의 전투 역시 무승부로 끝났다. 그랜트는 지친 포토맥군에게 다시 남동쪽으로 이동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베데스다(bethesda)에서 다시 전투를 벌이지만 이 전투 역시 무승부로 끝난다.
2주 동안 치열하게 벌어졌던 콜드 하버(Cold Harbor)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가져온 채 무승부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남군의 참호선을 번번이 뚫지 못하고 1만 3천의 사상자를 냈고, 리치먼드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양군이 다시 격돌한 것은 콜드-하버(Cold Harbor) 전투였다. 1864년 6월 초에 약 2주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그랜트의 군은 남군의 참호선을 돌파하고 리치먼드로 향하려 했지만, 강고한 참호선에 대한 돌격은 무의미한 자살행위라는 사실만 철저히 깨달아야 했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1만 3천의 사상자를 내었고, 리치먼드로 향하는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랜트는 굴하지 않고 군의 방향을 다시 틀어 리치먼드 남쪽의 피터스버그(Petersburg)로 향한다. 피터스버그는 리치먼드로 통하는 유일한 항구이자 보급 통로였다. 만약 북군이 피터스버그를 점령하게 되면 리치먼드를 고사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남북 전쟁의 끝머리를 장식하는 피터스버그의 공방전이 벌어지게 된다.
남부는 피터스버그와 리치먼드에 대한 압박을 풀고자 하였고, 늘 그랬듯이 기동력 좋은 부대를 북쪽으로 보내 약탈ㆍ기습하는 방법으로 북군을 괴롭혔다. 그랜트가 오버랜드 작전(Overland Campaign)을 시작한 후 리의 북부 버지니아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남군 수뇌부는 얼리(Jubal Early) 중장 휘하의 부대를 시켜 셰넌도어 벨리를 통하여 펜실베이니아를 기습하게 하였다. 얼리의 기습 부대는 펜실베이니아에 나타나 식량을 약탈하고 농장을 불태우면서 워싱턴 정부의 신경을 건드렸다.
남군 기습대에 의한 군사적 타격은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기습당한 지역의 불안감이 고조되었고, 1864년의 대선을 앞두고 있던 워싱턴 정부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에 남군의 기습을 막는 임무에 셰넌도어군(Army of the Shenandoah)이 투입되었고, 피터스버그 공방전에 참여하고 있던 맹장 셰리든(Philip Sheridan)이 셰넌도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셰리든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우선 셰넌도어를 통하여 북부를 공격하고 있는 얼리의 부대를 격퇴하고, 셰넌도어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셰리든이 받은 명령은 셰넌도어 지역을 봉쇄하는 것도, 그 지역을 점령하는 것도 아니었다. 셰넌도어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 지역을 모조리 불태우는 것이었다. 셰년도어는 비옥한 농경 지대였고 그 지역 주민들은 친(親)남부 성향이 강했다. 때문에 그곳을 불태우게 되면 남군이 북부를 기습할 통로가 없어짐은 물론 남부에 얼마 남지 않은 곡창지대도 없어지는 셈이었다.
셰리든은 얼리의 병력과 싸우면서 셰넌도어의 친남부 주민들에게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였다. 주민들을 직접적인 공격 대상으로 삼아 남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가축과 곡식을 모두 불태운 것이다. 농장의 창고와 함께 곡식을 가공하는 제분소가 그 다음 목표였고, 북군은 셰넌도어에 있는 곡식 창고와 제분소 역시 모두 불질러 파괴하였다. 그 다음에는 가공품을 만들 수 있는 소규모 공장들을 목표로 삼아 남김없이 부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셰넌도어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통로인 철로를 모두 뜯어내 주민들이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한때 풍요로웠던 셰넌도어는 불모지로 변하였다. 셰리든의 파괴 행위가 얼마나 철저했던지 그의 작전은 아직도 셰넌도어 사람들에게 “The Burning”이라고 불리면서 기억되고 있다. 셰넌도어가 철저히 파괴되면서 남군은 그 어떤 형태로든 북부를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후 수도 리치먼드에 가해지는 압력을 덜어낼 수가 없게 된다.
셰넌도어에 대한 초토화 작전도 타격이 컸지만, 셰넌도어가 불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재앙이 남부를 할퀴고 있었다. 채터누가 작전을 승리로 이끈 그랜트가 포토맥군을 지휘하기 위하여 동부로 떠난 후, 서부에 남아 있던 북군의 지휘는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이 맡게 된다. 한편 남군 테네시군(Army of Tennessee) 사령관 브래그(Braxton Bragg)는 채터누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존스턴(Joseph Johnston) 대장이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동부 전선에서도 그렇듯 남부 전선에서도 북군과 남군의 병력 차는 컸다. 채터누가 이후로 북군의 병력은 여러 차례 보강되어 셔먼이 거느린 미시시피 군관구(Military Division of the Mississippi)의 병력은 11만에 달했다. 이에 비하여 존스턴이 이끄는 남부 테네시군 병력은 5만 남짓이었다. 병력이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남군이 공격적인 전술을 펴기란 어려웠다. 반격을 시도했다가 혹시라도 패하게 되면 이 지역의 남군은 그대로 파멸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군은 지형을 이용한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아울러 신중하고 다소 소극적인 존스턴의 성격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겼다.
1 미시시피 군관구를 이끌고 남부의 심장 애틀랜타를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시작한 윌리엄 셔먼. 2 11만 북군에 맞서 남부 테네시군 5만 병력을 이끌고 수비전을 펼친 조셉 존스턴. |
1864년 5월 초, 셔먼의 진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그것은 남부의 대도시이자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애틀랜타의 함락이었다. 이를 잘 아는 존스턴은 필사적으로 셔먼의 진격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병력의 여유가 있는 셔먼은 존스턴의 방어를 무위로 돌렸다. 존스턴의 군이 수비 전선을 구축할 때마다 병력을 나누어 방어선을 우회하였기 때문이다. 양군은 로키 페이스 고원(Rocky Face Ridge, 5월 7일), 레사카(Resaca, 5월 13일), 뉴호프-처치(New Hope Church, 5월 26일), 피켓츠-밀(Picket’s Mill, 5월 27일), 댈러스(Dallas, 5월 26일~6월 1일), 콜브스-팜(Kolb’s Farm, 6월 22일), 케네소 마운틴(Kennesaw Mountain, 6월 27일) 등의 전투에서 승패를 주고 받았다. 북군은 남군을 격멸하는 데 실패했고, 남군은 북군을 막는 데 급급했으며 간헐적으로 보이는 북군의 실책이 있었음에도 이를 기회로 전환하려 하지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존스턴이 수비전을 하면서 1달 동안 100km가 넘은 거리를 물러났다는 것이다. 북군의 목표가 애틀랜타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존스턴은 애틀랜타의 최종 수비에 필요한 병력을 보전하려고 하였고, 북군과 결전을 벌이기 보다는 지연전과 후퇴로 애틀랜타의 방어망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려고 했다. 그러나 남부 정부의 관점에서 존스턴의 후퇴는 오히려 북군이 애틀랜타로 가는 길을 터주는 것으로 보였다. 6월 27일에 벌어진 케네소-마운틴의 전투에서는 셔먼의 정면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음에도 존스턴이 경질되었고 그 후임으로 후드(John Bell Hood)가 임명되었다.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케네소-마운틴을 포함한 매리에타(Marietta) 방면 전투에서는 그나마 남군 지휘관 중에서 전투 경험이 많은 폴크(Leonidas Polk)가 북군의 포격에 전사하면서 남군 테네시군 소속 병사들의 사기가 급감하였다. 남군은 다시 물러나서 애틀랜타 앞의 유일한 장애물이라 할 수 있는 채터후치(Chattahoochee)강에서 북군의 도강을 막고자 하였다.
남군은 채터후치강 페이스 페리(Pace’s Ferry)에 있는 유일한 부교를 파괴하고자 지연 작전을 펼치며 북군을 막았다. 7월 5일, 북군은 남군의 저항을 뚫고 부교가 있는 곳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남군은 부교에 불을 질러 파괴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남군은 북군이 부교를 건너기 직전, 가까스로 부교를 연결하는 밧줄을 끊는 데 성공하여 일단 북군의 진공을 막았다. 그러나 7월 8일에 후방에서 북군의 부교가 도착하고 아울러 추가 병력이 다다르면서 북군은 다른 지점에서 도강하여 반대편 강가에 있는 남군 진영을 우회하려 하였다. 결국 남군은 북군에 의한 포위를 피하여 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장벽이었던 채터후치마저 돌파당하자 남군은 북군을 상대로 결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7월 20일, 애틀랜타 외곽 풀턴 카운티(Fulton County)에 있는 피치트리-크릭(Peachtree Creek)이라는 조그마한 강가에서 북군 미시시피 방면군 소속 컴벌랜드군(Army of the Cumblerland)과 남군 테네시군(Army of Tennessee)이 본격적으로 격돌하였다. 새로이 테네시군의 지휘를 맡게된 후드(J. Hood)는 북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부대간 연락이 안 되어 공격 병력이 분산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남군 병력이 북군 방어선을 밀어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군은 물러나면서도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남군의 병력 손실은 누적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군의 돌격은 힘을 잃고 좌절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병력이 열세였던 테네시군은 피치트리-크릭에서 북군보다 많은 병력을 잃고 패잔병이 되어 황망히 철수하였다. 이제 미시시피 방면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애틀랜타를 에워싸기 시작했으며 상황은 남군에게 너무 불리하였다. 그러나 남군은 남부의 심장인 애틀랜타를 지켜내겠다는 결의로 다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병력의 현격한 열세를 절감한 후드는 연방군의 진격을 막지 않고 애틀랜타 방향으로 더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반격으로 전환하여 북군을 궤멸시키려 한 것이다. 그리고 7월 22일에 치텀(Benjamin Cheatham)의 부대로 북군에 대한 정면공격을, 하디(William Hardee)의 부대로 북군 좌측면을 공격하고, 휠러(Joseph Wheeler)의 기병대는 북군의 보급선을 치게 하였다. 휠러의 공격은 성공하여 보급 부대 일부를 격파하였지만 북군의 기민한 조치로 주요 보급품은 모두 안전하게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한편 하디의 좌측 공격은 그대로 돈좌(頓挫, 계획이나 기세가 갑자기 꺽임)되었고, 치텀은 어느 정도 북군을 밀어붙였으나 셔먼이 직접 포병대에 명령을 내려 치텀의 부대를 집중 타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잠시 밀리던 북군 15군단이 전력을 재정비하여 반격하였고, 결국 치텀 부대의 공격 역시 좌절되었다.
이 전투에서 북군의 사상자는 3,500여 명, 남군의 사상자는 5,500여 명으로, 공격하던 남군은 오히려 북군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셔먼은 애틀랜타로 진격하여 시가전을 벌이기보다는 애틀랜타를 에워싼 후 보급을 끊어 남군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북군은 애틀랜타를 완전히 에워싸지는 못하고 북쪽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남군은 시내 쪽의 수비 병력과 함께 애틀랜타 남쪽 참호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때 남군의 유일한 생명선은 애틀랜타 남서쪽 메이컨(Macon) 방면에서 애틀랜타로 들어오는 철로였는데, 북군의 관점에서는 이를 파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셔먼은 여러 차례 기병대를 보내 철로를 끊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남군 기병대에 격퇴당하였다. 그러나 이 철로를 둘러싼 공방전은 게속되었고 1864년 8월 31일, 마침내 북군은 애틀랜타의 유일한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한다.
보급선이 끊긴 상황에서 더 이상의 농성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후드는 병력을 이끌고 외곽으로 후퇴하였다. 그리나 8월 31일에 애틀랜타 남쪽 외곽의 존스버러(Jonesborough)에서 북군은 6개 군단 병력을 동원하여 2개 군단밖에 남지 않은 후드의 병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비록 후드의 남군이 전멸되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다음 날인 9월 1일, 후드는 결국 애틀랜타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주력 부대가 후퇴한 마당에 애틀랜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유력 인사들로 구성된 시민위원회가 셔먼과 미시시피 방면군 지휘관들을 만났고,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애틀랜타는 북군에 항복한다. 9월 3일에 셔먼은 워싱턴에 “당당하게 승리했음. 애틀랜타는 우리 것이 되었음(Atlanta is ours, fairly won)”이라고 전보를 보냈다. 남부의 심장인 애틀랜타가 북군에 함락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남부, 특히 조지아에 있어 애틀랜타 함락은 재앙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셔먼은 다음 목표를 애틀랜타 다음의 대도시이자 항구인 서배너(Savannah)로 잡았다. 그리고 후방에서의 보급에 의존하는 대신 그가 지휘하는 미시시피 방면군의 병사들에게 필요한 보급품, 특히 식량을 현지에서 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휘하 군단장에게는 필요할 경우 통과하는 지역에서 가옥과 공장, 농장 등을 불태우고 주요 시설을 파괴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었다. 물론 남부 주민들에 의한 공격 행위가 없을 경우 파괴와 약탈은 최대한 자제하게 되어 있었지만, 북군에 대한 약간의 적대 행위라도 있을 경우 해당 지역은 철저한 파괴와 약탈을 맛보아야 했다.
셔먼의 조지아 진격을 보여주는 지도. 셔먼의 군은 조지아를 통과하면서 조지아를 철저하게 파괴하여 남부 주민들의 저항 의지를 확실히 꺾어놓았다. <출처: (cc) Hal Jespersen at en.wikipedia.org>
미시시피 방면군 휘하 애틀랜타에서 서배너까지 넓은 지역을 지나면서 각 사단의 지휘관들은 ‘채집’을 위한 병력을 별도로 편성하였다. 이들 채집 부대는 작물이 있는 밭이면 모조리 ‘수확’을 하고, 창고에 있는 식량을 반강제로 꺼내서 가져갔다. 이럴 경우 주민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작물의 가치가 기재된 영수증이 아니라 북군이 식량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확인서’ 한 장뿐이었다. 셔먼은 약탈 명령을 내림으로써 보급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남부의 심장부인 조지아주 주민들의 저항 의지를 철저히 꺾으려고 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애틀랜타 인근의 철도를 모두 뜯어내어 당분간 도시로서의 기능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일부 병사들이 뜯어낸 철로를 나무에 대고 굽혀서 묶어버렸는데, 주민들은 이를 셔먼의 나비넥타이에 빗대어 ‘셔먼의 넥타이(Sherman’s Neckties)’라고 불렀다.
북군의 초토화 작전은 셔먼이 의도한 그대로 진행되었다. 젊은 장교 시절, 조지아주에 근무한 적이 있었던 셔먼은 이 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웬만큼 전황이 불리해지더라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적군도 적군이지만 전쟁을 지원하는 남부 주민들의 사기를 꺾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는 셔먼이 서배너 점령 후 할렉에게 미시시피 방면군 사령관 명의로 보낸 서신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적의 군사들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주민들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정규군은 물론이고 주민들도 노소(老少)와 빈부(貧富)를 가리지 않고 전쟁의 어려움을 절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최근 조지아주를 통과하는 본군의 움직임이 이와 관련하여 상당한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들이 늘 패배하고 있다는 거짓 보도에 속고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은 결국 진상을 알게 되었고, 다시는 이러한 꼴을 겪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br /><br />We are not only fighting armies, but a hostile people, and must make old and young, rich and poor, feel the hard hand of war, as well as their organized armies. I know that this recent movement of mine through Georgia has had a wonderful effect in this respect. Thousands who had been deceived by their lying papers into the belief that we were being whipped all the time, realized the truth, and have no appetite for a repetition of the same experience.<em></em>
이전 내슈빌, 채터누가의 점령으로 인하여 전쟁 물자 생산에 필요한 남부의 공업 생산력은 급감하였다. 여기에 애틀랜타가 점령되면서 남부는 완전히 수렁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셔먼이 서배너로 진군하면서 조지아주의 곡창 지대는 북군에 의한 약탈과 방화로 잿더미가 되었다. 조지아주에 대한 초토화 작전은 셰넌도어에서 이루어졌던 셰리든의 파괴 행위와 겹치면서 남부에서는 기본적인 식량 생산마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직접적인 살인 행위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남부 민병대나 패잔병들에 의하여 북군 측 피해가 발생할 경우 북군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을 모두 집에서 끌어내어 소개(疏開)하고 집과 곡식들을 남김없이 불질러버렸다. 생업의 수단을 모두 파괴하는 무자비한 대응 앞에서 주민들은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이후 이러한 ‘가혹 행위’가 문제가 되면서 일부 언론에서 비판이 일자 셔먼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원래 전쟁은 잔인한 것이고 이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오. 전쟁이 더 잔인해질수록 오히려 전쟁은 빨리 끝나게 될 것이오!” <br /><br />War is cruelty. There's no use trying to reform it, the crueler it is the sooner it will be over.<em></em>
셔먼은 일단의 부대를 남쪽으로 보내어 메이컨 쪽을 치는 듯한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이 방면의 남군을 견제하고 후드의 본군을 돕지 못하게 하였다. 후드 역시 일부 병력을 동원해 북군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북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려 하였다. 양군의 첫 전투는 11월 22일 메이컨 인근 그리스월드빌(Griswoldville)에서 일어났다. 휠러(J. Wheeler)의 기병대가 소규모 전투를 벌이는 동안 오거스타(Augusta)로 이동하던 조지아 민병대가 우연히 나타나 보다 큰 전투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휠러의 기병대는 북군 기병대의 반격에, 그리고 조지아 민병대는 북군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급속히 진군하던 북군은 11월 28일에 오코니(Oconee)강을 건너려다가 다시 휠러가 이끄는 기병대의 습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북군 기병대의 지휘관이 포로가 될 뻔했으나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휠러 기병대는 6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남군은 서배너 인근 여러 지역에 바리케이드와 장애물을 설치하고 북군의 진격을 막으려 하였고, 휠러의 기병대 역시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다시 북군을 습격했으나, 12월 4일 웨인즈버러에서 패하고 북군은 남군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하였다. 12월 10일에 셔먼의 군은 서배너 외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남군은 시 외곽에 참호선을 구축하고 1만의 병력으로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셔먼이 서배너로 진격하는 동안 또 하나의 문제는 흑인 노예들이었다. 노예해방이 선언된 후 북군이 들어왔으니 그들은 법적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흑인들의 삶이 당장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북군의 도착과 점령에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던 것이, 셔먼의 초토화 작전에 따라 북군이 집과 농작물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분탕질하며 다녔기에 셔먼의 군이 통과한 지역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모두 불타 없어지는 것을 본 흑인들은 셔먼의 군을 적극적으로 따라나서지 않았다. 일부는 혹시나 하며 북군을 따라나서기도 했으나, 사실 남군을 격파하여 전쟁을 끝내는 것이 급선무였던 셔먼은 흑인들이 따라오건 말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흑인들은 탈진과 노독(路毒)으로 죽는 일이 많았다. 법적으로는 해방이 되었건만 흑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방치와 무관심이었다.
셔먼의 초토화 작전은 남부에 있어 끔찍한 악몽이었다. 그리고 북부 병사들은 반란군을 혼내준다는 생각 때문에 초토화 작전에 적극적이었다. 전쟁이 끝날 때 즈음하여 작곡가 헨리 클레이 워크(Henry Clay Work)는 셔먼의 초토화 작전을 주제로 하는 “조지아 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노래 자체는 흥겨운 행진곡풍이고 전역한 북군 군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만, 당연하게도 남부에서는 금지곡 수준으로 싫어하는 노래가 되었다.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Bring the good old bugle, boys, we'll sing another song<br />전우들이여, 나팔을 가져오게. 그리고 다른 노래를 부르세<br /><br />Sing it with a spirit that will start the world along<br />온 세상 같이 부르도록 기세 높여 부르세<br /><br />Sing it as we used to sing it, 50,000 strong<br /> 5만 강군이 부르던 그때처럼 부르세<br /><br />While we were marching through Georgia.<br />우리가 조지아에서 진격하던 그때처럼.<br /><br /> (후렴)<br />Hurrah! Hurrah! we bring the jubilee!<br />만세, 만세. 기쁨을 가져다 준다네!<br /><br />Hurrah! Hurrah! the flag that makes you free!<br />만세, 만세. 그대들을 자유케할 깃발 보면서!<br /><br />So we sang the chorus from Atlanta to the sea<br />우리는 애틀랜타에서 바다까지 함께 불렀지.<br /><br />While we were marching through Georgia.<br />조지아에서 진격하던 그때처럼.
셔먼의 군이 서배너에 도착했을 때 서배너 외곽 지대에서는 하디(William Hardee) 중장이 지휘하는 1만의 남군 수비 병력이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배너로 통하는 길은 진창 투성이의 좁은 소로(小路) 하나밖에 없었다. 군의 기동이 어렵다고 생각한 셔먼은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12월 13일에 서배너 남쪽의 맥칼리스터 요새(Fort McAllister)에 대한 공략을 명한다. 수비 병력이 채 400명이 되지 않는 요새를 공격하기 위하여 무려 1개 사단이 동원되었고, 공격을 맡은 미시시피 방면군 15군단 제 2사단은 공격을 시작한 후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요새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셔먼의 군대는 서배너를 측면에서도 공격할 수 있게 됨은 물론, 해군 수송함대로부터 보급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보급 물자 중에는 서배너 포위와 공략에 필요한 중포(重砲)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배너로 통하는 철로마저 끊어버리고 서배너를 육지와 바다에서 포위한 셔먼은 12월 17일, 하디와 남군 수비병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최후통첩을 받은 하디는 고민했다. 만약 싸우게 되면 서배너 역시 애틀랜타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었다. 그러나 항복한다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디는 서배너강(Savannah River) 위에 지푸라기로 다리를 급조한 다음, 12월 20일에 그의 수비병들과 함께 탈출을 감행하였다. 셔먼은 탈출하는 수비병들을 굳이 추격하지 않았다.
도시의 운명이 기울었음을 알게 된 서배너 시장은 다음날 말을 타고 북군 전선으로 나와 주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서배너가 함락된 것이다. 셔먼은 애틀랜타에서 서배너로 진군하면서 남부의 경제에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 셔먼의 초토화로 인한 피해는 현재의 화폐가치로 약 15억 달러가 넘었고, 이를 복구하는 데는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애틀랜타와 서배너가 함락되면서 남부가 승리하리라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부전선이 뚫리고 애틀랜타와 서배너가 함락되면서 이제 남부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이제 북군은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남북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남부의 영역 중 텍사스 지역은 거의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북북의 강력한 수상 전력과 견제 병력으로 인하여 텍사스 쪽에서 원군을 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서배너가 무너진 후 북군의 진격은 더욱 거침없었다. 1865년 1월 15일, 북군은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에 있는 피셔 요새(Fort Fisher)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동부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 윌밍턴(Wilmington, N. Carolina)에 대한 공략을 시작하였다. 한편 1865년 1월 19일, 서배너에 있던 셔먼의 미시시피 방면군 병력 중 6만 명이 노스캐롤라이나 방면으로 북진(北進)을 시작하였다. 셔먼의 목표는 봄이 될 때까지 노스캐롤라이나로 진격하여 그곳에 배치되어 있는 북군 병력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남군은 병력 자원도 떨어져가고 물자도 부족했지만,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2월 3일, 일단의 남군이 북쪽을 향하여 진군하고 있던 미시시피 방면군을 요격하려 하였다. 맥로즈(L. McLaws)의 남군은 1865년 2월 3일에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진입하고 있던 셔먼의 본대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셔먼의 본대와 함께 측면에서 올라오던 북군 블레어(Francis Blair) 소장의 1개 사단 병력에게 협공을 당하면서 공격이 격퇴당하고 북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셔먼의 군은 조지아에서와 마찬가지로 파죽지세로 진격하였고, 2월 17일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인 컬럼비아(Columbia)가 함락된다. 비록 누가 불을 먼저 질렀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컬럼비아 역시 애틀랜타와 마찬가지로 대화재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컬럼비아가 점령됨으로써 고립될 위기에 처한 항구도시 찰스턴(Charleston)의 남군은 스스로 철수하였다. 컬럼비아를 점령한 다음날인 2월 18일, 북군은 컬럼비아에서 철도, 역사(驛舍), 창고, 공장 등 전쟁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시설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2월 22일에는 북군의 포위에 맞서 버티고 있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윌밍턴 역시 함락되었다. 윌밍턴은 남부에 남아 있던 마지막 국제 항구였다. 따라서 그곳의 함락은, 이제 남부가 외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다른 나라로 배를 띄울 수조차 없게 됨을 의미하였다. 2월 중에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종단(縱斷)한 셔먼의 군은 3월에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진입하였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던 브래그(Braxton Bragg)의 남군이 셔먼의 군을 막으려고 시도하였지만, 3월 10일에 와이즈-포크의 전투에서 패했다. 패한 브래그의 군은 북쪽으로 후퇴한다.
한편 버지니아에서는 그랜트가 목표를 피터스버그로 잡으면서 리는 이동 방어를 포기하고 농성전을 준비해야만 했다. 피터스버그는 수도인 리치먼드와 외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항구였고 보급기지였다. 피터스버그가 떨어지면 리치먼드 역시 그 운명이 다하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남군도 피터스버그의 방어에 필사적이었다. 북군은 계속하여 피터스버그 점령을 위한 공략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남군의 완강한 방어로 실패하였다.
북군이 피터스버그를 공략하기 위하여 설치한 공성포(The Dictator). 피터스버그는 남부 수도 리치먼드와 외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항구이자 보급기지로, 북군은 공략에 남군은 방어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피터스버그 공략을 시작할 때, 북부에서는 남군이 의외로 빨리 수비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낙관론이 우세했다. 포위전이란 그 특성상 빨리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북군은 이러한 낙관론에 힘입어 우세한 병력을 앞세워 바로 피터스버그 공략에 나섰다. 6월 9일에 북군 길모어(Quincy Gillmore) 소장은 1개 사단 병력으로 남군 방어선을 공격해보았으나 보우레가드(P.G.T Beauregard)의 수비 병력에게 격퇴되었다. 6월 15일부터 6월 18일까지 전개된 2차 공격에서는 2개군 무려 6만의 병력이 동원되어 남군의 방어선을 일시에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3만 5천의 남군은 필사적으로 방어에 임하였고, 북군은 이번에도 1만 2천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공격에 실패하였다. 남군의 방어가 의외로 완강한 것을 깨달은 그랜트는 포위전을 통해 남군을 굶겨 죽이는 작전으로 전환하였다.
1864년 6월에 시작된 피터스버그 공방전은 그해 가을과 겨울을 넘겨 1865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연이은 정면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6월말과 7월에 북군은 외부에서 피터스버그로 들어오는 철로를 끊는 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북군은 예루살렘 플랭크로드(Jerusalem Plan Road), 스턴톤 리버브릿지(Staunton River bridge), 새포니 처치(Sappony Church), 림즈 스테이션(Ream’s Station) 등에서 남군의 철도망에 기습을 가했다.
기습으로 시작했으나 보급선을 지키려는 남군의 저항으로 인해 전투는 의외로 대규모로 번졌고, 북군은 기습할 때마다 수km씩의 철로를 뜯어냈다. 그렇잖아도 공업 생산력이 저하된 남부는 파괴된 철로를 복구하는 데 몇주씩 걸리고는 하였다. 남군은 철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피터스버그 주변에 참호선을 만들었고, 북군의 철로 기습이 늘어나면서 참호선은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였다. 북군도 남군의 보급로를 끊는 데 주력하면서 남군의 참호에 맞서 참호선을 구축하였다. 결국 피터스버그는 50km가 넘는 참호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에 북군은 참호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남군의 참호선 밑까지 갱도를 파고 화약을 집어넣어 폭파시키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사실 폭약이 사용된 것이 달랐을 뿐, 성이나 요새의 수비 병력이 완강히 싸울 경우 성벽 밑으로 갱도를 파서 붕괴시키는 작전은 고대부터 공성전에서 흔히 사용되던 것이었다. 그랜트는 일단 7월 28일에 수천의 병력을 리치먼드 방면으로 보내 남군 병력 일부를 유인하여 참호선 수비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7월 30일 새벽 5시경, 남군 참호선 밑에 묻어놓은 화약 3600kg에 불이 붙었고 대폭발이 일어났다. 이에 남군 병사 수백명이 폭사(爆死)하고 길이 50미터, 넓이 20미터 정도의 폭발구(crater)가 만들어졌다.
남군의 참호선 밑으로 갱도를 파고 화약을 집어넣어 폭파시키는 작전을 실행 중인 북군. 이는 고대부터 공성전에서 흔히 사용되던 작전으로, 북군 역시 이 작전을 통한 승리를 예상했다.
남군의 참호선을 돌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다. 원래 폭발구 돌파는 페레로(E. Ferrero) 준장 휘하의 흑인 부대가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미드(George G. Meade)가 흑인 부대가 실패하고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정치적인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이유로 그랜트에게 건의하여 마지막에 부대를 교체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새로이 투입된 레들리(James Ledlie) 준장의 사단은 작전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도 받지 못한 채 곧장 돌파 작전에 투입되었다. 원래 작전은 폭발구 가장자리를 따라 전진하여 무너진 참호의 후방으로 돌입하는 것이었는데, 레들리의 병사들은 폭발구 안으로 그대로 들어갔고 참호선 뒤에 몰려든 남군 병력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았다. 오도가도 못하는 북군 병력들은 남군의 사격에 무참히 쓰러졌다. 레들리의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페레로의 흑인 병사들이 뒤늦게 투입되었으나 이들도 같은 꼴을 당했다. 일부 병력은 참호선을 돌파하여 남군의 제 2 방어선 일부를 점령하였으나 병력이 많지 않아 남군의 예비 병력에 격퇴당했다. 9천의 병력이 동원된 북군의 야심찬 돌파 계획은 4천의 사상자만을 남긴 채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북군의 대공세를 격퇴하기는 했지만 남군의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군은 병력의 손실을 메꾸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북군은 신병들이 계속 보충되었다. 북군은 8월에 피터스버그의 철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남쪽에서 들어오는 웰든(Weldon) 철도를 봉쇄하였다. 9월과 10월에는 각각 채핀스-팜(Chaffin’s Farm)와 피블즈-팜(Peeble’s Farm)에서 북군이 승리하면서 피터스버그 남동쪽의 도로도 봉쇄되었다. 10월 말에는 보이튼 플랭크-로드(Boydton Plank Road)에서 북군의 도로 봉쇄 시도를 저지하면서 남군이 간신히 외부와의 연락 통로를 유지하였으나 1865년 2월의 해처스-런(Hatcher’s Run) 전투로 남군 참호선 일부가 점령당하며 남군은 거의 완전히 포위되었다.
3월에 이르자 보급 물자가 바닥난 남군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리치먼드와 피터스버그를 수비하고 있는 병력 5만 5천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거의 악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포위를 하고 있는 북군 병력은 12만 5천에 달했고, 셰넌도어 초토화 작전을 마친 셰리든의 5만 병력 또한 그랜트의 병력과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지아를 불태운 셔먼의 병력도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돌파하고 버지니아의 턱밑인 노스캐롤라이나로 진입하였다. 3월 25일, 남군 수비 병력은 포트-스테드먼에 병력을 집중하여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하였으나 4천의 사상자만 내고 실패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셔먼의 군은 노스캐롤라이나를 돌파하고 남부 버지니아까지 진격해왔다. 셰리든의 군도 피터스버그 인근까지 접근하였다. 피켓(George Pickett)의 남군이 4월 1일에 파이브 포크스(Five Forks)에서 셰리든의 군을 막으려 시도하였으나 피켓이 식사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셰리든의 병력이 돌격하면서 남군은 지리멸렬되었다. 사실 피터스버그의 남군에게 있어 가장 좋은 선택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노스캐롤라이나의 병력과 합류하는 것이었는데 파이브 포크스의 패배로 이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남군은 마지막 남은 퇴로마저 끊겼다. 4월 2일에 북군의 총공격이 이어졌고, 피터스버그는 함락 위기에 몰렸다. 결국 리는 4월 2일에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서쪽으로 빠져나왔고 피터스버그와 리치먼드의 수비를 사실상 포기하였다. 북군은 4월 3일 오전에 피터스버그를, 그리고 오후에는 남부의 수도였던 리치먼드를 점령한다.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되면서 남부는 무너졌다. 다만 리와 존스턴의 야전군이 아직도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항복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 또한 휘하 병사들의 사기 저하를 막고 혹시라도 보다 유리한 조건하에서 항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버티고 있었을 뿐, 이미 승리의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리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버티고 있는 존슨의 군과 합류해야만 그나마 전투를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군을 서쪽 방향으로 돌렸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벌써 셰리든 휘하의 북군 기병대가 막고 있었기에 일단 북군을 우회하여 남쪽으로 갈 계획이었다. 여기에는 남군 병참감으로부터 서쪽에 있는 팜빌(Farmville)이란 마을에 대규모로 군량을 가져다 놓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식량을 확보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북군은 후퇴하는 남군을 맹렬히 추격했다. 셰리든의 부대는 세일러즈-크릭(Sailor’s Creek)에서 남군 이웰(Richard Ewell)의 1만 8천 병력을 따라잡아 그 퇴로를 가로막았다. 이웰은 갈 길을 가로막는 북군 진영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북군 기병과 포병의 합동 공격에 군이 무너지고 거의 8천의 병력이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한다. 나머지 남군 병력은 인근의 아포맷톡스강(Appomattox River)을 건너 남쪽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이곳 역시 북부의 대군에 의하여 가로막힌 상태였다.
아포맷톡스 전투 상황도. 붉은 색이 리가 이끄는 남군, 푸른색이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의 이동 경로이다. 이 전투로 남북 전쟁은 실질적으로 종결된다. <출처: (cc) Hlj at en.wikipedia.org>
하이-브릿지(High Bridge)와 아포맷톡스 스테이션(Appomattox Station)에서 남군은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아포맷톡스 전투에서 북군의 승리를 이끈 것은 이후 리틀 빅혼 전투에서 인디언 부대에게 대패하는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였다. 한때 남부 최대의 야전군이었던 북부 버지니아군(Confederate Army of Northern Virginia)은 이제 3만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랜트의 본대까지 아포맷톡스 인근에 도착하면서 북부 버지니아군을 포위한 북군은 10만을 넘어섰다. 전투는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지만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와 존 고든(John Gorden)은 더 이상 북군을 상대로 앞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리와 리의 부대에게는 이제 북군을 우회하기는커녕 탈출의 가능성마저 사라져 버렸다. 리에게 남은 선택은 항복밖에 없어보였다. 리가 항복을 고민하고 있던 차에 그의 부관인 알렉산더(Porter Alexander) 준장이 하나의 대안을 내놓는다. 항복하는 대신 병사들을 “토끼와 메추라기처럼 흩어지게(scatter like rabbits and partridges)” 하자는 것이었다. 싸울 수 있는 병사의 수가 여전히 1만이 넘으니, 그들이 아직도 북군의 손이 닿지 않는 벽지와 시골로 흩어져 게릴라전을 전개함으로써 북군을 지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수많은 전투에서 남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명장 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1만 명의 병사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네. 내가 귀관의 말을 받아들인다고 가정을 해보세. 그 병사들에게는 군량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기강을 유지할 수도 없네. 그들은 결국 약탈하고 도적질을 해야 하겠지. 그러면 이 땅은 무법자들로 뒤덮이게 될 것이야. 사회는 혼란스러울 것이고 그 상황을 복구하느라 또 여러 해를 허비해야 할 것이네. 아울러 적들의 기병대가 그들을 뒤쫓을 것이고 추격병들이 이르는 곳마다 또 다시 약탈과 파괴가 이어질 것이라네.<br /><br />따라서 자네의 제안을 거부하는 바이네. 우리는 연맹(Confederacy)이 패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네. 우리 병사들은 아무 말없이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곡식을 심고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야 할 것이야. 자네와 같은 젊은이들은 숨어서 싸울 수도 있겠지만 본관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 항복을 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네.”<em></em>
리는 이미 패한 마당에 게릴라전으로 전쟁을 연장시키는 것은 더 큰 사회적 혼란을 가져올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남부 곳곳을 다니면서 남부인들이게 연방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접고 전쟁의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설득하여 남부의 여론을 무마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항복하기로 마음을 정한 리는 그랜트에게 사절을 보내 만날 곳을 조율하였다. 사령관들이 조우할 곳을 찾던 사절들은 첫 번째 장소가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큰 도로변에 있는 윌머 맥클린(Wilmer MacLean)의 저택을 만남의 장소로 정했다.
만날 장소가 결정되자 리는 예법을 중시하는 군인답게 깨끗한 정복으로 갈아입고 허리띠까지 둘렀다. 반면 그랜트는 전장에서 달려온 모습 그대로였다. 장화는 진흙투성이였고 셔츠는 풀어헤친 상태였다. 만남 직후, 두 사람은 잠시 주위를 물리치고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에서 동료로서 같이 싸우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감회에 젖었다.
이미 승리가 굳어진 마당에 그랜트는 미합중국 야전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아량을 베풀었다. 법대로 하자면 남군 병사들은 모두 반란군으로서 포로가 되고 군사재판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랜트는 지휘관급 장성들을 사면하였고 해당 장성들은 휘하 장교들과 장병들에게 사면을 내림으로서 처벌을 면하게 하였다. 장교들은 권총을 휴대하고 말을 탄 채 귀가할 수 있게 되었다. 사병들 역시 미합중국 정부의 권위에 반항하지 않는 한 연방군으로부터 어떠한 제제도 받지 않고 귀향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1865년 4월 10일, 리는 휘하 장교와 장병들에게 이별을 고하였고, 4월 12일에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2만 8천의 북부 버지니아군 장병들은 개인화기를 하나 둘씩 반납하였고 대신 넉넉한 군량을 지급받았다. 그리고 게티즈버그 리틀 라운드 톱에서 남군과 싸웠던 채임벌린(Joshua Chamberlain) 준장은 떠나는 남군을 향하여 경례를 하면서 그동안 싸운 적에게 예를 표했다. 이리하여 남군의 항복식은 아무런 소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사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공식적인 항복에 앞서 4월 9일에 항복에 관한 제반 논의를 마치고 리가 맥클린 저택을 떠나고 있을 때, 북군의 일부 병사들과 장교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환호작약하며 승전을 축하하였다. 그랜트는 그들을 제지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그만하게. 반란군들은 다시 우리 동포가 되었어.”
아포맷톡스에서 리의 항복이 모든 전투를 종결시킨 것은 아니었다. 리의 항복 선언은 엄연히 말하자면 주력군이기는 하지만 남부의 한 개 야전군의 항복에 불과했다. 아직도 18만 명의 남군이 무장해제되지 않은 채 싸우고 있었으며, 그해 4월 15일에는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남부의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던 남부연맹 남부군(Confederate Army of the South)은 남부의 야전군 중 최대 규모였는데, 그 사령관인 존스턴 대장 역시 패배를 인정하고 4월 26일에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Durham)에 있는 베넷농장(Bennett’s Farm)에서 북부 미시시피 방면군 사령관 셔먼에게 항복하였다. 한때 남부 출신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에 의한 링컨 암살에 화가 난 워싱턴 정부가 셔먼이 제시한 항복 조건을 거부하고 존스턴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아 항복 과정은 난항을 겪었다. 남부 주정부 재구성에 대한 조건을 워싱턴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존스턴과 같이 있던 남부 대통령 데이비스는 존스턴에게 보병대는 해산하고 기병대를 이끌고 탈출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존스턴은 데이비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남부연맹 남부군이 항복하면서 존스턴이 관장하던 테네시-조지아 군관구, 테네시군, 사우스캐롤라이나-조지아-플로리다 군관구,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남부 버지니아 군관구가 모두 미합중국에 항복하였다. 데이비스는 거의 단신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존스턴이 북군 셔먼에게 항복한 베넷 농장.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cc) Ildar Sagdejev at en.wikipedia.org>
남군의 항복은 계속되었다. 5월 4일에는 앨라배마에 있던 테일러(Richard Taylor)와 포레스트(Nathan Bedford Forrest)의 부대가 항복하였다. 남부 대통령 데이비스는 5월 5일에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달아나다가 5월 10일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과 함께 조지아주 아브빌(Abbeville, Georgia)에서 체포되었다. 5월 11일과 12일에는 아칸소와 조지아에 잔류해 있던 남군 병력이 항복하였고, 5월 26일에는 텍사스의 남군이 모두 항복하였으며, 마지막 남부의 군관구이던 미시시피 군관구와 그 사령관인 스미스(Edmund Kirby Smith)가 항복하면서 남부의 항복 과정이 모두 종결되었다.
이로써 피비린내 나는 4년간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남북 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內戰)이었다. 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쟁은 내전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남북 전쟁에서의 전사자만 22만에 달하였고, 전투와 관련하여 사망한 병사들의 총수는 60만이 넘었다. 미국이 참여한 해외 그 어떠한 전쟁에서(심지어 2차 세계대전도) 60만의 사망자가 발생한 전쟁은 없다.
비록 남부가 재건되기는 하였지만,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이 패였다. 흑인들 또한 해방되었지만, 남부주들은 각종 차별법을 통해 흑인들의 민권을 제한하였으며 연방정부는 타협의 일환으로 남부주들의 차별적인 법을 묵인하였다. 결국 흑인들은 100년이 지난 1960년대에나 가서야 완전한 민권을 획득하게 된다. 미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많은 희생이 따랐고, 많은 사회적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았으며, 전쟁에서 싸운 많은 사람들에게도 육체적ㆍ정신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북부를 승리로 이끈 주역 중의 한 명인 셔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다. 전쟁의 영광이란 것은 다 헛소리다. 적들의 피를 요구하고 복수와 파괴를 외치는 놈들은 모조리 총 한번 쏘아본 일도 없거나 부상자들의 절규와 신음을 들어본 일도 없는 작자들이다. 전쟁은 지옥일 뿐이다.” <br /><br /> “I am tired and sick of war. Its glory is all moonshine. It is only those who have neither fired a shot nor heard the shrieks and groans of the wounded who cry aloud for blood, for vengeance, for desolation. War is hell.”<em></em>
그러나 엄청난 희생의 결과로 미국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만약 미국이 둘로 나뉘었으면 그 후의 역사는 어찌되었을지 모르지만, 현재 미합중국이라는 강대국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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