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집 아저씨의 사찰 저녁 예불 보러 가자는 말에 나는 다른 계획을 접고서 우리 집과 그 집 둘째 애들하고 우리 둘 합해서 넷이서 짐을 대충 아침거리만 싸서는 집을 나섰다.
징검다리 연휴라서 우리는 좀 서둘러서 떠났지만 다행히 길들은 한 적 했다.
사실 처음에는 구례 화엄사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밤사이 곰곰 생각해보니 하루 여행거리로는 너무 멀었다.
도대체 볼 만하고 큼지막하고 고풍스런 절들은 왜 모두 그리 서울서 먼 곳에만 있는지 모르겠다. 멀리 있은 절일수록 ‘때깔’이 나는 절들이 많다.
그렇다고 자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적당한 거리의 절간을 찾으니 ‘금산사’
전에 가본 것 같기도 하고 안 가본 것 같기도 한 그런 절간이었다.
늘 그 근처를 지나가기만 했지 딱히 들어 가본 적은 없는 것 같고 거리도 한 세 시간 거리로 적당할 것 같았다.
수덕사나 마곡사나 동학사는 절 크기도 그렇지만 거리가 좀 가까워서 하루를 애들하고 까먹기는 좀 가까운 듯 했다. 그래서 잡은 곳이 그 곳이다.
딱히 당기는 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고 단지 거리상의 이유로 또 물어 보니 꽤 큰 절이라서 그리로 택했다.
저녁 예불을 그래도 격식 있게 보려면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기에 마땅하리란 짐작으로 우리는 그 절을 향해서 내 달렸다.
천안서 다시 새로 만든 논산 천안 간 민자 고속도로를 달려가니 세 시간 좀 못 미쳐서 그 곳에 도달했다.
우리는 주차비 2천원을 내고 주차 후 절 입구에 들어서서 조금 길을 따라 걸어 가니 윈 쪽으로 조그만 ‘또랑’이 있고 물이 흐르는데 맑은 물이었다. 아마 절간을 훑고서 내셔 오는 물인 모양이다.
그 옛날 폼페이도 집집마다 물이 흘렀다는데 아마는 이런 식이었을 법하다. 또 송악의 외암리 민속 마을에도 집집마다 이런 식으로 냇물을 흐르게 했으니 이런 조그만 냇물이 졸졸 흐르는 마을이나 집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행복일까?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왼쪽으로 조그만 한 두어 평이나 될까한 사람이 두서넛 들어가서 절하기도 빠듯한 사당이 있고 그 속에는 운주사에서 본 것 같은 비슷한 모습의 대충대충 만든 ‘떡판부처’가 모셔져 있었는데 그 표정이 약간은 괴기하기 까지 한 그런 모습이었다.
마침 그 사당 앞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사방을 향해 선 채로 연신 두 손을 합장하여 고개를 조아리는데 그 동작이 어찌나 능숙하고 전혀 막힘이 없이 그 옆의 개울물 흐르듯이 유연해서 하나의 춤 동작을 보는 듯 했다.
아마 무속인인 듯싶었다.
그런 것이 보통은 산 속에 있을 법한테 하필 절 입구에 있는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아마 그 절의 운기를 나누어 가져서 신심을 더하려는 마음에 그런 사당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물어 보기도 분위기가 섬뜻한 지라 그냥 올랐다.
조금 가다 노인 세분을 만났는데 모자들이 다 제 각각인 나름의 간단한 등산복 차림으로 등산 겸해서 부처님을 만나러 올라가시나 보다.
어떤 분은 해병대 모자에 왼쪽 뒤춤에 수건을 접어 걸치시고 올라가시는데 그 분이 준비성이 제일 짱짱하신 분인가 보다. 나는 카메라도 빼 놓고 온 준비성인지라 그 분의 준비성이 부러웠다. 큰 놈 어릴 적의 사진은 많은데 둘 째 놈 사진은 별로 없어서 늘 미안한 마음인데 오늘 같은 날이 마음의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는 날인데도 나의 ‘깜박병’이 그나마도 못 건지게 만들었다.
“아무개가 죽었다메?” “아니 그것도 몰랐어? 벌써 갔어!”
우리가 “날씨 좋다!”하듯이 그냥 지나가는 어투로 별 느낌 없이 말하듯이 하는 대화였지만 그것이 남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서로 가슴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문제로 굳이 대화로 표현 할 필요가 없을 만큼의 세월을 넉넉하게 서로 공유해 오고 있는 사이로 보였다.
앞을 보니 ‘모악성지’라고 엄청 커다란 돌에다 한자를 파 넣었다.
여기가 무슨 교의 발생지라서 그런 모양이다.
꼭 ‘김일성교’에서 커다란 바위에다 글을 파 넣는데 한 획의 크기가 사람 키보다도 크다더니 다들 돌처럼 긴 세월을 버티고 싶은 모양이다.
미련한 돌 글씨를 옆으로 하고 다리를 건너려는데 앉은뱅이 구걸인이 눈에 들어 왔다. 올라오면서 저만치서 구슬픈 ‘뽕짝’이 길안내 삼아 들리더니 그가 끌고 다니는 좌판의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런데 참으로 ‘희안한’ 것은 그의 옷차림이었다.
하의는 잘 안 보였지만 상의는 어찌나 울긋불긋한 색깔인지 온갖 무지개 색은 다 들어 가있는 그런 무늬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보통의 시장통 아줌마들이 입는 ‘몸빼바지’ 색은 저리 가라였다. 거기다 망사 쪼기를 걸쳤는데 그것은 또 아주 빨간 색이었다.
모자도 어찌나 알록달록한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절간에 찾아오는 신심이 있는 이들의 마음에 기대어 구걸을 하는 입장에서 옷도 구질구질하고 더럽고 ‘꼬재재’하게 보여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화려한 옷을 입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다. 그냥 입은 것 같지는 않고 분명 나름으로 코디를 한 복장일 텐데 어떤 의도에서 그런 ‘패션’을 택했을까?
구성진 스피커 소리로도 부족하여 더불어 색깔까지 포개어 주목성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랬을까? 하긴 그 분의 덩치가 워낙 왜소해서 우리도 그 분 앞에 거의 다 와서 발견했으니.......
정말 그런 세심한 배려가 있는 패션일가? 없어도 즐겁다는 반증 같은 일종의 자기 과시일까?
다리에 건너드니 아래에 흐르는 물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고 수많은 송사리들이 한가롭게 물 속에서 유영을 하고 있는 모습에 우리 애들은 탄성을 지르며 좋아들 하고 난리다.
“야! 상어다!” “낚시 하자!” 두 놈이 감탄하는 언어도 갖가지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흔하던 것들이지만 이제는 이렇게 애들한테 경이로운 송사리들이 되어 버렸으니 인간들의 우매함이 그 물고기들의 등줄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것 같았다.
일순간 나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송사리 붕어찜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하니 찜이고 그때는 그냥 졸임이었다고 할까?
어디선가 아버님이 송사리들이나 잔 붕어들을 구해 오시면 어머님은 그것을 연탄불에 밤늦게 까지 졸여서 다음 날 내신다. 그 맛이란!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잔불에 하도 오랫동안 졸여서 양념이 작은 물고기 몸통 속속들이 배이고 또 오래 끓여서 그나마 잔뼈들이 완전히 삭아 내리니 애들 먹기에 그만이었다는 생각이다. “저런! 미련한 놈! 비린 것에 물을 말아 먹다니!”하고 아버님이 혀를 끌끌 차실 정도로 비위 좋게 비린 것을 유독 좋아 했던 나는 더 잘 먹었다. 사실 나는 냄새에 둔해서 비린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비린내 기억을 뒤로 하고 입구에서 우리는 어른 일인 당 2600원 애들 일인 당 1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절 입구에 들어섰다. 이제까지는 마을의 일부이고 여기서부터 절 입구인지 공원 입구인지 한 모양이다. 입장료를 이렇게 많이 받아서 일부는 절이 일부는 정부가 갖는 모양이니 그 액수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입장표를 내고 나서 오르는데 그 길도 우리가 지나온 길들처럼 아스팔트길이었다. 나무 사이로 그늘도 좋고 그 그늘이 만드는 얼굴의 무늬도 천연스러워서 좋고 가끔씩 들리는 늦은 매미 소리도 자연스럽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다 평화로워서 좋은데 유독 그 길이 맘에 안 들었다.
길을 이렇게 닦아 놓으면 오랫동안 손댈 일도 없고 차 다니기도 좋아서 어찌 보면 편리하고 좋을지 모르나 산길, 특히 절 길은 그 자연스런 흙 맛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자박 자박 밟히는 잔 모래감이나 적당히 굴곡져서 흐르는 길도 걷기에 훨씬 부드럽고 좋지 않을까?
그러잖아도 늘 아스팔트인데 이렇게 돈 내고 걷는 길 까지 굳이 두껍게 ‘싸발라서’ 사람의 발과 흙의 간격을 띄울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인지 야생화 단지사이로 일부러 비포장의 꼬부랑길을 만들어 그 아스팔트길을 옆으로 하고 걸어 올라가게 만들어 놓았다.
말하자면 선택사항이다.
아스팔트가 좋으면 아스팔트 자연스런 맛이 좋으면 야생화 길.
우리는 당연히 꽃길을 택했다.
고맙게도 팻말 들을 군데군데 박아 놓고 길도 꼬불꼬불 재미있게 만들어 놓고 적당히 흙모래길이라 걷기도 좋았다. 옆으로는 시냇물이 계속 우리들을 반짝이는 손짓으로 마음을 간지럽게 하면서 따라오고 간간이 보이는 야생화들에 애들도 즐거워 할 즈음 아까의 그 세 노인들을 또 만났다.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쉬면서 두런거리고 있는데 그 앞에 안주가 조금 있고 소주병 한 병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소주 맛을 잘 모르지만, 모르긴 몰라도 저분들이 들이키는 소주 한잔의 맛이 천당의 맛이 아닐까? 그림만으로 볼 때는 그 소주 한잔의 맛과 인생을 맞바꿔도 좋을 만큼의 정갈스런 풍경으로 다가 왔다.
이 길로 가면 징검다리가 나온다는 안내 글에 애들이 엄청 좋아한다.
어른만 예스런 모습이 좋은 것이 아니고 도시 애들도 우리가 잃어버린 그런 자연의 모습이 좋은가보다. 자연의 훼손은 정말이지 우리 인간들의 영혼의 피폐를 가져올 뿐이다.
‘은방울꽃’은 이름만 ‘덩그란히’ 꽂아 있고 철이 아이라 그런지 땅속에 숨었는지 흔적도 없고 ‘쑥부쟁이’ 한 송이가 외로운 이름판과 짝으로 오롯이 나 있기도 하고 듬성듬성한 ‘원추리’며 ‘범의귀’종이며 ‘비비추’며 ‘붓꽃’이며 ‘둥굴레’며 ‘고사리’ 등은 그런대로 모습을 관찰 할 수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꽃들은 다 등산을 갔는지 절간에 부처를 만나러 갔는지 잘 보이질 안했다.
마지막으로 ‘벌개미취’ 두어 송이가 팻말과 함께 보이더니 꽃길은 끝났다.
야생화길은 꽤 길었지만 그 엄청 들인 품에 비해서는 어딘지 모르게 썰렁했다.
우리 선배 중에 한 분이 대단히 커다란 야생화 정원을 조성한다기에 멀리 파주까지 애 데리고 한 보름 전에 간 적이 있는데 그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야생화란 것이 애시 당초 표시가 잘 안 나는 그런 꽃이다. 물론 군락지란 것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그저 눈에 띌 듯 말 듯 ‘쥐방울’만하게 피다 지는 꽃들이고 피는 계절이 몰려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 제각각이니 이래저래 흐트러진 모습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꽃들이다.
그저 관심 있는 이들이 허리 숙여 세심히 바라 볼 때만이 그 모습을 함초롬히 보여 주는 그런 시골 ‘새악시’ 같은 꽃들이다 보니 한꺼번에 모아 놓는 다고 유별나게 아름답게 와 닿을 리가 없는 꽃들이다.
양생화는 야생에 은자처럼 숨어 있을 때나 그냥 무심히 지나던 길에서 어느 날 문득 발견했을 때만이 그 아름다움을 발하는 꽃인 것이다.
이제 징검다리를 건너니 꽃길은 아쉬운 대로 끝나고 그 아스팔트길로 다시 접어드니 오른 쪽으론 야영지가 조성 되어 있고 그 앞으로 좌판장사꾼들이 있다.
어릴 적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들이 잡다하게 올려 있다.
고구마, 고동, 밤, 번데기 등등이 먹성 좋은 우리 애 코를 간질이는 모양이다.
녀석은 고동을 집는다.
하필 절간에서 고동을 집을까 싶었다. 중들한테나 신도들한테 눈총이나 안 받을까 싶었지만 놈이 먹고 싶다는데 그런 설명을 한 게제도 아니고 사주고 녀석이 건네는 ‘짭자름한’ 고동을 빨면서 길을 오르는데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만지는 느낌이 느껴진다.
저 앞에 공사 중인 일주문이 보인다.
주변의 녹색과 홍송이 가지고 있는 속살의 붉으스름하고 노르스름한 색의 그 확연한 대비감이란!
직선적으로 다듬고 각진 나무 건축자제와 거푸집의 인조적인 느낌의 선과 자연의 ‘뭉텡이진’,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느낌의 극명한 대조는 그 미완의 느낌을 넘어서 하나의 장엄 그 자체였다.
미완성 교향곡의 아름다움이 이런 것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습작 스케치 작품의 맛이 이런 것일까?
로댕의 미완의 인체 조각 작품이 갖는 맛이 이런 것일까?
이런 미완의 아름다움은 그 것이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이거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가 보니 그 일주문의 규모가 꽤 커 보였다. 특히 양쪽 기둥의 두께가 엄청 났다. 거의 지름이 2m는 됨 직했다. 자연목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다듬고 파 들어가 오목한 느낌이며 굴곡진 모습들이 아름다웠고 각재들의 군데군데 먹줄 띄워 검은 선이 양념처럼 보이는 모습이며 그 들어난 속살의 아름다움이, 우리가 선입견으로 가지고 있는 색칠해질 나중의 모습들을 압도 했다.
그것은 전체가 하나의 훌륭하고 아름답고 현장감이 있는 커다란 설치미술작품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런데 초석은 웅장한 돌을 쪼고 다듬어서 받친 모습으로 그런 나무의 ‘속살스런’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어서 옥의 티였다.
갑자기 망치 소리가 나의 이런 상상에 의한 ‘예술행위’를 깨웠다.
맛있고 기름진 ‘아끼바리’쌀 밥을 먹다 갑자기 돌을 씹은 기분이랄까?
지붕위에서 못 통을 허리에 찬 이가 망치질을 해서 나무를 박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전기톱까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기름 냄새가 났다.
내가 알기로는 예전의 목수들은 못 질을 안 하고 집을 짓는 다고 했는데 다 지난 이야기인가 보다.
그렇더라도 그 홍송의 속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좀 더 올라가니 전부터 있던 일주문이 하나 더 있었다. 지금 만드는 것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보니 이것이 원래의 일주문인데 입장료나 시줏돈이 남아돌다 보니 다시 더 커다랗게 짓는 모양이다. 일주문이 둘이면 불심이 더 생기나? 불쌍한 중생을 한명이라도 더 구제하나?
보기가 더 좋은가? 절간 위상이 더 사나? 뭔가 이유야 있겠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주문을 다시 보니 일주문이란 것이 정확히는 6주문이었다.
중심 기중 좌우에 하나, 무거운 지붕이 ‘부태껴서’인지 그 중심기둥 앞뒤로 작은 기둥이 하나씩 더 있으니 양쪽을 다 합하면 6개의 기둥이 된다.
그 네 개의 작은 기둥들은 인간들의 허약한 불심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뒷짐 지고 올라가니 해탈교가 나오고 그 오른 쪽으론 금붕어들이 ‘물반 고기반’으로 즐비한 작은 연못이 나오고 그 왼 쪽으로는 금강문이 있고 뒤로는 이고 있는 집이 작게만 보이는 커다란 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이 있다.
그런데 그 단청들의 색조가 비록 칠한 지는 얼마 안 되어 보이나 녹색 조를 잔 뜩 머금어서 인지 고풍스럽고 묵직하고 또 산뜻하여 보기가 좋았다.
우리 선배 중에 한 분도 추상에 녹색 조를 많이 써서 황홀함을 더하는 그림을 그리는 분이 있는데 설마 여기의 단청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니겠지?
그 문들을 뒤로 하니 왼 쪽에 커다란 박물관 건물이 ‘덩그란히’ 이제 곧 오픈을 할 요량으로 버티고 있다.
어느 절을 가나 요즈음은 이 박물관 짓는 것이 유행이다.
한 동안 절 입구며 연못이며 절 주변을 치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런 것은 묘 장식품처럼 사치스럽다고 생각하고, 불심과는 거리가 멀고, 문화적 가치의 보고인 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는 자성이 있었는지 요즈음은 이 박물관 바람이다.
박물관이 따지고 보면 그 절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를 보관하자는 취지이니 언뜻 보면 당위성도 있어 보인다. 요즈음은 절간도 도둑이 들끓어 잃어버리는 문화재가 많아서 저렇게 튼튼하게 성곽처럼 박물관을 지어 보관한다면 도둑놈들이 꿈이나 품겠는가?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다름 아니다.
외양간이야 농사 잘 짓고 운이 맞아 떨어져서 다시 송아지를 사면되지만 절간의 문화재야 다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절마다 무슨 대단한 문화재가 그렇게 성을 지어서 쌓을 만큼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건물 때문에 오히려 절만 망가지니 이건 그것만도 훨씬 못한 중생의 우매함의 극치가 아닐는지?
그래도 일주문 하나 더 짓는 것은 애교이고 그것이야 절간 울타리 저 밑이니 그나마 가람의 흔들림이 적겠지만 박물관은 꼭 절간 안 중요한 자리에 자리하는 통에 절간의 분위기는 다 죽고 만다.
언젠가 지나다가 ‘불가사의의 도량 무슨 사’해서 이름이 하도 신기한 지라 들어갔더니만 온갖 축대 돌 부조로 돌리고 건물은 웅장하게, 고식의 외관만 따른 콘크리트로 지은 정말이지 불가사의한 ‘돈덩어리’ 절을 본 적이 있는데 절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누군가가 완공된 유명사찰 절 공사를 보고 소림사 무술 영화 세트 같다고 했겠는가?
절이란 것이 꼭 그 건물이나 건물 안의 것들만 문화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주변의 느낌이나 공기의 흐름까지도 다 중요하거늘 이렇게 단순한 생각으로만 건축을 해나가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제발 문화재는 잃어 버려도 좋으니 절간의 고풍한 맛은 건졌으면 좋겠다.
절간만이라도 예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해 줬을 때 우리나 후손의 마음이 더 문화인스럽고
불심도 더 만방에 퍼지지 않을까? 순전히 구경꾼의 입장이니 스님들의 이야기는 또 어떨까?
그 다음 작은 것을 더 크게 늘였다는 안내판이 붙은 보제루라는 곳을 지났다.
확 트인 공간이 보이고 정면으로 대적광전, 왼 쪽으로 범종각 또 다른 건물과 그 앞의 고려시대 석등과 오른 쪽으로는 삼층 목탑 형식의 미륵전이 있고 앞마당 한 가운데는 세월이 피곤한 듯 한 쪽으로 기울어 져 받침대에 노구를 버티고 있는 소나무가 있고 그 뒤로 석탑이 있고 그 바로 옆으로는 커다란 연꽃 대좌가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이름 모를 꽃나무들이 있다.
가운데 절 건물을 바라보니 단청들의 녹색 톤이 유독 많이 바래서 밝은 느낌은 사라 졌지만 세월의 잔영을 어느 정도 내 보이고 있었다. 문짝이 기이하게도 건물 안으로 젖혀져 열려 있는 것들이 있고 닫혀 있는 문짝과 합하여 여러 짝인데 그 무늬들이 문살마다 달랐다. 꽃무늬가 대부분이나 추상적인 무늬도 있는데 그 정성들임이 엄청 났다.
꽃잎마다 그 색깔의 그라데이션을 주어서 그 부조된 형태의 다양함과 함께 반복되는 무늬의 단조로움을 ‘카바’하고 있었다. 각 문마다 동으로 된 장신구가 달려 있어서 그런 저런 들인 품의 정성을 배가하고 있었지만 세월의 때를 짊어지려면 아직도 한 두어 세기는 더 필요할 터이니 아직은 예스러움의 시늉에 그치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각종 이름의 불상과 그 협시불들이 즐비하다. 무슨 불상들이 이리 다른 이름으로 많은지 모셔야할 대상도 많은 모양이다. 커다란 불상이 다섯에 작은 협시불이 일곱 인가하니 그들 다른 제각각의 마음에 기대야 하는 인간의 마음만 더 산란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각각의 불상들은 금색은 번쩍번쩍한데 표정들은 모두 비슷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어리석게도 금불상 그러면 그 불상이 다 금덩어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금불상이란 것도 그 알맹이는 나무나 흙이나 석고나 철이나 구리 등 다 제 각각이고 금이란 것도 다른 것이 아니고 그저 금종이를 붙인 정도인데 금 한 돈이면 사방 몇 미터를 바른다니 말이 금이지 사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다만 사람들의 마음을 그 속만큼이나 헛되이 미혹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불상들 앞에서 사람들이 열심히 절을 한다. 어떤 애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족의 안녕을 빌고 있는 엄마 옆에서 천연스럽게 장난을 떨거나 눕거나 하는 모습의 엄마의 간절함과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그 옆의 비구니는 마음으로만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지 하나의 조각 작품이 되어 미동도 없고 그 오른 쪽으로는 본존불들 뒤와 마찬가지로 탱화가 걸려 있는데 색조의 퇴락함이나 발라진 모습이 제법 세월의 티를 내고 있었다.
마루는 좀 전에 봤던 석등 뒤의 절 건물에서 봤던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마루와는 달리 대패질을 반듯이 해서 자연스런 맛이 없고 거기다 니스 칠을 반들거리게 해서 전혀 예스러운 맛은 없었다. 마루 위에는 보통의 정사각형 방석이 아니라 절하기에 편리한 길다란, 짙은 갈색의 방석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나는 불심과 무불심의 경계인 그 문지방에 ‘엉뎅이’를 붙이고 문지방 턱에 두 팔을 걸치고는 느긋한 마음으로 지붕을 올려다보니 지붕의 단청들은 바랄 대로 바래서 그 고풍한 맛이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절간에서 돈들을 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이처럼 금당 안의 단청에는 돈을 들여서 손을 안대는 것이다. 아마는 매일 예불을 해야 하니 그런지 기술 적인 문제가 있어서인지 절마다 다녀 봐도 이 부분은 손을 안대고 바랜 채로 그대로 내버려 두니 늘 보기가 좋다.
거기만 보고 있으면 아주 오래 전에 만든 멋진 무덤 속에나 들어 와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어둑하고 그 바램의 정도도 심하다. 그 위에 마음을 칠해서 상상의 나래를 펴서 시간여행 떠나기가 안성맞춤이다. 여기도 그 바램의 정도가 어찌나 심한지 모든 단청색이 거의 갈색조로 변해서 불상들의 번쩍함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금불상에 미혹당해 불전함에 마음을 넣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처럼 옛 선인들의 장인정신에 미혹당해 천장에 마음을 칠하는 이도 간혹 가다 있을 법하다.
중앙의 각 불상들이 이고 있는 eke집들을 보니 그 꾸며진 붉디붉은 지붕들과, 그 사이의 용이나 각 종 형태의 목각과 그 위에 칠해 져 있는 색들의 다양함에서 오는 대조감이 또한 극명했다. 대부분이 조성된 시기가 짧아서인지 그 색들의 선명함이 강해서 대조감도 강하게 들어 왔다. 올려져서 붙어 있는 각 조각상들은 아마는 불상들을 지키고 있는 상서로운 짐승들을 조각한 모양이다. 어느 절이나 이 eke집의 장식이 그렇듯이 여기도 호화로움과 장식성의 극치를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그 절간 뒤로 어느 절에나 있는 토속신앙에 곁방살이 준 삼성각이 아주 조그마하게 볼품없이 자리하고 있고 또 대적광전 옆으로는 나한전이 있는데 그 수많은 작은 조각상들의 각각의 표정들이 재미있다.
모든 불상들이 하나의 전형화된 모습을 추구하다 보니 불상조각가들이 자유로운 표현의식의 나래를 펴기가 쉽지 안했다면 이 나한상들에 와서는 그런 억압된 마음들을 마음껏 풀어낼 수 있는 그야말로 예술적 기질의 최대한을 발휘할 수 있는 숨통 트인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인지 그 현판의 글씨체로 더 없이 호방하여 나한전 자체가 예술적 기질의 종교적 해석공간내지는 오랜 세월을 예술적 발전에 공헌한 미술 역사의 산 교육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옆으로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사방이 돌로 장식된 무슨 왕의 무덤처럼 거창하게 조성 되어있는 사리탑 보존 건조물들이 축조 되어 있고 그 한 가운데 둥그런 항아리 엎어 놓은 것 같은 사리탑과 그 앞으로 오층석탑이 영원히 사리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서 있다.
또 그 옆으로 적멸보궁이 자리하고 있는데 사리탑 사방의 돌계단 벽면의 부조들이 선부조 형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어떤 것은 이끼를 잔뜩 머금고 있어서 형태를 가름하기가 어렵고 어떤 것은 깨끗하여 형태가 비교적 선명했다.
그 선부조의 형태에서 언뜻 이중섭의 답배종이 선각화가 연상되고 어린애들의 그림이 연상 되었다. 행여나 사리를 누가 캐 갈까봐 주변으로 조그만 석인들이 ‘나래비로’ 서 있다.
그 밑으로 금붕어가 노니는 조그만 연못이 있고 또 미륵전이 거창하게 서 있다.
기울어지고 비틀어진 재목의 느낌을 그대로 사용한 한 기둥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보기가 넉넉하고 여유로웠다. 그런데 그 기둥의 한 귀퉁이에 소화기가 걸려 있었다. 땅에 놔도 될 것을 굳이 이렇게 하필 그 가장 자연스러운 기둥에 걸어 놓았을까? 잘 보이기는 했다.
그 미륵전의 북쪽 외벽은 반으로 위쪽은 불화들이 퇴락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그 밑으로는 흙칠인지 회칠 벽면인데 온갖 낙서가 그어져 있었다.
그 벽면의 낙서들은 대부분 글씨였는데 그 모습들이 너무나 ‘예술스러웠다.’
깊게 파인 자국 가늘게 파인 자국. 큰 글씨 작은 덧 씌워진 글씨, 여러 번 칠해진 벽이어서 엷은 표피가 그 파진 글씨체에 의해 겹겹이 드러나는 모습, 겉의 색과 속에 깊게 파여서 들어난 색의 이중 삼중구조의 멋, 무질서 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통합을 이루고 있는 깊이와 조화의 아름다움, 심지어는 다시 메꿔진 부분이 있고, 직접 쓴 글씨체며, 위의 그림들을 선으로 정리할 때 흘러내린 물감의 모습 등이 나무기둥 좌우와 상하 사이의 틀에 의해서 여러 점의 예술 작품으로 승화된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 위의 불화들도 여러 겹으로 거듭 그려지면서 세월의 무게에 눌려 떨어져 나가고 어떤 것은 겨우 붙어 있어 속 껍질에 그린 것과 바깥 껍질에 그린 것들이 만남과 적당히 바래서 빨리 바랜 색과 덜 바랜 색의 시간차에 의해서 형성된 전혀 인위적이지 않은 ‘시간예술’의 경지며 그 들인 품의 정교함이라던지 단순한 불화들이지만 나는 그 이상의 그 이상의 무엇이 보이는 듯 했고 무엇보다도 그 밑의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서로간의 교섭없이 무작위로 그어진 그림과 이런 인위적이고 계획적이고 기술적이고 오랜 기술의 연마가 뒤 따른 후에 격식과 패턴에 맞게 그려진 그림의 만남이 절묘 했다.
더욱 절묘한 것은 그런 밑의 낙서같은 것들에 대한 절간인들의 배려다.
생각하기에는 다 지워버려서 새 흙칠이나 회칠을 할 법도 하고 그 흔하디 흔한 낙서금지란 팻말이나 경고문 하나 정도 있을 법한데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 품이 부처를 닮아서 여유롭다 보니 이런 절묘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모든 예술은 사실 그 후견인이 만드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그랬고 다빈치가 그랬다.
바빈치는 그 옛날 파리에서 살 때 왕도 그의 물감심부름을 해 줬다는 말이 있으니 그가 혼자 결코 거장이 된 것이 아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이가 없이는 절대로 예술이 없고 예술인이 없다.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이고 최소한 누군가에 의해 하나의 분기점은 되었을 때 예술이 예술가가 탄생하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그 절간의 중들이 넉넉함은 오늘 나처럼 여기 와서 그나마도 볼거리를 최소한한 개는 건지고 가는 계기를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으니 그들이 고마울 뿐이다.
미륵전을 돌아 정면에 서니 그 미륵불의 웅장함이 또한 천정을 뚫고 지나갈 법하다.
삼층탑이라고 해서 내부도 삼층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내부는 글자 그대로 ‘통자’로 되어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목탑 형식의 불전이 많았겠지만 다 소실되거나 망가져서 없고(마지막으로 남았던 것은 쌍봉사로 얼마전에 신도인지 주지의 촛불로 날라감) 이것도 재건된 지가 얼마 안 된 것이겠지만 그나마 예전의 모습들을 상상해 보는데 도움이 되리라.
건출물의 구조적인 결함이나 어려움 때문인지 여기저기 외부에서 들어온 땟국물 자국이 지저분한 가운데 그 금옷 입은 속은 석고덩어리인 미륵불의 웅장함은 엄청났다. 미래에 이런 번쩌거림으로 현세에 나타난다니 나같은 놈이야 완전히 믿거나 말거나지만 신도들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이 미래불 덕에 여기서 발원한 종교 단체도 있다니 그 위용이 이래 저래 대단했다.
하지만 그 크기에 눌려서인지 어깨 위나 소매 위나 치켜든 손 위로는 어뜻 보면 금색과 비슥한 먼지 색을 뿌옇게 덮어 쓰고 있어서 금색의 휘황함을 조금을 누구러트리고 있었다.
먼지야 있건 없건 사람들은 열심히 그 커다란 금색 앞에서 절들을 하고 있다.
주변은 역시 빛 바래서 흙색 톤이 주조색인데 그 옆의 탱화도 갈색통이 주조색이라 벽면에 착 달라 붙은 느낌이고 그 앞으로 깔려 있는 온갖 무늬의 카펫트가 인상적이고 불살 왼쪽으로 놓여 있는 극락조 꽃이 인상적이다. 꽂는 이나 보는 이가 극락을 가고자 하는 염원이 꽂혀 있는 것일까?
내부의 기둥들은 밑둥으로 덧 붙여져 수리한 모습들이었다. 어느 때인가 대대적인 수리를 한 자국이리라. 그 덧 붙여진 부분이 신도들의 극락가기의 염원의 발 디딤판이라도 되리라는 염원이 서려 있는 듯 했다.
여러 신도들 사이에서 비구니도 절을 한다. 잘 다려 입은 옷과 적당한 회색톤과 파르란한 머리통이 금색의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아련하고 멀고 슬프고 안쓰럽고 아름답다.
그녀의 흰 양말과 거기 박혀 있는 애들 무늬 같은 로고가 선명하다.
돌아서는 아까의 그 세 노인들이 열심히 설명판들을 보면서 나름의 의견들을 첨엄하면서 사뭇 학구적인 토론들을 하신다.
절밥을 얻어 먹을 시간은 지나고 또 그럴 자격도 염치도 뻔뻔스럼움도 없는 지라 우리는 점심을 해결할 요량으로 절을 되돌아 나왔다.
그런데 길 옆에 올라갈 때는 미처 못 봤던 웬 거참한 탑인지 하는 조형물이 있다.
무슨 자연보호 헌장인가를 엄청 커다란 돌 조형물 ‘구탱이’에 새겨 넣은 그런 것이었다.
아니 이런 산중에 누가 그런 미련한 건축물을 만들어 놓았을까?
그런다고 누가 그걸 읽고서 자연을 보호할 마음이 만에 하나라도 생긴단 말인가?
그런 잡스런 조형물이 오히려 큼직만한 공간을 차지함으로서 이 좋은 산책길을 망친다고 생각을 못 했단 말인가? 그런 엄청난 돈은 누가 들였단 말인가?
그것을 계획하는 동안 그것을 건축하는 동안 그 무지에 대해서 깨우침을 준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세상에 한심한 일이 한 둘이 아니지만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었다. 그 조형물이 우리들의 우매함의 표상으로 오랫동안 남아서 후손 대대로 전해 질 것을 생각하니 낯이 뜨거웠다.
아까의 그 다리를 건너 나오는데 장애인이 이번에는 둘이다.
아마 부부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옷이 전혀 울긋불긋하지 안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나는 그 두사람에 행여 눈길이 부닫힐까봐 조심하면서 지나오고 나서 아무래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우리 애를 시켜 거기 ‘돈통’에 넣고 오라고 했다.
그래도 부자 부처 ‘돈통’에 넣는 것보다 더 복이 될 것 같아서 그랬는데 늘 마음이 여리고 모질지 못한 놈한테 시켜서 그 노 마음이 더 무디어지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사람이 무슨 쇠도 아니어서 담금질을 할 것도 아니고 다 제 생긴대로 사는 것이려니 하고는 내려오니 아직도 그 사당에는 어둑한 속에 촛불이 펄럭이고 절하던 무녀는 간 곳이 없고 그 부처의 얼굴은 더욱 괴기스러웠다.
우리 일행은 아까 고속도로 빠져 나올 때 받았던 행사안내 ‘지랄시’를 보고서 거기로 가기로 했다. 이름 하여 ‘김제 지평선 축제’ 이름이 좀 희안했지만 먹거리도 있고 볼거리도 있다니 마침 거리도 30분 거리라서 거기로 달렸다.
주차장을 나오면서 식당을 헤매서 찾아 다닐 것이 아니고 그냥 싸온 거 바닥내자고 길거리에 차를 세우고 주섬주섬 아까 아침에 오다 먹고 남은 것들을 꺼내서 다시 치우기 시작했다. 윗집 애 엄마와 우리 집 와이프가 둘 다 손이 커서 먹기는 그런대로 푸짐은 아니어도 모자라지는 안했다. 아마 이번 여행 중에 제일 기억에 남을 일이 길 달리다 퇴약볕 차 속에서 점심 먹은 기억이 아닐까 싶다.
김제를 지나서 행사자에 가는데 차들이 일차선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우리는 바쁠 것이 없는지라 넉넉한 마음으로 주춤 주춤거려 벽골제에 도착했다.
행사가 다 그렇듯이 막히는 것 만큼 볼 것이 없었다. 우리는 행사장을 쭉 가로질러서 연 날리는 곳에 가서 애들 연을 한 개씩 ‘앵기고는’ 적당히 부는 바람에 연을 날리게 했다.
그런데 웬걸 그 역사가 어린 ‘뚝’방에는 연 날리는 사람이 많아서 연줄이 뒤섞여 감기기가 예사였다. 거기다가 장사꾼이 일부러 그랬는디 줄 맨 끝이 ‘연줄 돌리개’에 매여 있지를 안해서 윗집 애 연이 강물 저쪽으로 날라가 버렸다. 바람이 제법세고 물은 깊은지라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윗 집 아저씨는 다시 돈을 축냈다.
잠시 후 잘 날리던 우리애도 그만 연줄을 날려서 연이 물건너 그 넓은 평야를 비행기마냥 날라 가는 것이 아닌가? ‘지전 날라 간다!“ 소리 질러 본들 바람이 갑자기 역풍이 불 것도 아니고 한 참을 날라가더니 먼 곳의 전깃줄에 연 줄이 감겼는지 연이 혼자서 허공에 날면서 신나하는데 여간 약오른 것이 아니었다.
내가 또 누구인가 뚝방길을 달려서 저만치 있는 다리를 건너 강 건너로 가니 거긴 날라온 연들이 지천이었다.
나와 아들 놈은 대충 주워서 서너개가 되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샀던 싸구려 가오리 비닐 연 말고도 제대로 한지로 만든 방패연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물 속에 있는 통에 고생고생해서 건지고 다른 좀 큰 가오리연은 줄이 감겨서 고생해서 줄감기해서 가지고 오는데 가오리 연은 손자것이라고 달라는 노인네가 있는 것이 아닌가?
확인할 수도 없는 것이라 뺏기고는 그나마도 그림도 그려져 있고 큼직막하고 튼트난 종이 방패연은 ‘건진’ 것이 다행이다 싶어서 우리는 그냥 그걸 갖고 돌아 왔다.
연 날리던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실 끝에 불을 달아서 염원을 매달아 날려 보내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은 남이 날린 연을 줍기나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염원을 바래기는 틀렸다.
우리는 다시 절간으로 가기로 했다.
그것은 원래의 목적인 저녁 예불을 보기 위해서이다. 애들은 정작 집에 붙잡아 두고온 컴퓨터 게임 생각에 가자고 보챘지만 우리들의 애들 추억 억지로 만들어주기 프로그램의 강렬한 의욕의 그 놈들의 아우성을 덮어 버렸다.
오는 길에 우리는 짜장면 집에 들렸다. 짜장면 한 그릇에 3500원, 쟁반짜장은 일인분에 5000원! 그런데 그 바로 옆의 거시가 탕 값은 4000원. 아니 이렇게 싼 탕이 있다니?
나나 울 집 놈은 당연히 거기 가자 였지만 윗집 아저씨네는 고양이 잃어 버리고 삼사흘을 동네를 헤맨 ‘애묘족’이요 족보도 없는 털 다 빠진 개를 식구처럼 애지 중지 하는 집이니 택도 없었다. 그저 침만 흘리다 짜장면으로 창자를 밀어 넣고는 절간으로 다시 향했다.
아까의 그 사당은 여전히 촛불만 펄럭이고 그 안의 장승같은 그 돌부처는 더 무서운 모습으로 어두운 사당안을 지키고 있었다. 아까의 길을 또 더듬어 올라 가니 서서히 해는 져가고 날은 좀더 서늘해져 가고 있었다.
아까의 해탈문을 넘어 서니 드디어 범종각 쪽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검은 고무신에 갈색 옷 색 띠를 목덜미에 삐죽 내밀고 긴팔 소매 펄럭이며 한 중이 짐승을 죽여서 만든 가죽을 두들기고 있었다.
좌우에 우로 춤추듯이, 가운데서 바깥쪽으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가장자리 테 부분을 다리미질 하듯이, 좌우로 더듬듯이 두들기고, 때로는 긁고 원으로 휘드르며, 한 손은 중안에 놓고 다른 손은 돌아 다니며 치기, 북채를 세워서 눕혀서 치기, 크게 두 북채를 같이 치다가 따로 치기, 땅땅하고 세게 치기 자근자근 치기, 자게 치다 크게 흔들고 앞뒤 좌유로 흔들며 치기, 끊어질 듯하다 다시시작하기 등의 한결 같은 동작으로 천년을 내려온 그 북치기 기법으로 두들기니 그 범종각의 짧은 역사를 뛰어 넘고도 남음이 있는 시간성으로 어둠을 두들겨 몰아 온다.
그 북소리를 우리 뿐만아니고 모악사 꼭대기의 군부대 싸이트 장병들도 들을 수 있고 산자는 물론 사자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소릴 통해서 다들 해탈의 경지는 못 가도 일순간이라 이승의 어지러움을 잊고 마음을 맑은 물처럼 깨끗이 할 수 있을까?
갑자기 꽝꽝거리더니 나의 상상을 뚝 잘라 버리면서 북소리는 멎고 이어 종소리.
아마 108번을 치는지 같은 동작으로 한 참을 뎅뎅거리더리 멎고
목어를 툭탁 치는데 그것은 금방 끝낸다. 물고기 소리는 중생들의 안녕에 별 도움이 안 되는지......
이어서 동판을 또 ‘딩딩’거리더니 그 많은 악기를 연주하던 스님은 휘적휘적 요사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데 손가락 마디마다에 하얀 반창고들을 감고 있었다. 북치는 것도 장난이 아닌지 연습하다 손이 부르트기라도 했는지 북칠 때 손가락 보호하려고 그랬는지 알 수가 없지만 암튼 북치는 일도 장난은 아닐 거란 생각이 그 반창고를 보고 알았다.
우리는 이어서 목탁소리와 염불소리를 따라 갔다.
아까의 대적광전은 촛불과 전기불로 밝혀져서 목탁소리와 염불소리도 공간을 서서히 채워가고 있었다. 턱괴고 안을 보니 아까는 미처 발견을 못했던 영정이 우리와 함께 관객이 되어 목탁소리 염불소리를 듣고 있고 그 닫집의 붉은색이 유독 붉게 빛나면서 부처이 위용을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본존불 앞으로는 향로가 향 몇 개를 태우고 있는데 백제 대향로를와 비교하기에는 택도 없었다. 그 앞으로는 불전함이 있었는데 오늘의 시줏돈이 엄라나 쌓였을까 궁금했다. 어느 교회의 일요일 헌금은 하도 많아서 경찰의 호위아래 은행으로 간다는데 절간의 시줏돈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그 앞으로는 아마 고승의 설법대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모든 장식이 나무로 되어 있는데 앞에는 사자 두 마리가 받치고 있었다. 절간의 사자들은 맨 돌덩이 석등을 받치고 있든가 돌계단을 바치고 있던가 돌 공을 받치고 있든가 아니면 이언 설법대를 받치고 있어야 하니 그 놈들은 운동을 안해도 알통이 두둑하리라.
두 사람이 읊고 있는데 그 목 당겨서 바리톤으로 읊조리는 가성이 아주 착 가라 앉아서 듣기가 좋았다. 그 중은 앞뒤로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며 엎드려 절할 때도 쉽 없이 염불을 토해 내는데 목탁 두드릴 때 잠시 멈출 때가 있을 뿐이었다. 또한 옆으로 돌아서서 도 염불을 하는데 그 쪽은 탱화 쪽이었다. 그림도 불상 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와아! 그럼 그 불상을 그린 이도 거의 부처대접을? 나도 불화나 입문해 볼까?
또 한 중은 거의 미동도 없이 베이스를 깔듯이 나직하게 읊조리는 음이 너무도 조화로웠다.
조금 있으니 아까의 그 종 치던 스님도 합심하여 읊조리는데 그는 또 가운데 음을 찾아서 읊조리는 것이 아닌가. 네 명 다섯 명이 되면 또 그 사이음들을 찾아서 자리하는 걸까?
가만히 보니 승복들이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무슨 승복의 형태가 승려간의 계급의 차이나 연수나 득도의 차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 염불소리는 내가 어렸을 적에 듣던 그 “마하바냐밀다.........”하는 아버님의 염불 소리였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특히 한 겨울에 새끼를 꼴 때나 시간이 한적할 때는 그런 염불들을 외우셨다.
아마 큰형 위로 세형이나 어린나이에 저승으로 보내야 하는 심정을 그런 독경 속에서라도 위안을 삼으려고 하셨는지 모르겠다. 정작 당신이 가실 때는 그 누구도 찾거나 부름이 없이 담담히 마실 가시 듯이 가셨다. 꼭 부처가 아니라도 저승길은 마음먹기에 따라 쉽기도 어렵기도 한 모양이다.
그 중들의 염불소리는 조용한 산사에 우리 네 사람의 관객만으로도 충분한 소리로 낭낭히 조용히 물 흐르듯이 금당 안을 채루고 산사에 퍼져나갔다.
부처들은 그저 지긋이 내려다만 볼 뿐 통 반응이 없었고 우리 애들만이 지루함에 부스럭댈 뿐이었다.
어릴 때 듣던 또 다른 염불“정구엽지기는 수리수리 마수리....”를 읊더니 마지막으로 지장보살만 한참을 읊더니 목탁을 툭탁거려 마지막을 고하는 모양이다 싶더니 다른 사람들은 불당을 나오고 그 아까의 바리톤 스님만이 다른 목탁을 바꾸어 두둘기며 한 낮에 어떤 아주마를 보고서 ‘꿍심’이라도 먹은 것이 죄스러워서 마치 혼자 벌이라도 서는지 다른 염불을 계속한다. 아니면 오늘이 그 스님의 나머지 목탁염불의 당번인지....
여전히 비로나자불은 눈을 내리 깔고 있을 뿐이고 촛불은 바람에 살살 나부끼고 목탁소리도바람에 실려 산중을 휘돌아 감길 뿐이었다.
한참을 더 들어야 할 것 같아서 턱 괴고 문지방에 기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뒤돌아 하늘을 보니 딱 반쪽인 달이 멀리서 구름사이을 유영하면 힐긋 힐긋 우리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검은 덩치로 미륵전은 촛불만 아득하고 주변은 검푸른 빛으로 사위어 가고 있었다.
어둔 길을 돌아서 오면서 애들이 추억여행도 그 끝자락에 섰다.
나는 길을 달려오면서 오늘의 기억을 애들이 언제까지 어떤 식으로 기억해 줄지 궁금했고 그래도 아버지로서의 따뜻함으로 섞어서 같이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차에 같이 싣고서 집으로 졸음을 쫓으며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