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삭녕(朔寧)은 경기도 연천군(漣川郡)과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일부지역에 위치했던 지명이다. 고구려 때에 소읍두현(所邑豆縣)이라 불리우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삭읍(朔邑)으로 개칭되어 토산군(兎山郡)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삭녕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년(현종 9)에는 동주(東州: 鐵原)에 병합되었다가 1107년(예종 2)에 승령현(僧嶺縣)으로 이속되었다. 1413년(태종 14)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여 승령현을 병합하였고, 1414년에 안협현(安峽縣)을 합쳐서 안삭군(安朔郡)이 되었다. 1416년에는 안협현을 분리하여 부활시키고 삭령군으로 개편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개성부 삭녕군, 1896년에 경기도 삭녕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삭녕군이 폐지되어 내문면(內文面), 인목면(寅目面), 마장면(馬場面)은 강원도 철원군에 속하였고, 나머지는 연천군에 병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삭녕최씨(朔寧崔氏) 시조는 최천로(崔天老)로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신유보(辛酉譜)》 세록편(世錄篇)에는 시조 최천로와 최유가(崔瑜價)를 이어 실었다. 최유가는 고려시대 국자감대사성추밀원부사(國子監大司成樞密院副使),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그런데 모두 원조(遠祖)로서 중간 세계가 전해지지 않고, 친어모군낭장(親禦侮軍郎將) 최선보(崔善甫)와 함경전부사(含慶殿副使) 최연(崔珚)을 1세조로 세계를 이어왔다.
조상들이 삭녕의 괴음촌(槐陰村)을 평장동(平章洞)으로 개칭하여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삭녕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분적종 및 분파
통진파(通津派), 양구파(楊口派), 삭녕파(朔寧派), 문정공종파(文靖公宗派), 남원(南原)·해미(海美)·양주(楊州)·태인파(泰仁派), 함열(咸悅)·홍주파(洪州波), 경파(京派), 개성수방파(開城秀邦派) 등 20여개로 분파되었다.
주요 세거지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도마리
경상남도 사천군 사남면
경상남도 사천군 사천면
경상남도 사천군 정동면
전라남도 구례군 용방면 신도리
전라북도 남원군 기매면 계수리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효기리
전라북도 옥구군 성산면 봉리
전라북도 완주군 조천면 신풍리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신정리
전라북도 정읍군 옹동면 산성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삭녕최씨는 12,055가구 총 38,73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