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 학생 독립운동과 항일정신
1929년 11월에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학생 항일운동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학생들이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가장 강하게 보여준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시위뿐 아니라, 연설과 웅변을 통해 민족의식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학생들에 의한 웅변운동의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 발생 배경과 웅변을 통한 민족운동
1920년대 후반 조선의 학생사회는 이미 3,1운동 뒤이기 때문에 강한 민족의식과 더불어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 교육정책은 조선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극심했을 뿐 아니라, 학교 안에서도 일본인 학생과 조선의 학생 사이의 갈등이 잦았다.
발단은 1929년 10월 30일,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 학생들이 조선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고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 학생들을 분노케 한 데서 비롯된다.
여학생이 희롱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조선 학생들이 항의하면서 충돌이 일어났고,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하였다.
결국, 전국의 약 320여 개교 학생 5만여 명이 참여하는 항일운동으로 확산이 되었으며, 학생들은 학교 안팎에서 비밀집회를 열고 항의연설을 하였다. 학생대표들은 이 집회를 통해 일본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조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며, 학생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격정적인 연설을 하였다.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교육을 타도하자.’거나 ‘조선 학생은 단결하라.’, 그리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싸우자.’ 등의 일본에 저항하는 격문과 선언문을 작성하여 낭독하였으며, 이러한 연설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민족운동이었던 것이다.
광주 학생 항일운동은 이후 한국 학생 웅변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즉, 학생연설의 전통을 세웠고, 연설을 주도했던 학생들이 이후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민족정신과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전통을 세웠던 것이다.
☛ 한 여학생을 향한 모욕에서 거대한 민족의 함성으로
10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경, 광주발 통학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다. 학생들이 개찰구를 빠져나가던 순간,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보통학교 3학년생 박기옥, 이광춘, 이금자 등에게 ‘센징(鮮人)’이라고 조롱하며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는 일이 벌어졌다. 박기옥의 사촌 동생이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박준채가 이를 보고 항의하면서 한일학생 사이의 충돌로 번졌다.
이 장면은 단순한 학생 사이의 말다툼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인 학생들은 학교에서부터 민족차별을 경험하고 있었다. 일본인 학교와 조선인 학교 사이에는 시설과 예산의 차이가 있었고,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도 민족적 차별이 있었다.
광주지역 학생들은 이미 성진회와 독서회 등을 통해 민족문제를 공부하고 한일의식을 키우고 있었다. 따라서 나주지역 사건은 갑자기 생겨난 분노의 시작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쌓여있던 민족적 울분이 터져 나온 하나의 도화선이었다.
더욱 큰 분노를 일으킨 것은 사건 이후 경찰의 대응이었다.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이 충돌하자 일본인 경찰은 조선인 학생 쪽을 일방적으로 탄압하였다. 이후 일본인 학생은 비교적 가볍게 처리된 반면, 조선인 학생들이 대거 체포 송치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 학생 72명이 체포되어 62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일본인 학생은 7명이 체포되고도 한 명도 검사국에 송치되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적인 처리는 학생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마침내 11월 3일, 광주의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다. 그날은 일본에게는 메이지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명치절이었지만, 조선 학생들에게는 개천절이기도 했다.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고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침묵으로 맞섰고, 이어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과 경찰의 편파적인 처우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외침은 단순한 개인적인 분노를 넘어 민족차별 철폐, 식민교육 반대,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거대한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리로 나선 순간 민족혼이 불타올랐고, 만세와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장재성 등 학생지도자들은 투쟁의 대상을 단순히 일본인 학생들로만 하지 말고, 일본 제국주의로 돌려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학생들의 분노를 조직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키려는 의도였다.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지역사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간회와 청년단체, 그리고 학생단체들은 광주사태에 개입하여 진상조사와 지원운동을 벌였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쟁은 나주와 목포 등 인근지역으로 번졌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거대한 학생독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한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긴 사건은 작은 불씨였다. 그러나 그 불씨가 거대한 민족의 불꽃으로 타오른 것은 이미 학생들의 가슴 속에 민족정신이라는 장작이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유창한 연설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외친 ‘대한독립’이라는 말은 어떤 연설문보다 강력했다. 그것은 학생들이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민족의 존엄을 선택한 행동의 웅변이었다.
1929년 광주의 학생들이 보여준 민족정신은 이후 전국으로 퍼저나갔다. 1929년 말부터 1930년까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적인 학생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었고, 참가학교가 194개교였으며, 학생 수가 약 5만 4천 명에 이르는 거대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