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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평이씨 기성군파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咸李(建煥59)
광천읍 광천리 신대마을에 있는 원주 변씨의 열녀각
김병연의 외할아버지인 이유수는 생부(生父)의 가르침을 받아 무예(武藝)를 익혀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이후 내직으로 선전관(宣傳官), 오위장(五衛將), 내금부(內禁府), 당상선전관(當上宣傳官), 부사(府使) 등을 역임하면서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이르렀다.
원주 변씨의 정문(旌門)에 이유수의 처라고 기록돼 있는 것과 이후 홍주실록, 홍주향교지, 홍성군지, 조선환여승람에서 원주 변씨의 간략한 열행(烈行)에서 함평 이씨를 확인했고, 어렵사리 입수한 계보(系譜)에서 그의 사위가 김안근이고 외손자가 병하와 병연임을 확인했다.
함평 이씨 가문에 내려오는 <수사 유수 배 원주 변씨 열행 사적문(水使儒秀配原州邊氏烈行事蹟文)>은 '중요하고 귀한 이름을 가진 77인의 선비(편집자 주 : 예조 근무)에게 전하던 유통문(儒通文)을 작성 발문하면서 온 나라 백성들에게 행실의 근본이 되도록 조정에서 널리 선양해 귀감이 되도록 해달라'고 간한 글이다.
간추려 살펴보면, 수군절도사인 이유수의 아내 숙부인(淑夫人) 원주 변씨는 고 길주목사(吉州牧使)인 변성화의 따님으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단정하고 온화하고 맑으며 지혜가 총명하고 마음이 곧고 명민(明敏)하였는데 이것은 본래 타고난 성품이 이러했다."고 기록했다.
정미(丁未) 1787년(정조 12년) 여름에 길주공(吉州公 : 변성화, 원주 변씨의 부친)의 병이 위독하게 됐는데 부인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댔음에도 상을 당하고 말았다.
보통 사람들은 아들들이 맡아서 상을 치르고 예를 다하지만, "어찌 아들과 딸이 다를 바가 있겠으며 우리 형제들은 이 옳은 길을 따를 것"이라며 맏누이로서 슬퍼하며 시가(媤家)에 간절히 눈물로 읍소(泣訴)해 마침내 허락을 받아 친정으로 돌아가 노모를 봉양하는 데 정성과 힘을 다했으며 부친 묘소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채식을 하면서 3년간 전(奠)을 올리는 등 어버이에게 극진한 효를 행했다.
신미(辛未) 1811년(순조 12년) 겨울 변씨가 남편 이유수와 함께 숙천(肅川 : 평안도 숙천군)의 임지에 있을 때 홍경래의 난을 만났다.
이공(李公 : 儒秀)은 임금의 명을 받아 상경해 없는 사이 청천강 북쪽은 이미 여러 고을이 함락 되고 몹시 위급하게 됐다. 이에 원주 변씨는 기개 있는 여장부로서 남편 대신 장병들을 모아 단속군(團束軍) 1,500명을 모아 성을 방어하는 한편 남편에게 급보(急報)했다. 황급히 달려온 이공은 관군을 거느리고 정주성에 도착해 반란군을 진압하고 민심을 바로잡아 내란평정에 큰 공훈을 세웠다.
이공이 지병인 담병(痰病)을 계속 앓고, 창원부사로 봉임돼 노숙을 많이 한 탓에 수토불복(水土不服)이 겹쳐 병이 심화되자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 병든 남편에게는 백약이 무효해 병이 위급해지자 원주 변씨는 칼을 들어 자신의 넓적다리를 깊게 갈라 피를 떠서 남편의 입에 흘려 넣었다.
수차 심한 토혈로 기진한 남편의 목숨을 연명시키는,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자신을 희생시키며 전심전력을 다했다.
끝내 부군이 운명하자, 변란 때 준비해두었던 비석(砒石)을 마시고 굳은 절의로서 남편의 뒤를 따라 조용히 순절했다. 이에 선과 의를 옳게 여겨 인륜의 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유통문을 예조(禮曹)에 청원한 것이 임금에게 상달돼 1821년(순조 21년) 명정(命旌)을 내려, 집에서 가까운 광천리 신대(新垈)마을 어귀에 원주 변씨 열녀각을 세웠다. 지금도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정려각이 지나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정.측면 한 칸의 정려 안에는 명정 편액(扁額)을 걸어 놓았는데, 원문은 이러하다.
烈女(열녀)
贈嘉善大夫兵曺參判兼 同知義禁府府事 訓練院都正
(즉가선대부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수사 훈련원도정)
行折衝將軍 全羅左道水軍節度使 李儒秀妻 贈 貞夫人 原州邊氏之閭
(행절충장군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유수처 증 정부인 원주변씨지려)
純祖 二十一年 壬午 命旌
(순조 이십일년 임오 명정)
※ 이유수(李儒秀)
함평인으로 자(字)는 사준(士俊)이고, 도학(道學)이 높았던 양곡 이의길의 5세손이다. 동고 이경의 증손(曾孫)으로 할아버지 석순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있었고 그 아버지 부사(府使) 영운(府使 榮運)은 영조(英祖) 기축년(1745) 12월 26일에 홍주에서 출생(出生)하여 중부(仲父) 복운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상이 영특하더니 생부(生父)의 명을 받아 무예(武藝)를 배웠다. 정조(正祖) 갑인(甲寅)에 별천으로 내시를 받았는데 철전(鐵箭)을 쏘아 삼중하여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였다.
내직(內職)으로 선전관(宣傳官), 오위장(五衛將), 내금부(內禁府), 참상(參上), 당상선전관(當上宣傳官), 어영훈국천총(御營訓局千摠)으로 있을 때 왕명(王命)을 받고 왕복 4시간의 현릉원에 가서 부정사건을 적발하고 돌아왔다. 왕 이 이에 크게 칭찬(稱讚)하고 사찬을 내리었다. 상원군수에 임명된 후 치산치수(治山治水)에 힘쓰고 다시 숙천부사로 전임(轉任)한 후에도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農事)를 권장하였다. 순조(純祖) 신미(辛未)년 (1811)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관서일대가 병란에 빠졌다.
이때에 이유수는 공사로 서울에 가고 부재 중에 유수의 아내 변씨가 모병(募兵)하여 단속군 1500명으로 성(城)을 방비하는 한편, 유수에게 급보(急報)하여 장사 20명을 거느리고 정주성에 도착하여 적(適)을 대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홍경래의 난을 평정 하는데 수훈을 세웠으나 조정(朝廷)에서는 그 공을 표창(表彰)하지 않고 남양부사로 전임(傳任)시켰다.
당시 이 지방은 흉년(凶年)으로 백성(百姓)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구제(救濟)에 힘썼고, 전라(全羅)좌수사(左水使)로 있을 때에는 권력(權力)을 등지고 황장산을 개간한 자가 있었는데 이를 사정없이 처단(處斷)하였다. 창원(昌原) 부사(府使)로 전근된 후 노숙을 많이 한 관계로 수토 불복으로 마침내 신사(辛巳)년 2월 3일 세상(世上)을 떠났다. 철종(哲宗) 무오(戊午)년에 순조(純祖)의 묘호(廟號)를 올려 임신(壬申)년 감난(勘難)의 공(功)을 추신(追伸)하여 병조(兵曹)참판(參判)의 증직(贈職)이 있었다. 묘(墓)는 장곡면 당산리에 있다.
첫댓글 함평인 이유수와 원주 변씨 사이에서 나신 따님이 김병연의 모친이시군요. 대단한 내력을 가진 집안이네요. 자료 고맙습니다.
훌륭하신 함평이씨 조상님들의 자취를 이렇게 올려주시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단편적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정확한 내력을 알수 있어 좋습니다. 함이의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