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아침 일어나 보니 대한민국 사회에서 좌파들이 활개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좌익 인물들도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좌익이 너무 활개치는 것은 스스로 국가 안보의 위기를 자초하기 때문이다. 좌익은 정말로 대한민국의 안보가 풍전 등화에 처해 있기를 바라는가? 어느날 갑자기 서울시청에 인공기가 휘날리고 인민군 장갑차들이 정부청사를 접수하는 날이 오는 것이 좌익이 원하는 바인가? 너무도 무모한 짓이다. 설사 전쟁을 피하고 서서히 단계적으로 적화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그리고 6.25동란 중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을 따라 북한으로 갔던 남로당 간부들이 단지 북한 토종 빨갱이가 아닌 이유로 모두 총살형을 당하였다.
오히려 남한 사회에서는 전 정승화 참모총장처럼 중국 공산당 팔로군 출신 장교들이 출세의 정상까지 올라갔으나, 북한에서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 출신 빨갱이들을 모두 학살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북한에서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 출신 빨갱이들을 연안파라고 불러 김일성의 소련파 빨갱이와 구별한다. 그런데, 같은 빨갱이들끼리 왜 서로 물어 뜯고 죽이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것이 빨갱이들의 생리이다. 연합투쟁전선을 내세우며 싫컨 이용한 다음 토종 빨갱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죽이는 것이 그들의 생리이다. 6.25 동란 중 남한 사회의 좌익은 남로당이었다. 오늘날의 범대위나 한총련에 해당하는 좌익이었다. 그들이 반미 시위하여 주한미군 철수시키고 김일성에게 남침의 기회를 주는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6.25 동란이 일어나자 팔에 붉은 완장을 찬 남로당 간부들의 수가 갑자기 불어났다. 그중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장인 권오석씨처럼 농사군이 갑자기 남로당 간부들이 된 이들도 있었다. 잘 사는 사람 학살하여 토지도 몰수하고 출세도 할 수 있는 때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붉은 완장차고 죽창 든 이들이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설치며 대학살극을 벌여 김일성에게 충성하였다. 경찰 가족도, 공무원 가족도, 지식인들도, 군인 가족들도, 도토리 키재기하여 자기네보다 잘 사는 사람들도 골라내어 자기네끼리 인민 재판한 다음으로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부산을 제외한 전 지역을 인민군 장갑차가 접수하였으며, 자기들도 이렇게 열심히 학살하며 김일성에게 충성하였으니 이제 적어도 고을 사또 자리는 맡아논 당상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좌익의 세상이 온 듯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웬일인가? 9.15일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면서 상황이 역전되지 않는가? 후방의 보급로가 완전 차단된 인민군들이 후퇴하기 바빴으며, 미군과 국군이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지리산 남쪽에 있던 인민군 병력도 퇴로가 차단되어 후퇴하지 못하고 지리산 빨갱이로 남는 판국에 노무현 대통령의 장인 권오석씨처럼 경상도의 남로당 빨갱이들은 미처 월북하지 못하였다. 남한에서 이들은 죽창으로 동포를 죽창으로 학살한 죄목으로 법정에 서야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동포 학살로 김일성에게 열심히 충성하다가 월북했던 남로당 간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요즘, 북한에서는 남조선에서 영웅 권오석 동무의 딸이 영부인되었다고 난리도 아니다. 여기서 좌익은 이 물음에 답하여야 한다. 만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한에서 좌익을 자처하는 그들도 인간의 탈을 썼으며, 털끝만한 애국심이라도 있다면 그들도 지금 북한에서 선전하듯이 권오석씨를 영웅이라고 생각하는지, 만일 그런 상황이 재연되면 그들도 수십 년 한 동네에서 같이 살던 동포들을 단지 자기들보다 생활 수준이 높거나 학력이 높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아 죽창으로 학살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영웅적인 행동인가?
그럼, 이 문제에 대한 좌익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마이크를 6.25 동란 중의 김일성에게 옮겨 보자. 6.25 동란 전에 한국의 두 대표적 공산주의 지도자는 남한의 박헌영과 북한의 김일성이었다. 그리고 박헌영의 남로당은 오늘날의 빨갱이 조직인 범대위가 하고 있는 일을 훨씬 조직적으로 하였다. 주한미군 철수, 반미 시위를 하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사회 각계 각층에 오늘날의 한총련과 같은 좌익 세력 조직을 확산시킨 다음 남한에서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 쳐들어오라는 신호를 김일성에게 보냈다. 그러면, 과연 오늘날 김정일이 권오석을 영웅이라고 부르듯이 김일성이 박헌영과 그의 남로당 빨갱이 일파를 영웅으로 우대하였는가? 아니다. 토종 빨갱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두 잔혹하게 처형하였다. 자, 여기서 마이크를 옮겨받은 김일성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1952년 12월 15일, 김일성은 노동당 제 5차 전원회의에서 핵폭탄과 같은 발언을 거침없이 했다. "종파분자들은 당과 정권기관에 파고들기 위해 과거의 혁명생활에서 깨끗지 못한 것을 서로 엄폐해 주며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다… 우리는 오늘 이런 분자들을 묵과할 수 없다! 종파주의 잔재를 그냥 남겨둔다면 인민민주주의 국가들과 우리의 형제적 당들의 경험이 가르쳐 주는 바와 같이 그들의 마지막 길은 적의 정탐배로 변하고 만다는 사실에 우리 당은 심심한 주의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1953년 2월 박헌영은 연금당했다. 동시에 이승엽,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이원조 등 남로당의 지도부들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7월 30일 이승엽, 임화 등 등 남로당 간부들과 당원들이 기소되었다. 8월 3일 공판이 시작되었고, 8월 6일 이승엽과 임화 등 남로당 간부들에게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남한에서 반미 시위, 주한미군 철수, 반정부 데모를 위해 오늘날의 범대위, 자통협, 한총련, 전국연합처럼 싫컨 이용해 먹다가 사형시키는 데는 사흘 이상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는 당연히 공산주의 이론의 대가요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던 박헌영이었다.
마크 워커 병장이 고의로 윤화사고를 일으켰다는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범대위가 그를 살인마라고 부르며 처형을 요구하듯이 이북 빨갱이들의 인민 재판은 범죄 증거를 꼭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처형의 목적이 있으면 고문으로 엉터리 자백을 강요한다. 아무리 빨갱이들의 무법 세상이지만 김일성이 박헌영을 죽이려면 범죄 증거가 필요했다. 그러나 몇달 동안 온갖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미제 간첩이라는 거짓 자백을 하기를 거부하자 김일성은 고문실에서 박헌영을 빨개 벗기고 여러마리의 세퍼트를 풀어 박헌영을 물어뜻게 했다. 온몸이 물려 뜯기고야 엉터리 자백 요구에 응한 박헌영은 1955년 12월 15일 초췌한 표정으로 빨갱이 재판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1939년부터 체포될 때까지 미국의 간첩으로 있었다…." 그리고 12월 17일 그는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이렇듯, 연합전선을 위해 이용해 먹을 때에는 영웅으로 부르다가 나중에 단지 이북 토종 빨갱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참하게 죽이는 것이 빨갱이의 생리이다. 좌익은 이미 그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권영길과 문성근을 다음 단계의 연합전선을 위해 어디까지 이용하다가 언제 버린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지금 조직적으로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는 좌익도 언젠가는 자신도 빨갱이 집단에서 배신당할 차례가 온다는 것이 무서운 빨갱이들의 조직이다.
그는 1955년 12월 17일 박헌영의 사형을 신호탄으로 남로당계 빨갱이들을 모두 처형하였을 때 중국공산당 출신이 빨갱이들, 이른바 연안파 빨갱이들은 밥그릇 경쟁 대상이 제거되었다고 옆에서 손뼉치며 좋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질 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단지 이북산 토종 빨갱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민 재판에서 반동으로 몰려 처형당할 차례는 자기네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정(포병사령과)과 방호산(6사단장) 등 연안파 장군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1956년 유명한 '8월종파사건'을 통해 김두봉(최고인민회의 위원장), 최창익(부수상) 등 연안파 거물을 쫓아냈다. 그러나 이렇게 순종과 잡종을 가려 빨갱이들을 처형하는 김일성 자신은 북한산 토종 빨갱이었던가? 아니다! 그 역시 소련파 잡종 빨갱이였다. 그렇다면, 소련파 잡종 빨갱이들은 숙청 대상에서 제외되었을까? 천만에! 잡종 빨갱이들을 처형하는 연합전선을 위해 소련파 잡종 빨갱이들을 이용하던 소련파 잡종 빨갱이 두목 김일성은 소련파 잡종 빨갱이들도 하나 하나 차례로 정치범수용소와 아오지 탄광에 보냈다. 이런 방법으로 1956년에 그는 허가이(조직담당 비서)등 소련파와 몇몇 빨치산 장군들을 숙청하였다.
1975년 월남이 적화통일되자 곧 900 만명이 학살되었다. 물론 이 숫자는 보트를 타고 월남에 탈출하여 바다에서 표류하다 굶어죽은 무수한 보트피플을 제외한 숫자이다. 전쟁 중에 죽은 숫자도 아니다. 수도가 베트콩 군에 함락되자 월남 대통령이 즉시 항복 선언을 하였으므로 단 한번의 전면전도 없었다. 그리고 티우 대통령이 항복 선언을 한 다음 재산을 다 팔아 뇌물을 바친 자는 보트를 타고 월남을 탈출할 수 있었는데 그 수가 백만 명을 훨씬 넘었으니 나라를 빼앗긴 비극이 얼마나 크던가?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망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일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 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왔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그러면, 막강한 주월미군이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어가며 지원하던 월남이 하루 아침에 패망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당시 베트콩 게릴라 정권은 오늘날 김정일이 하는 것과 너무도 똑같은 주장과 요구를 하였다. "왜 우리가 민족 공조하지 않고 우리끼리 싸워야 하느냐? 베트콩은 베트남을 침공할 의사가 없는데 주월미군이 월남차이나 반도에서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니 주월미군 철수시키고 평화협정 맺어 베트콩과 베트남이 민족공조하자." 여기서 우리는 홍위병 노사모에게 만일 그들이 당시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그런 베트콩의 음흉한 속들여다 보이는 말에 속아넘어갈 것인지 물어보자. 그럼, 여기서 노사모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당시 월남에서 어떤 상황이 전개되었었는지를 살펴보자. 오늘의 노사모와 같은 반미시위대가 월남에 있었다. 그들은 베트콩은 전쟁의 의도가 없는데 주월미군이 전쟁을 부추긴다고 따라서 합창했다. 결국, 반전 여론에 미국이 굴복하였다.
월맹이 요구하는 대로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회담을 했다. 월남사회는 남남분단으로 치달았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하며 파리 평화회담에 반대했고 야당은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며 악착같이 데모를 주동했다. 마침내 키신저는 월맹이 내민 평화협정서에 조인해 주었으며, 확실한 평화의 보장을 위해 40억달러의 경제 지원까지 얹어 주었다. 전쟁 억제 장치로 키신저는 캐나다,이란, 헝가리, 폴란드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어 휴전선을 감시하게 했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월맹의 외무차관이 이끄는 150명의 고문단을 사이공에 인절로 받아 놓았다. 이것도 믿지 못해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다. 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월남에 굳게 약속해 주었다. 미군이 보유하던 각종 최신 무기를 모두 월남에 주었기 때문에 비록 미군이 철수했어도 월남은 당시 세계에서 네번째 가는 군사 강대국이었다.
자, 그럼 여기서 노사모에게 다시 물어보자. 주월미군 철수시키고 월남과 월맹이 평화협정 맺었으니 월남이 평화로왔는가? 1974년 10월에 유전이 발견된 월남은 경제 특수에 도취되어 있었다. 월맹과 평화협정 맺고 평화 무드에 들떠있는 사회에서 반공정신을 일깨우며 안보의 중요성을 경각시키는 애국자들은 수구 세력으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거짓 평화는 몇달 가지 않았다. 모두가 방심하고 있던 1975년 1월 8일에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이 월남 공격에 투입되었다. 3월 26일에 다낭이 함락되고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으로 달렸다. 미군이 철수한 월남을 세계 4대 군사 강대국의 하나인 월남군이 방어하였는가? 아니다. 전쟁이 나자 군인들이 비행기와 배에 가족을 싣고 먼저 월남을 탈출했다. 월맹이 평화협정을 어겼으니 미국이 약속대로 해군과 공군을 보내 월맹에 북폭하였는가? 아니다. 이미 월맹군 총병력이 월남에 침투하여 있음을 본 미국은 방치하였다. 마침내 그해 4월 30일 정오에 월맹 탱크부대가 사이공을 함락하고 시청에 월맹기가 휘날리자 다섯 명을 제외한 월남의 장군들은 모두 미국으로 도망을 쳤다.
월맹군은 말이 군대이지 군화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남루한 거지떼들 모습이었다. 군사력도 경제도 월남이 월맹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월등했다. 그러나 막상 월맹군의 공격을 받은 다음 방어도 못한 채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고 군 장성들은 미국으로 도망치자 티우 대통령은 즉시 항복을 선언했다. 민족 공조의 평화 무드와 더불어 국운 상승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던 월남이 너무도 싱겁고 어이없게 적화통일을 당한 이래 근 삼십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나라를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를 잃은 날 시민단체 인사들이 제일 먼저 학살되는데, 이들은 바로 민족 공조를 외치던 자들이었다. 1973년에 월남과 월맹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지자 오늘날 한국의 자통협, 전교조, 통일광장, 통일연대, 평통사, 평화통일시민연대 등과 같은 100여개의 통일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정섰다.
그리고 1975년 4월 30일 월맹군 탱크가 사이공에 입성하자 이들 좌익 시민단체 인사들은 월맹기를 들고 월맹군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이제 이들의 세상이 왔는가? 아니다. 그 날 월맹기를 들고 월맹군을 열렬히 환영하던 빨갱이 시민들은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처형되었다. 이북 토종 빨갱이가 아니면 죽이는 것이 빨갱이들의 생리요, 한번 배신한 자는 다시 배신한다는 것이 좌익 집단의 논리이기에 이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은 예외 없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적화통일되면 당연히 죽는 군인, 공무원, 경찰 외에도 월남산 좌익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무려 900 만명이나 학살되었다.
당시 월남과 월맹은 거의 문화적인 차이가 없었는데도 900 만명이나 죽여야 공산주의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면 설사 한반도에서 무혈 적화통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김정일은 훨씬 더 많은 동포를 학살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 이번에도 근자에 민족 공조를 외치며 남한에서 김정일 똘마니 노릇하는 좌익이 제일 먼저 학살될 것임이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럼, 여기서 어째서 근 오십 년만에 한국 사회에 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재현되었는지 그 이유를 문화사적 관점에서 살펴 보자.
국토 분단 55년만이요 한국 전쟁 발발 오십 년만인 새 천년 첫 현충일에 평양교예단의 역사적 서울 공연이 있었다. 단원들도 모두 호흡이 일치된 최상의 묘기 공연을 보여 주었으며, 관람하는 청중의 호흡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일치하였다. 그래서 교예단의 공중 곡예 묘기 중 혹 실수라도 생기면 청중이 우뢰 같은 박수로 격려를 보내는 겨레애에 남과 북은 함께 웃고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모진 식량의 위기 속에서도 그들이 간직하고 가꾸어온 우리 한민족 고유의 전통 문화를 계승하여 한국적인 묘기 공연을 펼쳐 주었기에 우리의 반기는 마음 더욱 열렬하였었다.
그러나 지난해 한일월드컵 기간 때 방문한 북측 여성응원단원들이 남한에서 내뱉은 일성은 조선 여자들의 머리모양이 왜 저렇게 현란스럽느냐였다. 또 지난 12월 미국인들은 나이키 신발 신은 노란머리 반미 시위대를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한국 가수가 다른 나라 가서 제 아무리 힙합 댄스를 잘 추어도 아무도 그것이 한국 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중 가요는 한 나라의 서민들이 애창하는 노래를 말하는데, 언제부터인가 남한에서는 신세대의 대중음악은 외국풍의 음악과 동의어가 되었다. 지난 12월 15일 시청앞 광장에 십만 명의 반미 시위대가 모여 대형 성조기를 찢으며 반미 노래를 불렀을 때 미국의 언론들은 그 노래가 미국 대중음악의 한 장르인 록음악을 표절한 것임을 꼬집어 말하였다.
적어도 한국 고유의 문화를 보존하는데 있어서는 북한이 한가지는 내세울 점이 있으며, 남한에서도 한가지는 자성할 점이 있다. 그런데, 결코 주한미군이 신세대 청년 문화를 강제로 미국화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신세대 문화가 급격히 변한 것은 섣부른 일본 대중 문화 개방 정책때문이었다. 머리 염색도, 심지어 서태지 초창기의 록음악도 모두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이었지 결코 주한미군이 강제로 노랑머리 염색시키고 록음악으로 노래 부르게 한 것이 아니었다. 여하튼 오십 년전 6.25 동란 당시에는 남북한에 문화적 차이가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문화의 차이가 있다. 북한 문화는 서구 문화에 폐쇄적인데 반해 남한 신세대 문화는 이미 서구 문화에 열려 있다. 당연히 노랑머리 반미 시위대는 김정일의 학살 대상 목록 첫 줄에 오른다.
북한에는 북한 나름 대로의 문화 정책이 있다. 따라서 노랑머리 신세대의 친미문화와 북한의 문화 정책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상극이다. 자기네 말로 민주화 운동의 완성이라고 자화 자찬하는 노무현 정권이 첫날 시작한 일이 문성근과 명계남을 내세운 언론탄압단 결성이었듯이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새 정권은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통제 정책을 행사한다. 하물며, 강력한 통제 사회인 남한에 공산주의 체제를 강요하려면 서구화된 문화에 대한 얼마나 강한 통제를 하겠는가? 입에서 록음악 소리만 나도 그 날로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서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친미 문화의 김정일 똘마니들이 내세우는 민족 공조가 아무리 낭만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여기에 신세대 친미 문화와 김정일의 문화 정책 사이에는 민족 공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유가 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친미 문화 세대가 스스로 생명과 자유를 잃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반미시위대가 되는지 그 이유를 논해 보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위「진보」세력이라는 김정일 똘마니의 상당수는 본질적으로 가장 감상적인 자유주의자들이다. 이들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공산주의와는 서로 상극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한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인권 탄압에 민감하다. 이 사실을 아는 빨갱이들은 적화 통일되면 학살 명단 첫 줄에 오르는 이 자유주의자들과 연합 전선을 편다. 남파공작원들은 자신들을 인권 운동가라고 위장하고 좌익 인사들이 공안 당국에서 구금된 사실을 얘기한다. 이 자유주의자들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 반체제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이제 이들에게 인권 운동이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소리를 낼 건수가 생겼다. 이렇게 해서 자유주의자들을 이용하는 빨갱이와 차츰 좌경화되는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고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유주의자들은 지상에서 가장 악랄한 인권 탄압자 김정일을 위해 충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서서히 장님이 되어가는 이들은 그런 충성의 댓가는 김정일의 학살 대상 목록 첫 줄에 오르는 것이요, 그 행동의 결과로 민족 중 살아남은 자도 자유를 빼앗기고 짐승처럼 살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남한 다원화 사회에서 무한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김정일의 공산 정권 사이에, 즉 공존이 전혀 불가능한 두 집단 사이에 이데올로기 고리가 형성되는 것일까? 오십 년 전에 남한 빨갱이는 순종 빨갱이가 아니라는 학살하던 이북 빨갱이들의 주장이 오늘에 와서는 바로 들어맞는다. 1990년대 동구 공산주의 정권들의 급속한 몰락은 자유 사회의 우월성에 대한 도취감을 돋구었다. 빛과 어두움이 대조되듯이 다원론(pluralism)이 전체주의 (totalitarianism)와 대조되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개인의 무한 자유를 요구하는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이다. 냉전 시대는 지나갔으니 더 이상 정부는 아무런 단속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절대적 다원론 사상을 가진 이들은 국가 보안법도 인권 탄압이니 폐지시켜야 한다는 빨갱이의 말에 넘어가기 쉽다.
북한 전체주의 (totalitarianism) 사회에서는 한 개인에게 무한 자유를 허용하자는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기에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이 좌익 사상의 출발점인 남한의 잡종 빨갱이들을 이북 빨갱이들은 학살할 수밖에 없다. 남한 잡종 빨갱이와 이북 빨갱이는 사상 구조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그 차이는 극단적 주관주의와 극단적 객관주의의 창이이다.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은, 즉 극단적 주관주의는 사회의 법 체제와 공권력 자체를 부정한다. 그들은 저항을 위한 저항을 한다. 이에 비해 극단적 객관주의인 마르크스주의(Marxism)는 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공중 교의(Public doctrine)로서 강요할 권리를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객관적 진리요 그러므로 역사적 필연성이다. 수령의 명령은 역사적 필요성이다. 김정일을 숭배하며 사느냐 아니면 죽임을 당하느냐의 선택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반체제주의인 남한의 잡종 빨갱이들이 학살 대상 명단 첫 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마르크스 사상의 모든 그릇됨을 실증하였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기에 한반도를 제외한 세계 모든 국가에서는 이데올로기 분쟁의 종식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주제 파악을 못하고 진보 세력을 자처하는 남한의 잡종 빨갱이들이 마르크스 사상을 입에 담는 것은 스스로 자신들이 퇴보 세력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국의 신세대 청년들의 세계관은 주관주의에 의거하여 형성되기에 남한은 다원화 사회인데 비해 북한은 극단적인 객관주의가 주체사상을 형성하는 획일주의 사회이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다원화 사회와 획일화 사회만큼의 문화적 차이가 벌어져 있다. 남한은 조금 지나칠 정도로 자유인의 사회이다. 북한은 그 자유를 송두리째 몰살하는 것을 국시로 삼는다. 그러기에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대한민국 국민은 민족 공조 나팔 부는 철부지 노사모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녕, 그대들은 자유를 말살당하기 위해 민족 공조를 주장하는 것인가? 그대들은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 김정일의 똘마니 부대 편에 서있는가? 아니면 조국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하나된 국민 편에 서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