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은 이땅을 위해 목숨걸고 살다간 선교사들을 생생하게 알수있게 하며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지금도 이책을 읽고 가슴이 떨린다.
너무나 그동안 선교사님들의 헌신을 생각으로만 알았던 부분을 후회하며 생생하게 알수있
도록 책을 지어준 이용남 선교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대위임령에 목숨을 다해서 섬긴 선교사들을 보면
5천년동안 샤머니즘이 지배하고 있었던 조선땅
1600년 동안 불교가 통치하고 5백년이 넘게 유교로 제사하며 하나님 없이 살아온
캄캄한 이땅에 기도하며 가슴에 품었던 앞선 믿음의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세기 영국의 월리엄 케리는 침레교회 첫 선교사로서 인도에 선교를 한다.
영국의 로버트 모리슨(런던선교회)중국광성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네덜란드목사인 귀츨라프는 중국선교를 하면서 미지의 땅 조선에 충남 보령에 있는 고대도에 우리나라 최초로 첫발을 디딘 선교사이다.
그 당시 조선은 쇄국정치로 외국인의 방문을 허락지 않아 조선왕의 재가를 기다리는 동안 고대도주민들에게 감자 심는 법과 포도 재배법을 가르쳐 준뒤 아쉬운마음으로 한 달만에 마카오로 돌아가서 귀츨라프선교회를 만들게 된다.
그후 귀츨라프선교회의 첫 주자 선교사는 중국내륙을 복음전한 허드슨 테일러선교사이다
18세기 미전도종족인 조선 땅................
1858년 미일 수호조약 체결후 일본이 개방됨에 따라 많은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온다.
일본과 중국에 선교사들이 사역을 시작하면 서 미전도 종족인 컴컴한 조선을 발견 하게 된다.
그때 미전도종족국인 조선을 가슴에 품고 그땅을 향해서 무릅을 꿇고 기도한 푸른 눈을 가진 선교사님들이 있기에 우리나라가 하나님 앞에 문을 열수가 있었다
우리가 전해들어왔던 그 유명한
토마스선교사는 런던선교회 파송을 받고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에 도착 3년후 통역관으로 제너럴셔먼호란 상선을 타고 조선으로 오다가 배가 좌초 되어 대동강에서 박춘권이라는 군인에게 순교 당한다.
조선땅에 첫발을 디딤과동시에 조선의 군사에게 목아 날아갔다
1866년 그의 나이27세였다.
토마슨선교사의 부모와 성도들은 아들을 목 베어 죽인 미전도종족인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조선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 하였다는 대목에서 가슴이 미워진다.
훗날 그의 목을 친 박춘권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영수라는 직책까지 받았다.
아마 오늘날 장로 직책인것같다
성경책 종이가 좋다고 한 장 한장 뜯어 벽지를 바른 박영식의 집은 그후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세월이 지난후 그곳이 교회가 되다니 정말 아이럭한 애기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그때 월리엄슨선교사는 토마슨선교사가 한문어 성경책을 가지고 조선으로 가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 후임 선교사로 로스와 멕켄타이어 선교사가 토마슨의 순교소식을 듣고 조선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것을 각오하며 미지의 나라 조선을 가슴에 품는다..
사랑한 그들이여 이런 마음을 주신것은 하나님이시다..
“순교의피는 교회의 초석이된다”
아~ 무섭기도 하고 깜깜한 나라 그것도 알려지지않은 남의 나라를 ....
아마 아프리카 식인종 나라를 연상케한다
토마슨 선교사가 목이 날라 간가게한 아주 미개한 나라라고 선교사들에게 다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후 로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에서 이응찬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1887년 최초로 예수성교젼서 성경을 번역을 완성한다.
이수정은 참으로 조선선교의 다리역활을 하였다.
그는 도승지로서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으로 갔을때 조선인 최초로 미국선교사 조지낙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이 여러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로 번역한 성경책이 훗날 언더우더와 아펜젤러선교사가 한글성경책을 들고 한국최초의 선교사로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1882년에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해외에 문을 활짝 열기 시작한다.
견미단일행(미국방문단)~민영익,홍영식,서광범 유길준 6명의 사절단이 미국에서 가우처 목사를 만나게 된다.
가우처목사는 이상한 나라 미전도종족국인 조선이라는 나라를 그냥 놔둘 리가 없겟죠.
이후 조선공사관에 있는 맥클레이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고종황제에게 김옥균을 통해서 의사와 영어선생 3명이 들어올수 있도록 윤허를 받는다.
여기서 느낀점은 복음을 위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즉각적으로 반응을 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의 직분으로 선교 들어온 존 헤론의 기도는 가슴이 뭉클하게 한다.
존 헤론은 밝은 장래 석학자리를 마다하고 하나님께서 의학공부를 시켜 의사를 만든게 조선으로 가기위해서 한 것임을 깨닳는다.
존 헤론은 자기 약혼자까지 슬득하여서 함께 조선땅으로 갈려고 기도한다.
존 헤론은 기꺼이 성령에 의지하며 순종하는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한다.
알렌선교사는1884년9월에 입국 갑신정변때 민영익을 수술한 최초의 서양의사 였다.
알렌은 고종의 윤허를 받아서 세운 서양식 병원이 한국 최초의 병원 광혜원이다.
이후 제중원으로 이름이 개칭 되었죠
조선땅에 아주 지대한 업적을 남긴 선교사는 언더우더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이다.
인도에 선교의 꿈을 꾸고있던 언더우더는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끝까지 하나님 음성을 외면하지 않았던것이다.....
아~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우리와 차원이 다른 믿음을 가진거 같은 인물들이다.
존 헤론선교사는 갑신정변 때문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더 보다 뒤에 조선 땅을 밟았다.
존 헤론은 불철주야 광혜원에서 환자를 돌보다가 자기몸을 돌보지않고 결국 쓰러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양화진에 묻히게 되죠
이후에 비슨선교사 가 광혜원에서 사역하다가 병원이 부족함을 본국에 호소하여 세운것이 지금의 세브란스병원이다.
남녀칠세부동석 유교영향 때문에 여자의사가 필요하였다.
그후 로제타(여) 선교사와 그를 사랑하는 제임스 홀 선교사가 들어와 평양선교의 문을 연다.
제임스 홀 선교사는 환자를 돌보다가 전염되어 쓰러져 합정동 존 헤론선교사옆에 묻힌다.
부인 로제타선교사와 아들 셔우 홀도 조선땅을 위해서 사역하다가 조선땅에 묻힌다.
로제타 선교사의 시댁 캐나다에 있는 글렌비엘교회가 제임스홀 선교사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조선을
위해 기도하며 헌금을 보낸 선교사역을 하였는데 세워진 학교가 평양에서 서울로 옮겨온 광성고등학교이다.
로제타 선교사는 캐나다에서 조선으로 돌아와 딸 에디스가 풍토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최초로 맹인학교와 농아학교를 세우고 이땅을 위해서 헌신하다가
84세의 나이로 부르심을 받고 양화진에 있는 남편과 딸 옆에 묻힌다.
이에 한국의 의료발전의 지대한 공헌으로 이화여대 부속병원과 인천기독 병원과 인천간호전문 대학이
창설되었다.
한가족모두가 조선땅의 사람들에게 한평생을 헌신하며 그땅에 뼈를 묻었던 그들 ~
이것은 과연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일까?
늦게나마 양화진 선교사 묘지가 생긴 이유에 대해서 이제야 알게 되었다.
존헤론선교사가 죽었을 당시에 선교사 묻을수 있는 땅이 없었다.
동료선교사들은 존헤론의 시신을 집 뒤뜰에 묻으려 했지만 조선사람들 의 반대에 부딪혀서 서울 사대문 안에는 시체를 묻을 곳이 없었고 그렇다고 인천송도에 있는 외국인 묘소까지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신은 점점 썩어가고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할수 없이 동료선교사들이 존 헤론을 아꼈던 고종황제를 찿아 가게 된다.
존 헤론의 죽음을 눈물로서 호소하며 그가 묻을수 있는 땅을 달라고 호소한다.
고종은 이 호소를 듣고 서울 성안에서 십 리정도 떨어져 있는 한강의 모래땅을 준다.
그곳이 지금 서울 합정동 선교사 묘지이다.
양화진선교사 묘지는 존 헤론선교사 때문에 생긴 땅이다.
이토록 이 땅을 위해서 뼈까지 묻은 선교사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복음을 들을수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 복음의 빛 진자들이데 세상의 희노애락을 좋아하며 이땅에 영원히 천만년 살거처럼 목적을 엄뚱한데 관심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진노 하실거 같다.
이책을 읽으며 와 닿는것은 전문인 선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며 복음을 위한 접촉점이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정말 선교를 안일하게 생각했던거 회개하며 앞선 선진들의 그 믿음을 우러러 보며 행동을 옮기는게
우리의 앞으로 할일이다.
선교사님들의 헌신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