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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9 강 - 付囑品- 5
第二 阿難 第三 商那和修尊者
第四 優婆匊多尊者 第五 提多迦尊者
第六 彌遮迦尊者 第七 婆須密多尊者
第八 佛駄難提尊者 第九 伏駄密多尊者
第十 脇尊者 第十一 富那夜奢尊者
第十二 馬鳴大士 第十三 迦毘摩羅尊者
第十四 龍樹大士 第十五 迦那提婆尊者
第十六 羅後羅多尊者 第十七 僧迦難提尊者
第十八 伽那舍多尊者 第十九 鳩摩羅多尊者
第二十 闍耶多尊者 第二十一 婆修盤頭尊者
第二十二 摩拏羅尊者 第二十三 鶴勒那尊者
第二十四 師子尊者 第二十五 婆舍斯多尊者
第二十六 不如密多尊者 第二十七 般若多羅尊者
第二十八 菩提達摩尊者 第二十九 慧可大師
第三十 僧璨大師 第三十一 道信大師
第三十二 弘忍大師 第三十三 慧能이니라
從上諸祖- 各有禀承하시니
汝等은 向後에 遞代流傳하야 毋令乖誤어다
大師先天二年癸丑歲八月初三日에 於國恩寺에 薺罷하시고 謂諸徒衆曰, 汝等은 各依位坐하라 吾與汝別하리라 法海白言, 和尙이 留何敎法하사 今後代迷人으로 得見佛性케하시나이까
師言, 汝等은 諦聽하라
後代迷人이 若識衆生하면 卽是佛性이요
若不識衆生하면 萬劫覓佛難蓬이니라 吾今 敎汝하야 識自心衆生하고 見自心佛性케하노니 欲求見佛인댄 但識衆生이니라 只爲衆生이 迷佛이언정 非是佛이 迷衆生이니
自性을 若悟하면 衆生이 是佛이요
自性을 若迷하면 佛이 是衆生이며
自性이 平等하면 衆生이 是佛이요
自性이 邪險하면 佛이 是衆生이니라
汝等이 心若險曲하면 卽佛이 在衆生中이요
一念平直하면 卽是衆生이 成佛이니 我心에 自有佛이라 自佛이 是眞佛이니 自若無佛心이면 何處에 求眞佛이리요 汝等의 自心이 是佛이니 更莫狐疑어다 外無一物이라도 而能建立이니 皆是本心에서 生萬種法이라
故로 經에 云, 心中에 種種法이 生하고 心滅에 種種法이 滅이라하시니라 吾今留一偈하야 與汝等으로 別하리니 名이 自性眞佛偈라 後代之人이 識此偈意하면 自見本心하고 自成佛道하리라
偈曰
眞如自性이 是眞佛이요 邪見三毒은 是魔王이라
邪迷之時엔 魔在舍요 正見之時엔 佛在堂이로다
性中에 邪見三毒生하면 卽時魔王이 來住舍요
正見이 自除三毒心하면 魔變成佛이 眞無假니라
法身 報身 及化身이여 三身이 本來是一身이니
若向性中하야 能自見하면 卽是成佛菩提因이니라
本從化身生淨性이라 淨性이 常在化身中이니
性使化身行正道하면 當來圓滿眞無窮하리라
婬性이 本是淨性因이라 除婬卽是性淨身이니
性中에 各自離五欲하면 見性刹那卽是眞이니라
今生에 若遇頓敎門하면 忽悟自性見世尊이어니와
若欲修行覓作佛인댄 不知何處擬求眞이리요
若能心中自見眞하면 有眞卽是成佛因이나
不見自性外覓佛인댄 起心總是大痴人이니라
頓敎法門을 今已留하야 救度世人須自修케하노라
報汝當來學道者하노니 不作此見이면 大悠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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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크게 우리가 관심을 안 쓸 것 같은 데도 상당이 관심을 많이 쓰는 것이, 족보 문제입니다. 계통문제. 이것을 아주 중요시 여깁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공부할 차례입니다만, 육조스님도 그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그런 것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것을 통해서 육조스님의 법에 대한 그런 어떤 신임도를 가름하기도 하는 그런 경향이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역시 누구 제자냐? 또 특히 종교 외에 예술 분야 같은 데서는 더욱 더 그렇지요. 훌륭한 작가 밑에서, 좋은 제자가 나오듯이...
법맥의 문제는 특히 그런 것을 상당히 중요시 여깁니다.
영가스님 증도가에도 보면,
[有人問我解何宗(유인문아해하종)하면
報道摩訶般若力(보도마하반야력)] 그런 이야기하며, 또 누가 나에게
“어떤 宗旨(종지)를 이어 받았느냐?”고 이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또 내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아주 전통이 있는 이런 법맥을 이어받았고, 내 스승은 세상에서 알아주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이런 것을 밝히는 내용들이 간혹 있어요. 그리고 또
임제스님도 사실은 황벽스님의 법을 이었지만, 깨닫기는 대우스님한테 가서 깨달았거든요. 그런데 깨닫게한 그런 여러 가지 공부를 제공한 이는 황벽스님이기 때문에 “그대는 황벽의 제자다.” 이렇게 굳이 스승과 제자의 문제를 상당이 신경을 써 가면서 代(대)를 잇는 그런 것들이 어록에도 자주 보입니다.
육조단경도 지금 제일 마지막 부분에 와서 육조스님의 법맥.
그것을 “傳燈法脈(전등법맥).”이런 표현도 합니다. 부처님의 법의 등불을 이어받은 계통을 밝히는 그런 것을 말하는데요. 여기 지난 시간 끝에 보면, 지금 七佛(칠불)로서 爲始(위시)해서 過去莊嚴劫(과거장엄겁)
毘娑尸佛(비사시불) 尸棄佛(시기불) 毘舍浮佛(비사부불) 또
賢劫(현겁)에 拘留孫佛(구류손불) 拘那含牟尼佛(구나함모니불)
迦葉佛(가섭불)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 이렇게 칠불부터 밟아 오면서
釋迦文佛(석가문불)이 상수로서 傳摩詞迦葉尊者(전마하가섭존자). 마하가섭존자에게 전했다. 그리고
第二 阿難尊者(아난존자)
第三 商那和修尊者(상나화수존자)
第四 優婆匊多尊者(우바국다존자)
第五 提多迦尊者(제다가존자)
第六 彌遮迦尊者(미차가존자)
第七 婆須密多尊者(바수밀다존자)
第八 佛駄難提尊者(불타난제존자)
第九 伏駄密多尊者(복태밀다존자)
第十 脇尊者(협존자) 이 협존자 흉내 낸다고 저도 선방 첫 철에 흉내를 상당히 냈습니다.
80에 출가 했는데요. 젊은 사람들이 80노인이 뭘 하겠느냐고 막 놀리니까 奮心(분심)을 일으켜서, 그 순간부터 전혀 눕지를 아니하고,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했다.” 이런 뜻에서 협존자입니다. “옆구리 존자” 그런 식으로 표현이 될 정도로... 그래서 나무에 몸을 의지해서 정진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 법맥을 이어받은 그런 아주 뛰어난 분입니다.
第十一 富那夜奢尊者(부나야사존자) 또 유명한
第十二 馬鳴大師(마명대사) 起信論(기신론)의 저자이고, “붓다차리타”라고 부처님 생애를 詩(시)형식으로 처음 쓴 분이지요. 부처님 생애를 쓴 이가 이 마명대사가 제일 처음으로 썼습니다. 그 후로 그 마명대사가 쓴 것에 근거를 해서 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생애에 대해서 많이 記述(기술)을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한 八相錄(팔상록)이 시초가 되어서 수많은 세계의 아주 유수한 사람들이 부처님 생애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이 마명대사가 쓴“佛所行讚(불소행찬).”이쪽에서는“佛祖行讚(불조행찬)”이라고 그러고 “붓다차리타”라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부처님 생애의 아주 원형입니다. 그런 분 하며 또
第十三 迦毘摩羅尊者(가비마라존자)
第十四 龍樹大師(용수대사) 천하에 아주 “천부농사”라고 알려져 있는 대승불교의 鼻祖(비조)라고나 할까요? 어떤 창시자. 또 대승불교를 크게 흥황 시킨 이가 마명 · 용수. 그럽니다. 마명은 12대이고, 용수는 14대. 13대가 아니고 14대 이지만, 1대를 보통 30년으로 친다 하더라도 시간상으로 크게 거리가 떨어진 것은 아니지요. 특히 용수대사가 대승불교의 사상을 크게 드날린 그런 분으로 알려졌습니다. “나가라주나”라고 아주 유명한 분이지요. 그런 이들하며,
第十五 迦那提婆尊者(가나제바존자)
第十六 羅後羅多尊者(나후라다존자)
第十七 僧迦難提尊者(승가난제존자)
第十八 伽那舍多尊者(가나사다존자)
第十九 鳩摩羅多尊者(구마라다존자)
第二十 闍耶多尊者(사야다존자)
第二十一 婆修盤頭尊者(바수반두존자)
第二十二 摩拏羅尊者(마나라존자)
第二十三 鶴勒那尊者(학륵나존자) 이 분도 유명한 이야기가 있고,
第二十四 師子尊者(사자존자)
第二十五 婆舍斯多尊者(파사사다존자)
第二十六 不如密多尊者(불여밀다존자)
第二十七 般若多羅尊者(반야다라존자)
第二十八 菩提達摩尊者(보리달마존자) 그 유명한 28대.
그러니까 西天(서천)으로. 西域(서역)으로 치면 28대가 되지요.
이쪽 東土(동토)로 치면 初祖(초조)가 됩니다. 이 분이 一葉片舟(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중국으로 건너와서 중국으로서는 초조가 되지요.
바로 初祖菩提達摩尊者(초조보리달마존자). 그러면서 전체로는 28대조가 되고요. 그 다음에 그 유명한, 차고 있던 궤도를 뽑아서 자기의 믿음을 보인다고, 자기의 팔을 사정없이 잘라서 바친 아주 참 용기의 사나이 혜가대사!
第二十九 慧可大師(혜가대사)
第三十 僧璨大師(승찬대사) 승찬은 신심명으로 유명하지요?
第三十一 道信大師(도신대사)
第三十二 弘忍大師(홍인대사) 5조 홍인. 혜능스님의 스승이 되고요.
第三十三 慧能(혜능)33대가 혜능인데요. 중국에서 보리달마부터 치니까 흔히 “육조다.”해서 “육조 혜능”이렇게 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법에 준 하지는 못한다손 치더라도, 그나마 그런대로 법은 쭉 이어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꼭 지금 “몇 대 후손이다.”라고 이렇게 해서, 그럼
“옛날 이런 조사스님들과 같은 그런 법을 지니느냐?” 이렇게 묻는다면 할 말은 없어요.
경주 최씨. 무슨 또 김씨 하면, 우리나라 성씨들 옛날로 다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 신라 때 다 왕 노릇 했는데, 그럼 “너도 왕이냐?” 이렇게 질문할 수는 없는 것처럼, 꼭 왕이라야 최씨 후대손이 되는 것이고 김씨 후대손이 되는 것이고, 박씨 후대손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비록 좀 못났다 하더라도 김씨 박씨 이씨 후손이 될 수밖에 없듯이, 지금 우리들도 모두 부처님의 후대 손. 비록 부족하지만 부족한대로 후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또 말씀을 좀 드리면, 저는 탄허스님의 법을 이었고, 탄허스님은 한암스님의 법을 이었고, 한암스님은 그 유명한 경허스님의 법을 이었고, 이렇게 대가 내려옵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제자면 그 다음에 제 법을 잇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代數(대수)로는 저는 78대가 됩니다. 여러분이 79대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없이 이렇게 또 이야기 농담삼아라도 한번 흘려야지요?
三十三대 慧能(혜능)이니라
從上諸祖(종상제조)가 各有禀承(각유품승)하시니→ 옛날에 모든 조사스님들이 각각 禀承. 품 받아서 이어받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汝等(여등)→ 그대들도
向後(향후)에 遞代流傳(체대류전)하야→ 서로서로 의존해서
毋令乖誤(무령괴오)→ 毋.= 이것은 없을 무자입니다. 어미 모자가 아니고요. 사실은 줄을 솩 그은 겁니다. 점을 찍으면 어미 母(모)자가 되고, 점을 찍지 말고 거기다 줄을 그어 버리면 없을 無(무)자가 됩니다.
毋令乖誤(무령괴오)→ 어기거나 잘못됨이 없어라 그래요.
“遞代流傳(체대류전)하라” 그랬습니다. 어떻게 하든 그 나름대로, 법이 육조스님만치는 못된다손 치더라도, 그 나름대로 자꾸 뒷사람들에게 전해서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그렇게해라. 그래요.
작년에도 전관식을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 제 얘기를 어지간히 하긴 했어요, 제자들을 둬서...
大師先天二年(대사선천이년)→ 이것이 서기로 치면 713년입니다.
癸丑歲八月初三日(계축세팔월초삼일)에
於國恩寺(어국은사)에 薺罷(제파)하시고→ 국은사에서 薺가 있었는데 제가 끝나고, 謂諸徒衆曰(위제도중왈)→ 여러 제자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汝等(여등)은→ 그대들은
各依位坐(각의위좌)하라→ 자기위치 따라서 앉으라. “자기위치 따라서 앉으라.”하는 이것이 “계 받은 순서대로 앉으라.” 이 말입니다. 그것이 나이 순서대로 앉는 것도 아니고, 소임 순서대로 앉는 것도 아니고, 내 앞에서 제자가 된 순서대로... 또 수계한 순서대로... “그 순서에 따라서 앉으라.”하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吾與汝別(오여여별)하리라→ 내가 그대들로 더불어 이별 하리라.
“이별한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열반을 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육조단경을 나중에 편집한 큰 제자.
法海(법해)→ 법해라고 하는 스님이 있다가
白言和尙(백언화상)→ 고해 말하기를, 큰 스님께서
留何敎法(유하교법)하사→ 어떤 교법을 流傳(류전).→ 머물러서
今後代迷人(금후대미인)으로 得見佛性(득견불성)케하시니까→ (그 동안 법문 많이 들었지만, 또 한 말씀이라도 더 듣고 싶은 욕심에서) 후대 미혹한 사람들을 무슨 법을 가지고서 불성을. 각자 가지고 있는 불성을 얻어 볼 수 있게 하십니까?
師言(사언)→ 사가 말하기를
汝等(여등)은 諦聽(체청)하라→ 그대들은 자세히 들으라.
後代迷人(후대미인)이→ 후대에 미혹한 사람들이
若識衆生(약식중생)하면 卽是佛性(즉시불성)이요→ 만약에 “중생”이라는 중생의 본질을 알면 卽是佛性이다 이겁니다. “중생이 곧 불성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중생” “중생”하지만, 사람이 곧 불성입니다. 중생이 불성입니다.
若不識衆生(약불식중생)하면→ 중생을 만약 알지 못한다면,
萬劫에 覓佛難蓬(만겁멱불난봉)이라→ 만겁이 흐른다 하더라도, 부처를 찾는데 만나지 못할 것이다.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吾今敎汝(오금교여)하야→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가르쳐서
識自心衆生(식자심중생)하고→ 自心衆生을 알게 하고, 또
見自心佛性(견자심불성)을→ 자기 마음의 불성을 보게 한다. 自心衆生을 알게 하고, 自心佛性을 보게 한다. 그러니까 이름을 불성이 부처라 하든지, 중생이라 하든지 凡夫(범부)라 하든지 聖人(성인)이라 하든지, 이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사실. 마음을 소유한 중생이라는 이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欲求見佛(욕구견불)인댄→ 부처를 보고자 할진댄,
但識衆生(단식중생)이니라→ 다만 중생만 잘 알아라 이 말입니다. 중생만... 중생의 속성이 뭔지 잘 알면 끝난다 이 겁니다. 중생의 속성은 부처다 이런 말이지요.
只爲衆生(지위중생)이 迷佛(미불)이언정→ 다만 중생이 부처를 미혹하고, 부처를 모르고 있을지언정,
非是佛(비시불)이 迷衆生(미중생)이라→ 부처가 중생을 미혹한 것은 아니다. 중생이 부처를 모르고 있다. 각자 우리들 중생이 자기 부처를 모르고 있다. 부처야 중생을 다 알지요. 부처도 알고요. 그런 말입니다.
自性(자성)을 若悟(약오)하면→ 자기 본 성품을 만약 깨달으면,
衆生(중생)이 是佛(시불)이요→ 중생이 부처요.
自性(자성)을 若迷(약미)하면→ 자성이 만약에 미혹하면,
佛(불)이 是衆生(시중생)이다→ 부처가 중생이다. 그래 “중생이다.” “부처다.” 하는 것은 그저 아느냐? 모르느냐?
부처이면서 모르면 중생이고. 부처이면서 부처인줄 알면 부처이고 그런 겁니다. 달리 부처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조작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이 시종일관 똑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頓悟頓修(돈오돈수). 그런 사실을 깨달음으로서 모든 문제가 해결이다.
달리 닦을 것이 없다는 그런 주장이 가능한 것이지요.
衆生이 是佛이요
自性을 若迷하면→ 자성을 만약에 미혹하면
佛이 是衆生이다→ 부처가 중생이다.
自性이 平等하면 衆生이 是佛이요
自性이 邪險(사흠)→ (자꾸 설명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방향으로 저런 방향으로 자꾸 설명 하는 것이지요.) 邪險. 자성이 삿되고 험할 것 같으면,
佛이 是衆生이니라. 부처가 중생이니라.
汝等(여등)이 心若險曲(심약험곡)이면→ 마음이 만약에 험하고 굽어 있으면,
卽佛(즉불)이 在衆生中(재중생중)이요→ 부처가 중생 중에 있는 것이고, 부처가 중생 속에 있으니 참 거 욕보게 됐지요?
一念平直(일념평직)하며는→ 한 순간 한 순간 평등하고 곧으면,
卽是衆生(즉시중생)이 成佛(성불)이다→ 중생이 그대로 부처를 이룬 것이다. “멀리 안 가있다.”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등등의 사상. 또 이런 가르침들을 요약을 해서 한 마디로, “사람이 부처님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부처님이다.”라고 하면 제일 아주 간단명료하지요.
我心(아심)이 自有佛(자유불)이라→ 我心에. 내 마음에 저절로 부처가 있다 이겁니다. 내 마음에... 우리들 마음에 전부 부처가 다 있지요.
自佛(자불)이 是眞佛(시진불)이니→ 자기 부처가 이것이 진짜 부처입니다.
법당에 있는 부처는 佛像(불상)입니다. 부처의 형상을 한 것이고, 사실은 부처는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닌데요. 뭐 가짜배기라도 그렇게 해서,
相見衆生(상견중생). 어떤 형상이 있어야 비로소 뭔가 마음을 내는 우리 중생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그렇게 자꾸 이끌어 들이는 것이지요.
自佛이 是眞佛이라. 참 좋은 말이지요. 자기 부처가 진짜 부처다 이겁니다. 그 외에는 진짜 부처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 그것은 석가모니 자기 부처지 내 부처하고는 관계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自佛이 是眞佛이다. 이런 이야기요? 육조스님이나 하지 아무나 못합니다.
自若無佛心(자약무불심)이면→ 자신에게 만약 불심이 없다면
何處(하처)에 求眞佛(구진불)이리요→ 어디 가서 참 부처를 찾겠는가? 자기에게 부처가 있어야 부처를 찾지, 자기에게 부처가 없다면 어디 가서 아무리 돌아다닌들 그것 뭐 찾을 길이 있겠느냐?
汝等(여등)의 自心(자심)이 是佛(시불)이니→ 그대들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니 更莫狐疑(갱막호의)어다→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이것은 죽음을 앞두고 유언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앞에서도 같은 생각으로 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그래도 이 순간은 정말 더욱 더 어떤 진수를, 당신 사상의 진수로. 불교의 어떤 궁극적인 견해를 여기서 피력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느슨하게 이야기할 계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열반을 눈앞에 앞두고 어떻게 느슨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정말 바짝 조인 그런 이야기입니다. 같은 사상이라 하더라도요.
更莫狐疑(갱막호의)라→ 다시 의심하지 말라.
外無一物(외무일물)이라도→ 밖으로 한 물건이라도
而能建立(이능건립)이니→ 능히 건립함이 없음이니, 밖으로는 어떠한 조그만 것이라도, 부처라고 해서 이렇게 세워 놓은 것이 없다 이겁니다.
한 물건도 그런 것이 없어요. 자기 마음 외에는 달리. 부처는 그 외에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먼지만한 것도 부처의 어떤 속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皆是本心(개시본심)에서 生萬種法(생만종법)이라→ 우리들 근본 마음에서 만 가지 법을 낸다. 그러니 그 능력이야 말로 바로 부처의 능력이지요. 故(고)로 經(경)에 云(운)→ (이것은 기신론에 있는 이야기인데요.
유명한 말이지요. 아주 자주 인용합니다. 모든 조사스님들이요.)
心中(심중)에 種種法生(종종법생)하고
心滅(심멸)에 種種法滅(종종법멸)이라→ 우리 한 마음이 나면 가지가지 일이 생기고, 우리 한 마음이 없어지면 가지가지 일들이. 온갖 일들이 다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앞서서 모든 것을 이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 아니라 하더라도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뭐가 있지 않느냐? 어떤 역사도 있고... 제 3자는 누가 만듭니까? 결국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제 3자를 만들어 놓으니까 그 제 3자가 또, 수많은 것을 만들어서 전부 궁극적으로는 내 자신에게로 귀결이 되는 것이지요.
吾今留一偈(오금유일게)하야→ 내가 지금 최후로 한 게송을 남겨둔다. 그래서 與汝等(여여등)으로 別(별)하리니→ 그대들로 하여금 이별 곡으로 삼고 싶다 이겁니다.
名(명)이 自性眞佛偈(자성진불게)라→ 이름이 “自性眞佛偈”라고 내가 붙이고 싶다. “自性眞佛偈” 유명한 게송이지요. 자성이야말로 참 부처다. “우리들 자기 성품이 진짜 부처다.” 라는 게송입니다.
後代之人(후대지인)이 識此偈意(식차게의)하면→ 이 게송의 뜻을 확실히 알면,
自見本心(자견본심)하고→ 스스로 자기 본심을 보고,
自成佛道(자성불도→ 스스로 불도를 이루게 된다. 본심을 보는 것이 그대로 불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偈曰(게왈)→ 게송에 말하기를
[眞如自性(진여자성)이 是眞佛(시진불)이다→ “진여자성”이 뭐냐? 여기 뭐 “자성.” “자성.” “불성.” “불성.” 온갖 표현을 하는데요.
이렇게 말하고 여러분들 말소리 듣는 것입니다. 펜을 잡을 줄 알고 쓸 줄 알고, 기쁘고 슬픔을 표현할 줄 알고, 그리고 見聞覺知(견문각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 능력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 능력... 그것이 “眞如自性”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스님들이 그것을 보여 주려고, 그것을 깨우쳐 주려고, 주장자를 들기도 하고, 쾅 쳐서 들려주기도 하고, 들어서 보이기도 하고, 석가모니도 꽃을 보여서 그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꽃을 안 들고 다른 걸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꽃을 드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서 보이고 또 그 사실을 사람들이 본다고 하는 거기에 뜻이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뭐가 있겠어요? 있으면 한번 내놔 봐요.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 이 능력! 이 능력보다 더 위대한 것은 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眞如自性”이라는 것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고, 소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떤 동작을 해서 보이는 것이지요. 황벽스님은 임제스님에게 사정없이 후려쳐서, 그것을 일깨워주는 그런 법을 쓰기도 하고요. 또 어떤 이는 손가락. 구지화상 이라 하는 이는 평생 손가락만 들어 보이는 겁니다. 손가락만...
손가락 들어 보이고 들어 보이는 사실을 보고 하는 거기에, 뭐 그것이 부족 하지만 그런대로 그걸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꽃을 들어 보이기도 하고, 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 하고, 주장자를 들어 보이기도 하고, 쥐어박기도 하고, 조사 어록들 보면 멱살을 잡고 흔들기도 하고, 멱살을 잡고 땅에다 냅다 꽂아서 넘어지게 만들기도 하고, 주먹으로 허리를 쥐어박기도 하고, 별별 그런 법을 써서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눈을 떠야만 되는 것이고, 스스로 눈을 뜨는데 있는 것이지, 그 이상은 뭐 어떻게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와 닿지 않으니까 죽자 사자 절도 하고, 기도도 하고, 참구 하는 것이 “이 뭣꼬” “이 뭣꼬” “이 뭣꼬” 하면서 파고드는 것이지요.
邪見三毒(사견삼독)은 是魔王(시마왕)이라→ 삿된 견해. 탐 진 치 삼독. 이런 것은 좋은 것은 물론 아니지요. 견해가 좋아야 되니까요.
正見(정견). 邪見(사견). 이렇게 삿된 견해는 마왕이다.
邪迷之時(사미지시)에→ 삿되고 미혹할 때에는,
魔在舍(마재사)요→ 이 마구니가 집에 떡 들어앉았어. 그런데 正見之時(정견지시)에 佛在堂(불재당)이로다→ 부처가 방에 떡 들어앉았어.
바른 견해. 소견이 바를 때는 바로 부처님이 들어앉았고, 소견이 삿될 때는 마구니가 떡 들어앉았어요. 이 “眞如自性”이라는 것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삿되고 바르고, 이것을 보장을 못 해요. 보장을 못 한다고요. 삿될 수도 있고 바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性中(성중)에 邪見三毒生(사견삼독생)하면→ 우리 성품. 진여자성 가운데 사견과 삼독이 생길 것 같으면,
卽時(즉시)에 魔王(마왕)이 來住舍(내주사)요→ 집에 떡 와서 있는 것이고,
正見(정견)이 自除三毒心(자제삼독심)하면→ 정견이 스스로 삼독심을 제거할 것 같으면,
魔變成佛(마변성불)이 眞無假(진무가)니라→ 마구니가 변해서 부처를 이루는데, 참으로 거짓이 없다.
法身(법신) 報身(보신) 及化身(급화신)이여 三身(삼신)이→ 법신이니 보신이니 그리고 화신이니 하는 이런 삼신이 본래 한 몸이에요. 본래 한 몸... 本來是一身(본래시일신)이니→ 본래 “眞如自性”이라는 한 몸일 뿐이다.
若向性中(약향성중)하야→ 만약 성품 가운데를 향해서,
能自見(능자견)하면→ 능히 스스로 볼 것 같으면,
卽是成佛菩提因(즉시성불보리인)이니라→ 곧 부처를 이루고 菩提.
깨닫게 되는 그런 因이 된다. 그러니까 이 “자성”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지요.
本從化身生淨性(본종화신생정성)이라→ 본래 化身으로부터 淨性을 낸다. 이 몸뚱이. 우리 몸을 “化身”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몸이 또 중요하니까요. 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청정한 성품이 나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하고요. 삿되게도 되고 바르게도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淨性(정성)이 常在化身中(상재화신중)이다→ 청정한 성품이 늘 “化身” 가운데 있다.
性使化身行正道(성사화신행정도)하면→ 이 자성이 화신을 써서 正道를 행할 것 같으면 우리 성품이, 마음이 들어서 이 몸을 활용하는 것이지요. 이 몸을 활용해서 예를 들어서, “육조단경을 공부한다.” “불법을 공부한다.” 뭐 다른 “공부한다.”이렇게 해서 正道를 행 할 것 같으면,
當來圓滿眞無窮(당래원만진무궁)하리라→ 앞으로 원만해서. 원만해서 참된 것이 다 함이 없을 것이다. 그대로 이 마음이 본래 갖고 있는 正道를. 참되고 바른길을 다 함 없이 걸어가리라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婬性(음성)이 本是淨性因(본시정성인)이라→ 婬의 성품이 본래 청정한 성품의 因이다. “因이 된다” 이것이지요.
除婬卽是性淨身(제음즉시성정신)이니→ 婬의 성품을 제거할 것 같으면, 곧 이 성품이 청정한 그런 몸이니,
性中(성중)에 各自離五欲(각자리오욕)하며는→ 성품 가운데 각각 스스로 “五欲”을 떠나면,
見性(견성)이→ 성품을 보는 것이
刹那(찰나)라 卽是眞(즉시진)이다→ 그대로 “참다울 뿐이다.” 이것이지요. 있는 그대로. 오욕성이 있는 그대로. 여기서 “떠난다.”고 되어 있지만, 있는 그대로 眞이 되니까 붙을 자리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今生(금생)에 若遇頓敎門(약우돈교문)하며는→ 금생에 만약에 頓敎門을 만난다면, “頓敎門” 육조스님이 “頓”자를 잘 써요. “頓敎(돈교)” “頓法(돈법)” 한꺼번에 된다. 이 말입니다. 시간을 두지 않고,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그런 가르침의 문. 그 뜻입니다. “頓敎門” 하는 것은요. 순식간에 된다고 하는 것이. “삼아승지겁을 닦아서 된다.”는 말의 반대말인데, 본래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밖에는 달리 한꺼번에 되는 수는 없어요.
아무리 빨리 된다 하더라도 수행을 쌓고 정진을 하고, 차계차계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아무리 걸려도 그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본래 되어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밖에는 달리 “頓敎(돈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라고 하는 것은, 조각 하듯이 뭘 다듬고 또 어떤 덕행을 갖추고, 또 어떤 지식도 쌓아 가면서 이렇게 돼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틀림없이 그것은 아닙니다.
본래 갖고 있는 무한한 능력 이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고 느끼고 확철대오. 확연하게 정말 더 이상 의심할 바 없이 깨달아 버리는 것. 그것이지 무슨 조작하고 만들고 다듬고, 그렇게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의 “頓敎門”을 금생에 만약에 만날 것 같으면,
忽悟自性見世尊(홀오자성견세존)이어니와→ 홀연히 자성을 깨달아서 그 자리에서 세존을 봐. 자기 자성 찾아서 세존을 봐. 자기에게서 세존을 본다 이겁니다. 세존을 보거니와
若欲修行覓作佛(약욕수행멱작불)이면→ 만약 수행을 쌓아서 부처를 짓는다면, 부처를 찾고 짓는다고 한다면,
不知(부지)커라→ 모르겠다 나는...
何處(하처)에서 擬求眞(의구진)이리요→ 어느 곳에서 진짜 부처를 구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은요. 불교 가르침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今生(금생)에 若遇頓敎門(약우돈교문)하면 忽悟自性見世尊(홀오자성견세존)이어니와 若欲修行覓作佛(약욕수행멱작불). 수행해서 부처된다는 소리는 부단히 많아요. 그런데 여기는 전부 정 반대말입니다. 만약 수행해서 부처를 짓는다고 할 것 같으면, 나는 그거 모르겠다 이겁니다. 어디 가서 진짜 부처를 찾을 런지...
수행해서 조각 하듯이 만들어서 된 그 부처는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허물어질 부처고, 세월이 가면 변할 부처고, 그것은 진짜 부처가 아니다. 가짜 부처다 이것이지요. 조사스님들도요. 이렇게 한결같이 말하지만, 자주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말은...
영가 증도가에도 求佛施功早晩成(구불시공조만성)가? 제가 가끔 인용하지만,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施功. 공을 베푼다 이겁니다. 수행을 쌓는다 이것이지요.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공 베풀어서 된 부처는 이거는, 될 수도 없고 이루어지는 수가 없다 이겁니다. 그대로에요. 말이 달라서 그렇지... 이거 아주 중요한 소견입니다.
우리 불교의 어떤 궁극적인 견해를 우리가 구축하는데 있어서, 이건 참으로 중요한 소견입니다. 이렇게 돼있어도 우리 속으로는 ‘아닐꺼야, 그래도 뭔가 해야 되고 쌓아야 되고 닦아야 되고, 선행도 많이 해야 되고 보시도 많이 해야 되고, 이렇게 해야만 나중에 근사한 부처가 생길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자꾸 하고 계실겁니다 아마 틀림없이... 우리가 그동안 익혀온. 막연하나마 익혀온 소견. 그것을 못 버려서 그런 것이지요. 자기의 대단한 문제인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견해를 확실하게 해야 될 그런 대목이지요.
若能心中自見眞(약능심중자견진)이면→ 만약 능히 마음 가운데서 스스로 참 부처를 본다면, 見眞. 스스로 참 부처를 볼 것 같으면,
有眞卽是成佛因(유진즉시성불인)이라→ 眞이 있다고 하는 것이 곧 이 성불의 因이 된다. “因”이라고 해서 무슨 꼭 “씨앗이다.” 그런 뜻 보다는, 그냥 하는 말이지요. “바로 성불이다.” 그 말입니다. 진이 있다고 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수행해서 달라진다.”는 것은 변하는 사실이지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더라도 그거는 변하는 것입니다. 이 부처는 변하는 것이 아니지요.
진짜는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금은 안 변하지요. 그렇듯이 진짜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알면 좀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不見自性外覓佛(불견자성외멱불)→ 자성을 보지 아니하고, 밖으로만 자꾸 부처를 찾아. “外覓佛”이에요. 밖으로 부처를 찾을진댄,
起心總是大痴人(기심총시대치인)이니라→ 그런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모두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다. 정말 부처는. 그 소중한 부처는 자기에게 있는데, 마음을 일으켜서 자꾸 밖을 향하니,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겁니다.
이 육조단경의 위대한 점이 이런 사상. 이런 소견. 이런 견해에 있습니다. 이런 안목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頓敎아닙니까?
닦아서. 세월 걸려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있는 그대로. 그대로를 느끼고 인식하고, 알고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깨닫는 것은 어느 순간 문득 되는 것이지, 차츰차츰 탑 쌓듯이 그렇게 한층 올리고, 또 한층 올리고 이렇게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이 “頓敎法門”입니다.
頓敎法門(돈교법문)을 今已留(금이류)하야→ 지금에 이미, 지금에 남겨 둬서 救度世人須自修(구도세인수자수)케하노라→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고 제도케 하노니, 모름지기 스스로 닦을지라. 수행하라.
報汝當來學道者(보여당래학도자)하노니→ 그대들과 그리고 앞으로 올 도를 공부하는 사람. 진짜 불도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내가 알리노니,
不作此見(부작차견)이면 大悠悠(대유유)하리라→ 이 견해를 짓지 아니하면, 이렇게 이해하지를 않는다면, 大悠悠하리라. 크게 유유하리라. 아주 많이 늦어져서 언제 부처가 될지 모른다 이겁니다. “너무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大悠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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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저 중간 넘어온 곳에 ???=<뚜렷이. 확실히. 철저히. 정확히.> 라는 방언 같은데요. 가르쳐 주세요. 녹취는 스님의 뜻과 언어에 충실해야지요. 그 말이 그 말 같애도 이왕이면 정확히...
이 게송의 뜻을 "후대 사람들이" 알면은,.. 後代之人(후대지인)이 識此偈意(식차게의)하면 .... 대원성님^^*
無影樹님 _()()()_
염화실 녹취사님들께
하하하하하하 무영수님! 저, 지금 배꼽이 빠지려합니다. 녹취시에는 "구대사미"로만 들립디다. 오늘은 선명히 들리네요. 제가 짐작한 말들과의 차이를 생각하니...ㅎㅎㅎ
저도 교정하면서 웃을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점이 녹취하는 사람의 특권인것 같아요.ㅎㅎㅎ 내 귀에 들리는데로 기록해 올리게 되니까요. 나무관세음보살!
自佛이 是眞佛이니 自若無佛心이면 何處에 求眞佛이리요... 자기 부처가 진짜 부처이니 자신에게 만약 불심이 없다면, 어디 가서 참 부처를 찾겠는가...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_()()()_
眞如自性이 是眞佛이오, 邪見三毒은 是魔王이라...육조스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 감사합니다 _()()()_
若能心中自見眞이면 有眞卽是成佛因이라...만약 능히 마음 가운데서 스스로 참 부처를 볼 것 같으면, 바로 성불이라...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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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能心中自見眞이면 有眞卽是成佛因이라...不見自性外覓佛인댄 起心總是大痴人이니라 .만약 능히 마음 가운데서 스스로 참 부처를 볼것 같으면 바로 성불이라...자성을 보지 아니하고, 밖으로만 부처를 찾아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모두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다..대원성님 고맙습니다._()()()_
무량화님 죄송합니다만 위에 댓글중 절하는 이미지는 어떻게 넣으시는건가요? 제가 잘 몰라서요.. 좀 알려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쪽지보내기가 안되서 여기다 여쭤봐요....^^
自佛이 是眞佛이라...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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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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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識衆生(약식중생)하면 卽是佛性(즉시불성)이요→ 만약에 “중생”이라는 중생의 본질을 알면 卽是佛性이다 이겁니다.“중생이 곧 불성이다." _()()()_
삼배 올립니다
부처이면서 모르면 중생이고. 부처이면서 부처인줄 알면 부처이고 그런 겁니다. 달리 부처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조작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自性 若悟 衆生 是佛
自性 若迷 佛 是衆生
自性 平等 衆生 是佛
自性 邪險 佛 是衆生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하~ 감탄 감탄 또 감탄입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自佛 是眞佛 ...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즉심즉불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
약불식중생 만겁멱불난봉 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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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