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에 관한 생각
고두현
냉장고 문에
에티오피아 아이들
굶는 사진 붙여놓고 석 달에 한 번
용돈으로 성금 채우는 건이 녀석,
장난치다가 짐짓
눈길 굵어지는 표정
아내가 달덩이 같은
밥상을 들고 들어올 때
누군가 수저를 놓고 쨍, 지구의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먹는 일의 성스러움이란
때로 기품 있게 굶는 일.
식구들 모여
오래오래 냉장고 문을
☆----- 밥 생각
김기택
퇴근길 차가운 바람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쓸데없는 잡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리고
깨끗해진 머리 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하애지고 둥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생각들
머리 속이 아주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 흰 밥
김용택
해는 높고
하늘이 푸르른 날
소와 쟁기와 사람이 논을 고르고
사람들이 맨발로 논에 들어가
하루종일 모를 낸다
왼손에 쥐어진
파란 못잎을 보았느냐
캄캄한 흙 속에 들어갔다 나온
아름다운 오른손을 보았느냐
그 모들이
바람을 타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파랗게
몸을 굽히며 오래오래 자라더니
흰 쌀이 되어 우리 발 아래 쏟아져
길을 비추고
흰 밥이 되어
우리 어둔 눈이 열린다
흰 밥이 어둥 입으로 들어갈 때 생각하라
사람이 이 땅에 할 짓이 무엇이더냐
☆----- 개밥
랑승만
산길을 오르다
나무그늘에 쉬고 있는데
배가 홀쭉 들어가고
털이 숭숭 빠진
비루먹은 개 한 마리
내 앞뒤를 서성거린다
나처럼 쩔뚝거리며
내가 쓰러져 눈을 감으면
뜯어 먹을 참인가.
옛날 道가 높으신 스님들은
당신의 죽게 된 병든 몸을 내던져
山 짐승들에게 布施供養을 했다지만
뜯어먹으라고
들고 있던 빵 한 조각을 던져주는데
빵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지
캥 캥 짖어대며 꽁무니를 뺀다.
빵보다는 내 심장덩이가 먹고 싶었던가
도망치는 비루먹은 개꼬리를 훔쳐보았더니
당뇨를 질질 흘리는 암놈이었다.
네 신세나
내 팔자나
그게 그거군
전생에 무슨 큰 業을 지었기
개망신 당할 개가 되었더냐
내 돌아가 大寂菴부처님께
너를 위해 기도하리니
來生엔 기필코
내던져주는 빵조각을 가져가 먹고
解脫을 하거라.
☆----- 밥상 앞에서
박목월
나는 우리 신규가
젤 예뻐
아암 문규도 예쁘지.
밥 많이 먹는 애가
아버진 젤 예뻐.
낼은 아빠 돈 벌어가지고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오마.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비가 변한 눈 오는 공간.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그것은 내일에 걱정할 일.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하늘.
아빠, 참말이지.
접 때처럼 안 까먹지.
아암, 참말이지.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온다는데.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바람이 설레는 빈 공간.
어린것을 내가 키우나.
하나님께서 키워 주시지
가난한 자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뜻을
내야 알지만
상 위에 찬은 순식물성.
숟갈은 한죽에 다 차는데
많이 먹는 애가 젤 예뻐
언제부터 측은한 정으로
인간은 얽매어 살아왔던가.
이만큼 낼은 선물 사올께.
이만큼 벌린 팔을 들고
신이여. 당신 앞에
육신을 벗는 날,
내가 서리다.
☆----- 단 밥
배정원
오래 앓다 일어나
단내나는 입으로 밥을 먹는다
부르튼 입술 사이로
흘러드는 낱알들이, 달다
첫사랑의 입맞춤처럼
지난 여름
땀 흘리지 않았어도
이렇게 밥이 달음은
이상한 일이다
텅 빈 집에서
말 없는 밥상과 마주앉아
무거운 수저를 든다
다시 살아봐야겠다
내가 먹는 이것은
밥이 아니다
누군가 흘린 땀방울이다
모래알 같은 부끄러움이다
밥을 먹는다
문득 목이 메여온다
첫서리 내린 아침,
뜨거운 밥을 울컥울컥 퍼 먹는다
☆----- 밥
안도현
밥그릇을 빼앗긴 지 1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놀고 먹지는 않았습니다
벽보와 풀통을 들고 거리를 해매기는 했습니다만
입에 풀칠하기 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빼앗겨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빼앗은 사람의 이름과 성격을
머리 끝까지 새겨 두고 살아갑니다
☆----- 아나, 밥?
유용선
황금빛 망토의 시절일랑
바람에게 던져 주고
두고 온 낟알들은 세월의 증인으로 남겨 두고
누군가의 피와 살이 되기 위하여
끓는 물속으로 들어가는 뽀오얀 쌀알들
물의 숨통을 틔게 하는 불
불의 살기를 다스려 주는 물
그 상극의 조화 속에서
딱딱했던 것들 속속들이 부드러워지고
풀내 나던 몸뚱이에 살내음 돌 때
그제서야 쌀알은
아, 하고 기다리던 목구멍으로 들어와
오, 하고 기다리던 위장 속에서
제 모습을 바꾸어 작은 별이 된다
궤도를 이루며 도는 힘찬 행성이 된다
가장 순결한 피와 살이 되었다가
가장 겸허한 오줌똥으로 내려앉을 때까지
아나, 밥?
너만이 내게 가장 절실한 현재임을
☆----- 밥 나이, 잠 나이
윤석산
지금까지 나는 내 몸뚱이나 달래며 살아왔다.
배가 고파 보채면 밥 집어넣고
졸립다고 꾸벅이면 잠이나 퍼담으며
오 척 오 푼의 단구, 그 놈이 시키는 대로
안 들으면 이내 어떻게 될까보아
차곡차곡 밥 나이 잠 나이만, 그렇게 쌓아왔다.
☆----- 밥에 대하여
이성복
1
어느날 밥이 내게 말하길
[참 아저씨나 나나....
말꼬리를 흐리며 밥이 말하길
[중요한 것은 사과 껍질
찢어버린 편지
욕설과 하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빙벽을 오르기 전에
밥 먹어 두는 일.
밥아 , 언제 너도 배고픈 적 있었니?
2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로 술을 만든다
밥으로 과자를 만든다
밥으로 사랑을 만든다 애인은 못 만든다
밥으로 힘을쓴다 힘 쓰고 나면 피로하다
밥으로 피로를 만들고 비관주의와 아카데미즘을 만든다
밥으로 빈대와 파렴치와 방범대원과 창녀를 만든다
밥으로 천국과 유곽과 꿈과 화장실을 만든다 피로하다 피
로하다 심히 피로하다
밥으로 고통을 만든다 밥으로 시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으로 오르가즘에 오른다 밥으로 양심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꿈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
정과 눈물과 능변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희망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 밥
은 국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 밥
이승훈
먹던 밥 들고 나가
개에게 준다
너도 먹어라 이 푸른
여름 지나가는 바람도
먹어라
매미도 먹어라
너희들 배고프면 나도
배고프다 지는 해
뜨는 해여 숨쉴 때마다
해가 지고 해가 뜬다
☆----- 대통밥
이정록
화살도 싫고 창도 싫다
마디마디 밥 한 그릇 품기까지
수 천년을 비워왔다
합죽선도 싫고 죽부인도 싫다
모든 열매들에게 물어봐라
지가 세상의 허기를 어루만지는
밥이라고 으스대리니,
이제 더는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땔감도 못되는 빈 몸뚱어리가
밥그릇이 되었다 층층 밥솥이 되었다
칼집처럼 식식대는 사람아
내가 네 밥이다 농담도 건네며
아궁이처럼 큰 숨 들이마셔라
불길을 재우고 뜸들일 줄 알면
스스로 밥이 된 것이다
하늘 끝 푸른 굴뚝까지
칸 칸의 방고래마다 밥솥을 걸고
품바, 품바, 품바
푸르게 타오르는 통큰 대나무들
☆----- 어머니의 밥
이향아
'얘야 밥 먹어라'
어머니의 성경책
잠언의 몇 절쯤에
혹은 요한계시록 어디쯤에
금빛 실로 수를 놓은
이 말씀이 있을 거다.
'얘야, 밥먹어라
더운 국에 밥 몇 술 뜨고 가거라'
아이 낳고 첫국밥을 먹은 듯,
첫국밥 잡수시고 내게 물리신
당신의 젖을 빨고 나온 듯
기운차게 대문을 나서는 새벽.
맑은 백자 물대접만한
유순한 달이 어머니의 심부름을 따라 나와서
'체할라 물 마셔라, 끼니 거르지 말거라'
눈 앞 보얗게 타일러 쌓고
언제부터서인가
시원의 검은 흙바닥에서부턴가
마른 가슴 헐어내는
당신의 근심
평생토록 밥을 먹이는
당신의 사랑.
☆----- 밥
정대구
밥을 먹는 나를 보고
해바라기가 웃는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긴 허벅지가 드러난다
내 얼굴에 밥풀이
다닥다닥 여드름 꽃피고
나는 괜히 뜨거워
밥숟갈로
사루비아 꽃을 턴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해바라기가
더 크게 웃는다
오늘은 밥 한 사발 더 먹고
그녀에게 열을 올리자
그래도 그녀가 다시
배시시 웃는지를
그때에 또 두고 봐야지
열 아홉 살, 밥값을 해야지.
☆----- 밥詩 8.
정진규
처음엔 死者밥인 줄 알았습니다 저승길도 시장하셔서는 가시지 못합니다 이승에서 받으시는 마지막 밥 한상 어머님께 차려올리는 눈물의 밥 그런 걸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使者밥, 저승길 잘 모시고 가달라고 제 어머님 잘 모시고 가달라고 밥 한 상 잘 차려올렸사오나 노자도 두둑히 드리긴 드렸사오나 어머니, 평생을 나의 밥이셨던 당신, 마지막 밥 한상마저 당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 위험한 식사
최문자
무서운 일이다
50년 이상
매일 매끼니
저 불량한 밥을 위하여
세상에다, 끝도 모서리도 없는 둥근 밥상 하나 차리는 노동.
거품 물듯 흰 밥알 한 입 물을 때마다
이빨과 이빨 사이에서 와와, 흩어지던 으깨진 희망.
산다는 건
세상이 나를 질겅질겅 밟고 지나가는
아, 말발굽 같은 식사.
산다는 건
아주 벙어리인 나로 깔릴 때까지
밥상 하나 차리며, 밥상이 나를 차리며
서로 반질반질하게 길들이는 노동.
무서운 일이다.
50년 넘게
이렇게 매일 매끼니 밥을 이기며
아슬아슬하게 밥을 먹어치우는 위험한 식사
저 불량한 칼 같은 밥을 먹기 위하여
꼭두새벽
나는 숟가락을 들고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