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서문)
'AP통신'은 2011년 5월 29일, 캄보디아 시하모니 국왕의 근황에 관한 데니스 그래이(Denis D. Gray) 기자의 심층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고문은 시하모니 국왕의 정치적 위상에 관한 글로서는 드물게 공개된 것으로, 캄보디아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이에게는 나름 흥미로운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원문의 제목을 직역하면 <자신의 왕궁에 갇힌 '수감자'로 비춰지는 캄보디아 국왕>(Cambodia's king seen as a 'prisoner' in his palace)이다.
한국의 '연합뉴스'는 5월 30일, 그래이 기자의 이 기사를 <왕궁에 갇힌 캄보디아의 허수아비 왕>이란 제목으로 번역해서 공개했다. '연합뉴스'는 이 번역문에 'maroonje@yna.co.kr'이라는 이-메일 주소만 공개했을 뿐 구체적으로 누가 번역했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또한 기사 초입에 '프놈펜=AP-연합뉴스'라는 정도의 표시만 있을 뿐, 원 저자 개인의 이름도 표시하지 않았다. 데니스 그레이는 AP 소속 기자로서 태국이나 캄보디아에 관한 분석기사를 종종 기고해온 인물이다.
'연합뉴스'의 번역문은 비교적 무난하게 작성됐지만, 그래이 기자의 원문 중 앞쪽의 절반 정도만 번역했고, 그나마도 일부에서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후반부에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들어 있고 요약된 부분의 표현들 역시 매우 미묘한 사안들이어서, '연합뉴스' 번역문을 그대로 스크랩하기엔 망설임이 따랐다. 따라서 '크메르의 세계'는 이 기고문 전체를 다시 완역해서 공개하게 되었다. 사진자료는 모두 '크메르의 세계'가 추가한 것이다. [크세] |
(보도) AP 2011-5-29 (번역) 크메르의 세계
[분석] 시하모니 국왕은 캄보디아의 마지막 군주일 것인가
Cambodia's king seen as a 'prisoner' in his palace
기사작성 : DENIS D. GRAY
황혼이 물들고 마지막 방문객이 떠나고 나면, 젠틀하고 위엄을 갖춘 그 사내는 오랜 전설을 지닌 드넓은 왕궁에서 거의 혼자서 남게 된다. 이때 그와 함께 하는 것은,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던 --- 아마도 그 마지막 대일 수도 있는 --- 캄보디아 국왕에 오르기 전의 행복했던 시간들에 대한 추억 뿐이다.
(사진: AP) 2010년 3월 체코를 방문한 노로돔 시하모니 캄보디아 국왕이, 자신의 모교인 '프라하 음악예술아카데미'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헌정받았다.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이 계승자가 된 '왕가의 계보'는 근 2천년에 이르는 연원을 지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항상 거칠고 험난한 조국의 정치 무대보다는, 자신이 발레 무용수로 활동했던 유럽의 예술계에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그의 측근들과 전문가들은, 그가 점점 더 자신의 왕궁에 갇힌 죄수처럼 되어간다고 비유한다.
그에 대한 가장 주요한 감시자는 훈센(Hun Sen) 총리이다. 훈센은 가난한 농촌 출신에서 명민하고 교활한 ---- 일부에서는 무자비하다고 평가하기도 하는 ---- 정치인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훈센은 캄보디아가 베트남전쟁 및 자국 내전의 수렁에서 서서히 빠져나오던 무렵에, '1997년 쿠테타'를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캄보디아는 명목 상 민주주의 국가지만, 그는 정부의 모든 기제들을 동원하여 비판자들을 잠재우면서 자신의 재선을 보장해두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훈센 및 그의 사업 친구들이 자기자신들만 부유하게 만들면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빈곤의 수렁에 빠뜨려 놓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훈센의 통제력은 왕궁에 대해서도 미치고 있다. 국왕은 정부의 감시인들에 둘러싸여 있고, 이들을 훈센과 가까운 관료인 꽁 삼 올(Kong Som Ol) 부총리 겸 궁내청대신이 감독한다.(역주) 국왕이 드물게도 왕궁의 담장 바깥으로 나가기라도 하면, 근접 경호를 받으면서 언론의 접근은 차단된다.
(역주) 궁내청(왕실관리국)의 행정수장인 꽁 삼 올 궁내청대신은 시하모니 국왕의 부친인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상왕을 지근거리에서 그림자처럼 수행했고, 시하누크 공이 '자신의 유언집행에 참여를 부탁'했을 정도로 신뢰하는 왕실의 가신이다. 하지만 그는 공산당에 기반한 문화를 지닌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 내 당서열 16위의 위상을 갖고 있고, 당서열 36위까지 참여하는 상임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그의 당서열 16위는 훈센 총리의 최측근인 속 안(Sok An) 부총리 겸 관방장관(당서열 17위)보다도 앞서는 것이다. 하지만 왕당파인 그가 어떤 연유로 집권 CPP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가 CPP 당원이란 사실조차 대중적으로는 인식되지 않고 있다. |
비록 <캄보디아 헌법>이 국왕에게 상당한 권력을 부여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주어진 바가 없다. 야당인 '삼랑시당'(SRP) 소속으로 정부에 대한 극소수의 공공연한 비판자 중 한 사람인 손 차이(Son Chhay)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꼭두각시 국왕'(puppet king)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왕의 권력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까지 약화됐다. 국왕은 살아남기 위해 가능한 한 총리의 비위를 맞춰야만 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
캄보디아 국왕의 위상이 언제나 이랬던 것은 아니다. 시하모니 국왕의 부친은 현란하고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던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공이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마치 거대한 조각상처럼 캄보디아에 올라타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신왕(神王, god-king)으로 여겼고, 그의 생일이 되면 왕궁 앞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불꽃놀이나 여타 화려한 축하행사를 열곤 했다.
시하누크 전임 국왕은 2004년 훈센 총리와 마찰을 빚은 후 돌연 퇴위했다. 손 차이 의원 및 여타 사람들은 시하모니 국왕이 군주제 존속을 바라는 부모의 압력 때문에 왕위를 계승했다고 말한다.
슬프고, 외롭고, 버림받았다
7년이 지난 지금, 동정적인 캄보디아인들은 시하모니 국왕에 대해 묘사할 때 "슬프고, 외롭고, 버림받았다"는 말을 사용한다. 시하누크 공의 개인비서였고 현재는 시하모니 국왕의 자문위원이기도 한 시소왓 토미쪼(Sisowath Thomico) 왕자에 따르면, 올해 58세의 시하모니 국왕은 매일마다 문서에 서명(결재)하고 방문객들을 접견하며, 여타 일상적 업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으며,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홀로 식사를 하거나 독서를 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6명의 부인과 수많은 정부를 두었던 그의 부친과는 달리, 시하모니 국왕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후계자를 남길 것 같지도 않다.
(자료사진: Phnom Penh Post) 왕실 자문위원인 시소왓 토미쪼 왕자.
왕궁의 담장 안에 우아한 천산(天傘)과 황금빛 뾰족탑이 서 있긴 하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바깥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녹음이 우거진 강변의 광장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거나 매트를 깔고 앉아 국수 같은 간식을 먹으면서 일상적인 저녁 시간의 휴식을 취할 뿐이었다. 이 광장에서 근무하는 젊은 공무원인 신 차이(Sin Chhay)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왕은 선량한 신사이며, 캄보디아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문제를 갖고 있다. 바로 권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궁전 안에 머물기만 한다. TV를 보면 지도자들이 국왕의 면전에서 굽신대지만, 그의 등 뒤에서는 존경하지 않는다. 캄보디아의 진짜 국왕은 훈센이라고 할 수 있다." |
키우 깐하릿(Khieu Kanharith) 공보부장관은 국왕이 사회 및 종교적 사안들과 사법적 검토에 관여하고 있다면서, 훈센 총리로부터 매달 정부의 활동에 관한 보고를 받고 그에 대해 권고사항을 조언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의 시하모니 국왕은 군주제 부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국왕이자 국가단결의 상징으로서, 그는 엄정한 중립을 유지하고 있고, 어떠한 정치적 활동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가 궁 안에 있는 수감자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다." |
시하모니 국왕은 전직 발레 무용수이자 문화대사로서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랑스에서 25년을 살았다. 서방 외교관들은 그러한 유럽에서의 과거생활이 그에게는 커다란 도피처였다고 말한다.
시하모니 국왕은 지금도 "나의 제2의 고국"이라 부르는 현재의 체코 공화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그곳의 수도 프라하(Prague)에서 보낸 시간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말하기도 한다. 체코인 방문객들과 대화할 때 그의 유창한 체코어가 대화를 엿들으려는 감시자들에게는 분명하게 곤혹스런 일이 되기도 하는데, 그는 체코의 무대예술 평론지를 탐독하며 발레나 오페라 DVD도 좋아한다.
시하모니 국왕은 9세 때 체코에 건너갔을 때 자신을 돌봐줬던 가족들과 지금까지도 밀접하게 연락을 하고 있다. 13년 후, 그는 프라하의 '음악예술아카데미'(Academy of Musical Art)를 졸업했다. 그 직후 그의 부모와 상봉했는데, 당시 그들은 잔학한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 하에서 왕궁 안에 사실상 가택연금된 상태였다.
크메르루즈는 1975년 친미 정권을 붕괴시키고 정권을 잡은 바 있다. 당시에 시하모니 왕자는 왕궁의 정원에서 일하면서 왕관홀을 청소하기도 했다. 크메르루즈 정권의 만행으로 약 170만명 정도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안에는 시하누크 공의 자녀 및 친인척 10여명도 포함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지만, 캄보디아는 여전히 당시의 문제에 직면해있다. 유엔(UN)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국제법정'(ECCC)은 극소수의 생존해있는 크메르루즈 지도자들을 심판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오랜 기간 연기되고 관련 부정부패 의혹도 제기되면서 피로감을 주기도 했다.
시하모니 국왕은 이 국제재판에 단지 의례적으로만 참여했다. 더욱 깊숙히 개입하는 일은 그 어떤 것이든 훈센 총리 및 그의 부친인 시하누크 공을 짜증나게 만들 것이다. 두 사람은 당시 크메르루즈와 직접 동맹을 맺었던 이들이지만, 이번 재판을 지지하기도 했다.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하자, 시하누크 공은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베트남의 위성정권'에 대항하는 반군들을 배후에서 후원했다. 이때 시하모니 왕자도 파리로 건너갔고, 심지어 1993년 부왕이 다시금 캄보디아 국왕으로 복위한 후에도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파리에서 서양 발레는 물론 '크메르 고전무용'까지도 가르치고, 공연하고, 무대에 올렸다. 또한 주 유네스코(UNESCO) 대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는 2004년도에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이 즐거웠던 생활을 청산해야만 했다.
(사진: Phnom Penh Post) 2010년 9월 27 프놈펜 국제공항에서, 시하모니 국왕(좌)이 중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출영나온 훈센 총리(중앙)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국왕의 고위급 자문위원이자 의회 내 소수의석을 지닌 군소 야당 2곳 중 1곳과 관련이 있는 손 소우벳(Son Soubert) 씨는, 정부가 헌법 조항 중 2가지를 차단시켜 놓았다고 말했다. 하나는 잠재적으로 출현할 수도 있는 국왕이 수장이 되는 강력한 '국가안보 최고위원회'(Supreme Council of National Defense)의 형성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이 국왕에게 직접 청원하던 전통을 이어갈 연례 국회라고 한다. 키우 깐하릿 공보부장관은 연례 국회에 관해 논평하면서, 오늘날의 캄보디아에서 선출직 국회가 결정한 내용을 뒤집기에는 그러한 연례 국회가 곤란하기도 하고 힘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시하모니 국왕이 얼마만큼의 권력을 양보하기 원하며, 또 알마만큼 실천할 수 있기를 원하는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호주의 싱크탱크인 "로위연구소"(Lowy Institute) 소속 역사가로서 노로돔 시하누크 공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던 밀턴 오스본(Milton Osborne)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그(국왕)가 정치적 역할을 하려 한다면, 훈센이 그와 군주제 자체를 거의 즉시로 약화시키려 들 것이란 점에 대해, 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바로 그가 효과적으로 왕궁 내 수감자가 되어버린 이유인 것이다. 그는 아마도 캄보디아의 마지막 국왕이 될 가능성이 높다." |
과거의 수호자
국왕의 자문위원인 시소왓 토미쪼 왕자는 훈센 총리와 시하모니 국왕 사이에는 적대감이 없다면서, 캄보디아의 군주제가 그 정치적 역할을 버린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을 뿐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국왕은 과거와 전통의 수호자이고, 캄보디아의 도덕적 측면을 대변한다. 또한 미래 세대들이 나아갈 바를 가리키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에 관해서는 정부에 맡겨두고 있다." |
대부분의 정보들을 취합해보면, 시하모니 국왕은 여전히 대체로 존경을 받고 있는데, 특히 시골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도시지역에서는 좀더 관련이 약한 인물로 여겨질 수도 있으며, 특히 평균연령이 23세인 극도로 젊은 인구학적 상황에서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캄보디아에 폭력이 난무하기 이전인 그의 부친 시하누쿠 공의 전성시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자료사진) 시하누크 공의 장남으로서, 한때는 훈센 총리의 주요한 정적이기도 했던 노로돔 라나릿 왕자. 그는 지난 2-3년간 정계은퇴 상태에 있었는데, 최근 정계복귀를 발표했다.
왕당파 군소정당인 '노로돔 라나릿 당'(NRP) 총재이자 시하모니 국왕의 이복 형인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ridh) 왕자는 캄보디아인들이 "아직도 마음 속으론 왕당파"라고 믿으면서, 자신의 이복 동생에 대해 여운 섞인 견해를 보였다. 라나릿 왕자는, 시하모니 국왕이 자기 자신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군주제를 위태롭게 하지 않기 위해 <헌법>에 규정된 특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시하모니 국왕은 내성적인 성격이고, 그러한 점이 그로 하여금 최소한의 역할만 하는 일을 편안히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라나릿 왕자는 "국왕과 총리는 상황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신사협정"이라면서 웃었다. 하지만 그는 "내 동생이 많이 행복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다른 종류의 일을 하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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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통신의 방콕 주재 기자인 그랜트 펙(Grant Peck)이 본 기사의 작성에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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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흠 그렇군요 .... 연합뉴스의 글은 도마뱀이 머리 꼬리 짤른 격이라 누가 봐도 오해사기 쉽겠네요 .. 출처도 없고 ... 왜그랫을까요?? 공신력 잇는 회사가 말이죠 ...
크세의 귀염둥이 보아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