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실로암 안과병원은 앞 못보는 가난하고 영세한 맹인들에게 광명을 주는 개안수술 전문병원이다. 그런데 이 병원이 어떤 연유로 설립되어 영세 맹인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얘기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54년전인 1950년 6·25동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 성동구 신당동의 무학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선태군이 바로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이다. 6·25동란이 났던 1950년 당시 10살의 김선태 소년은 어디선가 날라온 포탄에 의해 부모님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비극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된다. 일가친척이라고는 하나없는 서울에서 그는 당장 갈곳이 없어 친구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는데 또다시 그에게 제2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7월 18일 김선태 소년은 친구 7명과 함께 서울 뚝섬에 있는 참외밭에 들어가다가 북한 인민군들이 설치해놓은 시한폭탄을 밟아 친구 6명이 폭사하고 김선태 소년 혼자만 살아남았다. 생명을 건졌지만 그러나 시력이 상실되어 버렸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세상은 보이지 않고 캄캄한 암흑 뿐이었다. 전쟁으로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들판에서 그는 며칠을 절망과 무 서움에 떨면서 울다가 지쳐 버렸다.
어느날 밤 유달리도 밤이슬이 많이 내리는 조용한 밤 이름모를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김선태 소년은 풀밭에 누워 지난날을 회 상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생각중에서도 그가 초등학교 2학년때 교회에 나갔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교회 주일학교의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던 기도 생각이 떠오른다.
김선태 소년은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나는 부모도 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눈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대로 며칠만 더가면 죽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신다면 나는 그 은혜를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 기도를 하는 동안 피로써 얼룩진 눈에서는 뜨거운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갑자기 용기와 자신감이 넘쳐 흐른다‥‥ 그후 죽을 힘을 다해 간신히 피난민의 대열에 끼어드는데 성공한 김선태 소년은 부산까지 오는 동안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때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기도를 했다. 특히 어렵게 얻어온 깡통밥을 앞에 놓고도 한참동안 감사기도를 드린 후 밥을 먹는다.
부산에 도착한 김선태 소년은 구걸을 하면서 일과를 보낸다. 어느날 김선태 소년은 길거리에서 귀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불우한 맹인소년 김선태군을 불쌍히 여긴 어떤 사람이 이 맹인소년에게 맹인소년들만 모여 점자교육을 시키는 장소를 알려준다.
김선태 소년은 이곳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후 9·28 수복과 더불어 서울로 올라와 어느 미국선교사의 도움으로 숭실중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러나 맹인 점자책이 아닌 일반 교과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공부를 하는 동안 그 어려움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다. 친구가 읽어주는 교과서를 그대로 외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학생에 비해 두배 세배의 공부 시간이 소요되며 매일 새벽 두시까지 공부를 해야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선태군은 다시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숭실대학에 지망한다. 그러나 당시 점자교육시설이 없는 대학에서 맹인 학생의 입학을 거부했다.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았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로 매달렸다. 그리고 당시 문교부 장관실을 33번이나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김선태군의 불굴의 향학열과 그 투철한 집념에 감동을 한 문교부 장관은 특별지시를 내려 김선태군을 숭실대학 철학과에 입학시키게 된다‥‥
영어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친구들에게 부탁을 해야만 하는 어려운 공부 ! 그러나 그는 불퇴진의 용기와 슬기로써 학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그리하여 그는 대학생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깊은 지식과 인격을 쌓아서 1966년 숭실대학 철학과를 우수 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졸업식날 그의 두눈에서는 또한번의 뜨거운 눈물이 졸업가운을 적시고 있었다. 하나님 나를 살려주신다면 그 은혜를 꼭 갚겠다고 했던 10살때의 그 기도를 생각하니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흐른다‥‥
숭실대학을 졸업한 김선태군은 다시 신학대학에 들어가 4년을 공부하고 전도사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항상 소원했던 맹인복지증진을 위한 첫단계 계획으로 미국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국의 맹인 특수기관에 유학을 가게 된다. 그는 이곳에 서 특수분야의 실기훈련과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뜻있는 사람들의 협조로 맹인들의 사회활동 지원에 앞장선다. 1972년 최초로 설립된 한국맹인 연합교회, 역시 최초의 맹인 장학금제도, 점자 찬송보급, 77년 맹인선교 후원회창설 등등 많은 일을 해나간다.
그리고 가장 소원했던 사업이 드디어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맹인들에게 광명을 찾아주는 개안수술 전문병원 설립이다. 이것은 김선태 목사 개인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눈을 뜨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광명을 찾아주겠다고 발버둥치는 이 맹인 목사의 간절한 기도에 오묘한 섭리의 역사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충북대학교 이종순 교수가 자기 아들의 결혼준비금을 느닷없이 맹인 개안수술비로 바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성심병원 구본술 박 사를 중심으로 한 맹인개안 수술비용 모금운동이 벌어진다. 그리고 1981년 어느 음악회에서 개안수술을 받고 광명을 찾은 여학생이 나와 감동어린 소감을 발표하자 당시 고려합성 장치혁 회장이 김선태 목사에게 빨리 병원을 설립하자는 제의를 해오면서부터 기독교 실업인을 비롯한 각 교회 여전도회가 동참, 드디어 기금조성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86년 2월 17일 서울실로암 안과병원이 개원되어 김선태 목사는 이 병원의 원목으로 사역을 하게 된다. 김선태 목사 의 하루일과는 4시에 기상하여 새벽기도가 시작되며 7시30분에는 환자들과 아침예배 8시 30분에도 다시 병원 직원들과 아침 예배 등 꽉 짜여진 하루일과는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형편이다. 그동안 안내자없이 미국을 수십번이나 혼자서 여행을 했다.
민족의 비극 6·25! 이 6·25동란으로 인해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에 의해 부모님이 사망했고 역시 폭탄으로 친구 6명이 사망하는 등 6·25동란의 대표적인 비극의 주인공이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 속에 친구들은 간곳 없고 혼자만 까무라쳐 기절해버린 그날의 이 소년을 누가 혼들어 깨웠을까?
암흑과 피고 범벅이 된 두 눈을 쥐어뜯으며 통곡하던 절대절망의 그날의 참상!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던 이 소년의 처절한 모습을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직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 !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성경 여호수아 1장 9절)
김선태 목사는 실로암 안과병원 원목으로 18년을 사역했는데 지난 1월(2004년)에 다시 병원장의 중책을 맡았다. 그가 이 병원을 설립한 이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로 개안수술을 하여 광명을 찾게 한 사람이 2003년까지 총 4,381명이 된다고 했다.
1987년 김목사는 당시 필자와 방송대담에서 만일 10살때 그 폭탄으로 다행히 실명이 되지 않고 성한 몸으로 살아 남았다면 오늘날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를 가상해 본 일이 있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내가 성한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왔다면 나도 내인생과 내행복 내가족을 위해 욕망을 달성하느라 정신없이 살았지 남의 눈뜨는 일에 신경썼겠느냐'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가정부의 실수로 맹인이 된 크로스비는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나의 갈길 다가도록'등 9천여편의 찬송시를 쓴 1800년대 혜성처 럼 나타난 위대한 찬송시인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다시 허락해주신다 해도 나는 받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은 더 맑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꿋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겠습니다'하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또 '나는 내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고 진실을 다해 고백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김선태 목사의 개인의 실명은 곧 수천명의 맹인들에게 광명을 준 생명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썩으면 수십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예수님의 만고불변의 진리의 말씀은 혼탁하 고 이기주의에 빠진 이 시대를 향해 더욱더 큰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글 : 김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