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수동의 하바드 >
" 어 자네 혜광고가 부산 어디에 있나? "
" 저 <보수동>에 있습니다."
" 뭐라고 하바드가 있는 <보스톤>에서 왔다고?"
1979년 대학입시 합격후 당시 형식적으로 치러진 면접에서
학장이 물어본 첫번째 물음이 도대체 혜광이란 학교가
어디 붙어 있느냐는 것이었다. 서울은 촌놈 기죽이는 곳이다.
평준화 2기였던 우리는 가는 곳마다 찬밥신세였지만
청춘은 우리를 현실에 눈멀게 했다. 그까짓 대입과정의
불이익은 우리가 맞은 찬서리의 전조에 불과한 것이다.
서울의 5대공립과 6대사립 그리고 광주,경북,경남의 명문
출신들에게 평준화세대의 진출은 전혀 고민거리가 못되는
찻잔속의 태풍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부는 기존의 명문시스템에 투항해 편하게 살아야 할 길을
택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없는
시골출신들은 가을 추수가 끝난 벌판에 내린 찬서리를
맞으며 떨어진 이삭을 줏어들고 겨울을 통과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의 의식깊은 곳엔 찬서리맞은 세대라는 피해의식이
잠재해 있었다. 괜히 구체적으로 따지면 막연한, 차별이
일반화된 시대였지만 우리는 왠지 더 서러웠다.
< 麗玉과 공무도하가 >
최근 한나라당대변인으로 방방날고 있는 전여옥은 아니지만
여옥(麗玉)이란 여인이 공무도하가에 공후인으로 곡을 붙였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본에서 활동하다 돌아온 가수 이상은이
공무도하가를 또 곡으로 만들었습니다.
백수광부,수로왕의 이름을 참고해 그들이 마치 아라비아인이거나
백인인 것처럼 해석하기도 하지만 넌센스입니다. 말그대로 그들의 머리카락이
아닌 얼굴이 하얗다는 뜻이며 얼굴에 백색화장을 한 카부키배우를
연상하면 됩니다. (지나친 육식으로 생긴 부스럼을 가리고 햇빛을 피하고자
얼굴에 회를 칠한 것이다. 제사상은 주지육림 아닌가. 유교의 지도자는
제사로 날을 세웠던 것이다,)
일본의 유교는 원시유교로서 불교전래이전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물건너간 것입니다. 그것은 야만에서 약간 진화한 형태로 사무라이와
태평양전쟁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이미지는 원시유교의 원형인 것입니다.
왜구를 앞세운 일본의 맹목적 약탈국민성이 공자의 가르침이 전파되는 것을
저해한 것입니다.
주자학은 안티공자입니다.공자의 인(仁)이란 휴매니즘이며 그는 왕권을
경험한 적도 없습니다. 혁명사상가로 알려진 맹자가 오히려 후퇴한 것입니다.
왕도정치는 왕권국가를 전제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주자는 원시유교를 참고해 조선의 왕족들에게 복고풍의 엔틱유교를
세일즈한 것입니다. 그것은 왕에 의한 지배와 야만의 약육강식을 인정하는
사이비유교였던 것입니다. 주자학을 받아들인 조선역사가 사화와 전쟁으로
얼룩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퇴계학에 열광하는 것도 이황의 사단칠정시비가 원시유교문화의
화두인 기(氣)를 앞세우고 인(仁)의 실천을 우선하지 않는 점에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 나는 왜 H그룹에 천착하는가 >
홍보실직원들은 야행성이다.
요즈음은 잘 알려졌지만 홍보실직원들은 일과가 끝난
저녁 8시쯤 한국의 정보1번지라는 광화문부근 신문로
4거리 D일보주변에서 다음날 아침신문 가판을 체크하는 것이
일상의 가장 큰 업무이다.
J회장이 평양을 다녀온 어느날 나는 가판당번이 되어
H일보를 체크하다 이상한 문구를 발견했다.
회장의 평양방문기를 특집으로 다룬 기사에서
<몽필어미>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는데
J회장이 고향에 들러 처가를 방문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회장은 늘 <MK어미>라는 호칭을 즐겨한다.
나는 실장에게 이 문구의 정확성여부를 확인했는데
의외로 실장은 굉장히 당황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죽은 장남과 현재의 장남역할을 하는 MK의 모계가 달랐던 것이다.
본처로 알려진 회장부인은 첫번째가 아닌 두번째 여자였던 것이다.
나는 1993년 H그룹을 떠난후 고향에 계신 모친으로부터 장남인 선친에게
배다른 누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회사시절 겼었던
당황스런 기억과 겹쳐 묘한 기분이 든 적이 있었다.
뭔가 비밀이 있는듯한 가족사에 대한 천착은 사실 선친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
해방의 혼란속에 동경에서 가족과 함께 귀국한 선친은 의사지망생이었다.
그러나 모국어에 대한 무지와 정치적 혼란속에 의사로의 길을
포기한 선친은 조부의 재산관리인으로 발이묶였다가 한국전쟁을
맞게 되는데 그 이후로는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현대사의 격랑속에서
자기정체성을 상실한채 떠밀려온 세대였었다.
< 어떤 성공회사제와의 대화 >
질문: 한국기독당의 실험이 포말정당으로 결론났습니다.
서독의 기민당은 본호프의 정신을 승계한 하나의 크리스트
교회적 성격이 있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서독의 교회는 텅텅 비어있다 합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인가요.
응답: 교회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어떤 교회는 사도 베드로가 독점한 어떠한 정당일지도 모릅니다.
중국에는 지금 공식적으로 교회가 없지만 수천만의 기독교인이
존재합니다.
질문: 한국교회는 대형화의 문제로 신병을 앓고 있는 듯 합니다.
즉 대형화된 교회에는 참된 목자가 아쉽고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교회에는
신자가 아쉽고 거리에는 성자들의 행진(노숙자)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응답: 신자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교회는 사교장이 아니며
교회는 현실에서 쫏겨난 죄인들의 피할 곳이 되어도
좋은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란 오직 믿는 자들만을 위한 곳이라기 보단
죄인들을 위해 텅 비위진 곳일지도 모르며
원시적 의미의 교회는 원래 그런 곳이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질문; 성직자의 목회에도 성공과 실패가 존재합니까?
응답: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제직에 무한성이 전혀 내포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신자개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제는 왕이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대리점의 관리자일 뿐입니다.
엄연히 본사(주인)는 따로 있지요.
인간으로서의 인격이 사제직에 동반하는 것입니다. 사제도 사람일뿐
사제든 사제가 아니든지 사제답게 살수 있기를 우리 모두 희망할 뿐입니다.
굳이 유무한을 따진다면 사제직은 유한한 것입니다.
사제도 죄인이며 다만 죄로 부터 자유할 뿐인 것입니다.
질문:군부독재하 민주화투쟁과정에서 기독교가 기여한바가 작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민주화가 된 오늘날 그때 앞장섰던 기독청년들은
역사현장이나 정치현장에서 하나의 세력으로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극소수의 마이너리티를 형성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응답: 교회에 대한 민주운동권의 시각은 크게 세가지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그 첫째가 맑스의 주장대로 종교를 민중의 마약으로 보는
절대다수의 견해인데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구체제하에서
또는 민주화투쟁과정에서도 종교는 민중의 아편으로서 부정적 기능을
한 사실을 모두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외피론인데 모든 정치활동이 규제된 상태에서 문화를 비롯한
종교가 일정한 운동의 장을 제공한 역할을 또한 부인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세째는 중생론인데 이것은 외피론의 연장으로서 민주화투쟁과정에서
일정기간 신앙의 시련을 겪은후 종교적으로 다시 태어난 경우입니다.
두번째와 세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첫번째의 경우를 좀 비판을 해 본다면
민주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도 과연 아직도 종교가 민중의
아편으로서 심대하게 작용하고 있겠느냐 하는 것이고 오히려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쟁탈전이 일상화된 오늘날의 아젠다는
민중의 아편으로서의 종교가 아니고 지도자들의 아편으로서의
권력과잉의 문제가 심각하게 떠오르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종교권위주의 >
1.4.15총선에서 맹위를 떨친 것은 나랏님콤플렉스였다.
탄핵반대여론이 폭발한 이면에는 나랏님 콤플렉스도 한몫했다.
역사적으로 나랏님 콤플렉스는 의적 김재규를 반란자로 몰았으며
멍청이 고종을 독립군대장으로 위장시켰고 광기의 인간 이승만을
국부로 추종케 했으며 최근 박근혜를 통해 한나라당을 부활시켰다.
한국의 현대정치사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동으로서
한국인의 집단히스테리의 뿌리는 왕가에 대한 향수에 있으며
선거등을 통해 불합리한 집단행동양태를 드러낸다.
2. 구체제의 유물 나랏님콤플렉스의 혜택을 톡톡히 보는 종교지도자들
교권과 교회내 허위와 가식이 이러한 한국인의 정치의식구조와
밀접히 연관되어있다. 선거막바지가 되거나 각종 선출직을 둘러싼
조직내 갈등이 격화되는 막판분위기는 거의 광적이다.
모두 인간이기를 포기한 권력중독증환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히스테리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는 권위와
교권을 틀어쥐고 일반위에 왕처럼 군림한다.
3.정치인들도 집권만 하면 폐쇄적 분리주의자로 돌변한다.
정치에 있어서는 아예 노골적이다.
온갖 수모를 마다하지 않으며 집권을 위해 동분서주 여기저기
쑤시고 돌아다니다 일단 집권만 하면 언제 봤느냐는 식이다.
이러한 폐쇄주의적 분리주의자들의 양산은 필연적으로
지지율의 저하로 연결되며 종국에는 레임덕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참혹한 폐배를 겪은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꼬리를 내린다. 마치 늙고
병든 한마리 삵괭이처럼.. 민주당과 자민련을 보라.
4.국민정치교육을 언론이 독점한 결과
자민련은 모르겠지만 민주당의 몰락은 정말 너무
뜻밖이 아닌가? 아무리 탄핵후폭풍일지라도...
이것은 뒤줴이를 둘러싼 정치집단에 대해 평소에
우리가 우려한 심각한 폐쇄주의가 초래한 결과이다.
DJ에게 줄섰다 좌절한 정치지망생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노무현대통령은 정말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 이유는 언론때문이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독점하고
왜곡하는 언론이 존재하는한 정상적인 국민정치교육은
어려울 것이다. 한국에서 권력쟁탈전化된 정치를 이해하는
길이란 극히 개인적인 고행같은 것이 될 것이며 득도의 길은
한없는 추락의 지름길일 것이다.
하기야 신은 오직 추락을 선택하는 자에게만 날개를 허락할 지도 모른다.
< 압구정동은 비상구가 없다 >
압구정동 H아파트에서 출발해 동호대교를 건너 남산 1호터널을
지나 광화문까지 소나타세단을 타고 논스톱으로 출퇴근하는 계층에
포함되는 날 당신은 이 땅의 소위 출세한 부류에 등록되는
것이다. 세상에 강남의 노른자위땅에서 강북의 요지까지 단 10분에
주파하는 스스로를 상상해보라. 그 길은 신 주작대로요 남한식
주석전용도로라 할 것이다.
새벽 5시경 먼저 대기업의 비서실장들이 이 길을 탄 후
연이어 청와대와 정부청사 1급이상 공직자들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오전 10시경 전날 야간업소를 휘돌았던 연예인들이
맨마지막으로 교통경찰의 에스코트를 받는다.
공식적이 아니지만 우리사회에도 관습적이고 비공식적인
특수층 전용도로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운전기사가 딸린 검은색 세단을 타고 신호등에 구애받지 않고
지하철3호선과 평행으로 달리는 이 땅의 정복자들 2,3천명의
손에 의해 이 나라는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 이권을 노리는 파리떼가 여러겹의 동심원을
둘러치는 형상이 강남불패신화의 실체인 것이다.
이러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2,30명의 핵심만 물갈이하는데도
2,3백억의 정치자금이 소요되는 것이다. 구세력은 아파트값을
양껏 올려놓고 프리미엄겸 전별금삼아 뜯어챙기고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다.
행정수도이전은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의 분산이며 그 성공의
핵심키워드는 강남을 해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홍보실전용 소나타세단을 타고 내가 먼저 들른 곳은 국회
의원회관의 J의원 사무실이었다. 비서관에게서 1천3백만원짜리
지폐다발을 받아들고 C일보 정치부장에게 전달하는 것이
그날 나의 소임이었다. C일보의 정치부장이었던 주기자는
소위 YS장학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경우 흔히 수표를 백봉투에 넣어 회사사보사이에
끼워 몰래 전달하는 것이 예의에 속하나 현금다발을 숨길
방법이 결코 마땅치 않았다. 1만원짜리 지폐 1천3백장이라
해봐야 월간지 1권 부피밖에 되지 않지만..
정치부장대신 코리아나호텔 커피숖에 나타난 C일보 주간지부장은
돈봉투를 받으며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 몇십만원은 우리 부서 회식비외다"
나는 속으로 아까운 돈 날렸네하고 생각하면서 회사로 돌아왔지만
그 돈 1천3백만원이 일으킬 엄청난 사태를 예감할 수 없었다.
H중공업 노동자들을 착취한 잉여금임이 확실한 그 돈은 3당합당의
빌미가 된 동해보궐선거 후보매수자금의 일부였던 것이다.
6.29이후 양김분열로 2,3등으로 낙선한 YS와 DJ는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면서 정치적 재기를 노렸고 연이어
계속된 보궐선거들은 양김의 결사적 대결장으로 비화되었다.
DJ를 비토하던 전경련은 YS를 지원하기 위해 4대그룹으로부터
1천3백만원씩을 받아 5천만원을 채워 후보매수자금으로 활용케
했던 것이다. 13 X 4 = 52 그리고 나머지 2백만원은 정치부기자
들의 술값으로 날린 것이다. 기자들을 통해 정치자금을 마련하
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을 YS는 경험을 통해
간파하고 있었을터이다.
그런데 누군가에 의해 이 사실은 집권세력에게 알려졌고
M당 사무총장이 YS대신 구속되는 결과를 가져 왔는데
이 일로 귀공자출신 YS는 감옥살이를 피해 3당합당에 합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동해후보매수사건에서 3당야합으로 가게된
전말일 것이다.
< 소설가 P氏의 하루 >
소설가 P씨는 말합니다 우리문단에 큰 그물이 두개 있어 하나는 문지요
다른 것은 창비요 그 그물에 걸려줘야 문화인명부에 등재된다오 아니 동리도 죽고 미당도 갔는데 그 무슨 말씀인가요 이름하여 구조적 및 자폭검열을 말씀하시는가본데.. 출판사 사장은 말합니다 돌아가시면 전집이 팔릴텐데~ 아 P씨는 살고픈데 가난과 처자식이 쳐다보고 있구나 저출판사 사장놈은 무슨 화랑주인친구인가 알아듣지도 못할 수요공급법칙이 어떻고 문화관광부가 어떻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들어 본듯한데 문광부는 또 무엇인가 바쁜 세상에 글쟁이 챙겨주는 공무원이 생겼나 어쨋든 출판사 사장은 뒈지기전에 잔뜩 써질러 놓고 죽으랜다 아그렇지 유산보험이라고 요즘 잘 팔린대더라 소설가 P씨의 하루는 십여년전부터이부근서 오락가락하다 최근에 자리보존하고 누웠단다 그러니 문학이 이래야하니소설이 저래야 사니 시란 무엇인가 따지기전에 실명의 문화부터 좀 정착시키자 나는 그대가 쓴 글을 믿지 못한다 익명이 설치는 곳에 문학의 미래는 없다 문학없어도 사람 사는가 보다 인터넷만 있어도
< 헤광의 새 정문에 얽힌 에큐메니칼 >
내가 서울생활 말미에 사귄 L화백은 환속한 승려였다.
그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출가를 한 후 뜻이 있어
환속해 우리나라 비국전파의 거두인 석도륜선생의
손제자가 되는데 석선생은 이미륵의 뒤를 이어 독일대학의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던 석학이었다. 석선생역시 환속한
승려였다.
그런데 월정사와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전쟁당시 북한군에 밀린 국군중 일부가
북한군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상황에서
사찰주변이 적의 은거지로
활용될 것을 우려해 절에 불을 지르고 후퇴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주지를 찾은 것이었다.
그당시 주지로 계셨던 분이 유명한 방한암선사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방선사는 심사숙고끝에
한가지 계책을 내놓았는데 국군의 지휘장교에게 절간문만
태우고 후퇴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사찰의 정문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난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본 북한군은 절을 피해 애둘러 진격했고
국군장교도 지휘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가 절간문을 불태우게 한 사건은 훗날 불교계에
시비거리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나는 민주공원으로 가는 버스속에서 스쳐지나는
혜광고의 새로 낸 정문을 보면 괜시리 L화백과 월정사의
방선사 그리고
새 정문을 새우는데 기여했다는 동문회장이
생각나 괜시리
씨익 웃곤 하는 것이다.
< 부산민주공원에서 >
노사정위원회 J선배를 통해 소개받은 부산 민주공원 운영
위원인 L선배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 이곳은 YS정부시절 부마항쟁과 부림사건 주동 멤버들이
조성하고 운영하는 곳이라 6월항쟁세력과는 약간 거리가 있네"
" 박종철기념관이 어려우시다면 민주운동사료관내에 조그만
부쓰라도 하나 만들어 주실수 없으신가요? "
우리의 대화는 이정도에서 더 진전되지 못했다.
국세청안에 있는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인 J선배는
나의 보고를 받고 이렇게 자랑했다.
" 나의 모교인 광주일고에는 일제강점기 최초의 학생의거였던
광주학생의거기념탐이 정문을 들어서는 정중앙에 위치해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주고 있네"
K대 학생운동권출신인 J선배는 한때 인사동에서 붓을
팔아 생업을 삼던 아웃사이더로서 나는 그의 작은 고객이
었었다.
민주정부의 탄생은 영원한 아웃사이더일 것 같았던 그를
인사이더로 탈바꿈시켜 놓았던 것이다.
< 밀다원시대 >
얼마전 피카소의 유작 한점이 백수억에 팔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서양의 그림이 고가로 판매되는 것은 아마 공급루트가
일원화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더비를 통하지 않고는
그림이 제값을 받을 수 없는 서양미술작품들은 한편 구라파의
가난한 귀족들을 먹여살리는 방편이기도 할 것이다.
노골적으로 영업행위를 할 수 없는 귀족들은 가끔씩 예술품이나
고가구를 처분하는 방식으로 몫돈을 만들어 가난한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는 공산공분공생문화를 통해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우리의 경우 출판문화계의 베스트셀러만들기를 통해 가난한
문인들을 먹여 살리는 공생문화가 살아있기는 했다.
기실 이러한 문화는 한국전쟁당시 남포동의 밀다원에 모인
문인들간의 미풍양식이 기원이었다. 전쟁을 피해 부산에 모인
전국의 문인들은 밀다원에 모여 하루를 소일했을 터인데
그날 누군가 원고료를 받았다든지 세간살이를 처분한
독지가가 나타날 때까지 죽치고 앉아 하루종일 담소하다
주인공이 나타나 왠종일 축적된 커피값,담배값을 해결하고서야
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물론 남는 돈은 술값이었을터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이러한 POOR NOBLE의 전통은 문화의
독식주의로 변종되어버렸다. 그리고 문화권력은 마치 문단에
거미줄친 DIRTY HIGH(더러운 상류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도 인사동의 수희제같은 전통찻집에는 밀다원의 전통이
남아 있어 몇몇 재야인사들이 마지막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환도이전의 밀다원을 꿈꾸는 수더분하게 생긴 다방주인과 함께...
그런데 한국전쟁당시에는 부산역이 광복동 시청옆에
있었고 나의 할아버지는 그 맞은편 지금의 ESS학원자리에
부산에서 가장 큰 부일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열세번째 교회 >
2004 오감도
=-=-=-=-=-=-=-=-=-=
첫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두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세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네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다섯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여섯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일곱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여덜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아홉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열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열한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열두번째 교회가 무섭다고 합니다.
열세번째 교회가 우습다고 합니다.
웃다 죽은 교회여.
- 이상 김혜경의 詩 <오감도>를 패러디함 -
同時代 年表 (다섯개의 봉인) - 1920년대 연구
==================================
1980.5.18= 1919.3.1
1987.6.29= 6.10 만세운동
1991문화일보창간 = 1920동아일보 창간 (社是 : 문화주의를 주창함)
1997 IMF = 태평양전쟁
2001 .9.11 WTC = little boy(Atomic-bomber)
아놀드 토인비 역사학의 핵심은 <도전과 응전>이 아니라
<同時代性>에 대한 고찰이다.
<동시대성>이란 한마디로 <오늘이 그날이다>란 뜻이다.
< 치사한 리버스엔지니어링 >
리버스엔지니어링이란
기술후진국이 선진기술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기술선진국의 경우 기술개발의 발달이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겠지만 후진국들은 버튼을 눌르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담엔 조립해체를
학습한 후에야 마지막으로 제작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이 과정에서 선진국들은 엄청난 로얄티를 챙깁니다.
영국의 경우 국민총생산의 40%가 로얄티수입이라 합니다.
서구역사상 정치개혁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혁명은
종교개혁과 산업혁명을 뒤이은 것이었습니다.
정치사회개혁에 있어서도 리버스엔지니어링이론이 해당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거꾸로 세계사를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4.19라는 정치혁명이 선행된 이후에 산업혁명을 경험했지요.
선진국들은 우리의 학습이 지체될수록 고가의 학습비용을
챙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완성시켜야할 사회문화혁명은
종교혁명이며 이 과제를 소화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영원히 낙후될 것입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볼때 4.15총선이후에
영국이 우리나라에 빌려준 차관 20억불의
원천은 바로 우리나라의 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영국기술자들이 쓸어간 설계용역비와
연간 1백억불이상의 석유수입비용에
포함된 영국왕립지리학회 유전개발용역비등이
환불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다시 복리이자를
쳐서 뜯기는 것이다.
아니 이러한 구조자체가 복리구조이겠다.>
< 王子의 난인가 七庶의 난인가 >
나에게 네분의 할머니가 계셨다는 사실을 안 것은
3,4년전이었다.
징용과 난민의 무리에 섞여 일본으로 가신 조부는
청년 시절 간난신고끝에 건설청부업으로 성공하는데
그 과정에서 네 여성의 조력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있는 친할머니는 두번째 부인으로서
할아버지의 물질적 성공에 가장 크게 기여하신
분이었다.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딸하나를 두었지만
가난과 옥살이에 뭍혀 헤어지고 아버지를 낳으신
본처를 만나 동경의 토목왕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 이왕직과 남묘호랑게교 >
옛 경기고자리를 계승한 정독도서관은 언론고시생들의
보금자리이다. 운동장 한쪽 귀퉁이에는 4.19혁명시에
사망한 경기고출신 4의인의 부조가 아직도 낡은 비석처럼
남아있고 학교가 강남으로 옮긴후 운동장은 사철나무등을
심어 정원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재조선 일본인과 망국조선의 왕족들을
교육훈치시키는 역할을 했던 이 명문고의 한쪽 켠에는
아직 스러지지 않은 한옥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종친부라 헌액되어 있는 것이다.
옛날 이씨조선의 왕손들을 관리하던, 지금으로 치면
민정비서관실이었던 셈인데 일본은 조선총독부내에
이왕직이라는 특별조직을 두어 같은 일을 하게 했다.
지금도 SGI불교라 알려진 남묘호랑게교(니켄교)는 일제의
조선침략의 첨병역할을 했다. 원래 이름이 일련정종인
니켄교는 창가학회라는 조직을 통해 일본 공명당을
창당해 자민당과 일본의 보수세력을 거중조정하는
집단으로도 유명한데 서양의 경우 가톨릭의 일파인
예수회가 굉장히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것이다.
정통이 아닌 일종의 변종으로서의 이들 종교집단은 정치인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정치인들은 해외진출시 이들의 자금과
인력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왕직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귀족출신들이나
일반중에 뛰어나서 문제를 일으킬 만한 인물들은 미리
색출하여 일본유학등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일단 니켄교
(남묘호랑게교)에 입교시킨후 친일분자로 색칠하는 정보
기관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조계종의 교종제도를 인정하는듯 민중의 불만을 무마
시키면서 조계종단은 일본 불교의 정통이 아닌 이단성이 있는
일련정종의 산하에 두어 문화정신적으로 지배한 것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성공한 조선인은 남묘호랑게교
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그래야 그들의 성공과 출세가
보장되었던 것이다.
해방이후에도 이승만의 감리교회가 이러한 역할을 했다.
장로교와 경쟁관계에 있던 감리회는 정치적으로 이승만과
결탁하여 교세경쟁의 열세를 만회했던 것이다.
장로교와 조계종 간판을 달지 않으면 장사가 안되는 한국의
종교집단이야말로 친일독재의 잔재로서 최후에 개혁되어
야할 대상인 것이다.
나의 조부이신 동경의 신흥 토목청부업자 이토오센키치
(창씨명)도 남묘호랑게교를 통해 입신양명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오늘날 모든 건설영웅들의
모델일 것이다. 여기저기 현장을 벌여놓고 다니는
건설회사 사장들에겐 숨겨놓은 여성들이 항상
있는 법이다. 아니 건설업자체가 함바(식당)과
술집을 매개로 성업하는 업종인 것이다.
J회장의 경우도 비슷한 복제인생을 살았다.
그는 유별난 존재가 아닌 그냥 우리나라가 일제시대때부터
답습한 먹고살기 방식으로서의 노가다의 한 전형을
따랐을 뿐인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와 기생신사유람단>
만주사변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조선여인들에 대한 정신대
징용은 일반화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의 지식여성들의 반발이 만만잖았을 터인데
막무가내로 반대만 할 수 없었던 조선의 여성지도자들은
형평성의 문제를 들고 나와 정신대차출을 비판했다.
예를 들어 평양,개성,경성,동래등에 산재한 조선기생들의
존재가 문제가 된 것이다. 기생들도 무언가 대동아공영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는 당시 여성계의 불만과 맞아
떨어져 기괴한 결과를 초래했다.
계륵이라고 했던가 먹기엔 목에 걸리고 버리기엔 아까운
기생들을 전투가 빈발한 만주나 동남아의 일본군 부대에 보내기
는 좀 아쉬웠던 총독부는 당시 조선기생들을 소거하여
동경의 화류계에 팔아넘겨 버리는 기발한 꾀를 낸 것이다.
최초의 기생신사유람단(?) 20명이 현해탄을 넘어온다는
흥미로운 기사가 일본신문의 가십란에 게재되자
이 사실은 동경의 조선인들에게도 알려졌고 민족적 모멸감을
느낀 조선의 한량중에 한사람이 관부연락선을 타고 내리는
기생유람단중 가장 아름다운 기생 하나를 유괴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분이 나의 할아버지 일본명 이토오
센끼치(伊藤仙吉)이었다. 그리고 보쌈당한 기생이야말로
부일여관의 안주이이자 세번째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 미인 >
그녀도 나를 의식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벌써 삼심분동안이나
서면로타리부근에서 숨바꼭질 아닌가 그녀는 봄꽃같은 아름다움으로
저녁어스름의 아스팔트길을 밝혀주며 내앞에 나타났다 어디로
가는걸까 누구랑 약속이 되어있을까 나는 두근대는 가슴을 숨기며
그녀 뒤를 미행하고 있다 갑자기 발을 멈추고 뒤로 돌아 내게
다가오면 뭐라고 할까 혹시 xx초등학교 다니시지 않았나요
아 얼굴을 잘못 보았군요 옛날 산복도로까지 버스를 타고
따라갔던 어떤 그녀는 어머 맞아요 어떻게 되시죠
순간 나는 휴가나온 군인으로서 참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이군
스스로 김이 빠져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황급히 내리곤
한참을 걸어서 집으로 갔던가 가까이서 보니 실제 미인이 아니
었던가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어쨋든 지금의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걷기만 한다 이번엔 좀 뜻밖이다
그녀는 또한번 로타리 건널목을 건넜다 벌써 초저녁 네온싸인이
빌딩들을 밝혀준다 그래도 그녀의 얼굴은 빛을 잃지 않았다 어떤
중년의 남성과 대화를 나눈다 나에 대해 뭐라하는 것은 아닐까
잠시 초조했지만 그녀는 그 남자와 금방 헤어져 다시 건널목을
헤쳐나간후 좁은 골목으로 접어든다 처음 봤을 때 기분좋게 흔들어
대던 핸드백도 많이 차분해 졌다 옷차림으로 보아 대학신입생이 틀림
없을텐데 번화가를 벗어나 자꾸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는 걸 봐선
집에 가는가보다 이제 나도 슬슬 포기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순간
당황해서 발걸음을 멈출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왠지 사방을 둘레둘레
살피더니 내쪽을 향해 한번 웃어주곤 맞은 편 건물로 살포시 뛰어들었
다 그 건물간판에는 이렇게 네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장미여관
(이후로 나는 한 십년간 여자만 보면 멍해졌다 스스로 배신당하는
일은 참 자주있는 일이 아닐텐데도 늘 서면로타리를 지날때먼
그때 그 예쁘고 귀여운 미인이 생각난다 얼굴이 아닌 사건으로)
< 장미의 숲에서 >
역시 가장 오래남는 것은 첫번째 사랑이다.
첫번째 미팅에서 만난 파트너는 E女大 약학과 신입생이었다.
" CPA가 뭐예요? " 나도 모르는 것을 어찌 그녀는 잘도
알고 있을까?
약사후보자인 그녀에게 남자는 악세사리일지도
모른다. 그 말에 우리는 만나자마자 반쯤 헤어진 것처럼
어색해져 버렸다. 그녀는 스스로가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곤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기름진 얼굴에 숨겨진
여드름을 발견했다. 그런데 나의 대답도 웃겼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아마 나의 전공이 공인회계사와
유관하다는 사전 정보를 갖고 나왔을 터이다. 그런데 나는
CPA와 공인회계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영학과 신입생이
었던 것이다.
명동에서 영화라도 한편 보면서 어색함과
당혹감을 식혀가는 노련함이 내겐 없었다. 그렇게 우린
아쉽게 헤어졌지만 아직까지 생각나는 그녀의 조그마한
얼굴에 난 여드름자욱은 나를 쓴웃음짓게 한다. 어쨋든
처음 만난 그녀가 내 일생 최대의 퀸카였음이 틀림없으
련만..
두번째 여인은 부산출신 S여대 신입생이었다.
나는 마치 동병상련할 대상을 만난듯 고향 떠난 고생길
타향에서 고향친구를 만난듯 너무 적극적으로 미주알
고주알 씨부렁 거렸나보다.
마침내 긴장한 그녀는 울음보를 터트렸다.
그녀의 기숙사가 있는 청파동을 벗어나면서까지
나는 왜 그녀가 "엄마!"를 찾으며 울었는지 감을 못잡고
있었다.
후일 나는 방학기간에 고향 부산에서 대티고개를 넘어가다
버스안에서 우연히 그녀를 보았지만 우리는 그냥
상대방을 소 닭보듯이 하고 쳐다 봤을뿐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세번째는 악몽이었다. 크라운관이 있는 휘문동
K大 여학생들은 학생회관 입구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남학생을 유혹할 정도로 개방적이고 스타일이 자극적이다.
기말고사를 끝낸 나와 친구 둘은 낭만적인 캠퍼스가 있는
휘문동 K大 미술대 신입생들과 쫑미팅을 하기위해
장미의 숲까지 진출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중 가장 얼굴이 예쁜 <얼짱>과 파트너가
된 것이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 >
죽음이란 ...
나만 홀로 남고 모두를 떠나보내는 것이다.
- 티베트 死者의 書에서 -
" 그쪽 파트너가 어딜 간 줄 알아요? "
파트너가 나를 한번 훑어본 후 학원에 간다며 자리를 비운뒤
나는 친구들의 건투를 빌며 장미의 숲에 남아 있었는데
수수하게 생긴 친구의 파트너가 내게 와서는 던지는 말이
었다.
" 미술학원에 간다고 했는데... "
" 걔 오늘 떠블 데이트 갔어요 "
얼굴이 예뻐서 잘 나갔던 그녀는 나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놓고 다른 남학생을 찾아 고고장으로
갔던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우리 일행은 나머지들을 모두 돌려
보낸후 술이나 마시기로 하고 생맥주를 시켰다.
그 날은 할 수없이 물을 흐린 내가 총대를 매야 했다.
레스토랑 한쪽 구석에서 뿌연 연기를 피우고 있던
여성들을 합석까지 시켜 놓은 나는 저녁 어스름이
되자 모든 것이 시들해 졌다.
나는 여자와 친구들을 내버려두고 잠깐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길위에서 P를 본 것이다. 우리는 구면이었다.
당황도 되고 호기심도 나고해서 입구에 서서 모르는 척
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여자와 정담을 나누는듯 보도옆 펜스에 걸쳐 서서
고개를 숙이며 잠깐 서 있다가 그녀와도 헤어졌다.
몰래 P를 따라갔다. 그녀가 들어 간 곳은 스넥가게였다.
좀 망설이다가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집에 들어가 우연히
만난척 P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날은 그녀의 생일이라
했다.
우리는 눈빛으로 그날 서로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렸을
것이다. 둘은 노을이 지는 크라운관 언덕을 오르며 잊을 수
없는 산책과 소요의 시간을 가졌다. 대화는 필설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한 내용이었지만 아름답지 않으면 추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는 내 청춘의 베아트리체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지옥과 연옥을 오가며 방황할
것이다.
< 지옥이란 무엇인가 >
지옥이란....
자아와 시간,사람,재물 그리고 지식.종교와 이념까지
모든 형태의 소유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 어떤 사제와의 대화중에서 -
건설회사 사장으로서 여의도 S교회의 장로의 딸이기도 했던
P는 E여대 단과대학 학생회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체육관을 닮은 S교회 건축위원장이었다.
그녀의 생일날 그녀가 설명하는 인생의 가장 큰 질곡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딸 둘을 낳은 그녀의 아버지가
아들을 갖기 위한 주술적 행위로 그녀의 이름에 억지로
남자들에게 붙이는 성명을 붙였던 것이다.
즉 그녀의 이름은 <경복>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쁜 딸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 미안했든지 한자는
<구슬 경><향기 복>으로 억지로 여성화해 면피를 한 것
이었다. 당시 공부보다는 먹고사는 것이 급박했던 내겐
확실히 실감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건축업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무슨 교회든 자신에게
공사를 맡기는 곳만 찾아다니는 가짜 교인이었는데
P는 또 교회를 옮겨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나의 할아버지도 일제시절 교회건축을 많이 했다 한다.
1920년부터 만주사변이 일어나기까지 동경에서도 이념분쟁의
틈을 타 종교가 타락했으며 우리가 아는 함석헌,김교신의
무교회주의도 이즈음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당개 풍월읊듯이 노가다판에서 종교지식을 줏어들은
할아버지의 기독교에 대한 선입관은 생각보다 완고했다.
종교의 부패는 모든 타락에 빌미를 주는 것이다.
그녀는 어쨋든 남동생을 갖게 되었는데 그 일로 언니보다
집에서 존중받는 존재가 된 P는 E여대 학생회장이
될 정도로 아버지의 물질적 후원을 받게 되지만
잃어버린 그녀의 이름은 탄생일에도 P를 외롭게하는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다.
< 동경 世田谷區의 이토오 센키치 >
성공한 재벌들은 후계자이자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장남에겐
자신의 고백을 숨기는 법이다. H자동차의 MK회장도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부친을 <회장님>이라 부르는 대신
<모모氏>라 부르는 정도로 부와 권력은 동거를 싫어한다.
숙부로부터 전해들은 할아버지의 행장은 이러하다.
1898년 구한말 고령의 퇴락한 양반출신인 조부는
갑오경장으로 세상이 뒤집혀 상인과 평민이 득세하자
조상의 땅을 떠나 낙동강 오리알신세가 되어 창녕 밀양
등지로 흘러드는데 일본의 조선귀족 소거정책과 맞물려
휘둘린 것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일종의 엔클로저운동으로서
군량증산을 위해 지리산등지에 은거하던 죽림들을
낙동강 하류쪽으로 몰아 세웠을 것이다.
여기에 반발해 조선인들은 만주와 일본등지로
징용과 이민을 자처했는데 할아버지는 동경등지에서
혹독한 고생을 겪은 후 할머니와 결혼한다. 처남들과
함께 토목업에 투신한 할아버지는 당시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의 특수에 힘입어 동경지방의 토목계에
데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젊은이들이 모두 전쟁터에 끌려간 상태로
후방의 조선인들에게 대부분의 공사를 맡길 수밖에
없었고 급박한 전쟁상황에서 공기를 맞추기 위해선
말이 통하는 조선인출신 업자들에게 청부를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3年을 벌어 3代가 버티다 >
할머니의 전언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말기에 할아버지는
밤마다 지폐가 가득든 가방을 집으로 실어 날랐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임금을 제대로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추정컨대 할아버지에게 떨어진 돈벼락은 이러한 연유였을
것 같다.
진주만폭격이후 미국은 집요하게 일본 동경을 공습했으며
B29의 위용에 질린 조선인들은 귀국을 서들렀으나 배삯이
문제였다. 동경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폭격기로부터
벗어나 죽어도 고향땅에 뭍히기를 꿈꾸었을 조선인들이
고향 갈 여비를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굶는 것이었다.
징용 온 조선인들에게는 아마도 식권이 주어졌을 것이고
일꾼을 돌려보내길 꺼린 사용자들은 징용 조선인들이
모아온 식권에 대해 비싼 할인료를 받고 와리깡해 주었던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철수한 영국대사관저를
불하받을 정도로 조부는 신흥재벌로 손꼽혔을 것이다.
그러니까 1941년부터 한 3년동안 끌어모은 돈으로
해방이후 50년간의 격동기를 쌀은 떨어지지 않고
살아온, 어쩌면 기괴한 가족사를 우리는 영위해 온 것이다.
한국재벌의 역사에도 이러한 경향은 뚜렸하다.
대부분의 재벌들은 전쟁기간동안 생성했다가
전쟁을 통해 성장을 해온 것이다.
재벌에게 평화란 악몽이며 현상유지는 조직내의
암투와 구성원간의 긴장이 이완되는 파멸적 결과를
초래할 뿐인 것이다. 공룡에겐 항상 계속되는 위기만이
생존을 보장할 뿐이다. 그리고 과도한 긴장은 신경세포의
경직을 초래해 서서히 자신도 모르게 소멸하는 것이다.
< 종말의 시초 >
" 임원들중에 기독교인 명단을 파악해 보고하라"
J회장의 정치참여가 기정사실화 되어갈때쯤 회장으로
부터 이러한 명령이 떨어진 것은 휴일인 일요일이었다.
J회장은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 MB사장의 동참이
필수적이었지만 MB는 신당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친한 사이에 갈등이 생겨
헤어질 때 가장 핑계대기 좋은 것이 바로 종교를 내세우
는 것이다. 강남 대형교회의 장로급 집사였던 MB에게
기독교출신 임원들이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J회장은 전쟁을 벌이기전에 피아를 구분할 필요를
느꼈던 것일까?
그러나 우리에게 그러한 자료가 있을리가 만무했다.
기독교라는 것이 천주교도 있고 개신교도 있고
군소교단과 이단들까지 포함하면 선뜻 두부모 자르듯이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흔히 사람들중
에는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자료를 요청하는 J회장을 보면서
< 아 이제 진짜 회사가 쪼개지는구나 >하고 직감할
수 있었다. 회사를 떠날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