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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포럼 78회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독후감
이름 : 곽은서
제출일 : 22년 11월 10일 (목)
제임스 패커는 1973년 서문에서 발코니에 앉아 있는 구경꾼과 여행자의 모습을 묘사하며 이론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을 비교하여 설명했습니다. 저자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먼저 습득하고, 그 이후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책을 소개할 때 “이 책은 여행자들을 위한 책이며,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들은 여행자들이 던지는 질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이 책의 이면에 있는 확신은,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많은 연약한 점들의 뿌리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하나님의 도(ways) 및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에 대한 무지-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함께해야함을 학습하고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얻고 소유하길 날마다 힘썼던 사도 바울의 영성을 묵상하며 더욱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길 소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드시 필요함을 묵상했습니다. 영적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성장하게 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고 섬기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호 4:1, 6, 6:3, 6, 렘 9:23~24, 요 17:3).
그는 마지막 장 22장 하나님의 충족성을 설명하면서 마지막 소주제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배움’이라는 내용에서 이 책의 구성을 요약합니다. 이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 로마서의 하나님, 예수님 안에 계시되신 하나님, 역사적인 기독교가 가르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 하나님을 아는 것은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인격적 관계를 포함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예수님 때문에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하나님을 아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동의, 찬성, 헌신-을 포함하며 믿음은 기도와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5.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넉넉히 이길 것이며,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충족성 안에서 기뻐하면서 로마서 8장처럼 살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저자는 이 삶을 시편 16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와 고백으로 연결합니다. 그리고 승리와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인생이라는 견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을 수 있고, 또 바로잡아야만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배우는 것’이 참된 우선순위입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 27:8)
서론과 마지막 소주제를 통해 남은 생애동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살아야함을 묵상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고 섬겼던 다윗처럼, 항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살길 소원했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하는 영성인이 되길 소원했습니다.
제1부 여호와를 알라
1. 하나님에 대한 연구
제임스 패커는 스펄전의 설교를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이 연구해야할 합당한 주제는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가장 고도의 과학, 가장 고상한 사색, 가장 강력한 철학은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이름과 본성과 인격과 역사와 행사와 존재입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가장 실제적인 연구과제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위해 다섯 개의 기본적인 진리를 설명합니다.
저자는 적용된 지식과 진리에 대한 묵상을 통해 실제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함께 가는 길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이론적인 것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야함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꾸는 방법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배운 각각의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동기와 목적이 매우 중요함을 말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지식 자체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고전 8:1~2), 신학적 지식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지식을 얻는 일에 몰두하는 것, 단지 정답을 모두 알려는 열망만으로 성경 공부에 착수하는 것은 곧장 자기만족적인 자기기만 상태에 이르게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는 시편 119편의 시인의 고백을 토대로 하여 “신성을 연구하는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교리들만이 아니라 그 속성을 지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연구하는 주제이며, 연구를 하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그 분이 연구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구해야 한다. 계시는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사용해야만 한다.”라고 말합니다.
2.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저자는 사도 바울의 간증(빌 3:7~10)과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직접 하나님을 아는 것과 들어서 아는 것의 차이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들어서 아는 것의 치명적인 함정을 들려줍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경건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나의 하나님을 알아야한다고 말하며 더욱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르게 얻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1장 하나님에 대한 연구와 2장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알고 얻고 소유함으로써 영적 지각이 지속적으로 계발되어야함을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늘 배우고 적용하는 것처럼 “학습과 훈련과 연단과 실제”의 원리를 더욱더 힘써 적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성령의 빛 비춤 가운데 학습에 더욱 힘쓰고, 훈련에 게으르지 아니하는 복된 영성인이 되길 소원합니다. 엘리사가 하나님 앞에 먼저 세워지고, 나의 하나님을 소유하고, 그 이후에 선지생도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고 섬겼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 11절~16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더욱 구속사에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착각하는 자기기만을 날마다 경계해야함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알고 얻고 소유하길 소원했습니다(요 14:26, 고전 2:13). 성령으로, 성령 안에서 말하고 영적 실제를 통해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고 권면하는 말씀의 사역자로 세워지고 참여되길 소망합니다.
3.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갈 4:9)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 아신 바 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처럼, 신하가 왕을 아는 것처럼, 양이 목자를 아는 것처럼(이는 성경에서 주요하게 사용하는 네 개의 유추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 네 가지 유추는 모두 아는 자가 그 대상을 바라보고 그 대상은 아는 자의 복지에 대한 책임을 지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성경적 개념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요한복음 17장 3절의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관련되는 일입니다. 곧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관련됩니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는 그런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하셔서 우리와 사귀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되었거늘”(갈 4:9)이라고 씀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는 이처럼 은혜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아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의 근저에 있는 더 큰 사실 곧 그분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나의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도권을 쥐고 나를 아시는 것에 좌우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과 아신 바 된다는 의미에 대해 학습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감사하지만 하나님께 아신 바 된다는 것이 더욱 감사한 일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감사하고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가 되도록 겸손을 유지하며 날마다 일마다 하나님을 의뢰하겠습니다.
4. 오직 참되신 하나님 (십계명 중 2계명)
성경의 계시보다 철학적 추론에 의거하고 있는 모든 사변적인 신학은 잘못되었다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또 그들을 통해 말씀하셨으며, 또한 아들의 말씀과 행위들로써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접하게 된 이 계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2계명의 적극적인 효과는 다른 어떤 출처도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취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통해 성령의 계시와 훈련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계시하실 때(조명계시) 더욱 감각된 자가 되기 위해 영성훈련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복된 예배자가 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살전 2:4)
5. 성육신하신 하나님 / 6. 그가 증언하실 것이요
제2부 네 하나님을 보라
7.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불변성)
(1) 하나님의 생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습니다.
(3)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의 방식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5) 하나님의 목적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6) 하나님의 아들은 변하지 않습니다(히 13:8, 히 7:25).
8. 하나님의 위엄
영어의 위엄(majesty)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위대함(greatness)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위엄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위엄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란 말 대신 사용되었습니다(히 1:3, 8:1).
저자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며 엄위하신 분이심을 균형 있게 이해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취해야 할 두 단계를 가르쳐 줍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서 하나님을 조그맣게 만들 만한 제한들을 제거해 버리라는 것입니다(시 139편). 시편 139편의 시인은 하나님의 임재와 지식과 능력과 무한하고 무제한적인 특성에 대해 묵상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위대하다고 여기는 권세들이나 힘들과 하나님을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사 40장).
9. 지혜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단순한 영리함이나 교묘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성이나 지식 이상의 것으로 지적인 속성일 뿐 아니라 도덕적 속성이기도 합니다. 지혜는 최선이며 최고인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들을 보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는 성향입니다. 지혜는 도덕적 선의 실제적 측면입니다. 그러한 지혜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게 발견됩니다. 하나님만이 원래부터 전적으로 변함없이 지혜로우십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능력과 진리와 선하심이 하나님의 진수, 즉 하나님의 성품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와 섭리와 은혜의 사역은 지혜를 나타내 보이며 우리가 그것들 안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혜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들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역사하는 목적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지혜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지혜를 나타내셨으며(구속사),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다루실 때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저자는 아브라함, 야곱, 요셉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인간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배열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첫째, 개인적인 성화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 속에서 그가 하도록 정해진 사역과 섬김을 완수하는 일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예상 밖으로 당황케 하며 실망케 하는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그 분의 지혜안에서 우리를 우리가 아직 이르지 못한 어떤 존재로 만들려고 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 따라 우리를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10. 하나님의 지혜와 우리의 지혜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그의 택하신 목적인 하나님 자신과 인간의 관계-바로 그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만드셨다-를 회복시키고 완전케 하시기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하나님의 모든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혜로우시다고 고백하고, 시종 여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은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 가득 차 있는 알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들에 대해 우리가 이전보다 더 겸손하고 더 즐겁고 더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더 예민하며 그것을 행하는 일에 더 단호하고 덜 불안하도록 만드는 효력이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지혜의 열매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화평과 겸손과 사랑(약 3:17)-이며, 그 뿌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난 것으로(고전 1:24, 30) 믿는 믿음(고전 3:18, 딤후 3:15)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고자 기다리는 지혜는 바로 우리를 하나님과 결속시킬 지혜, 믿음의 정신과 신실한 삶에서 표현될 지혜입니다.
9장과 10장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지혜의 깊음과 부요함을 묵상했습니다(롬 11:33).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지혜에 감사드립니다. 남은 생애동안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의뢰하는 영성인이 되도록 더욱 추구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11. 주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통치의 방편일 뿐 아니라 교제의 방편입니다(시 139:1~4). 저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합니다.
12. 하나님의 사랑 (요일 4:8, 16)
저자는 이 장의 목표는 성령께서 부으시는 신적 사랑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성경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엄격합니다. 그것은 사랑하시는 분의 거룩함을 나타내며 사랑받는 자에게서 거룩함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인과 관련해서는 완전한 진리입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개개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의 발휘로서 스스로를 그들의 복지와 동일시하사 그들의 구세주가 되도록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이제 그들이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즐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소주제를 6가지로 제시합니다.
13. 하나님의 은혜
은혜는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서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활동입니다. 저자는 은혜의 교리가 전제되는 영역에는 중요한 진리가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인간의 도덕적 악덕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응보적 정의이고, 셋째는 인간의 영적 무력함이고, 넷째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입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무자격자가 받은 은혜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의 행위와는 반대로, 실로 그들의 죄과를 무시하고 그들에게 값없이 보이시는 사랑입니다. 은혜와 구원은 원인과 결과로서 한데 결합되어 있습니다. 신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세 가지 특정한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그 각각의 맥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속적인 경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첫째는 죄 사함의 근원으로서의 은혜이고, 둘째는 구원계획의 동기로서의 은혜이고, 셋째는 성도의 견인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서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은혜에 의해 시작되고 은혜에 의해 지속되는 은혜의 선물입니다(빌 1:29).
14. 심판자 하나님
15. 하나님의 진노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일 가운데 하나는 신약에서나 구약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과 그 두려움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6.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고 바울은 로마서 11:22에서 말합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단어는 ‘…와’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인자만을 강조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엄위만을 강조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둘 다 은혜의 섭리 안에서 나란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참으로 알아지려면 두 속성이 함께 인정되어야만 합니다.
17. 질투하시는 하나님
저자는 하나님의 질투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질투에 대한 성경의 진술들은 신인동형론적인 것입니다. 즉 그것들은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삶에서 이끌어 낸 언어로 묘사한 것입니다. 둘째,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질투가 있으며 그 중 하나만이 악덕입니다. 먼저는 사악한 질투이고, 다른 종류의 질투는 사랑의 관계를 보호하려는 혹은 그것이 깨어졌을 때 복수하려는 열심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질투를 후자와 같은 종류로 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단언하는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삼중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죄에 대한 심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의가 옳음을 입증하는 것,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속하시고 구속하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랑과 찬양을 받으시는 것 등. 하나님은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 곧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시며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질투는 정확하게 말하면 정의와 자비라는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입니다(사 9:7, 37:32, 겔 5:13).
저자는 하나님의 질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적절한 반응이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듯이, 하나님의 질투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입니다. 제2계명의 우상 숭배에 대한 금지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적극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인격, 목적, 영예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헌신을 나타내는 성경의 용어는 ‘열심’으로 불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질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께 대해 ‘열심’이 없는 교회들을 위협합니다.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에서 볼 수 있습니다(계 3:15~16, 19).
저자는 12장에서 17장까지의 내용을 통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성을 균형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만족을 위하여, 자기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왜곡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선택하지 않아야 함을 학습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균형있게 학습하고 그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3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18. 복음의 핵심
저자는 이 장에서 화목의 개념을 사용하여 복음의 핵심을 설명합니다. 신약에서는 화목에 관련된 네 개의 본문이 나타납니다(롬 3:21~26, 히 2:17, 요일 2:1~2, 요일 4:8~10). 신약의 신앙에서 화목은 중심을 차지합니다. 저자는 속죄와 화목의 개념을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그 차이점은 속죄는 화목이 의미하는 바의 반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속죄란 죄를 대상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속죄는 죄를 덮어 가리는 것, 치워 버리거나 제거해 버리는 것, 그래서 죄가 더 이상 인간과 하나님의 우호적인 교제에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화목은 속죄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또한 그로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저자는 로마서를 통해 바울의 논증의 맥락에서 설명하며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희생적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셨다고 말합니다(롬 5:10).
바울이 묘사하는바 화목에 대한 세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화목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2. 화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3. 화목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보입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복음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는 인간의 죄이며,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마련해주신 것이 진노에서 평화를 가져오는 화목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가장 심오한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화목의 진리라는 정상에 설 때, 전체 성경을 올바른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며 다른 면에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관련된 주제를 다섯 가지로 언급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추진력,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운명,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라는 선물, 하나님의 사랑의 여러 차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 등입니다.
19. 하나님의 자녀
저자는 이 장에서 양자됨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온 주님의 증거에 따르면 주님에게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는 것은 다음 네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아버지 되심은 권위를 의미합니다. 둘째, 아버지 되심은 애정을 의미합니다. 셋째, 아버지 되심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넷째, 아버지 되심은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양자됨은 복음이 제시하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양자됨은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양자됨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첫째, 산상수훈에서는 양자됨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기초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 원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는 원리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원리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원리입니다. 둘째, 산상수훈에서 양자됨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기초로 나타납니다. 셋째, 산상수훈에서 양자됨은 믿음의 삶, 즉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는 삶의 기초로 나타납니다.
양자됨이라는 진리가 신약이 제기하는 다섯 가지 또 다른 문제에 대해 가장 심오하게 통찰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면서 주로 서신서들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것입니다. 그 다섯 개의 문제란,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영광, 셋째로 성령의 사역, 넷째로 청교도들이 복음의 거룩함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와 동기, 다섯째로 그리스도인의 확신의 문제입니다.
20.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하나님의 인도가 실재한다는 믿음의 두 가지 기초적인 사실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재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실 모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21. 내적 시련
저자는 은혜의 목적을 일차적으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계속적으로 깊어지는 지식 그리고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친밀해지는 교제야말로 바로 모든 은혜의 역사가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하나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우리가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꼭 붙잡는 법을 확실히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죄와 실수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실패와 실수라는 교육적 징계 수단을 매우 자주 사용하십니다.
“이 내적 시련들을 사용해서
나는 너를 자아와 교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 한다.
그리고 지상의 기쁨을 위한 너의 계획들을 무산시켜
네가 내 안에서 모든 것을 구하게 하려는 것이다.”
22. 하나님의 충족성 (하나님의 충분성)
로마서 8장은 서로 다른 길이의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처음 30절은 일련의 곤경 전체-죄책과 죄의 권세(19절), 사망이라는 사실(6-13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하는 두려움(15절), 고난에 직면하여 느끼는 연약함과 절망(17-25절), 기도할 때의 무력함(26-27절), 삶이 무의미하고 절망적이라는 느낌(28-30절)을 다루는 데 있어 하나님 은혜의 충족성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네 가지 선물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관찰합니다. 첫 번째는 의 곧 정죄함이 없는 것(1절)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입니다(4-27). 세 번째는 아들 됨, 곧 주 예수님이 장자 되시는 신적 가족으로 입양됨(14-17 29절)입니다. 네 번째는 지금 그리고 영원토록 이어지는 안전함입니다(28-30절). 이 여러 가지 선물- 지위에 덧붙어진 역동성과 여기에 덧붙여진 신원 그리고 안전한 행동-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든 그를 충분히 후원하고도 남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31절). 바울은 계속해서 그의 반응이자 또한 우리의 반응이 되어야 하는 것을 똑똑히 설명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제는 약간 바뀌어 은혜의 하나님의 충족성이 부각됩니다. 흥미롭게도 선물로부터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인 하나님으로, 악에서의 해방으로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것-“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창 15:1)-이 되신다는 생각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1-30절이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 73:24)라고 말하고 있다면, 31-39절은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
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5-26)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바울의 모범 답안은 네 가지 개념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개념은 또 다른 질문 안에 집중적으로 나와 있습니다(결국 질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어찌 그 아들(그리스도)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1-35절). 처음 세 개의 개념에서 되풀이되는 핵심단어는 ‘위하다’(헬라어로는 휘페르(hyper); …을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네 번째 개념은 처음 세 개념 전체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것은 어느 것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38-39절의 승리에 찬 선언에서 바울이 단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충족성-옛 단어를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충분성’(all-sufficiency)을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보여 줍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으로서 충족하신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굳게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으며(벧전 1:5),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안전하도록 지키실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계속해서 믿도록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믿음을 유지시키시는 한, 그 믿음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붙잡기로 결심하는 한, 당신은 거기서 떨어져 나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으로서 충족하신 분이십니다.
찬송가에서 말하듯이, “그리스도는 길이요 그리스도는 상급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갖는 관계의 목적은 그 관계 자체를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관계일진대, 다른 어떤 것이 목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한걸음 더 나아간 의미에서도 충족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앎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로 하거나 바라지 않은 채 완전히 만족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22장 하나님의 충족성을 통해 사도 바울의 갈망(빌 3:7~14)을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것을 신뢰하고 소망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 안에서 더욱 추구하길 뜻을 정했습니다. 날마다 더욱 정진하고자 소원을 드렸습니다. 독후감 서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추구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예배자의 삶에 더욱 충실하도록 힘쓰겠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