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 둘째 날(1)
새 날이 밝았다. 날씨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숙소의 창문을 열고 보니 ‘는개’가 내린다. ‘는개’란 ‘안개보다 짙고 이슬비보다 약한 비’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아침 QT는 어제 저녁집회와는 달리 원형으로 하였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예배 대형을 갖추면 맨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강사를 쳐다볼 때, 고개를 바짝 세워야 하기에 이만 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특히 정 목사님은 교역자들 가운데 키가 제일 크지 않던가! 수련회에 은혜 받으러 왔다가 목 디스크에 걸려 돌아간다면, 그것처럼 난감한 일은 없을 터...
둥글게 자리를 잡은 대원들 가운데 허리가 불편한 어느 대원은 방석을 5개 정도 쌓아놓고 그 위에 앉았다. 그게 바닥에 앉은 것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좋은 것은 빨리 따라하는 게 지혜로운 일이라 나도 그렇게 해 보았더니, 등받이 없는 푹신한 의자에 앉은 것 같았다. 이런 참신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각했을꼬?
정 목사님은 잠언 4장 24절(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마음을 지키라”는 제목으로 신선하고 감동적인 아침 QT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아침 QT가 짧게 진행된 탓도 있지만, 나도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에 몰입하느라 미처 설교를 요약할 생각을 못했다. 여러분의 양해를 바란다.
QT가 끝나자, 느닷없이 아침체조 이야기가 나왔다. 그건 아마도 잠자리가 바뀐 탓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온통 몸이 뻐근한 대원들 때문이리라. 이때 ‘체조의 달인’으로 이름이 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김선희 권사님이 즉석에서 아침체조 강사로 강제 추대(?) 되었다.
권사님의 명령에 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체조를 시작하였는데 허리를 돌릴 때부터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여기저기서 “우드득, 우드득”하는 소리가 나고 입에서는 “어구구구, 어구구구!”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아침 체조도 참 오랜 만이다. 예전에 청년부를 지도할 때 아침마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체조인지, 율동인지 아니면 스포츠 댄스인지 이름붙이기가 좀 ‘거시기’한 체조를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따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예루살렘 찬양대의 체조는 청년부 체조와 차원이 달랐다. 김 권사님은 설교에 은혜를 받아서인지 체조 배경음악을 찬송가 620장(여기에 모인 우리)으로 선택하셨다. 피아노 반주가 나오자 체조와 찬송가 620장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지만, 체조노래나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 4/4박자니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굳이 박자에 맞춰 체조하라는 법도 없으니 배경음악은 음악대로, 체조는 체조대로 각자 제 갈 길을 가도 큰 문제는 없었다.
운동(?)을 했으니 이제 또 먹으러 갈 차례다. 갈치조림과 미역국, 그리고 달걀과 토마토 이중주로 구성된 정갈한 아침 식사는 대원들의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사실 난 소시적(?)부터 빵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아침부터 밥 먹는 게 상당히 불편하다. 그러나 이번 수련회는 달랐다. 아침부터 탱글탱글한 밥이 입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난 역시 뼈 속까지 한국인임이 분명한 모양이다. 식사 후, 후식으로 사과를 먹고 나서 김덕규 장로님을 십장으로 설거지 당번 조가 동원이 되어 우리 그릇뿐만 아니라, 타 교회 교인들이 사용한 식사 그릇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면서 보니까, 아침잠을 깬 암탉 두 마리가 배가 고프다는 듯 “꼬오옥 꼭꼭꼭 꼬오옥 꼭꼭꼭...” 이러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얼핏 보기에도 이 녀석들 참 튼실하게 생겼다. 얘들이 이렇게 살이 찐 이유는 비만 오면 단백질 덩어리인 지렁이가 사방에서 올라오고 게다가 수련회에 온 사람들이 먹다 버린 잔반들이 널려 있으니...
그런데 이 녀석들은 무슨 배짱인지, 수양관에 있는 개는커녕 사람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설거지 하는 걸 뻔히 보면서도 막무가내로 들이댄다. 이 녀석들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자리를 비켜주어야 할 판이다. 빨리 설거지를 마쳐야 다음 순서를 진행할 수 있기에 닭들더러 저리 가라고 종주먹을 흔들어도 이 녀석들은 고개만 갸우뚱하며 한쪽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 도무지 도망갈 생각을 안 한다.
이 녀석들이 수양관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듣기로는 이렇다.
홍 집사님이 수양관 관리자로 임명되어 철원에 오셨을 때, 몇몇 대원들이 올 여름의 무더위를 대비해 미리부터 자기 이름으로 병아리를 사서 집사님에게 맡겼단다. 이러구러 시간이 흘러, 병아리가 씨암탉으로 튼실하게 자란 어느 날, 몸보신을 위해 모인 대원들이 수양관을 제 집처럼 돌아다니는 닭을 잡으려고 사방팔방 뛰어다녀 겨우 닭을 포획했더니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발그레 웃는 닭을 차마 사형시키지 못해 몸보신은커녕 결국 동네 주민에게 팔아버렸단다. 그렇게 팔아버린 닭이 아마 10여 마리나 된다지?
사실 내가 어렸을 때, 어려운 가정살림의 보탬을 위해 병아리 50여 마리를 키운 적이 있었다. 병아리들이 어느 정도 자라 닭이 될 무렵, 몸보신 겸 겸사겸사해서 교회 전도사님에게 대접해 드리려고 한 마리를 잡았는데 모두들 닭을 죽이지 못했다. 칼을 쓰면 쉽겠지만, 그게 너무 잔인해 보여, 다른 방법으로 닭의 숨을 끊으려고 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미물이라 할지라도 생명력에 있어서만큼은 참으로 대단했다.
바로 그때 어느 집사님이 자기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자기도 집에서 키운 닭을 잡아먹으려고 했는데 차마 칼은 들 수 없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닭의 목을 비틀어 숨을 끊은 다음에 뜨거운 물에 살짝 넣으면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걸 기억하고 그 말대로 산 닭의 목을 비틀고 뜨거운 물에 잠시 넣었다가 꺼내니 정말 닭이 죽은 것처럼 보였단다. 그래서 털을 뽑고 배를 가르려는 순간! 누드가 된 닭이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푸드득 목을 풀면서 일어나더니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도망갔다나? 믿거나 말거나...
하여간 지금도 수양관에는 아직 팔리지 않은 튼실한 암탉 두 마리가 있다. 몸보신이 필요하신 분은 언제고 시간 날 때 들러주시기를...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건 자기 손으로 닭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식사 후에, 아침 집회가 시작되었다. 장성범 총무의 기타, 문복주 자매의 드럼, 그리고 이정신 사모의 피아노에 맞춰 찬양을 시작하였다.
아침 집회에서 정 목사님은 잠언 9:17(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말씀을 중심으로 ‘죄’에 대한 설교를 하셨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1. 우리는 죄에 대해 전인격적 즉,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지적으로만 회개해서는 안 된다.
2.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지적으로 죄인 줄을 알고 회개를 해도 이게 상습적으로 반복이 된다. 왜냐하면, 내가 지적으로 죄인 줄은 알아도 감정적으로 죄가 갖고 있는 묘한 매력, 쾌감이 있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죄를 지을 때, 감정적으로 쾌감이 있으니 그 쾌감을 버리지 못해 결국 의지적으로도 죄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 것이다.
4. 이렇게 되면 상습적(?)으로 짓는 죄의 고리를 끊을 수가 없다.
5. 우리가 ‘거룩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감정적으로 느끼는 죄의 쾌락을 버리도록 기도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아파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그 아픔을 경험하지 못하면 죄를 이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