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민주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수상 겸 국방상으로 티토가 임명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티토의 레지스탕스 운동은 합법적 정권으로 변모하여 그 통치조직과 운영 양면은 소련의 정치체제를 크게 모방했다.
2. 독자 노선의 추구와 내정개혁
사실 상 자력으로 조국을 해방했던 유고슬라비아는 그런 의식을 크게 표출함으로 동유럽의 해방자임을 자칭하던 소련과의 균열이 생긴다. 소련은 제2, 3차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제명하고 티토를 배신자로 몰았다. 티토는 이런 소련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이러한 소련 블록의 고립 정책은 유고슬라비아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티토는 소련 측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적 통합을 유지하고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비에트 형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반하는 체제로서 유고슬라비아 특유의 자주관리 사회주의건설에 나섰다. 1950년 6월 티토는 계획 경제 체체에 반발하여, "노동자 자주관리 제도" 를 도입했다. 이 제도의 도입목적은 권력의 과도 집중과 관료주의적 통제의 폐해를 타파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에 의해 국유지는 사회소유가 되고 차례로 경제관리의 분권화 및 정치기구의 분권화가 행해졌다. 1952년 1월에는 당명을 공산당에서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개칭했고, 중앙집권적 사회주의에서 분권화된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1955년 1월에는 신헌법을 채택하여 헌법에서 국가기구부분을 삭제하고 모든 면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공산 제도를 기초로 할 것을 제창하였다. 또한 대통령제를 도입, 최초로 티토가 선출 되었다. 1958년에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강령" 을 발표, 사회주의 국가의 사멸의 전망과 당의 적극적 역할 부정 등 소련과의 이데올로기 상의 큰 차이를 보였고, 이에 소련, 동유럽국가들에게 수정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3. 소련과의 화해
스탈린 사망 이 후 차차 회복을 보였고 1955년 5월 소렴의 당정부의 수뇌인 흐루시초프가 베오그라드를 방문, 과거의 정책에 유감을 표명 사회주의 발전의 구체적 형태는 각각 나름대로 결정할 것을 확인했다.
4. 신 경제 시스템
1950년대 들어와 유고슬라비아는 경제제도를 근본적으로 재편성하는 작업에 착수, 1953년 헌법적 법률로서 일단 결착을 보이지만 이 시기를 통해 유고 민족들은 경제발전 경로를 소련 형 모델에서 유고 형의 "독자의 길" 로 크게 전환한다. 이리하여 등장한 시스템은 당시 "신 경제 시스템" 이라 불렸으나, 그 기본적 내용은
1)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통제
2) 정치적 의사결정의 분권화
3) 노동자 자주관리제도
이 세가지로 요약된다. 1950년대초에 주로 이론적 검토에 기초하여 설계된 경제 시스템은 그 후 수년 간에 걸쳐 시행되는 중 제도 상의 여러 가지 모순이 표면화 되었다.
5. 외교
제3세계 국가들과 연합하는 비동맹 외교노선을 취하게 된다. (참고로, 제1세계는 미국 중심의 경제 체제, 제2 세계는 소련 중심의 경제 체제를 말한다) 소련 블록과의 결별이래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주의" 로 알려진 독자적 사회주의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1952년 11월에는 미국과 군사원조 협정을, 1953년 2월에는 그리스, 터키와 우호조약을 맺는 등 서구적인 경향을 나타냈으나, 1954년 소련과의 국교회복 이 후 친 서구적 원칙에서 중립주의로 외교노선을 바꾸었다. 1958년부터 티토는 아시아, 남미국가를 방문, 지지세력을 얻었다.
1950년대에 유고슬라비아는 새로운 정치, 경제분권화의 도입으로 눈에 띄게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 예로,
1) 정치, 사상적 이유로 체포되는 예도 줄었고 비밀경찰의 권력도 축소되었다.
2) 서구의 각종 출판물이 들어왔고 여행도 가능했다.
3) 각 공장이나 기업도 자유로운 관리체제 하에 소비품목을 생산했다.
1950년대의 이러한 분권, 자유화 현상은 유고슬라비아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야기되는 문제점은 극단의 분권, 극단의 통제사이의 균형에 존재하던 것이었다. 또한 자유화라고 해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체제에 내재되어있는 근본적 한계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