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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삼십년 가꿔온 진주 산방 명상원입니다. 봄이 오니 산방 생각이 더 많이 납니다. 그 애틋한 히스토리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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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에 큰 꿈을 품고 명상원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든지 벌써 30년이 흘렀다.
그당시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절이름이라고 종이에 內泉庵을 적어주셨다. 꿈이 너무 생생했는데 다음날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이곳에 와보니 마당 가운데 조그만 연못이 있었고 마을 이름이 안골이었다. 꿈에 노인이 건네준 내천암 즉 '안쪽에 연못이 있는 암자' 와 의미가 일치했다. 그래서 필연이라 생각하고 이 터를 장만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 헌집을 고쳐 사람이 쉴 공간을 만들고 연못을 넓혔으며 경사진 곳을 이용하여 작은 길을 내고 여러 나무를 심었다. 은행나무, 회화나무, 삼나무, 자작나무, 느릅나무, 깡깡나무, 단풍나무, 배롱나무, 자두나무 등을 심었다. 정원의 큰나무들은 모두 그때 심은 나무들이다. 그 후, 융자를 받아서 약 20평 규모의 법당을 지었다.
이렇게 산방 히스토리는 시작되었다. 나는 생업이 있어 자주 오지못했고 스님들이 이곳에 머무셨다. 또 방학때는 대불련 학생들이 수련을 하며 지냈다.
그후 십년이 지난 2000년 겨울에 집을 개조하여 옆에 황토방을 만들었고 2001년부터 스님이 5년 살고 나가자 다시 집을 확장하여 황토방을 본채와 연결하고 그 사이에 큰 거실과 주방을 넣는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
그리고 가을에 우리 가족이 이사왔다. 이정이나 이경이는 태어날 때부터 아파트에 살았으니 생리상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다들 불평없이 빠르게 이곳에 적응했다. 삽살개 동방이와 수달이도 함께 왔다. 그러면서 기존 법당을 해체하여 수련원으로 개조하고 기도축원, 제사지내는 절이 아닌 진짜 절을 만들기 위한 힘찬 날갯짓을 펼쳤다.
내가 진짜 절로 생각한 것은 기도하고 소원을 비는 절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위빳사나 명상원이었다. 불교가 수행종교라면 당연히 명상을 하는 절이 진짜 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당 안의 불상을 전에 살던 스님 절로 보내드리고 탱화를 장막으로 가리고 벽화와 단청을 흰색으로 도색하여 수련당 분위기로 바꾸었다. 그리고 수련당 뒤로 수행자를 위한 꾸띠를 여러 채 짓고 식당과 세면장, 외부 화장실 등을 만들어 최소한의 수련자 주거 요건을 갖추었다.
인부 한사람과 대부분 직접 만들었다. 산위 꾸띠를 지을 때는 경사진 언덕을 들짐을 지고 하루 100번 이상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다 몸이 아파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지만 설사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죽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닦고 수행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런 꾸띠를 7 채나 지었다. 방안은 황토로 바르고 담백하게 선반과 책장 하나만 놓았다. 꾸띠 어느 곳에서나 보는 바깥풍광은 아름답다. 대숲은 대숲대로, 굴참방은 굴참방대로, 운주원은 운주원대로 숲속 분위기를 만끽 할 수 있다. 더욱이 시내에 위치하면서 새소리만 들리고 인적없는 그야말로 수행처로는 최상의 처소이다.
이렇게 명상원을 개원한 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수행을 했지만 기대만큼 사람들이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애초 생각대로 라면 사람들이 일박이일, 이박삼일 머물면서 수행을 해야 하는데 몇시간 왔다가는 짜투리 공간이 되다보니 그동안 계획하던 일들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꾸띠에서 한 시간을 채 견디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모든 꾸띠는 거미줄과 찌든 곰팡이로 쇠락해 갔다.
처음 수련하러 오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묻는 질문이 "몇 시간 수련합니까? 바빠서요" 이다. 물론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병상에서 꼼짝 못하는 환자가 아닌 다음,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늘 바쁜 게 우리들 일상이다. 그러나 이곳에 오면 그래도 시간거래는 뒷짐 질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시간을 잊고 여유롭게 앉아야 한다. 그래야 잠시동안이라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시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부처님 생애 강좌였다. 다시는 강좌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무언가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달갑지 않은 재주?를 다시 불러들여야 했다. 강좌를 하지않으려는 의도는 한마디로 사람들은 번쇄한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불교는 심오하여 감각적 즐거움에 빠져사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들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때문이다. 더욱이 능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설법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처님 생애 강좌를 시작한 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확인했다. 사람들은 오지 않고 오던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설법이 좋다고 감격하던 사람도 어느 날 부터 보이지 않았다. 아, 이제 무얼하지? 자조했다.
절에 살다 세속에 내려와 그동안 내가 했던 일은 실패를 몰랐다. 무엇을 해도 성공했다. 사업은 사업대로 번창했고 내 주변에 나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정말 해보고 싶은 이 일은 내 돈을 쓰고 장소를 제공하며 무상으로 하는 일인데도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2,001년 시작한 문서포교지 월간산방도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좋은 예이다. 월간 산방은 한 달에 한번씩 발행하는 약 70쪽 정도의 소책자이다. 내용은 부처님 말씀, 이웃종교, 생태, 철학, 인문학, 예술, 시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그곳에 삽화를 넣고 겉지를 재생지로 담백하게 꾸민 비영리 월간지이다. 1년 12번 발송하고 일년 구독료는 1만원이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에게만 보냈다. 그냥 받아보는 분도 있고 만원을 보내오는 분도 있었다. 인쇄비, 봉투 발송비 등을 따지면 턱없는 금액이지만 문서포교를 한다는 일념으로 용돈을 아껴가며 일로매진했다. 구독자가 1,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대략 유가회비를 내는 사람들은 300명, 그외 월 1만원을 보내주는 분 20분 정도였다.
따로 생업을 하면서 한달 한번씩 잡지를 낸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근 일주일 밤을 설치고 원고를 청탁하고 받고 수정하고 삽화를 넣고 편집하여 인쇄소에 보내고 다시 책자를 가져와서 주소를 붙히고 봉투에 넣어 분류하고 다시 우체국에 가서 발송하고 혼자서 디해내려니 하루하루 정신이 없었다. 발송을 끝내고 좀 숨을 돌리려 하면 금새 한 달이 다가왔다.
이렇게 2000년 12월부터 2012년까지 꾸준히 발행했다. 무려 12년이다. 그러나 이사를 가면서 알려주지 않아 주소불명으로 돌아오는 구독자가 늘고 새 구독자는 점점 줄어들어 근심은 늘어만 갔다. 내가 엔지오 활동과 신문사를 운영했기때문에 여러 지인이 있어 그들에게 부탁은 했지만 대부분 타종교인들이고 정작 명상원 회원들과는 이런 상황을 공유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마음은 굴뚝같이 추천해 주세요 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시간 내는 게 부담된다는 사람들에게 이 일까지 부담되면 아예 나오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에 하지를 못했다. 갈수록 감소하는 회원을 보면서 의욕도 잃고 회의가 들었다. 이게 한계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나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평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좋은 뜻을 전하는 우편 배달부가 되겠다고 창간호에서 약속했는데... 아니야 하면서 다시 의지를 북돋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나늘 또 다른 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잡지 내용을 인터넷에 전달하는 방식이였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모델로 삼았다. 그래서 인터넷 산방편지란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좋은 글을 정한 다음, 음악과 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사이버상 산방편지를 주변에 발송하기 시작했다. 약 5년동안 공휴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편지를 올렸다. 댓글을 다는 것도 어느 날은 쉽게 생각이 났지만 어느 날은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곤 했다. 하지만 이마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참여하는 자도 적고 관심도 부족했다. 매번 독려하고 댓글을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냥 구경꾼에 머물렀다. 그게 내 한계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지 자문했다. 누구나 오면 탄복하는 명상처를 가지고도 나의 계획은 계속 무너젔다. 이렇게 월간 산방도, 인터넷 산방편지도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10년을 동거동락한 월간 산방과 5년을 꼬박 써온 산방편지를 포기하던 날 밤, 나는 애인을 떠나보낸듯 꾸띠에서 오열했다.
한 두달 아픔을 견디고 나는 또 다른 시도를 했다. 요일별로 모집하면 사람들이 더 올 수 있다고 생각하여 각 반을 요일 별로 세 반으로 나누고 반마다 책임자를 두고 명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주 한 번 일 때 모이는 숫자나 세 번 모이는 숫자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새벽반을 만들어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다시 명상 스테이를 시도했다. 처음 한 달 한번씩 금요일 입소하여 일요일 퇴소하는 2박3일 집중 명상스테이를 계획했지만 회원들이 부담된다고 해서 1박2일로 축소해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 6시 입소해서 토요일 오전 11시에 마치니 대략 17시간 정도이다. 이역시 참여도는 적고 설상가상 참여자 중에서도 잠은 집에 가서 자고 새벽에 오곤 했다. 집이 코앞에 있으니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스테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면서 집중수행은 반토막이 났다.
처음부터 2박3일 휴대폰 반납, 입소후 출입제한 등으로 제대로 시작했어야 하는데 후회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그래서 또 다른 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걷기명상반을 만들어 남강변이나 촉석루 등을 걸었다. 그러나 이마져 책임자들의 의지부족으로 두 달도 못가 폐지하고 말았다. 또 명상음악회를 통해 회원 배가와 단합을 유도를 했지만 그마저 고생한 보람도 없이 단발 행사로 그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나자신 무능하다는 점을 확인하는 절차의 연속이였다. 한 때 무엇이나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완벽한 자아도취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시 새로운 시도를 했다. 명상원에 가족과 함께 사는 게 걸림돌이 되는걸까?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이 제약이 아닌가? 가족이 명상원에서 나오면 명상원 중심으로 도량을 마음껏 사용하면 부담없이 머무는 수행공동체가 될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나오지 않으려는 가족들을 설득하고 동네 안에 주차장 부지를 사고 그곳에 터를 구입해서 이층집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요사채는 한달 간의 공사를 거쳐 자율보시 찻집으로 만들었다. 또 주변에 작은 부속찻집을 짓고 도량 정리도 다시 했다. 이때문에 가족이 이사 가지 않았다면 전혀 상관없는 예산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허브산방이란 이름으로 개원을 했다. 이제 산방이 달라지겠구나, 사람들이 머무는 수행처가 되겠구나, 그러나 인생은 기대에 속고 희망에 사기당하는 것 인가 보다. 일년이 지난 지금, 찻집은 제법 북적거렸지만 수행처는 찻집에 가려 더 위축되어갔고 머무는 이도 없어 애초 목적한 수행처 부활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찻집도 폐쇄하고 산방문도 완전히 닫았다.
나는 이러한 결과를 필연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업자성정견이다. 산방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야 되는데 하나도 즐겁지 않고 우울하기만 했다. 더욱이 수행처를 보면 너무 힘들었다. 그냥 절을 하면 사람들이 모이고 시내에 근접해 있어 제사도 들어오고 활력이 넘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충고를 했지만 나는 그런 유혹에 빠질 수 없었다. 그 일들이 바른 가르침이 아닌 줄 알면서 이보다 더 무너져도 그런 잔 꾀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절을 만들려면 그까짓 고통은 수백 배라도 더 견뎌야 된다. 그리고 그게 옳은 것이다 이렇게 다짐하면서 나는 다시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책을 만드는 일이다. 오래전 대불련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성경같은 '부처님 성전'을 꼭 만들리라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렵고 내 능력으로 감당되지 않아 포기했던 성전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이년 반을 꼬박 매달렸다. 20 년동안 꾸준히 준비한 자료가 있어서 그나마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일주일마다 서울로 동국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필요한 자료를 모았다. 하루 평균 10 시간 정도 이 작업에 매달렸다. 인도란 나라가 원래 시간개념이 없어 싯달타 고타마의 역사적 행적을 연대별로 찾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도 편년체로 엮어야 흥미있는 스토리텔링이 된다는 일념으로 인도권. 영어권. 일어권 모든 텍스트들을 취합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인도 빨리어 번역을 했고 그중 유려한 내용만 가려 아주 쉬운 일상언어로 다시 번역했다. 여기에는 번역을 증명할 인도 고전문헌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시 인도 고전들을 공부했다. 그리고 나니 다시 위 사실들을 입증할 스승이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는 선사, 조사에 대한 전문가는 많았지만 부처님 생애에 관한 전문가가 없었다. 다행히 미국 로욜라 메리마운틴 대학의 교수이신 종매스님이 그 분야의 전문가였고 그 분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력은 극도로 나빠지고 컴퓨터를 너무 많이 사용하여 팔은 펴지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니 이미 굳어져 다시 원상으로 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 좋아하는 테니스도 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즐거웠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자랑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대하던 책이 나왔다. 책을 보니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동안의 실패와 좌절이 보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서재에서 흐느끼자 딸이 와서 가만히 안아주었다. 주변에서 다들 출판기념회를 하자고 말했지만 나는 그 흔한 출판기념회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자랑 할 만한 것도 없었고 그들을 모아놓고 별 할 말도 없었다.
다행히 이 책은 한국 기자협회 종교부분 베스트 북에 선정되었고 불교계에서도 학자들이 읽어야할 다섯 도서중에 올랐다. 그리고 호응이 좋아 곧 유럽과 미국에서 출판을 앞두고 있다.
이렇듯 많은 실패를 했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또 시도를 할 것이다. 그게 금생이건 내생이건 상관없이... 내가 먹고 사는 일이라면 내가 안 먹고 굶으면 그만이니 포기하면 되지만 이 일은 내가 굶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영혼을 나눠주는 길이라고 믿기때문이다. 다시 진주에 내려갈 수 있을지 지금으론 기약할 수 없지만 그럴 시절인연이 오면 다시 시작하고싶다. 오늘도 그 꿈을 꾸면서 살아간다.
https://youtu.be/GuNoTsQ_wj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