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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권영호
[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아메리칸 뷰티 | ||||||||||
이 남자의 하루 중 최고의 순간은 샤워실에서 자위를 할 때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유일한 순간이다. 생활은 파탄나고, 자신도 없고, 하는 일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런 무기력한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눈길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다. 그녀는 바람이 나 힘있는 부동산 중개인(피터 갤러거)의 품에 안겨 “오! 나의 왕이여”를 외치며 숨가쁘게 파워를 찬양한다. 그 순진했던 여인이 언제부터 이런 속물이 된 것일까.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은 이제 “누가 아빠를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그 귀엽던 나의 천사가 왜 이렇게 됐을까.
회사에도 처세에 능한 사악한 인간들이 좌지우지한다. 전문성도 없는 새파란 젊은 매니저가 호시탐탐 그의 해고를 노리고 있다.
오! 나의 꿈은 어디로 사라지고, 삶의 쓴잔들만 남은 것일까.
영국 연극계의 귀재 샘 멘데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는 미국 중산층의 몰락과 비애를 짜임새 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수작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모두 곪아터져 있다. 주인공 가정은 물론이고, 옆집 예비역 대령(크리스 쿠퍼) 집은 더욱 병적이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그의 위세에 눌려 아들 릭키(웨스 벤틀리)는 어린 나이에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았고, 어머니는 삶의 끈을 놓아버린 것처럼 망연자실해 있다.
‘아메리칸 뷰티’는 모진 삶의 편린들을 다양한 상징으로 그리고 있다. 캠코더의 뷰파인더로 세상을 보고 있는 릭키가 보여주는 바람에 일렁이는 비닐봉지는 삶에 대한, 또 사물에 대한 진지하고 따뜻한 태도를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릭키는 제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바람에 일렁이는 비닐봉지. 바짝 마른 낙엽 위에서 무심하게 떠다닌다. 바닥에 앉으려다가 다시 바람에 일어서고,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를 반복한다.
릭키는 눈물이 촉촉하게 고인 눈으로 말한다. “마치 나와 춤을 추는 것 같았어. 어떨 때는 세상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 많아서 견디기 힘들어. 내 마음이 미어질 것 같아.” 아무도 유심히 보지 않는, 무심한 비닐봉지의 움직임에서 그는 지구위에 드리워진 위대한 사랑의 자장(磁場)을 느낀다.
비닐봉지는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반대되는 이미지가 붉은 장미다. 미국식의 화려하고, 풍성한 장미는 레스터가 안젤라의 환상을 꿈꾸면서 천장에서 쏟아진다. 침대에서 자위를 하는 순간 얼굴에 떨어지는 장미는 붉은 욕망과 몽환성이 잘 드러난다.
이 장미는 미국에서 개량한 장미다. 금발의 안젤라와 붉은 장미는 미국식 아름다움, 아메리칸 뷰티를 나타낸다. 레스터가 장미와 똑같은 붉은 피를 뿌리고 최후를 맞는 장면은 아메리칸 뷰티의 이중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화가 장숙경은 장미에 포커스를 맞췄다. 장미꽃을 확대해 붉게 소용돌이치는 이미지를 그려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미망 속에 빠질 듯한 느낌이다. 한치 앞을 예측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삶과 불가항력적인 미래를 닮았다.
시인 문인수도 장미에 주목하고 있다. 관통된 뒤통수와 가족사진, 꽃병, 흰 벽이 일렬종대로 붉은 피로 칠갑을 했다. 마치 한다발의 꽃다발처럼 꿰어 있다. 애타게 찾으려고 했던 아메리칸 뷰티의 역설적인 비장미가 ‘활짝 피어난 찰나가 붉다’에서 극대화된다.
‘아메리칸 뷰티’의 마지막 레스터의 대사는 삶의 소중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살다보면 화나는 일도 많지만, 분노를 품어서는 안 된다. 세상엔 아름다움이 넘치니깐. 드디어 그 아름다움에 눈뜨는 순간, 가슴이 벅찰 때가 있다. 터질 듯이 부푼 풍선처럼.”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삶의 진리. “오늘은 내가 살아갈 날의 첫 날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1999) 감독:샘 멘데스 출연:케빈 스페이시, 아네트 베닝 러닝타임:122분 줄거리:레스터 번햄(케빈 스페이시 분)은 무기력 속에 살아가는 중년 남성이다. 부동산 소개업자인 아내 캐롤린(아네트 베닝)은 물질만능의 속물이 되었고, 반항적인 10대 외동딸 제인(도라 버치)은 아빠가 사라져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어느 날 딸의 학교에 갔다가 되바라진 딸의 친구 안젤라(메나 수바리)를 보는 순간 욕정이 살아난다. 회사를 때려치우면서 상사를 협박해 목돈을 받아내 스포츠카를 사고, 마리화나를 피우기 시작하면서 이미 사라진 자신의 열정과 자유를 맛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