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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보시사
1702년(숙종 28) 윤6월 17일에 이형상 제주목사 자신이 시험관이 되어 시행한 시험장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시험장은 관덕정이다.
이 그림은 선비들에게 승보시를 보이는 장면이다. 승보시는 본래 성균관 유생들에게 치러진 소과(小科)의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시험인데, 지방에서는 개성, 제주, 수원에서 시행되었다.
제주의 경우 1639년(인조17) 심연(沈演)목사가 조정에 건의해 허락을 받고 실시됐는데, 고시관 3원(員 : 9품 이상의 관료에게 붙이는 칭호)이 매년 2명을 뽑아서 소과 복시(覆試)의 응시자격을 주었다. 관덕정 중앙 상좌에 시험관인 목사가 홍삼(紅衫) 차림에 사모(紗帽)를 쓰고 엄숙한 분위기로 앉아 있다. 그 약간 전면의 좌우에는 부시관(副試官)과 참시관(參試官)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고개 숙여 앉아 있고, 시험관 오른쪽 뒷면에는 사동(使童)이 엎드려있다.
시험관을 중앙에 두고 관덕정 좌우에는 6방 관속들이 부동자세로 서있는데, 모두가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이다. 그 중에는 통인(通引)이 좌우에 각각 1명씩 서있다. 계단 아래쪽 왼쪽에는 의관을 차려입은 유생 3명이 꿇어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한 선비가 서있다.
관덕정 앞뜰에는 큰 차일(遮日)을 쳐놓았으며 정면 좌우에는 시제(試題)가 4개의 대막대기 끝에 저마다 걸려있다. 그 앞에 깔아놓은 초석에는 붉은 옷을 입은 12명의 응시자가 한 줄로 나란히 앉아 과거에 응시하고 있다.
응시자 좌우편에는 각각 녹기(綠旗)를 든 기수 4명과 집장사령(執杖使令) 4명이 배치되어 있다. 좌측 뒷면에는 고수(鼓手)가 대령해 있고 관덕정 좌측 전면의 높은 게양대에는 사자기(獅子伎)가 걸려 있다.
관덕정 앞 왼쪽에는 포정루(布政樓)가 있는데, 2층 다락에 종과 북을 매달아 놓고 있다. 또 그 옆에는 군기청, 진무청, 기생청, 군기고, 병고, 북과원 등이 그려져 있고 전면 좌우에는 긴 집채인 회랑(回廊)이 그려져 있다.
또한 중앙 전면에는 물림폭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 물림폭은 과녁 뒤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되는 휘장으로 사수(射手)가 150보 전방의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쏠 때 과녁을 조정하기 쉽게 만들어놓은 일종의 보조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아래 설명에 의하면, 시험관은 정시관(正試官)인 이형상 목사와 부시관인 제주판관 이태현, 참시관인 대정현감 최동제 등의 문시관(文試官)으로 3원을 갖추었다.
응시자 12명, 거둔 답안지도 12매이므로 응시자 전원이 답안지를 제출했음을 알 수 있다. 합격자는 시(詩)와 부(賦)에 각 1명이며, 시험은 3일 동안 계속되었다.
耽羅巡歷圖란?
耽羅巡歷圖
탐라순력도는 1702년(숙종28)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제주관내 순시를 비롯해 한 해 동안 거행했던 여러 행사 장면을 제주목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40폭의 채색도로 그리게 한 다음 매 화폭의 하단에 간결한 설명을 적고, ‘호연금서’라는 이름의 그림 한 폭을 곁들여 꾸며진 총 41폭의 화첩이다.
18세기 초 제주도의 관아와 성읍, 군사 등의 시설과 지형, 풍물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제주도의 역사연구에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순력도’라는 이름의 기록화로는 거의 유일하게 현존하는 소중한 화첩이다.
그 진본을 이형상의 후손들이 간직해오다가 1998년 12월부터 제주시가 소장하고 있다. 탐라순력도는 보물 제652-6호로 지정되었다.
탐라순력도에 수록되어 있는 행사그림들은 18세기 초 제주도의 관아와 성읍, 군사 등의 시설과 지형 및 풍물에 관한 갖가지 시각적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제주지방의 역사적 연구에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특히 ‘순력도’라는 이름의 기록화로서는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자료일 뿐 아니라 당시 해외로 인식될 정도로 서울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제주도지방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지도는 궁궐이 있는 한양에서 바라보는 시점에서 제작된 경우가 많다.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 역시 마찬가지여서, 현재지도와는 달리 남과 북의 방향이 거꾸로 제작되어 있다
李衡祥 목사는 누구인가?
이형상(李衡祥)의 자(字)는 중옥(仲玉)이며 호(號)를 병와(甁窩) 또는 순옹(順翁)이라고 했다. 그는 조선시대의 문관으로서 유교의 이념철학을 실천한 목민관이었다. 청주(淸州), 동래(東萊), 양주(楊州), 경주(慶州), 제주 등 9개 큰 고을의 수령을 지냈지만 집터 하나 마련하지 않았고 떠날 때는 늘 책 몇 권만 들고 다니던 청백리였다.
효령대군보의 10대 손인 왕족의 후예로 약관에 대과 급제하여 등용문이 열려 있었지만 그의 80 평생 가운데 관직은 12년뿐이고 대부분의 생애를 독서와 연구로 보내며 60여 종, 2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는 역(易), 경서(經書)를 비롯해 시, 서, 의례, 가례 등 각 분야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악학편고(樂學便考), 악학십령(樂學拾零) 등을 내놓은 음악의 대가이기도 했다.
이형상은 그의 나이 50살인 1702년(숙종28년) 3월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제주목사의 임기는 2년 반이었다. 그러나 이형상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이듬해 6월에 제주를 떠나게 된다. 그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은 유배인들을 두둔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날 때 그의 행장 속에는 제주산 박달나무로 손수 만든 거문고 하나와 책 몇 권이 들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제주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 오백, 절 오백을 부순 영천 이목사,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던 광정당의 이무기를 퇴치한 장수, 알몸으로 작업하던 잠수들에게 잠수복을 입게 한 사또 등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그가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한 일은 다음과 같다.
- 삼읍의 문묘(文廟, 향교)를 수리하고 이름난 학자들을 골라 삼읍 향교의 훈장으로 삼아 지방 유생과 자제들에게 유학교육을 실시했다. 그의 강력한 유학교육은 그동안 낙후돼 있던 제주유학에 새로운 시동이 되었다.
- 삼성사를 가락천 동쪽에 건립하고 탐라건국의 시조 삼위와 함께 고후 등 세 형제도 향사하도록 했다. 이로부터 혈제와 아울러 춘추향제가 봉행되었다.
- 도내 각 마을에 산재해 있던 당 129개소와 모든 무구들을 불태워버리고 1천명에 가까운 무당들을 모두 귀농시켜 더 이상 미신행위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 이어 불사 2개소도 불태워버리고 불상 2기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당시의 사찰들이 이형상의 눈에는 타락한 절과 승려로 비쳐졌던 것이다.
- 관행(官行)으로 실시하던 풍운뇌우단제(風雲雷雨壇祭)를 폐지시켰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농작물의 피해나 해상사고 등 바람으로 입는 재해가 컸다. 그런 재앙이 천신, 지신, 산신, 해신, 풍신 등 신의 조화로 보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 비용이 관비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형상은 그런 제사를 모두 미신행위로 보고 중지시켰던 것이다. 풍운뇌우단제는 중지시키고 나서 흉년과 질병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도민들의 진정에 따라 이형상이 떠나고 17년이 지난 뒤부터 다시 지내게 되었다.
- 이형상은 도민들 가운데 동성동본 사이에 혼인을 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는 유교의 윤리로 보거나 미풍양속으로 보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동성동본 간의 혼인과 근족간의 혼인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 제주도에는 일부다처가 많다는 말을 듣고 이도 윤리에 벗어난 일이라 하여 부인이 있는 사람이 거듭 처를 들이는 행위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금지행위는 계속 지켜지지는 않았다.
- 제주도는 물이 귀해 마을에 샘물이 하나밖에 없으면 여름에 남녀가 어울려 샘물에서 함께 목욕하는 일이 많았다. 이것도 풍기를 문란케 하는 행위라 하여 금지시켰다.
- 이 무렵까지만 해도 제주도에는 잠수들이 바다에서 나체로 작업하는 일이 있었고, 사람이 지나다니는 개천가 등에서도 부녀자들이 나체로 목욕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형상은 이런 풍토가 양속을 해치는 일이라 하여 금지시켰다.
- 헌마공신 김만일 가문에 이어져 온 산장감목관의 세습제를 계청해 폐지시켰다. 1658년(효종9년) 이래 제주도에서는 김만일의 아들 김대길이 감목관을 이어받은 이후 그 자손이 그 자리를 계속 물려받고 있었다. 이 세습제가 수십 년을 지나는 동안 권세를 남용하고 목졸들을 괴롭히는 황포사례들이 나타나 민원을 사고 있었다. 이때 이형상 목사가 도임해 이를 과감하게 혁파한 것이다. 그러나 뒤에 다시 부활되었다.
- 남환박물지 남환박물 임진편, 탐라기, 탐라록, 탐라순력도, 탐라장계초, 성여록, 탐라도 등 제주도에 관한 많은 유작들을 남겼다. 이 저작들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제주도의 상황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소중한 문헌자료들이다.
이형상은 제주목사를 그만 둔 뒤 영천 호연정으로 돌아가 자신이 원하던 학문의 길에 파묻혔다. 잠깐 영관군수를 하기도 하지만 이내 그만 두고 더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조정에서 다시 관직에 돌아올 것을 종용했지만 모두 사퇴하고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영천에 칩거하면서 30년 동안 오로지 연구와 저술에 몰두했으며 1733년(영조9년) 11월 30일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관덕정(觀德亭)의 역사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322호로 지정된 관덕정(觀德亭)은 원래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1448년(세종 30) 신숙청(辛淑晴) 목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관덕정이란 이름의 ‘관덕(觀德)’이란 두 글자는 <예기(禮記)>에 “활을 쏘는 것은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사례(射禮), 다시 말해 활쏘기를 할 때의 의식을 통해서 사람의 덕행을 관찰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창건 당시에 안평대군이 중앙현판의 글씨를 써줬다는데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 걸려 있는 것은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글씨라고 한다.
관덕정
실내 상부에 걸려 있는 ‘탐라형승(耽羅形勝)’은 김영수 목사,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은 박선양 목사의 글씨다. 두 개의 대들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언제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매우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본래 3칸 건물이었던 관덕정은 여러 차례 늘려짓고 고치고 손질하는 과정을 거쳤다.
1480년(성종 11) 양찬 목사, 1559년(명종 14) 이영 목사, 1690년(숙종 16)이우항 목사, 1753년(영조 29) 김몽규 목사, 1778년(정조 2) 황최언 목사, 1833년(순조 33) 한응활 목사, 1851년(철종 2) 이현공 목사 때에 새로 고치고 손질되었다. 그리고 1882년(고종 19) 박선양 목사가 너비 13칸, 가로 10칸, 높이 5칸으로 늘려지었다.
관덕정은 팔작지붕을 한 단층 목조 건물로 비바람이 세차게 들이치는 제주도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 처마 길이를 매우 길게 내밀도록 만들어졌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1924년 일본인이 수리를 맡아 지붕처마가 2자나 잘려나가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그 뒤 1969년에 또 수리를 했지만 제 모습을 찾지는 못했다. 관덕정 마당에서 벌어진 행사와 일들은 곧 제주의 역사였다.
조선시대에는 병사훈련은 물론이고 관에서 주도하는 갖가지 잔치가 벌어졌고, 진상용 말과 감귤을 점검했으며,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민란의 장두가 악질향리들을 처벌하던 장소였으며, 일제초기를 전후해서는 5일에 한 번 큰 장이 섰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4·3사건의 도화선이 됐던 1947년의 3·1절 발포사건이 터진 현장이기도 하다.
관덕정 앞에는 돌하르방이 양쪽으로 1기씩 서있다. 원래 제주성문 앞을 지키던 수호석이였는데, 읍성이 헐리면서 이곳으로 옮겨져 제주의 상징물 역할을 하고 있다. 관덕정 뒤쪽에는 법을 선포하는 자리인 ‘선덕대’가 있다. 문화재청은 27억 원의 예산을 들여 2003년 12월에 보수공사를 착공했다.
관덕정을 전면 해체한 뒤 부식되거나 변형된 곳을 보수하고 지붕처마를 복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관덕정 복구공사는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관계 전문가의 고증과 자문 아래 최고의 장인들의 성심 어린 노력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착공 44개월 만인 2006년 8월 18일 준공식을 거행했다.
관덕정의 전설
관덕정은 ‘호남 제1정’이라고 부를 만큼 매우 웅장한 정자다. 이 정자를 지으려고 할 때 목사는 전국에서 유명한 목수들을 불러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 지으면 쓰러지고, 지으면 쓰러지고 했다. 일류목수들이었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엔 꼭 쓰러지지 않게 지읍시다.” 목수들은 더욱 치밀한 계산을 하고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한참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 삿갓을 들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또 쓰러지겠는 걸”, 그러자 “지가 무엇을 안다고 불길한 소리야!” 목수들이 야단을 치자 스님은 삿갓을 덮어쓰고 묵묵히 가 버렸다.
이번에도 완공되자마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스님의 이야기가 그냥 흘러버릴 수 없는 소리라는 걸 깨달은 목수들은 사방으로 그 스님을 찾았다. 한 달 만에 겨우 스님을 찾은 목수들은 방법을 알려 달라고 애원했다.
“닭이나 돼지 상량으로는 안 되고, 사람상량식을 해야 합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사람을 희생시켜 상량식을 합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아무 날 아무 시에 상량을 할 것으로 준비해서 ‘상량!’하고 큰소리를 지르면 지나가던 솥장수가 죽을 것입니다. 그를 희생으로 해서 상량식을 하면 됩니다.”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어쨌거나 스님이 하라는 대로 하기로 하고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어느덧 상량할 날이 되었다. 목수들이 상량식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침 동쪽에서 솥장수가 큰 솥을 머리에 이고 오고 있었다. 솥장수가 관덕정 앞마당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더니 “상량!”하는 큰소리가 울렸다.
솥장수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머리를 들어 쳐다보려고 하는 순간, 솥이 무거워 넘어지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목수들은 이 솥장수를 희생으로 해 상량식을 지냈다. 그때야 관덕정은 다시 쓰러지지 않고 완공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