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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영천향교국학학원
~~~서예,문인화,회원전을 열다~~~
언 제 ; 2014년 11월 26일~11월30일(5일간)
어디서 ; 영천시 왕평길38(교촌동)
영천향교국학학원이 주관하고 영천시가 후원하는
서예,문인화 회원전이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대전시실에서
2014년 11월 26일부터 11월 30일까지 5일간 향교의 서예, 문인화에
대하여 그 동안 열심히 연마한 실력을 전시하여 시민들에게 마음의 정서를 안겨주고 있다.
~~~서화의 역사를 약간 들추면~~~ 1918년 안중식과 조석진이 이끄는 서화미술회와 김규진이 이끄는 서화연구회가 모두 참여하여 조직한 미술인들의 모임에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실 이들은 문인화가를 제외하고는 서울에서 미술가로 활동하는 인물 거의 모두이기도 했다. 서화협회의 구성원은 서화 제작․전람․교수․감식을 하는 정회원과 후원단으로 부총재, 고문, 명예회원, 특별회원이 있었는데 1923년 3월 이후 김윤식이나 이완용 등이 참여하는 후원인단 제도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서예가 자격으로 협회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서화협회’를 전시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근대미술 전체를 전시주제로 설정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ㅇ 갑오(2014)년 11월그믐께 영천향교의 모습을~~~ 예를 들어 첫 협회전에서는 회원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고서화를 합쳐서 글씨 70여 점, 그림 30여 점의 총 100점 정도가 전시되었다. 안평대군이나 겸재 정선의 그림 등 전통적인 그림에서부터 정회원의 작품들이 출품되었는데, 고희동과 나혜석의 작품뿐만 아니라 와다 가즈다(和田英作)의 작품 8, 9점 등 서양화도 전시되었다. 정말 몇 안 되는 양화가까지 아울러 ‘당대의 평면 미술’을 모두 담은 것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마지막 전시인 15회까지도 지속되었다. ㅇ
전시행사가 시작될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건물도~~~
정회원에 대한 자격이 엄격함에도 한창 때는 60명이 넘는 회원이 소속했던 서화협회를 보여준다는 것은 매우 방대한 전시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휘문고등학교 강당 등에서 이루어졌을 정도로 대규모였던 전시를 재현하는 것은 공간이라는 걸림돌을 맞는다. 따라서 이 전시는 과거 협회전의 재구성이 아니라, 서화협회의 면모를 파악하는 최초의 전시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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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현판도~~~
그동안 가옥의 일부만을 전시장으로 사용하였던 것과 달리 가옥 전체를 전시장으로 구성하여 곳곳에서 서화협회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첫 전시실에서는 서화협회의 구성과 고희동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자료를 만날 수 있다. 두 번째 큰 방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잡지인 <서화협회보>를 실견할 수 있으며, 오세창, 김돈희를 비롯한 서예가들의 작품을 통해 당대 최고의 명필들을 만날 수 있다. 처음 소개되는 외손녀에게 그려준 모란을 비롯한 작은 그림 두 점은 친족에 대한 고희동의 자애로움을 엿보게 한다. 안채는 이번 전시를 기회로 처음으로 전시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찬방은 휴게 혹은 아카이브 공간으로 비워져서 더 많은 구상이 가능한 열린 공간임을 알려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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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답게 조각품도~~~
서화협회의 전시에서는 처음에 글씨를 출품한 작가들이 많다가 차츰 그림이나 양화가 증가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양화를 발견할 수 없다. 일단 나헤석, 이종우, 정현웅, 이승만, 김종태, 이제창 등 협회전에 참여하였던 양화가의 작품이 현재 양에서 매우 귀하기 때문이다. 서화협회 전반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전시는 1920년대 근대인들의 세계를 눈앞에 옮겨다 놓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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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단체에서 보내온 화환도~~~
전문화사의 농염한 색채를 희롱하는 경지를 보여주는 안중식과 조석진의 화조와 먹을 들어 농담을 다르게 하여 멀고 가까움, 흔들리고 고정된 세계를 표현해낸 지창한, 사군자에서도 호쾌함을 부리는 김규진, 전통의 산수와 근대의 수채를 결합한 듯 자유로운 안종원의 산수 등은 전통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근대의 다양한 기량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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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심인섭의 명랑한 화조나 김용진의 화사한 모란, 변관식의 자유로우며 거친 필치뿐만 아니라 사군자와 화조와 실지 정원의 풍경을 함께 묘사한 최우석의 화면에서 시간의 교차와 소재의 근대적 병용을 확인하게 된다. 자주 접하지 못하는 김권수, 홍순인, 김유탁, 유진찬, 나수연의 작품을 한군데서 볼 수 있는 것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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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프랑카~드도~~~
모두를 담지 못하였기에 전부를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근대서화의 세계를 서화협회의 이름으로 펼치는 이 전시는, 문인화가와 전문화가가 동시대 화단을 구성하였고 전통고 새로움이 함께 숭상되었고, 변화하는 정세와 사회 속에서 개인의 감성에 침착하게 되는 근대의 특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적인 작품들이 모여 하나의 전시를 이룸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서화협회가 하나의 이념적 결집체라기보다는 동시대 함께하는 미술인들의 우호성을 중시한 단체임을 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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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는분 시도(접수)부터~~~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에 대하여~~~
추사 김정희는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경주 김씨 유당 김노경의
자식으로 탄생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에 능했다고 한다. 번암 채제공은 추사의
입춘첩을 보고 글씨의 천재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이보다 앞서 초정 박제가도
추사의 글씨를 칭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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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추사는 1792년 월성위 궁의 양자가 된다. 그러나 양부 김노영은 계속되는 유배 끝에 5년 뒤, 끝내 죽고 만다. 그리고 그 해, 조부 김석주 역시 죽고, 추사의 형 관희도 세상을 떠난다. 관희 형의 죽음은 추사에게 타격을 준다. 추사의 순수한 성격은 이때 형성된다.
추사의 나이 15세, 추사는 관례를 올리고 원춘(元春)이란 자를 가졌으며 그것을 전후하여 박제가에게 사사한다. 그 해 6월,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다. 몇년뒤, 신유사옥이 일어나고 이승훈, 정약종이 순교한다. 박제가는 정다산과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 종성에 유배당한다.
추사는 이 해, 한산 이씨와 혼인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5년 뒤, 추사의 초취부인 한산 이씨는 죽고, 2년 뒤, 추사는 재취부인으로 예안 이씨를 맞는다. 추사는 생원시에 급제하고, 호조참판이던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연행됨에 때라, 그 자제 군관으로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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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 행사로 가야금 연주부터~~~
그리고 태화쌍비지관에서 운대 완원을 처음으로 만나고 사제의 의를 맺는다. 이어 담계 옹방강과도 사제의 의를, 그의 두 아들 옹수배, 수곤 형제 및 야운 주학년 등과도 결의 형제를 맺는다. 3월에 추사는 귀국을 하지만, 이 짧은 연행의 경험이 그의 일생을 통한 학문의 일대 전기가 되고, 이후 30여 년의 변함 없는 교유를 청유들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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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서도 담아 보고~~~
추사는 옹방강과 편지로서 사제의 정을 끈끈히 하게 되고, 답계의 제자 섭지선을 알게 된다.
이 때부터 추사의 필명이 청유에게 알려져 우리나라 금석에 관심이 높아진다. 1816 병자년, 김경연과 공동으로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식이 없던 부인의 권고로 소실을 맞는다. 그 다음 해 봄, 대구로 내려가 특히 경주 일대를 답사하고, 경주 무장사의 비조각을 찾아내고 비 측면에 옹담계 부자의 이름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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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오신분 전시실을 둘러 보고~~~
또한, 운석 조인영과 재차 북한산에 올라가 순수비의 미해독 글자를 실사하고 진흥2비고, 신라진흥왕릉고, 등을 집필한다. 추사는 황산 김유근, 권돈인, 조인영 등 이른바 4인방으로 친밀하게 교우하며 산유하고 시부를 읊는다. 그 후, 추사는 문과에 급제하고, 그 다음 해에 한림시에 급제하는 등 전도 양양한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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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도 ~~~
추사는 청유 주달, 섭지선 등과 계속 서신으로 왕래하며 많은 글씨, 탑본 등을 보내준다. 추사는 난초 그림에도 관심을 갖는다. 홍문관 부수찬이던 권돈인이 예제 문제로 갑산에 유배가 되고, 추사는 그것을 슬퍼하며 시를 짓는다. 몇 년 후, 추사는 정식으로 규장각 대교가 된다. 권돈인은 유배에서 풀리고 그의 '허천소초'에 소기를 부친다. 추사의 글씨는 청유 사람들에게 점점 명성을 떨쳐가고, 추사는 글씨가 입신의 경지에 들었다는 소리를 듣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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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만나니 반가운 인사도~~~
병술년, 추사는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비인 현감 김우명을 봉고 파직한다. 그러나 이것이 두고두고 추사 일문을 정치적 함정에 빠뜨리는 계기가 된다. 그 다음해, 김황산은 평안 감사가 되고, 추사는 부교리가 되는데, 이때쯤부터 경주 김씨에 대한 안동김씨의 시샘으로 관계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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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학원 교육사가 사회를 맡고~~~
그 원인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추사 등을 무겁게 썼다는 데 대한 반동이었다. 효명세자는 주변의 김로, 홍기섭, 조병영 등을 요직에 발탁, 김황산과 순원왕비는 이런 움직임에 잔뜩 경계하며 그 일각을 형성하는 추사 일분을 표적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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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빈들의 모습도~~~
그리하여 김노경은 광주 유수, 평안감사 등 중앙에서 외직으로 좌천된다. 중국에 있는 추사의 벗들은 많은 문헌과 서신을 보내어 추사에게 변함 없는 의리를 보여준다. 벗들은 이제 1~2년이면 추사가 다시 연경에 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학수고대한다는 말을 전한다.
추사는 승정원 부승지가 되는데, 윤상도 옥사가 발생한다. 안동 김씨가 은밀히 추진한 정치 공작의 일환으로, 김우명에 의해 김노경이 탄핵된다. 이것은 동년 4월 왕세자의 승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김노경은 마침내 고금도로 보내져 위리안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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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전교,학원장님의 귀빈 소개부터~~~
추사 부부는 매일 통곡하며 아버지의 무사함을 빌었는데 그 참담한 심정을 뭐라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섭지선의 친상으로 연경을 비운 사이 옹인달의 방탕으로 석묵화루 소정의 금석탑본, 고서화 등이 산일된다. 김노경은 얼마 후,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리고 판의금부사로 복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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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분위기도 담고~~~
추사는 성균관 대사성이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이어 병조참판이 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김노경은 죽고, 추사는 그 후, 형조참판이 된다. 1840 경자년 6월에 추사는 대망의 동지부사로 예정된다. 그러나 6월 30일에 김홍근이 대사헌이 되면서 김우명과 더불어 추사 일분을 탄핵한다.
즉 7월 4일에 윤상도의 옥사를 재론하면서 먼저 사망한 김노경을 탄핵하고 그 일당으로 추사 형제를 공격, 7월 11일엔 김정희, 명희를 사관록에서 이름을 삭제한다. 당연히 동지부사 예정도 취소된다. 추사는 금호 별서로 물러가서 죄를 기다리는 몸이 되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먼 조카뻘인 상무를 월성위 궁 계자로 맞았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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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도 담아 보고~~~
8월 초, 추사는 예산의 향저로 내려갔는데 그 사이 국문을 받고 죽게 된 것을 조인영이 적극 주장하여 모면케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8월 20일, 죽음이 하나 감해져 제주도로 유배하고 위리안치한다는 가혹한 조치가 취해진다. 유배 도중 남원에서 “모질도”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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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장님 축사도~~~
10월 쯤 제주도로 압송되었는데 그 배웅에는 초의선사와 허소치도 있었음이 서독에서 증명된다. 추사는 아전이었던 송계순의 집 대정에 안치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중씨 명희에게 보낸 서독에서 나온다. 추사는 반 년 남짓 동안 풍토병인 학질병과 다리의 신경통, 급격한 시력 저하 등으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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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열심히 청취하고~~~
그러나 도민은 순박하고 친절했으며, 추사도 차츰 기력을 회복한다. 특히 경자년 12월, 영국 군함 2척이 추사의 대정 유배처 앞바다인 가파도에 나타나 농우를 약탈하는 일이 있자 도민이 동요되었는데, 이 때 장병사 인식과도 알게 된 듯 다소의 원조를 받게 되었으며 나라를 걱정하는 서독을 특히 권돈인에게 써보내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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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교육지원청교육감의 축사도~~~
1842년 부인 예산 이씨가 죽는다. 그러자 추사는 슬퍼하며 “부인 예산 이씨 애서문”을 짓는다. 1848년 12월 6일, 추사는 9년 만에 유배가 풀리고 한양에 돌아온다. 추사의 유배 시절, 큰 힘이 되었던 허소치는 신관호의 추천으로 어전에 나가 헌종을 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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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프 자르기도~~~
이때 추사의 글씨와 안부에 대해 하문을 받는다. 그러나 그 해 6월 8일, 23세였던 헌종이 승하함으로써 추사의 재기 기회는 사라졌다. 안동김씨는 철종을 영립하고 순원대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한다. 추사는 1851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고, 황초령 묵수비를 고증한다. 그리고 1852년 추사의 귀양이 풀리고, 이때부터 추사는 관악산 아래 살면서 근처의 봉은사 승려들과 교유하며 만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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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 병진년 10월 10일, 추사는 향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한다. "추사의 품안은 참으로 넓어 이 글을 쓰고 나서도 미진한 점이 너무나도 많이 부끄럽고 오히려 아쉬움마저도 없지 않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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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주로 나 아닌 남에 대해 모자라는 점이 있고, 그럼에도 작자 나름의 마름질을 하려 했기 때문이리라. 더욱이 추사 김정희는 나와 남을 초월한 공의 입장이라서 다루기에 훨씬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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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문인화에 대한 설명과 작가도 소개 하고~~~
과연 얼마만큼 추사의 모습을 정확히 정립하고 재현하며, 그의 발자취를 배울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러므로 저자는 독자와 더불어 배운다는 입장에서 추사라는 하나의 높은 산을 등반하여 필연적인 우리의 겨레와, 강토, 정신까지 총망라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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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과 함께 열심히 감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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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이 많이 담긴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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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한면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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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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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부지런히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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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농(정병용씨)작품도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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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체가 힘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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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화 부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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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농작품 천자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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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씨 작품 팔곡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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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연주의 기념 촬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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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면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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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 병풍작품 앞에 천농(정병용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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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작품 앞에 기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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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추실 작품을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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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에다 그린 작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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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죽이 무척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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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피는 매화의 부드러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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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작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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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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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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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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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고 나오니 어둠이 깔리고~~~
첫댓글 이모저모를 담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으로 눈으로 감상을 하고 갑니다.^^
훌륭한 작품들을 다시 볼수 있도록 애쓰신 덕분에 맘
영천향교 카페에도
감상의 댓글
갖는분이 계시니 비록 졸작이지만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감사합니다
와우`~~정말 대단하십니다..ㅋㅋ 사진찍는 기술도 상당한 실력이지만 적절한 사진분배와 설명댓글 등 보통 실력이 아니십니다 ㅋㅋ
늘 좋은 추억을 남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예~!
고맙습니다.
그런데 졸작에
칭찬 주시니 어리둥절
그르나 기분은 좋으니 더욱
열심히 노력하라는 걸로 알고 부지런히 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