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1883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탄생기
1881년 1월 25일에 니체는 《서광(Morgenröte; 아침놀)》을 완성했다.
2월 하순부터 니체는 친구 하인리히 쾨젤리츠(Heinrich Köselitz, 1854~1918)를 “페터 가스트(Peter Gast)”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3월 하순에는 페터 가스트가 독일 의사·물리학자 율리우스 폰 마여(Julius von Mayer, 1814~1878)의 저서 《열역학(熱力學; Mechanik der Wärme)》(1867)을 니체에게 추천했다. 마여의 저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영원회귀” 개념을 착안한 니체는 이후에도 많은 자연과학서적을 탐독했다.
7월 8일 《서광(아침놀)》을 출간한 니체는 7월 초순~9월 스위스 질스마리아에서 처음으로 휴양했다.
8월 초순에 니체는 영원회귀개념의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실감했다. 그즈음에 니체의 시력이 약해졌다. 니체는 글쓰기를 조금 더 쉽게 하려고 타자기(打字機)를 물색하면서 타자연습도 겸했지만 실패했다. 그동안 니체는 독일 지리학자·문명역사학자 프리드리히 폰 헬발트(Friedrich von Hellwald, 1842~1892)의 《지구와 지구인들(Die Erde und ihre Völker)》, 독일 철학자·비평가 쿠노 피셔(Kuno Fischer, 1824~1907)의 《스피노자의 삶과 성격(Baruch Spinozas Leben und Charakter)》, 독일 신(新)칸트주의철학자 오토 리프만(Otto Liebmann, 1840~1912)의 《칸트와 그의 아류들(Kant und die Epigonen)》과 《현실분석(Analysis der Wirklichkeit)》을 읽었다.
11월 27일 이탈리아 제노바의 폴리테아나(Politeana) 극장에서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의 오페라 《카르멘(Carmen)》을 처음 관람하고 비제의 음악에 심취하면서부터 니체는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음악과 결별했다.
1882년 2월 4일 친구 파울 레(Paul Rée, 1849~1901)가 타자기 한 대를 가지고 니체를 방문하여 니체와 함께 타자연습을 했지만 니체는 끝내 숙달하지 못했다.
3월 16일 니체와 헤어진 파울 레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독일 작가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Malwida von Meysenbug, 1816~1903)의 소개로 러시아 출신 작가·심리학자 루 살로메(Lou Salome, 1861~1937)(오른쪽사진)를 처음 만났고, 니체에게는 편지로 루 살로메를 열광적으로 소개했다. 그즈음 반유태주의자(반유대주의자) 베른하르트 푀르스터(Bernhard Förster, 1843~1889)가 니체를 존경한다는 사실을 여동생 엘리자베트(Elisabeth Nietzsche, 1846~1935)가 니체에게 알리면서 푀르스터를 소개했다.
4월 20일 파울 레는 자신을 포함하여 루 살로메, 니체, “중년여성”(말비다 폰 마이젠부크)과 함께 “삼위일체”라는 회명(會名)을 내세운 학습모임을 갖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니체에게 보냈다.
4월 24일 로마에 도착한 니체는 며칠 후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Basilica Papale di San Pietro)에서 루 살로메를 처음 만났다.
5월 1일에는 루 살로메와 그녀의 모친 루이제 폰 살로메(Louise von Salome, 1823~1913)가 로마를 떠나 북이탈리아로 출발했다. 그즈음에 니체의 건강은 갑자기 나빠졌고, 로마에서 파울 레와 함께 나흘을 더 머물던 니체는 5월 5일 북이탈리아로 출발하여 오르타(Orta) 호숫가에서 루 살로메와 루이제를 만나 며칠간 함께 지냈다. 그때 루 살로메와 함께 호수 북방으로 산행을 나간 니체는 루 살로메와 철학적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의 총명한 지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 살로메 모녀와 헤어져 스위스 바젤에 머물던 니체는 5월 13일 스위스 루체른에서 루 살로메와 파울 레를 다시 만났다.
루체른의 어느 사진관에서 니체와 파울 레는 수레를 끌고 루 살로메는 손에 채찍을 든 유명한 “채찍사진”(《니체 자서전: 나의 여동생과 나》 제9장의 표제사진 참조)을 촬영했다.
5월 16일 니체, 파울 레, 루 살로메는 겨울에 “삼위일체” 학습모임을 갖기로 약속하고 각자 갈 길로 헤어졌다. 5월 30일 루 살로메는 바젤로 가서 니체의 친구이자 독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던 프란츠 오버베크(Franz Overbeck, 1837~1905)의 집을 방문하여 오버베크의 아내 이다(Ida Rothpletz, 1848~1933)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6월 16~17일 루 살로메가 독일 베를린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니체는 베를린으로 갔지만 루 살로메를 만나지 못하고 나움부르크로 귀가했다. 6월 하순에 《즐거운 학문》을 완성한 니체는 루 살로메에게 그것의 원고를 보여주려고 베를린으로 갔지만, 폴란드 북서부 마을 스티베(Stibbe)에 있던 파울 레의 집을 방문하려고 이미 베를린을 떠난 루 살로메를 만나지 못했다.
7월 하순에 니체는 루 살로메와 여동생 엘리자베트(오른쪽사진)와 함께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을 관람하려고 나움부르크를 떠나 바이로이트(Bayreuth)로 갔다. 그러나 오페라 공연에 초청받지 못한 니체가 바이로이트 인근의 도시 타우텐부르크(Tautenburg)에서 6월 25일~8월 27일까지 체류하는 사이에, 오페라 관람권을 구입한 엘리자베트와 루 살로메는 7월 24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만나 28일 함께 바이로이트로 가서 오페라를 관람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수많은 남성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그들로부터 쇄도하는 청혼신청들을 능란하게 받아넘기는 루 살로메의 모습은 곁에서 동행하던 엘리자베트의 분노를 자극했다.
8월 7일 독일 예나(Jena)에서 다시 만난 엘리자베트와 루 살로메는 서로의 행실을 비난하며 설전을 벌였지만, 곧 또다시 함께 니체를 만나러 타우텐부르크로 갔다. 그곳에 엘리자베트도 함께 머물렀는데, 니체는 루 살로메와 장시간 산책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8월 20일에는 《즐거운 학문》의 초판본이 니체에게 우송되었다.
8월 26일에 니체와 헤어진 루 살로메는 파울 레를 만나러 스티베로 떠났다.
9월에 니체의 모친은 루체른에서 촬영된 이른바 “채찍사진”을 직접 봤고 엘리자베트의 고자질까지 들었다. 니체의 모친이 니체와 루 살로메의 교제를 극력반대하고 나서자 니체는 모친과 엘리자베트를 상대로 언쟁했다.
10월 바젤에서 “삼위일체”의 마지막 모임이 열렸지만, 루 살로메를 사이에 두고 연적관계로 변한 니체와 파울 레의 서로를 향한 질투심이 빚어낸 오해는 심각해졌다.
11월 중순에는 향후 파리에서 열기로 계획한 모임은 니체가 불참하기로 통보하면서 최종적으로 중단되었다.
11월 하순부터 이탈리아 북서해안도시 라팔로(Rapallo)에서 정신적‧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파울 레뿐 아니라 루 살로메와도 멀어지고 모친과 엘리자베트와 주고받던 편지마저 끊어버린 니체는 깊은 절망에 휩싸인 채로 연말을 고독하게 보냈다.
1883년 1월 초순 니체는 절망감과 정신적 고양상태를 반복적으로 느끼다가 몇 주간 건강이 호전된 사이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를 완성했다.
2월 13일 리하르트 바그너가 사망하자 니체는 코지마 바그너(Cosima Wagner, 1837~1930)(왼쪽사진)에게 애도편지를 보냈다. 2월 하순~3월 초순 니체의 건강이 호전되고 정신도 활기를 얻었다. 니체는 나움부르크에 있던 모친과 엘리자베트에게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5월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가 출간되었고, 니체는 로마에서 엘리자베트를 만나서 화해했다.
6월 중순~9월 초순 질스마리아에 머물던 니체는 7월 중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2부를 완성했다. 그즈음 루 살로메와 파울 레의 행적에 관한 엘리자베트의 고자질을 들은 니체는 루 살로메와 파울 레에게 신랄하게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편으로 니체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했지만, 라이프치히 대학교 총장은 니체의 반기독교적 성향을 암시하며 니체의 임용을 거절했다.
8월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9월 중순~10월 초순 나움부르크에 머물던 니체에게 엘리자베트가 반유태주의자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10월 중순 제노바에 머물던 니체는 악화된 건강 때문에 11월 프랑스 남동부 항구도시 니스(Nice)로 거처를 옮겼지만, 그의 건강은 연말까지 더욱 악화되었다. 그무렵에 니체는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와 절친하던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요제프 파네트(Joseph Paneth, 1857~1890)를 만나서 교유하기 시작했다.
* 출처: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자서전: 나의 여동생과 나》(까만양, 2013), 414~417쪽.
* 참조: 메타문학(Meta-literature)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가늠한 여러 견해, 평가, 해석: 자신, 바슐라르, 하이데거, 츠바이크, 푸코, 들뢰즈, 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