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도수 없는 안경 ‘공부꾼’ 인생길에 앞선 내 어린 시절의 시련
글 장회익 물리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공부, 그까짓 것 아무 쓸데없는 짓이다.
아예 할 생각도 말라.” 할아버지에게 ‘공부’는 또 하나의 안경이었다. 도수가 없는 민짜안경처럼 그것을 낀다고 해서 세상이 조금도 달리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멋쟁이들이 민짜안경을 쓰고 다니듯이 공부했다는 놈들이 졸업장이나 꿰어차고 다닌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할아버지 덕에 나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내겐 소중한 실전 경험이 되었다. 공부해야 할 본연의 이유를 찾게 만들었고, ‘공부꾼’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안경 쓰는 건 어른 앞의 예(禮)가 아니니라”대학생 때까지도 나는 시력이 무척 좋은 편이었는데 공군사관학교에 근무하면서 시력이 점차 나빠져 결국 근시안 안경을 쓰게 되었다. 안경을 쓰고 한참 되었던 시기에 고향에 가서 할아버지께 문안을 드린 일이 있다. 으레 하듯이 정중히 엎드려 인사를 드렸는데, 할아버지는 안 된다고 안경을 벗고 절을 다시 하라고 하셨다. 안경은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썼는지 벗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이것이 왜 예법에 어긋나는지 알 수 없었다.
안경을 벗고 다시 인사를 드렸더니, “안경을 쓰는 것은 자존(自尊)이라, 어른 앞에 자존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예(禮)가 아니니라” 하시는 것이었다. 눈이 나빠 보조기구를 착용했는데, 그게 어떻게 자존이 되는가? 그러나 어른 앞에 되묻는 것은 적어도 할아버지에 관한 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훗날 할아버지가 작고하신 후 유품을 살피던 중 그것이 왜 자존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 거기에 고풍스런 안경이 하나 있었는데, 유리에 도수(度數)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완전 민짜안경이 아닌가!
하, 이분은 안경을 완전히 장식품으로 아셨구나. 공부나 좀 했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멋을 부리기 위해 쓰는 것으로, 당신도 젊었을 때 아마 그런 목적으로 쓰신 모양이었다. “저놈이 요즘 공부를 좀 했다고 하더니 건방이 들어 안경까지 쓰고 나타났구나. 더구나 어른 앞에서까지 버젓이 쓰고 절을 하다니!” 당연히 한마디 훈계가 떨어지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일을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훨씬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이 어른이 왜 내 공부에 그렇게 적대적이었던가 하는 점이다. 1950년 당시 학제 변경에 따라 나는 막 6학년에 올라갔다. 그러나 곧 6?25 전란이 시작되어 우리 가족은 다 오천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할아버지가 나를 학교에 아예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다. 초등학교조차 가지 말라고 하셨다. 도무지 이유가 없었다. 5대 장손인 집안에서의 위치로 보나 공부에 대한 적성으로 보나 심지어 학교 성적으로 보더라도 납득할 수 없었다.
할머니와 종조부 등 집안 어르신들이 옆에서 만류해도 막무가내셨다. 학교에만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집안 일꾼들과 같이 들에 나가 일하라고 하셨다. 결국 나는 1년 동안 학업을 중단하고 산으로 들로 일하러 다녔다. 새벽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 마당을 청소하고,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 해오는 일을 해야 했다. 또래 아이들이 모두 학교로 가는데 나 혼자 나무 지게를 메고 산에 올라가 그 아래 학교를 내려다보며 나무해야 하는 심정은 당해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운동회에 가서 감을 팔아라 이 무렵, 내 의지를 시험하는 사건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우리 집 감을 따다가 초등학교 운동회 날 나가 팔아오라고 하신 것이다. 학교에 못 다니는 것도 섭섭한 일인데 하필이면 친구들이 운동회라고 모여 희희낙락하는 데에 들어가서 감을 팔아라, 참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나는 아랑곳 않고 감을 가지고 나가 팔았다. 망신이라면 할아버지 망신이지 내 망신이 아닐 것이고, 할아버지는 그런 망신을 좀 당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그 안에서나마 모든 수단을 활용해서 공부할 길을 찾고 있었다. 훈련 가운데 실전 체험만큼 좋은 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연습으로 하는 훈련이다 하는 것을 안다면 벌써 생명에 지장이 없는 줄 아는지라 그만큼 대응이 안이해지고 훈련의 성과가 떨어진다. 그러나 실전인 경우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 시기 내가 몰린 상황이 바로 실전에 해당한다. 할아버지의 단호한 명령은 실제 상황이었으므로 이겨 나가든지, 아니면 공부의 길에서 완전히 탈락하든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인삼 밭에 들어가 주는 대로 받아먹고 자란 희멀건 인삼 뿌리가 되느냐, 아니면 빈 산속에 들어가 먹을 거 제 손으로 챙겨 먹은 산삼 뿌리가 되느냐다. 물론 그 시기에 내가 인삼 뿌리가 될지 열무 뿌리가 될지 생각이라도 해보았을 리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진 제한된 여건 아래 내가 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되도록 하고 싶은 것을 골라 하면서 사는 길밖에 없었다. 그 무렵 내게 맡겨진 일 가운데 하나가 소를 돌보는 일이었다. 소 뜯기러 갈 때면 늘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나갔다.
소가 풀을 뜯는 것을 멀찌감치 지켜보면서 혼자 읽다보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고 들어보지도 못한 이상한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답답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노트에 읽은 것을 적기로 했다. 적어도 내가 한번 직접 써보면 더 알아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글자로 적는다고 더 잘 알아질 이유가 없으니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다음부터는 내가 책을 짓는 저자라고 생각하고, 만약 내가 그 내용을 알고 책을 짓는다면 어떻게 적을까 하는 자세로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니 적어도 내가 수긍되지 않는 것은 적지 않게 되고 따라서 내 스스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의식적으로 가려내고 검토하는 습관이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늘 언젠가 정규 교육을 받으면 확인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떻게 하면 다시 정규 교육으로 돌아갈까 고심하고 있었다. 정규 교육에 복귀했을 무렵에는 이러한 독자적인 학습방법이 나름대로 정착되어 이번에는 반대로 학교에서 배우더라도 내 고유의 방식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학습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야생에서 온실의 표준을 적용하려 했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온실에서 야생의 표준을 적용하려 한 것이다.
학문에도 야생(野生)이 있다 일년 후 내가 정규 교육에 복귀하고 나서도 할아버지의 자세엔 별 변화가 없었다. 중학교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든, 고등학교 입시에서 수석을 했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든, 또 주위 사람들이 축하를 드려도 할아버지는 덤덤해하셨다. 공부에 관한 것이라면 나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잘했다고 하신 일이 없다.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할아버지에게 ‘공부’는 또 하나의 안경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착용하셨던 ‘공부안경’ 역시 도수가 없는 민짜안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공부라는 안경을 직접 끼어 보았지만 그것을 낀다고 해서 세상이 조금도 달리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공부는 하든 하지 않든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데, 마치 멋쟁이들이 민짜안경을 쓰고 다니듯이 공부했다는 놈들이 졸업장이나 꿰어차고 다닌다고 보았던 것이다. 차라리 안경을 전혀 끼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안경이 중요한 것인가 보다, 안경이 필요해서 끼나 보다 했을 테지만, 민짜안경을 끼어 본 사람은 안경이 겉멋을 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사기’라는 것을 알아버렸기에 확신을 가지고 이것을 배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그 시련이 오히려 내게 실전 경험이 되어 공부에 현실적으로 큰 보탬이 되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묘한 아이러니다. “공부, 그까짓 것 아무 쓸데없는 짓이다.
아예 할 생각도 말라”고 한 것이 오히려 내게는 공부해야 할 본연의 이유를 찾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는 ‘공부꾼’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내가 할아버지에게 정말로 고맙게 여기는 것은 “남이 장에 가니 나도 간다”는 식의 공부 길이 아니라 “아무도 장에 안 가도, 옆에서 아무리 장에 가는 것을 막아도 나는 장벽을 뚫고라도 간다”는 식의 공부 길을 일찍부터 걷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다가 뒤늦은 시기에 할아버지도 결국 내가 쓰고 있는 ‘공부’안경이 당신이 쓰던 ‘공부’안경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 같다. 어느 날엔가 나는 들에 나가 할아버지의 들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무척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넌 이제 일 그냥 두고 들어가거라.” “예?” “이 일은 네가 할 게 아니야.” 말하자면 이제 더는 농사꾼이 아닌 공부꾼으로 나를 인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공부를 통해 내가 걸어갈 독자적인 길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하신 것이다. 아, 나도 드디어 이 할아버지에게 공부꾼으로 인정받는 날이 왔구나! 나는 지금 그때 그 일에 조용히 대답해 본다. “네,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 덕분에 저는 학문에도 야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장 회 익 님은 1938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미국 텍사스대 연구원을 거쳐 30여 년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물리학 이외에 과학 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습니다. 저서로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등이 있습니다. 지난 1월호의 글은 <새들은 과외수업을 받지 않는다>에, 이번 호의 글은 <공부도둑>에 게재된 글로 저자의 양해를 구해 수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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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내용도 여러번 읽었던 내용인데 ^^ 또 읽을수 있어 좋네요
네네 ^^
이글 진짜 좋았는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