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 시절
학원을 찾아서
다카다노바바는 학생들의 거리로 유명하다. 그리고 바로 대학진학을 위한 ‘재수학원’의
거리이기도 하다. 다카다노바바의 역주변에는 크고 작은 학원이 수도 없이 많아서 어디로
갈까 망설여질 정도다. 따로 점찍어 둔 학원이 없어 그저 집에서 가까우면 어디라도 좋다고
생각하던 내게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친구가 아주 괜
찮은 곳이라고 소개해 준 학원이 있었다. “저어 4월부터 등록하고 싶은데요.”“잠깐만 기
다리세요.”이말을 남기고 접수창고의 여자가 안쪽으로 사라진다. 팸플릿이라도 가지러 가나
싶어 그것은 빗나간 추측이었다. “우리 학원에는 엘리베이트나 휠체어용 화장실이 준비되
어 있질 않아 받아 줄수가 없습니다.”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다른 학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똑같은 이유로 거절당했다. ‘전제발로 계단을 올라갈 수 있으니까 엘리베이
트는 필요없어요. 화장실도 휠체어용이 아니어도 관계없습니다.’라고 말해 보았지만, 학원
측은 결국‘무슨 일이 생겼을 때 책임 질 수가 없다’는 이유를 대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뒤로도 ‘학원’이라는 간판만 보이면 무조건 들어가 문의를 해보았지만, 줄곧 허사였다.
심한 경우에는 ‘글쎄, 휠체어를 탄분은....’이라며 직설적으로 거절하기도 했다. 아니, 그렇
다면 왜 입구에 ‘휠체어 금지’라고 써붙이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분노를 느끼지도 않
았고, 비탄에 젖어 지내지도 않았다. 그저 놀랐을 따름이다. “예에, 휠체어를 타고 있으시다
구요. 다시 생각해 봐야 겠는데요.”부모님, 선생님들, 친구들..... 날 아껴주던 모든 분들의
은혜에 휩싸여 성장해 온 나로선 내가 장애인임을 의식 할 기회가 그만큼 없었다. 장애인으
로서 벽에 부딪힌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저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모
처럼 ‘대학에 가자. 공부를 하자’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집에서 혼자 공부를 해낼 만큼 강
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통학할 수 있는 학원이 필요했다. 상황이 절박했다. 그
때, 신문 광고를 보고 3대 학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슨다이 학원이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규모가 큰 학원인 만큼 등록을 받아주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며 집을 나섰다. 본관 건
물에는 계단이 있었지만, 신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도 완비돼있었다. 전동 휠체어로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환경 문제는 허가를 받느냐못 받느냐 못 받는냐뿐이었다. 처음 상담에 나선
부장쯤 돼 보이는 분은 역시 난색을 표했다. ‘책임이.....’라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 또
나온다. 이번에도 안 되는가 싶어 낙담하는 그 순간에 젊은 직원들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
죠?‘라며 반론을 편다. 그 덕분인가, 이야기는 입학허가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상담이 끝
난후 실제로 휠체어로 이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 체크하기 위해 젊은 직원과 함께 건물 안을
돌았다. “우리 함께 잘해 봅시다!” 엘리베이터를 탈때 그 분이 내게 말해 주었다. 그 한마
디에 얼마나 용기를 얻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수많은 학원을 돌며 퇴짜를 맞았지만, 그 서
운함이 단숨에 날아가면서 길고도짧은 1년간의 재수생 생활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잔뜩 부
풀어 왔다.
자전거 사나이
내가 다니고 있던 슨다이 신주쿠 학원은 사람들에게 ‘유령학원’으로 불렀다. 신주쿠라
는 이름 탓에 누구나 신주쿠역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오쿠보에 있었다. 오쿠
보까지는 집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 그러나 전철로 통학하기가 어려운 나는 걸어서 다닐수
밖에 없었다. 전동 휠체어로 꼭 30분 걸렸다.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다카다노바바의
거의 모든 학원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 거리는 문제도 아니었다. 하
지만 비라도 오는 날이면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왼쪽 어깨와 목으로 우산을 받쳐들고, 바람
에 날아가지않도록 손잡이 부분을 발로 꽉 누른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휠체어를 운전한다.
상당히 힘이 드는 동작이기 때문에 맑은 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체력이 소모되었
다. 게다가 우산 때문에 왼쪽 절반 정도는 앞이 보이지 않아 신호등도 잘 보이지 않았고 갑
자기 튀어나오는 자동차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속에서 휠체어를 30분
씩이나 타야 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그럼에도 별로 고생이라는 생각없이 1년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학원 생활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학원생활이 ‘즐거웠다니?’하고 의아해
하겠지만, 정말 즐거웠다. 슨다이는 학급제로 운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학원과는 달리
고정석이었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 쉬웠다.
더구나 우리반의 대부분이 동일한 대학을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같은 목표를 향하는 ‘동
료의식’같은 것이 싹텄는지도 모른다. 처음 알게된 친구가 리키마루였다. 180센티미터 가까
운 키에 머리는 장발이었으며 얼굴이 갸름했다. 언젠가 ‘저 친구 마약 하는 거 아냐?’라
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인상이 고약했다. 쉬는 시간에 혼자서 푸우-담배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어찌나 거칠었던지 도저히 가까이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물 마
시러 갔다가 그만 수업에 조금 늦고 말았다. 수업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는데 마침 담배 피
우느라 늦어 버린 리키마루와 문 앞에서 마주쳤다. 다소 엄한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수업도
중 교실 문 열기가 좀 뭐해서 1층 벤치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리키마루
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대단히 씩씩
하고 좋은 친구였다. 중학시절 농구부의 팀메이트가 리키마루의 고등학교 친구였다는 얘기
를 듣고는 둘은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그 뒤 우리 둘은 단짝이 되었다. 리키마루는 자전거를
아주 좋아해서 학원에도 자전거로 통학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내 주변에는 자전거를 좋아하
는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대단히 신선했다. 내가 다니던 슨다이 학원에는 지
방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도 있었고 사립학교 고등학교 출신도 있었다. 리키마루를 비
롯해 그 학원에서 사귄 친구들은 내가 모르는 세계를 경험한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학원을 즐기며 다닐수 있게 해준 또 하나의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고비
인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에는 친구들이 그룹으로 만들어져 있을 정도였다. 한 반에 100명
정도되는 많은 학생들이 있었지만, 그 분위기는 학원이라기보다 오히려 학교에 가까웠다. 아
침부터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가사이 임해공원으로 소품을 가기도 했고, 샤브샤브 뷔페에서
큰 접시로 16개나 비우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미식축구에만 푹 빠져 있었던 고등학교와는
달리 ‘놀이’라는 부분에 더 충실하던 시기였다. 친구와 서로 연락을 주고 받기 위해 삐삐
를 산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재수 생활을 하던 그 해에는 공부가 나의 임무 이렇게 놀
아도 정말 괜찮은지.....
기적
그래, 지금부터 시작이야
공부하고 담을 쌓고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만큼 나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학원에
등록을 하고 나서 첫 수업은 영어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선 ‘S(주어), V(동사), O(목적어)’
라는 말을 연발하였지만, 난 그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용기를 내어 옆자리 학생에게 물어 보
았다. “미안한데 S니 V니 하는게 뭐지? 무슨 암호니?“ 옆자리 학생은 ‘이 자식, 날 놀리
는 거야 뭐야,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인가’하는 분노와 동정이 뒤섞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서 물어보았을 뿐인데...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라곤 본적이 없었기 때
문에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100명이 넘는 학생들 가운데 바닥을 길
정도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제로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1년 동안
얼마나 성적을 높일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마치 그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
처럼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은 와세다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
은’ 느낌 흔히 ‘인종의 도가니’라고 표현되는 이 대학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
이 존재한다. 그 개성이 서로 맞부딪치는 대단히 강력하고 매력있는 대학이라고 나는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 나를 몰아넣고 자신에게도 ‘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러 대학에 가는 나에게는 와세다가 가장 적합한 대학처럼 여겨졌
다. 거리도 가까웠다. 집에서 와세다 대학의 본관 캠퍼스까지는 걸어서 5분정도, 문학부의
캠퍼스는 창문만 열어도 보일정도였다. 이공학부의 캠퍼스도 모교인 도야마 고등학교의 맞
은 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수학과는 거리가 먼 내가 이공학부의 위치까지 고려에 넣을 필요
는 없었지만, 이렇게 가까우면 친근감 또한 솟아나는 법이다. 다른 대학에 가게되면 또다시
이사를 가야 하지만 집만 나서면 보이는 와세다 대학. 그러나 가까운 대학에 들어가기가 왜
그리도 멀고 험했는지....... 학원에서 처음 치른 모의고사 채점 결과를 확인한 나는 그만 입
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지망하는 5학부 가운데 4학부가 E판정. 나머지 하나도 D판정
이었다. ‘재고가 필요’하다고 씌어진 회신용지를 보고는‘도대체 어쩔셈이야, 이 성적으로
와세다 대학이 가당키나 해?’라며 자책했다. 성적이 안좋은 줄은 알았지만 내 실력이 알파
벳 E와 D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이 되는 것을 보고는 약이 오르다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내가 정말 와세다 대학에 입학 할 수 있을까.
나만의 공부방법
내가 공부하는 스타일은 남들과는 좀 달랐다. 재수생이라면 모두들 새벽 두세 시까지는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연상하겠지만 난 밤 10시만 넘으면 잠자리에 들었다. 재수생 맞냐
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체력이 달리는 나는 수면이 부족하면, 다음날 컨디션이 엉망이 되
고 만다. 그래서 10시만 넘으면 무조건 잠자리에 들었다. 이유는 또 한가지 있었다. 집에서
는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집에 들어가면 만사가 귀찮아지기도 했지만, 무엇보
다 내 방엔 책상이 없었다. 침대, 화장실, 책장으로 이미 꽉 차버린 내 방에 책상을 둘 공간
이 없었던 것이다. 부모님께서 텔레비젼을 보시는 거실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산만한
분위기 때문에 책이 머릿속에 들어올리 없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아예 일찍 자버렸다. 그
대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늦어도 6시반이면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가급적 빨리 학원
으로 가서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자습실에서 공부를 했다. 실은 이곳이 내겐 ‘아주 특별
한’곳이었다. 왜냐하면 원래의 자습실은 본관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용하기
가 힘들었다. 그래서 학원에서는 신관 1층에있는 작은 교실을 ‘오토용 자습실’로 만들어
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나 혼자 있었기 때문에 집중할 수 있었고 최상의 컨디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마
치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런 식으로 공부에 집
중했고 집에 돌아와선 아버지와 프로야구 중계를 보며 좀 쉬다가, 10시가 넘으면 잠드는 생
활을 계속했다. 주변에선 ‘그야말로 마이 페이스구만’하며 웃었지만, 나는 그말이 칭찬이
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험과
목은 국어, 국사, 영어였다. 국어는 어느 정도 자신있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
기로 했다. 국사는 고등학교 때 유일하게 성적이 좋았던 과목이라 후반기에 접어들어 집중
적으로 해도 문제 없다는 계산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필사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어야 하는
영어. 나의 영어 실력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빨간 불이었다.
여름방학 때 영어만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때만큼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열심히 공
부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결코 영어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평소에 노력하는 성실한 학생
들은 결코 나를 따라하지 말도록!) 매일 10시간 이상은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가을이 되어
다시 ‘마이 페이스’생활로 돌아갔지만, 여름방학의 효과는 눈이 휘둥거레질 정도로 좋았
다. 거의 바닥에서 헤매던 성적이 쑥쑥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9월무렵에는 중간 정도하더니
겨울이 되자 상위권 10등안에 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합격할 수 있겠다’고 마음을 놓
은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지망학교 모의고사에서는 여전히 E판정과 D판정이었다. 간혹,
‘이번엔 시험을 잘 본 것 같은데’라며 기대도 해보지만, 기껏해야 C판정이었을 뿐이다.
내 실력이 늘기 시작한 것은 분명했지만, 와세다 대학에 합격 할 정도의 수준은 아직도 멀
었다. 과연 본고사 때까지 실력을 더 키울 수가 있을까. 그런 초조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
니지만, ‘아직 몇 달 남았다’며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변함없는 마이 페이스를 무너뜨리
지 않으며 공부를 게속했다.
오늘의 운세
1월 15일. 사람들은 성인식을 준비하느라 난리들이지만 수험생은 이 날 ‘본고사’를 치
러야 하기 때문에 성인식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관계가 없다. 와세다 대학만을 지원한
나는 본고사를 치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실린 문제를 풀어 보기로 했다. 물론 반은 재미
삼아 풀어 본 문제였다. '차라리 풀어 보지 말걸’1시간 뒤 후회하는 마음에 사로 잡혔다.
90점이 되지 않으면 대학진학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그 시험문제, 내가 가장 자신있어 하던
국사가 70점밖에 되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에 영어와 국어는 풀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걱정하는 부모님께 ‘괜찮아요, 본고사와 와세다 대학의 국사 문제는 출제 경향이 많이 다
르니까요’라며 안심은 시켜 드렸지만 그때 내 얼굴은 분명 핏기가 싹 가셔져 있었을 것이
다. 2월 1일. 이때부터 주요 사립대학의 입학시험이 시작된다. 어느덧 입시 시즌이 찾아온
것이다. 나도 긴장감에 휩싸인다. 2, 3주 지나자 몇명의 친구들로부터 무슨무슨 대학에 합격
했다며 기뻐하는 전화를 받았다. 아직 입학시험조차 치르지 않은 나의 초조감은 극에 달했
다. 와세다 대학의 입학시험 일정은 사립대학 가운데 가장 늦었다. 마음을 가라 않히기 위해
와세다 대학의 과거 입시문제를 풀어본다. ‘어어?’하며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높은 점
수를 얻었다. 전체적으로 70점이상. 국사는 8,90점대였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다시 몇년 전 것까지 풀어보았지만, 점수는 여전히 높았
다. 그렇다면 혹시.....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2월 20일. 드디어 입학시험이 시작되었다. 5학
부에 지원한 나는 이제부터 닷새 동안 연속적으로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시험은 거의 하루
종일 걸리기 때문에 상당한 체력을 요구했다. 체력 면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뒤질 수밖에 없
던 나는 꿈에도 원하던 와세다 대학 입학을 위해 거의 정신력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첫
날에는 교육학부 시험. 내가 가장 자신있던 국사의 배점이 다섯 과목 중에서 가장 높았기
때문에 국사 시험만 잘보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해프닝이 벌어진다.
둘째시간이 되자 갑자기 소변이 마려운 것이다. 예상보다 추운 날씨와 긴장감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참아 본다. 보통사람이면 시험이 끝난 다음 화장실에 다녀오면 되지만, 난 혼자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간신히 참아 가면서 셋째 시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
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나중에는 온몸을 비비 꼬아야 했다. 게다가 이번 시험과목은
국어. 암기하고 있던 내용을 시험지에 옮겨 쓰면 되는 국사 시험과는 달리 독해력과 사고력
이 필요한 시험이다. 그런데 내 머리는 온통 화장실 생각뿐으로 필자가 뭘 주장하는지 파악
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끝났다. 1년간 열심히 해 온 공부.
그 모든 것이 결국 ‘오줌’에 지고 말았다. 3월 1일. 합격자 발표 첫날. 이 날은 ‘문제
의’ 교육학부와, 최대의 난관이라고 알려진 정경학부. 두 군데 모두 가능성이 낮았다. 며칠
전에 몇몇 학원에서 나눠 준 모범답안을 보고 채점을 해보니, 커트라인에 닿을락말락 했다.
혹시.....기대를 가져 봤지만 집에서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장실에 가
고 싶어서 제대로 시험을 치르지 못했던 교육학부와, 사립대학교 문과계열 학부 중에서 최
대의 난관이라고 일컬어지는 정경학부가 아니던가.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속으
로 오는 정도는 자신이 있었기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지만 부모님은 달랐다.
합격여부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고 어떻게 하면 풀이 죽어 있을 나를 상처받지 않도록
위로 해 줄까 고민하고 계셨기 때문에 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더구나 아침
TV에서 방송해 준 ‘별자리로 본 오늘의 운세’가 불안해하는 부모님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오늘의 내 별자리(양자리) 운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할 운세.’평소 별
자리 따위는 믿지 않던 부모님이셨지만 그날만큼은 완전히 포기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주
룩주룩 빗발이 거셌다. 눈물의 비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발표장으로 갔다. 5분도 안되는
거리. 별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도착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때도 어머니께서 다녀오
셨기 때문에, ‘합격자 발표’를 직접 체험하기는 처음이었다. 텔레비젼에서 보았던 것처럼
인파를 헤치고 게시판 앞으로 나아가......이런 식의 광경을 상상했던 나는 그만 실망하고 말
았다. 헤쳐나갈 만큼의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녀석들하고 난 근본적으로 와세다 대
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달라!’ 터무니없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선 정경학부의 게
시판으로 향했다.‘4664, 4664, 4664.......’수험번호를 입 속으로 되뇌어 가면서 게시판을 죽
훑어 본다. 어, 어라, 이상한데. 몇 번씩이나 확인해도 틀림없다. 무슨 까닭인지 게시판에는
4664라는 네 자리 숫자가 표시 되어 있었다. 혹시 내 번호가 6446이었나? 의아한 마음으로
수험표를 끄집어내 다시 확인하지만, 수험표에는 분명히 4664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합격한
것이다. 와세다 대학에, 바로 내가!! 믿을 수 없었다. 꿈만 같았다.
설마 합격하리라고는 게다가 지원한 모든 학부에. 어떻게 해서라도 와세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거기서 무얼 공부할까에 대해선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 학과 선택에
고민을 해야 할 만큼 많은 학부에 합격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 내가 학과 선택 문
제로 사치스러운 고민을 했다. 1개월 뒤의 입학식. 나는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정치학과의
신입생 자리에 서 있었다.
새내기 시절
건방진 신입생들
9 6년도 와세다 대학 입학식은 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열렸다. 입학식 날 캠퍼스는 상상
을 초월하는 인파로 넘쳤다. 1만 명에 가까운 신입생이 모였을 뿐 아니라, 신입생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기다리는 선배들의 수도 엄청났다. 물론 자신들의 동아리에 가입시키기 위해서
였다. 고등학교 입학 때도 그런 열기에 시달린 경험이 있었지만,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
다. 캠퍼스에 들어서서 열 발자국만 걸어도 각 동아리의 선전지가 100장 가까이 쌓일 정도
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란스러움과 멀리 떨어진 이방인었다. ‘우리들’이란 고등학교
시절의 미식축구부 동료들을 말한다. 약속이나 한 듯이 사이 좋게 1년 재수를 하더니 와세
다 대학에 나란히 입학했다. 엄청난 인파속에서도 머리 한 두 개 만큼은 남보다 높게 떠다
니는 거대한 료, 늘 대장을 맡았던 탓인지 노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리, 검은색 정자을 입
고 다녀 ‘마피아’라는 별명이 붙은 가게,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나. 그런 모습으로
어디 정장이 어울리겠냐며 친구들이 놀려댈 정도로 나는 머리를 기르고 다녔다. 겉모습들이
이 모양이니 선배들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내가 선배라도 이런 녀석들이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면 말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교정을 함께 걷던 가게가 볼멘소리로
묻는다.“방금 지나간 썬-배 말이야, 왜 선전지를 주려다 내 얼굴을 보더니 그냥 가버리
냐?”"당연하지. 네놈의 눈매가 얼마나 고약한데.”“지당하신 말씀.”“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내 눈이 뭐 어떻다고?”
우리에게 신입생의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지방에서 갓 올라온 녀석은 한눈에도
티가 났다. 선배들이 나누어준 선전지를 한 아름 껴안고는 조심스럽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
는 모습이 딱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4년전부터 다카다노바바를 휘젓고 다닌 우리들에겐
와세다 대학이 안방보다 훤하다. 그러니 긴장한다면 오히려 더 이상해 보일 수밖에. 어리벙
벙한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불량기를 물씬 풍기는 덩치 큰 대학 새내기들. 과연 그들
앞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어를 위해서라면 별로 적극적인 가입 권유를 받지
못한 나는 직접 흥미있는 동아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신입생들이 반 강제적으로 끌려와 듣
고 있는 따분한 설명회에 끼어 들어 ‘좀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라고 했다가 단번에 그
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껴야 했다.
내 친구들은 대학에서도 미식축구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도야마 고등학교 출신들이 기둥
역할을 하는 ‘와세다 레불스’는 관동에서는 상대할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했다. 고등학교
시절 못 다 이룬 ‘관동제패’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강팀이었다. 그러나 나는 레불스에 가
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미련이 없을 만큼 팀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는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활동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미식축구를 그만두
고 응원이나 열심히 하기로 했다. 2만 개, 혹은 3만 개라고 알려진 와세다 대학의 동아리.
그 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ESS였다. ‘English Speaking Society'의 약자로서 영어실력
을 쌓아 두고 싶었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가입하기도 했지만, 잔소리라
고는 모르시던 아버지가 ’영어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해둬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
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친구와 함께 ESS의 설명회에 참석한 나는 얼이 빠지
고 말았다. 400명은 족히 들어감직한 강의실에 학생들이 반 이상이나 되는 회원이 가입한다
고 한다. 그뿐 아니었다. ESS는 활동이 빡빡하기로도 유명했다. 동아리에 가입하던 첫날의
일이다. ‘야, 이것 받아라’라며 영어가 가득 씌어져 있는 책자를 나눠 주었다. ‘뭐예
요?’하고 물었더니 선배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응, 이달말에 열리는 웅변대회 교재
야’라고 말한다.‘??’ 웅변대회라면 각자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이 동아
리의 웅변대회는 참가자 전원이 똑같은 내용으로 경쟁을 벌인다고 한다. 이번 타이틀은
‘국민의, 국민에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링컨의 유명한 연설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화장
실에 앉아서도 ‘피플, 피플’하며 살짝 맛이 간사람처럼 중얼거려야 했다. 빌어먹을, 입시
공부가 끝났다고 좋아했더니 이게 무슨 꼴이람.
결승전 진출
교재는 마치 악보를 연상시켰다. 여기는 강조, 여기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소화, 여기는
천천히 열정을 담아, 라는 등등의 표시가 잔뜩 들어 있었다. 모두 같은 내용으로 웅변을 해
야 했으므로 영어 발음은 물론이고얼마나 힘이 있고 웅대한가, 얼마나 유창한다, 억양은 얼
마나 정확한가에 따라 승패가 결정났다. 얼마나 당당하게 하는가도 물론 중요한 평가 항목
중의 하나였다. 모두들 기대하시라. 당당한 태도라면 이 몸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발음이야
좀 서툴겠지만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 만큼은 자신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학생회의 임
원으로 일했고,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도 졸업생 대표로서 답사를 읽지 않았던가! 긴장의
‘ㄱ’자도 느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목표는 파이널리스트. 파이널
리스트란 본선 진출자를 말한다. 200명 전후의 신입생이 모두 참가해 웅변을 했다가는 날이
저물고 만다. 그래서 본선이 열리기 1주일 전부터 상급생을 심사위원으로 모시고 예선을 펼
친다. 이때 뽑힌 열 사람의 파이널리스트 만이 본선에 진출하여 청중 앞에서 웅변을 할 수
있다. 200명 중에서 남자가 100명이라 가정했을 때, 파이널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10대 1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외국에서 살다 온 학생들도 많았기 때문에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예선은 3학년 선배들의 동아리방에서 치렀다. 예선을 통과한 학생들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다. 벌써 여덟 명째 호명했지만 내 이름은 없었다.
역시나 하고 고개를 떨구려 할 때 ‘오토다께, 신주쿠 홈’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주쿠 홈
이란 회원 수가 워낙 많아서 지역별로 만들어진 일종의 소모임 이름이다. 평소에는 소모임
별로 활동하지만, 이번처럼 대회가 열리면 모든 소모임이 명예를 걸고 실력을 겨룬다. 나는
신주쿠에 살았기 때문에 ‘신주쿠 홈’소속이었다. 내 이름이 불리자 동료들이 환호성을 지
르며 발을 굴렀다. 마치 자신들이 뽑힌 듯이 기뻐했다. “오토, 본선에서도 잘해야 돼.”“꼭
응원하러 갈게.”따뜻한 격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잘할 수 있을까?
외국에서 살다 온 실력자들과 당당한 태도만으로 뽑힌 나는 하늘과 땅 차이. 청중들 앞에서
망신이나 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
트로피를 바라보며
본선에 출전하는 파이널리스트는 정장을 입어야 했다. 게다가 장소는 강의실이 아니라 구
민회관을 빌려서 개최한다고 했다. 예선에서는 상급생이 심사위원을 맡았지만 본선에서는
외국인들로 구성된 심사위원이었다. 한마디로 장난이 아니었다.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고 발
음 연습에 몰두했다. 일본에는 없는 ‘V' 발음은 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특히 신경
을 썼다. 'L' 과 'R' 의 차이도 어려웠고, 'th''에 이르면 아무리 애를 써도 공기 새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이래서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내 차례는 오후로 잡혔다. 오전에 출
전한 파이널리스트들은 예상대로 대단한 실력을 자랑했다. 말 그대로 ‘영어’를 구사했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혼자서 중얼중얼 연습해 보았지만
그래도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천하의 오토가 긴장을 하다니 별일이군.’일본어로 웅변을
하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팔자에도 없는 영어라니? 고등학교 시절에도
형편없던 영어점수가 아니던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영어실력의 향상’이라는
당초의 목표는 온데간데 없고 한번 부딪쳐 보자는 오기가 치밀었다. 드디어 나의 등장.
“Fourscore and two years ago....." 웅변이 시작되자 대회장이 다시 조용하게 가라 앉았다.
분위기 탓이었을까. 거의 자기도취에 빠져 연설을 했다. ‘난 역시 남들 앞에 나서는 체질인
가 봐.’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였다. ‘국민의’라는 구절에 이르자 내가 마치 진짜 대
통령이라도 된 듯이 절정에 달했다.
“First Prize Mr. Ototake(우승은 오토다케군).”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청중의 시선을 한몸에 모았다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우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근사한 우승컵을 바라보자 나도 몰래 빙그레 웃음이 묻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들어온 와세다 대학. 어쩌면 기대 이상의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아는가? 엄청난 스토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인생의 목표
전환점
극적인 우승을 차지하고 두 달 뒤 나는 ESS를 그만두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마음으
로 들어간 동아리였기 때문에 4년을 꼬박 다닐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렇다고 시작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그만둘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우선 활동을 하면서 갑자기 회의가 들었다. 웅변대회가 끝나자 곧장 영어연극으로 이어졌는
데 대학 광장에서 큰 소리로 대사를 외쳐 가며 연습을 해야 했다. 나는 창피했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둘러대며 동아리에서 빠져 나왔다.
두 번째는 다른 동아리 활동이 바빠졌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것이 진짜 이유였다. 내가 가
입한 또 하나의 동아리는 아이젝(AIESEC), 즉 ‘국제경제 경영 학생협회’라는 학생단체였
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취직과 관련된 세미나를 열거나 해외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
도록 주선해 주는 것이 주요한 활동이었다. 나는 입학 당시부터 이 동아리에 중심을 두었고,
여름에 열리는 큰 행사가 다가오자 준비에 바빠진 것이다.‘빈티지(Vintage) 96’이라는 여
름 행사는 선배들이 거의 한해 동안 준비해 온 것이었다.
100만원 단위로 움직이는 규모가 큰 행사였다. 그러나 학생이 무슨 돈이 있는가.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한 그렇게 큰 돈을 손에 넣을 길은 없다. 방법은 한 가지, 스폰서를 구해야
했다. 먼저 전화로 내용을 설명하고 방문 일정을 잡는다. 냉정하게 거절당하는 일도 많았다.
기업을 방문할 때는 정장을 차려입고 이름표까지 달고 가야 했다. 아이젝이란 어떤 단체인
가, 이번 행사는 무엇을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 등을 설명하면서 상대가 관심있는 낌새
를 보이면 돈 이야기로 넘어간다. 자금을 달라고 터놓고 부탁하는 것이다. 신선해야 할 학생
시절에 왜 사회인 흉내를 내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섭외’라 불리는 이 활동은 아
주 매력적이었다. 행사 내용도 상당히 의미 깊었지만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비즈니스
를 계기로 라이프 디자인, 다시 말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자는 것이 행사의 주
제였다. 행사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해외 학생들을 초청해 요요기에 있는 올림픽센터에서
치러졌다. 1주일에 걸친 장기 세미나였다.
낮에는 세계의 비즈니스에 대해서 토론하거나 일본의 비즈니스 현장을 견학했고 밤이 되
면 떠들썩하고 분주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국경을 뛰어넘은 큰 잔치가 열렸다. 각국에서 가
져온 먹거리와 술로 푸짐하고 시끌벅적한 파티가 열렸다. 날마다 서너 시간밖에 못 자는 생
활의 연속이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은 그저 즐겁고 기억에 오래 남을 추억거리로만 여
겼으나 세미나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나의 사고에 변화가 몰려왔다. 내면으로부터 ‘빈티
지 96’이 의도했던 본 목적이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긴긴 밤 잠 못 이루며 끝없는 생각을 더듬고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로부터 시작된
질문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그리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겨 온 것은 돈과 지위, 명예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변호사를 꿈꾸었던 것도 ‘약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지위와 수입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젝에 매력을 느낀 것도 국제 교류가
아니라 비즈니스 때문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싶다’는 생
각보다 비즈니스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다는 야망이 훨씬 컸다.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비뚤어진 나의 가치관을 직시하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
다. ‘그렇게 살기는 싫다!’ 아무리 돈과 지위, 명예가 있다 해도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
을 받는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인생이 아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답은 비교적
간단했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존재가 되어 줄 수 있는가. 그리고 그들을 얼마나 많이 이해해 줄 수 있는가... 어려
운 줄 알지만 이런 것들을 실천할 수 있다면 ‘내 인생은 행복하다’고 가슴을 쫙 펴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살든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다름아닌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할 나’란 도대체 어떤 존재
인가?‘사람은 외 살아야 하는가’라는 철학적이고 어려운 문제는 질색이었던 내가 새삼스
럽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문제로 고민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장애인’이라는 세
글자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남의 눈에는 당연히 장애인으로 보이겠
지만 정작 본인인 나는 그 동안 ‘장애’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해결해 왔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은 부모님과 친구들이 ‘해주는’것이 아니
라 자연스럽게 ‘거들어’주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왕따를 당한 것도 없고, 제약을 받은
기억도 별로 없었다. ‘나도 팔다리가 멀쩡한 정상인이다’라고 억지를 부린 적도 없었지만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굳이 자각할 기회도 그리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어려서부터 나를 돌보던 의사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대개 이런
장애를 가진 아이는 네다섯 살이 되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왜
나는 팔다리가 없지요?’라고 물어 오는데 오토는 그런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군요.” 어머
니는 그 말이 ‘댁의 아드님은 좀 유별나군요’라는 뜻으로 들려서 왠지 얼굴이 뜨거웠다고
하셨다. 사실이 그랬다. 그런 질문이나 의문을 품은 기억이 없다.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나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 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고민을 하는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장애’라는 단
어. 왜 나는 장애인일까. 많은 사람이 정상인으로 태어나는데, 왜 나는 장애를 지닌 채 태어
났을까. 거기에는 혹시 어떤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은 이미 여기에까지 미쳐 있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반면에, 장애인이기 때문에 해낼 수 있는 일도 있
다. 예를 들어, 정치가나 관료가 ‘장애인을 위해 복지정책이 필요합니다!’라고 외치는 것
보다 내가 계단 앞에 서서 ‘우리에게는 이 계단 한 칸이 그 무엇보다도 높은 벽입니다!’
라고 호소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다. 아주 사소한 예에 불과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
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나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이런 몸으
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고민의 실마리가 보이자 이번에는 ‘그렇다면 나는 뭘 하고
있었지?“라는 생각이 잇따른다. 정말 그런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면 그 동안 나는 얼마나
안이한 삶을 살아왔는가?라는 자책이 들었다.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방치해
두다니.... 장애가 특권의식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오토다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
까? 이 물음의 답을 찾아서 실천하는 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내 인생
의 답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이 준 기회
우연한 재회
한번은 일렁인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놀랍게도 다음날부터 그 흐름에 휩쓸렸다. 시
기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것을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전율조차 느껴진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어 그만 늦잠을 잤다. 자구 감기는 눈을 비비며
첫 수업을 들으러 갔다. 그때 ‘이봐,오토다케’하고 부르는 소리가 드렸다. 뒤돌아보니 요
코우치 씨였다. 정말 우연한 재회였다. 요코우치 씨를 만난 것은 두 달 전이었다. 내가 아이
젝 활동을 하면서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방문했던 ‘도쿄 콜로니’라는 기업의 담당자가 바
로 그였다. 이 회사는 일할 의지와 능력은 있지만 일반기업에 취직하기 어려운 중증의 장애
인을 고용해서 인쇄와 컴퓨터 업무를 맡김으로써 자립을 돕는 사회복지 법인이었다. 그러
나 이익이 별로 남지 않아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임금마저 주기 힘든 형편이었다. 그런 회
사에 행사자금을 대 달라고 갔으니 우리가 얼마나 철부지이고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는
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이다. 그러나 요코우치 씨는 우리를 나무라지 않고
복지, 사회, 회사, 컴퓨터 등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나중에는 사무실과 인쇄공장까
지 안내해 주었다. 단 하루였지만 성실하고 사려 깊은 인품이 저절로 배어나오는 그에게 강
한 인상을 받았다. 요코우치 씨가 그날 와세다 대학에 온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96년부터 도쿄 23개 구에 있는 점포 사업자의 쓰레기 배출이 유료로 전환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와세다의 상인회에서는 ‘쓰레기를 배출한다고 돈을 내라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
냐’며 쓰레기 재활용운동을 폈다. 그해 여름에 있었던 ‘에코 서머 페스티벌 인 와세다
(Echo Summer Festival in Waseda)'라는 행사를 통해 ’생명의 거리 만들기‘ 운동은 전
개 되었다.‘에코 서머 페스티벌’의 탄생 배경은 퍽 재미있다. 와세다 대학의 본부인 서 와
세다 캠퍼스에는 평소 3만 명이상의 학생들이 들끓지만 여름방학이 되면 절반 이하로 떨어
지기 때문에 그 시기에 문을 닫는 상점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거리가 너무 썰렁해서 남
은 사람들끼리라도 ‘뭔가 해보자’는 의견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에코 서머 페스티벌이
었다. 행사 내용으로 초등학생의 합창대회 등 여러 가지 안이 나왔지만, 최종적으로 ‘생명
의 거리 만들기’로 결말이 났다. 그 배경에 사업자 쓰레기 배출의 유료화가 놓여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후원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신주쿠 구는 ‘전면적으로 협력하겠
다’고 약속했고, 와세다 대학은 오쿠마 강당의 광장을 빌려주었다. 대학 시설을 지역주민에
게 무료로 빌려준 것은 창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야기는 계속 진행된다. ‘환경을
주제로 한 행사장에서 쓰레기가 잔뜩 나왔다가는 망신만 당한다’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에
행사장에 ‘깡통 회수기’등을 설치해서 ‘쓰레기 제로’를 달성하기로 했다. 결과도 좋았
다. 행사가 열리는 날은 날씨가 나빠서 주스나 맥주가 200캔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모여진
깡통 수는 1,300개였다. 페트병은 130개나 넘게 모였다.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행사 실적
을 NHK-TV등 언론까지 나서서 다루었다. 첫 시도치고는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어
떤 대학 관계자가 ‘학생도 없는 여름방학에 해놓고 성공이다 아니다를 말할 수 있겠냐’며
꼬집었다. 그래서 캠퍼스가 학생들로 넘칠 때 다시 한 번 도전하기로 했다. 그날 요코우치
씨가 와세다 대학을 찾은 이유는 이 행사를 개인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격려차 들른 것이었
다.
만남
회사업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이런 활동을 하고 있으니 요코우치 씨는 역시 대단하
다고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인사를 건넨다. 그의 이름은
기타니였는데, 와세다 지구를 관할하는 신주쿠 구청소사무소의 소장이었다. 기타니 씨도
‘쓰레기 제로 평상시 실험’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두 분으로부터 활동내용을 좀더 자세
하게 듣는 중에 기타니 씨의 입에서 엄청난 이야기가 나왔다. “몇 개월 동안의 과정을 통
해서 우리는 문제가 재활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네. 지진 대책과 지역교육 문
제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는 않아. 결국 모든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어야 한다는 결론이지.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거리 만들기’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다각적인 방향에서 움직일 생각이야. 그 중의 하나로 ‘마음의 장벽 없애기(barrier free)'라
는 이름 아래 장애인과 고령자에 대한 대책도 적극적으로 세워 볼 생각인데. 이것만큼은 당
사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어, 그래서 자네 힘을 꼭 빌리고 싶은데,
도와주겠나?”귀를 의심했다. ‘장애인인 나만이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결론 내린
것이 고작 어젯밤의 일이었다. 정확하게 7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느닷없이 ‘실천의
장’이 주어지다니, 이 흐름은 무엇일까, 무서운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별히 종
교를 믿는 것도 아니면서 그 순간 나는 신의 존재를 확신했다. “영광입니다.”문득 정신을
차리니 내가 대답하고 있었다. ‘마음의 장벽 없애기’란 ‘장애인과 고령자에게 장벽이 되
는 것(배리어)을 제거한다(프리)’ 는 의미다.
그 동안 이런 단어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늘이 내려 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대학생활의, 아니 내
인생의 막이 새롭게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와세다 상인회 회장 야스이 씨
였는데 무척 재미있는 분이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확실한 리더십과 강한 메시지가 담
긴 연설로 ‘생명의 거리 만들기’를 힘있게 끌어가는 중심인물이었다. 그의 유명한 ‘야스
이 어록’ 몇 가지를 소개한다. “우리 상인회에서는 ‘실패’라고 쓰고 ‘경험’이라고 읽
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패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험을 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행
정가가 아닙니다. 따라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시민의 참가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스타일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장을 만들고, 그곳에
‘행정을 참가’시키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얼핏 독특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이 표
현들은 사실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되는 말을 들으면 와세다 거리에서 어쩐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부담 없는 외모 또한 그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
다. ‘잘 빠진 남자가 만일 그런 말을 했다면 그토록 인상적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기타니
씨의 말대로 둥글둥글한 그의 모습은 아무리 초면이라도 친밀감이 들게 했다. 활동도 재미
있었을 뿐 아니라 야스이라는 매력적인 사람 덕분에 ‘생명의 거리 만들기’는 상인회말고
도 엄청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앞에서 말한 가타니 씨와 요코우치 씨를 비롯해서 공무원,
기업가와 회사원, 대학교수와 학생, 언론인 등 각 분야에서 일꾼들이 모여들었다. 이쯤 되고
보니 기타니 씨가 ‘수호전의 양산박’이라고 평할 만도 했다. 일꾼들이 많이 모이자 곤란
한 일도 생겼다. 과연 어떻게 의견을 교환할 것인가? 전원이 회의에 참석한 날이 하루도 없
었다. 관청과 기업의 업무가 7시에서 8시 사이에 끝난다고 해서 9시까지 영업하는 상점은
10시가 넘지 않으면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여기에 교수와 학생의 일정까지 고려하면 전체가
모임을 가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인터넷의 전자우
편을 이용한 의견 교환이었다. 다시 컴퓨터와 만나게 되었다. 오카 선생님의 업무를 도왔던
초등학교 시절과 미식축구부에서 상대 팀의 분석을 맡았던 고등학교 시절에 이어 세 번째
만남이다. 이번에는 인터넷이라는 미지의 세계와 맞닥뜨렸지만 무척 재미있었다. 일반적으로
전자우편의 세계에서는 개개인이 ‘주소(address)'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여기로 우편을 보낸
다. 그러나 우리가 채택한 것은 한걸음 더 진보한 ’메일링 리스트‘라는 방식이었다.
메일링 리스트는 리사이클 네트(Recyle-net)의 약자를 따서 ’리네트(RENET)'라고 이름
붙이고 주소로 정하였다. 회의 내용을 메일로 보내면 리네트에 등록된 모든 회원은 그것을
받아볼 수 있고 또 누구든 회신을 보내면 그 내용이 다시 전원에게 동시에 전달되었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해외와의 통신이었다.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해외에서는 어떻
게 대응하고 있습니까?’하고 문제제기를 하면 런던과 뉴욕, 밴쿠버 등지의 리네트 회원들
이 각국의 사정을 전자우편으로 알려 온다. 질문과 응답이 불과 몇 초 망에 이루어지는 것
을 보고 인터넷이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하는 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장애가 있
지만 다행히도 마음껏 밖을 나돌아다닌다. 그러나 육체적, 정신적 이유 때문에 좀처럼 집 밖
으로 나가지 못하는 장애인도 많다. 그런 분들에게 나는 컴퓨터를 권하고 싶다. 집안에 앉아
서 전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인터넷이 그들에게 어떤 획기적인 계기가 되어 줄 것이기 때
문이다. 컴퓨터와의 세 번째 만남,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무기와 사귀면서 나의 활동무대는
마침내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되었다.
생명의 거리 만들기
케네디가 남긴 것
‘생명의 거리 만들기’ 실행위원회에는 여섯 개의 분과가 있었다. 첨단기기와 독특한 발
상으로 와세다 특유의 재활용 시스템을 추구하고자 하는 재활용 분과, ‘거리의 장애물’
‘대학의 장애물’을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의 장벽 없애기 분과, ‘우리의 거리는 우리가
지킨다’를 구호로 지진대책 분과, 우리 활동의 생명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터넷의 확충
과 발전에 힘쓰는 정보 분과, 와세다의 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
할 수 있도록 행사를 개최하는 지역교육 분과, 재활용 운동을 중심으로 영세상인과 지역상
인회의 활성화를 꾀하는 상인 분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2회 ‘생명의 거리 만들기’는 지
난해와는 달리 재활용이라는 주제만으로 각 분과가 독자적인 분야에서 행사를 열기로 했다.
지진대책 분과는 지진을 체험하는 행사를 벌였고, 지역소방대는 구조 시범을 선보였다. 인터
넷을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는 코너에서는 아이들이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고, 뜨거운 햇살
이 내리쬐는 가운데 열린 자유시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와 요코우치 씨가 맡
은 ‘어린이를 위한 휠체어 체험’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와세다 거리를돌아다녀본 아이들이
‘휠체어 타기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라며 한결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피날레는 신주쿠 교향악단의 ‘여름밤의 음악회’로 장식 하기로 했다.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 행사에는 실행 위원장인 야스이 씨의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 일본을 방문한 로버트 케네디가 오쿠마 강당에서 연설을 한 일이 있었다. ‘미제 타도’
라는 구호가 드높던 시절, 케네디가 강연을 마치고 오쿠마 강당을 나서자 학생들이 케네디
를 에워싸고 ‘양키 고 홈, 양키 고 홈’을 외쳤다. ‘무슨 일이 일어나겠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야스이 소년은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했다. 케네디는 ‘내가 아는 노
래가 하나 있다’며 마이크를 잡고 와세다 대학의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
게도 그때까지 욕설을 퍼붓던 학생들이 케네디를 따라 교가를 불렀다. 야스이 소년은 온몸
에 소름이 돋았다. 사상과 신념과 철학을 뛰어넘어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바로 음악임을 그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2회 ‘생명의 거리 만들기’는 신주쿠 교향악단
의 연주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막을 내리고 있었다. 와세다 거리를 오가는 모든 이의 마음속
에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마음의 장벽이 없는 학교
내가 생명의 거리 만들기에 관여한 것은 제2회부터였다. 홍보물의 제작, ‘30년 후에는 이
거리에서 장애물이 없어지기’를 기원하며 만든 어린이를 위한 휠체어 체험의 지휘, 회원들
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토론을 마무리하는 등 맡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중에
서도 가장 큰 성과는 ‘마음의 장벽 없애기’제안서의 작성이었다. ‘열린 대학’을 추구하
는 와세다 대학이었지만, 장애인에게 열려 있는 문은 아직도 높고 험했다. 와세다의 상징인
오쿠마 강당은 휠체어를 탄 채로 들어갈 수 없었고, 엘리베이터와 휠체어 운반기를 설치한
건물도 손꼽을 정도로 적었다. 장애 학생이 쾌적한 캠퍼스 생활을 보낼 수 있는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생명의 거리 만들기’개막 행사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서를 낭독했
다.“우리 ‘생명의 거리 만들기 실행위원회’는 작년의 쓰레기 제로 실험을 계기로, 와세다
를 생명의 거리로 만들자는 취지 아래 만들어진 단체로서, 현재는 ‘환경과 공생하는 거
리’를 추구하며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주민과 상점주인 그리고 대학, 기업, 관청, 학생
등 와세다의 거리에 애착을 갖고, ‘생명의 거리 만들기’에 관심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마음의 장벽 없애기’란
말이 있습니다. 마음의 장벽 없애기란 ‘함께 살아갈 수 있는’거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서, 이를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와세다
대학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못한 실정입니다. 전통을 자랑하는 본교에는 휠체어
를 탄 채 들어가기조차 힘든 건물도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걸을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학생에게 그런 건물은 차갑고 딱딱
한 장애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오쿠시마 총장님도 말씀하셨듯이 와세다 대학은
‘열린 대학’이라는 빛나는 이념을 갖고 있습니다. 진정한 ‘열린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장애인도 자유롭게 배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려면
당연히 비용과 시간이 들 것입니다. 또한 기술적으로 검토해야 할 점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
만 ‘마음의 장벽 없애기’ 운동에 뒤따르는 여러 문제를 포함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리
를 만드는 데 협조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와세다 대학이 ‘장애인에게도 열린
대학’이 되면 다른 대학도 앞다투어 따라올 것이고, 마음의 장벽 없애기를 향한 사회의 움
직임도 드높아질 것입니다.
또한 우리 와세다에 사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긍지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폭탄 테러로 몸
이 자유롭지 못했던 창설자 오쿠마 시게노부 선생님도 마음의 장벽 없애기를 바라실 것입니
다. 앞으로 대학과 지역이 하나가 되어 21세기를 향한 ‘생명의 거리 만들기’를 함께 추진
합시다.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이 제안서는 해외 출장중인 총장 대신 참석한 부총장에게
전달되었다. 내용이 심각했던 만큼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내가 건넨 농담으로 박수가 터져나
오기 전까지는, “부총장님, 친구들 하는 말이 장애설비가 제대로 갖춰지면 제가 땡땡이 칠
수 있는 시절도 이젠 끝이라는데요.” 부총장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오토다케 군이 땡땡
이 치는 일이 없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네.” 지켜보던 사람들로부터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후 부총장과 내가 나눈 대화는 단순한 농담으로 그치지 않고 확실하게 실현되었
다. 98년 봄에 완공된 신축건물은 엘리베이터와 휠체어 운반기를 완비한 ‘마음의 장벽이
없는 건물’이 되었고, 캠퍼스 곳곳에 있는 턱에도 판자를 깔아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우리의 활동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결실을 맺자 가슴 뿌듯한 자부심이 넘쳤다.
자,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할까?
다가서는 관심들
미니 사인회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와세다를 중심으로 한 ‘마음의 장벽 없애
기’ 운동과 학교활동을 소개하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강연요청이 들어
왔다.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모두 받아들였지만, 처음
에는 익숙하지 못해 당황한 적도 많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중간고사가 끝나는 다음날에 강
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요청한 곳이 시즈오카 현에 있는 단과대
학이었다. 단과대학은 곧 ‘여학생들이 많은 곳’이라는 엉큼한 생각으로 덜컥 허락하고 말
았다. 그런데 막상 강연장에 도착하자 단과대 여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역주민들에게도
강연회를 개방하는 바람에 맨 앞자리를 가득 메운 것은 아주머니들이었다. 무사히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한 사람이 달려와 ‘선생님!’하고 불렀다. 나를 초청하신 교수님을 부
르는 거겠지 하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교수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지금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셨나요?’ 얼굴을 붉히며 묻자, ‘네, 사인 좀 해주세요’하
며 수첩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당황해서 ‘제가 무슨 사인...’하고 거절했지만,
‘성함하고 날짜를 적어 주시면 소중하게 간직할게요’하고 고집을 피우는 데 도리가 없었
다. 사인펜으로 ‘오토다케 히로타다 97.7.15’라고 적고, ‘이제 됐지요?’하고 고개를 치켜
든 나는 잠시 동안 얼얼해지고 말았다. 그녀 뒤로 10명 가까운 아주머니들이 줄지어 서 있
지 않은가. 보통사람의 팔꿈치까지도 안되는 짧은 팔과 뺨 사이엔 펜을 끼우고 글씨를 쓰는
모습이 신기했겠지만, 인기스타도 유명인도 아닌 내가 ‘미니 사인회’를 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강연을 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것은 역시 어린이들과의 만남
이었다. 30분에서 1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눈 뒤에 아이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질문은 언제나 놀라웠다. 소박하기 때문인지 톡톡 튀는 관점이 재미있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남자아이 하나가 질문을 한다. ‘오토다케 형은 안경을 끼고
있는데, 어떻게 끼고 벗고 합니까?’
나는 짧은 두 팔에 안경의 양끝을 끼워서 안경을 벗고 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면서 ‘우와, 대단하다’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안경 벗은 내 모습이
이상하지는 않겠지’속으로 생각하며 안경을 다시 끼고 있을 때 저쪽에서 ‘와, 정말 잘생
겼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보고 잘생겼다니,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날 급식으로 나
온 젤리를 그 녀석에게 주었다. 초등학생이지만 붙임성이 대단한 아이였다. 니시타마 군의
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이들의 질문이 예상보다 많아서 시간 내에 그 질문들을 전
부 받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묻고 싶
은 것이 있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하고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다. 강연장을 둘러보니 남
자아이 하나가 손을 들었다.“이와사키 군 말하세요.” “저.....” “네, 궁금한 것이 뭔가
요?” “그룹 도리후타즈(4명의 남성으로 구성된 개그맨 그룹)가운데 누굴 제일 좋아하나
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