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만원님과 정상규님이 아르케 처치(Arche church, 원형 교회)에 게시물을 올렸습니다 |
|
 |
|
|
|
이런
말을 하면 반응이 어떨지 모르지만, 개의치 않고 말하겠다. 내가 이중표 목사님을 남달리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유가 있다. 그 분에게도 사실
문제점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분의 의도를 100분 이해하지만, 어쨌든 “헌금을 잘 하라, 임직자들은 그에 걸맞게
헌금하라, 교회에 충성하라...”는 말씀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요즘 한국교회의 치명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외형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은 지금 목사들처럼 자신의 부나 명예, 또는 교회의 외적 성장을 위해서 헌금을 강요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 다만, 신앙을 증명하는 외적인 수단으로 헌금을 비롯한 자기희생을 강조하셨다. 물론 그조차 허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교인들이 수천 명이 넘는 교회의 목회자로서 달리 교인들의 신앙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을망정 어쨌든 그 분의
치명적인 잘못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분이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나라도 앞장서서 그 분에게 “옳지 않다”고 말씀드렸을 텐데... 안타깝다.
일화를 소개한다. 누가 봐도 모범적인 신앙심을 지닌 분이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가난한 집사가 한 분 있었다. 3명의
장로를 새로 뽑으면서 이중표 목사님이 몇몇 교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개 집사가 이번에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깊은 신앙심과
겸손한 자세를 보건대 그는 우리 교회를 위해서 정말 보배 같은 사람이다. 내가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무개 집사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이번에 장로로 피택되지 못하면 다음에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말씀을 전해 듣고 교인들이
투표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5명의 후보 가운데 3 명을 뽑는 투표였는데 아무개 집사는 5등이었다. 예정했던 3명 가운데 2명이 2/3를
넘어서 장로로 피택되었지만, 예외적으로 이중표 목사님은 나머지 한 명을 더 뽑겠다며 ‘처음으로’ 재투표를 선언했다.
물론 그 분의
속마음은 아무개 집사가 당선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잠시 뒤에 재투표 결과가 나왔다. 3명이 후보자 가운데 한 명을 뽑는 투표에 아무개 집사는
이번에도 꼴찌였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2/3 이상의 득표로 선출되었기 더 이상 아무개 집사를 위해서 투표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나중에 몇몇 교인들의 입을 통해서 이중표 목사님의 뜻과 달리 아무개 집사를 뽑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집사는 너무 가난하잖아. 그렇게 가난한 사람이 장로가 되면 교회에 덕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본이 되지 않아서...”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다른 교회도 아니고 나름 한국의 ‘대표적인 영성을 지녔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목사가
목회하는 교인들의 수준조차 이 정도라는 말이다.
장로 투표를 마치고 아무개 집사가 인사를 했다. "저처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너무 큰 은혜이며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겉으로는 겸손을 말하며, 말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가난한 형제를 섬기겠다고 하면서도 ‘성공주의 기복신앙’이라는 더럽고 천박한 탐심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골수에 깊숙이
박혀있다.
지금 살아있다면 이중표 목사님이 한국교회의 참담한 실상을 보시면서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런 추악한 모습에 책임이
없지 않다며 눈물을 흘리셨을 것 같다. 그 분의 ‘진심’은 내가 잘 알고 있다. 돈에 욕심이 없었으며, 뒷돈은 고사하고 통장에 있던 아들 학비
4000만원까지 남김없이 헌금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문제는 그 분의 진심은 사라져버리고, 후임 목사들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임직자 헌금은 이중표 목사님때부터 있었던 우리 교회의 전통이었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돈이 필요해서라지만, 자신들이 ‘새로운
주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 이중표 목사님의 공은 소리 없이 지우면서 과는 열심히 부각하는 비겁한 태도다.
이중표 목사님과
후임들의 분명한 차이를 말한다. 이중표 목사님은 선교를 빙자해서 해외여행을 쏘다니시지 않았으며, 해외선교가 있을 때는 항상 교역자들에게 여행할
기회를 주셨다.
지금 목사들처럼 매년 안식년을 즐기지(?) 않았으며, 강사비로 받은 돈을 봉투도 뜯지 않은 채 사무장에게 넘겨주며
사례비보다 많은 돈을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셨다.
한 마디로 이중표 목사님은 사사로운 욕심에 끌리지 않았던 반면에
후임들은 하나 같이 개인적인 욕망에 불붙어 있다. 요컨대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말이다.
그런 것들보다 내가 이중표 목사님을
떠올리면서 새삼 감동하는 것은, 그 분은 정말로 예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 눈물을 주룩 흘리면서 종종 설교를 멈추던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 분의 진심을 안다.
자존감이 강한 그 분이 그런 식의 유치한 쇼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진정 사랑하는 자는 때로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중표
목사님은 교인들을 끔찍이 사랑하셨고, 교인을 사랑하는 그의 태도는 임직자들과 달리 빈부나 지위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임직자들에게 헌금하라고
하신 그 분의 의도는, 어차피 부자들이 대부분 임직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부자에게 당연히 헌금하라는 것이다.
반면에 몸이 아픈
교인들, 슬퍼서 우는 교인들을 대하면서 눈이 벌개지는 그 분의 모습이 너무 그립다. 목사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이 이상한가? 오히려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당신이 너무 이상할 뿐이다.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내가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치명적인 문제는 교회에 예수가
없다는 것이며, 예수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사랑이 없고, 예수의 계명인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이며, 나를 사랑하는 자라야 나를 믿는
자이니라...!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