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여행기 순담
나는 9월이 오면 이전에 네덜란드 왕도 헤이그에서 한 주간 넘게 머물었던 생각이 난다. 2006년 바로 이맘때 아내와 나는 둘째 아들과 현지에 유학중인 딸의 안내로 암스테르담 관광길에 렘브란트와 반 고흐의 기념관을 구경하면서 장로교 목사로서 워필드, 바빙크와 같이 세계3대 칼빈주의 신학자이며 근대 네덜란드를 빛낸 위대한 정치가 아브라함 카이퍼를 떠올리게 됐다.
네덜란드는 유럽 북서부의 입헌군주국으로 1517년 종교개혁 때 국교를 신교로 하고 구교의 맹주인 스페인으로부터 수많은 희생을 딛고 오랜지공이 독립을 쟁취한 나라다.
실제로 오랜지가 많이 생산되어 상당량이 유럽에 공급되고 오렌지공 가문이 왕위를 이어가 축구가 국기인 국가대표팀을 오랜지군단이라고 부른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사통팔방으로 난 시가지에는 트랩(궤도전동차)이 버스처럼 운행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각종차량과 함께 수로를 교통수단으로도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강인하고 근면하면서 세밀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내면을 보는 듯 했다. 기독교역사의 색채가 짙은 전통과 문화를 고스란히 지닌 고풍스러운 거리의 명소마다 관광객들이 장사진인데 자전거가 물결치듯 달리고 걷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이 파리나 로마보다 더 역동적으로 보였다.
일찍이 네덜란드는 선진해양농업국으로 지구촌의 화훼와 낙농업을 주도하면서 선박과 총포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였고 농기구와 가전제품 기술이 뛰어나 세계시장을 선점하여 경제기반이 튼튼하고 사회가 안정된 나라다. 나는 네덜란드장로교회가 우리나라 개신교회에 끼친 영향과 6·25 때 참전해준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헤이그 이준열사기념교회 이창기 목사님이 안내를 해주어서 자동화시스템으로 다양한 꽃들이 신속하게 모아져 금방 전 세계로 실려 나가는 암스테르담 스키폴국제공항을 둘러보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7세기 선조 때 풍랑으로 조선의 해안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세 사람이 식수를 구하려 다니다가 조선관군에 붙잡혀 남쪽 해안에서 한동안 살게 됐다고 한다. 그들의 이름은 얀 얀스 벨테브레이(Jan Janse Weltevree)와 그의 동료 드리크 하이스베르츠(Drik Gijsbertsz) 피터스 베르바스트(Jan Pieterse Verbsest)다. 이들은 일본이 네덜란드의 신기술을 받아들이던 1627년 우베를케르크(Ouwerkertsz)호에 승선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조선남쪽 해안에 좌초 되어 주민의 신고로 관헌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후일 세 사람은 조선관군이 되어 병자호란 때 하이스베르츠와 베르바스트가 전사를 하고 벨테브레이만 남아 박연이란 이름으로 개명되어 화포와 소총 기술자로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으며 살았다.
선조가 승하고 효종이 왕이 된 후 박연은 무관급제를 하고 효종대왕의 군사고문으로 조선관군에 필요로 한 신무기 개발에 많이 기여하게 됐다. 박연의 조선생활27년째가 되던 1653년 제주도 해안에 또 한척의 네덜란드 상선이 좌초되어 이 배의 항해기록서기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일행 36명이 관군에 붙잡혔다. 박연은 관군통역관으로 제주도에 내려가 하멜일행을 심문 통역할 때 “나도 27년 전에 이 나라 해안에 표착하여 식수를 구하려다 포로가 됐다. 조선의 법은 자국에 들어온 외국인을 절대로 내보지 않는다. 나는 이곳 여인과 결혼하여 관군으로 왕을 섬기고 있다”라고 자기를 알렸다.
후일 하멜이 조선을 탈출하여 쓴 표류기가 은둔의 나라를 선진유럽에 알리면서 네덜란드 북부의 드 라이프(De Lijp)에는 조선관군의 복장을 갖춘 박연의 동상이 서게 되고, 제주도에는 하멜을 기념하는 선박 조형물이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최근에는 고종의 밀사 이준 열사가 숨을 거둔 헤이그에 감리교 군목출신의 이창기목사님이 이곳 한인교회를 담임하면서 감리교단의 지원을 받아 2007년도 독립건물을 구입하여 이준열사 기념교회로 개명하였다. 이제는 이준열사 기념교회와 이준열사 기념관이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적 자긍심과 교민들의 신앙생활에 크게 기여하는 보루가 되고 있다.
또 한 가지 네덜란드는 카이로 선언을 주도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관련해 대한민국과 관계되어 있다. 루즈벨트는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유대인으로 히틀러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과 독일의 동맹국 일본에게 압제받고 있던 대한제국을 염두에 두고 카이로 선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6·25전쟁 때는 워커장군 후임으로 미8군사령관이 되어 한국에 온 벤플리트 장군역시 네덜란드인으로 우리대한민국의 열악한 군대를 현대화하고 정예화 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고 자신의 아들도 한국전선에 바쳤다.
벤플리트 장군은 제2차 대전 중 발치전투와 노르망디상륙 작전에 이어 한국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루고, 이승만대통령의 한국정부를 위해 미국 내에서 영향력 있는 일을 해내는 인사였다. 60년대 초까지도 용산에서 이태원으로 넘어가는 삼거리에는 벤플리트 장군의 동상이 서 있었고, 4성 장군으로 전역한 벤플리트 장군을 기념해 코리아소사이어이트에서는 매년 한미관계에 이바지한 인물을 찾아 상을 주고 있는데, 2010년도는 콜린파월 전미국무장관과 한국전쟁의 위대한 지휘관 백선엽 장군께서 벤플리트상을 수상했다.
네덜란드는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자국이 나치독일에게 침략을 당해봤었기에 유엔의 일원으로 지상군 보병 1개 대대와 해양국답게 구축함 1척을 참전시켰다. 네널란드의 판 호이츠 보병전투부대는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제2사단에 배속되었다. 첫 번째 횡성전투에서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기습해온 중공군에게 대대장 오우텐 중령과 수많은 장병들을 잃으면서 용전분투했다. 총 5322명이 참전하여 120명이 전사를 했는데 그 중 117명은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유엔 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화훼와 수로 등 농업선진국인 네덜란드와 교류를 하며, 올림픽보다 더 인기가 좋은 월드컵 축구를 2002년 한일 공동으로 유치 해 놓고 거스 히딩크라는 네덜란드인을 데려 왔다. 그는 우리축구를 세계4강의 반열에 세워놓은 명장이었다. 그의 영향으로 우리선수들이 유럽의 명문구단으로 속속 진출했고 요아네스 본프레, 딬 아카보드, 핌 베어백 같은 네덜란드인 감독이 계속 우리선수들을 훈련시키다 떠났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해외원정사상 최초로 16강에 오른 우리선수들과 허정무감독에게 찬사를 보내면서 히딩크에게도 감사해야 할 우리축구의 영광이 아닌가 싶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좋은 관계에 있는 네덜란드는 우리 딸이 헤이그 왕립음악학교에 유학하면서 참 좋은 일이 생겼다. 이창기 목사님의 주선과 주례로 여왕폐하가 예배드리는 교회 예배당에서 파리장로교회 이극범목사님의 축복기도를 받으며 아이슬란드에서 유학 온 청년 비르키르 페어 마태아숀(Birkir Freyr Matthiasson)과 내 딸 최경은이 결혼식을 올렸다. 학업을 모두 마치고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빅에 살면서 그곳 대학에서 아이슬란드어를 공부하는데 또 좋은 일이 있으리라 믿어진다. 늘 헤이그 이창기목사님의 후한 선대와 파리장로교회 이극범목사님께서 자비로 3일간 파리관광을 시켜주고 주일예배 설교를 하도록 배려해 주심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