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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풍암 문위세 임란실기에 실린 퇴계선생 제자명단에 노촌공(휘 윤량) 행적사항
풍암 문선생 실기 제6권
부록, 도산연원록(陶山淵源錄)
정윤량(鄭允良). 자는 원우(元佑)요 호는 노촌(魯村)이며 영천(永川)에 살았다.
덕행과 학문과 명망이 사림(士林)의 존경하는 바가 되었는데, 퇴계선생의 문 하
에서 공부하면서부터 벼슬길에 나가는 데 뜻이 없어지고 김응생(金應生) 공과
더불어 함께 서숙을 세워 영재들을가르쳤다,
또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정포은이 살던 옛 마을에 학교와 사당을 세워 문교(文
敎)를 일으키고, 모든 학교 규모와 절목은 한결같이 선생의 명령하는 바의 따르
니 이로 부터선비들 풍속이 크게 바뀌어 황금계(黃錦溪) 공이 칭 찬하기를,
<착한 것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면서 은연중에 인륜을 두터이 하고 좋은 풍
속을 이룩하는 뜻이있다>하였다.
만년에 유일(遺逸:벼슬길에 나서지않는 훌륭한 선비)로 추천되어 참봉 에 임명 되
었다.
노수(盧遂). 영천(永川)에 살았고 사마시에 뽑혔으며 문학이 있었다.
일찍부터 김삼족당(金三足堂) 공을 스승으로 섬기다가 늦게야 퇴계선생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정윤량(鄭允良), 김응생(金應生)과 더불어 정 포은 선
생의 유허지에 학교를 세울것을 의론하였다.
그때 퇴계선생은 서울에 있었는데 공이 선생을 뵈니 선생이 하사한 성리학의 여
러 서적 한 질을 선물하고 책머리에 공부에 부지런하라는 뜻 을 손수 써 주었다.
김응생(金應生). 자는 덕수(德秀)요 사마시에 합격하여 정윤량과 더불어 같은 마
을 출신으로서 함께 자양산(紫陽山) 아래서 서숙을 세우니, 금계(錦溪)가 그 사
적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이내 그가 일찍 과거공부를 그 만두고 은 거하여 가
르치는 것을 칭찬하였다.
일찍이 퇴계선생 문하에 왕래하면서 질문한바가 있었으며 후에 호조 참의
에 증직 되였다.
조호익(曺好益), 자는 사우(士友)요 호는 지산(芝山)이며 창원(昌原)에 살았다.
가정 을사년(1545년)에 출생하여 8세에 능히 문장의 뜻을 통했고,점점 장 성함
에 따라 이미 위기지학(爲己之學:자기 수양을 주로 하는 학문)이 있음을 알 아, 항상
한 작은 방에 혼자 앉아 책을 읽으면서 밖에 나가지 않으니 사람 들이 작은방 아
이라 불렸다.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함에 이르러 학문을 하는 큰 방법을 들을 수 있 어서
더욱 스스로 노력 하면서 침식을 잊는 데 이르니 명성과 소문이 날로 더욱 드러
났다.
병자년(1576년)에 사실이 아닌 죄에 연루되어 강동(江東)에 유배되여 7년 간 귀
양살이를 하면서 항상 독서를 하고 예의를 숭상하니 원근에서 그를 스승으로 삼
았다.
이에 학교 규칙을 세우고 제자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니 서인(西
人)들이 비로소 예속(禮俗)의 가르침이 있는 것을 알았다.
임진왜란에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했을 때 류서애(柳西厓)가 공의 무죄를 역설
하니, 임금이 특명으로 사면하고 이내 의병을 모으기를 명령하여 5백 여 명의
군사를 모아 상원(祥原),중화(中和) 간을 왕래하면서 적을 토벌 하 는공이 많아
곧 상호군(上護軍:오위(五衛)의 3품 벼슬)에 승진 하였다.
명나라 군대를 따라 평양의 적을 공격하는 것을 도왔고, 북관(北關:함경도)에
들어가 왜장 청정(淸正)의 병졸을 추격하여 양주(楊州)에 이르니 임금이 포 상
해 말하기를, [천리 길을 전전 하면서 싸워 적의 목을 베고 사로 잡은것 이 매우
많으니 나는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하였다.
후에 성주(星州),안주(安州),정주(定州) 목사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 후에 영천(永川)에 우거하면서 여러 학생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 하는 일
에 게으르지 않았고 관직에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5세에 사망했느데 저서에 <심경고이(心經考異)>,<가례고증(家禮考證)>,<주역
석해(周易釋解)> 등 총 10여 권이 있다.
후에 이조찬판에 증직되고 영천(永川)과 성천(成川)에 모두 사당을 세웠다.
정지운(鄭之雲),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 본관 경주(慶州) 高陽에 살았다
이담(李湛), 자는 중구(仲久) 호는 정존(靜存) 본관 용인(龍仁) 서울에 살았다
이정(李禎), 자는 강이(剛而) 호는 귀암(龜巖) 사천(泗川)에 살았다
김부인(金富仁), 자는 백영(伯榮) 호는 산남(山南) 본관 광주(光州)
최응용(崔應龍), 자는 견숙(見叔) 호는 송정(松亭) 선산(善山)에 살았다,
홍인우(洪仁祐), 자는 응길(應吉) 호는 치재(恥齋) 본관 남양(南陽) 서울에 살았다
한수(韓修), 자는 영숙(永叔) 호는 석봉(石峰) 서울에 살았다,
신옥(申沃), 자는 계숙(啓叔) 서울에 살았다,
한윤명(韓胤命), 자는 사경(士冏)
김부필(金富弼),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凋堂) 예안(禮安)에 살았다,
황준량(黃俊良),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풍기(豊基)에 살았다,
박승임(朴承任),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 영천(榮川)에 살았다,
장수희(張壽禧), 자는 우옹(祐翁) 호는 과재(果齋) 본관 인동(仁同),
김생명(金生溟), 자는 사호(士浩) 예안(禮安)에 살았다,
권동보(權東輔), 자는 진경(震卿) 호는 청암(靑巖), 충재(沖齋)선생 발(발)으 아들
황응규(黃應奎), 자는 중문(仲文) 호는 송간(松澗) 풍기(豐基)에 살았다,
이숙량(李叔樑),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 예안(禮安)에 살았다,
오건(吳健),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산음(山陰)에 살았다,
김극일(金克一),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안동(安東)에 살았다,
박순(朴淳),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시호 문충(文忠) 본관 忠州
이원승(李元承), 자는 운장(雲長) 농암(聾巖) 효절공(孝節公)의 손자
김부신(김부신), 자는 가행(가행) 호는 양정당(養正堂) 부필의 종제,
박승륜(朴承倫), 자는 공서(公敍) 호는 동원(桐原) 소고공의 아우
김우굉(金宇宏),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巖) 성주(星州)에 살았다,
조목(趙穆),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본관 횡성(橫城) 예안 살았다
김팔원(金八元), 자는 순거(舜擧) 처음자는 수경(秀卿) 호는 지산(芝山),
김낙춘(金樂春), 자는 태화(泰和) 안동(安東)에 살았다,
김부의(金富儀), 자는 신중(愼重) 호는 읍청정(挹淸亭) 부필의 아우
구봉령(具鳳齡),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栢潭) 본관은 능성(綾城) 안동에살았다
정탁(鄭琢),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시호는 정간(貞簡)
금응협(琴應夾), 자는 협지(夾之) 호는 일휴당(日休堂) 예안에 살았다,
박광전(朴光前),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 호남 보성에 살았다,
기대승(奇大升), 자는 명언(明彦) 본관 행주(幸州) 광주에 살았다,
남언경(南彦經), 자는 시보(時甫) 호는 동강(東岡)
깁수일(金守一), 자는 경순(景純) 호는 구봉(龜峰) 극일 아우
남몽오(南夢鰲), 자는 경상(景祥) 호는 삼송당(三松堂)
박신(朴愼), 자는 여흠(汝欽) 호는 무진재(無盡齋) 밀양(密陽)에 살았다,
금란유(琴蘭유),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성재(惺惺齋) 예안에 살았다,
민응기(閔應祺), 자는 백향(伯嚮) 호는 경추재(景追齋) 우수의 아우
민응록(閔應祿), 우수(尤叟)의 아우
김부륜(金富倫), 자는 돈서(敦敍) 호는 설월당(雪月堂) 부신의 아우
류중엄(柳仲淹), 자는 희범(希範),경문(景文) 호는 파산(巴山) 안동에 살았다
최운우(崔雲遇), 자는 시중(時中) 호는 도경(蹈景),학구(鶴衢) 강릉에 살았다
권호문(權好文),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본관 안동(安東)
정유일(鄭惟一),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峯) 안동에 살았다
김명원(金命元),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 시호 충익(忠翼)
김명일(金明一), 자는 언계(彦계) 호는 운암(雲巖) 본관 의성(義城) 수일 아우
배삼익(裵三益),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臨淵) 안동에 살았다,
권문해(權文海),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예천에 살았다,
문위세(文緯世), 자는 숙장(叔章) 호는 풍암(楓巖) 본관은 남평(南平)
이이(李珥),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시호 文成 본관은 덕수(德水)
이응진(李應進), 자는 자순(子循)
윤근수(尹根壽),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시호 문정(文貞)본관 海平
김성일(金誠一),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 문충(文忠)明一 아우
정곤수(鄭崑壽),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경음(慶陰),초은(憔隱),
김전(金전), 자는 자후(子厚) 호는 구봉(九峯) 김부인의 아들
류운용(柳雲龍),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 본관 豊山,류성용의 형님
이성중(李誠中), 자는 공저(公箸) 호는 파곡(坡谷) 시호 충간(忠簡)
김사원(金士元), 자는 경인(景仁),경방(景龐) 호는 만취당(晩翠堂)
권춘란(權春蘭),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 안동에 살았다
김늑(金玏),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菴) 영천(榮川)에 살았다
김우옹(金宇顒),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시호 문정(文貞) 본관 義城
금응훈(琴應壎), 자는 훈지(壎之) 호는 면진재(勉進齋)
김복일(金復一), 자는 수순(秀純) 호는 남악(南岳) 김성일의 아우
오운(吳澐), 자는 대원(大源) 호는 죽유(竹牖) 영천(榮川)에 살았다
변성진(卞成振), 자는 여옥(汝玉) 변성온의 아우
홍가신(洪可臣),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晩全) 시호 문장(文莊)
이명홍(李命弘), 자는 인중(仁仲) 예안(禮安)에 살았다
이복홍(李福弘), 자는 성중(成仲) 이명홍의 아우
이덕홍(李德弘),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명홍의 아우
류성룡(柳成龍),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우성전(禹性傳),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 서울에 살았다
김효원(金孝元), 자는 仁伯(인백) 호는 성암(省菴) 서울에 살았다
박점(朴漸), 자는 자진(子進) 호는 복암(復巖) 서울에 살았다
정윤희(丁胤禧), 자는 경석(景錫) 호는 고암(顧菴) 응두의 아들
이경중(李敬中), 자는 공직(公直) 호는 단애(丹崖) 본관 영성(靈城)
이양중(李養中), 자는 공호(公浩) 경중의 아우
남치리(南致利), 자는 의중(義仲) 호는 분지(賁趾) 안동에 살았다
정구(鄭逑),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星州에 살았다,
김취려(金就厲), 자는 이정(而精) 호는 잠재(潛齋),정암(靜菴)
허충길(許忠吉), 지는 국선(國善) 서울에 살았다
정사성(鄭士誠), 자는 자명(子明) 호는 지양(芝陽) 안동에 살았다
김덕룡(金德龍), 자는 운보(雲甫) 호는 정재(靜齋) 서울에 살았다
김덕붕(金德鵬), 자는 성보(成甫) 德龍의 아우
김수(金晬),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시호 소의(昭懿) 서울에 살았다,
조진(趙振), 자는 기백(起伯) 서울에 살았다
이희(李憙), 자는 자수(子修) 호는 눌헌(訥軒) 예안에 살았다
이함형(李咸亨), 자는 평숙(平淑) 호는 천산재(天山齋) 서울에서 순천(順天)우거
이국필(李國弼), 자는 비언(棐彦) 서울에 살았다
금보(琴輔), 자는 사임(士任) 호는 매헌(梅軒),백당(栢堂) 예안에 살았다
이요신(李堯臣), 자는 여흠(汝欽) 호는 율곡(栗谷) 충무공 이순신 형이다
오수영(吳守盈), 자는 겸중(謙仲) 호는 춘당(春塘) 예안(禮安)에 살았다
윤강중(尹剛中), 해남(海南)에 살았다
윤흠중(尹欽中), 호는 석정(石亭) 강중의 아우
권대기(權大器), 자는 경수(景受) 호는 인재(忍齋) 본관 안동(安東)
남언기(南彦紀), 자는 장보(張甫) 서울에 살았다 언경(彦經)의 아우
긴기보(金箕報), 자는 문경(文卿) 안동에 살았다
김택룡(金澤龍), 자는 시보(施普) 호는 조성당(操省堂)
김기(金圻), 자는 지숙(止叔) 호는 북애(北崖) 전(전)의 동생
심희수(沈喜壽),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서울에 살았다
류근(柳根),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 시호 문정(文靖) 서울에 살았다
송언신(宋言愼), 자는 과우(寡尤) 호는 호봉(壺峯)
박제(朴濟), 자는 대제(大濟)
조O(曺O), 자는 대이(大而) 호는 운송당(雲松堂) 서울에서 龍壽에 우거
신식(申湜), 자는 숙정(叔正) 호는 졸재(拙齋) 청주(淸州)에 살았다
허봉(許篈), 자는 미숙(美淑) 호는 하곡(荷谷) 허엽(許曄)의 아들 서울에 살았다
권우(權宇), 자는 정보(定甫) 호는 송소(松巢)
박운(朴蕓), 자는 언수(彦秀) 호는 병백당(病栢堂) 禮泉에 살았다
김태정(金泰廷), 자는 형언(亨彦) 본관 광주(光州) 서울에 살았다
백견룡(白견룡), 자는 문세(文世) 호는 성헌(惺軒) 寧海에 살았다
성락(成洛), 자는 사중(士中) 서울에 살았다
홍반(洪胖), 청량산 절에서 독서했다
금의순(琴義筍), 자는 우경(友卿) 호는 취암(翠巖) 봉화(奉化)에 살았다
금제순(琴悌筍), 자는 공숙(恭叔) 호는 적암(赤巖) 의순의 아우
남필문(南弼文), 밀양(密陽)에서 살았다
김희우(金希禹), 자는 사검(思儉)
박제(朴濟), 서울에 살았다
이순(李淳), 퇴계선생과 문답한 글 이있다
이달(李達), 호는 손곡(蓀谷) 서울에 살았다
아천기(李天機), 퇴계선생과 학문을 논한 글이 있다
박사희(朴士熹), 자는 덕명(德明) 호는 묵재(默齋) 예안(禮安)에 살았다
여세윤(呂世潤), 자는 국화(國華) 본관 함양(咸陽) 서울에 살았다
이국량(李國樑), 자는 비원(庇遠)
신언(申漹), 용수산(龍壽山)에 살았다
김수개(金壽愷)
김수회(金壽恢) 퇴계선생 손자 안도(安道)에게 준글
이봉춘(李逢春), 자는 근회(勤晦) 안동에 살았다
조지(趙摯), 서울에 살았다
문명개(文命凱), 과거 급제하여 퇴계선생문하에 공부
안제(安霽), 자는 여지(汝止)
손예(孫禮),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다
허성(許筬), 자는 서보(瑞甫) 호는 산재(山齋) 허봉의 아우
이광헌(李光軒), 선생의 만장(挽章)지었다
신익(申瀷), 선생의 만장 지었다 문하생이라 했다
신확(申확), 무진질정록이있다
구찬록(具贊祿), 자는 여응(汝膺) 호는 송안(松顔),용산(龍山) 안동 살았다
구찬복(具贊福), 구찬록의 아우
박수일(朴遂一), 자는 순백(純伯) 호는 건재(健齋) 용암(龍巖)의 손자
김찬(金纘), 자는 경선(景先) 호는 사우당(四友堂) 용궁(龍宮)에 살았다
최덕수(崔德秀), 자는 자수(子粹)
정지(鄭芝)
신섬(申暹), 자는 해중(偕仲)
박여(朴欐), 자는 거중(居中) 구명(舊名)은 량(樑) 영천(榮川)살았다
김언기(金彦機), 자는 중온(仲昷) 호는 유일재(惟一齋) 安東 살았다
이중립(李中立), 자는 강중(剛中) 호는 귀암(龜巖) 본관 월성(月城)
김규(金戣), 자는 경엄(景嚴) 본관 안동(安東)
류경룡(柳景龍), 자는 시백(施伯) 안동에 살았다
이문규(李文奎), 자는 경소(景昭) 퇴계 가문의 손자 안동에 살았다
이준(李寯), 퇴계선생 장남
이복(李宓), 자는 자앙(子昻) 퇴계선생 네째형 해(瀣)의 아들
이완(李完), 자는 자고(子固) 호는 요산(樂山) 퇴계 장형 잠(潛)의 양자
이영(李寧), 자는 노경(魯卿) 복(宓)의 아우
이교(李교), 자는 군미(君美) 영(寧)의 아우
이치(李寘), 자는 지국(持國) 교(교)의 아우
이안도(李安道), 자는 봉원(逢原) 호는 몽재(蒙齋) 퇴계선생의 손자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정리하시너라 수고하셨습니다.
정리하는데 수고가 많았다.
노촌공의 후예임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