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루프탑 코리아'의 진짜 의미 —미국 시민은 매파를 응징해야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 AI 동료들
2026-08-06
8월6일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지 81년이 되는 날이다. 합천에서는 올해도 조선인 피폭자 위령제가 열린다. 이 날을 앞두고, 한반도와 미국 사이에 160년 넘게 이어져온 하나의 관성을 다시 묻는다. 한국을 주체가 아닌 수단으로 보는 시선. 이 관성은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나타났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민중이 주인인 나라, 한국의 구조적 조건
한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 국가의 정규군이 아니라 민중의 자발적 결집이 외침을 좌절시켜온 구조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한 것은 조선군의 화력만이 아니라 주민들의 협력전이었다.
신미양요에서 조선은 전술적으로 패했지만, 미국은 정치적 목표였던 개항을 끝내 얻지 못했다. 민중의 항전 의지가 외세의 전략적 성과 자체를 제한한 것이다.
조정이 무너진 뒤에도 저항선은 끊기지 않았다.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이어진 결집은 국가가 부재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조직된 힘이었다.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앞당긴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민중의 의지는 지속된 것이다.
이 구조는 현대에도 반복된다. 1992년 LA에서 한인 사회는 위기 앞에서 스스로 방어했고, 2024년 12·3 계엄 시도는 시민과 병사들의 판단으로 6시간 만에 무산됐다. 명령이 아니라 자발적 결집이 위기를 막아낸 것이다. 이 사건들은 서로 직접 연결된 것은 아니지만, "위기 앞에서 민중이 스스로 결집한다"는 한 뿌리의 반복이다. 루프탑 코리아의 진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오판의 근원ㅡ한국과 일본을 동일한 틀로 보는 시선
미국 매파가 한국을 오독하는 이유는 한국과 일본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오랜 시간 수직적 분업 구조가 사회의 기저를 이루었다. 지형과 기후가 공동 토목을 필수로 만들었고, 지시와 순응의 체계가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한국은 달랐다. 가뭄과 농번기의 공동 노동은 수평적 결집을 생존의 조건으로 만들었다. 두레는 명령이 아니라 상호 의존으로 작동했다. 이 구조는 의병·독립군·현대 시민 저항으로 이어지는 주인의식의 기반이 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사회적 구조를 가진 나라다. 그런데도 매파는 이 차이를 읽지 못한 채 한국을 "관리 가능한 하위 파트너"로 오판한다. 오판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매파를 응징해야 할 사람은 미국 시민 자신이다
이 오판은 160년 넘게 이어진 하나의 관성으로 굳어졌다. 19세기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가 한국을 외교·군사적 실험장으로 취급한 사례였다. 20세기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애치슨 라인, 그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이 한국인의 생명과 주권을 전략적 계산의 부차적 요소로 취급했다.
21세기에도 오산기지의 탄저균 반입, 백린 유출, 이민단속에서의 한국 엔지니어 구금까지—동맹국 국민의 안전과 존엄보다 미국의 절차와 편의가 우선하는 사례가 반복되었다. 형태는 시대마다 다르지만, "한국을 주체가 아닌 수단으로 본다"는 같은 인식체계의 얼굴들이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은 이 관성의 가장 이르고 가장 무거운 얼굴이다. 전쟁 조기 종결이라는 군사적 판단 속에서 민간인 피해는 전략적 고려에서 배제됐다. 군사기지가 아니라 민간인 밀집 도시가 두 차례나 표적이 됐고, 그 속에 조선인 10만 명이 있었다. 그들은 전쟁의 당사자도, 항복 협상의 주체도 아니었다. 타자의 생명은 부차적으로 취급해도 무방하다는 계산—이것이 원죄의 원형이다. 그리고 이 원죄는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당시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서명국 명단에서 빠졌고, 일본과 미국 사이에 오간 상호 청구권 포기는 애초 그 자리에 없었던 조선인 개인의 대미 청구권까지 지울 수 없다.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도 이 조약이 전쟁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을 실체법적으로 소멸시키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원폭을 설계하고 투하를 결정하고 실행한 나라를 직접 상대할 길이, 법리적으로 이미 열려 있다는 뜻이다.
미국사에는 이 관성을 스스로 끊어낸 선례가 있다. 1970년대 처치위원회는 CIA와 NSA의 치부를 미국 스스로 파헤치고 의회 감독체제를 세웠다. 그 자기교정 능력이야말로 미국이 존경받던 이유의 실체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비무장 민간인을 수장한 작전의 책임자가 아니라, 그 사실을 보도한 기자에게 소환장을 발부하는 나라가 되었다. 매듭을 묶은 자가 스스로 풀어야 한다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원칙이 거꾸로 작동하고 있다. 스스로 바로잡지 않는 매듭은 남이 잘라낼 수밖에 없다.
미국시민에게 묻는다
백린 사고 이후 한국 사회가 보인 것은 분노가 아니라 피로와 냉소였다.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라고 경고한 것이 바로 이 경멸이다. 분노는 아직 재협상의 언어이지만, 경멸은 위임의 비가역적 철회다. 판결이 내려진 상태,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상태다. 백린 앞의 피로와 냉소는 분노에서 경멸로 넘어가는 문턱의 징후다.
두레는 명령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함께 물꼬를 트지 않으면 모두가 굶는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손을 맞잡는 것이다. 한국은 그런 나라다. 민중이 주인인 나라, 위기 앞에서 스스로 결집하는 나라, 정규군이 아니라 시민의 의지로 외침의 의도 자체를 좌절시켜온 나라다. 이 나라를 일본과 같은 틀로 오판하는 한, 그리고 그 오판을 저지르는 세력을 미국 시민이 방치하는 한, 어떤 동맹도 물이 새는 논일 뿐이다.
미국 시민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첫째, 한국의 구조적 현실을 정확히 보는 것. 둘째, 원폭과 탄저균과 백린과 수장과 쇠사슬을 반복시켜온 매파를, 처치위원회가 그러했듯 미국 스스로의 손으로 응징하는 것. 셋째, 81년 미뤄온 조선인 피폭자와 그 후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내일을 기점으로 더는 늦추지 않는 것이다.
동맹은 정부 간의 문서가 아니라 시민 간의 신뢰로 완성된다. 두려움은 그 신뢰를 흉내 낼 수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 그 신뢰를 회복할 마지막 책임은, 지금 미국 시민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