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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 일차성 |
사실 이차성 |
법칙 삼차성 |
표상체 일차성 |
품질기호 |
개별기호 |
법칙기호 |
대상체 이차성 |
도상 |
지표 |
상징 |
해석체 삼차성 |
해석기호 |
발화기호 |
논항기호 |
이는 다음과 같은 현실의 예로서 기호들의 조합이 설명될 수 있다.
축구 경기 중에 심판이 고의적으로 비신사적 행위를 범한 선수에게 레드 카드를 내보인다. 레드 카드는 규칙(고의적인 파울은 규칙에 어긋나고 가해자에게 제재 조치가 취해진다)를 통해 존재하므로, 이 레드 카드는 논항기호이다. 또한 이 레드 카드는 상징 기호(레드 카드는 관습적으로 고의적인 파울을 의미한다.)이며, 따라서 법칙기호(일반법칙)도 된다. 한편 레드 카드는 이전부터 심판들이 사용해 온 것이고 선수들은 이 카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심판이 파울을 범한 선수에게 레드 카드를 꺼내보이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발화 지시적인 개별기호이다(심판이 취한 행동은 축구 규칙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에 대한 진술 행위이다). 퍼스의 기호학은 특히 행위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퍼스 계열의 기호학은 godehdwndml 심리학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어 발전되어 왔다.
2.
이제부터는 (퍼스가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자신의 걸작이라고 부른 바 있으며) 그가 지닌 기호학적 사유의 기초가 되는 텍스트를 살펴 보자. 그것은 18세기에 윌러 Euler가 제안하여 1880년경에 벤Venn이 다시 인용하는 『존재론적 그래프』에 관한 글로서, 여기서 퍼스는 <원으로 표현되는 삼단 논법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이 도식은 성자들이 모두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며 인간들은 모두 정열의 소유자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반대로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 않다>는 삼단 논법은 다음과 같이 성자들이 완벽한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나타낼 수 있다. 퍼스에 따르면, 이런 그래프가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가지는 <본래의 도상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같은 발언은 도표의 공간적 외형이 실질적인 공간적 상황을 <모방>한다는 생각을 낳게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퍼스의 도상 이론은 참으로 순박한 이론에 그칠 것이다. 왜냐하면 도표
들이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런 공간적 특성들이 다른 공간적 특성의 도상임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열의 소유 여부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전통 논리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기껏해야 어떤 특성의 소유 여부 문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현대 논리학이 이런 특성의 소유 여부를 특정 범주에의 포함 여부로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규약 때문이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체>에는 (비본질적인) <사건>이 내재한다는 생각을 지배하는 순박한 현실주의적 개념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어떤 범주에의 포함 여부는 공간의 문제인가? 물론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특정한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범주에 누군가를 포함시키는 일은 제외된다. 그러나 정열을 아는 사람들의 범주에 내가 포함된다면 그 범주는 공간이 아닌 추상 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원형을 사용한 표현 방법에서 범주가 공간으로 바뀌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도 오로지 규약 때문이다>.
결국 이런 저런 동그라미에 포함되는지 여부는 어떠한 것의 도상도 아니다. 그것은 규약적으로 설정된 관계이자 기껏해야 동그라미를 사용하는 또 다른 규약적 표현의 도상적 관계일 뿐이다 (이는 결국 하나의 기호가 동일한 의미 형태와 동일한 의미 표현의 실체를 갖는 모든 기호들과 닮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빨간색, 노란색, 검정색 깃발은 모든 빨간색, 노란색, 검정색의 깃발들과 동일하다는 말이다). 퍼스의 주장대로, 도표에 대한 그것의 정신적 이미지는 도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일단 도표가 설정되면 우리는 그것을 지각하고 그것에 정신적 이미지 내지는 적어도 망막의 이미지, 즉 사물의 도상적 투영을 일치시킨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나 우리의 논점은, 도표와 같은 기호는 과연 그것이 표현하는 관계에 따라 도상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왜냐하면 두 관계 사이에 비례 관계가 <제시> 되었고 (A/B = B/C) 단 하나의 규약이 논리적 포함 여부와 공간적 포함 여부를 일치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식의 일치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어떠한 도상적 관계도 없는 각각의 사물을 혼동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도상에 대한 논의는 방향 전환을 할 수 밖에 없다. 즉 도상의 문제는 <도상을 만들어 내는 규약적 양식>의 문제로 바뀐다.
퍼스는, 윌러의 도표들이 도상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것들이 현실을 재현해서가 아니라 <도표들의 논리를 지배하는 논리를 재현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처음에는 공간에의 포함 관계가 곧 범주에의 포함 관계이며 그걸 공간에서의 배제 여부는 곧 범주에서의 배제 여부라는 식의 규약적 등가 관계를 설정했다. 따라서 <의미 표현의 형태>와 <의미 내용의 형태> 사이의 <동형성>으로서의 도상을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었다 (즉 이런 동형성은 사진의 <유사성> 법칙이 아닌 수학적 비례 법칙을 따른다). 다시 말해 이런 논증에서는 현실과의 모든 유사성이 완벽하게 배제되었던 것이다.
물론, 어떻게 해서 공간적 상관 관계와 논리적 상관 관계의 비례적 등가 관계가 즉각 기능을 발휘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관해 우리는, 연대순의 형태로는 논리적 상관 관계가 우선권을 가지며 (우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라는 명제를 놓고 그 다음에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적어 놓는 식의 연대순), 그래프에 대한 우리의 글쓰기 습관에 따라 언어적 담화의 시간적 연쇄는 공간적 연쇄로 표현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칸트의 주장과 유사하게, 이 두 범주(공간의 범주와 기간의 범주)는, 우리의 지각 능력 및 지적 능력을 결정하는 한 쌍의 근본 개념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 기호에 대한 담론은 지각의 구조 자체와 심지어는 우리 뇌세포의 구조에 대한 담론을 가리키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시간의 연쇄를 공간의 연쇄로 (또는 그 반대로) 재현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우리로 하여금 논리적 관계를 공간적 상관 관계(예를 들어 범주에의 포함 여부) 내지는 (항상 <결과>의 잔재를 간직하는 <원인>인) 시간의 연쇄로 표현하게 만들면서 우리의 추상 작용을 조건지을 것이다.
퍼스는 이 문제를 오히려 <직관적 이미지>와 근접한 것으로서 정신적 도상과 도식의 관계로 인식했다. 이에 대해 퍼스는 도상의 두 가지 정의를 제시하는데 그 두 번째 정의는 직관론의 관점에서 정리된다. 따라서 우리는 스코투스적 현실주의로 물든 퍼스의 반복적인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에 따르면 정신적 도상은 스콜라 학파에서 말하는 이른바 <정신속에 새겨진 양상>의 모든 특성들을 갖는다. 다시 말해 형태와 관련하여 사물이 이런 <양상>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이것이 <지각과 사물의 일치성adequatio rei et intellectus>으로서의 인식의 개념이다). 이렇게 도상 이론은 <규약/본질>이라는 양자 택일의 두 번째 요소인 <본질Physis> 쪽으로 다시 기운다. 즉 기로는 사물 형태의 물리적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퍼스만큼이나 직관론적 형태의 적으로 군림하려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단기호>와 <질기호>를 다룰 때 퍼스는 분명 직관론을 언급한다. 그러나 질기호는 기호가 물리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형태이다. 따라서 이런 특성은 기호의 내적 구조를 구성하지 못한다. 퍼스에 따르면 단순한 직감이 직감의 지위를 포기하고 기호로 변하는 순간에만 인식이 있다. 기호학적 관계는 규약적 요소들이 개입함으로써 구성된다. 이런 규약적 요소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을 우선 언급할 수 있다. 즉 기호는, 다른 기호들과 고립되어 오로지 그 자체만을 위해서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기호들이 그 기호를 해석하는 만큼 기호는 다른 기호의 해석소로 사용된다. 앞서 기호학적 과정으로서의 지각에 대해 말했듯이, 기호를 안다는 것은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 기호를 통해 그런 사물들을 분류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럼으로써 어떤 사물에 대해 <빨갛다>는 특성을 부여하는 행위조차도 이미 문화가 한정지어 놓은 범주 속에서 무언가를 비교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함축한다.
중국 여인의 도상을 정의하기 위해 퍼스가 여인의 도상과 중국인의 도상을 결합시키는 식의 다소 진부한 개념을 사용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 분할 과정은 무한히 지속될 수 있다. 이에 반해 도상의 직관론에 입각하면 중국 여인의 이미지는 그것을 오로지 게슈탈트적으로 완전하게 반영하는 단위가 되며 그것은 우리의 지각을 선행하게 된다. 따라서 지각 사물은 하나의 (기호학적) 구성체이며, 생성 과정의 결과가 아닌 것은 결코 도상일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문제는 <도상>이라는 규약적 명칭으로 분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다양한 종류의 기호학적 과정을 분석할 때 이미 강조한 바 있다. 도상을 <투영적 기호> 내지는 <특성화의 기호>로 엄격하게 정의할 때조차도, 흔히 도상 기호라고 불리는 것은 그 외시적 현실과 유사한 사물이 아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사물의 몇 가지 자질을 인식하는 것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도상 기호는 ≪유사성≫이라고 불리는 외형을 생성하도록 만들어진 기호이다>. 기호와 그 대상의 인과 관계는 <사물의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기호의 근원이 되는 규약에 있다> (따라서 문화적 단위로서의 사물 자체에 기초한다). 도상에 대한 퍼스의 논의는 이런 정의를 전형적인 도상처럼 보이는 정신적 이미지에도 적용할 수 있게 했다. 일단 사물과 기호의 인과 관계를 제거한 이상, 언술과 현실의 관계는 마치 거울과 같다는 순박한 믿음이 무너지게 되었다. 따라서 (소위 논리 형태의 도상성과 도표의 분석을 통해 밝힐 수 있었듯이) 대응의 규약적 관계를 언급할 이유가 더욱 명백해질 따름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 <언술은 사실의 형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습득을 통해 언술이 흐르는 형태로 사실을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논의한 모든 것이 새로운 문제에 부딪친다. 즉 어떠한 과정을 통해 두 가지의 음성적 구성체가 동일한 모델의 구체적인 사용 사례로 인식되는가 (또는 두 개의 단기호가 하나의 단어로서의 합법 기호의 실현체로 인식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도상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각 행위의 핵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윌러의 두 도표가 두 가지의 규약적 표현 방법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할지라도, 어떻게 해서 우리는 두 개의 동그라미를 동그라미의 존재로 인식하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이렇게 도상 이론은 형태의 인식 문제를 제거하기 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요컨데 도상 이론은 이 문제를 더욱 깊은 차원으로 끌어내리며 여기서 유연성과 규약성은, 마치 방사 물리학에서 파동과 분자가 상호 보충하듯이 보충적인 범주의 짝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어낸 셈이다. 왜냐하면 도상적 유연성을 기호 정의의 준거점으로 채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런 유연성에 근거하는 모든 설명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호 보충적 범주들은 아마도 한층 더 분석적인 연구에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예를 들어 심리학이나 어쩌면 지각 생리학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호를 분석할 때는 그것을 문화적 도구로 정립하는 규약의 관점에서 언제든지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3.
소쉬르로 부터 퍼스는 어떻게 다른가?
기호학적 시각이라는 점에서 볼 때 Peirce의 기호학이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지도라고 한다면 Saussure의 그것은 한 나라만을 나타내는 국가지도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Saussure와 Peirce가 갖는 기호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Saussure는 커뮤니케이션을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관례화된 기호체계(다시말해 인간 발신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만을 기호로 간주하고 이러한 것들만을 기호학의 연구영역 속에 포함한다.
반면 Peirce에게 기호란 기호사용자에게 무엇인가를 대신하여 나타낼 수 있는 어떤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호로 작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 발신자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에게는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관습적 기호체계의 영역을 훨씬 벗어난 것들, 자연현상이나 비의도적인 발현물(uninternational manifestation)들도 기호로 파악함으로써, 그의 기호이론에 따르면 기호학연구는 무제한의 연구영역을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기호학자들은 Saussure의 기호학을 의미소통을 위한 관습체계의 이론(thory of systems of convensions for communication)이라고 본다면 Peirce의 기호학은 의미작용의 이론(thory of signification)이라고 설명한다.
Peirce와 Saussure의 차이는 연구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연구의 주안점에서도 상이하다. 너무 단순화시켜 말하는 것이겠지만 Peirce는 철학자로서 그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철학적 질문, 즉 인간의 ‘사유’나 ‘이해’, ‘추론’, ‘해석’, ‘지식’, ‘진리’ 등의 본질파악을 위한 어떤 열쇠를 기호학이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과학적이고도 객관적인 접근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기호의 일반이론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Saussure는 언어학자로서 언어연구를 중심으로 한 기호의 일반이론을 추구함으로써 Peirce의 주요 관심사와는 다른 것에 기호학적 연구의 중심을 두었다. 특히 언어기호에 대한 구조적 관념, 즉 형식(구조)이 실질을 결정한다는 구조주의적 시각은 그로 하여금 ‘사회적 관습’이나 관례화된 ‘규칙’, ‘체계화된 표현수단’, ‘약호속의 의미가치 체계’등과 같은 문제들을 규명하는 데 그의 기호이론의 주안점을 갖게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Saussure와 Peirce의 기호학 이론은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각각 독립적으로 전개되어 유럽에서는 Saussure 전통의 기호론(semiology)으로 영어권에서는 Peirce 전통의 기호학으로 각기 불려 왔다. Julia Kristeva와 같은 이론가들은 기호학은 기호표현(signifier)을 연구하고, 기호론은 기호내용(signified)을 연구한다고 구분해서 보기도 하지만 기호론과 기호학은 사실 같은 학문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라고 하겠다.
이 두 연구전통은 사실상 서로 단절된 채 이어오다가 현대 언어학자 Roman Jakobson이 학문분야로서 기호학의 문제를 연구하면서 그 접촉이 이루어지고, 1964년 Roland Barthes의 ≪기호학 요강≫을 통하여 그 영향이 고루 미치게 되었다고 보겠다. 그의 ≪기호학 요강≫은 Saussure의 기호학 구상을 현실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양대 기호학의 이론을 통하여 기호학적 방법론의 교과서를 만들어냈다고 할만큼 기호학 연구의 고전이 되었다.
4.
퍼스적 의미와 소쉬르 의미에서 기호를 보는 눈을 통합적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기호는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과 시그니피케이션(의미작용)의 기본 단위이다. 먼저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요소로서 기호를 살펴보자. 기호는 정보를 전송하고 한 사람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다른 이들이 알 수 있도록 말하거나 가르쳐 주기 위해 사용된다. 따라서 기호는 다음과 같은 유형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도입된다고 할 수 있다.
정보원 - 발신자 - 경로 - 메시지 - 수신자
이 도식은 통신 분야의 엔지니어들이 정보 전송의 이상적인 조건들을 창의하는 과정에서 제시한 도식의 축소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식은 수많은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적용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메시지는 기호에 해당된다. 사실 (대다수의 경우가 그렇듯이) 하나의 메시지는 수많은 기호로 구성되는 복합적인 조직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보다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주목하기로 한다. 예를 들어 나에게 말을 건 친구에게 /당장!/이라고 소리친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경우 나는 정보원과 거의 동일시될 수 있는 수신자이며, 경로는 내가 발화한 음파가 통과하는 공기이다. 또한, 이 경우에 /당장!/은 고립된 기호로 간주될 수 있는 메시지이다.
코드는 기호의 필요 충분 조건이다. 코드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의 병리학적 증후도 기호가 될 수 있는데 이는 환자의 의도와 무관한 문제이기도 하다.(그리고 이런 코드는 의학 기호학적 코드이다.)
코드는 그것이 부정확하고 유연하거나, 또는 불완전하고 모순될 때도 코드로서 존재한다(다시 말해 신속하게 재구성될 수 있거나, 시니피앙이 거대하고 분할될 수 있는 의미 내용의 일부분만을 가리킬 때, 마지막으로 그런 시니피앙이 속하는 하위 체계와 다른 하위 체계가 모순되는 경우, 다시 말해 하나의 하위 체계에서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결합되지만 다른 하위 체계에서는 그런 시니피에가 전혀 다른 시니피앙으로 표현되는 경우에도 코드는 어디까지나 코드이다). 따라서 패션 <코드>는 부정확하고 연약하며 불안정하고 일시적이지만 그것은 언어 코드만큼이나 엄연한 코드이다.
이렇게 코드들이 가질 수 있는 부정확하고 연약하며, 불완전하고 일시적이자 모순적인 특성은 기호의 정의를 무력화시키지 않는다.
기껏해야 이런 특징은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며 그것의 커뮤니케이션을 다소 어렵게 할 뿐이다. 커뮤니케이션이 다소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은 기호를 기호로서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때 사용되는 코드가 앞서 언급한 특징들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갖는다.
코드가 부재하기 때문에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은 자극 - 반응의 과정에 그친다. 자극들은 <다른 무언가를 대신한다>는 기호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자극은 다른 무언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접> 일으킨다. 강력한 빛은 나의 눈을 감게 하지만 그것은 나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하는 명령과 매우 다르다. 전자의 경우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눈을 감는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나는 우선 명령을 이해해야 하고, 따라서 메시지를 해독해야 한다(이것이 기호 과정이다). 그런 다음 나는 그런 명령을 따를지 여부를 결정한다(이는 나의 기호학적 능력에서 유래되는 의지의 과정이다). 따라서 파블로프의 실험에서 개에게 침을 흘리게 하는 종소리는 하나의 자극이다. 이런 소리는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종소리와 결합시킨 먹이와 동일한 효과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 종소리는 먹이를 대신해서 제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건 반사>라고 한다. 종소리에 이어 음식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인간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이 경우 종소리는 음식의 지표이다. 이는 식사 시간을 알리는 보병 나팔 소리와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언어로 표현될 수도 있는 인공적 기호이다. 동물 기호학자들은 동물들도 기호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종소리가 하나의 기호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그 개가 먹이를 얻기 위해 매일 파블로프 연구소에 가서, <조건화된> 심리학자가 종을 울리고 먹이를 가져다 줄 때까지 침을 흘려야 한다. 다시 말해 기호 과정은 모든 지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그 과정이 역전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기호 과정으로 인정될 수 있다. 한마디로 기호에서 지시 대상으로 넘어갈 수 있을 때만 지시 대상에서 기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연기가 있으면 불이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불이 연기를 일으킨다는 사실 역시 아는 순간부터 기호 과정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의미 과정의 요소로서 기호에 대해 살펴보자. 여기서 논의되는 기호의 두 번째 관점은 앞서 거론한 관점보다 덜 명확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분들이 명백하지 않던 원시 문명이나 다소 이상한 관점들이 지배하던 시대는 항상 존재했다. 즉 어떤 문화들은 말과 사물을 동일한 것으로 보거나 <명사는 곧 정신의 의지다 nomina sunt numina>라고 주장했다. 이런 구분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이른바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에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스토아 학파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모든 기호 과정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세이마이논seimainon>: 물리적인 실체로서 지각되는 시니피앙 또는 표현.
-<세마이노메논semainomenon>: 물리적 실체를 가리키지 않는 표현이나 시니피에 또는 내용.
-<틴카논tynchanon>: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로서 물리적 실체 내지는 사건 또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
이런 구분은 언어 철학과 언어학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언급되어 왔다.
우리도 이런 구분을 앞으로 전개될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한다. 또한 우리가 사용할 용어들을 미리 제시하기 위해 이런 구분을 이미 사용되고 있는 삼각형의 도표로 정리하기로 한다.
그러면 /말(馬)/이라는 기호를 예로 들어 보자(이제 부터는 /***/를 사용하여 기호의 <시니피앙>을 표현하기로 한다). 한국어를 모르는 에스키모 인에게 /말/이라는 시니피앙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달리 말하자면 에스키모 인은 한국어의 코드를 모른다). /말/의 시니피에를 에스키모 인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에스키모 어로 그것을 면역해야 한다. 또는 백과 사전적 방식으로 말이 과연 무엇인지를 정의하거나, 아니면 종이 위에 말의 그림을 그려 주어야 한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모든 방법은, 내가 설명해야 하는 시니피앙 대신에 다른 시니피앙을 제시하는 방법을 의미한다(이런 시니피앙들은 언어적 내지는 시각적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기호의 <해석소>라고 부르기로 한다). 어쨌든 경험적으로 우리는 에스키모 인이 언젠가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에스키모 인의 머릿속에 하나의 <관념> 내지는 <개념>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우리가 그에게 <반응의 능력>을 자극했다고 말하며 이런 능력 덕분에 그는 진짜 말을 데려 오거나, 자신이 정확히 이해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갑자기 말의 울음소리를 흉내낼 거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에스키모인이 코드를 갖게 되는 순간부터 /말/이라는 시니피앙은 그것을 말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정의하지 않는) <시니피에>를 가리키게 된다. 우리는 이런 시니피에를 <***>로 표현하기로 한다(구어(口語)에서는 시니피에를 가리키기 위해 그것의 시니피앙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사실 시니피앙 /말/은 시니피에 <x>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런 분류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지적 사항들은 일반 상식을 넘어서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일단 접어 두기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위의 삼각형을 새롭게 해석하기로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삼각형의 세 범주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다양한 분류 방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지도 않는 --- 일반 상식은 기껏해야 삼분법에만 동의할 뿐, 각각의 범주에 부여하는 명칭에 대해서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어떤 학자는 우리가 지시 대상이라고 부른 것을 /시니피에/라고 부르며, 우리가 /시니피에/라고 한 것은 /의미/로 취급한다. 그리고 예를 들어 프레게가 <Bedeutung>이 학자는 <지시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런 차이는 전문 용어상의 차이에 그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보다 근본적인 개념의 차이를 함축하기도 한다. 사실 이 모든 분류법을 논한다는 것은 결국 수많은 논쟁으로 가득 찬 의미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처사와 다를 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위의 분류법 중 몇 가지만을 살펴보는데 만족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난처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요컨대 이런 분류에서 기호는 과연 무엇인가? 삼각형 위쪽에 위치한 실체들인가? 소쉬르(1916)는 우리에게 기호가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갖는 양면의 실체라는 것을 가르쳤다(언어학에서는 삼각형 오른쪽에 위치한 지시대상은 어떠한 관여성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쉬르의 견해는 기호의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범위를 너무나도 넘어선다.
5.
퍼스의 기호학은 모리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에게서 비로소 기호화용론의 개념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기호에 대한 세 가지 시선(의미론, 통사론, 화용론)에서 비롯되었다.
모리스(1946)는 기호를 정의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안한 바 있으며 학계에서는 그의 방법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실제로 기호는 다음 세 가지의 차원에서 지각될 수 있다.
의미론적 차원: 기호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과의 관계를 통해 정의될 수 있다.
통사론적 차원: 기호는 다른 기호들의 연속체에 도입되는 방법에 근거하여 특정한 조합 규칙에 따라 정의될 수 있다. 사실 <통사론>은 기호가 전달하는 시니피에와 무관하게,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떠한 시니피에도 전달하지 않는 기호까지를 포함하여, 시니피앙 부분의 내적 구조에 대한 연구를 가리키기도 한다(예를 들어 단어를 직접 성분으로 분할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화용론적 차원: 기호는 그것의 근원과 수신자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그리고 수신자들의 기호 사용법 등에 근거하여 정의될 수 있다.
출처: http://semiotic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