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숙종 7년(1681년 신유) 7월 21일(임신) 【조선왕조실록】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동지사(同知事) 이민서(李敏敍)가 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을 부르도록 청하고,『생략』 임금이 말하기를,
"정비(正妃)가 탄생한 바는 모두 대군·공주라고 일컬으니, 노산군(魯山君)도 당연히 대군으로 일컬어야 한다. 그것을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이 모두 타당하게 여기자 마침내 대군으로 추가하여 일컫도록 명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그의 묘(墓)에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생략』
㉮ 주강 : 조선 시대에, 경연특진관 이하가 오시(午時 :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에 임금을 모시고 법강(法講)을 행하던 일.
③ 어제 치제문 - 정조 16년(1792) 9월 1일 정유 【㉮ 弘齋全書 22권 祭文 4】
礪良府院君 宋玹壽와 여흥부부인(驪興府夫人) 민씨(閔氏)의 묘에 대한 치제문
여량부원군의 묘는 실전(失傳)하였으므로 부부인의 묘 곁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드렸으니, 숙종 계사년(1713, 숙종39)의 고사를 쓴 것이다. 부부인의 묘는 계사년 후에 또 실전했는데, 금년에 장릉(莊陵)에 ㉯의기의 예를 행하기에 이르러 묘지를 다시 찾은 것이 마침 이때에 있었으니, 일이 우연하지 않은 듯하였다. 이에 관찰사에게 명하여 신도(神道 : 묘소로 가는 길. 묘문(墓門))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묘를 지키는 집 두 가구를 두게 하였다. 礪良府院君宋玹壽驪興府夫人閔氏墓致祭文 礪良墓失傳。爲壇於府夫人墓傍設祭。用肅廟癸巳故事也。府夫人墓。癸巳後又失傳。至今年。莊陵行義起之禮。而墓地之更尋。適在此時。事若不偶。命道伯竪短碣於神道。置守塚二戶。
九月丁酉 (구월정유) / 구월 정유일에 祇拜仙陵 (기배선릉) / 경건히 선릉을 참배했는데 ㉠聖后之思 (성후지사) / 정순왕후(定順王后)에 대한 생각이 迤及㉡驪興 (시급여흥) / 부부인에게까지 미쳤네 不須㉢提起 (불수제기) / 굳이 이야기를 끌어낼 것 없으니 萬事㉣滄桑 (만사창상) / 만사가 덧없는 변화를 거듭했네 ㉤聖祖敷恩 (성조부은) / 성조께서 은혜를 베푸시니 厚土回光 (후토회광) / 후토에 광채가 돌아왔네 翩繽處彼 (편빈처피) / 영령이 한가로이 노닌 곳 ㉥牛巒之原 (우만지원) / 저 우만의 언덕일세 爲竪短碑 (위견단비) / 이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且訪㉦孱孫 (차방잔손) / 또한 어리고 약한 후손이 찾아 왔네 ㉧礪良躋享 (여량제향) / 부원군을 받들어 제사를 드리니 一抔何許 (일배하허) / 한 잔을 받으심이 어떠리오 其㉨來同㉩歆 (기래동흠) / 이르러 함께 흠향하소서 旣墠而醑 (기선이서) / 이미 제단을 손질하고 미주(술)와 제물을 바쳤을 것이니 많이 드십시오. --- 한국고전번역원 김홍영(역) 1998
㉠ 성후(聖后) : 왕비. 경순왕후
㉡ 여흥(驪興) : 경기도 여주의 옛 지명. 여흥부부인 여흥민씨(송현수 부인)
㉢ 제기(提起) : 의견을 붙이어 의논할 것을 제초함. 드러내어 문제(問題)를 일으킴
㉣ 창상(滄桑) = 상전 벽해(桑田碧海) : 사회나 자연에 심한 변화가 생기는 일. 또는 덧없이 변하는 세태(世態).
㉤ 성조(聖祖) : 황제나 임금의 조상(祖上)을 높여 부르는 말.
㉥ 우만(牛巒) : 우면산(牛眠山)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경기도 과천시 경계에 있는 293m 높이의 산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산 77
㉦ 잔손(孱孫) : 어리고 약한 후손. 약질(弱質)로 생긴 자손.
㉧ 여량(礪良) = 여산(礪山) = 송현수
㉨ 내동(來同) : 와서 함께 모임
㉩ 흠향(歆饗) : 조상이 제상에 차려진 제사 음식을 받아들이는 행위.
# 운감(殞感) : 제사 때에 차려 놓은 음식을 귀신이 맛봄.
☼ 숙종 7년(1681년 신유) 7월 21일(임신) 【조선왕조실록】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동지사(同知事) 이민서(李敏敍)가 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을 부르도록 청하고,『생략』 임금이 말하기를,
"정비(正妃)가 탄생한 바는 모두 대군·공주라고 일컬으니, 노산군(魯山君)도 당연히 대군으로 일컬어야 한다. 그것을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이 모두 타당하게 여기자 마침내 대군으로 추가하여 일컫도록 명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그의 묘(墓)에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생략』
㉮ 주강 : 조선 시대에, 경연특진관 이하가 오시(午時 :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에 임금을 모시고 법강(法講)을 행하던 일.
③ 어제 치제문 - 정조 16년(1792) 9월 1일 정유 【㉮ 弘齋全書 22권 祭文 4】
礪良府院君 宋玹壽와 여흥부부인(驪興府夫人) 민씨(閔氏)의 묘에 대한 치제문
여량부원군의 묘는 실전(失傳)하였으므로 부부인의 묘 곁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드렸으니, 숙종 계사년(1713, 숙종39)의 고사를 쓴 것이다. 부부인의 묘는 계사년 후에 또 실전했는데, 금년에 장릉(莊陵)에 ㉯의기의 예를 행하기에 이르러 묘지를 다시 찾은 것이 마침 이때에 있었으니, 일이 우연하지 않은 듯하였다. 이에 관찰사에게 명하여 신도(神道 : 묘소로 가는 길. 묘문(墓門))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묘를 지키는 집 두 가구를 두게 하였다. 礪良府院君宋玹壽驪興府夫人閔氏墓致祭文 礪良墓失傳。爲壇於府夫人墓傍設祭。用肅廟癸巳故事也。府夫人墓。癸巳後又失傳。至今年。莊陵行義起之禮。而墓地之更尋。適在此時。事若不偶。命道伯竪短碣於神道。置守塚二戶。
九月丁酉 (구월정유) / 구월 정유일에 祇拜仙陵 (기배선릉) / 경건히 선릉을 참배했는데 ㉠聖后之思 (성후지사) / 정순왕후(定順王后)에 대한 생각이 迤及㉡驪興 (시급여흥) / 부부인에게까지 미쳤네 不須㉢提起 (불수제기) / 굳이 이야기를 끌어낼 것 없으니 萬事㉣滄桑 (만사창상) / 만사가 덧없는 변화를 거듭했네 ㉤聖祖敷恩 (성조부은) / 성조께서 은혜를 베푸시니 厚土回光 (후토회광) / 후토에 광채가 돌아왔네 翩繽處彼 (편빈처피) / 영령이 한가로이 노닌 곳 ㉥牛巒之原 (우만지원) / 저 우만의 언덕일세 爲竪短碑 (위견단비) / 이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且訪㉦孱孫 (차방잔손) / 또한 어리고 약한 후손이 찾아 왔네 ㉧礪良躋享 (여량제향) / 부원군을 받들어 제사를 드리니 一抔何許 (일배하허) / 한 잔을 받으심이 어떠리오 其㉨來同㉩歆 (기래동흠) / 이르러 함께 흠향하소서 旣墠而醑 (기선이서) / 이미 제단을 손질하고 미주(술)와 제물을 바쳤을 것이니 많이 드십시오. --- 한국고전번역원 김홍영(역) 1998
㉠ 성후(聖后) : 왕비. 경순왕후
㉡ 여흥(驪興) : 경기도 여주의 옛 지명. 여흥부부인 여흥민씨(송현수 부인)
㉢ 제기(提起) : 의견을 붙이어 의논할 것을 제초함. 드러내어 문제(問題)를 일으킴
㉣ 창상(滄桑) = 상전 벽해(桑田碧海) : 사회나 자연에 심한 변화가 생기는 일. 또는 덧없이 변하는 세태(世態).
㉤ 성조(聖祖) : 황제나 임금의 조상(祖上)을 높여 부르는 말.
㉥ 우만(牛巒) : 우면산(牛眠山)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경기도 과천시 경계에 있는 293m 높이의 산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산 77
㉦ 잔손(孱孫) : 어리고 약한 후손. 약질(弱質)로 생긴 자손.
㉧ 여량(礪良) = 여산(礪山) = 송현수
㉨ 내동(來同) : 와서 함께 모임
㉩ 흠향(歆饗) : 조상이 제상에 차려진 제사 음식을 받아들이는 행위.
# 운감(殞感) : 제사 때에 차려 놓은 음식을 귀신이 맛봄.
㉯ 의기(義起)의 예 : 규정된 예제(禮制)에는 없으나 부득이 의에 따라 일으키는 예를 말한다.
4) 配 ① 驪興府夫人 驪興閔氏 父 府使 贈 參判 紹生 祖 典較令 中立
曾祖 驥山府院君 瑾 外祖 府使 綾城 具成亮
배 여흥부부인 여흥민씨 부 부사 증 참판 소생 조 전교령 중립
증조 기산부원군 근 외조 부사 능성 구성량
出生忌年月日未祥
墓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 산 84번지 산96번지 子坐原
☛ 송 현수의 장인 민 소생은 한 명희의 장인 민 대생의 동생
☛ 여흥 민씨 : 한 명희의 처인 황려부부인(민 대성의 딸)의 친사촌
① 부부인(府夫人) : 조선시대 외명부 작위 중 하나로, 국왕의 적자(嫡子)인 大君의 正夫人과 왕비의 어머니에게 내린 정1품 작위다. 조선 중기에는 종친의 아내로서 왕의 사친이 된 여성의 작위로도 쓰이다가 철종시대부터 부대부인으로 대체되었다.
5) 時享 : 음력 10월 6일
6) 純祖 庚申(1820년) 建祠于 南原 ①藍溪祠(?) 藍田祠(건사우 남원 남계사, 남전사)
① 남계사(藍溪祠, 藍田祠) : 1766년(正祖 23년) 2월에 전라도 내 士林들의 결의에 따라 宋玹壽, 안귀행(安貴行), 안재도(安載道) 안경달(安景達)등 네 사람을 중국의 남전여씨(藍田呂氏)와 같은 향학(鄕約)의 대가 사현(四賢)들이라 하여 南原市 二白面 藍鷄里 남평(藍坪)마을에 남전여씨의 사적을 본 따 지어진 祠宇이다.
전해오는 설에 따르면 남전사(藍田祠)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라감사 이서구가 요천제방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남원시 이백면 남계리 마을 소개】
7) 長水郡 山西面 五聖里 介峙在 不祧廟 (개치재 부조묘)
宋玹壽 ㉮부조묘 全羅北道 長水郡 山西面 五聖里(개치마을) 437
장수군 유형문화재 3호. 목조건조물 / 사당. 수량3동(부조묘, 고직사, 문간채)
단종의 장인인 宋玹壽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정조15년(1791년)년 6월 10일 건립되었으나 자손들이 현 위치로 이주하면서 1928년 移建한 건축물이다. 관련 인물의 역사적 가치가 높고 건축물의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건축물의 구조수법과 세부 수법 등을 볼 때 건축적 가치가 높다.【장수군 유형문화유산】
이 부조묘의 솟을대문 안 위에는 "증보국승록대부영돈녕부사행승록대부판돈녕부사여량부원군송현수지려"라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다.
㉮ 부조묘(不祧廟) : 불천위 제사(不遷位 祭祀)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
신위를 영원히 사당에 모시는 것이 허락된 인물에게 그 후손들이 행하는 제사.
사전적으로 위패를 옮기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불천위는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아 4대가 지나도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사람의 신위를 말한다.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로 부조위(不祧位)라고도 한다. 본래 제사는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되어 있고 그 위의 조상들은 시제를 통해 모시게 되어 있으나 불천위에 봉해지면 그 자손들이 있는 한 분묘와는 별도로 사당에 신위를 모시고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으며 이러한 제사를 불천위제사 또는 불천위대제라고 한다.
불천위는 나라에서 인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 유림에서 발의하여 정한 향불천위 또는 유림불천위, 문중에서 모셔야 한다고 뜻이 모아진 사불천위(私不遷位) 또는 문중불천위로 대별된다. 국불천위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사람들로 우리나라의 경우 문묘 배향자는 모두 18명이며 그 외 왕이나 왕자, 부마 등도 그 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국불천위가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되며 향불천위와 사불천위는 조선 후기에 그 수가 너무 많아져 그 권위가 실추되는 결과를 낳았다.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므로 불천위제사는 그 가문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되며 따라서 시제사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은혜리의 퇴계 이황 종가, 하회마을의 겸암 류운룡 종가와 서애 류성룡 종가, 봉화 닭실마을의 충재 권벌 종가, 의성의 학봉 김성일 종가 등의 불천위제사가 대표적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8) 동학사 ㉮숙모전(肅慕殿) 서무에 配享
㉮ 숙모전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조선 전기에 단종의 영혼과 세조에게 항거한 충신 열사의 혼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우로 동학사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숙모전은 억울하게 죽은 단종과 사육신,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김종서 등 신라, 고려, 조선의 충절인 280여 위를 배향하고 있는 사우이다. 숙모전은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의 시신을 김시습이 혼자 수습하여 몰래 장사 치루고 동학사로 돌아와 삼은각 옆에 단을 쌓고 초혼제를 지낸 초혼단이 그 시초이다.
초혼단은 1728년(영조 4)의 무신난 때 신천영(申天永)이 초혼각과 동학사를 방화하여 폐허가 되었다가 여러 번 중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1827년(순조 27)에야 일각을 세우는 데 그치고 말았다.
1830년(순조 30)에 동학서원의 건립이 추진되면서 서원이 창건되면서, 삼상(三相)·육신(六臣)과 삼은(三隱)·계림백(鷄林伯)을 제향하고 단종과 여러 절신을 따로 모셔 군신의 자리를 나누었다. 그러나 서원은 6년 후 훼철되었고 1864년(고종 1) 사찰이 대대적으로 중건되면서 가람 40칸과 함께 초혼각 3칸이 마련되었다. 1904년(고종 41)에는 초혼각을 숙모전이라 개칭하고 사액하였으며, 단종의 비 정순황후를 단종 위패에 합독(合櫝 : 부부의 신주(神主)를 한 독 안에 넣음. 또는 그 독)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김복한(金福漢)·최영조(崔永祚)·송계헌(宋桂憲) 등의 주동으로 제수(祭需)와 중수비를 모아 증축에 착수하여 완공하였고, 1921년에는 다시 두 배로 중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형태] 숙모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초익공 형식의 사당 건물이다. 저면은 띠살 사분각으로 배공시킬 수 있다. 숙모전 전정 동·서변에 늘어선 동·서무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건물이며, 1883년(고종 20)에 충청좌도어사 우석에 의해 건립되어 군신을 나누어 봉사하게 하였다.
[의의와 평가] 신라, 고려, 조선 삼대의 충절인이 배향되어 있어 일반적인 서원 사우의 특징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유교와 불교가 한자리에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현재 95위가 모셔져 있고 음력 3월 보름과 10월 24일에 추모제를 지낸다.
숙모전 정전 :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
숙모전 정전에는 비운의 임금 단종(李弘暐(이홍위))과 그의 妃(비)인 定順王后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숙모전 서무(西廡) 배향위차 숙모전 동무 배향위차
1. 貞愍公 宋玹壽(礪山) 외 47인 1.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全州) 외 46인
✍동무 18위에 충강공 송간. 동무 31위에 돈학공 송경원 배위
9) 子 二男二女 長男 宋琚 (官 蔚山縣監) 次男 宋珀
長女 ①定順王后(단종비) 二女 辛肅 (官 判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