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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여행 길라잡이
城과 宮과 門으로 독해하는 北京
맹 강 현
(북경대 박사, 성균관 교무부장)
1. 중국의 수도 - 북경
북경은 세계적인 도시다. 중국의 수도로서 중국의 정치, 외교, 행정, 경제, 문화, 교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경은 중앙정부의 직할시이다. 직할시는 성(省)과 더불어, 최고 지방행정단위이다.
그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지만, 주민으로 등록된 인구가 대략 1천4백만 명에 이르며, 반년 이상 거주하는 유동인구까지 합치면 2천만 명을 훨씬 넘어선다. 시내 면적은 서울의 두 배 정도는 되고, 현(縣) 등 교외지역까지 포함한, 직할시의 전체 면적은 한국의 경기도 넓이와 비슷하다. 지금 이 북경이 몸살을 앓고 있다. 북쪽 70킬로미터 바깥에 황사를 일으키는 평원이 자리하고 있어, 봄마다 하늘을 혼탁하게 있다. 어쨌든, 북경은 그 규모와 수도라는 상징성, 그리고 많은 문제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 역사적, 문화적 차원에서 충분히 주목하고 구경할 만한 도시이다.
북경이 수도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금(金)나라, 원(元)나라 때부터이며, 그 궁성이 지금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명(明)나라 성조(成祖: 永樂帝)가 15세기초에 남경에서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청(淸)나라에 이르러, 궁성과 도로가 더욱 정비되고 화려함을 더하게 되었다.
신중국이 1949년 10월 1일 세워진 이후, 도로를 정비하면서, 성곽과 건물을 적잖이 헐어냈다. 성곽이 교통을 막고 있고, 도시 확장에 걸림돌이 되었으므로, 그 불가피한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성곽 외에 궁궐과 문루 등 중요하고 상징적인 건축물은 보존되어 있다.
북경은 그 한가운데에 있는 궁성의 대칭축을 중심으로 해서, 바깥으로 확대되고 있는 전형적인 도시다. 즉, 뭉쳐진 국수 반죽을 늘여서 펴듯이, 중심은 두텁고, 바깥은 확대되며 엷어지는 형국이다. 그래서, 2환로(二環路), 3환로, 4환로, 5환로, 이런 도로 이름이 생겨났다. 환(環)이란 가락지 처럼 동그랗게 둘러싸는 것을 뜻한다. 북경의 궁성, 즉 내성과 외성을 감싸는 도로는 2환로이다. 지금의 북경은 5환로까지 생겨났으니, 이 5환로 안이 시내라 할 수 있고, 그 바깥은 교외지역이라 하겠다.
그리고, 북경은 산이나 바다를 옆에 끼고서, 이것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도시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넓은 분지에 인공적으로 설계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동,서,남,북이 명료하다. 즉 동-서, 남-북의 큰 도로는 있지만, 동남-서북, 동북-서남, 이러한 방향을 갖는 큰 도로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북경에선 어느 도로에 서 있더라도, 그 방향잡기에 혼선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렇게 방향이 확실하게 잡힌 것은, 임금(천자)은 남면(북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봄)한다는 사상, 또는 찬 기운이 있는 북쪽을 등져야 한다는 풍수 관념과도 관련이 있다. 중요한 것은, 북경은 그 대칭축을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그 도시 풍경을 잘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2008년 북경 올림픽 개막식 컨셉의 하나도 이 대칭축이었다.
2. 성(城), 단(壇), 묘(廟), 원(園), 해(海)
궁성은 네 지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자금성, 황성, 내성, 외성이 그것이다.
자금성(紫禁城)은 말 그대로 하나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궁궐이다. 보통 ‘고궁(古宮)’이라 부르는 지역이다. 사방 모서리에 각루(角樓)를 세웠다. 서울 경복궁의 동십자각, 서십자각처럼 말이다. 자금성의 크기는, 남북으로 9백 61미터, 동서로 7백53미터에 달한다. 천자(天子)가 사는 곳이라 9천9백9십9칸의 건물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 칸 수는 8천7백7칸이라는 조사결과가 있다. 자금성을 둘러싸고 물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통자하(筒子河)라고 부른다. 즉 방어를 위해 일부러 물로써 사방을 둘러친 ‘해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해자의 너비는 52미터이다.
이 자금성과 거리를 두고 다시,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 바로 황성(皇城)이다. 그 길이는 9리에 달한다,
내성(內城)은 다시 황성과 거리를 두고, 황성을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외성(外城)은 내성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성의 남쪽 면을 북쪽 면으로 하여, 다시 하나의 성곽을 형성하고 있다.
즉, 내성이 정사각형 모양으로서, 황성을 둘러싸고 있다면, 외성은 내성의 남쪽에서 직사각형 모양으로, 내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각 모서리마다 각루가 있었다. 내,외성 전체 길이는 37킬로미터에 달하며, 성벽 높이는 10미터 이상이다. 내, 외성 바깥에 있는 해자를 호성하(護城河)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많이 매몰되어 없어졌다. 그리고, 원나라 때까지는 지금의 내성 북쪽에도 성곽이 있었다. 즉 지금의 내성 북쪽면이 명나라 때 남쪽 방향으로 이동한 셈이다.
자금성에는 황제 일가와 이들을 모시는 환관(내시)과 궁녀들이 살았으며, 황성 안에는 관청이 자리하고, 내성 안에는 황족, 귀족들이 살고, 외성 안에는 서민들이 살았다.
외성, 내성, 황성, 자금성의 중심되는 건물과 문은 모두 중앙 축선에 자리하며, 기타 건물은 음양 원리에 따라, 동쪽과 서쪽에 대칭을 이루며 서있다.
내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바깥에 천단, 지단, 일단, 월단이 각각 남, 북, 동,서에 설치되어 있다. 이것들은 하늘, 땅, 해, 달에 제사 지내는 곳이다.
이 네 곳의 단과 사직단, 선농단, 선잠단, 천신단(天神壇), 지지단(地祗壇)을 합쳐 구단(九壇)이라 불렀다.
선잠단(先蠶壇)은 황성 안 서쪽에 있다. 지금의 북해공원 북문 안쪽이다. 선잠단은 누에치기가 잘되기를, 그래서 옷 만드는 일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제단으로서, 유일하게 여성(황후)이 제사지내는 곳이었다.
천단 역시 내성 바깥에 있지만, 외성 안, 남쪽 끝에 있다. 천단은 중심 축선의 동쪽에 있으며, 황제가 자금성에서 이 곳으로 제사지내러 올 때는 천단의 서쪽 문을 통하여 들어갔다. 천단에는 기년전 ,황궁우, 회음벽, 원구단 등 볼거리가 있다.
선농단(先農壇), 천신단, 지지단은 천단과 대칭으로 마주하여 중심 축선의 서쪽에 있으며, 황제가 친림하여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제단이다.
내성 안, 동북쪽에 문묘(공묘)와 태학(국자감)이 있으며, 라마교 사찰인 옹화궁(雍和宮)이 있다. 또 내성 안, 황궁 서쪽에 인공호수인 남해, 중해, 북해가 있으며, 그 위에 전해(前海), 후해(後海)가 있다. 남해와 중해를 합쳐 중남해(中南海)라 부르며, 전해와 후해를 합쳐 십찰해(什刹海)라 부른다. 바다 아닌 바다들이다. 현재, 중남해는 중국 중앙정부가 들어서 있고, 정부 요인들이 살고 있어, 외부에 개방하지 않는다. 천안문 서쪽으로 가면 신화문(新華門)이라는 문이 하나 있다. 민국초기에 새로 만든 문인데, 이 곳이 중남해의 남문이다.
북해는 북해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화원과 더불어 대표적인 황족 정원으로 관광객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구룡벽 등 여러 명물이 있다. 십찰해는 한국의 인사동 처럼 골동품을 파는 가게가 많으며, 주변에 산재한 독특한 골목길, 즉 호동(胡同: 몽고말로서 ‘샘이 있는 곳’을 뜻함. 즉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을 둘러보기 위해 외국인들이 자전거로 끄는 인력거를 타고 구경하는 곳이다. 밤에 가면, 주변의 운치있는 카페나 식당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다.
황성 안, 즉 천안문 안쪽 동쪽 편에 태묘(太廟 :종묘)가, 이와 대칭으로 사직단(社稷壇)이 자리한다. 태묘는 역대 황제들을 제사지내는 곳이고, 사직단은 사신(社神: 지신)과 직신(稷神: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다. 지금 태묘 자리 옆에는 인민문화궁전이, 사직단 자리 옆에는 중산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황족 정원이라 일컫는 이화원(颐和園), 원명원(圓明園)은 아예 내성,외성과 멀찍하게 떨어져 서북쪽 외곽에 자리한다. 이 곳은 옛날에는 교외였지만, 지금은 번화한 시내와 연접하고 있다. 이화원은 불향각, 곤명호가 유명하다. 원명원은 19세기말 8국 연합군이 침략할 때에 불태워져서 그 원형을 거의 상실하였으나, 수풀과 물이 많아 산책하기에 좋다.
북경은 한마디로 문(門)의 도시다. 문이 아주 많다. 지금의 궁성과 원(園), 단(壇), 묘(廟), 부(府) 등에 남아있는 문도 많거니와, 없어진 문의 이름도 도로명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들은 지상으로부터 15미터에서 20미터에 달한다.
자금성과 황성의 문이 아닌, 내성과 외성 성곽의 각 문은 두 개로 짝을 이루고 있다. 내성과 외성은 방위를 위한 성곽이기 때문이다. 즉, 전루(箭樓)가 앞에 있고, 안쪽으로 공식적인 문이 자리하는 것이다. 전루란, 말 그대로 화살이나 대포를 쏠 수 있게끔 여러 층의 구멍이 있는 군사용 누각이다. 문과 전루는 옹성(甕城: 항아리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성)이 연결된다.
3. 중앙 축선으로 이어지는 문(門), 교(橋), 전(殿), 궁(宮), 정(亭), 루(樓)
외성의 맨남쪽 문으로서, 중앙 축선에 자리하고 있는 문은 영정문(永定門)이다. 외국 사신이 들어올 때, 맨 처음 들어서는 문이다.
영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천단이 보이고, 왼쪽에 선농단이 보인다. 이 중앙도로가 전문(前門)까지 이어진다. 전문 앞의 큰 길을 ‘전문대로’라고 부른다.
‘전문’은 민간에서 부르는 속칭이고, 공식 명칭은 정양문(正陽門)이다. 중앙은 정(正)이고, 남쪽은 음양에서 양(陽)이기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정양문 전루는 일곱 칸에 4층으로 되어 있으며, 동, 서, 남쪽에 94개의 구멍을 내었다.
문과 전루가 옹성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옹성 안쪽, 즉 정양문 바로 앞 양쪽에 사당이 있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이 관음보살상을 모신 관음묘(觀音廟), 서쪽에 있는 것이 관우를 모신 관제묘(關帝廟)이다. 이 전루 앞에 냇물이 흘러, 다리가 있었고, 그 앞에 패루(牌樓)가 있었다. 이 패루는 다른 패루가 세 칸으로 된 것과 달리, 유일하게 다섯 칸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변형된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패루는 아치형으로 만들어져 그 구역을 드러내는 입간판 역할을 한다. 이 전문 앞 가까운 동쪽에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오리구이집 전취덕(全聚德)이, 서쪽에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찻집 노사다관(老舍茶館)이 아직 영업하고 있다.
전문대로 중간에 무지개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를 천교(天橋)라 했다. 이 밑으로 배가 다닐 정도의 냇물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이 다리도 냇물도 찾아볼 수 없다.
전문대로 서쪽에 있던 대책란(大柵欄: 따스랄)이라는 지역은, 300여 미터의 길 양쪽에 각종 점포가 있어서, 지금의 왕부정(王府井) 거리처럼 번화한 상업지구였다. 대책란 서쪽에 자리한 유리창(琉璃廠)이란 곳은, 지금도 문방사보를 비롯하여 고서화, 골동품을 파는 곳이다. 원래 원, 명나라 때 유리(琉璃: 수정(水晶)의 한 종류)를 만드는 가마가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영정문이 외성의 정문이라면, 정양문은 내성의 정문이다. 정양문을 들어선 후, 백보 거리에 대청문(大淸門)이 있었다. 정양문과 대청문 사이에 기반가(棋盤街)라는 거리가 있었는데, 바둑판 처럼 선을 그어 낮은 울타리를 쳐놓았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여기까지가 평민들이 들어와서 장사도 할 수 있는 곳이다.
대청문은 명나라 때 이름은 대명문(大明門)이었고, 중화민국이 들어선 후에는 중화문(中華門)이었다. 이 문은 서울의 광화문 하단처럼 생겨서, 그 문(구멍)도 세 개인,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문이었다. 어떤 이는 이 문이 황궁의 정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천안문이 황궁의 정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이 대청문은 흔적조차 없다. 왜냐하면, 신중국이 세워진 후 1959년 천안문 광장을 확장할 때 이 문을 헐어버리고, 이 곳에 모택동기념관을 세웠기 때문이다. 즉 이 곳이 지금의 광장 남쪽이다.
여기서부터 천안문 앞까지 천보랑(千步廊), 즉 천보를 걷는 회랑이 있었고, 동서쪽 양편으로, 서울 광화문 앞 육조거리처럼 육부(六部) 등 여러 관청이 있었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철거되어 지금의 광장이 되었다. 그리고, 동쪽에는 중국역사박물관,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이 들어섰고, 광장 중앙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세워졌다.
명나라 때는 승천문(承天門)이라 불리웠던 천안문은 중국의 국가 휘장에도 그려져 있는 등 중국을 상징하는 모습이 되었다. 또 천안문에 국가 휘장이 걸려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천안문과 그 앞 광장이 천하제일승경(勝景), 즉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경치라고 자찬한다. 천안문 앞과 뒤에는 화표(華表)라고 하는 돌기둥이 이정표처럼 양 옆으로 서있다. 화표 안쪽 양 옆에는 돌사자가 앉아 있다. 서울 광화문 앞의 해치(獬豸)처럼 말이다.
천안문 앞을 흐르는 냇물을 외금수하(外金水河)라고 부른다. 내금수하(內金水河)는 오문 안쪽에 있다. 외금수하, 즉 천안문 앞에는 양 옆으로 일곱 길의 돌다리가 있다. 이를 금수교(金水橋)라 부른다. 이 가운데 다섯 길은 천안문의 다섯 문(구멍)과 대응하고 있는데, 가운뎃 길은 어도(御道)로서 황제만이 다닐 수 있고, 그 양 옆 둘은 황족, 다시 그 바깥 둘은 3품 이상의 관리가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다리를 품급교(品給橋)라고도 불렀다. 천안문을 통과하면 단문(端門)이 있고, 이 문을 지나면 오문이 있다.
오문(午門)은 자금성의 정문이다. 오문은 독특하게 요(凹)자형으로 되어 있어 팔을 벌려 앞쪽을 껴안는 모습이다. 이렇게 양쪽의 벌린 부분을 ‘궐(闕)’이라고 했다.
오문 다음에 있는 문이 태화문(泰和門)이다. 태화전의 정문이다. 경복궁 근정전의 정문이 근정문인 것처럼 말이다.
황성 및 자금성의 구조를 삼조오문(三朝五門), 전조후침(前朝後寢)이라 한다. 삼조란 외조(外朝), 치조(治朝), 내조(內朝 :연조(燕朝))를 말한다. 외조란 관청이 있는 부분이고, 치조란 황제가 공무를 보는 부분, 내조란 황제와 그 가족의 침전과 생활공간이 있는 곳이다. 오문이란 다섯 개의 문이 앞에 있다는 것이다. 즉 대청문, 천안문, 단문, 오문, 태화문을 가리킨다.
전조후침이란, 앞쪽에 조정이 자리하고 뒤쪽에 침전이 자리한다는 뜻이다.
자금성은 전3전, 후3궁 구조라 하는데, 전3전이란 태화전(泰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즉 치조 공간을 말한다. 전 3전 양옆으로 문화전(文華殿 :동쪽), 무영전(武英殿 :서쪽)이 날개처럼 자리하고 있다. 문무(文武)개념을, 음양에 따라 동서로 배치한 것이다.
후3궁이란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즉 내조를 가리킨다. 후3궁 양옆으로도 각각 여섯 곳의 상대적으로 작은 궁전이 자리하고 있다. 곤녕궁 뒤의 중앙 축선은 곤녕문, 승광문(承光門), 흠안전(欽安殿), 순정문(順貞門)으로 이어진다. 3궁 뒤편은 어화원(御花園)인데, 꽃과 나무, 정자 등으로 꾸민 정원이다. 이 곳을 나서면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에 다다른다.
신무문(神武門)의 원래 이름은 현무문(玄武門)이다. 현무는 북방의 신이기에 북쪽 문 이름으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 성조(聖祖: 康熙帝)의 이름이 현엽(玄燁)이었기에, 이 현자를 피하기 위해 신무문으로 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쨌든 현무문이나 신무문이나 그 뜻은 같다.
신무문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이를 경산(景山)이라 부른다. 신무문에서 경산 꼭대기에 오르기 전, 그 축선에 누각이 하나 있는데, 이를 기망루(綺望樓)라 한다.
경산은 매산(煤山) 또는 만세산(萬歲山)으로도 불리웠으며, 인공적으로 만든 산이다. 다섯 봉우리를 자그많게 만들었는데, 중앙 축선에 있는 가운데 봉우리를 가장 높다랗게 하였다. 부근의 인공호수인 남, 중, 북해를 만들면서 그 흙을 여기에 쏟아부은 것이다. 원래 이 자리는 원나라 궁궐이 있었는데, 원나라가 망하고 나서 명나라가 일부러 원나라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이 곳에 흙으로 궁궐터를 묻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그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사종(思宗 :崇禎帝)은 후금의 군대가 쳐들어와 나라가 망하자, 이 곳에 올라와 목을 매어 죽었다.
다섯 봉우리 위에는 각각 정자를 세웠으며, 그 정자 안에는 다섯가지 맛, 즉 신 맛, 단 맛, 쓴 맛, 매운 맛, 짠 맛을 나타내는 신을 모셨다.
중앙 축선에 있는 가장 높은 정자가 만춘정(萬春亭)이다. 이 정자에 올라서면 한 눈에 자금성 그 현란한 노란색 지붕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만춘정 북쪽으로 내려가면, 역시 중앙 축선에 수황전(壽皇殿)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이 일대가 공원으로 꾸며져 경산공원으로 불리운다.
이 경산공원 구역을 벗어나, 축선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지안문(地安門)이 나오는데,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지안문의 세 문(구멍)은 네모 형태였고, 대청문과 천안문의 문(구멍)은 동그란 형태였다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남)을 뜻한다.
신무문이 자금성의 북문이라면, 지안문은 황궁의 북문이다. 지안문 다음에 물길이 있고, 이 곳을 건너는 다리가 지교(地橋)이다. 전문대로에 있는 천교와 상대되는 개념이다. 지교를 지나면, 고루(鼓樓)와 종루(鐘樓)가 있다. 고루는 말 그대로 북을 달아놓은 곳이고, 종루는 종을 달아 놓았다. 밤 초경, 삼경, 오경을 합쳐 1백 8회씩 북소리와 종소리를 울려서 시간을 알렸던 곳이다.
고루 서쪽 편이 십찰해 지역이다.
영정문에서 종루까지 약 8킬로미터(정확하게 7천8백미터)이다. 즉, 영정문이 중앙축선의 시작이고, 종루가 이 축선의 끝인 셈이다. 영정문, 천교, 정양문, 대청문, 천안문, 단문, 오문, 태화문, 전조3전, 건청문, 후조3궁, 곤녕문, 승광문, 흠안전, 순정문, 신무문, 기망루, 만춘정, 수황전, 지안문, 지교, 고루, 종루로 이어지는 선이다.
4. 자금성, 황성, 내성, 외성의 문(門)
자금성, 황성, 내성, 외성의 문을 따로 정리해 보자.
이를 내구외칠황칠금사(內九外七皇七禁四)라 한다. 즉 그 문이 내성은 아홉 곳, 외성은 일곱 곳, 황성도 일곱 곳, 자금성은 네 곳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자금성의 정문, 즉 남문은 오문이며, 동문은 동화문(東華門), 서문은 서화문(西華門), 북문은 신무문이다. 모두 네 곳이다.
황성은, 그 맨 앞에 대청문, 그 뒤로 천안문이 있고, 그 동문은 동안문(東安門), 서문은 서안문(西安門), 북문은 지안문이다. 그리고, 천안문 동쪽으로 장안좌문(長安左門), 서쪽으로 장안우문(長安右門)이 있어서 모두 일곱 곳이 된다. 장안좌문, 장안우문은 천안문 옆 선에서 연결되는 문이 아니라, 천안문 양 옆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성벽의 문이다.
좌우 구분은, 황제가 남면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이 문들을 제외한, 황성 성벽의 다른 문들은 모두 근대에 뚫은 것이다.
내성의 문은 북쪽, 서쪽, 동쪽에 각각 둘, 남쪽에 셋이다. 그래서, 사방 아홉 문이라서 구문이라 했고, 이를 지키는 장수를 구문제독(九門提督)이라 했다.
즉, 북쪽면에 안정문(安定門 :동쪽), 덕승문(德勝門 :서쪽), 동쪽면에 북쪽으로부터 동직문(東直門), 조양문(朝陽門), 서쪽면에 북쪽으로부터 서직문(西直門), 부성문(阜成門)이 있었고, 남쪽면에는 정양문 동쪽으로 숭문문(崇文門), 서쪽으로 선무문(宣武門)이 있었다. 역시 각 문 앞에 전루가 있고, 패루가 있었으며, 성의 모서리에는 각루가 있었다. 내성의 각루로서 현재 동남쪽 각루가 남아 있다. 덕승문, 안정문은 명나라 초기, 내성 북쪽면의 성벽이 남쪽으로 이동할 때 그 건덕문(健德門), 안정문(安貞門)을 개명한 것이다.
일제침략기에 이르러, 장안대로(천안문 앞 동서를 가로지르는 큰길) 양끝이 끝나는 곳, 즉 조양문 남쪽에 계명문(啓明門), 부성문 남쪽에 장안문(長安門)을 새로 만들었는데, 광복된 후에 건국문(建國門), 부흥문(復興門)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민국 초기에 정양문과 선무문 사이에 화평문(和平門)을 만들었으나, 역시 남아있지 않다. 지금 내성 문 가운데, 정양문,덕승문이 그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내성 아홉 곳은 각각 그 용도가 정해져 있었다. 즉, 정양문은 황제가 행차하는 문이며, 숭문문은 술과 어육을 들여오는 곳, 동직문은 목재, 서직문은 물, 부성문은 땔감(煤), 조양문은 운하를 통해 운송되는 남방의 쌀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리고 덕승문을은 전쟁하러 출정하는 문이었으며, 죄수들은 선무문을 통해서 형장으로 갔고, 분뇨는 안정문을 통해 외부로 반출되었다.
외성 문은 남쪽면으로는 정문인 영정문, 그 동쪽에 좌안문(左安門), 서쪽에 우안문(右安門)이 있었고, 서쪽 면에 광안문(廣安門), 동쪽 면에 광거문(廣渠門)이 있었다. 북쪽면에서 내성과 연결되는 모서리쪽에 동편문(東便門: 동쪽), 서편문(西便門: 서쪽)이 있어서, 모두 일곱 곳이다. 이 문들도 영정문을 제외하곤 현재 복원되어 있지 않다.
이상의 여러 건물들과 문들 가운데 그 상당수의 이름은, 1644년 청(淸)나라가 전중국을 장악할 즈음에 바뀐 것이다.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 핵심 건물들과 문들 이름을 보면, 특히 중(中)자와 화(和)자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표에 따라 천하를 다스리려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를 배반하면서 달려왔음은 주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