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개의 상자와 네 개의 벽돌로 만든 이상한 작업대 앞에 섰다. 바로 오르지 않고 간만에 큰 붓으로 벽에 페인트칠하며 감각을 익혔다. 크긴 해도 지금 내 손에 있는 것도 붓은 붓이다. 붓을 놓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도 없다. 예전에는 이것보다 작아도 너무 작은 붓으로 먹고살았다. 그런 내가 지금 큰 붓에 끈적거리는 흰색 페인트를 묻혀 벽에 대고 문지른다. 페인트와 물의 배합이 적절하지 않아 푹 찍은 붓이 벽면을 문지를 때마다 페인트가 미끄럼 타듯이 흘러내린다. 한 말짜리 페인트통을 겨우 들어 좀 벅벅 하게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무 되어 붓이 잘 나가지 않는 대신 페인트가 흘러내리지는 않는다. 삼차 배합은 적당하여, 되지도 묽지도 않아 원하는 대로 붓이 움직인다. 그때야 작업대에 올랐다. 페인트를 갠 통은 있던 흔들거리는 나무 선반에 올렸다. 팔을 쭉 펴면 추녀 끝이 겨우 닿을 정도 높이밖에 안 되는 작업대 위에서 회색 시멘트를 흰색으로 조금씩 바꾸는데 채 얼마 되지 않아 붓 감각이 되살아나더니, 이내 음악에 맞추어 흥겨워졌다. 동쪽 산등성이가 붉게 물드는 것으로 보아 곧 해가 뜰 것이다.
이 시각, 페인트칠하는 것을 돕는 음악은 모차르트다. 교향곡 제25번으로 시작한 모차르트의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페인트 붓을 움직이는 내 손놀림도 가벼워졌다. 때까치가 사납게 지저귀고, 저 멀리서 아침부터 산비둘기 소리 구성진데, 새 소리가 음악을 방해하지 않고 음악도 새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페인트칠하려고 선택한 음악이 적중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창틀에 페인트가 묻지 않게 붓놀림을 늦추어 조심스럽게 작업하는데 이도 음악이 돕는다. 마침 느린 안단테로 바뀌없다.
꼼꼼하고 정밀하게 하려면 칠하기 전에 준비작업으로 창틀을 가리는 것부터 해야 했다. 그 생각을 아니 한 건 아니지만, 예전 붓을 사용한 숱한 경력을 믿고 건너 띄고 바로 페인트칠하려고 작정한 것이다. 아무리 찬찬하게 칠한다 해도 수직으로 된 벽과 창틀 사이에서 정확하게 페인트를 멈추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하여 몇 방울이 창틀과 유리에 떨어졌다. 잽싸게 장갑 낀 손으로 마르기 전에 쓱 문질렀다. 이런 실수를 몇 번 하면서 점점 요령이 생겨 후는 창틀과 유리에 페인트 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줄어들었다.
"며칠은 해야겠는데요?"
모차르트를 들으며 페인트칠하느라 남자가 등 뒤에 서 있는 것도 몰랐다.
"하루면 끝나!"
"희망 사항이죠?"
"내기할까?"
남자가 내가 하는 걸 보고 며칠이 걸릴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그럴 수 있는 게 비해당 전면은 빠를 속도로 페인트칠할 수가 없다. 두 개의 창과 현관을 피해야 하므로 다른 세 벽면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지만, 내 계산에, 이 일이 하루에 끝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 바람에 남자가 선뜻 내기에 응하지 않는다.
"거들까요?"
"나중에."
거들겠다는 남자의 말을 거절했다. 두 시간 반 만에 전면 페인트칠이 모두 끝났다. 그때야 남자가 내 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왼쪽 벽으로 그쪽에는 창이 없다. 하지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건, 벽 가까이에 엉겅퀴와 식물을 심었으므로 그것들에 페인트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롤러를 움직여야 한다.
"여긴 장애물이 없으니 같이 해요."
"그러면 좋지."
초소에서 만든 지팡이에 롤러를 끼워 남자가 페인트를 넉넉히 묻혀 마구 문지르는 것을 보고 야릇하게 웃었다. 웃는 걸 본 남자도 덩달아 웃더니만 슬쩍 내가 칠한 것을 본다.
"제가 할 일이 아니네요!"
"왜? 같이 하면 좋은데."
"붓질은 못해도 이건 할 것 같았는데."
남자가 롤러를 빼서 물통에 담그고는 안에 들어가 버렸다. 이리저리 남자가 칠한 페인트가 마르기 전에 얼룩이 지지 않게 덧칠을 했다. 걸릴 것이 없으므로 롤러에 페인트를 넉넉히 묻혀 쓱쓱 같은 방향으로 문질러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작업대에서 내려와 심플을 보니 한 개비도 없고, 그 옆에 박하담배가 있다. 내 것이 떨어진 걸 안 남자가 제 것을 알아서 피우라고 갔다 놓았다. 순한 박하담배 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는 데 상큼하고 시원하다. 담배를 사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오전 페인트칠은 두 벽면에 그쳤다.
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데다 무리하게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점심을 의성역 부근 어느 국밥집에서 해결하고 우리는 어떤 곳을 찾아 시내를 헤맸다. 며칠 전 남자가 한 말, '시골다방 구경 가세요.'를 오늘에야 행동으로 옮기려 하는데 도무지 다방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청송의 어느 작은 면에 열대엿 개 다방이 있는 것에 비하면 의성읍은 그보다 훨씬 큰데도 다방 간판 찾기가 쉽잖다. 멀리 보이는 하나를 발견하고 갔더니만 자물쇠가 잠겼다. 오기로 우리는 찾아 돌아다니다가 이 층에 있는 다방에 들어갔다.
짙게 화장을 하여 나이를 짐작하지 못할 서너 여자가 있는 말대로 시골냄새가 물씬한 다방이다.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한 여자가 남자 옆에 앉아 주문을 받았다.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는 데도 다방이란 곳이 어설프기 그지없다. 나와 마찬가지로 남자도 다방을 들락거리지 않는다. 그런데 며칠 전에 시골다방 구경하겠다는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요'라고만 한다.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자리를 뜨고 싶었다.
"더 있을 거야?"
가자는 뜻으로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몫 두 잔 외 쓸데없이 두 여자 몫까지 남자가 계산했다. 오후에는 페인트 붓을 들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좋아하는 노래를 각자 택하여 길게 들었다. 노래를 듣다 말고 남자가 노래방을 하고 싶다고 했다. 프로그램을 켜주니 남자가 혼자서 마이크를 잡고 한 시간 이상을 신나게 노래하는데 레퍼토리가 다양하다. 옛날 노래부터, 요즘 유행하는 것까지. 남자의 노래를 들으며 한 생각을 했다. '저 솜씨면, 앞으로 비해당 가수로 손색이 없다.'
남자가 비해당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는 사이 슬그머니 밖에 나왔다. 오늘은 그만하겠다는 생각을 바꾸고 페인트 붓을 들었다. 오른쪽 벽면을 칠한 것이다. 넘어가는 해가 비치는 쪽이지만, 진 후여서 땀을 적게 흘릴 것이란 판단에서였고, 혼자서도 잘 노는 남자를 방해하지 않고 나 혼자 가능한 페인트칠이다. 이렇게 해서 뒷벽만 남기고 페인트칠을 수십 년 만에 한 날이다. 갈라진 틈을 얼마 전에 버티로 메워 거미줄같이 지저분하던 벽이 하얗게 변했으니, 흠씬 땀 흘린 보람이 있다.
2011.07.07
의성 비해당 원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