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두 막
조 철 형
우리 동네에 과일가게가 입점했다. 상호가 ‘자연팜’이다. 자연을 판다는 그럴싸한 옥호(屋號)이다. 인근에 대형 마트들도 있는데 젊은 부부가 가게를 차렸다. 몇 달 버티다 투자비도 못 건지고 문 닫는 게 허다한데 용기가 대견스러웠으며 예감도 좋았다. 집을 나설 때나 귀가 할 때도 눈길이 자연팜 쪽으로 간다. 진열된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입맛을 당긴다. 24시 가게이므로 언제나 들를 수 있다. 제법 불어난 충성고객에게 주인은 로열 고객으로 품질과 가격, 친절과 함께 서비스한다. 이민 가서 밤잠 안 자고 식품가게를 운영하여 성공한 친구처럼 자연팜도 오피스텔촌에서 폐점 고비를 넘기며 신뢰받는 가게로 자리 잡았다. 귀갓길에 과일들이 손짓을 하여 나도 몰래 사온 참외를 먹다보니 옛날 원두막의 정경이 눈에 떠오른다.
6.25전란을 겪느라 허리가 휠 정도였는데 농사마저 흉년이 들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다시피 하였다. 고달픈 보릿고개를 감안하여 아버지는 칠석 무렵에 출하하는 개구리참외 농사를 지으셨다. 숨 쉬는 보명개 토질의 밭에 거름은 숙성한 천연퇴비로 했다. 작업은 퇴비고에서 이루어지는데 바닥에 깔린 솔잎 위에 떡갈나무 잎을 쌓고, 가래나무 뿌리와 목초액으로 충(蟲)을 박멸하고 살균 처리한 분뇨에 깻묵, 재를 섞어 숙성시키면, 발효되어 영양이 듬뿍한 천연 알칼리성 비료가 된다. 아버지와 함께 이 퇴비를 만드느라 코를 막고 꽤나 비지땀을 흘렸다. 경사진 밭이랑은 종(縱)으로 경사를 따라 둑을 만든다. 비가와도 흙이 숨 쉴 수 있도록 함이다. 둑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덩이를 파고 퇴비를 놓는다. 이틀 후에 씨를 얹고 흙을 덮는다. 이때부터 철저한 병충해 예방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열매식물의 자연 순환 이치를 터득하고 개발한 유기농 재배와 병충해 예방 노하우(KNOW HOW)가 비로서 일사분란하게 펼쳐진다.
드디어 밭 전체가 잘 보이는 곳에 원두막이 자리 잡는다. 2층 통나무 다락방으로 1층은 공간 2층은 통나무 누대에 발이 내려진 볏짚 원두막(園頭幕)이 등장한다. *와과로(蛙瓜樓)라 쓴 현판을 달았다. 다행히 곁에 지하수 펌프도 설치하였다. 다음 날 풍년 기원제를 원두막에서 치른다. 병충해와 부정을 타지 않은 건강한 참외를 기원한 것이다. 전에 원두막이 밭 한가운데 있다 보니 사람들의 왕래를 피할 수 없었다. 참외 순들이 아무 까닭 없이 병들어 폐농한 것을 상기하여 원두막을 아예 밭과 격리시켰다. 사람들이 병을 옮긴 탓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서리를 맞아도 좋으니 병충해만은 막으라 하셨고, 참외 밭의 주인은 참외이니 참외한테 물어보고 들어가라 하시며 원두막 훈령 1호를 포고하셨다. ‘들어 갈 때는 손을 씻고 장갑을 끼며 신발은 상비된 목초액으로 살균한다.’
하학 후에는 진돌이(진도개)와 함께 원두막에서 지낸다. 진돌이는 참외밭 호위 무사다. 동물적 감각으로 제 몫을 톡톡히 해낸다. 개구리참외 쌍떡잎이 솟아나면, 새벽에 출몰하는 땅속의 무법자 두더지를 차단했다. 들쥐는 얼씬도 못했다. 참외 밭에 눈독을 들이는 낯 선 사람들 까지도.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을 알 리 없지만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이처럼 철통같은 수비로 참외 순들이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우면 벌은 풍년을 구가하고 나비는 춤춘다.
원두막은 망루(望樓)의 역할 뿐만이 아니라 마을 길목 만남의 정자이다. 형님이 만든 광석 라디오 덕분에 원두막은 일기예보 기상대가 되기도 하며 밤에는 동네 처녀 총각들의 사교 장소가 된다. 집배원 아저씨가 잠시 쉬어 가며, 윗동네 누나들이 양장점에 다녀오며 손을 흔든다. 뒷산에 버섯이 많아 아주머니들이 꾀꼬리, 싸리, 느타리버섯을 채취하여 원두막에서 손질한 후 골고루 온정과 함께 나눈다.
어느 날 건넛마을 상달 형 할머니께서 군사우편을 갖고 오셨기에 읽어 드렸다. 내용인 즉 운전병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손자가 운전사가 되었다는 자랑을 멈추지 않으셨고.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친구들을 데리고 와 ‘언문’을 가르쳐 달라고 막무가내로 조르셨다. 할 수 없이 아버지께 허락 받고 야학당 까까머리 선생이 되었다. 할머니들은 모래주머니를 보자기에 담아 와서 모래위에 글쓰기를 하였다. 어서 손자에게 답장을 쓰고 싶은 심정은 오죽 하였겠는가. 나는 땀 흘리는 할머니 뒤에서 부채질을 하였다. 한편 아버지께서는 원두막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유기농법 노하우를 전수하여 다음 해를 대비하셨다.
개구리참외 껍질은 개구리 무늬이고 속은 선명한 적황색이며 식감은 아삭하다. 당도는 단연 꿀참외다. 단점이라면 한 포기에 두 개만의 열매로 소출이 적었다. 나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뿌리식물인 칡잎 퇴비로 임상재배를 해 본 결과 열매가 네 개가 열려 다음 해는 떡갈잎과 칡잎을 반반씩 배합하기로 하였다. 이로 인해 난 영농 후계자가 될 뻔 했다.
개구리참외는 병충해 없이 부정도 타지 않고 잘 익어 시장에서 나일론참외를 제치고 전량 과일가게에 팔렸다. 다음 해 계약도 해서 마을은 개구리참외 마을로 변신하였다. 참외 끝 무렵 마을 어르신을 모시어, 베보자기 소쿠리에 개구리참외를 담아 대접 후 귀가 시 밭가에 자생한 개똥참외를 싸 드렸다.
온정이 넘치고 보릿고개를 이겨냈던 원두막! 고향의 단 맛을 지켜준 원두막의 추억 속에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연팜” 아니 “자연을 심고 자연을 팝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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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瓜田不納履(과전불납리) : 참외 밭에서 벗겨진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李下不整冠(이하부정관) : 자두나무 밑에서 관(갓)을 고쳐 쓰지 말라
의심받는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와과로(蛙瓜樓)-蛙:개구리 와, 瓜 : 오이 과
첫댓글 아주 재미있는 글입니다. 유익하기도 하고요. 글 내용만 참고해도 제대로 참외농사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저희 집 참회밭은 강릉 비행장 부근 월호평에 있었는데 거기에도 개구리 참외가 있었는데 참외농사 짓는 방법은 알 수 없었습니다. 참외가 익으면 원두막에 가서 먹기만 했지요. ㅎㅎ.
아버님을 도와 참외밭을 가꾼 조철형님께 함께 칭찬의 박수를 보내드려요. 짝! 짝! 짝!!!
황토의 내음이 물신 풍기는 글입니다.
비닐하우스의 참외공장이 아닌, 이름 그대로인 자연농원(natural Farm)!
개구리참외가 정겹고 그립습니다.
원두막을 보니 어린 시절의 참외밭과
퇴근하시면 바로 작업복으로 갈아입으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새삼 코끝이 아려옵니다.
저도 개구리참외가 그립답니다. 요즘 참외는 공장에서 만들어 낸 듯 하니까요.
우리 동네 인근의 소 공장, 닭 공장도 다 그렇습니다.
달뜬 암소를 묶어놓고 젖가슴을 하루에도 두 번씩이나 우유를 짜내며 계속 어루만지기만 하니
저들도 여자인데 안 미치고 배기겠어요?
제비리를 개구리참외 마을로 탈바꿈시켰으니
소싯적의 작가님은 아버님만의 효자가 아닌 온 동네의 복덩이셨네요.
'우리 마실에 큰 인물이 났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했겠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