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무너진 집터를 찾아 역사의 흔적을 짚어: 오승철 ＜터무니있다＞박진임 평

[sunny]

무너진 집터를 찾아 역사의 흔적을 짚어: 오승철 제3 시집 『터무니있다』

박진임

I. 섧고 그립고 때로 거칠고

“지나다 바람결에도/슬쩍 한 번 묻는 말, ‘셔?’“ 오승철 시인의 2011년 중앙시조대상 수상작인 「“셔”」의 한 구절이다. ‘셔’라는 짧은 한 마디 말은 오승철 시인의 시적 소재가 되면서부터 독특하고 은밀한 고백의 말로 바뀌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결에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상륙하였다. 제주도라는 제한된 공간을 넘어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를 대변하는 시어로 환생하였다.

솥뚜껑 손잡이 같네

오름 위에 돋은 무덤

노루귀 너도바람꽃 까치무릇 얼음새꽃

솥뚜껑 여닫는 사이 쇳물 끓는 봄이 오네

그런 봄 그런 오후 바람 안 나면 사람이랴

장디리꽃 담 넘어 수작하는 어느 올레

지나다 바람결에도 슬쩍 한번 묻는 말

“셔?"

그러네 제주에선 소리보다 바람이 빨라

‘안에 계셔?’ 그 말조차 다 흘리고 지워져

마지막 겨우 당도한

고백 같은

그 말

“셔?”

--「“셔?“」전문

시인은 먼저 제주에 피어나는 소박한 봄꽃들을 하나씩 호명한다. 노루귀, 너도바람꽃, 까치무릇, 얼음새꽃... 하나 같이 화려하지도 귀하지도 않은 꽃들이다.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풀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노래할 준비를 한다. “쇳물 끓는 봄”의 이미지를 덧입히며 뒤에 올 왈츠를 위한 서곡을 연주한다. 그리하여 장다리꽃이 담장너머 수작하고 나른한 봄날 오후, 올레길에서는 사람들도 수작하는 봄의 민속춤을 추게 한다. 마지막 수에 이르면 “셔?”라는 정겨운 한 마디 말의 어원을 풀어 노래함으로써 시편을 마감한다. “셔?”하고 물으면서 은근히 정을 나누는 사람살이의 모습이 시조의 정형성 안에서 완성된다.

제주 지방의 토속 언어를 손상 없이 옮겨와 한반도 사람들 모두의 보편적인 정서에 접붙이는 시인이 오승철 시인이다. 도라지 뿌리 옮기듯 흙 떨지 않고 제주의 지방어와 체험, 그리고 정서를 캐어 나른다. 오승철 시인은 질박한 인간살이의 모습들을 담백하게 재현한다. 제주도의 검은 돌이나 흙처럼 거친 현실을 그대로 옮긴다.”모로 가든 도로 가든/ 사람 팔자 윷가락 팔자“(「별어곡역」) 하고 부러 속된 일상어를 골라 시어로 부린다. 언어를 통해 숭고하고 초월적인 것을 찾는 구도자의 역할을 하기 보다는 윷가락 판 같은 것이 인생이라고 소리친다.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킨 동네 사람이 해질녘에 통속적인 유행가 가락을 큰 소리로 불러대며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을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바흐찐이 말한대로 민중언어가 문학 텍스트 속에 틈입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요 부르듯 풍속을 능청스레 노래하기도 한다. 「돗 잡는 날」에서는 잔치 준비를 위해 돼지를 잡는 장면을 재미있게 재현해 낸다. ”익어신가 한 점/ 설어신가 한 점// 꽤애액 청첩을 하듯/ 온 동네를 흔든다“(「돗 잡는 날」.) ‘꽤애액’하고 질러대는 돼지소리조차 청첩의 신호로 들리는 것온 동네에 충만한 흥겨움과 신명의 기운 때문이다.”익어신가 한 점/설어신가 한점“구절에서는 솥에서 삶기는 고기가 익었는지 살핀다는 구실로 한 점씩 베어 먹고 있는 동네사람의 모습이 포착된다. 그 장면 또한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듯 정겹고도 친근하게 그려져 있다.

때로 시인은 제주의 바다 바람처럼 포효하듯 거칠게 노래한다. 곱게 다듬은 시어가 아니라 거친 일상어를 그대로 시편에 부린다. 그물에서 막 건져 올린 물고기가 펄떡거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 날 것의 언어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 ”볼장 다 본 장다리꽃“”봄 들판 깽판을 놓듯“(「매봉에 들다」.) ”한 때의 섰다 판처럼/거덜 난 민둥산아“하고 노래한다.

그러나 그 파도 가라앉으면 일순 순한 서정 시인으로 돌아온다. 바다를 보고 자란 사람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설움과 그리움을 실꾸리에서 명주실 풀 듯 풀어낸다. 비극적인 역사에서 살아남은 자의 한을 지극히 서정적인 시어로 그려낸다. 뭍을 향한 그리움으로 목이 메는 사나이의 모습이 거기 있다. ”솔체꽃 하나만 져도/ 먹먹한 이승에서“(「고승사」)에서 보듯이 아득바득 살아가는 이승 살이에서 꽃 하나 지는 것에 가슴 에인다. 떠나간 사람 그리는 정을 섧게 노래하기도 한다. 다정한 목소리를 다시 불러들여 시의 살결에 스며 넣는다. “철아, 서물 날랑 나영 섬에 안 갈티야?”// 이승과 저승 사인/ 자맥질로 오가는 거“(「벌초는 끝나고」.) 인연의 끈으로 묶여 있던,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존재가 어머니 아니던가? 썰물 맞추어 함께 섬에 가자고 속삭이던 어머니가 있었다. 흐르는 세월에 그 끈 낡아져 그만 끊어지고 어머니의 존재는 부재로 바뀌었다. 그러나 어머니 무덤의 풀을 베며 안으로 울음을 삼키다보면 속삭이듯 그 목소리 다시 들린다. 그 때 그 음성, 그 억양 그대로 함께 물 넘어 섬에 가려냐고 다정하게 말을 건다. 자맥질 한 번이면 가 닿을 것 같은 것! 그리 가까운 것이 돌아가신 어머니 사는 저승과 시인이 사는 이승의 거리이다. 마음이 맑다면 이승에서도 저승길 가신 분의 모습 볼 수 있지 않던가? 그 목소리 받들며 살 수 있는 것 아니던가? 그 목소리 섬기며 사노라면 거친 한 세상도 살아볼만 하지 않던가? 죄 짓고 살던 이도 그만 눈물 핑 돌며 후회하게 만드는 그런 존재, 어머니... 시인의 가슴에 어머니 목소리가 아직 남아있기에 시인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자맥질해 다니며 인생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 고적하고도 호젓한 시인의 마음은 곧잘 고추잠자리의 모습을 통해 재현되곤 했다. 「고추잠자리」 연작은 고립된 섬으로서의 제주도 풍경과 정서를 후경으로 거느린 채 오승철 시인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드러내왔다. 이번 시집의 「고추 잠자리 17」을 보자.

가을은 섬에 와도 날개를 쉬지 않네

전라도말 제주말 반쯤 섞인 하추자 길

예초리

숨비소리를 금빛으로 져 나르네

한 시간 간격으로 공영버스 뜨든 말든

정난주 물생이바위

그 바위만 달래다가

세상 끝

봉분 하나를

이제 그만 놓고 가네

--「고추잠자리 17」 전문.

조용하고도 조금은 서글픈 섬의 가을 풍경이 느껴지게 하는 시편이다. 하추자길, 예초리, 정난주, 물생이바위... 그런 고유명사들은 제주 풍경을 그려내는 표식의 구실을 적절히 감당하며 시인이 지닌 ‘제주 지역특수성’을 그려낸다. “한 시간 간격으로/ 공영버스 뜨든 말든”에 이르면 섬을 도는 공영버스는 이제 지역특수성이 아닌 일종의 보편성으로 전환한다. 어느 섬에든 공영버스는 있게 마련이고 공영버스는 바쁠 일 없는 섬사람들의 나들이를 돕는 삶의 도구이다. “한 시간 간격으로” 다니기에 그것은 한가함과 느림과 여유로움과 낙후성등 다양한 의미의 내포항을 거느린다. 이어 “달래다”“세상 끝” “봉분 하나”로 이어지는 시어를 통하여 귀양살이같이 외롭고 서글픈 삶에 대한 위로의 정이 드러난다. 제주 섬의 삶이라서 귀양살이 같이 호젓하고 외롭겠는가? 아닐 것이다. 시인이 거듭 언급하듯 “이승”의 삶이 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립된 개인의 내면을 읊는 순하기만 한 서정시인에 머무르지 않는다. 서정성과 더불어 강한 역사성을 갖춘 것이 오승철시인의 특장이다. 「그리운 남영호」의 가락은 남영호 사고를 집단의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 오면서 세월호 희생자들의 한을 함께 위로한다. ”다시 만나자는/약속은 못했어도// 내 아직 이승에 있을 때/ 이제 그만 돌아오라“! 그 구절은 팽목항에 서성이며 돌아올 아이들을 기다리고 섰는 어버이들의 서러운 외침에 다름 아니다.

바다는 싸락눈을 삼키는가 내뱉는가수평선 넘나들던섶섬 새섬 문섬 범섬저무는 바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숨바꼭질 끝났다 이제 그만 나와라경술년 그 뱃길이 황망히 놓친 세상못 다한 마지막 말이 별빛으로 돋아난다보따리장수 홀어머니 바다에 묻은 세 아이그 눈빛 그 어깨울음 뿔뿔이 흩어진 골목마당귀 유자 몇 알이 장대만큼 솟았는데아, 어느 이름인들

눈부처가 아니랴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못했어도내 아직 이승에 있을 때 이제 그만 돌아오라

*1970년 침몰한 <제주-부산> 정기여객선

-- 「그리운 남영호 —삼백스물세분을 호명하며」.

”이제 그만 나와라“하고 돌아오지 않는 이들에 대한 기다림을 노래한다. 1970년 삼백여명을 태우고 가다 침몰한 남영호는 2014년 그만큼 많은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에 대한 정확한 대응물이다. 미술에서 데칼코마니기법을 사용하여 종이를 접었다 펼치면 한 면에 바른 물감이 그대로 다른 면에 찍혀 나온다. 세월호의 아픔을 겪으며 남영호를 상기하는 것이 공포의 느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왜일까? 틀림없이 데칼코마니 효과 때문일 것이다. 역사에서도 데칼코마니가 존재하여 40여년 전에 일어난 일이 거의 그대로 다시 재현되었다는 사실은 공포감을 증폭시킨다. 처음 본 것이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다는 기시감(旣視感), 데자뷔(déjà vu)의 느낌이 더욱 공포스럽다. 분명히 한 번 본 것 같은데 정체를 분명히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공포의 근원에 있다. 2014년 4월 이후 수많은 시인들이 세월호 사건의 아픔을 노래함으로써 억울한 넋들을 위로하고자 했지만 오승철 시인은 홀로 남영호 침몰이라는 잊혀진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킨다. 남영호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세월호 사건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며 남영호를 그리워함으로써 세월호를 그리워한다. 남영호의 삼백스물세 분을 호명하여 세월호의 어린 생명들을 호명한다. 그리하여 세월호 사건이 갖는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직접적으로 추궁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남영호 사건에 이어 다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것을 상기시키며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다시 제2, 제 3의 남영호나 세월호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친다.”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절규가 더욱 큰 폭으로 공명하는 것은 앞 서 놓인,”숨바꼭질 끝났다“는 구절 때문이다. 그저 하룻밤의 꿈이었기를, 해질 때까지 벌인, 아이들의 한 판 숨바꼭질 놀이였기를,”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하는 외침소리에 흩어져 꼭꼭 숨어있던 아이들이 이제는 골목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주기를... 오늘도, 그런 무수한 바램들이 진도 팽목항에 수천 개의 노란 리본으로 나부끼고 있다.”내 아직 이승에 있을 때/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외침에 독자는 그만 목이 멘다.

II. 4.3의 터무니를 찾아, 역사의 흔적을 찾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이른바 ‘냉전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냉전’은 서구인들에게만 ‘냉전’이었다. 서구인들이 전쟁 없는 시대를 사는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국들은 내전, 항쟁, 진압이라는 이름의, 피로 얼룩진 시대를 살아야 했다.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국에서 일어난 내전들, 우리의 한국 동란, 베트남전, 아프리카의 크고 작은 내전들... 그것은 모두 이른 바 ‘냉전시대’에 일어났다. 우리 같은,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생국 국민들에게 냉전은 없었다. 우리가 겪은 것은 피 없는 전쟁, 즉 냉전이 결코 아니었다. 이념 충돌로 인한, 어쩌면 세계 대전보다 더 고통스럽고 참혹한 내전의 시대를 우리는 대신 살았다. 한국동란만이 아니다. 제주 4.3 사건, 여수 순천 반란 사건,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 인류학자 권헌익이 주장한 바와 같이,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막을 내린 이후 유럽 국가들을 위시한 강대국들은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 뒤에서 안정과 성장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신생국들은 이념 대결로 야기된 ‘또 하나의 전쟁’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에는 사망자의 대부분이 군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2차대전 종전 이후에는 사망의 80퍼센트는 양민의 죽음이 차지한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4.3은 그 이른 바 ‘냉전시대’,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인의 냉전시대’에 일어난 피 흘림의 역사 중 대표적인 것이다.

제주 사람들의 가슴에는 4.3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문순자 시인이 증언하고 시로 기록해 내듯이, 어머니가 남겨주신 염전을 가꾸거나 물질에 쓸 도구들을 헹구어 다스리며 그 날의 기억을 조금씩 밀쳐 내며 살아갈 뿐이다. 그래도 해마다 4월 3일이면 어김없이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그 날 무더기져 스러져간 넋들이 떼 지어 제주 땅을 기습하듯... 해마다 그날 밤엔 제주섬 전체가 훤해질 터이다. 섬 전체의 제삿날, 4월에도 3일! 4.3의 기억은 제주 사람들만 간직한 것이 아니다. 제주에 피는 꽃도 섬에 와서 우는 새도 그 기억으로 피고 지고 울고 날아간다. 찔레는 “삐라처럼”피고 “숨어 앉은 무덤 몇 채”는 “봄꿩”으로 울음 운다. 오승철 제3시집의 제목이 된 「터무니 있다」를 보자.

홀연히

일생일획

긋고 간 별똥별처럼

한라산 머체골에

그런 올레 있었네

예순 해 비바람에도 삭지 않은 터무니 있네

그해 겨울 하늘은

눈발이 아니었네

숨바꼭질 하는 사이

비잉 빙 잠자리비행기

<4․3땅> 중산간 마을 삐라처럼 피는 찔레

이제라도 자수하면 이승으로 다시 올까

할아버지 할머니 꽁꽁 숨은 무덤 몇 채

화덕에 또 둘러앉아

봄꿩으로 우는 저녁

--「터무니 있다」 전문

첫 연은 사라져버린 집의 터를 찾아낸 시인의 발견을 그린다. 예순 해 동안 그 존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묻혀져 역사의 망각 속에 있던 집터가 있었다. 그 집터를 찾아내고 “터무니있다”고 소리치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둘째 연은 역사 속으로의 시간 여행을 그린다. 잠자리 비행기라는 이름의 헬리콥터가 돌며 삐라를 뿌려대는 풍경을 보여준다. 그 삐라의 흰 종이는 찔레꽃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마지막 연에서는 다시 집터만 남기고 4.3사건에 희생된 양주의 무덤을 그림으로써 첫 연의 장면으로 회귀한다. “이제라도 자수하면/이승으로 다시 올까”하고 노래함으로써 ‘자수’를 종용하는 삐라가 가진 공적 권력을 먼저 배치한다. 그리고 “숨어 앉은 무덤”에 제시된 것처럼 결국 이승을 떠나고 만 사람들의 흔적을 그린다. 이제 서정적 주체는 봄꿩 우는 봄날 저녁 속에 던져져있다. 역사의 흔적을 발견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봄꿩이 대신 울음 운다.

오승철 시인은 극진히 서정적인 시어들로 억울한 넋들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그들의 한을 노래한다. 역사를 다시 쓴다. 넋두리 같은 회고록이 아니다. 전형적 인물이 나서 웅변하는 소설이 아니다. 친근한 자유시가 아니다. 3장 6구 정형시 양식 속에 한(恨) 많은 역사를 꽁꽁 여며 넣는다. 찔레꽃 향기 속에 봄꿩 울음소리 들릴 때 독자로 하여금 그 소리에 화답하여 음악처럼 함께 읊게 한다. 부족의 전설들을 노래로 환생시키는 음유시인, 바드(bard) 역할을 오승철 시인은 능숙하게 감당한다. 그리하여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공간에 등불을 내어 건다. 제사집 마당을 밝히는 초롱불같이... 그리고 울어도 울어도 달래어지지 않을 4.3의 원혼을 위해 증언한다. ”터무니 없다“를 반복하는 공적담론에 맞서 홀로 울부짖는다.”터무니 있다!“하고 소리친다. 역사의 기록, 공적 담론은 쉼 없이 4.3의 진실을 거부하고자 한다. 그리고 반복한다. “터무니 없다”고! 오승철 시인의 제3시집은 시적 언어로 반발하고 저항한다. 그리고 무너진 집터를 찾아 역사의 흔적들을 짚어가며 여기 소리치고 있다. “터무니 있다!”

제주의 4.3은 오승철 시인에겐 부채, 즉 업보이며 의무이며 족쇄이며 원형이다. 제주의 아픈 역사는 시인을 필요로 하고 시인은 다시 민족의 아픈 역사가 있어 시를 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4.3? 아직도 4.3?” 마치도 1980년대 이후의 한국 소설에서 어떤 작가가 “광주? 아직도 광주?”라고 썼듯이... 그러나 역사는 서술되고 다시 서술되어야 한다. 이미 일어난 일을 두고 뒷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밖엔 별로 없음으로...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 그것만이라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므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제주도를 넘어 한반도의 역사로 상상력의 반경을 확대시킨다. 과거와 현재를 병치시키며 공간의 동일성과 시간의 차이성을 대조시킨다. 그리하여 역사의 지속성, 반복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얻는다.

강은 언저리의 불빛들만 기억한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전철도 까치소리도

때 절은 역사마저도 말끔히 씻어낸다

...

‘항쟁’과 ‘항복’사이 펄럭이는 서울 한 녘

강둑으로 내몰린

불황의 저 눈발들이

오늘은 어느 가장의 뒷모습으로 떠돈다

-- 「삼전도비」 1,4 수.

시인은 먼저 서울의 삼전도비를 소재로 삼아 강이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고 유실하는 것을 노래한다. 몽고 침입과 그에 따른 굴욕의 민족사를 겨울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발’의 이미지와 연결하여 2,3 수에서 전개한다. 그리고 마지막 4수에 이르러서는 시간을 현재 시점으로 전환한다. 과거, 굴욕의 역사를 한강이 지켜보아왔다면 한강은 ‘항쟁’과 ‘항복’이라는 어휘를 새겨 기억할 것이다. 이제 이민족의 침입이 막을 내린 시간, 여전히 한강은 우울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강둑으로 내몰린”,“불황”,“가장의 뒷모습“... 전쟁이 없는 이 시대에 내리는 눈발들도 우울하게만 보인다. ‘항쟁’과 ‘항복’이라는 어휘는 몽고 침략이 오래 전에 끝나버린 이 땅에서도 여전히 낯설지 않은 말이 되어 있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우리 시대의 불황, 한강 언저리 강둑길을 가는 어느 가장의 풀죽은 뒷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III. 옛 가락을 지켜 새 노래를 부르리

‘...라’ 명령형 어미는 오승철 시인의 이전 시편들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구사되어 왔다. 「송당 말똥구리」의 “누가 나를 격발하라”는 구절은 비극적인 4.3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시인의 저항 정신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격발’도 강한 저항성을 지닌 어휘이거니와 ‘하라’라는 명령어는 역사 앞에 당당히 일어서서 자신을 주장하는 사람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전달한다. 회한에 찬 영탄조를 벗어나, 피해자 혹은 희생자의 울음을 벗어나, 과거의 망각을 의도하는 체념의 비장미를 벗어나, 오승철 시인은 단호한 목소리를 보여주었다. “하라”라는 명령체로 과거사 규명과 정의 실현을 요구해왔다.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는 그러한 시인의 방식은 개인적인 서정의 영역에까지 재미있게 확장된다. 눈발이 날리면 맑은 날 지녀오던 그리움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타자에 대한 그리움은 존재에겐 구속이다. 만해 한용운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하지만 나는 복종을 사랑해요”라고 노래할 때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자발적 복종의 심리 기제라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영혼의 구속을 자원하는 것이 사랑이고 그리움이다. 값을 치러야만 놓여날 수 있는 죄라고 시인은 이미 노래한 바 있다. “그리움도 하나의 죄”(「고추잠자리」) 라고 읊은 것이다. 사랑이 구속이라면 그리움은 당연히 유배에 해당한다. 그리움 너무 깊어 견딜 수 없는 날, 시인은 하늘에서 날리는 눈발을 향해 절규한다. “그리움을 해배하라”고.

한 세상 내 그리움도 해배(解配)하라

눈발들아

--「서울 할망」 부분.

살아있는 동안은 그리움을 피할 수 없고 권력 가진 자가 풀어주지 않으면 귀양살이는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절규할 수 있을 뿐이다. 유형에도 형기가 있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벗어나기 마련인데 생애 다하도록 버리지 못하는 그리움의 유배는 아득하기만 하다. 그 그리움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고 시적 화자는 외친다. 그런 안타까움과 절절함이 “해배하라”라는 명령어로 드러난다. 간절하지만 은밀한 기원이 아니다. 오히려 거친 항거에 가깝다. 해배할 권력 가진 자에 대한 읍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형국이다. “해배하라”라는 말은 그래서 아이러니가 된다.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받아야 할 존재가 가당치않게 거꾸로 명령을 내림으로써 내면에 쌓인 한을 폭발시키며 현재에 저항한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그런 명령형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가자’라는 청유형 어미의 등장이다.

가자, 이별의 골짝

억새물결 터지기 전

아리랑 첫 대목 끌고

거기가서 헤어지자

한 때의 섯다판처럼 거덜난 민둥산아

-- 「별어곡역」 부분.

‘가자’라는 청유형 종결 어미는 필자에게는 슬픈 기억을 가져다준다. “가자, 가자, 이 어둠을 뚫고. 우리 것 우리가 찾으러...”하고 캠퍼스에 울려 퍼지던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노래를 기억하기에 이 청유형 구절은 예사롭지 않다. 엘리어트(T.S. Eliot)의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The Love song of Alfred Prufrock」에서 이 ‘가자’ 시귀를 보았을 때 받았던 신선한 인상이 여전히 필자의 가슴에 남아있다. “당신과 나, 이제 길 떠납시다. Let us go then, you and I!” 그 청유형 문장이 갖는 미묘한 느낌을 기억한다. 명령이 아니면서도 타자에게 자아의 의지를 전이시키고 타자를 움직이는 은밀한 권력의 힘을 기억한다. “가자”는 이범선의 단편소설, 「오발탄」의 등장인물인 치매 노인이 습관처럼 내뱉는 단말마이기도 하다.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앞, 뒤, 좌, 우 막혀있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탈출과 비상을 꿈꾸는 자의 발화가 “가자”였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소설의 세계를 더욱 암담하게 채색한 모티프가 바로 “가자”하고 반복되는 외침이었다. “가자”는 “...하라”를 통해 강렬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던 오승철 시인이 어조는 누그러뜨리면서도 타자와의 동반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자”와 “하라”가 모두 시인의 개별적인 내적 목소리를 넘어 타자를 향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시편에서는 민중의 한과 설움이 느껴진다. 억새물결, 아리랑 첫대목, 섯다판, 민둥산,.. 등의 어휘가 거친 연대를 살아온 한국 남성의 정을 대변한다. 민둥산도 안스러운 형상이지만 “거덜난 민둥산”이라는 표현은 더욱 서글프다. 한 생애 고달프게 시달리며 앞으로 나아왔지만 끝내 가진 것 다 잃고 빈털터리로 남은 사람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한편으론 시인은 징검다리의 은유를 계승하기도 한다. 장순하 시인이 시 「징검다리」에서 “선도 점도 아닌/ 논리 밖의 저 실존”이라고 노래한 것이 바로 징검다리이다. 띄엄 띄엄 놓여져 있어 선이라고 하면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점 같아 보이고 또한 그러면서도 끊어진 것은 아니고 이어진 것이기에 점이라기엔 선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장순하 시인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실존”이라고 갈파한 것이다. 오승철 시인은 이를 두고 “허공의 길‘이라고 새로이 노래한다. 허공에 길이 있을 수 없겠지만 징검다리는 허공이면서 동시에 길인, 그런 실존이다. 있다면 있는 것이고 없다면 없는 것이기에 허공이면서 동시에 길인 것이다.

살아선 진천이요, 죽어선 용인이라는

‘생거진천’ 돌다리

징검징검 허공의 길

산당화 안 터져도 그만 이별하기 딱 좋겠다

-- 「농다리」 부분.

허공을 잇는 길은 이별의 은유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견우와 직녀의 이별을 전제로 까막 까치의 오작교가 가능한 것이기에 역으로 ’있는 듯 없는 듯”한 돌다리를 마주하며 시인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상상하는 것이다.”이별하기 딱 좋겠다“고 노래하는 것은 실은 그리하여 먼 훗날 그 이별한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이 돌다리를 밟아오며 재회하게 하리라는 시인의 상상력의 표현이다. 시인은 그 이별의 장면에 만개한 ”산당화“의 색채를 덧입힌다. 붉은 산당화 ”터지“는 시간을 기다려 진천 돌다리에 이르러 이별하라고 주문한다. 시인은 역설을 생명으로 삼는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한다. ”산당화 안 터져도/ 그만 이별하기 딱 좋겠다“고.

IV. 누가 날 거느리나?

누군가 별빛들을 말끔히 거둔 새벽

일순 물때를 놓친 멸치떼가 파닥인다

덩달아 세상 왔다가 돌아가질 못한다

잠잠한 바람에도 바닷길은 믿지 마라

언제 그대 안에 내 그리움 갇혔는지

다시금 밀물이 와도 못 나가는 돌그물

--- 「원담」* 전문

*밀물에 들어온 고기들이 썰물 때 나가지 못하도록 돌로 쌓아 만든

제주도의 전통적인 자연그물

제주의 맑은 바닷물과 더불어 산 시인의 상상력은 그 근원을 바로 제주 바다에서 찾을 수 있다. 바다가 미역과 다시마와 전복과 굴과 소라를 주렁주렁 품고 살 듯 오승철 시인의 상상력의 바다에는 그리움과 기억과 정과 소망의 은유가 올망졸망 들어앉아 있다. 그러다 불쑥 물 밖으로 머리 내민 것은 시가 된다. “돌그물”의 상징성은 아마도 제주 출신, 바다의 시인인 오승철 시인이 누구보다도 더 정확히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들기는 쉬우나 나가기는 어렵다.” 돌그물에 갇힌 물고기를 묘사한 것이리라. 그런데 사람살이가 물고기 살이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나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우리 옛말이 있지 않은가. 파도 쓸려 올 때 쉽게 들었는데 그물인냥 막아서는 돌 때문에 갇혀서 나갈 수가 없다. 들기는 쉬우나 나기는 어려운 것... 그리움! 시인은 무심한 듯한 돌의 형상을 빌어 그리움을 노래한다. 하지만 그 장면을 꽃잎으로 찧은 고운 물감으로 채색한다. 상상해보라. 맑은 제주 바닷물, 그 물가에 자리 잡은 검은 현무암의 돌그물 한 채, 그 쪽빛과 검정의 산뜻한 대조를... 그러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풍경이 아름다워 더욱 간절한 그리움을. 물 맑아서 더욱 서러운 속박의 신세를. 밀물이 와도 못나가는 신세를.

앞서 든 장순하 시인의 「징검다리」에 “허자虛字하나 시귀와 얼려/ 관주비점貫珠批點하는 그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때론 허접한 것이 함께 얼려야 구슬꿰기가 완성되고 용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겠다. 오승철 시인의 “다시금 밀물이 와도”라는 구절은 바로 그, 관주비점의 구절이라 할 만하다. “못 나가는 돌그물”을 위한 최적의 선행귀로 보인다. 관주비점해 줄 허자라서가 아니다. 돌이켜 “잠잠한 바람에도/ 바닷길은 믿지마라”는 시인의 경고가 더욱 분명해진다. 평온해 보이지만 알 수 없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감히 무어라 재단할 수 없는 것... 어디 바닷길만 그러하겠는가. 사랑이 그러하고 그리움이 그러하고 더 나아가 우리 사는 생애가 다 그러한 것을. 밀물이 와도, 온 세상 벚꽃이 환하게 뒤덮는, 짧고 숨 가쁜 한 때가 와도 그만 돌그물에 갇혀 못나가는 것...사랑, 운명, 우리네 인생!

그런 갇힌 느낌, 그런 절망, 그런 외로움... 시인은 문득 자신의 근원과 지향을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하늘은 말씀으로 세상을 거느리고

도랑물은 구름으로 하늘을 거느리네

봄날이 다하는 길목

누가 날 거느리나

볼장 다 본 장다리꽃

설렘도 그쳤는데

삼십년 외면해온 그 오름에 이끌렸네

첫 시집 못 바친 봉분

무릎 꿇고 싶었네

사랑도 첫사랑은

한 생애 허기 같은 거

주거니 받거니 잔 돌리는 장끼소리

봄 들판 깽판을 놓듯 푸릇푸릇 갈아엎네

-- 「매봉에 들다」 전문.

하늘이 세상을 거느린다면 도랑물은 그 하늘을 거느린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하늘이 ‘말씀’이라는 추상적이고 숭고한 것을 매개로 삼아 세상에 질서를 부여할 때, 한갓 흘러가는 도랑물이 오히려 하늘을 관장한다는 역설이 초,중장에 드러난다. 작은 물에 비치는 하늘과 구름을 재미있게 갈파한 부분이다. 도랑물은 작은 존재이나 하늘을 되비치어 주니 하늘을 감사(監査)한다고 볼 수 있다. 흘러가며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광대한 우주를 지배한다는 깨달음이 거기엔 드러나 있다. 하늘과 세상 사이는 말씀이 매개하고 도랑물과 하늘 사이는 구름이 매개한다. 말씀, 즉 진리는 하늘에서 와서 세상을 관장한다, 그렇듯이 하늘의 구름은 도랑물에 그대로 되비치어 하늘과 물을 매개하는 것이다. 오종문 시인이 시조의 구성 원리는 ‘천지인(天地人)’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초장은 하늘의 원리로, 중장은 땅의 질서로 구성되고 종장은 결국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을 노래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오승철 시인의 이 시편은 천지인의 시조원리가 현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늘, 땅의 물, 그리고 사람... 하늘과 땅, 말씀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자신의 존재의미를 묻는다. “누가 날 거느리나”하고. “봄날이 다하는 길목”에서는 시적 화자의 초조감이 드러나 있다. 생애의 봄날, 즉 젊음과 역동성과 약진의 시간이 다해가는 데 ‘지금, 여기, 나는 누구인가?’ 하는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고 있는 시편으로 보인다.

“리사무소 스피커가/ 혼 부르듯 하는 날은// 천지간 외로운 사랑/ 딱 한 번 하고 싶다”고 시인은 노래한 바 있다. 대명천지 밝은 날, 너무 환하고 밝고 아름다워서 슬픈 그런 봄날, 문득 유한자의 고독이 강조된다. 봄날, 그 아름다움이 지쳐가는 어느 순간, 누구나 묻고 싶어질 것이다. “누가 날 거느리나”하고. 봄날은 이울어 장다리꽃도 “볼 장 다 본” 꽃이 되는 시간, 그런 호젓한 마음은 결국은 그리움의 근원을 찾는다. “삼십년 외면해온 오름”은 시인의 죄의식의 근원지를 의미한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지닌 오름이라면, 그래서 시인이 삼십년 동안 줄곧 외면함으로써 그 아픔을 묻고 살아왔다면 봄날이 다해 가는 이 시점, 시적 화자는 그 죄의식을 직접 대면하고자 할 것이다. 이제는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한다. 그 오름은 어쩌면 어머니의 무덤일 것이다. 시인은 이전 시집에서 노래한 바 있다. “알고 보면 오름들도/헛봉분이 아니던가”하고. 봉분이 죽은 이의 넋을 묻은 흙더미라면 제주 섬 여기 저기 솟아있는 크고 작은 오름들도 나중에 죽을 이들의 넋을 위해 미리 만들어 두는 봉분에 다름 아니라고 노래했다. 그리하여 그 오름들을 통해 천지에 만연한 죽음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바 있었던 것이다. “첫시집 못바친 봉분”,“무릎 꿇고 싶었네” 귀절에 이르면 그 봉분 혹은 작은 오름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첫 시집은 시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거리이다. 그 소중한 첫 열매는 누구보다도 어머니께 드려야 하는 것일테다. 어떤 사연에서인지 그 첫시집을 어머니께 바치지 못한 채 그 한을 안고 어머니 무덤 앞에 와 무릎 꿇는다. 생의 여러 고비마다 수십 번의 봄을 맞고 보냈으련만 시인에겐 모든 봄이 다 새롭고 특별하다. 해마다 조금씩 다른 경험, 다른 감성으로 맞고 또 보내기 때문이다. “첫시집”의 ‘첫’이 제시하는 각별함과 소중함은 다시 3수의 “첫사랑”의 심상으로 연결된다. 첫시집이 가장 소중해서 가장 소중한 이에게 바쳐져야 했던 것처럼 “첫사랑”은 “한 생애 허기 같은 거”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살아 있는 한 생명체는 허기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채워도 채워도 다시 솟아나는 샘물처럼 허기는 잠깐 가셨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첫사랑 또한 그러하리라. 끝없이 문득 문득 기억에 틈입하는 그런 것이리라. 시적 화자의 호젓한 마음에 장끼들이 서로 응답하듯 울음 우는 소리가 스며든다. “주거니 받거니/잔 돌리는” 장끼는 하나가 멀리서 울면 다른 하나가 따라 우는 그런 봄의 정경을 그려낸다. 그리하여 봄의 끝머리에서 느끼는 시인의 존재론적 고독을 강조한다.

“누가 날 거느리나”하고 자문하는 시인의 허허로운 마음은 자신의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허무로 연결된다. ‘허무’는 실존주의 철학자의 형이상학적인 어휘로 들리며 과장된 느낌을 준다. 시인은 ‘허무’를 “허기”로 바꾸고 있다. 삶의 현장에 발 붙이고 소가 밭을 갈 듯이 천천히 움직여 갈 뿐인 것이 우리네 살이가 아니던가. 소는 보습 댄 쟁기를 끌고, 가장은 가족의 생계를 등에 매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돌연 머리 들어 하늘을 보노라니 칠흑의 하늘도 허기져 보인다. 그도 누군가를 끌고 가는 모양이다.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모습이 “엎어적 갈라적하며”로 노랫가락처럼 펼쳐진다. 칠흑 하늘에 돋아난 “칠성”을 보며 시인은 자신의 허기를 하늘과 공유한다.

칠흑의 하늘에겐들 허기가 왜 없겠는가

엎어적 갈라적하며

칠성끌고 가는 밤

---「판」 부분.

하늘도 밝은 하늘이면 거기에 시적 화자의 아쉬움과 허전함을 투사할 만 할 것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미당이 노래한 바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아득바득한 하루의 살이가 다 끝난 시간, 무심한 듯한 칠흑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시인이 그 하늘에서 ‘허기’를 읽는 것은 마음의 깊은 허기가 투사된 것이리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비틀거리면서도 나아가야 할 시적 화자의 모습이 “허기진 칠흑 하늘”이 “칠성 끌고”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늘도 바다도 시인도 다 허기져 보인다. 삶은 허기로 추동되는 것이므로. “엎어적 갈라적하며” 가는 것은 여러 겹의 삶의 모습이다. 그물에 그득하니 고기를 건져 끌고 가는 뱃사람의 모습, 보습 댄 소를 끌고 밭갈이 하는 농사꾼의 모습, 역사의 무게를 홀로 지고 가난한 민족어를 고르는 시인의 모습... 시인의 심상은 칠흑 하늘도 그들과 함께 얼려 허기를 참고 나아가는 것으로 본다. 칠성을 끌고가는 것으로 읽는다.

오승철 시인은 다양한 목소리를 지닌 시인이다. “철아, 서물 날랑 나영 섬에 안 갈티야?”에서 보듯 다정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그대로 살려내는 복화술사였다가 “숨바꼭질 끝났다/이제 그만 나와라”하고 자식 잃고 울부짖는 이웃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선한 이웃이 된다. 다시 “터무니있다”고 역사의 진실을 고발하는 민족의 음유시인이 되기도 한다. “한 세상/ 내 그리움도 해배하라”고 외치고 저항하고 울음 울다가 “익어신가 한 점/설어신가 한 점” 하고 신나게 민요 가락을 노래하듯 풍속을 그리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누가 날 거느리나”하고 유한자의 존재의미를 묻기도 하고 “엎어적 갈라적하며” 버겁게 삶을 끌고 가는 존재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제주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풍경과 풍속을 더욱 고유한 언어의 색채로 그려내기를 희망하면서 동시에 한반도인 모두의 보편적 정서를 또 그만큼 아름다운 감각으로 그려내 주기를 함께 바래본다. 그것은 오승철 시인의 시세계가 그만큼 넓고도 다양하기 때문에 가능한 주문일 것이다.

*200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평택대학교 미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