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생 처음 가슴에 달아보는 카네이션, 어머니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제1회 사랑의 카네이션 달아주기’행사에 참석한 한 장애아 어머니가 눈물을 닦아내고 있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중증 장애아의 부모 100명,
'1일 자녀'에게 꽃 선물 받고 눈물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여중생 100명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어머님 은혜' 노래를 불렀다. 조용히합창을 듣고 있던 어른 100명이 눈시울을 붉혔다. 목멘 소리로 나직하게 노래를 따라 부르다 목이 메는지 입술을 꽉 다무는 이들도 있었다.
8일 오전 11시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 상명대 부속여중 학생들과 장애아 부모들이 모인 가운데 '사랑의 카네이션 달아주기' 행사가 열렸다. 장애가 심한 자식을 키우느라 평생 한번도 빨간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본 적이 없는 중년 부모들을 위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상명대 부속여중 학생들이 '1일 자녀'가 되어 카네이션을 달아주러 나온 것이다.
이 학교 3학년 김혜선(15)양이 "1일 어머니, 사랑합니다"라며 이순자(여·49)씨의 가슴에 꽃을 달아줬다. 정신지체에 자폐증이 겹친 아들(23)을 키우며 고단하게 살아온 이씨가 김양을 꼭 끌어안고 울먹였다. "평생 처음으로 카네이션을 달아봐요. 어버이날 꽃집 앞을 지날 때마다 '저 많은 카네이션은 누가 다 사갈까' 생각했어요. 나한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이날 행사는 한국장애인부모회 권유상(60) 사무처장의 아이디어였다. 자폐아 아들(23)을 둔 권 처장은 "6년 전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 과로로 쓰러진 아내가 병원에서 '입원하라'는 걸 마다하고 링거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고 했다. 그날이 마침 어버이날이었다. 카네이션을 파는 가게를 지나치며 권 처장은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 없는 아내, 카네이션 한번 못 받아본 아내가 생각나 가슴이 아렸다"며 "제 아내뿐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장애아 부모들을 위로하는 자리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후원자를 찾지 못해 매년 무산되던 권 처장의 꿈은 올해 초 강신호(82) 동아제약 회장이 후원금 1500만원을 쾌척하면서 현실이 됐다. 권 처장 등 한국장애인부모회 간부들은 서울·경기지역 60여개 특수학교와 80여개 복지기관에 공문을 보내 장애아 자녀를 여럿 뒀거나 자녀의 장애 정도가 특히 심한 부모들을 추천받아 그중 100명을 뽑았다.
행사 취지에 공감한 상명대 부속여중 한영란(여·57) 교장이 지난달 전교생 464명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내 참석 희망자를 받았다. 한 교장은 "과연 100명을 모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300여명이 몰렸다"고 했다. 반마다 가위바위보, 선착순 등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참가자를 추렸다. 참가자 선발을 총괄한 교사 추경숙(여·49)씨는 "떨어진 아이의 학부모들로부터 '뜻깊은 행사 같아서 꼭 보내고 싶은데 방법이 없느냐'는 문의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고 했다.
- ▲ 상명대부속여중 학생이 장애아 어머니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있다./채승우 기자
장애아 부모를 대표해 답사를 한 김순미(여·44)씨는 "얼마 전 자폐증과 간질을 앓는 아들(15)이 횡단보도에 대(大)자로 드러누웠던 날이 떠오른다"고 했다. 차들이 빵빵거리고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가운데 김씨는 남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정신없이 아들을 인도까지 끌고 나왔다고 했다.
"저는 지금까지 어린이날·어버이날이 싫었어요. 어린이날이 돼도 '복지관이 노니까 오늘 하루 힘들겠구나' 그 생각뿐이었어요. 어버이날도 제겐 '그냥 지나가는 날'이었어요."
김씨는 "남들은 몰라도 제겐 너무 예쁜 자식"이라며 "온종일 아이와 씨름하다가도 자는 얼굴을 보면 너무 예쁘고, 해맑게 웃으며 엄마 뺨에 얼굴을 비비거나 복지관에 가서 뭔가 하나씩 배워오면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4년 전 남편이 암으로 숨진 뒤 아들(10·지체장애 2급)과 단둘이 사는 주경숙(여·37·지체장애 1급)씨는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얼굴로 꽃을 받았다. 주씨는 1998년 재활기관에서 만난 네 살 연상의 비장애인 자원봉사자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지만 7년 만에 남편을 잃고 홀몸이 됐다. 주씨는 "오늘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생일이기도 하다"며 "미역국을 끓여서 저녁상을 차린 다음 남편 자리에 카네이션을 놓고 아들과 함께 밥을 먹겠다"고 했다.
행사에 참석한 장애아 어머니 99명 틈에서 계속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참는 유일한 아버지가 있었다. 김윤곤(46·안마사·시각장애 3급)씨는 앞을 보지 못하는 아내와 만나 딸(9)을 낳았다. 그는 "딸도 나처럼 앞을 보지 못해 한때 매일 술로 살았다"며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아빠, 뭐해?' 하고 전화하는 딸이 안쓰러워서 이제는 술을 완전히 끊었고 '딸이 나를 사람 만들었다'는 생각에 고맙다"고 했다.
행사에 참여한 홍모(13)양은 "암 후유증으로 오른쪽 반신을 잘 못 쓰는 여동생(10)이 올해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갔다"며 "오늘 여기서 꽃을 달아드리면서, 한번도 동생 손에 카네이션을 못 받아 보신 우리 부모님이 많이 생각났다"고 했다.
유동효(15)양은 "부모님이 '공부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자리니까 오늘은 학원에 빠져도 된다'고 하셨다"며 "쑥스러워서 대놓고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하고 솔직히 좀 대들기도 했는데, 오늘 집에 가면 '건강하게 낳아주셔서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카네이션을 직접 달아 드려야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