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삶을 돌아보는 순간이란 분명 인생의 발자국이 아닌 선명한 브레이크 자국이 뒤에 남아있을 순간이다. 그만큼 이제껏 전력으로 달려왔다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자랑스럽건 다소 후회스러웠건 간에 길고 긴 바퀴자국 사이에 누군가와 함께 천천히 걸었던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지는 이 봄, 그에 꼭 맞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아시아에서는 네 곳 뿐인 슬로우시티 중 한 곳인 청산도다.
‘인생길 천천히 걸어본다’는 것을 음미하고자 나선 여행은 그에 어울리게 단숨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한반도 남쪽 땅끝마을이 있는 해남 땅에 짧은 연육교 하나로 이어진 완도, 그 곳에서도 주중엔 하루 네 번, 주말엔 하루 다섯 번만 운행하는 배를 타고 50여분을 더 내려가야 비로소 청산도에 다다를 수 있다.
혹시 완도항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여 출발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연안여객선 터미널 근처에 활어해산물장터에 들어가 싱싱한 낙지, 해삼, 멍게 및 각종 생선을 그 자리에서 회쳐먹는 것도 좋다. 완도 연안의 생선들이 일단 이곳에 모여 경매되어 각 섬으로 흩어지므로, 섬보다 싸고 싱싱하다는 이점이 있다. 화창한 날엔 장터 바깥쪽의 항구에 마련된 테이블에 모여앉아 푸른 바다와 섬, 떠다니는 배들을 바라보며 먹는 맛이 일품이다.
청산항에 다다르면, 자가용 혹은 배시간에 맞춰 운행하는 버스와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으나, 나를 신속히 어딘가로 데려다주는 교통수단을 잠시 항구에 세워두고 일단 걸어서 여행을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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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항에서 도보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당리마을에 그 유명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가 있다. 푸르른 청보리밭과 노오란 유채꽃밭이 가득한 언덕배기를, 야트막한 돌담을 두른 황토길이 갈래갈래 나누며 올라간 끝자락에 ‘봄의 왈츠’ 촬영세트장으로 쓰였던 ‘왈츠하우스’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풍경은 누가 어떤 각도로 사진을 찍든 왠만해선 실패하기 힘들다.
왈츠하우스까지 올라갔다면 왼편으로 난 화랑포로 가는 길을 걸어 산책하는 것도 좋다. 천천히 걸어 한 시간 반쯤 걸릴만한 거리로 탁 트인 바다와 바다를 향해 우뚝 머리를 세운 범바위를 감상할 수 있다.
황토길 촬영장 아래로 온통 빨갛고 파아란 지붕 가득한 당리마을 가운데에 서편제 촬영세트장이 옛 모습대로 짚으로 된 지붕을 이고 자리하고 있는데, 지붕 가운데를 봉긋이 세운 모습이 무척 귀엽다. 세트장 울안에는 서편제의 소리꾼 부녀와 오누이가 툇마루에 앉아 판소리 연습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청산도 해안도로 길가의 보리밭_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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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세트장 관람을 마쳤다면 이제부터 청산도 섬 반쪽을 둥글게 돌아 대부분의 마을에 고루 들리는 군도(郡道)를 따라 가보자. 보통은 자동차로 이동하지만, 천천히 걷는 여행답게 길을 따라 걷는다면 족히 이틀은 소요될 정도로 제법 거리가 된다. 간혹 자전거 여행을 온 일행도 보인다.
당리를 떠나 길게 이어진 시골길 주변으로 봄의 푸르름과 더불어 청산도의 독특한 구들논을 만날 수 있다. 구들논이란 벼농사가 가능하도록 유수를 막기위해 땅을 파서 구들을 놓듯이 돌로 바닥을 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논을 만들어 낸 것으로 조상들의 지혜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고요히 걷노라면 바람이 청보리를 스치는 소리, 논두렁에 가득 채워진 물 가운데서 나는 개구리 울음소리 등, 청산도는 지금 봄의 소리로 가득하다.
낙조가 특히 아름답다는 청산도의 대표적 해수욕장인 지리해수욕장, 뱃일을 나가거나 외지에 나가 있는 자식이 장례시기에 맞춰올 수 없어 죽은 사람을 바로 묻지 않고 이엉으로 덮어두었다가 3년이 지나면 좋은 날을 골라서 남은 뼈를 추려 땅에 묻는 풍습이 전해지는 초분, 유채밭으로 온통 노오란 국화리, 집 사이의 담은 물론 외양간이나 창고조차 돌담으로 이뤄진 상서리, 예로부터 출중한 인물을 많이 배출해 ‘청산가면 글 자랑 하지마라’의 청산이 바로 이곳이라는 청계리 등 청산도의 마을들은 하나같이 이야기거리로 풍성하다. 다른 마을들은 대부분 길가에 있는데, 돌담마을 상서리는 산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길가에 중흥리 표지석이 보이면 진입하여 원동리를 거쳐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 속 어딘가에 잠자고 있었을 정지용의 ‘향수’ 노래가락이 절로 피어오르는 곳, 청산도를 떠나는 아쉬운 길엔 꼭 완도 정도리 구계등과 드라마 ‘해신’ 청해포구 촬영장, 완도 수목원 등을 들를 것을 권한다.
구계등 갯돌해변 전경_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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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리 구계등은 갯돌층이 아홉 개의 계단을 이룬다는 해변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식생이 다양하고 무성한 방풍숲이 신비로움을 더하는 대한민국 명소 중의 명소이다.
200여년 전 정도리, 사정리 주민들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일, 염분으로부터 농작물과 삶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풍숲이자 마을을 수호하는 당숲인 이곳에 들어서면 지척에 바다가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새소리가 싱그러움을 더한다. 숲의 양분으로 인해 구계등 연안에 어류의 유치와 증식을 도와 어부림(魚付林) 역할도 한다니, 조상의 지혜가 단연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무료 자연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니, 구계등 입구 탐방지원센터에 들어가 요청하면 즉석에서 원하는 시간만큼 안내를 해준다. 사전 예약도 가능하다.
프로그램은 지식전수식 설명이 아닌 무심코 지나쳤던 자연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도록 돕기위해 함께 만져보고 냄새를 맞고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하니 어린이와 함께하는 가족여행지로도 적합하다.
청해포구촬영장은 해신, 신돈, 주몽, 대조영, 서동요, 태왕사신기, 신기전, 청해의 꿈, 사랑의 선율, 순옥이, 이산, 대왕세종 등 왠만한 사극에는 꼭 등장하는 장소로 국내 최초로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져 관리가 잘 되고 있는 세트장이다.
완도수목원은 붉가시나무, 황칠나무, 후박나무 등 난대성 식물 750여종이 집단자생하는 국내 최대의 난대림 집단자생지로 유리온실 몇 동으로 이뤄진 여느 수목원을 떠올린다면 큰 오산이다. 2,050ha 부지에 산림전시관, 산림환경교육관, 유리온실 등 15동 이외에 노약자, 장애자 유모차 보행이 편리한 초록빛 중앙관찰로와 산속과 호수가로 난 다양한 꽃길, 돌길, 목제탐방로들은 일종의 자연테마파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봄을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어디에나 봄이 흐드러진 완도로 주저없이 떠나보길 권해본다.
♣여행정보♣
▷ 맛집 바다식당(061)552-1502), 부두횟집(061)552-8547)등에 맛있는 먹거리가 있다. ▷ 숙박 청산도에는 왈츠하우스(02)2279-5959), 맴피스 모텔(061)555-0660, 0770), 청운장 모텔(061)552-8575), 등대모텔(061)552-8558), 청산민박(061)552-8800), 앞개민박(061)552-8703), 등대민박(061)552-8521, 광주민박(061)552-8500)등이 있다.
▷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호남고속도로 광산IC(13번 국도) 또는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해남을 거치면 완도 청산도에 갈 수 있다. 부산에서 가려면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해남(55번 국도)로 진입하면 완도 청산도에 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