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운동 일러스트
68 운동, 또는 프랑스 5월 혁명은 프랑스 샤를 드 골 정부의 실정과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저항운동과
총파업 투쟁을 뜻한다.
복지형 혼합 경제를 통해, 그리고 국제협력을 통해 1960년대의 서유럽 경제 번영과 사회안정을 확립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경제성장은 구조 변동의 원인이 되었고, 새로운 사회 문제를 발생시키고 소수 불만 세력에 의한 반란을 유발하는
배경이 되었다. 서유럽국가들의 경제성장과 사회적 안정이 절대로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1960년대 말에 각지에서 발생한 학생 등의
반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프랑스 사회의 동요가 한층 격심했다.
프랑스에서는 1968년 3월 낭테르의 파리대학 분교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대학의 구태의연한 관리제도와
시험제도에 항의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곧바로 이 운동은 대학제도뿐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프랑스 사회의 보수성과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확산되었다. 5월이 되자 운동의 참가자들도 낭테르의 학생에서 파리대학의 중심 소르본대학으로 확산하여
대학의 거리 라땡 가를 붉게 물들였다. 더 나아가 각지의 대학생과 고교생과 교직원에게까지 확대되었으며, 노동자들도 24시간 총파업으로 학생운동을
지원했다.
운동이 확산되자 개혁에 대한 요구는 대학을 벗어나 드골 대통령의 퇴진 요구로 옮겨갔고, 점차로 노동계급이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의 단축을 요구하고 각지에서 파업과 공장 점거를 감행했다. 공산당은 이에 편승해서 '전
좌익 인민연합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 이 상황을 이른바 '5월 혁명'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드골은 반격에 나섰다. 우선 그는 대학개혁과 노동자의 경영참가 문제 등에 국민의 견해를 묻는
국민투표를 주장했으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하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했다. 하지만 국민의 심성은 '5월 혁명'이 너무
격렬함에 대해 불안해하여 드골의 편을 들었다. 이처럼 '5월 혁명'은 프랑스 사회를 급속하게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드골의 정치적
권위는 복구되지 못했고 그 결과로 다음 해 69년도에 그는 지방의회와 상원의 개혁을 쟁점으로 하는 국민투표 결과에 실망하여 스스로 퇴진하여
향리로 돌아갔다.
'68년 운동'은 프랑스에서 미국, 유럽 국가들과 한국,
일본 등지의 학생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에 미군 파병을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흑인의 시민권을 확립하는 운동이 학생운동과 결부되어
발생했다. 학생들의 급진주의 운동은 독재타도 민주화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를 비롯한 공해 반대, 원전 건설 반대 등으로 확산되면서 그 일부는 그
투쟁무기로서 마르크스주의, 아나키즘, 모택동 사상 등에 감염되어 과격한 행동으로 휩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일반 국민으로부터 고립되어
소멸하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