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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5:9-20
찬송가 365장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
삼손을 블레셋에 넘긴 유다 지파(9-13)
오늘 본문은 아내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삼손의 보복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15장의 두 번째 단락입니다.
(9-10)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다툼에 의한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습니다. 앞선 삼손의 보복으로 인해, 이제 보복의 순번이 블레셋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들은 삼손이 유다로 몸을 숨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유다의 땅으로 가서 진영을 정비하고 레히 지역으로 탐색대를 보냈습니다. 진을 치고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삼손을 잡으려고 온 블레셋의 규모는 개인을 상대하기 위한 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뒤에 살펴볼 15절에서 나타난 삼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원을 생각해 보았을 때, 블레셋의 군대의 수는 못해도 1,000명 이상은 되었을 것입니다. 사사시대 최초의 지도자 옷니엘을 배출한 유다 지파는 한동안 성경에 언급되지 않다가 이제 다시 등장을 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급습에 놀란 유다 지파는 불쾌한 내색을 하며 자신과 맞서려는 이유를 블레셋에게 질문합니다. 이는 유다가 영내에서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않고 다른 민족의 심기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왜 조용하게 살아가는 자신들을 찾아와서 불안에 떨게 만드냐는 질문입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듯한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맡기신 역할의 관점에서 보면 유다의 이러한 모습은 아쉬운 장면입니다. 유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대해 다른 어떤 지파보다 더 절박해야 했습니다. 이는 성경의 예언을 따라 온 세상의 구원자가 바로 유다 지파를 통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파가 이방 민족이 자신의 땅 한 가운데로 들어와 자신의 백성과 지파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그저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며,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려는 모습은 여러 가지로 아쉬운 장면입니다. 이를 영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유다를 향한 블레셋의 느닷없는 기습은 유다의 영적인 태만을 일깨워주는 자명종과 같습니다. 유다는 블레셋의 침입에 대해 적들에게 따지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이 상황에 맞는 자신의 행동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모습을 보였어야 합니다.
본문 10절 하반절을 보면 유다 지파의 질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답변을 합니다. 블레셋의 군대가 유다에 온 이유는 유다 지파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삼손을 결박하여 삼손이 블레셋에 피해를 입힌 대로 되돌려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낳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이러한 갈등의 상황이 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인 정당한 삼손의 역할과 유다 지파의 역할이 있을 것인데, 영적으로 무뎌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의미를 분별하지 못하였습니다.
(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블레셋의 목적이 삼손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유다 지파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삼손을 잡는 일을 돕기 위해 3,000명이나 되는 인원을 동원하여 삼손이 은둔해 있는 에담의 바위틈으로 내려갔습니다. 블레셋 사람이나 유다 지파나 삼손 한 명을 잡으려고 이 대규모 인원이 동원한 것으로 보아 그들 모두가 삼손의 막대한 힘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삼손에게 찾아간 유다가 이제는 삼손을 추궁합니다. 삼손을 향한 유다의 추궁은 자신들이 현재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는 속에서 삼손이 블레셋의 심기를 건드리고 유다의 땅으로 도망쳐 자신들을 위험에 빠트리면 어떻게 하냐는 외침이었습니다. 이러한 항변으로 보았을 때 유다 지파의 인식 속에 자신들을 다스리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인식은 사라진지 오래였으며 이제는 블레셋의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는 과거 여호수아 때와는 다른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유다는 블레셋이 삼손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다가, 삼손이 블레셋 사람에게 행한 일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강하게 항의합니다. 이는 삼손이 당할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이나 걱정도 느끼지 않고, 자신들의 신변만을 걱정하는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야박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말씀은 무시하고 현세적인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는 유다와 삼손의 수준이 세상의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였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삼손도 그 처지가 비슷하였는데, 삼손에게는 하나님께 구별된 나실인의 거룩한 사상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로서의 거룩한 가치관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할 뿐이었고, 자신이 공격을 받았기에 보복할 따름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 세상의 원리이며, 한쪽이 완전히 망하거나 사라질 때까지 보복의 평행선을 그리는 형국입니다. 그렇기에 이 땅의 악의 굴레를 끊어낼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참 믿음의 사람들뿐입니다.
(12)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유다는 삼손과 블레셋의 생각이 서로를 향한 보복만 있음을 확인한 후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기로 결정합니다. 양측의 입장이 동일한 경우 유다에게 판단의 근거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기준이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위기의 때에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유다는 블레셋의 위협 때문에 블레셋의 뜻을 따르며 블레셋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자신들의 안위를 택한 일이었습니다. 힘과 전투 능력에 근거해서 본다면 블레셋 전체보다 삼손이 더 강하였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삼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계산에 넣지 않고 판단했습니다. 만약에 유다가 삼손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여도 삼손이 유다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이 유다의 결정에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삼손을 블레셋에 넘기는 유다의 결정도 삼손과 블레셋의 보복과 동일하게 자신들을 위험에 빠뜨린 삼손에 대한 보복이었습니다. 유다는 지금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니라 이방인의 다스림을 받고 있지만 오늘에 대한 안락과 평안함을 하나님을 통해 찾으려 하지 않고, 세상의 힘의 논리를 따라 유지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블레셋의 통치가 지속됨에 따라 그것에 익숙해진 유다가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야성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길들여졌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13)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유다는 삼손을 죽이지 않고 결박만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이는 삼손이 유다를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유다가 삼손을 배려한 것이지 그 구분이 분명하지 않으나 삼손이 유다를 같은 민족으로서 공격하지 않고 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유다는 삼손이 자신들을 공격할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려움의 크기는 유다가 삼손을 결박하기 위해 온 인원에 비례합니다. 유다는 삼손을 결박하기 위해 3,000명이나 되는 수가 동원되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새 밧줄 두 개로 삼손을 결박했습니다. 이 밧줄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밧줄로 삼손을 결박할 때 새 밧줄이 끊어질 가능성이 없이 더 견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삼손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밧줄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자신이 아주 강한 밧줄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능력도 묶을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을 죽인 삼손(14-20)
(14-15)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삼손과 그를 결박한 유다 사람들이 레히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맞이하며 소리를 쳤다고 사사기는 기록합니다. 그들이 지른 소리의 의미는 아마도 자신들의 원수인 삼손을 잡았기 때문에 촉발된 기쁨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블레셋이 삼손을 보자 잡아 죽여야 한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모이고 모여 거대한 함성이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삼손을 향한 블레셋의 살기가 최고조가 되어 그것이 큰 외침이 되었을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였습니다. 그때 삼손의 팔을 결박하던 밧줄은 불탄 삼과 같이 맥없이 녹아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풀려난 삼손은 나귀의 신선한 새 턱뼈를 발견하였고, 그것으로 1,000명의 블레셋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이 당시의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즉 철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무장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블레셋 사람들은 헷 족속의 지역에서 나는 철을 사용하여 무기를 만들던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무기와 대적하여 싸운 삼손의 무기가 나귀의 턱뼈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이는 무기의 성능 때문에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제압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과 은혜의 결과로 삼손이 이 전투에서 승리 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삼손의 턱뼈만이 아니라 성경에는 홍해를 가른 ‘모세의 지팡이’, 거구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물맷돌’, 오천 명을 먹인 ‘아이의 도시락’ 과 같이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어, 기적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작고, 연약하고, 흠이 많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 우리 개개인도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면, 작고, 연약하고, 흠이 많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로 쓰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서 다양한 경험과 고난을 허락하시며, 우리 개개인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준비를 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매일 매일을 허투루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미래를 준비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고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16-17)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하나님의 은혜로 삼손은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여전히 삼손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턱없이 부족한 사사였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승리를 한 후 삼손이 부른 노래의 내용을 보면 어린아이와 같은 삼손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삼손은 턱뼈라는 상징적인 물건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드러내는 도구로 이해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는 증거물로 제시하였습니다. 삼손의 생각에 자신의 승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과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승리 후 삼손의 노래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 승리의 주체가 ‘나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 역시 하나님을 모르는 교만한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보이지 않고, 항상 자신의 업적과 자신의 욕망만이 자신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아, 자신의 생각과 그 입술로 내뱉는 표현에서 자신만을 드러내는 말들에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삼손이 그 이름을 지은 지역 ‘라맛 레히’의 뜻도 결국 ‘턱뼈의 높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업적만을 드러내려는 삼손의 교만함이 드러납니다.
(18-20)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만한 삼손이었지만, 그에게도 가뭄에 콩이 나듯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삼손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블레셋의 억압 속에서 살고 있어도, 자신들의 근원적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았지만, 당장 자신들이 육적으로 고달프고, 절박할 때에는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지금 삼손은 심히 목마릅니다. 턱뼈로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으니 그 체력적인 소모가 엄청났을 것입니다. 삼손은 이와 같은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하여 거의 탈진 상태에 처했습니다. 삼손은 자신에게 찾아온 체력 소모와 극심한 갈증으로 인하여 결국 자신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삼손은 극심한 갈증 앞에서 비로소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짧게나마 블레셋으로부터 얻은 승리가 삼손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큰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형통한 인생에서 갑자기 곤고함이나 고통의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 비슷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삶의 위기가 찾아오면 비로소 그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더듬습니다. 이는 답답한 현실을 속히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통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현상입니다. 심각한 목마름이 삼손의 세속화된 신앙을 일깨워 하나님을 찾게 만든 자극제가 된 것처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삶의 고통이나 아픔도, 결국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 우리가 다시금 하나님을 찾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극으로 우리의 신앙이 단번에 온전한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되돌아 볼 기회를 주셨고, 그 기회를 통해 하나님을 찾고, 그 은혜를 누렸다면, 그 뒤의 인생은 이제 나의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신앙이 아니라, 비천에 처할 때나 풍부에 처할 때나 하나님을 향한 동일한 중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따르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삼손의 이러한 얄팍한 마음을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기도에 친히 응답해 주시는 선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레히의 한 우묵한 곳을 쪼개어 샘을 만드셨고, 그곳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물을 마신 삼손은 정신이 회복되었고, 몸이 살아났습니다. 삼손을 향한 이러한 은혜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우리를 향한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향한 걸음은 더디시고, 은총을 허락하시려는 걸음은 빠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의 뻔한 엄살에 늘 속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마음을 훤히 아시면서도 사랑으로 늘 속아주시며, 새로운 기회와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급하게 물을 주신 은혜를 기념하여 삼손은 그곳을 “엔학고레” 즉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삼손의 작명에는 자기중심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삼손이 참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되었다면, “부르짖는 자의 샘”이 아니라 “응답하시는 분의 샘”이라고 그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의 모습은 아직도 부족한 모습이며, 삼손은 물을 마시고,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어느 정도 벗어난 자리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성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그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이나 사용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 부족한 도구를 통해서도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도 삼손과 같은 어리석은 모습이 없는지 한번 스스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삼손과 같은 어리석은 모습이 있다면 이를 과감히 버리고,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놀라운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도구되는 삶을 살아감으로 세상을 이기신 주님과 함께 각자의 삶의 전투에서 주님과 함께 승리의 자리로 나아가시는 교우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참된 능력이자, 구원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 속에서도
삼손과 유다 백성들과 같은 어리석은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의 자세가 되게 해주옵시고,
우리가 흠이 많고 연약하고 부족하다 하여도, 우리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어,
주님의 크신 일에 승리의 도구로 사용되는 영광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삼손과 블레셋이 서로 보복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 주변에 이와 비슷한 다툼은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삼손에게 놀라운 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특별한 은사와 은혜를 주셨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3.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나귀의 턱뼈도 놀라운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사용하시어, 감당했으면 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4. 삼손에게 계속해서 찾아오는 자기중심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에게도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자기중심성을 멀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작성: 유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