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침뜸의료정책/손중양(허임기념사업회 이사)
1. 생활침뜸과 전문침뜸의 전통
원시로부터 온 탁월한 서민의술
원래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고자 한다. 자연환경에 적응해 나가고 상처가 나거나 병이 들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침뜸의학은 이러한 생명체의 자기 존립을 위한 생물학적인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생겨난 가장 원시적인 자연의술이다. 가려울 때 긁어서 시원하게 하는 것, 아픈 곳을 누르고 도구를 이용하여 자극하는 행위에서 시작된 것이다. 돌침․뼈침 등을 만들어 스스로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뜸은 불을 쬐면서 생겨난 원시 자연의술이다. 수천 만 년 전 원시시대부터 아픈 곳을 따뜻하게 하고, 불로 약한 화상을 입힘으로써 질병을 치료하며 발전시켜온 것이다. 헛배가 부르는 창만병에 도토리 크기의 쑥뜸을 뜨겁게 하였다. 그래도 부작용 없이 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더구나 요즈음 쑥뜸은 쌀알 반만한 크기로 하여 각종 만성병에 훌륭한 치료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식생활과 자연치유법을 배워 익히고 생활에 활용해 왔다. 이렇듯 침과 뜸은 동북아 지역에서 발전해온 대표적인 자연치유법이다.
체하여 답답하고 머리가 아플 때 손가락에 바늘로 찔러 사혈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리고 전국에 수지침 하는 사람이 수백 만 명이라고 한다.
민간의술의 일반적인 특징은 배운 만큼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체했을 때 손가락을 바늘로 따서 사혈을 하는 민간의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침시술이라 할 수 있다. 삼음교라는 혈자리에다 가느다란 피내침을 살짝 꽂아 두기만 해도 생리통 정도는 쉽게 가라앉는다. 족삼리에다 쌀알 반 만하게 작은 뜸을 해도 피로가 풀어지고 노인들은 다리에 기운이 좋아진다.
상투를 하거나 쪽을 찌고 다니던 시절에 남자들은동곳, 여성들은귀잠(귀이지개)이라는 뾰족한 물건을 장식물을 겸해서 하고 다니다가, 응급상황에는 이를 바로 침으로 이용했다. 대표적으로 남녀 교합 시 복상사를 하거나 질경련을 일으키면 머리에 꽂고 있던 장식물을 빼서 회음會陰혈을 찔러 소생을 시키고 위급한 상황을 넘겼다.
침뜸은 이렇듯 원시의학으로써 문자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어온 전통적인 민간의술이다. 요즈음 같이 지적수준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침뜸 이야말로 누구든지 배울 수 있고 또 배운 만큼은 사용할 수 있는 민간의술인 것이다.
이러한 민간요법을 일반인이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침뜸에 대해 대단히 무지하거나, 특정이익집단의 이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전문업종으로 발전한 침구
원시 침술의 발상지는 조선을 비롯한 동방지역이다. 원시 뜸술은 불을 가까이 하던 북방에서 개발됐다. 침뜸술이 중국 본토보다는 동방과 북방지역에서 나와서 문자로 기록되면서 중국 본토의학으로 발전되었다.
중국의 침구에 대한 서적이 한반도와 일본에 전해진 것은 고구려 평원왕 원년(서기 564년)이라고 한다. 중국 강남의 오吳나라 사람 지총知聰이 침구명당도鍼灸明堂圖 등을 가지고 한반도로 들어 왔다가 일본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하며 동북아지역의 전통의술로 자리를 잡은 침과 뜸은 현대의학이 밀려들기 전까지 질병을 치료하는 핵심적인 의술로 백성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를 잡아갔다. 즉 침과 뜸이 동북아지역에서는 ‘대체의학’이 아니라 ‘정통의학’인 것이다.
침뜸은 고려시대부터 점차 전문업종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다가 조선시대에는 침구의鍼灸醫 제도가 마련되었다. 세종실록에는 “중추원 부사 황자후黃子厚가 건의하여 침구針灸를 전문으로 하는 업종을 창설하였고, 가을에 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자후는 의약에 밝아 항상 전의감典醫監 제조提調로 있었다.”란 구절이 있다. 실록에는 조선시대 침구를 전문으로 하는 업종의 창설과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침뜸전문생을 매년 3명씩 선발하여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의 삼의사에 한 명씩 배속시켰다. 침구전문의생이 관직을 받을 수 없는 경우는 사역원별재생司譯院別齋生의 예에 의하여 도목정都目政에 교대하여 임하게 했다.
세종 24년에는, 제생원濟生院을 혁파하여 침구전문생鍼灸專門生들을 혜민 제생원惠民濟生院에 분속分屬시키고, 매년 채용할 때에는 삼의사인三醫司人이 아울러 『침구경針灸經』을 시험하게 했다.
침구전문의제도가 완성된 것은 성종 대에 이르러서다. 성종 3년(1472), 성종은 의학권장醫學權裝 10조를 정하는 중에 침구전문의를 따로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성종 16년(1485), 약 1세기에 걸쳐 완성한 조선 최고의 법전『경국대전』의 의과취재(의과고시 또는 의과시험에 관한 것)에 침구분야와 약제분야의 취재를 분리한다고 기록하면서 침구를 분리ㆍ독립할 것을 법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전통의료가 전문과로 발전하여 약의藥醫와 침구의鍼灸醫로 전문화 되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의료제도는 조선 말 근대의료기관이 처음 시작 될 때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구한말의 의료기관인 내부병원內部病院은 1899년(光武 3년)에 내부직할병원으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일반 환자를 진료하는 외에 감옥 죄수들의 구료, 전염병 환자에 대한 피병원避病院 설치 등을 실행하였다. 이 내부병원의 직제는 주임급으로 병원장 1인과 기수技手 1인을 주고, 판임判任급 의사 15인 이하를 두기로 했다. 이들 의사 가운데 대방의大方醫 두 명과 종두의種痘醫 열명, 외과의外科醫 한명, 소아의小兒醫 한명 그리고 침의鍼醫 한명을 별도로 두고 있었다.
1900년(光武 4년)에 내부병원內部病院을 광제원廣濟院으로 개정한 뒤에도 본원의 직제에 의사 7인 가운데 대방의와 별도로 침의鍼醫 1인을 두고 있다.
이같이 침뜸의와 약의를 구분한 제도는 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되어, 침구의鍼灸醫는 침구사鍼灸士로 약의는의생醫生으로 하여 제도를 운영했다. 해방 후 국민의료법에는 침구를 ‘의료유사업’으로 하여 침사와 구사를 양성하는 것으로 하였고, 일제시대의 의생과 한약종상에 종사하는 약의를 한방의료를 담당하는 한의사로 하여 배출해 왔다. 한의사의 법통적인 맥은 약의藥醫인 것이다.
허준은 침을 몰라 … ‘침의’는 허임
허준이 약과 침뜸을 동시에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허준은 약의藥醫였고, 침의鍼醫는 허임이라는 걸출한 어의御醫가 또 있었다. 조선실록의 기록을 보자.
선조 37년. 밤에 선조에게 갑작스런 편두통이 발작한다. 입시한 의관 허준에게 선조가 묻는다.
“침을 맞는 것이 어떻겠는가?”
허준이 아뢴다.
“여러 차례 침을 맞는 것이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침의들은 항상 ‘반드시 침으로 열기熱氣를 해소시켜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말합니다.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아픈 바로 그 자리)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후 병풍이 쳐지고, 남영南嶸이 혈자리를 정하고 허임이 침을 놓는다. …한달 뒤, 대대적인 포상이 따른다. 어의 허준에게는 숙마 1필이 하사되고 허임과 남영은 6, 7품의 관원에서 당상관으로 파격 승진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허준은 분명하게 ‘소신은 침을 모릅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침의와 약의는 구분이 되어 있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침뜸전문과 약 전문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나라 한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침을 모른다는 허준이 침놓는 사람으로 되고, 전문침의는 없었던 것처럼 하여 역사까지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 일본도 전문침뜸 역사 천년이 넘어
동북아지역 전통의약은 침구와 한약처방이 분리되어 전문과로 발전하여 왔다. 중국에서는 진秦나라 시대부터 구비되어 오던 의관제도醫官制度가 수당시대부터 완비되면서 침구는 전문과專門科로 정비되었다. 「침사鍼師」와 「구사灸師」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의과의 대방맥과 소방맥과 등의 ‘방方’자는 중국어로 ‘약제처방’을 뜻하는 것으로 쓰이고, 침구처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唐대에 침구과. 의과, 안마과, 주금과로 4개과 이던 것이 송宋대에는 9개과였다가 원元대의 분과는 13개과가 되었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국가기구를 정비하면서부터 침뜸이 의료분야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는 전문분야였다. 일본의 의료제도는 701년 대보률령에 의사, 침사, 안마사, 여의女醫 등 이미 전문의 제도를 도입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에서 침뜸전문의료인이 침구사라는 명칭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때는 근대적인 법제가 정비되기 시작하던 19세기 후반.
그런데 1945년 종전과 함께 시작된 맥아더 군정은 침구시술을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이것은 전쟁시기에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일본군인들이 의약품이 부족한 가운데 침구시술로 질병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고문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침구시술을 한 군인들을 전범으로 처단한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 침구사들은 미군정의 침구시술금지조치에 항의하면서 전국적인 반대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운동에 대하여 몇몇 현대의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침구의 과학적 효과를 입증하여 주었다. 그 결과 맥아더 정부는 침구금지 조치를 철회했다.
일본에서는 침뜸에 대한 현대의학적인 검증 노력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의사들이 침구학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이고 면허시험과목에 동양의학개론, 경락경혈학, 침구학 등의 과목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동시에 침구사들도 교육과정에서부터 현대의학에 대해 충분한 학습을 하도록 하여 침뜸을 현대적 의료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고대 이후 침구술이 꽃피었던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결같이 침뜸을 약제처방과 분리하여 발전시켜온 것은 침구술 고유의 특성 때문이다. 침 몇 자루와 뜸쑥, 그리고 시술자만 있으면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침구술은 비용이 매우 저렴한 반면 효과는 대단히 탁월하다. 환자와 국민보건, 국가 재정에 있어서는 대단히 유익하고 더없이 경제적인 치료법이다. 반면 의술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침구술이 힘이 들고 벌이는 얼마 안 되는 노동으로 천덕꾸러기가 되기 십상이다.
더구나 오늘날 이윤추구를 우선시 하는 시장경제에서 하나의 독립된 전문의학인 침뜸의학을 한약처방에다 섞어버리면 노력에 비해 부가가치가 덜 생기는 침구의학은 치료수단에서 밀려나거나 한약판매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침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서민생활의술로서의 전통을 살려나가는 한편, 하나의 독립된 전문의료로 발전시켜나가면서 현대의술을 비롯한 다른 의술과 결합시키는 정책이 필수적이다.
2. 침뜸수난시대
동북아 지역의 전통의술은 전 세계적 의술로 각광을 받으며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과 북한에서는 민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침구인들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풍부한 경험으로 전승되어온 전통의술의 맥을 잇도록 했다. 또한 전통의술을 현대의학의 바탕 위에 계승 발전시켜 환자의 치료에 활용해 나가고 있다. 미주와 유럽 각 국에서도 동양의 지혜인 침술을 배우고 현대 의료에 적극 활용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남단에서만은 그렇게 널리 활용되던 침뜸이 반세기 동안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첫째, 민간 침구인들이 제도권으로 수렴되는 과정이 한 차례도 없이 핍박만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둘째, 한약을 중심으로 하는 한의사에게 침구를 독점시켜 침구를 한약 판매의 보조수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셋째, 전통의술과 현대의학 사이에 서로 넘어가지 못하게 철조망을 쌓아놓아 전통의학의 핵심인 침뜸을 현대적 의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통침뜸 맥 끊은 의료쿠데타
전통의술은 대부분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전승되어 오는 의술이다. 따라서 전통의술의 맥을 이으려면 일차적으로 민간의료인들의 의술을 검증하여 활용하는 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전통의술은 일침이구삼약一鍼二灸三藥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의술의 핵심인 침뜸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나서 박해만을 당해왔다.
해방 후 우리 정부가 제정한 최초의 의료관계법은 1951년 공포된 국민의료법. 이 법률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 등을 의료업자로 규정하고 접골·침술·구술·안마술업자 등은 의료유사업자로 정했다. 그런데 보건사회부는 법률에 명시한 대로 의료유사업자제도에 대한 주무부령을 제정하지 않아 침구사 배출이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연기를 거듭하던 의료유사업자에 대한 주무부령이 제정된 것은 국민의료법이 제정되고 10년 가까이 지난 4.19 이후. 1960년 1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의료유사업자령과 자격시험규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침사나 구사 등의 자격시험은 보건사회장관의 지시에 의하여 매년 1회씩 서울특별시장 또는 도지사가 시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침사 및 구사 자격시험이 시행되기를 고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당국이 인가한 8의 관인침구사 양성기관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친 5천여명의 졸업생들이었다. 주무부령이 제정됨에 따라 이들 졸업생은 침구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자격시험은 단 한 차례도 시행되지 못했다. 5·16 직후인 1962년 3월20일 국민의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한 의료법을 만들면서 의료유사업자제도에 관한 규정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해방 후 한 명의 침구사도 배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해방 이전에 침구사 자격을 취득한 기旣 자격취득자에 대해서만, ‘당시의 의료유사업자의 자격과 기타 의료상의 권리는 동법同法에 의하여 취득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경과규정을 두었을 뿐이다.
민간 침구인들과 침구사 양성기관 출신자에 대하여는 단 한 차례도 구제의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가 62년 박정희 정권이 등장한 직후 갑자기 침구사 양성제도 자체를 폐지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전통침뜸의술의 맥을 끊는 의료쿠데타 과정이다.
침뜸 모르는 한의사에게 '침구독점'
이와는 대조적으로 첩약(약제)의료에 종사하던 사람을 위해서는 1952년부터 매년 검정시험을 실시하여 한의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이 검정시험규정은 6개월 내지 1년 과정의 단기양성기관(각종 관인학원) 출신자는 물론 무학력으로 한의업(약제상 등)에서 10년 이상 종사한 사람에 대하여도 5년간은 한의사국가시험 응시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한약업 관련 종사자들에 대한 검정시험은 1963년 10월에 의한 공고까지 14회에 걸쳐 이루어졌고 검정시험과 자격시험을 모두 통과해 한의사가 된 사람의 수는 2천명에 이르렀다. 당시 한의사의 수가 3천명 선이었으니 대단히 많은 숫자이다.
보건복지부는 62년 이후 침구의료행위가 한의사의 업무영역으로 제도정비가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침구는 전혀 배우지도 않고 자격시험에 침구학이 한 과목도 없던 한약 전문인들에게 침구를 하도록 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침사·구사 등의 양성과 배출에 관한 규정을 삭제하면서 이 업무를 누가 대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법률에 전혀 명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의계는 침술과 구술을 한의학적 치료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처음에는 강제적으로, 이후에는 암묵적으로 침구시술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보건의료당국은 침구에 관한 학습여부는 물론 능력 여부에 대한 검정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한의사들에게 침구시술권을 허용한 셈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보다 큰 문제는 침구술을 모르는 원로 한의사들이 각 한의과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는 사실이다. 첩약전문이었던 의생들이 하나뿐인 한약전문학원을 운영하다 60년대 중반 재정난으로 경희대로 넘어가 의대가 되고 경희의대 내에 4년제 한의과가 생긴 것이 한의대의 뿌리이다.
한약만을 위주로 공부한 한의사들이 교수가 되었으니, 우리나라 대부분 한의대에서는 제대로 맥을 잇는 침구교수가 없는 것이다. 그 후 경희대를 포함하여 10여개의 한의대가 생겼으나 한약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침뜸은 뒷전으로 되어, 침과 뜸의 맥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첩약술과 침구술은 다같이 우리나라의 전통의료지만 그 특성이 달라 선조들은 삼국시대부터 약제전문의와 침구전문의를 제도적으로 분리·전문화시켜 운용해 왔다. 전통침뜸의술을 계승해 오던 민간침구인들을 제도권으로 수렴하지도 않고 약제만을 공부한 한의사에게 침구술을 독점시키려 한 것은 침구의 맥을 끊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의사의 주된 수입원이 침이 아니라 약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의계 일각에서는 한의원을 찾는 환자에게 침시술을 많이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침은 한약 판매를 위한 유인수단 또는 보조수단일 뿐이다.
젊은 한의사들 중에는 침술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있으나 침뜸을 해서는 한의원 운영이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다. 환자부담금과 보험급여비를 합해 1만원 남짓의 침 값을 받아가며 손수 시술해야하는 침구시술만을 고집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한약판매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수입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히 침뜸으로 병을 고치기보다는 한약 판매의 보조수단으로 침구를 하다보니 침구술의 발전은 없다. 한의사의 형식적인 침 시술로 효과를 보지 못하여 침에 대한 환자들의 불신만 커지는 것이다.
전통의술과 현대의술 사이의 장벽
침구사 김남수 씨는 화상을 침으로 흉터 없이 말끔히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하지만 이 탁월한 치료법을 논문으로 정리하여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진료현장에서 일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화상을 입은 환자들은 우선 병원의 응급실을 찾을 것이다.
그런데 병원응급실에 침시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없고 침이 있을 리 없다. 화상침치료법을 배운 의사들도 화상을 침으로 치료하여 탁월한 효과를 보고 있지만 의사가 침시술을 한다고 영업정지되는 사례까지 있어 늘 불안하다. 전통의술을 한의사라는 특정 의료인들에게 독점시켜놓은 데 따른 폐해의 한 단면이다.
전통의학이 오늘날 다시 재조명되고 의료현장에 광범하게 쓰이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통적 의료와 현대적 의료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놓여 의술의 발전을 가로막고 환자들에게 고통을 더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의학계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침술을 활용하자 한국의 의사들도 침구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여러 침뜸교육기관을 찾아 침구학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현대의학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려는 대체의학의 범주 가운데 침구학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동양의 침뜸이 서구로 건너가서 거기서 다시 역수입된 새로운 침법인 IMS(근육자극요법)는 요즈음 모르는 의사가 별로 없을 정도이다. 한의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침시술이 늘어나면 전통과 현대 사이에 쳐 놓은 장벽은 무의미하고 결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들풀 같은 생명력, 침뜸의 부활
침과 뜸은 이 땅의 역사가 기록되던 그때부터 백성들의 삶과 함께 해온 탁월한 우리의 전통 민간의술이다. 백성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린 생활의술은 쉽게 없앨 수 없다. 처음부터 민간의술로 백성들 사이에서 활용되어온 침뜸은 들풀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침술은 그 방법이 간단하고 효과가 빠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아픈 사람에게 손쉽게 시술해 줄 수 있다. 이러한 침술의 특징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한번만 손 봐달라고 찾아온 이웃에게 침을 놔 주게 된다. 그렇게 하여 병이 나으면 금방 소문이 퍼져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
침구양성제도가 없어진 뒤부터는 무면허 침술 행위에 대한 단속이 대단히 심했다. 검문검색 중에 가방 속에 침이 발견되기만 해도 구속되던 시절까지 있었다. 죽을 지경이라며 침을 놔달라고 매달리는 함정 수사에 걸려 침을 놓다가 구속이 되는 사람도 허다했다.
한의사들은 민간 침구인들을 끊임없이 고발하였다. 수지침의 경우도 한의사들의 단골 고발 종목이었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에서 수지침은 민간의술이라는 판례가 나와 일단락 됐다. 침뜸교육의 경우도 한의사들은 눈에 가시처럼 여긴다. 9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침뜸을 가르치는 행위조차 불법으로 치부되어 한의사들의 고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95년 모든 강습행위는 원칙적으로 등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결정이 있고 나서야 침뜸교육이 각 사회교육기관에서 대대적으로 활성화되기에 이르렀다.
최근 들어서는 대안대학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녹색대학 자연의학과에 침구전공과정이 개설되었다. 또 광주의 송원대학에서는 뜸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자연요법학과를 개설하자 지원자가 넘쳐났다.
맹인학교에서는 교육부에서 만든 교재로 침뜸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지금 맹인 안마사들이 침술원 간판을 내걸고 침시술을 하고 있는 것은 ‘3호 이하의 침은 자극기구다’라는 1988년 보건사회부의 유권해석에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해 침구의 독점을 주장하는 대한한의사협회가 ‘안마사 침술자격 부여처분 무효확인 청구소송’을 내는 등 집요하게 방해해왔지만 맹인들이 생명을 걸고 강력히 반발, 현재까지 유권해석으로 침술을 하고 있다.
필자는 침구사 제도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해 오다 고령에 이르러 전통 침뜸술의 맥을 이을 침구인 양성이 더 시급해져 10년 전부터 침뜸교육에 나서고 있다. ‘배워서 남 주자!’라는 구호 아래 침뜸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험을 거쳐 뜸요법사들을 배출, 이들을 중심으로 지금 전국 각지에서 연간 6만명 이상에게 무료진료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뜸사랑, 정통침뜸연구소,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등은 북한의 전통의학 분야 최고기관인 고려의학과학원과 침뜸학술토론회를 갖는 등 남북침뜸교류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정부에서 끊은 정통침뜸의 맥을 민간에서 이어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3. 한의사 침구독점권 없다.
어느 원로 한의사의 고백
지난 1995년 대한한의사협회장까지 지낸 바 있는 원로 한의사 배원식씨는 ‘자신은 침구를 배운 바도 없고 시술할 능력도 없다’고 밝히고 ‘한의사 면허로는 침구를 할 수 없다’고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민원호소까지 냈다.
위 ‘청원서’를 제출한 배원식씨는 청원서에서 청구인이 취득한 한의사 면허 범위는 순수 한약재에 의한 한방의료행위만을 전담하는 한의사 면허이며, 본인은 지난 60여년간 임상에서 한방의료행위 외에는 일체 취급한 사실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또한 ‘면허 취득 당시 침구시술행위가 검정과목에서 제외되어 침구 시술을 행할 자격도 없을 뿐 아니라 일평생 침구 시술을 행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배원식씨가 제출한 청원서에 대하여 의료보험조합연합회는 ‘현행 의료법상 한의사 면허를 소지하고 한의원을 개설한 자는 침구 행위가 가능하다. 따라서 청구인의 침구 시술행위도 위법이 아니고…’(후략)라는 회신을 보냈다. 이에 따라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청원이 이유 없음을 들어 각하했다. 위 청원서에 대해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단 한번도 침구술을 배운 적도 없고 시술한 적도 없는 사람에게 국민의 보건과 의료를 억지로 떠맡긴 것이나 다름없다.
침구를 전혀 배우지도 않고 시술능력도 없으며 검정과정도 전혀 거치지 않은 한의사의 침구시술은 법률적으로 문제가 있다.
침구는 한방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의료법 2조 1항은 의료인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조산사 간호사를 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의사는 의료법 2조 3항에서 ‘한방의료와 한방보건지도에 종사함을 임무로 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의사의 임무인 한방의료는 무엇인가. 한방漢方이란 원래 중국 한나라의 약 처방이라는 뜻으로 써 오던 말이다. 중국말로 方fang은 ‘약의 처방’이라는 뜻이다. 한방의료라 함은 약 처방 의료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 한자문화권에 속하고, 근대에 들어서는 우리나라 제도형성과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 일본에서도 한방은 약제처방이라고 풀이하고, 침뜸은 한방과 전혀 별도이다. 따라서 한방이라고 하면 약제처방을 나타내는 것이지 침구처방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 것이다.
우선 한방을 담당하는 한의사가 침구를 행할 자격을 갖고 있었는지 우리나라에서 한의사 자격 취득에 대한 연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침구 의료와는 전혀 업종이 다른 한약종상에게 무학력으로 10년 이상 종사한 경력만 있으면 한의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따라서 이들 한약종상에게 한의사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해 한의사를 배출했다는 것은 당시 국가가 한의사는 침구시술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사실을 인정해 제도를 마련한 것이 틀림없다.
또한, 당시 한의사면허 검정시험과목을 보더라도(4285. 4. 1. 공고 39호 제1회 시험부터 1963. 10. 8. 공고 1056호 제14회 최종시험까지) 생리학, 약물학, 병리학, 해부학, 위생학, 진단학, 내과학, 소아과학 등으로서 침구과목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고, 이는 한의사 국가시험 본 과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위와 같은 한의사 면허 검정시험 및 본시험에 이르기까지 침구지식에 관한 것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던 점들을 고려하면 당시 침구에 관해서는 한의사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이와 관련해서 대법원 역시 1961년 판결(대법원 4292행상122호 판결)에 의해 침구사 자격증이 없는 한의사가 침구를 시술해서는 되지 않는다.라는 판결을 선고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의료법 제정 당시 한의사 면허자는 법률적으로 보아 면허범위에서 침구시술행위가 완전히 배제되어 한약의료전문인이라는 사실은 명명백백하다.
이러함에도 보건당국이 한의사들에게 침구시술을 허용한 것은 침구는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거나 검증을 거치지 않아도 의료영업을 할 수 있는 민간의료행위로 인정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들 한의사들에게만 무면허 의료행위를 불법적으로 허용한 것이 될 것이다.
한의사가 의료유사업자인가?
현행의료법상 침사와 구사는 의료유사업자이다. 더 이상 배출하지는 않고 기존의 침사와 구사에게만 침구면허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현행 법률상 의료행위와 의료유사행위는 엄격히 구분해 놓고 있다.
의료인의 종별을 나누어 그 임무를 설명하고 있는 의료법 제2조 제2항에도 의료유사업자에 관한 규정은 없다. 의료유사업자와 안마사에 관한 규정은 제60조와 제61조에 규정하고 있다. 의료법 제60조 제2항에 의료유사업자의 경우는 의료인과는 별도로 ‘면허’는 ‘자격’으로, ‘면허증’은 ‘자격증’으로, ‘의료기관’은 ‘시술소’로 하는 등 분명히 의료인의 그것과는 다르게 명시하고 있다. 한의사는 의료법 제2조(의료인)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의료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의료인이 의료유사업을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의료법 제25조에는 “의료인이 아니면 누구든지 의료행위를 할 수 없으며 의료인도 면허된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라는 규정을 두어 의료 면허주의를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따라서 의료유사업자가 아닌 한의사가 의료유사행위를 했다면 이는 명백히 의료법을 위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안마업을 안마사 이외에는 어느 ‘의료인’이라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침사․구사가 하는 업을 다른 의료인이 할 수 없는 것이 합리적인 법해석일 것이다. 그런데 보건당국이 유독 한의사에게만 의료유사업을 허용하고 있다. 도대체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한의사는 침구학을 배우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배워 잘 할 수 있다면 이를 업으로 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보건당국도 의료법에서 한의사의 침구시술을 허용하는 규정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당국이 내세운 한의사의 침뜸허용을 인정하는 규정이란 의료법 시행규칙 제8조와 제30조를 가리킨다. 의료법 시행규칙 제8조의 시험과목에 관한 규정이 한의사의 침구시술권을 인정하는 법조항이라고 한 보건당국의 주장은 유권해석에 불과하다. ‘국가시험에 통과하기 위하여 침구학을 공부하였으니 그 시술권을 갖게 한다’는 것은 법에 규정된 권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침구학이 시험과목에 전혀 들어 있지 않던 1962년 이전에 한의사 자격시험에 응시, 자격을 획득한 2000여명의 한의사는 이 해석으로도 침구시술권을 가질 수 없다. 이는 보건당국의 유권해석이 엉터리라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보사부의 이러한 유권해석은 명백한 법률위반이다. 유권해석에 의해 하위법인 의료법 시행규칙이 상위법인 의료법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건당국의 잘못된 유권해석에 의하면 한의사들이 법률이 허가하지 않는 의료유사업(침사․구사의 업)를 한 것이 되어 ‘의료인이라도 면허된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는 의료법 제25조에도 위배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보건당국이 근거로 내세운 또 다른 조항인 의료법 시행규칙 제30조는 ‘진료과목 표시’에 대한 항목이다. 이 규정에 의하면 한방병원 또는 한의원에 있어서는 한방내과, 한방부인과, 한방소아과 등과 함께 침구과를 진료과목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에 의해 한의사가 침구를 시술할 수 있다는 보사부의 해석은 ‘단지 표기할 수 있는 진료과목 안에 침구과가 들어있다’는 뜻인데 이는 상위법에 규정되지 않은 것을 표기하도록 해 놓은 것이니 이 또한 상위 법률을 위반한 유권해석일 뿐이다. 이 규정 또한 한의사가 유사의료업인 침뜸진료를 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한의사는 의료유사업자가 아닌 것이 명백하므로 한의사가 의료유사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료유사업이 한방의 범주에도 속한다고 하면서 한의사가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의료유사업은 의료의 범주에도 속하기 때문에 모든 의료인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보건당국에서 이러한 의료유사업자도 아닌 한의사에게 침구를 광범위하게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침구와 같은 의료유사행위는 민간요법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