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무애한 대승의 모습 / 김형효 교수
천룡은 대승의 자유스런 보살도 경지
고행 예찬은 불교대승사상 모르는 것
“사자후(獅子吼)의 두려움이 없는 설법이여. 뭇 짐승들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이라.
향기 나는 코끼리(香象=성문과 연각)는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고,
천룡(天龍)은 고요히 듣고 희열을 내는 도다.”
백수의 왕 사자는
모든 짐승이 다 두려워하는 포효로서 두려움이 없는 무외(無畏)의 존재를 나타낸다.
사자후는 부처님의 법을 깨달은 무상의 정등각을 말하며
사자후를 들으면 뭇 짐승들은 이해가 안 되어서 뇌가 파열하고,
짐승 중에서 가장 육중하고 힘이 센 향기 나는 코끼리는 놀라서 도망을 간다.
말로서 부처님의 법을 들은 성문(聲聞)과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을 듣지 않아도
이치로 깨달은 연각(緣覺) 등과 같은 소승(小乘) 등은 불법에 입문하였기에
향기가 나고 힘이 세지만, 아직도 땅을 떠나지 못하는 코끼리의 신세에 머물고 있다.
그것은 천공을 날아다니는 자유스런 천룡의 모습은 아니다.
천룡은 대승의 입장으로서 자유스러운 보살도의 경계에 속한다 하겠다.
성문과 연각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과 가르침에 얽매여 있는 수준으로서 자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성문과 연각은 부처님의 법이라는 것에 사로잡혀서 거기에 얽매인 종속적 존재에 불과하다.
지난 회에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이야기하였을 때에 우리가 그 점을 말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으려고 거기에 얽매인 기독교인들은
코끼리와 같은 육중한 존재자가 되어서 결코 자유자재하게 천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없겠다.
소승은 천공을 날아다니는 대승에 비하여
청각의 가르침(성문)과 시각의 이치에(연각) 얽매여서 거기에 생각이 좁혀 사는 인간으로
영가(永嘉)대사가 ‘증도가’에서 비유하였다.
향기 나는 코끼리인 ‘향상(香象)’이라는 용어는 진흙으로 더렵혀진 일반 코끼리와 다르지만,
여전히 대지의 무거운 중력에 항복한 상태에 있다.
천공을 날아다니는 천룡의 대승적 보살에 비하여 불법의 차원에서 아주 어리다.
이것은 마치 학문적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전공 학자에 비유됨직하다.
전공학자는 자기 전공의 분야에 얽매여 거기에 갇혀 연구한다.
이른바 전공한다는 소리가 그것을 말한다.
귀로서 소리를 듣고 거기에 얽매여 사는 성문이나,
연각처럼 눈으로 보는 이치에 갇혀 사는 전공인은
다 좋고 아름다운 일에 종사하기에 향기가 나지만,
각자가 들은 소리와 눈으로 익힌 이치에만 정신을 집중하므로
다른 소리와 색다른 이치에 둔감한 그런 좁은 전공인이다.
전공학자들은 자기의 전공에 너무 종속되어서
그 전공의 바깥을 나서면 아무 것도 모르는 침묵도사가 된다.
이때의 침묵은 수많은 답변을 다 안고 있는 영양가 많은 침묵이 아니라,
아무 영양가도 없는 매우 가난하고 빈곤한 침묵일 뿐이다.
향기 나는 코끼리가 소승적 차원이라면,
천룡은 대승적 차원의 자유스러움을 본질로 살아간다.
그런 천룡은 사자후를 듣자마자 환희심에 기뻐서 춤을 추려한다고 영가대사가 술회하였다.
천룡이 환희심에 춤을 춤으로써 부처님처럼 사자후의 설법으로 돌변한다.
우리는 사자후가 목에 힘을 주고 소리를 내려 까는 무게 잡기로 착각을 한다.
그러나 영가대사가 말한 사자후는 춤추면서 웃는 낭랑한 소리와 다르지 않다.
한국 불교는 너무 웃지 않는 금욕주의와 엄숙주의에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우리는 불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가 미소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은 미소의 순간을 앗아간다.
십자가에 못이 박힌 자가 미소를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고행을 예찬한다든지, 엄숙한 도덕군자의 이미지를 지으려고 하는 이는
불자의 대승사상을 모르는 자와 같겠다.
2012. 03. 07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