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청죽골 면앙정(俛仰亭)을 찾아서
우리는 오랜만에 남도 땅을 밟았다. 아직도 이곳에는 사람들이 사는 찐한 냄새가 난다. 오늘 첫 답사지는 청죽골(담양)이다. 이곳 담양은 어디인가! 전통의 고장이면서 가사문학과 함께 죽제품의 명산지다. 조선중기 국문학을 찬란히 꽃피운 면앙정 송순을 비롯하여 송강 정철, 석천 임억령 선생 등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원림(園林)과 누정(樓亭)을 가꾸면서,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유서 깊은 곳이 아닌가.
오늘따라 만원을 이룬 답사버스는 면앙정(俛仰亭)을 향해 29번 국도를 타고 고서 방향으로 나가다 약간 지나치기 쉬운 후미진 곳으로 진입하여 도로와 연접된 꽤 널찍한 공터에 정차한다.
이런 곳에 공지를 조성해 놓은 까닭은 아마도 면앙정을 찾는 답사객 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곳 담양군(지방자치단체)의 배려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 중기 때 문신이며,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인 송순(宋純. 1493~1582)이 고향마을인 봉산면 제월봉(霽月峯)언덕 위에다 정자를 세우고 면앙정이라 하였는데, ‘강쟁리 뜰’로 부르는 너른 들판을 내려다보고 배치하였다.
정자의 문패 겸 선생의 호(號)인 ‘면앙정’ 이란 뜻은 ‘땅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쳐다본다’ 란 의미로, 즉, 아무런 사심이나 부끄럼 없이 산다는 뜻으로 선생의 넓고 담담한 경지와 당당한 선비의 기개를 나타내는 여유로운 마음을 담고있다.
그림설명:늠름한 자태로 이방인을 맞는 면앙정
청죽(靑竹)이 우거진 사이로 가파른 돌계단 하나가 나타나는데, 이곳을 오르는 길이 마치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높기만 하다. 그런데 미지의 세계를 빨리 보고싶어하는 혈기왕성한 젊은 회원들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거기에 보폭을 맞추다보니 숨이 턱까지 차 오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들이밀자, 전혀 예상치 못한 널찍한 공간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하늘과 땅과 소나무와 대나무가 함께 어우러지는 숲이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지는데, 마치 다른 미지의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다.
좌측 언덕(절벽)배기 위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하게 꾸며진 면앙정이 이방인을 향해 눈길을 보낸다. 정자 한 가운데로 한 칸 짜리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방을 중심으로 사방에는 마루바닥을 깔았다.
정자 뒤로는 선생이 심었다는 수 백년 된 아름드리 상수리나무와 참나무가 자태를 뽐내며 서로 키재기를 한다. 그리고 벼랑 끝으로 전개되는 넓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지면서 아름다운 전원을 일구는데, 들녘 저편으론 불대산, 삼인산, 용진산, 금성산, 추월산(秋月山)을 잇는 호남정맥이 병풍처럼 연이어진다.
그림설명:하늘길 처럼 높은 면앙정을 오르는 돌 계단.jpg
추월산은 담양의 진산(鎭山)으로, 산 정상에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그 경관이 장대하다. 산이 유난히 깊고 수많은 골짜기는 약수와 함께 맑은 물줄기를 흘러 보내는데, 그 물이 계곡을 타고 담양호로 들어간다.
정자에 앉아 들녘을 바라본다. 넓적한 상수리 잎이 무성한 숲을 만든 사이로 들판이 점점으로 이어지면서, 미풍(微風)이 일 때마다 잎새를 흔들며, 너울져 흐르기를 반복하는데, 한참동안 자연에 동화되다보니 서울에서 찌든 마음의 불순물이 모두 빠져나가는 듯 시원하다.
예전의 정자 아래로는 푸른 여계천이 사시사철 흘러 갈꽃과 역귀가 철 따라 피어나고, 흰 백사장에는 백로 때와 어우러진 어부들의 노랫소리가 이곳 정자에서도 들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논밭으로 개간되어 고즈넉한 옛 정취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설에 의하면 이곳 면앙정 터는 당초 곽씨란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곽씨가 잠을 자는데, 관복(官服)에 옥대(玉帶)를 두른 선비들이 이곳 터로 몰려든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후로 곽씨는 이 터에서 태어난 아들이 틀림없이 큰 벼슬을 할거라 믿고는 열심히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뜻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가산만 탕진하고는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송순이 이 터를 인수하여 정자를 지었고, 그 후 많은 학자와 선비, 시인, 묵객들이 몰려들었는데, 결국 곽씨가 꿈은 제대로 꾸었지만 해몽이 잘못된 것이라 전한다.
회원들이 모두 정자마루에 올라 양반다리를 하고는 그럴싸하게 폼을 잡는다. 그리곤 타임머신을 타고 이조 중기에 도착하여 금새 선비가 된 양 한담을 나누는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제월산 자락으로 퍼져나간다. 곧 이어 몸과 마음이 모두 후덕한 총무로부터 간산 때마다 단골메뉴가 되어버린 김밥이 제공되고, 이 지역에서 활동중인 이××고문께서 회원들을 위해 성심 성의껏 준비한 삶은 돼지고기와 보쌈김치가 배분되고, 금새 소주잔이 몇 순 배 돌아 가자, 모두들 신선이 되어버린다.
면앙정 천장(天障)에는 퇴계 이황(李滉), 하서 김인후(金麟厚), 고봉 기대승(奇大升), 백호 임제(林悌), 석천 임억령(林億齡), 등이 쓴 판각이 즐비한데 그 중에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좌측 천장에 걸린, 정자 주인장인 송순이 `면앙정` 이란 세 글자를 머리말로 하여 지은 면앙정 삼언가(俛仰亭 三言歌)가 유독 돋보인다.
俛有地 굽어보면 땅이요
仰有天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亭其中 이곳에 정자가 있는데
興浩然 흥이 절로 넘치구나
招風月 풍월을 부르고
揖山川 산천을 모아
扶藜杖 명아주 지팡이 짚고
送百年 백년을 살아가리라
송순【1493(성종 24)~1582(선조 15)】은 담양군 봉산면 상덕리에서 태어나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자(字)는 수초(遂初), 성지(誠之)다.
호는 기촌(企村), 면앙정이며,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인 송태(宋泰)의 아들로 태어났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 說書)가 되고, 1527년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533년(중종 28) 김안로(金安老)에 의하여 이곳으로 귀향(歸鄕)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은거생활을 하다가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었고, 다시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과 충청도 어사 등을 지내고, 1539년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어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의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 관찰사와 사간원 대사간 등의 요직을 맡았으나, 1542년 윤원형과 황헌 등에 의하여 전라도 관찰사로 피출(被黜)되었다. 1547년(명종 2)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을 찬수하였다. 그 해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사가 되었고, 1550년에 대사헌과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과 이기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을 폈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 1552년 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그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때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가 부(賦)를, 김인후와 임억령, 박순(朴淳), 고경명(高敬命) 등이 시를 지었다. 그 후 전주 부윤과 나주 목사를 거쳐 7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선조 1년(1568)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 판윤과 의정부 우참찬을 걸쳐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는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으며, 풍류를 음미한 재상으로 일컬어진다.
선생은 77세의 나이로 관직을 은퇴하여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이곳에서 ‘면앙정장가’ 와 ‘면앙정단가’ 를 비롯하여 ‘비석가’, ‘오륜가 ’등 여러 편의 시조를 남겼으며, 당대의 내노라하는 선비들이 노학자를 찾아 이곳을 드나들면서 호남제일의 기단인 면앙정 시단을 형성하였다.
중식을 끝내고, 요즈음 한창 풍수학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K교수의 논문에 `면앙정에서 제월봉 정상을 향해 100m 쯤 오르면 선비의 무덤답게 조촐한 선생의 묘소가 있다` 는 글이 올라와,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선생의 묘소를 간산하자는 회원들의 제안으로 부지런히 제월봉을 향해서 오른다. 면앙정까지 기복굴곡으로 들어오는 내룡(來龍)을 밟으며, 300m 정도 올랐으나, 이름 모를 민묘들만 간간이 나타날 뿐 정작 선생의 묘소가 보이지 않는다.
함께 동행한 회원들이 기대감이 무너졌는지 모두들 하산하고, 우리나라 풍수학계에서 ‘뚝심’ 이란 닉네임과 함께 ‘한번 한다면 끝장을 보는’ 열의가 대단하신 김명식 고문과 제월봉을 누비는데, 초여름이 선사하는 땀방울이 쉴새없이 흐르면서 겉옷까지 젖은지 오래다. 죽림의 고장답게 울창하게 치솟은 왕대나무 사이를 곡예 하듯 샅샅이 뒤졌으나 결국 포기하고 하산 길로 접어드는데,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그렇다, 우리나라 풍수학계가 좀더 세인들에게 다가서려면 지도자란 위치에 있는 분들이 어떤 의무와 책임감을 가지고 사실에 입각한 논문이나 간산기를 올려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2003년 4월 17일 (목) 자 `디지털타임스` 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딴판인 선생의 다른 면모를 접하는 기사하나가 올라왔다.
(제목) 아랫물 맑은데…
고려 충렬왕 때 감찰시승을 하던 조인규(趙仁規)라는 관리가 있었다. 남경 지역의 백성을 800명이나 동원, 수달피 사냥을 시켰다. 남경은 오늘날의 서울이다. 조인규는 백성들이 사냥해온 모피 가운데 절반만 왕비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챙겼다. 해마다 이런 짓을 하다가 남경부사 최자수(崔資壽)에게 적발되었다. 남경부사 최자수는 조인규의 휘하 졸개를 잡아 가뒀다.
......................................................(중략)
조선시대 관리였던 송순은 멋진 시조를 남겼다. 자신의 `청렴결백` 을 세상에 두루 알리는 시조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淸風)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시조만 보면 `포청천` 따위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청렴한 관리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가난한` 송순이 자손들에게 상당한 재산을 물려준다. 장녀에게는 노비 41명과 전답 153 두락, 차남의 부인에게 노비 40명에 전답 142 두락과 유명한 정자인 `면앙정`, 그리고 정자 주위의 죽림 등을 상속해준 것이다.
모두 8명의 자손에게 약 2천 석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시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재산 분배다. 단지 글 솜씨만 청렴했던 것이다.
송순은 경상, 전라도 감사,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고급 관리였다. 직위를 이용해 막대한 재산을 만들었거나 아니면 직위 덕분에 물려받은 재산을 관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의 저자인 이덕일 씨는 이를 `자기기만의 극치` 라 꼬집는다.
예전의 우리 조상들은 정자(亭子) 하나를 짓더라도 자연과 조화를 혼합한 풍수적(風水的)산물을 응용하였다. 즉, 주변의 자연현상을 정자로 끌어들여 상생(相生)의 조화를 꾀했는데, 예를 들어 터를 일구는 주산(主山)이나 현무봉(玄武峰)이 뾰족한 화형산(火形山)이면, 정자의 지붕을 목형(木形)인, 육각(六角)이나 팔각(八角), 또는 다각(多角)을 배치, 목생화(木生火)의 순리를 적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