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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쥐
김 기 진
1
겨울은 눈앞에 있었다. 모든 것이 눈이 돌아갈 만큼 바쁘게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열두시를 치게 되었어도, 하늘은 개지 않고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방 안의 사람들은 끝없는 이야기에 기운이 풀어져서 모두 다 입을 다물고 괴로운 듯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담배의 연기는 방 안의 공기를 더한층 무겁고 견디기 어려울 만큼 텁텁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정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다가, 어찌하다가 끊어지고서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다 각각 깊은 연못 슥에 빠져 버렸다. 힘이 없다. 팔에도, 얼굴에도, 입귀에도―온갖 곳의 기운은 그 동안의 쉴새없이 주고받고 하던 이야기로 말미암아 다 빠져 버린 것같이 온 몸이 기운 없는 살덩어리같이 놓여 있을 뿐이다. 방 안을 둘러보면,
그곳은 마치 시골 어느 곳의 구두 짓는 방이나 다를 것이 없을 만큼 더러웠다. 뜰로 향한 문은, 깨어진 유리 조각을 신문지로 기운 듯한 유리 영장이 닫혀 있고, 그 유리창으로는 연기와 먼지와 때묻은 구름으로 말미암아 지저분해진 하늘이 내다보이고, 행길거리로 붙은 들창은, 오래전부터 사용이 되지 않았던 듯이 열어 보지도 못하도록 아주 봉해 버려 있었다. 벽은 떨어지고, 장판은 벗어지고, 빈대 피는 여기저기의 벽 위에다 그 검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여러 해 동안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방에서 살다가 나갔다는 듯이, 벽 위에는, 빈대 피가 달음박질한 그 사이사이에, 서투른 글씨로 사람의 이름을 쓴 것과, 주소를 쓴 것과, 혹은 날짜를 쓴 것이 하나 가득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 방을 맨 처음에 셋방으로 내놓자 들었던 사람이 떠나간 뒤로는 한 번도 도배를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이 집은, 생각건대 처음에는 아마, 훌륭한 양반이 떵떵 울리고 살던 집인데, 그 후로 이 집이 팔린 뒤로, 새로 산 집주인은 이 집을 방방마다 따로 떼어서 세를 놓은 듯싶다).
대갓집의 줄행랑이 되다시피 지어 놓은 이 집은, 방방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곁의 방에는 충청도에서 올라온 듯싶은 젊은 내외와 그들의 어린 자식 두 아이가 세들어 있었고, 그 다음 방에는 늙은 노인 내외와 연초회사에 다니는 그들의 나이 어린 손자인 듯싶은 사내아이가 세들고 있었다. 이와 같이 그 다음 방에도, 그 다음 방에도 한 집 가구가 살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기운 없는 속에서도,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 ―옆의 방에서 지껄여 대는 소리, 또는 행랑 뒷골목으로 소리를 외치면서 지나가는 물건 장수의 반벙어리 소리, 멀리 들리는 행길거리의 시끄러운 소리, 그리고는 겨울을 준비하는 흐리멍텅한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하는 듯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있었느냐? 구루마 바퀴가 땅바닥과 이를 가는 소리가 있었다. 사람의 발바닥이 땅바닥과 입맞추는 소리가 끊일 새 없이 일어났다. 옆의 방에서 간간이 들리는 한숨 섞인 글소리가 있었다. 한량없는 이야기에 마음과 입술이 피곤한 이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머리를 누르는 무거운 느낌을 주는 구시렁대는 소리였었다.
“사는 게 뭐예요. 벌거지죠…… 먹고살라니.”
여편네인 듯싶은, 맡소리가 들렸다. 충청도에서 올라온 젊은 여편네의 말소리다.
“그거 참, 기막힙니다! 무얼 하러 알뜰한 이 세상에 나왔는지…… 시골선 편지도 없나요? 일본 사람의 집에 천거하여 준다고 그러더니만……?”
지금은, 그 여편네의 일가 되는 듯싶은 젊은 사내의 말소리다.
“편지가 뭐요! 애아버지가 한 보름 전에 길거리에서 만났다는데…… 사직골 어디 와서 묵다가 갔다는데, 이왕 여기까지 올라왔다가 겨우 하나 남은 누이동생 좀 찾아보고 가면 누가 어쩌는지 그대로 갔다는데요. 일본 사람의 집에 가서 어린애 보기로 하고 들어가게 해주마고 그러더니만 그 말시 말할 것 없이 떡 떼먹듯이 시치미 복 뗀다니깐…… 작년에 꿔다 먹은 나락이 있는데 그걸 갚으라고 야단을 치기에 일본 사람의 집에만 들어가게 해주면 갚으마 했지. 그리고 나서는 여태껏 소식이 없으니깐…… 아마 의절하자는 수작이랍니다…… 애아버지는 지겠벌이도 없어서 펀둥펀둥 놀지요. 나는 배가 이 모양이 되어서 쇠통 먹지도 못하고…… 벌써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답니다. 바느질품도 팔어 보지만 일 없을 때는 그것도 못 하니까…… 휴우, 글쎄 사는 게 아니란밖에 어짭니까. 벌거지 모양으로 꼼지락거리다가 언제 어떻게 죽어…… 버릴는지, 모르지요…….”
한숨 섞인, 음침한 목소리가 숨이 차서 토막토막 끊어져 가면서 다시 이어진다. 방 안의 사람들은 지금, 그들의 슬픔의 깊은 연못에서 빠져나올 줄 모르고 마치 굴뚝 속 같은 컴컴하게 연기 낀 이 방 안에 앉아서 옆의 방의 말소리를 듣고 있었다.
“편지나 써 부치고서 죽든지 살든지 이번뿐이니 와서 보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어요. 일본 사람의 집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나 보고, 나는 아무것도 못 먹고 객지에서 죽을 지경이고, 어린애 아비는 지겟벌이도 없어서 돈 한푼 구경도 못 한다고, 편지나 해보지요. 휘― 누이동생 하나 남은 것이 불쌍하면, 와볼 테고, 그렇잖으면, 오냐 어서 잘 죽었다 할 테지…….”
조금 있다가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옆의 방문이 열리자,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 방문 앞에 기침 소리가 가냘프게 들리더니 문을 열고서, 얼굴이 퉁퉁 부은 여편네의 대가리가 나타났다.
“박주사 나리…….”
여편네는 이렇게 말했다. 박형준이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놓고서
“왜 그라시오” 하였다.
“저어, 어려우시지만 편지 겉봉 하나만 써주십쇼. 여기 이렇게 쓴 것을 보시고서……?”
여편네는 지금도 숨을 어깨로 쉬면서, 형준이 앞에다, 꼬깃꼬깃하게 구기어진 헌 봉투 하나와, 새 봉투 하나를 꺼내 놓았다. 형준이는 묻지 않고, 그 봉투를 집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 붓을 들었다. 바깥에서 그 여편네의 큰아들 되는 다섯 살쯤 먹어 보이는 아이가 눈물 흔적을 묻히고 있는 얼굴을 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저의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응석을 한다. 저의 어머니는,
“어디 가서 애놈들하고 또 장난하다가 얻어맞았구나? 빙충맞은 것……!”
하고, 분해하는 듯이, 또는 동정하는 듯이 어린애의 때묻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형준이는 이 여편네의 고생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무엇이 없어서 고생한다는 그 원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겉봉을 쓰면서, 눈은 겉봉투에서 떼지 않고, 다만 입으로 이렇게 말했다.
“거북아, 너도 얼른 커서 돈 많이 모아 가지고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 잘살아야 한다. 돈 많은 훌륭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다가 ‘돈 많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스스로 우습기도 해서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웃는 것이 그다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자기도 스스로 걷잡지 못할 만큼, ‘허허허……’ 하고 속이 텅 빈 선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 돈만 있을 것이면 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하는 그러한 생각을 하자, 형준이는 속으로 자기가 지금 웃은 것이 공연한 짓이었던 것을 깨닫고 스스로 ˙비웃는 듯이 두 입귀를 축 처뜨리고서 아래윗니를 꼭 물었다. 그렇다, 돈만 있으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여편네는 편지 겉봉을 써주는 것을 받아 가지고, 자기의 아들 거북이를 데리고 자기의 방으로 갔다. 여편네가 열어 놓고 간, 마당으로 난 유리 영창을 형준이가 닫았다. 방 안에 앉았던 사람들은 이때에야 몸을 조금씩 움직거렸다. 형준이는 다시 담배를 물고서, 성냥불을 그어 대고 나서, 연기를 입 안으로 하나 가득하게 빨아마셔 가지고는 후 하고 내뿜었다. 유리 조각으로 내다보이는 늦은 가을의 하늘은, 마치 지금 유리 영창으로 엉키어 가는 이 담배의 연기와 같았다.
“아아, 오십 년만 자다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지금 형준이의 마음은 자기의 입에서 흘러나온 담배의 연기와 같았고 유리 조각으로 내다보이는 흐린 하늘과 같았다. 갑갑하였다. 답답하였다. 그 날개를 걷어치우고 싶으나 될 수 없다. 눈을 감으면 온 세계가 캄캄하였다. 눈을 뜨면 마음과 몸이 무거웠다. 어찌하나? 그래도 어찌하는 수는 없다. 초찌끼와 같이 가라앉았고 사북 개천의 썩은 흙과 같이 굳었고, 구정물과 같이 흐려진 마음, 그 마음을 어떻게 해 보는 수가 도저히 없었다.
“아아, 오십 년만 자다가 일어났으면 좋겠 다!”
“자고 나면 시원할 줄 아나? 발등에 떨어지는 급한 불을 어떻게 하고?”
C가 화증난다는 듯이,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비어 끄면서 이같이 말했다.
……(원문 탈락)……
“……(원문 탈락)……우리가 우리의 말로 글을 쓰고 우리가 우리의 말로 이야기를 하여 들려준들 무슨 소용이 있나? 지금은 늦었어! …… 그것도 전 같으면 모르겠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부지하세월이지! 우리는 직집 일본 말로 글을 쓰고 일본 사람에게로 맞부딪쳐 파고들어가야지 …….”
C가 A의 말이 끝도 나기 전에 가로채 가지고는 이와 같이 기다랗게 늘어놓는다. 형준이는 가만히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것이 아까부터 또는 그전부터 오늘까지, 이 사람들이 한량없는 이야기에 몸까지 피곤해지는 이야깃거리였다.
C가 다시 말을 이었다.
“행길로 다니는 보통학교 아이들이 무슨 노래를 하는지 자네는 아나? 저녁밥 먹고 마당에서 뛰노는 보통학교 계집애들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자네가 아는가? 머리를 질끈 동이고 나막신 신고서 걸음걷는 채로 어깨를 으쓱으쓱하고 걸으면서 ‘ココハオクニノナソビゲリハナレテトホキマンツユノ…….’ 하는 보통학교 아이들을 자네는 무슨 약으로 고쳐 볼 텐가? ‘브나로드!’ 좋은 말이지!
……(원문 탈락)……
형준이도 A도 C도 다같이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서 똑같은 괴로움을 맛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아무 일도 안 된다. 우리들은 아무 일도 못 할 백성들이다.’
이와 같이 똑같은 때에 세 사람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의 앞에는 깊고 깊은 절망의 연못이 있을 뿐이다.
2
형준이는 흥분하였다. 걸음을 걷는다느니보다는 차라리 엉금엉금 기어다닌다고 하는 것이 적당할 만큼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윗양복주머니에다 두 손을 찌르고서 성큼성큼 기운 없이 걸었다.
여러 가지 생각―참말로 수효도 없이 많은 생각이 걷잡을 수 없게 머릿속으로 떠올라 와서 형준이로 하여금 이 땅덩이 안에 살고 있는 백성이 아닌 별다른 사람이 되게 하였다. 형준이의 머리는 ― 머리뿐만이 아니라 그 몸뚱어리의 전체가, 육체가, 정신이, 인제, 이 모양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원문 탈락)……
만약에 될 수만 있으면 형준이는 지구의 적도(赤道)를 자기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옮겨다 놓았을 것이다.
적도. 그렇다. 적도는 형준이가 오래전부터 그리워하던 곳이다. 푹푹 찌는 더위, 방바닥에서 내뿜어 보내는 화끈화끈한 입김, 짐승과 나무와 풀들의 코를 찌르는 듯한 내음새― 이것들은 오래전부터 형준이가 그리워하던 것들이다. 그리하여 형준이가 그리워하는 그 적도는 지금은 형준이의 가슴속에 있었다. 그 가슴의 전체가 한 개의 불덩어리나 다름이 없이 되었다. 어느 때는 그 가슴뿐만 아니라 그 몸뚱어리의 전체까지 온통 한 개의 불덩어리로 화해 버리는 때도 적지는 않았다.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이 세상은 아니, 이 조그마한 동양의 한 모퉁이에 있는, 콩껍질만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형준이로 하여금 한 개의 불덩어리가 되도록 하였느냐?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하간 그는 이 땅에서 생겨나 가지고 이곳의 사회에서 생장한 까닭으로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적도를 꿈꾸지 않고서는 지낼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형준이의 이와 같은 꿈, 참말로 가엾은 꿈은, 그가 길거리로 돌아다닐 때, 더 굉장하고, 곱고, 찬란하였다. 그래서 형준이는 날마다 볼 일도 없으면서, 전찻길을 따라서 끝나는 데까지 걸어다니는 것이다. 전차바퀴의 이를 가는 소리, 자동차의 짖는 소리, 자전거의 종소리, 사람의 발소리, 구루마의 시끄러운 소리 ― 이것들이 한데 범벅이 되어 가지고 어우러지는 속에서 형준이는 자기의 즐거운 꿈을 낚시질하는 것이었다.
꿈―이것은 형준에게 있어서는 꿈이 아니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와 같은 뜻의 꿈이라는 글자는 이 형준이의 머릿속에 와서는 적합하지 못한 것이다. 그에게는 오히려, 이 현실이 도리어 꿈이나 혹은 그림자같이 생각되고, 자기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현상이 보다 더 현실인 듯싶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형준이는, 자기의 머릿속에서 짜내 놓는 세계에, 자기 자신을 심고 자기 자신을 키우고 자기 자신을 뻗어 보는 것이다.
왜? 무슨 까닭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도리어 그림자나 꿈같이 생각하고, 자기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활동을 보다 더 현실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지 못하고, 너무도 깨끗하지 못하고, 너무도 반듯하지 못하였다. 거짓투성이다. 때투성이다. 어디를 가든지 도적놈이 있었다. 행세하고 다니는 신수 좋은 도적놈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지 점잖은 도적놈의 발 아래에 짓밟히는 불쌍한 사람이 있(었)다. 사람의 탈을 쓴 이리의 무리가 떼를 지어 가지고 그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눈 가는 곳마다, 발 가는 곳마다, 곳곳마다, 사람의 모가지가 비틀리는 광경뿐이다.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버러지다. 강아지다. 그렇다, 강아지에 지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홍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었다. 그가 꾸부정한 허리를 펴보지도 못하고, 홍분이 되어서 전찻길가로 겉어다니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형준이에게는 이 지구 덩어리가 한량없이 작게 생각되었다. 사방을 돌아보나 아기가 자기 어머니의 품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그와 같은 넓고 큰 느낌은 없었다. 동쪽도 막다른 곳인 것과 같고, 서쪽도 막다른 길인 것과 같이 생각되었다. 사실, 지구는 넓다. 지구의 겉껍데기에는 십육억 몇천만 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협착하기 한량없는, 조그만 흙덩어리같이밖에는 더 크게 생각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사실 그렇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서 이 꾸겨 내던져 놓은 휴지 조각 같은 형준이에게는 너무 협착한 것같이 생각되느냐?
―사람의 자식들은 이제는 제가 서 있을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그 목표가 틀렸던 까닭으로 보잘것없이 망해 버리고 말았다. 생각건대 이 세계는 이제 여기서 더 나아갈 수도 없으렷다. 형준이는 이와 같이 생각해 본 적도 드물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이 땅 위에서 무슨 짓을 하고 지나왔는지 잘 알았다. 그리고 이 앞으로의 사람들도 무엇을 하고 지나갈 것인지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이 땅 위에다 해골바가지의 산을 쌓아 놓는다. 쌓이고 쌓여 층층으로 쌓여 있는 사람의 시체는 앞으로 사람들의 나갈 겉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쉴새없이 땅껍질은 사람의 손으로 파제껴진다. 마치 지렁이의 일을 가로맡아 가지고 노동하다시피.
그러나, 사람들은 몇 자 못 되는 땅속을 파보았으나 진리(眞理)는 발견하지 못했다. 진리는 그와 같이 쉽게 손에 붙잡히는 것은 아니었었으니까. 해골바가지의 산을 몇 번 쌓아 놓고는 다시 몇 번을 파서 헤쳐 보았으나 진리는 그렇게 쉽게 발견되지 못했다. 마치, 진리라는 것은 연기와 같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처럼.
형준이는 이와 같이 살아나온 사람의 자식의, 피곤한 시대에 태어난 최후(最後)의 자식이었다.
―그렇다, 피곤한 시대다. 피곤한 인생 이다. 사람들은 피곤했다. 이것은 결단코 허풍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간 곳마다, 패잔(敗殘)한 사람의 자식들이 우물우물하고 있지 않으냐? 기운 없이 늘어진 팔과 다리가, 온 세계를 파묻고 있지 아니하냐.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눈깔만 휘둥그렇게 뜨고서 풀기 없이 늘어져 있다. 절망(絶望)과 절규(絶叫)의 뒤법벅이 된 덩어리가, 바다의 밀물과 같이 온 지구(地球)의 표면(表而)을 뒤엎어 출렁 거리고 있을 뿐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저희들의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하였으면…….’
형준이는 때때로 이와 같이 생각해 보는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자기가 자기의 물음에 대해서 스스로 대답하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입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사람은 지금 같아서는 도저히 ‘세기(世紀)’와 역행(逆行)할 수는 없다. 왜 그러냐 하면 현대(現代)의 문명(文明)은 사람으로 하여금 저희들의 원시시대, 본능생활(本能生活)로 돌아가게 하지를 않으니까. 사람이 본능생활로 돌아가자면, 지금의 이 문명의 찬란한 옷을 벗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찬란한 문명의 옷을 사람들이 넉넉히 벗어 버릴 수가 있을까? 노…… 결단코 사람의 자식들은 현대의 찬란한 문명의 옷을 벗어 버리지는 않는다.’
형준이는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그의 인생문제의 해결은, 오로지 본능생활로 돌아가는 길에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크나큰 절대(絶大)의 난관(難關)이 있었다. 즉, 말하자면 문명 이라 하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서 무거운 다리를 끌고 D공원을 향했다.
전차는 서쪽으로부터 데굴데굴 굴러오다가, 공원 앞에서 다리가 무거운 듯이 잠깐 멈추고는, 또다시 그 느릿느릿한 마치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때묻고, 낡아빠진 폐물이 되다시피 더러운 전차가 지나가자 그 뒤로 아까 지나가던 전차보다도 더 헐어빠진 자동차가 하나 줄달음질을 쳤다. 자전거가 지나갔다. 그 다음으로 인력거가 지나갔다. 그 다음으로 티끌을 뒤집어쓴 사람의 얼굴, 또 얼굴, 얼굴…….
하늘은 무겁게 머리 위를 덮고 있다. 티끌과 연기가 한데 합해진 것처럼 흐려진 하늘은, 뾰족집의 지붕 꼭대기 위에까지 내려와 있는 것 같았다. 해는 보이지 아니하나, 그러나 때는 황혼이었다.
그는 무거운 걸음걸이로 공원 안에 들어가, 벤치에 걸터앉았다.
3
‘대체 이 모양으로 어느 때까지 지내 갈 테냐?’
형준이는 생각하였다. 이 견딜 수 없는, 단 하루 동안을 참고 보지 못할 더러운 현실과 스스로 정 떨어지는 자기 자신의 빙충맞은 인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날이 흘러가는 오늘날의 형편과, 힘 없고, 용기 없고, 등신 같은 오늘의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두고, 어느 때까지나 이 현상을 그대로 가지고 계속해 갈 것이냐. 이것을 생각하자 그의 눈앞은 캄캄하였다. 자기가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거슨 과연 어느 때나 이루어질 것이며, 또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가망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오늘날의 문명 ―자본주의의 문명 ― 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양잿물이나 비상 같은 것이다. 먹기만 하면 그 독이 온몸으로 퍼져 흘러서, 얼굴로, 사지로, 피부의 털구멍마다 온갖 곳으로 그 독이 배어나오는 것이다. 살가죽의 구멍을 찾아서 피는 흐르고, 오장의 썩은 물 흐르는 그와 같은 독액(毒液)이다. 이 문명이 그 대로 계속되면 세상은 실로 한심하기 그 끝이 없다. 그러나, 그러나 사람들은 이 문명을 지극히 자연으로 이루어 놓았던 것이며, 또한 이 문명 속에서 커나아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누가, 일부러 이와 같은 획책을 뜻하고 꾸미어 놓은 일이 아니고, 사람이 살아나오는 동안에 저절로 이와 같이 되어 나온 일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이대로 계속해 나가면 될 수 있겠느냐 하면, 그것은 될 수 없다. 일찍이 문명은 사람의 생활을 행복하게 하였었다. 그것이 몇백 년을 지나지 못한 오늘날에 와서는 도리어 사람을 주리틀고, 얽어매고, 목을 비틀게 되었다. 즉 말하자면, 사람은 저희가 지어 놓은 그물[網〕 속에서 저희가 꼬아 놓은 빨랫줄로 저희의 몸을 단단히 감고서 꼼짝을 못 하고 몸부림만 치는 것이다. 딱하기 짝이 없다. 가엾기 한량없는 일이다. 어디를 보든지 식상(食傷)한 문명병 환자(文明病患者)가 고개를 펴지 못하고 기운 없이 기대 서 있다.
현대인의 모든 재앙은 이 문명병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들 식상했다. 단단히 식상했다. 그렇다, 포식(飽食) 폭식(暴食)한 여독(餘毒)으로 가는 곳마다 식상한 사람의 얼굴이 우물우물하다. 그런데다가 더구나 식상한 한편으로는 영양부족으로 흐느적흐느적하고 있는 사람들이 구물구물하고 있는 것은 어찌 된 까닭이냐?
그렇다, 이것은 어찌 된 까닭이냐? 영양부족은 어찌 된 까닭이냐? 이것은 자본주의 문명의 특색 이다. 커머셜리즘(商業主義), 컬렉티비즘(集中主義)의 저주할 만한 결과일 뿐이다. 대량생산과 식민지정책이 모두 다, 자본주의에서 근원되어 내려오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할 사람이 누구냐. 세계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먹칠해졌다.
그러나 앞으로 보이는 그 무슨 인생의 해결이 있느냐? 오냐, 이것으로 할 것이면 반드시 인생은 해결된다는 그 무슨 프로그램이 있느냐? 그 무슨 (프)리퍼레이션이 있느냐? 그 무슨 독트린이 있느냐? 종교냐? 이상향이냐? 사회주의의 택틱(전술)이냐? 인조(人造)의 신(神)의 신비적 계시냐? 마법사의 황금의 지팡이냐? 점 쟁 이의 주문(呪文)이냐? 또는 그 외의 무엇이냐?
모든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모든 것이 모를 일이었다. 안다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은 모를 일이었다. 다만, 영구(永久)히 변하지 않는 것은 천년 전에도 이와 같았었고, 후에도 이와 같을, 어제도 이와 같았었고, 오늘도 이와 같을 것이고, 내일도 이와 같을 것은 다만 살아 있는 사람은 결국에 가서 죽는다는 것 하나뿐이다. 죽는다는 것, 이것뿐이다.
그렇다, 사람은 한번 살다가 한번 죽는다. 이것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 있느냐. 무엇이 귀(貴)하냐? 무엇이 대단하냐? 사람은 났다가 죽는다는 것을! 모든 일은 다 고만고만한 것이었다.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 다만 산다는 것은 현재(現在)일 뿐. 이렇게 살아도 사는 것이요, 저렇게 살아도 사는 것이다. 다만 현재에서 살아나가기만 하면 고만이다. 그러나 나날이 글러 가는 이 문명 속에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하는 것보다도, 이 문명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해결도 없고 답안(答案)도 없는 것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모르겠다! 알 수 없다!’
형준이는 오래 생각하던 끝에, 이와 같이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늘과 땅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한량없이 흐리어졌다. 자기의 앞에는 캄캄한 어둠이 가까이 다가올 뿐이다. 무엇을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보다도, 이 당장에 지금 와서는 무엇을 생각했으면 좋겠느냐? 하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다만, 머릿속이 텅 비어질 뿐이요 모든 것은 공(空)이다, 무(無)다! 하는 생각― 연기같이 흐릿한 머릿속에는 허무(虛無)라는 글자가 하나 가득 쓰였을 뿐이다. 참말로 그는 모든 것이 알 수 없게 된 동시에, 모든 것을 온갖 것을 잊어버렸다. 그는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길거리에는 일제히 전등불이 켜졌다.
형준이의 머리에는 다시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배가 고프다는 깨달음이 그의 머리를 찔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요즈음에 자기의 생활을 살펴볼 기회를 붙잡았다.
굶으며 먹으며 하여 가면서 지내 온 자기 자신을 돌아다보았다. 날마다 재촉하는 방세(房貰)에 쫓기는 자기 자신을 돌아다보았다. 대체로 사람이 굶어 가면서 억지로 살아도 관계치 않겠나, 다른 사람은 먹는 것이 남아서 어쩔 줄 몰라 돈 쓰기를 물 쓰듯이 하는데?
모든 것으로 종국(終局)까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머릿속에는 더러운 현실이라는 부르짖음이 떠올라 왔다. 그의 머리에는 이미 며칠 전에 그의 동무들과 앉아서 이야기하던 때의, “오십 년만 자다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던 그와 같은 감정(感情)은 없었다. 나날이 쫓기고 위협(威脅)당하고, 채찍질받는 두려운 생활의 위협을, 인제 와서는 견디지 못하였다. 주머니 속에는 떡 한 개를 살 만한 돈이 남아 있느냐? 하면 그의 손은 빈손이었다.
‘그렇다. 이 모양으로 살아나갈 필요는 없다. 현실은 어디까지든지 포악 무도 잔인(暴惡 無道 殘忍)하다. 나는 아직도 좀더 살아야겠다. 산다는 것은 나의 권리(權利)이다. 너희들이 도둑질하면 나도 도적질하면서 살아갈 테다. 네가 나에게 밥 한 사발을 거절할 경우이면 나는 네 밥의 한 사발을 빼앗겠다! 나는 네 위에 선다. 나는 너를 발 아래에 밟고서 그 위에 선다. 현실이라는 너를 짓밟고서 그 위에 서겠다…….’
형준이는 입안의 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원대(遠大)한 이상(理想)도, 지고(李高)한 포부(抱負)도, 인류(人類)의 행복(辛福)도, 조선(朝鮮)의 구제책 (救濟策)도, 전투(戰鬪)의 순서(順序)도, 교화(敎化)의 이론(理論)도 이제 와서는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행길로 다니는 사람의 얼굴이며, 길거리에 늘어서 있는 거무튀튀한 집들이며, 구루마며, 전차가 한데 범벅이 되어 가지고 기계공장(機械工場)에서 쉴새없이 돌아가는 벨트(革帶)와 같이, 또는 양쪽 끝에서 잡아당겨 늘이고 있는 엿〔肖台〕과 같이, 넓적한 허리띠 모양으로 눈앞을 가리고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같이 보일 뿐이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그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그가 다섯 발자국을 걸어나가지 못하여서 그의 발바닥에는 무엇인지 뭉클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주춤하고 소름을 쳤다. 발바닥에 밟히었던 것은 무엇이냐. 그는 물러서 발 아래를 내려다효았다. 땅바닥 위에는 피 묻은 쥐가 한 마리 자빠져 있다.
쥐가 자빠져 있었다? 그는 또다시 한번 몸서리를 쳤다. 머리끝이 모두 다 하늘로 올라가는 듯싶었다. 무서워서였냐? 아니다, 그렇지도 않다. 그는 다만 마음으로 놀랐을 따름이다. 어디서 어떻게 되어서 죽어 가지고, 이곳에 내던져 놓여 가지고, 지금은 다시, 자기의 발 아래에 밟히어 버린 까닭으로, 창자가 튀어져 나오고 모가지가 납작하게 눌려서, 온몸이 새빨갛게 피 묻어 버린, 이름도 없는 조그만 동물(動物)의 시체(屍體)를 보고 마음으로 놀랐던 까닭이다.
그의 머리에는 온갖 쥐새끼들의 모양이 나타났다. 수챗구멍에서 사람의 기척이 없을 때 고개를 불쑥 내밀고서 새까만 눈동자를 깜박거리고 있는 강아지만한 쥐, 또는 그 언제인가 밤에 자다가 천장에서 와르락다르락하여 가며 시끄럽게 야단을 치고 달음질하다가, 천장의 구멍으로 빠져서, 자기의 이불 속으로 떨어져 들어온 일이 있던 그 조그만 생쥐, 또는 헛간 구석으로, 쌀섬 가로, 장독대 모퉁이로, 개구멍 속으로 마루 밑 구멍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어디를 가든지, 신출귀몰(新出鬼沒)하게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여 가면서, 고기도 먹고, 달걀도 먹고, 생선도 물어 가고, 두부도 긁어먹고, 밤도 먹고, 가마니도 쪼아 놓고, 벽틈에다 구멍도 뚫고, 벽장 속에다 똥도 누어 놓고, 상자 속에서 해산(解産)도 해붙이는 온갖 쥐새끼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왔다. 사람의 집 안에 있어서, 크나큰 도적놈인 이 쥐가 어디서 또 무슨 짓을 하다가 커다란 사람의 손에 붙잡히었든지, 몽둥이로 얻어맞았든지 하여서, 이곳에 내버림을 받은 이 쥐에 대해서 그는 조용히 생각하였다. 쥐의 사람의 집 안에서 하는 활동이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하는 두려울 만한 활동이다. 쥐가 헛간 속에서 나올 때 얼마나한 주의를 하여 가면서 소리도 내지 않고 기어나오느냐. 사람의 바시락 소리만 들으면 얼마나 민첩하게 숨어 버리느냐. 이것들은 저희의 목숨을 내놓고서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것들이다. 저희들을 잡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고양이도 기르고 쥐덫도 사다 놓고 약품(藥品)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저희들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사람의 행위는 두려움기는 할지언정, 그렇다고 저희들의 활동을 단념하게 하는 아무런 권위(權威)도 없다. 떼어 버릴래야 떼어 버릴 수 없는 생명을 위해서는, 도리어 생명을 내놓고서까지 활동을 하지 아니치 못한다一 이것이 쥐의 생활철학(生活哲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생명을 위해서는 도리어 그 생명을 내놓고서 활동을 한다. 그렇다. 사람은―짐승은, 생명을 그와 같이 사랑한다. 어느 때, 언제, 어느 곳, 어디서, 이 피 묻어 창자까지 튀어져 나온 붉은 쥐와 같이 죽어 버릴는지는 모르나 불쌍한 사람들은 쥐새끼와 같이 돌아다니지 아니하고는 못 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눈깔이 빨개 가지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아라. 행길에 죽어 자빠져 있는 붉은 피 묻은 쥐와 무엇이 다르랴. 저 사람의 엿을 보기를 쥐같이 하고, 저 사람의 방심(放心)한 틈을 노리고 기다리기를 쥐같이 하고, 저 사람 몰래 도적질하기를 쥐같이 하고, 저 사람을 헐뜯기를 쥐가 물건을 쪼아 놓듯 하고, 저희끼리 싸움하기를 쥐같이 하고, 저 사람의 집을 치기를 쥐같이 하고, 저 사람을 속이기를 쥐같이 하는 것이 사람이다. 만물의 영장(靈長)인 사람이다.
형준이는 이와 같이 생각하고서 낡아빠진 양복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른 채로, 다시 발을 옮기어 놓기 시작하였다. 그의 눈앞에는 이십여 년 동안의 지내 온 경험(經驗)과 사상(思想)이 한뭉치가 된 듯이, 혹은 다 각각 떨어진 채로 연결(連結)이 된 듯이 번갯불 모양으로 눈 한번 깜짝하는 동안에 처음서부터 끝까지가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는 공원 바깥으로 나왔다. 행길에는 이때가 사람이 제일 많이 다니는 때다. 젊은 사람, 늙은 사람, 어린애, 어른, 여잔 사내 할 것 없이 바쁘게 오고 가고 한다. 기운 없이 팔과 발을 움직이면서 영양부족 식상한 누런 얼굴을 쳐들고서 형준이의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는 한꺼번에 눈동자 속에다 사진 박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었다. 전찻길을 건너 행길의 한가운데로 나섰다. 그리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쥐다, 쥐다! 쥐새끼들이다. 쥐새끼들이다!’
그는 무의식(無意識)으로 전찻길의 커브까지 걸어왔다. ‘쥐다! 쥐세끼다!’ 쉬지 않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별안간 그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瞬間)에, 그는 그 어떠한 이상스러운 흥분(興奮)을 깨달았다. 두어 발자국 앞으로 떼어놓다가 다시 무슨 생각이 난 듯이 돌아섰다. 전차 교차점(電車交叉點)에는 순사(巡査) 두 사람, 천차 인스펙터(檢察官)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주저하지도 않고 다짜고짜로, 그 옆에 길가에 있는 식료품(食料品) 상회(商會)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갔다. 그는 안내(案內)하는 사람을 기다리지도 않고 유리문을 해닫은, 쇼 박스를 열고서 크림이 들어 있는 빵과 조그만 면보를 집히는 대로 주워서, 양복 아랫바지의 호주머니 속에다 집어넣고 돌아서서 나왔다.
그는 또다시 뚜벅뚜벅 걸어서 그 옆에 있는 귀금속(貴金屬) 파는 집에 들어가서 아까와 마찬가지로 문을 열고서 손에 붙잡히는 대로 시계, 반지 들을 훔쳐 넣었다. 그가 행길로 나서서 오른손편 골목으로 돌아 들어갈 때 자기 뒤에서 들리는 사람의 달음박질 소리를 귀로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줄달음질쳤다. 그의 오른손가락 끝은 양복 윗저고리 호주머니 속에 있는 딱딱한 금속(金屬)의 물건을 여러 번 긁었다. 그러자 다짜고짜로 돌아서서 한 방을 탕 쏘았다. 와르르…… 하고 수없는 사람들의 발자취 소리가 잠시 동안 들리지 않았다. 그는 되는대로 달음박질했다. 골목 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흘끔홀끔 쳐다보고 지나갔다. 그는 ‘쥐다! 쥐새끼들이다. 쥐다!’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달음박질했다. 뒤에서는 또다시 거진거진 쫓아오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아우성을 치는 고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맨 앞에 선 두 사람의 순사와 형준이의 사이는 그다지 멀지 아니하게 되었다.
형준이는 한번 흘끔 돌아다보자, 자기의 위급함을 느낀 듯이 전속력(全速力)을 다해서 줄달음쳤다. 그는 오른손에 든 피스톨을 함부로 내저으면서, 탕탕 쏘아 가면서 도망질쳤다. 길이 왼편으로 꼬부라지면서, 넓은 행길이 내다보이었다. 컴컴한 밤은 전등불빛 아래에서 귀신과 같이 묵묵히 서 있었다. 전차가 지나가고 자동차가 지나갔다. 그는 좌우전후를 살피지 않고 큰길로 뛰어나갔다. 얼마쯤 달아났다. 그러나, 자기의 뒤에서 시끄럽게 종을 치면서 바람같이 달려오는 소방대(消防隊)의 자동차를 그는 보지를 못하였다. 그가 전찻길 위로 달음질치다가, 하마터면 자기의 앞으로 마주 보면서 종을 치고 오는 전차에 치일 뻔하다가 갑자기 몸을 피해서 왼편 구루마 다니는 길로 따라나가자, 뒤에서 큰일이 난 듯이 바람같이 따라오던 소방대 자동차에 걷어채어서, 그는 세 칸〔三問〕 이나 날려서 담뱃가게 앞에 가 철퍽 떨어졌다. 세계는, 여기서 깨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지고 그의 한 편짝 다리는 부러지고, 아랫뱃가죽은 찢어져서 창자가 튀어져 나왔다. 검붉은 피가 여기저기에 점점이 튀어 갔다.
뒤에서 따라오던 순사와 뭇사람들이 형준이의 몸뚱어리를 둘러쌌을 때는, 이미 때는 늦었었다. 형준이는 입으로 코로 피를 토하고, 눈동자는 튀어나와서 떨어지고 혓바닥은 이와 이 틈으로 한 자는 늘어져 있었다. 소방대 자동차는 잠깐 동안 머물렀다가, 바로 곧 종을 치면서 또다시 바람같이 지나가 버렸다. 순사들은 형준이의 몸에서 떨어진 시계, 반지, 빵, 과자 같은 것을 주워서 가려고 덤비는 뭇사람들을 쫓아서 헤지기에 힘을 썼다.
그 이튿날, 형준이가 가지고 있던 피스톨의 출처(出處)와 그와 관련(關聯)된 사실(事實)의 혐의자(嫌疑者)로 세 사람의 청년(靑年)이 경찰서(警察署)로 일본 순사에게 붙잡히어서 끌려가고 서울 안의 신문은 이 일에 대해 크나큰 거짓 말의 기사(記事)를 내었다.
(『김팔봉문학전집』, 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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