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묘사와 문장력
문장에 가장 날카로운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묘사다.
……범죄자의 누명을 쓰고 처자까지 잃은 이내 신세일망정 십여 년이나 정을 들이고 살던 사 개월 전의 내 집조차 나를 배반하고 고리에 쇠를 비스듬히 차고 있는 것을 볼 제 그는 그대로 매달려서 울고 싶었다.
백부는 숨이 찰 듯이 씨근씨근하며 쫓아와서
"열대 예 있다."
하며 자기 손으로 열고 들어갔으나 어느 때까지 우두커니 섰었다.
일 개월 이상이나 손이 가지 않은 마당은 이삿짐을 나른 뒤 모양으로 새끼부스러기 종잇조각들이 늘비한 사이에 초하(初夏)의 잡초가 수채 앞이며 담 밑에 푸릇푸릇하였다. 그의 숙부도 역시 이럴 줄이야 몰랐다는 듯이 깜짝 놀라며 한번 휙 돌아보고 나서 신을 신은 채 툇마루에 올라섰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퇴 위에는 고양이 발자국이 여기저기 산국화 송이같이 박혀 있다. 뒤로 쫓아들어온 그는 뜰 한가운데에 서서 덧문을 첩첩이 닫은 대청을 멀거니 바라보고 섰다가 자기 서재로 쓰던 아랫방으로 들어가서 먼지 앉은 요(褥) 위에 엎드러지듯이 벌떡 드러누웠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의사는 영실이를 힐끗 보자 눈이 희뜩 올라가고 푸른 입술에 비웃음을 삐죽이 흘린다. 영실이는 이것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홀랑 달아나고 어디선지 악이 바짝 치달아온다. 그래서 얼른 세면기 앞으로 와서 브러시로 손을 닦기 시작하였다. 따끔 부딪치는 브러시를 따라 휭휭 돌던 머리가 딱 멈추어지고 맘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구! 아구!”
환자는 외마디 소리를 내다 지르고 다리를 함부로 내젓는다.
간호부들은 머리와 다리를 꼭 누르니 환자는 더 죽는 소리를 내었다. 힐끗 돌아보니 의사는 방금 칼로 피부를 갈라놓았고, 흐르는 피 속에 지방이 희끗희끗 나타났으며, 혈관을 찝은 '고히루(止血緘子)'가 두어 개 꽂히어 영실의 눈을 꼭 찌르는 듯하였다. 눈송이 같은 가제가 나까가와의 손에서 의사의 피 묻은 손에 쥐여 있는 핀셋으로 옮아와서 수술처에 들어가자마자 빨갛게 핏덩이가 된다.
영실이는 손을 다 씻고 나서 나가가와의 곁으로 갔다.
"미안하게 됐소.”
"리상!"
나까가와는 머리를 돌린다. 이마엔 구슬땀이 봉을봉을 맺히었고, 얼굴이 빨갛게 되어 영실이를 보자 시원하다는 듯이 핀셋을 내주고 머리를 설렁설렁 흔들어 땀을 떨구면서 물러났다. 수갑 낀 손에 쥐어지는 이 핀셋! 매끈하고도 듬직한 감을 주며 무엇이나 찝고 싶어지는 이 감촉, 손에 기운이 버쩍 나고 흩어진 마음이 보짝 모인다.
눈 감고라도 이 핀셋만 쥐면 어떠한 기계라도 능란히 섬길 수가 있는 것이다.
-강경애의 「어둠」에서
“이쩐짜이 (일 전짜리).”
-이것은 우리가 어느 시골 정거장을 지나다가 지은 이름이다. 그적에 차를 기다리던 손님이 우리서껀 도합 사오 인밖에 안 되었는데 조그마한 대합실 바깥벽에 아침 햇빛이 또아리를 틀고 있고 그 옆에는 사과장수 늙은 할미가 과일 함지박을 앞에 놓고 우들우들 떨고 앉았다.
그 사과 중에 맨 꼭대기에 놓인 사과 한 알이 가장 작고, 한편 모서리가 찌부러지고 빨갛고 보삭한 얼굴을 반짝 쳐들고 우리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허- 저 쪼꼬만 애기능금이 재 없이 당신 모습을 닮었구려.”
우리는 즐겁게 웃었다. 그리고 노파 앞으로 다가서며 흥정을 붙였다.
“일 쩐으 냅세.”
노파의 희망대로 일 전 한 푼을 주고 그 작고 귀엽고 가엾고 꼼꼼하고 영리해 보이는 애기능금을 샀다. 이때부터 나는 '이쩐짜이'가 된 것이다.
-이선희의 「계산서」에서
포플러나무 밑에 염소가 한 마리 매여 있습니다. 구식으로 수염이 났습니다. 나는 그 앞에 가서 그 총명한 동공을 들여다봅니다. 셀룰로이드로 만든 정교한 구슬을 오브리드로 싼 것같이 맑고 투명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도색(桃色) 눈자위가 움직이면서 내 삼정(三停)과 오악(五岳)이 고르지 못한 빈상(貧相)을 업신여기는 중입니다.
- 이상의 「산촌여정」에서
그때 -심한 구토를 한 후부터 한 방울 물도 먹지 못하고 혓바닥을 축이는 것만으로도 심한 구역을 하게 된 만수 노인은 물을 보기라도 하겠다고 하였다. 정일이는 요를 포개서 병상을 돋우고 아버지가 바라보기 편한 곳에 큰 물그릇을 놓아드렸다. 그러나 그 물그릇을 바라보기에 피곤한 병인은 어디나 눈 가는 곳에는 물이 보이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큰 어항을 병실에 가득 늘어놓고 물을 채워놓았다. 병인은 이 어항에서 저 어항으로 서느러운 감각을 시선으로 핥듯이 둘러보다가 그도 만족치 못하여 시원히 흐르는 물이 보고 싶다고 하였다. 정일이는 아버지가 보기 편한 곳에 큰 물그릇을 놓고 대접으로 물을 떠서는 작은 폭포같이 드리워 쏟고 또 떠서는 드리워 쏟기를 계속하였다. 만수 노인은 꺼떻게 탄 혀를 벌린 입밖에 내놓고 황홀한 눈으로 드리우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볼 때 정일이는 걷잡을 사이도 없이 자기 눈에 눈물이 솟아오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일이는 일찍이 그러한 눈을 본 기억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아버지의 얼굴에서! 자기 아버지에게서 저러한 동경에 사무친 황홀한 눈을 보게 되는 것은 의외라고 할 밖에 없었다.
혹시 아버지가 돌아앉아서 돈을 헤일 때에 저러한 눈으로 돈을 보았을는지는 모를 것이다.
-최명익의 「무성격자」에서
닮은 것 이상들이다. 사진도 이처럼 싱싱할 수 없다.
글은 들려주고 알려주고 보여주고, 이 세 가지를 한다. 들려주는 것은 운문의 일이요, 알려주고 보여주고 하는 것이 산문의 일인데, 알리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은 몇 배나 구체적인 전달이다. 누구에게나 시각처럼 빠르고 직접적인 감각은 없기 때문이다.
묘사란 그린다는 뜻의 회화용어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태를 그림 그리듯 그대로 그려냄을 가리킴이다. 역사나 학술처럼 조리를 세워 끌어나가는 것은 기술(記述)이지 묘사는 아니다. 실경(實景), 실황(實況)을 보여주어 독자로 하여금 그 경지에 스스로 들고, 분위기까지 스스로 맛보게 하기 위한 표현이 이 묘사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답구나!' 하는 것은 자기의 심리다. 자기의 심리인 '아름답구나!'만 써가지고는, 독자는 아무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한다. 독자에게도 그런 심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풍경이 아름다운 까닭을, 즉 하늘, 구름, 산, 내, 나무, 돌 등 풍경의 재료를 풍경대로 조합해서 문장으로 표현해주어야 독자도 비로소 작자와 동일한 경험을 그 문장에서 얻고 한가지로 '아름답구나!' 심리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재의 현상을 문장으로 재현하는 것이 묘사다.
묘사의 요점으로는,
(1) 객관적일 것, 언제든지 냉정한 관찰을 거쳐야 할 것이니까.
(2) 정연할 것, 시간상으로나 공간상으로 순서가 있어야 전체 인상이 선명해질 것이니까.
(3) 사진기와는 달라야 할 것, 대상의 요점과 특색을 가려 거두는 반면에 불필요한 것은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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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初夏) 초여름.
수채 집 안에서 버린 물이 흘러가도록 만든 시설.
고히루(止血緘子) 피를 멎게 하는 의료기구로 겸자(子)의 일종. 이 기구를 발명한 스위스의 외과의 사코허(E.T.Kocher)의 이름에서 유래.
우리서껀 우리랑 함께
재 없이 영락없이.
도색(桃色) 복숭아꽃 빛처럼 연한 분홍색,
삼정(三停)과 오악(五岳) 관상학에서 얼굴을 볼 때 기준이 되는 곳. 삼정은 상정(이마 위에서 눈썹까지), 중정(눈썹에서 코끝까지), 하정(인중에서 턱까지)을 가리키고, 오악은 양쪽 광대뼈, 이마, 턱, 코를 일컬음.
빈상(貧相) 궁색해 보이는 인상.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2025. 4. 20
맹태영 옮겨 적음